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 냄새가 짙다. 가을,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가을의 푸른 하늘이여. 음악이 흐른다. 내 주변에는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다. 그 음악들은 내 우울을 더욱 짙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나 는 그들을 떼어 버릴 수가 없다.
언제부터였던가? 브람스의 음악에 심취하게 된 것은…… 그래,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은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거기에 나오는 음악 이야기가 너무도 멋져서 그다음부터 브람스를 듣게 되었다. 사실 음악이 좋은지 어떤지는 잘 모른다. 남이 물으면 그냥 ‘저도 브람스의 팬입니다. 물론요!’라고 말하 지만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은 더 우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 른 이유는 없다.
우울한 게 좋으냐고? 글쎄, 내 이성은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 그 어디에서는 우울해져라, 더 우울해져라 하고 말한다. 내 과거 때문에? 아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과거 는 찬란하고 밝기만 하다. 하지만 이젠 더 생각하기도 싫다. 그 래도 아주 가끔씩 뇌까려 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왜 이 렇게 되었을까. 하면서 원인을 생각하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이 나를 허탈하게 만들면서 더더욱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 우울증은 수렁과도 같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브람스………………. 인간 세상을 우울하게 만들려고 작정 한 듯한 그의 음악이 나를 더 우울하게 한다. 아니, 그러면 또 어 떠랴? 이미 수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인데.
이길 수 없거든 친해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브람스가 꼭 그랬던 사람 같다. 우울과 현학으로 온몸에 도배를 하고 내 귓가 에 나타나는 그는 마치・・・・・・ 아니, 이런 생각도 귀찮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지도 오래되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 은 내가 휴학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실 것이고, 전에 보내 주신 등록금과 생활비를 술 마시고 레코드판 사는 데 썼다는 사실도 모르실 것이다. 알리기도 귀찮다. 만사가 피곤할 따름이다.
베르테르의 시에 나오는 젊은 해골같이 거리를 걷는다. 하지 만 차마 길바닥에 눕지는 않는다. 그래도 약간의 수치심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판이나 사러 갈까? 내가 잘 들르는 레코드 가게의 주인은 지독하게 말이 없어서 맘에 든다. 여태껏 손님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내가 갈 때마다 판을 골라준다. 물론 말은 하지 않는다. 그가 판을 내밀면, 나는 만사가 귀찮아서 그냥 사고 만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도리어 나 는 아주 작은 재미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꿰뚫는 듯한 눈으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을 쳐다보는 게 마음에 걸릴 뿐…….
낙엽이 벌써 하나둘 떨어지고 있다. 이것들은 시체다. 푸르름 을 자랑했던 여름이 변색된 채 죽어 쌓이고 있다…………….. 발 앞으 로 낙엽 한 장이 떨어져 뒹군다. 나는 귀찮아 죽겠다는 근육에게 명령을 내려 방금 떨어진 낙엽을 지그시 밟아본다. 감각 무(無), 반응 무(無).
“흥, 생명이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흠칫 놀랐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나도 모르게 사방 을 둘러본다. 피곤한 시신경, 그러나 아직은 쓸 만한 시신경에도 인간의 반응은 감지되지 않는다. 청각신경의 착각으로 단정 짓는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에 머릿속에 주제가 있는 생각이 돌아간다. 낙엽, 낙엽, 그리고 생명……..
나도 낙엽과 마찬가지겠지?
삼십 년? 오십 년? 백 년이면 무엇하랴? 이렇게 떨어져서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버리는 게 끝이겠지? 그래, 분명 끝이다. 죽어 흙이 되면 그만이 아닌가? 분해되고 나면 분자 상태, 아니 원자 상태로의 분열・・・・・・・ 그다음의 조합은?
“너는 아냐. 아무 쓸 데도 없지. 영생, 윤회? 다 헛것이야.”
어디선가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엔 좀 더 분명하게 들린 다. 목소리도 파악 가능. 좋은 음성이다. 좀 딱딱하지만, 마음에 든다. 레코드 가게 주인의 음성과 흡사하다. 주인의 목소리를 들 은 적은 없지만, 누구의 목소리일까? 뒤를 돌아보니 웬 남자가 따라오고 있다. 저 사람이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날 쳐 다보지? 깡패? 맘대로 하라지.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더 듣고 싶 다. 아주 매력적인 소리가 들린다.
