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4화 – 하르마게돈 8 : 고반다를 만나다
고반다를 만나다
고반다가 있다는 작은 아쉬람은 차가 간신히 올라올 수 있는 산중턱에서도 한참을 더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박 신부 일행은 카르나의 안내를 받으며 산길을 오르면서도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고반다가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의외지만 전적으로 고반다를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시간 이상이나 산길을 터벅터벅 오르다가 승희가 카르나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카르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절반 정도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승희는 박 신부에게 속삭였다.
“벌써 초소가 열네 군데나 있더군요. 모두 상당한 능력자들이 있었고요.”
“능력자들이 대략 몇이나 되었니?”
“적게 잡아도 서른 명?”
승희는 그 말을 하면서 안색을 흐렸다. 그러자 성난큰곰이 조 용히 뒤에서 마음속으로 말을 전달했다.
사십 명도 넘는다. 그리고 그중 최소한 여섯 명은 내가 당해 낼 수 없는 자들이다.
그 말을 듣자 승희의 안색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성난큰곰은 박신부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최강의 주술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뛰어넘는 자들이 그렇게 많다니………….
다시 성난큰곰이 조용히 말을 전달해 왔다.
그런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 사람들 중에는 힌두교도도 있고, 불교도나 시크교도, 자이나교도도 있다. 그리고 악인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기운이 밝은 자들이 많다. 고반다는 어떤 자이기에 종파를 초월하여 그런 사람들을 수하로 거느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에 박 신부는 그저 조용히 대꾸했다.
“만나보면 알 수 있지 않겠소?”
고반다가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박 신부는 그만한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고반 다를 찾아가야 할 것이라면 이번 기회에 가는 것이 좋으리라 여 겼기 때문이다.
며칠 전, 카르나가 찾아왔을 때 흥분한 로파무드를 달래어 고 반다에 관해 물어보니, 로파무드도 고반다를 직접 만난 적은 없 다고 했다. 그러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고반다는 실제로 자신은 손 하나 까닥하여 힘을 쓴 적이 없으며, 항상 눈부신 광휘로 둘 러싸여서 누구라도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박신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으며, 정말 고반다를 만나보기 전에는 그가 어떤 자인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고 생 각하게 되었다. 로파무드는 평소 그렇게 얌전했지만, 한번 화가 나자 도무지 흥분을 삭일 줄 몰랐다. 더욱이 화를 내면 집요해지 는 점은 마스터를 닮은 듯했다. 따지고 보면 로파무드의 영혼은 마스터의 영혼이었으니, 아무리 정화되어 아기처럼 깨끗해졌다 고는 하나 근본 성격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고반다를 만나러 가는 일행 중에 로파무드와 바이올렛은 끼어 있지 않았다. 로파무드는 고반다를 무척 증오 하기 때문에 이성을 잃을 수 있어서 남겨 둔 것이고, 바이올렛 은 그런 로파무드를 옆에서 지켜보기 위해서, 그리고 현암의 소 식을 기다리기 위해 남은 것이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 황달지 교수도 남았고,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위험이 있는 연 희 역시 현암의 연락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남겨 두고 온 참이 었다.
그들이 출발한 지 이틀째가 되어 가고 있었으며, 현암에게서 소식이 끊긴 지도 닷새가 지나 있었다.
사실 장소를 이쪽에서 정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박 신부는 굳 이 고반다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했다. 좀 위험한 것 도 같았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편이 옳았다. 그들의 도착을 미리 알 정도의 능력자들이 모여 있다면 굳이 이편에서 유리한 장소를 고른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카르나 쪽에서 그렇게 뻔한 함정을 파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박 신부는 받았다.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박 신부는 이 기회에 고반다의 평소의 모습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고반다가 머문다는 오 지의 작은 아쉬람을 찾아간다고 말한 것이다. 그곳은 산과 울창 한 밀림을 몇 군데나 통과해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지만.
박 신부는 눈을 돌려 승희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승희 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지만,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현암의 소식이 없어서였으리라.
그러나 박 신부나 승희 모두, 현암이 정말 어떤 일을 당했으리 라고는 믿지 않았다. 아니, 애써 믿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 산길을 걷고 있는데 돌연 앞서 가던 카르 나가 걸음을 멈추고 위로 먼저 달려 올라갔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영문도 모른 채 서서 기다리다 보니 한 떼의 사람들이 위쪽에 서 내려왔다. 난민들처럼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 는데, 개중에는 말쑥한 차림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박 신부 일행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박 신부 일행이 올라온 길을 따 라산을 내려가 버렸다.
잠시 후 카르나가 나타나서 그들을 인솔하여 다시 길을 올랐다. 한 십 분가량 더 올라가자 카르나가 입을 열었다.
“다왔습니다. 여기가 고반다 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그들 앞에는 아주 조그맣고 엉성한 아쉬람 한 채가 있을 뿐이 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아쉬람 전체가 색색의 야생화로 온 통 뒤덮여 있어 꽃으로 만든 집처럼 보인다는 것뿐, 어마어마한 위풍의 고반다가 이런 곳에 있다고는 미처 생각할 수 없을 정도 였다.
꽃들도 정성 들여 꽂혀 있기는 했지만 색의 조화에 따라 꽂은 것이 아니라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승희가 그 꽃들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카르나가 설명해주었다.
“신자들이 꽃은 것입니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이 한 송이씩 꽂고 가지요.”
“그럼 아까 그 사람들이 ……………?”
“예. 고반다 님을 뵙기 위해 왔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만 일단 내려 보냈지요. 귀한 손님들이 오시니까.”
