퇴마록 국내편 2권 4화 – 생명의 나무 4 : 브리트라
브리트라
“내, 내 아기………… 내 아기를 어쨌다고? 내 아기는 어디에 있지?”
소미는 눈을 부릅뜨면서 자기의 양손을 살피고는 허공을 우 러러 외쳤다. 그리고 갑자기 성큼성큼 승희 앞으로 걸어왔다. 준 후는 어안이 벙벙한 채 두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승희가 뒤로 주춤하다가 똑바로 섰다.
“알고 싶어?”
승희는 째진 눈을 위로 치켜 올리면서 소미에게 소리를 질렀 다. 승희의 마음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 다. 물론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어린아이를, 그것도 갓 태어난 생명을 희생시켰다는 생각이 치를 떨게 했다.
“네가 한 짓을 네가 몰라? 너는 네 아이를 잘난 브리트라에게 바쳤어! 첫 번째 제물로!”
소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연녹색으로 변했다. 준후는 어떻게 사람의 얼굴이 저런 색을 띨 수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 었다.
“내, 내가…… 내 아이를…………….”
소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소미 는 비틀거리더니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았다. 승희는 그러는 그녀의 마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거, 거짓말이야!”
갑자기 땅 밑이 요란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일어 나는 것 같았다. 문득 승희는 아까 대사제의 마음을 읽었던 것을 기억했다.
“큰일이다! 내 정신 좀 봐! 브리트라가 부활해요!”
준후가 승희의 고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박 신부는 힘 겹게 고개를 들었고, 현암도 운기하다 말고 눈을 뜨고는 소리를 쳤다.
“무슨 말이야, 승희야?”
다시 한번 지진 같은 파동이 엄습해 왔다. 승희는 비틀거리면 서 빠른 속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브리트라가 분노해 있어요! 의식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 어요! 제물, 제물의 선택이요! 그래서 의식이 중단돼도 브리트라 는 스스로의 힘으로 환생을…………….”
박신부가 황급히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면서 물었다.
“제물? 제물이 왜?”
승희는 거의 넋이 나간 듯했다. 그녀의 말은 더욱 빨라져 알아 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제물 말이에요. 그 제물은 생명나무의 도안을 만든 세 개 종파와 상관없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우리나라를 택했고. 그러나 우리나라는 바빌론과 관계가 아주 없는 게 아녜요! 고대 고대의 기원을 따지자면 그들과 우리 의 피는 섞여 있어요!”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현암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빌론의 원형은 수메르다. 그런데 일설에는 고대에 수메르도 우리나라 쪽과 교통을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수밀이국이라고 전해지는 그 나라는, 환국 시대의 열두 연방 중 하나였다고 하지 만, 실제로는 지리적인 차이로 보아 그 설이 맞다 해도 연방국이 라기보다는 서로 드나들며 약간씩이나마 교통을 했던 나라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거나 단순히 지리적으로 멀다 해서 관련 없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맞아요! 우리는 그쪽과 상관이 없지 않았어요! 의례 과정에 쓰인 아홉 명의 희생은 그래서 도리어 브리트라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마지막 대주술사의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브리트라는 분노한 채로 세상에 출현하게 될지도 몰라요!”
박신부가 멍하니 읊었다.
“아멘……………”
“그래서 대사제는 오히려 브리트라를 막기 위해서는 의식을 끝까지 진행해야 한다고 했어요! 분노의 상태가 아닌 브리트라 를 현신케 해서, 마지막으로 모두가 힘을 합하면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그러나 분노한 브리트라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면 그건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했어요!”
뒤에서 누가 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주술에 의해 움직이는 대사제의 시체였다. 아까 엔키두의 바람과 광채를 몸 에 쐬서 이제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 었고, 몸에서 몇 가닥 가는 연기마저 솟고 있었다. 시체의 입이 열리면서 알아듣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소소소미・・・・・・ 무사………… 무사했구나………….”
소미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반가움과 놀라움, 두려움과 슬픔이 뒤섞인 착잡한 형태를 띠었다. 대사제 의 엉망진창이 된 몸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 그래・・・・・・ 너너만 무사하면………… 나나는……?”
“안 돼!”
소미가 자지러지듯 외치면서 그쪽으로 달려가려 하자 대사제의 시체가 한쪽 팔을 들어 막았다. 들어 올린 팔이 부스러져 땅에 떨어졌다.
“오지마…………… 나나………… 너무…… 추해…………….”
“바보!”
소미가 할 말조차 잊고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대사제의 얼 굴은 이목구비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의 입가 부근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는 듯했다.
“너 널위해……… 너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이 모든것을…………..”
