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야!”
“불이 났다. 불!”
사람들의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곳곳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붉은 불길은 해가 져서 어두워진 밤하늘을 다시 붉게 물들이면 서 작은 불똥들을 하늘 높이 날려 보내고 있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가 달려오고, 급히 연결된 소방호스들이 물보라를 뿜었다. 많은 사람들, 지나가던 행인과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까지 몰려와서는 붉은빛을 얼굴에 쐬 면서 불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부분은 말이 없었으나, 몇몇은 사람이 없는 사무실이었을 테니 다행이었을 것이라든지 소방대도 불을 끄기는 힘들겠다는 말들을 나누기도 했다. 어쨌 거나 모두는 불이 나서 멀쩡한 건물이 타 버려 안됐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활활 타올라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있는 불길을 이유 모를 동경이 실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동준이 근무하던 송림 산업의 작전동 지부 사무실에 불이 났 다는 사실을 전하는 전화를 받은 것은 불길이 잡혀 가던 즈음이 었다. 가족과 함께 저녁상을 앞에 놓고 있던 동준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동준의 가족은 그 화재가 동준 과 또 무슨 관계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하여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차를 제때에 정비해 두지 않아서 그런지 시동이 잘 걸리지 않 았다. 동준은 애꿎은 계기판을 주먹으로 치며 서너 번 키를 돌렸 다. 기침을 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간신히 시동이 걸리자, 동준은 지체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벌써 몇 번짼가?’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로 알았다. 갓 수습 딱지를 뗀 동준이 발 령을 받아 연구부에 배치되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애인이었던 은엽과의 비극적인 추억을 오랜 시간 동안 묵혀 두고 이 년간이 나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다가 마침내 털어 버리고는, 원래 목적 을 두었던 대학원을 포기하고 회사 생활로 진로를 돌린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야간에 그가 새로 맡았던 7 호 공실에 화재가 일어나고 그 광경을 옆에서 목격했던 잔업자 의 말을 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별것 아니라고 무시했지만 동준은 스산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불이 날 이유가 없었어요! 화기를 가까이한 적도 없고, 전기 콘센트도 근처에는 없었지요. 하지만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나 무로 된 작업대가, 분명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검게 타들어 가더니 불이 붙었다고요.”
작업자의 말을 들은 조사팀이 화재가 일어난 시점을 조사한 결과 보고서를 동준도 보았다. 발화점은 분명히 아무것도 없던 빈 테이블이었다.
“이상한 일은, 거기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후끈한, 아니 펄펄 끓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어요. 작업대에 불이 붙은 건 그다 음이었고요. 아니, 분명하다니까요! 저도 안 믿기지만 분명히 그랬어요!”
보름 후, 동준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불이 났다. 멀쩡하게 닫혀 있던 캐비닛 안쪽에서 불이 일어난 것이다. 안의 서류들이 한순 간에 타오르며 공기를 덥히고, 잠긴 캐비닛 문이 팽창 압력을 이 기지 못해 벌컥 열리면서 사무실에 불붙은 종잇조각을 토해 냈 다. 늦게까지 근무하던 여직원이 기겁을 하며 대피해서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불이 난 원인은 밝혀낼 수 없었다. 서류 들만 보관되어 있던 캐비닛의 안에서 불이 붙은 이유를 도대체 해석할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난 후, 경비원과 같이 야간숙직을 돌던 동준의 눈 앞에서 아세톤 탱크가 폭발하는 큰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둘다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그때부터 동준에 대해 알 수 없 는 쑤군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장 내에서 동준이 불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물 론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동 준이 병원에서 나오자 자재로 배속이 바뀐 것을 보면 그냥 흐 지부지 사라질 성질의 소문은 아니었던 듯싶었다.
망연히 옛 생각을 하던 동준의 눈앞에 불덩어리 같은 것이 휙 지나갔다. 놀란 동준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왈칵 쏠리면 서 차가 멈추자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차에서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고개 를 창밖으로 내밀고 욕을 퍼붓고 있을 따름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뭐가 있다고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아? 죽 으려고 환장했냐?”