“죽는 게 정해진 이치라면 죽어 보고 싶지 않아?”
그럴듯하다. 이렇게 사는 게 귀찮다. 죽음?
“꼭 무서운 것만은 아니지. 아프지도 않아! 지겹게 반복되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보고 싶지 않아?”
대화를 시도해 온다. 아주 오랜만에 흥미를 느낀다. 우울함에 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아니 벗어날 생각도 하기 싫지만……………. 매력적인 제안이다. 누군지 알고 싶지는 않다. 뒤에 따라오는 녀석이 말하는 걸지도・・・・・・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어디에서 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냥 대답해 버린다.
“맘대로 해!”
눈을 돌려보니 단골로 다녔던 레코드 가게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그 이상한 주인밖에 없다. 가게가 어쩐지 어둡다. 나가려는 생각과는 반대로 내 몸은 주인이 있는 카운터로 향해 가고 있다. 아직 한 번도 주인이 의자에서 일어 나는 걸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유별나게 희고 큰 이다. 그리고 뾰족하다.
가게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힌다. 그러고 보니 창문 도 닫혀 있고 셔터도 내려져 있다. 전등 하나만 가게 주인의 머 리 위에서 건들거리고 있다.
뒤로 돌아서고 싶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가 게 주인에게로 몇 걸음 더 다가가더니 그 앞에 멈추어 선다. 이 게 아닌데? 뭔가 잘못되어 가는 느낌이다. 가게 주인이 일어섰 다. 아니, 일어선 것처럼 보인다. 가게 주인은 다리가 없다. 몸이 공중에 떠 있다. 아무리 눈을 감으려 해도 감기질 않는다. 몸도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잘왔네. 처음부터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지. 오래 기다려 왔네.”
꿈이라 믿고 싶다. 빌어먹을 몸은 떨리지도 않는다. 주인의 눈이 노란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이제 몸을 전부 갖출 수 있게 되었군. 다리만, 다리만 내게 주 게. 그러면 그 대가로 자네를 끝없는 권태에서 해방시켜 주지. 흐흐흐…….”
권태라고 해방이라고? 이런 식의 해방은 싫다.
주인이 짧은 메스를 건네준다. 내 손이, 빌어먹을 손이 그걸 선뜻 받는다. 으……………. 내가 왜? 다리로 손이 간다. 이 짧은 칼날 로 다리를 잘라 내려면 퍽이나 오래 걸리겠다. 이게 아니다! 내 가 바란 건 이게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무의미하게 포기하는 인간들 덕분에 나는 몸을 하나씩 하나씩 모을 수 있었지. 이제 마지막이네. 다리만 붙 이게 되면 말일세. 흐흐흐……. 빈약하긴 하지만 이제 부유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지. 어떤 인간보다도 강한 육신으로…………….”
으악! 고통! 몸이 말을 듣지 않는데도 고통은 느껴진다! 다리 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갑자기 가게 문이 와장창 부서져 나가면서 무엇이 날아 들어 왔다. 정신이 없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다리에는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한다.
내 오른손은 아직도 사정없이 다리를 후벼 대고 있다. 은빛 나 는 작은 물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가게 주인 주변을 날아다니 고 있다. 가게 주인은 몸을 허공에 띄운 채 노란 눈깔을 뒤집으며 허공을 쥐어뜯고 있다.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진다. 갑자기 온몸에 전기가 도는 듯 힘이 빠지더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다리에 꽂힌 메스, 누군가의 손이 메스를 거침없이 쑥 빼낸다. 아파서 까무러칠 것 같다.
“잠시 기다려!”
누군가 했더니 아까 뒤를 따라오던 청년이다. 허공을 가르며 하얗고 작은 물체가, 아, 칼이었군, 눈앞에서는 노란 눈깔을 한 주인이 칼과 싸우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판인 데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더러운 것! 내 너를 벌써 오랫동안 쫓았다. 회생마(回生魔) 녀석, 여덟 사람이나 해쳐 몸을 빼앗다니!”