“이 바보야! 나도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어! 이 모든 악행을 말이야…………….”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네 사람은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들은 잘못된 사랑에 빠져 있었다. 상대만을 위하고 상대에게 극 도의 봉사를 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들은 자기를 희생시켜서라도 최고의 선물을 안겨 주는 것이 사 랑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둘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사랑의 고삐에 매여 엄청난 일을 꾸며 왔다. 거기에 그릇된 신앙을 가진 엔키두가 얽히면서 돌이 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의 대사제에 게는 브리트라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 지 소미의 안위가 최고의 가치일 뿐이었다.
“최후의⋯⋯⋯ 방법은……………..”
대사제의 시체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간신히 몸을 지탱 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미가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브리트라를………… 진정시켜서………… 형체를 드러나게 하는방법은….”
대사제의 흉한 얼굴에서 숯처럼 까맣게 탄 살점이 후드득 떨어져 나가며 백골이 드러났다. 현암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랑? 숭고함? 고귀함? 그는 자신의 행동을 알고 있을까? 그는 지 금 자신의 행동에서 가치를 느끼고 있고, 그것이 소미에 대한 사 랑 때문이라 여기고 있고, 그것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정말 사랑일까?
“주술사・・・・・・ 열명의 주술사의 간을 …………… 저기 쓰러 져있는 자들………… 열두사제의 것으로…………… 잔인하다 생 각말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소미가 있는 세상 을…….”
현암은 깨달았다. 대사제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그의 사랑은 진실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대사제의 시체가 털 썩 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먼지와 연기를 제 외하면 조용한 침묵만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승희가 입술을 덜덜 떨며 박 신부를 돌아보았다. 박 신부의 눈 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준후도 훌쩍이고 있었다. 승희는 문득 준후가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어린 나이에 못 볼 것을 많이도 보는구나…………. 그때 문득 엔키두 앞에 놓여 있던 수정구 가 승희의 눈에 들어왔다. 수정구속이 핏빛 불길로 가득 차 있 었다. 무엇인지 꿈틀거리는 형상이 비쳤다. 승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브리트라가 움직여요! 신부님, 현암 씨, 서둘러야 해요!”
현암이 고개를 돌렸다.
“뭐?”
“브, 브리트라의 재생을 막아야 할 것 아녜요?”
박신부가 안경을 올리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승희는 답답했다. 분명히 이야기를 다 들어 놓고는….
“저 사제들・・・・・・ 저 사제들의 ………….”
현암이 눈을 부릅떴다.
“너, 승희 네가 하겠니? 그렇게 할 수 있어?”
“예?”
박신부가 승희의 어깨를 툭 치고는 뒤로 돌아서면서 한마디 했다.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이대로 브리트라와 상대한다.”
“예? 뭐라고요?”
승희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분명 대 사제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멍해 있는 승 희의 귀에 현암의 음성이 들려왔다.
“승희야, 세상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어? 수십억의 사람을 위해서 악인 몇 명 따위는 희생해 버리자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냐, 생명은 숫자로 따질 수 없어. 세상의 진리는 간단한 데 있 다고 생각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
고통에 치여 쥐어짜듯 나오는 현암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에겐 우리의 길이 있어. 우리의 방법이 있고……………. 승희 야, 생명의 비밀은 영생에 있는 게 아냐. 생명이 영원히 이어진 다는 것을 믿고, 자신의 그 믿음을 펼치고, 자신의 존재를 진정 한 것으로 만드는 데 생명의 신비가, 생명의 비밀이 있는 거야. 생명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버릴 수도 있는 것, 그것은 진정한 생명을 가진 자 외에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행위야. 승희야, 너도 대사제의 모습에서 거룩함을 보았지. 그러나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인 줄 알겠어? 소미에 대한 사랑…………… 과연 그것뿐일까?”
박신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박 신부의 얼굴은 무표정했 다. 다만 평상시에 보이던 옅은 미소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현암군, 말을 해서 무엇하겠나. 힘을 아끼게………….”
승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승 희는 큰 소리로 울부짖듯이 외쳤다.
“바보들! 모두 바보들이야!”
준후도 웃고 있었다.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은 준후가 웃음을 띠면서 승희에게 물었다.
“누나, 누나는 바보 아니야?”
돌연 땅이 우르르 떨렸다. 지진과 같은 울림이 다시 시작되었 다. 수정구 안의 붉은빛이 순식간에 강해지면서 번쩍거리는 빛 을 사방에 뿌렸다. 악신 브리트라가 부활하려 하고 있었다. 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꼼짝할 수도 없었다. 이제 싸울 힘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있다 해도 상대가 될 수 없 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들의 믿음을, 자신 들의 세상을,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 여・・・・・・ 수정구가 산산조각 나면서 흩어졌다. 파편들이 튀어 오 르면서 붉은빛이 사방을 메웠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