동준은 대꾸도 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마 치 보이지 않는 불의 인연을 털어 내려는 듯이…………. 그러고는 다 시 차를 몰았다.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사무실의 불길은 다 잡히고 흰 연기만 모락모락 일고 있었다. 지점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도착하여 현 장을 수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과장이 소방대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무실에 일어난 화재의 원인을 도대체 알 수 없다는 이야기 같았다. 특별한 인화물질이나 전열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열선은 사무실이 전소된 지금까지도 거 의 상하지 않은 채였다. 발화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한쪽 벽 에 서 있던 큰 책꽂이에서 시작된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 준은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낯 뜨겁게 느껴졌다. 자신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 지 모른다. 불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소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 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 동준은 묵묵히 다른 동료들 사이에 끼어 잔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자재로 옮기고 두 달 동안은 무사했다. 동준은 발목을 잡힌 듯한 부담감에서 풀려나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장에서 불이 난 적은 십 년 동안 네 번밖에 없었는데 그중 세 번이 동준과 연관된(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화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자 자재 사무실에 또 화재가 일어났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갑자기 우그러들고 녹으면서 그 안에 든 종잇조각에 불이 붙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쓰레기통 안에는 인화물질(담배나 성냥 따위)의 흔적은 아예 없었다. 그것이 자리를 잠시 비웠던 동준의 쓰레기통이라는 점을 빼면.
사무실의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여직원들은 동준과 눈을 마주 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고, 동료들 사이에도 대화 가 점점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무실에 불이 났다. 동준이 출근하려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의 일이었다. 이틀 뒤 자 재과 창고의 화재로 이어졌다. 동준이 숙직을 서게 된 날, 동준 이 순찰을 돌기 직전의 일이었다.
동준은 괴로웠다. 어째서 자신의 자리, 자신의 사무실, 자신이 속한 부서에서 계속 불이 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 했기에………. 원래 동준은 종교 같은 것을 믿지 않았으나 이런 원 인을 알 수 없는 불에 직면해서는 공포스러운 마음을 가누기 어 려웠다. 특별히 원한을 지거나 악행을 저지른 기억도 없었다. 그 의 마음속에 여태껏 평생을 살면서 앙금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던 은엽의 정체 모 를 실종뿐이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불, 불과 연관 있었던 일이 있었던가?
동준은 괴로워하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는 결국 사표를 제출하 러 갔다. 그러나 사표 수리되지 않았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 러한 이유 때문에 사원을 내쫓는다는 것이 탐탁하지 않았던 모 양이다. 동준은 사표 대신 서울의 한 지점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공장 사람들이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근무처를 옮긴 지 한 달밖 에 되지 않은 지금, 불이 난 것이다.
커다란 책장은 반쯤 타 버린 채 엎어져 있었다. 동준과 동료 직원인 권 대리가 힘을 합해 책장을 일으켜 세웠다. 책들이 탄 재며 숯으로 변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 바람에 둘 은 시커먼 굴뚝 청소부가 되었다. 권 대리가 타고 남은 재와 종 이 부스러기 더미로 변한 책들을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전부 타 버렸군,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책들을 여기 갖다 놓지 않는 건데. 자네도 책 많이 갖다 놓았지?”
지금은 책이 문제가 아닌데. 그러나 동준은 무겁게 고개를 끄 덕이면서 책 더미를 발로 툭 쳤다. 재가 흩어지며 불그레한 표지 가 보였다. 거의 재가 되다시피 한동준의 책이었다.
은엽이 선물했던 시집이다. 어떻게 이 시집이 여기에 끼워져 있었을까? 아마도 책을 한꺼번에 직장으로 옮길 때 끼어든 것이 리라.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은 엽, 오래전에 잊기로 맹세했던 은엽이 불쑥 떠올랐다. 왜 이제 와서……. 대체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녀에게 무 슨 일이 생긴 것일까?
권 대리는 한쪽 구석에서 캐비닛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동준은 자꾸 떠오르는 해묵은 기억들을 억누르면서, 타다 남은 시집 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모양이 이상했다. 신기하게도 시집은 가 장자리부터 작은 직사각형의 모양만 남기며 타 들어간 듯했다. 잔해가 거의 완벽하게 작은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동준은 어떻게 종이가 그렇게 탈 수 있는지 의아했다. 자세히 보려고 책 을 들추었는데, 갈피에 무엇이 끼워져 있었는지 페이지가 저절로 열렸다.
“이건?”