청년의 입에서 기합 소리가 나오자 작은 칼이 비명을 지르며 청년의 손으로 날아 돌아온다. 정말 꿈인가 보다. 갑자기 작은 칼에서 기다란 빛줄기가 맺힌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 같다. 다리의 통증은 무진장 심하다………………
가게 주인, 아니 회생마라고 했던가? 그놈의 모습이 점점 흉악 해져 간다. 눈은 싯누렇게 변했고 이마며 목에 빨간 실핏줄이 돋고 손톱도 엄청나게 길어졌다. 몸은 여전히 둥둥 떠 있다.
“케케켁! 방해할 셈이냐? 대신 네놈의 다리를 잘라 주마! 네 놈 다리가 저 빈약한 놈보단 나을 것 같구나!”
갑자기 사방에서 레코드판들이 붕 뜨기 시작한다. 청년이 나 의 멱살을 왼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더니(그렇게 안 생겼는데 힘 한번 좋다) 구석으로 던지며 자기도 허공으로 솟는다.
아이쿠! 날 죽일 작정인가 보다! 벽에 부딪히니 오래간만에 별이 다 보인다. 아까 내가 있던 자리엔 레코드판들이 날아와 콘크리트 벽에 빽빽이 박혔다. 이건 아무래도 이 세상의 일이 아니야…..으아아!”
“야압!”
청년의 기합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누가 나를 일으키는 바람에 다리가 아파 정신을 차렸다.
“으윽!”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네. 내가 아까부터 자네에게 심마(魔)가 들린 것 같아 따라왔지. 덕분에 숨어 버렸던 회생마를 잡을 수 있었어. 괜찮은가, 다리는?”
으, 괜찮을 리가 있나? 제발 도로 눕혀라, 세워 놓지 말고!
“예, 괜찮습니다. 으윽!”
청년이 씩 웃는다. 그러고 보니 이 청년이 무시무시해 보였던 회생마인가 뭔가를 물리쳤나 보다. 가게 한쪽이 뭉그러져 있고 피와 살 조각 따위가 사방에 널려 있다. 우웩! 욕지기가 난다.
“사람이 스스로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뭔지 아나?”
아이고, 속이 뒤집히려는데 뭘 묻는 거야?
“욱, 그, 글쎄요.”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 아니 포기하는 걸세.”
“예, 욱・・・・・・ 고, 고맙…….”
“그런 소리는 필요 없어. 난 자네 같은 사람이 싫으니까! 생명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없어서 구한 것뿐.”
그래, 너 잘났다! 으아아, 갑자기 손을 놓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잖아!
“다리는 대강 손봤으니 병원에 가보게. 난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떠나야겠어.”
그러고 보니 다친 다리가 대충이나마 묶여 있다. 청년이 자신 의 옷을 찢어 응급처치를 한 것 같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고마운 마음이 밀려든다.
“자, 잠깐! 성함이라도 !”
떠나려던 청년이 뒤를 돌아다보며 씩 웃는다.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알 것 없어! 열심히 살기나 하라고.”
병원에서의 며칠 동안,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경찰이 귀찮게 굴었지만, 그냥 가스 폭발 사고로 처리하는 듯했다. 나는 내내 입을 다물고 모르겠다고만 했으니까.
창밖으로 낙엽이 진다. 전에 거리를 걸으며 본 것보다 더 많이 진다. 픽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산다는 건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죽음 앞에 섰다 돌아오니 이제는 청년이 한 말의 뜻을 알 것 같기도 하다.
할 일이 많다. 다리가 낫는 대로 복학도 해야겠고…………. 판? 그 집에서 산 판들은 다 버릴 거다! 특히 브람스는 모조리 버릴 거다! 병원비를 내고 나면 거지나 다름없으니 아르바이트도 다시 시작해야겠지.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한다? 아무리 몸으로 때운 다 해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을까? 아이고, 귀찮다. 아니, 아니지…….
낙엽들이 많이도 진다. 그러나 이젠 별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다. 하지만 낙엽 지는 날이면 항상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듯하 다. 그것을 악몽 같은 기억이라 해야 하나, 좋은 기억이라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