안에 은엽의 사진이 있었다. 원래 시를 좋아하지 않던 동준은 시집을 선물로 받고도 몇 페이지, 정확히 말하면 표지에 썼던 은 엽의 말만 읽고 두어 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말았다. 그런데 안 에 사진이 끼워져 있는 것이다. 단풍에 붉게 물든 가을 산을 배 경으로 머리를 휘날리며 은엽이 서 있었다. 시집은 정확히 사진 크기만큼 남아, 사진은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었다. 그는 오래 전에 은엽의 흔적이 남은 사진들을 모조리 찢어서 태워 버렸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은엽인가. 동준은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 혀 하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왜 이러지? 벌써 잊기로 한 여잔데. 나를 버리고 매정하게 사라져 버린 여자 때문에 내가……
“공동준 씨! 이리 와서 좀 도와줘!”
권 대리가 부르는 소리에 동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시집의 잔해를 바지 주머니에 우겨 넣고 돌아섰다. 눈에 물기가 남아 있었으나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사무실은 대강 수습되었지만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지점장이 임시 사무실을 알아보는 동안에는 할 일이 없었다.
동준은 잠들어 있었다. 어제 거나하게 마신 술이 깨지 않아서 였다. 동준은 회사 사람들과 폭음을 하고 돌아온 뒤에도 집에서 또 몇 병의 술을 비웠다. 어머니가 조심스레 부르는 소리가 귓가 에 들려왔다. 동준은 부스스 눈을 떴다. 흐릿한 눈 속으로 머리 맡에 너저분하게 놓인 술병들이 들어왔다. 어제 늦게 들어와서 는 시집을 꺼내 놓고 그대로 꽤나 오래 앉아 있었다. 계속 술을 들이켜면서 타고 남은 시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눈에 들어온 시집의 잔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동준은 떨리는 손을 시집으로 뻗었다. 만약, 만약 이제껏 있었 던 일들이 은엽과 관계가 있다면…… 이 시집의 잔해는 은엽에 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증거일까? 혹시 은엽이 죽은 것은 아닐 까? 아니야, 그렇다 해도 왜 내게…………. 그러나 정말로 은엽에게 변고가 생긴 것이라면………….
동준은 쿵쿵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시집의 겉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예전부터 낯이 익은 은엽의 둥근 글씨가 소담하게 들어 있었다.
생일을 축하하며, 은엽.
글씨는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동준이 발작적으로 시집을 털 자, 어제 보았던 은엽의 사진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코끝이 시렸다.
동준은 고개를 천장으로 젖히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란 것 을 잊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 그동안의 일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뇌리에는 잊었던, 아니 억지로 잊은 척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흘러들었다.
-어이쿠, 정말 차다! 이리 와 봐, 물이 정말 시원해!
-아니 됐어. 후후후.
-덥지 않아? 정상까지는 한참 남았다구! 으아, 동상 걸릴 지
경이야!
-난 괜찮아, 보기만 해도 시원해.
은엽은 그런 식이었다. 늘 따뜻하고, 진지하고, 그러나 항상
뒤로 한발 물러서 있었다.
-너, 너한테 할 말이 있어, 흠흠.
-술 더 안 마실래?
-아냐, 됐어. 그런데 할 말이라던 게 그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아이고….
-왜그래? 어디 아파?
-아니, 별, 별건 아니고….
-뭔데?
-응, 그러니까….와, 죽겠네. 에라 모르겠다, 널 사랑한다고! 됐어?
-뭐야? 후후훗.
동준의 어머니가 문을 열었을 때, 동준의 방 안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런 불기로 보이지 않고 연기나 냄새도 없 건만, 방 안은 강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의식을 잃은 동준이 쓰러져 있었다.
“동준아, 동준아!”
동준의 어머니는 뜨거운 열기를 뚫고 들어가 동준을 방 밖으 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119를 눌렀다.
병원은 언제나 붐비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응급실은 사고를 당해 실려 오는 사람과 가족들로 웅성거리는 절박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동준 어머니의 심경도 다른 가족과 별로 다를 것 이 없었다. 초조하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 통곡 소 리를 듣고 있던 동준 어머니의 눈에 흰 커튼을 들치며 나오는 담 당 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이불을 덮고 있어서 허리 아래 부분은 화상을 입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고, 나머지 화상도 대수롭지 않다는 말에 동준의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의사가 물었다.
“그런데 아드님이 무엇에 덴 거죠?”
“글쎄요, 방이 온통 타버렸는데……..”
“불이 났나요?”
“아뇨, 불은 안 났어요.”
“예? 이상하군요. 그럼 뭐죠?”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통 대답을 안 하니.”
“이상하군요. 방사선도 아니고, 아주 잠깐 동안 굉장히 높은 열에 입은 화상 같은데………….”
뭐라고 이야기를 해 보았자 동준의 어머니가 알아들을 이야기 는 없다고 판단한 의사는 휘적휘적 다음 환자에게로 갔다. 동준 의 어머니는 조심스레 커튼을 젖히고 동준이 누워 있는 침대를 들여다보았다. 동준은 아무 말 없이 잠든 듯 누워 있었다. 얼굴 과 팔에 약이 발려 있었고,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동준 의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는 한숨을 쉬면서 나가려 했다. 그 런데 갑자기 동준이 비명을 질렀다.
“은엽아! 은엽아!”
동준의 어머니는 기겁을 해서 몸을 돌렸다. 동준은 눈을 감은 채 손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은엽이 라는 이름이 귀에 익었다. 전에 동준이 데리고 와서 인사까지 시 켰던 참한 아가씨가 아닌가. 그 후 동준이 버림받았다면서 괴로 워할 적에는 얼마나 욕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동준의 어머니가 아들의 허리를 붙들고 진정시키려 했으나 동준은 계속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다.
“얘, 얘! 왜 이러니? 왜 이러는 거야?”
“으, 은엽이가…… 어, 어머니, 은엽이가 나타났었어요………….”
분명히 은엽이었어요.’
“헛걸 본 거야! 정신차려! 얘, 동준아!”
“은엽이가 죽었어요, 틀림없어요………. 그녀가 나타나서는 뜨 거워지고………… 안 돼, 죽었다니 그럴 리가 없어!”
“간호사, 간호사! 의사 선생님!”
간호사가 달려와서는 동준을 눕히려다가 어렵사리 진정제 주 사를 놓았다. 동준은 은엽의 이름을 부르면서 서서히 의식을 잃 었다. 사람들은 벌어진 장면을 쳐다보며 잠시 동안 웅성거리다 가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 사람, 상반신에 온통 붕대 를 감은 한 남자가 형형한 눈빛으로 커튼이 젖혀진 응급실 침대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밤이 되도록 동준은 헛소리를 해 댔다. 환자가 밀어닥치자 동 준은 응급실에서 병실로 배정되었고, 며칠이 지나자 화상의 상 처는 차차 아물어 갔다. 비록 넓은 부위에 화상을 입었으나 1도 의 경미한 화상인데다 동준의 건강 상태가 좋아서 회복이 빨랐 기 때문에, 퇴원하여 집에서 정양하면 될 것이라는 담당 의사의 말을 들은 동준의 어머니도 며칠 동안의 밤샘에서 벗어나 집을 정리하러 귀가했다. 동준이 의식을 찾은 후로 동준의 어머니는 몇 번이나 은엽의 일을 물어보았으나, 동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동준의 어머니는 그냥 과거의 기억이었겠거니하고 일단 집으로 떠났다. 그러나 동준의 머릿속에서 은엽은 떠나지 않았다.
누가 병실 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왔다. 그러나 동준은 꼼짝 하기가 싫었다. 들어온 사람이 머리맡에 섰다. 힐끗 보니 건장한 청년이었다. 가슴이며 배 주위에 붕대를 두툼하게 감고 있는 걸 로 보아 중환자 같은데 태연히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수상하기 도 했다. 동준은 귀찮은 듯, 까딱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청년의 그리 크지 않지만, 우렁찬 울림을 지닌 목소리가 대답했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왔소.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고통이요? 난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다 나았어요. 내일은 퇴원을…….”
“몸의 고통이 아니오. 마음의 고통 때문이지.”
청년은 잠시 고개를 돌리며 놀라운 말을 했다.
“은엽 씨, 오은엽 씨 아시죠?”
동준이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은엽이의 이름을 압니까?”
“당신이 계속 내 옆자리에서 이름을 부르며 고통스러워했소.
응급실에 있을 때 말이오.”
동준의 마음속에 옛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동준은 밀려 오는 기억을 누르려 애썼으나, 눈앞에 은엽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청년은 동준에게 계속 말을 했다.
“보시다시피 나도 누워 있는 처지라서 쓸데없이 당신의 일에 간섭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오. 허나, 아마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거요.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은 은엽 씨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뭐라고요?”
“아니면 아직도 은엽 씨를 못 잊고 있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당신의 생각이 어떻든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싶지 는 않소. 이런 문제야말로 가장 미묘한 것일지도 모르고………… 또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런 남녀 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숨기지 말고 이 야기해 주세요. 은엽 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죠?”
동준은 어이가 없었다. 이 친구는 은엽을 어떻게 아는 걸까? 혹시, 은엽을 빼앗아 간 장본인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이런 것을 물을 이유가 없다.
“당신, 어떻게 은엽이를 알죠? 왜 나와 은엽의 관계를 알려고 하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은엽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청년은 주춤하더니 동준의 눈을 쳐다보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 덕였다. 무거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동준의 온 몸으로 번져 나갔다. 이유는 알 수는 없었으나 전율이 몸을 차갑 게 훑고 지나갔다.
“어디에, 어디에 있소? 도대체 어디에 있소? 만날 수 있게 해 주시오! 한 번만이라도 좋소! 그녀에게 말할 수 있게 해 주시 오! 아니,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좋소! 제발 그녀를………… 흐흑…………”
동준은 청년의 옷깃을 부여잡고 목멘 소리를 질렀다. 마치 연 극 무대에 선 배우의 행동을 지켜보듯이, 우스꽝스럽게도 동준 의 의식에 자신의 행동이 비쳐 들어왔다. 내가 왜 그 독한 여자 를? 나를 속이고, 소중한 약속을 배반하고, 갈가리 찢겨 텅 비어 버린 마음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던 그 여자를 내가 왜 다 시 찾는 것일까?
그러나 동준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청년이 원망스럽다기보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털어놓아 호소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은 엽을 잊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원망과 마음속 깊이 억눌려 있 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박차고 튀어나온, 은엽을 보고 싶다는 일 념이 동준을 오열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오래 참았던가. 모두 잊
었다고 생각한 것이 언제던가.
청년은 묵묵히 서서 오열하고 있는 동준을 내려다보았다. 청 년의 사나워 보이는 눈매가 축축해져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동준의 눈물이 조금씩 수그러들자 청년이 입을 열었다.
“아직 잊지 못하고 계시군요.”
동준의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다시 몇 방울의 눈물이 흘러나왔 다. 동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 이더니 말을 했다.
“은엽 씨가 원망스러우시죠?”
동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모든 것을, 아니 아는 대로만 가르쳐 드리죠.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아마 당신이 은엽 씨에게서 온 편지를 받았을 때의 일이었을 겁니다. 그때 은엽 씨는 마음이 들 떠 있었지요. 공동준 씨, 은엽 씨의 하숙집에 찾아가신 적이 있 죠? 분명 가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예, 있습니다……. 그랬죠.”
“편지를 보낸 날짜와 은엽 씨가 방을 비운 날짜가 비슷하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렇죠?”
“예.”
“은엽 씨는 방을 옮기려고 한 겁니다. 좀 더 시내에 가까운 쪽으로요. 이사가 뭐 대수로운 일도 아니고, 원래 은엽 씨는 자신의 생활 주변의 자잘한 일들을 시시콜콜 얘기하는 성격이 아니 었을 겁니다. 누가 물어보면 숨기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예,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내게는 새 주소를?”
“차근차근 들으세요. 은엽 씨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여자 혼자 의 몸으로 이사를 가는 일은, 아무리 방 하나뿐이라지만 쉬운 일 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저것 처리할 일이 많죠. 그래서 잠깐 틈을 내어 그렇게 간결한 편지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를 했다면 왜 내게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죠? 내게 말했으면…….”
“그때는 동준 씨의 시험 기간이 아니었습니까?”
맞다. 그랬다. 은엽은 자신이 이사 가는 사실을 알리면 내가 분명히 만사 제치고 달려올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혼 자 힘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을 것이다.
“은엽 씨는 혼자 방을 옮겼습니다. 이사가 끝난 게 아마 10월 13일쯤이었을 겁니다. 공동준 씨, 생일이 어떻게 되죠?”
“제・・・・・・ 생일 말입니까?”
“예.”
“10월 15일…….”
동준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연한 느낌뿐이었지만.
“침착하세요. 옛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청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준의 귀에 대포 소리처럼 들려왔다.
“으, 은엽은 어떻게 된 겁니까? 예? 말해 주세요!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은엽 씨는 당신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들 만한 것을 사기 위해 이곳 저곳을 다녔죠. 아, 간략히 말하겠습니다. 그녀가 찾아갔던 어 느 곳에서 폭발 사고가 나면서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은엽 씨는….”
“뭐, 뭐라고요?”
“기억하실 겁니다. 그즈음 보도된 백화점 화재 사건…………. 보 수 공사를 위해 쌓아 두었던 페인트에 연쇄적으로 불이 붙어 폭 발하면서, 안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 고 변을 당했죠. 열기가 심해서 신원은 물론 사상자 수조차도 정 확히 파악되지 않은 사고였습니다.”
동준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역 시…………. 그는 지금까지 은엽을 원망해 오면서도 그런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문득문득 불안감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은엽이 그 런 일을 당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차라리 배신을 당했 다고 생각할지언정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아냐,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당신은 어떻게 알지? 은엽이 정말로 그렇게 죽었다면, 당신은 도대체 그런 일들 을 어떻게 알 수 있지? 거짓말! 은엽은 어디에 있지? 당신과. 당신과 같이 있는 거지? 대답해 봐!”
“제가 한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걸 알 수는 없지요. 그러나 저에게 문병을 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뭐, 능력? 그러면 죽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가 있단 말이야? 거짓말!”
“믿고 안믿고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로 인정하셔 야 합니다. 공동준 씨, 어째서 당신 주변에 불이 그렇게 자주 났는지 아십니까?”
“그, 그걸 어떻게…………..”
“수도 없을 겁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그게 은엽 때문이라는 거야? 믿을 수 없어! 그녀가 왜 내 게 원한을 품는단 말이지?”
“원한 때문이 아닙니다. 은엽 씨는 강한 불 속에서 오로지 당신을 생각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그만! 그만해! 으흐흑…………….”
“은엽 씨의 영은 해결하지 못했던 당신과의 일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당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숨을 거둘 때의 열기를 담은 채로 부유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아간 겁니다.”
“차, 찾아왔다고? 어, 어째서?”
“당신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을 보고 싶어 한 겁니다. 그래서 회사로 찾아갔지요. 처음에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려 했겠죠. 따라가려 했는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은엽 씨 의 몸에서는 영적인 열기가 솟고 있었어요. 그래서 공실에 이유 없이 불이 난 겁니다. 은엽 씨의 몸을 태우던 불의 열기로 인해!”
“그러면 그 후의 불들도?”
“그렇습니다. 은엽 씨는 영의 상태였지만, 몹시 놀랐을 겁니 다. 그래서 다음엔 조심스럽게 당신의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주위에 있는 것이 전부 타 버렸습니다. 캐비닛이 불타올랐다죠?”
“그, 그랬소”
“은엽 씨는 자신이 나타나면 좋지 않을 거라 느끼고 당신에게 는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바 같이라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죠. 당신이 숙직을 돌 때, 앞에 있던 화학 탱크가 터진 일이 있었죠?”
“맞아요. 흐흑…….”
동준은 알 수 있었다. 은엽은, 가련한 은엽의 영은 아직도 타 오르는 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에 차 있는 자신을 보고 싶은 생각에………… 아아,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은엽의 하얀 몸을 갉아먹 은 망할 놈의 불, 그 열기가 자신을 곤란하게 하자 은엽은 얼마 나 놀랐을까! 나를 찾아오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번민을 했을까! 가지 않아야 한다고, 가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은엽은 자신을, 보잘것없고 속 좁 은 자신을 그저 바라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어서…………….
동준은 침대에 엎드려 흐느꼈다. 청년은 그러나 묵묵히, 단조 로운 어조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공동준 씨가 불에 탄 사무실에서 시집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집에서 은엽 씨에 대한 회상에 잠겼을 때, 은엽 씨의 영은 더 이 상 참지 못하고 동준 씨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은엽 씨의 몸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동준 씨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마 이제 다시는 찾지 않을 겁니다.”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동준이 얼굴을 들었다. 청년, 아니 현암은 맑은 눈을 동준에게 돌렸다. 그의 얼굴은 아무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의지로 가득 했으나, 그런 그의 눈도 젖어 빛났다.
“만나게 해 줘요. 제발, 제발.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만날 수 있게 해 줘요. 흐흐흑…. 제발요.”
동준은 현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남자에게 무슨 깨우침이며 가르침이 필요하겠 는가.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고? 만난 자는 언젠가 헤어지 게 되는 법이라고? 전부 신의 뜻이라고? 현암은 생각에 잠겼다. 아니, 생각하는 척했는지도 모른다. 현암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 이 울렸다.
“같이 갑시다. 지금 당장………… 시간이 없어요.”
악령과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고 우연히 병원에서 동준의 일을 눈치챈 사람은 현암이었다. 현암의 이야기를 듣고 은엽의 마음 과 그간의 사정을 읽은 사람은 승희였다. 그리고 은엽이 살던 곳 을 투시한 사람은 준후였다. 지금, 귀화를 사방에 뿌려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고 안식도 취하지 못하는 은엽의 영 을 천국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박 신부였다. 장소는 이사를 한 뒤 돌아가지 못해 텅 비어 있는 은엽의 방이었다.
병원에서 동준을 설득시키기로 한 현암이 갑자기 문을 열고 동준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 세 명은 깜짝 놀랐다. 의식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어서 은엽의 영이 허공에 떠 있었다. 동준은 그녀 를 볼 수 없었으나 느낌은 확실히 받을 수 있었다. 방 안이 타는 듯이 더웠다. 준후가 열심히 승희와 함께 수를 발휘해서 열기를 식히려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강렬한 열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 고 있었다. 동준이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마를 줄 모르는 듯,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여기・・・・・・ 그래, 여기 있지? 은엽아!”
현암은 눈짓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세 명은 동준의 표정만을 보고 모든 것을 알아챈 듯싶었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돌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동준의 얼굴이 따갑게 쏘아져 오는 열기의 근원을 찾아 이리 저리 돌아가다가 한 점에 멎었다. 동준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드디어… 다시 보게 되는구나.”
준후가 눈물을 뚝 떨어뜨리면서 동준의 손에 부적 한 장을 슬 며시 쥐어 주었다. 뭐라고 중얼거리자 동준의 앞에 환한 빛과 이 글이글 타고 있는 불길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불길 한가운데서 미소를 짓고 있는 은엽의 모습이 보였다. 불길은 마치 공작새인 양, 저녁노을인 양, 은엽의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은엽 은 생시와 다를 바 없이 안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동준은 계 속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엽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동준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려는 것을 박신부가 제지했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 의 주변에 이글거렸기 때문이었다. 대신 현암이 힘을 가하자, 뭔 가 조그마한 것이 은엽의 손에서 날아올라 동준의 손 위에 가볍 게 얹혔다. 동준의 목이 콱 막혀 왔다.
불에 타서 반쯤 녹아 버리고 검게 그을린 자국이 아직 그대로 있는 넥타이핀, 은엽의 생일 선물이었다. 미처 동준에게 전해 주지 못했던.
“아아, 은엽아, 은엽아!”
박 신부의 눈도 붉게 충혈되었다. 박 신부는 몸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간이 되었네. 은엽 씨는 가야 할 곳이 있어.”
“뭐라고요? 안 돼요!”
동준이 목이 메어 외쳤다.
“안돼! 이제야 지금에야 보게 되었는데・・・・・・ 은엽아 가지마!”
은엽의 얼굴은 슬픈 듯, 그러나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동준은 뜨거운 열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현암이 팔을 잡았다.
“안 돼, 그래선 안돼.”
“아냐, 아냐. 나도 가야 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올랐는지 동준은 현암의 팔을 뿌리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네 명은 놀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동준은 죽기를 각오한 것 같았다.
“동준 씨, 안 돼! 그랬다간 죽어!”
‘오랫동안, 이미 넘칠 만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원망도 많 이 했고 오해도 많았지. 그러나 너는 알 거라 믿는다. 너와 다시 한 번이라도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무서운 열기를 뚫고 동준은 은엽을 껴안았 다. 뜨거운 팔이 동준을 받아들였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다만 그러고 있었다. 무서운 열기도 둘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벼락이 떨어진 듯, 앞을 볼 수 없는 광휘가 사방을 비추며 사 방이 현란한 빛 속에 가려졌다. 은엽의 몸을 끝없이 태우고 있던 열기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네 명이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는, 은엽의 영의 모습도, 동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반짝거리는 빛을 내 며 그슬린 넥타이핀 하나만이 동그마니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승희는 울음을 터뜨렸고, 준후도 흐 느끼고 있었다. 박 신부가 말없이 준후를 안고 등을 다독였다.
“이젠 구원받았을 거야.”
현암은 이를 악물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잘된 일 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없었다. 현암은 고 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뇌성이 들려 오는 것이,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비라도 퍼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시원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