카르나는 귀한 손님들이 박 신부 일행이라는 듯, 턱으로 그들 을 가리키더니 씩 웃으며 아쉬람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들어가서 고반다 님을 만나 보십시오. 아쉬람이 협소하 여 다 들어가실 수 있을지 …………….”
카르나는 성난큰곰을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슬쩍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아쉬람이 너무 좁아 덩치가 워낙 큰 성난큰곰이 들어 갈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박신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소. 나하고 윌리엄스 신부님, 승희 양만 들어가 보도록 하리다.”
“우린 밖에서 기다리죠.’
이반 교수가 배낭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밖을 경 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의 배낭에는 예의 그 무시무시한 자동화기가 잔뜩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성난큰곰도 무표정하게 장승처럼 버티고 섰다.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카르나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피식피식 악의 없이 웃으며 올 라왔던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것은 확실히 예상과는 달랐다. 박신부 일행은 의아해하며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고, 승 희는 투시력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쉬람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아쉬람 안에는 두어 명의 사람이 있는 듯했지만, 최소한 승희의 투시력이 미치는 가까운 거리에 숨어 있거나 지키는 자 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왜 아무도 없죠? 우리는 아직 그들 편이 아닌데…………
승희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성난큰곰이 인상 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말해 왔다.
자신 있다는 것이겠지.
박신부가 쓴웃음을 지으며 아쉬람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이반교수가 말렸다.
“잠시만. 안에 폭약 같은 것이 장치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안에서 누군가가 무뚝뚝하게 서툰 영어로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곧이어 그 안에서 작은 인도 아이 두 명이 나왔다. 한 명은 남자아이고 한 명은 여자아이였는데, 평범하기 그지없었으며 차림새도 너저분했다.
승희가 은근슬쩍 투시를 해 보니 아이들에겐 특이한 힘이 전 혀 없었고, 다만 방문객은 이제 귀찮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을 뿐 이었다.
“괜찮겠는데요?”
승희가 말하기도 전에 박 신부는 미소를 띠며 아이들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고는 아쉬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가 들어섰다.
아쉬람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박 신부는 아찔할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아쉬람 안은 좁고 낡았지만 무엇인가로 꽉 차 있었다. 빛이었다. 눈을 부시게 만드는 빛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해지는 오라 같은 밝은 빛이 아쉬람 안에 가득했다.
그 빛은 순수하고 맑았으며, 티끌만큼의 그 어떤 악한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그 빛은 아쉬람 한 모퉁이에 조용히 쪼그려 벽에 기대앉은 한 늙은 남자의 몸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전혀 다듬 지 않은 상태로 기른 수염과 머리, 그리고 너저분한 옷을 걸치고 맨발로 앉아 있었는데 손에는 작은 칠판과 석필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박 신부를 보고는 칠판에 놀랄 만큼 빠르게 글씨를 쓱쓱 써 서 내밀었다.
‘환영하오.’
“고반다……………?”
노인은 다시 능숙하게 칠판에 글씨를 써서 내밀었다.
‘그렇소.’
고개만 까딱해도 될 텐데 고반다는 그것이 습관이 된 듯,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칠판의 글씨로만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칠판도 작아 긴 글은 쓰기가 힘들 듯했다. 글씨를 보인 뒤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오른팔로 칠판을 쓱 문질러 글을 지웠다.
“항상 이런 식으로 의사소통을 하십니까?”
고반다는 기계보다도 빠른 손놀림으로 또다시 간략하게 썼다.
‘오십년’
“말씀은……?”
‘못하오.’
“그 칠판만 사용하십니까?”
‘항상’
박신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십 년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고 작은 칠판으로만 의사소통을 해 오다니…’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박 신부가 말이 없자 고반다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지루해진 승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릴 왜 불렀죠?”
고반다가 재빨리 글을 썼다.
‘도와주시오.’
“도와 달라고요? 어떻게 도와 달라는 거죠?”
여전히 고반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칠판에 글을 썼다.
‘당신들과 같이 다니던 아이는?’
그 말에 박 신부가 되물었다.
“준후 말이오?”
‘그렇소.’
“이번에는 같이 오지 않았소.”
그러자 고반다는 잠시 손을 부르르 떨다가 글을 썼다.
‘그 아이만이 도울 수 있소.’
승희와 박 신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준후라고? 왜 고반다는 준후만이 도울 수 있다고 하는 걸까? 그때 윌리엄스 신부가 나섰다.
“타보트・・・・・・ 타보트는 어디 있소?”
고반다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힘없이 썼다.
‘카르나에게 말하시오.’
“우리에게 줄 수 있소?”
마음대로 하시오. 다만 그 아이를 불러 주시오.’
“준후를 불러다 주어야 타보트를 주겠다는 거요?”
‘아니오. 그냥 가지시오.’
뭔가 의아함을 느낀 박 신부가 물었다.
“당신은 대답만 하시오? 먼저 말은 하지 않소?”
그러자 고반다가 생기를 찾은 듯 재빨리 썼다.
‘그렇소.’
“정말이오?”
‘그렇소. 나는 거짓말은 할 수 없소.’
그러더니 고반다는 칠판을 내려놓고 구석에 쪼그린 채 눈을 감아버렸다.
세 사람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틈에 두 꼬마가 나타나더니
말했다.
“고반다 님께서 안녕히 가시랍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실로 너무도 의외로운 일이었다.
한참 지난 후에야 승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혹시………… 저 고반다 가짜가 아닐까요?”
그러자 박 신부가 딱 잘라 말했다.
“가짜는 저런 오라를 낼 수 없다.”
“저・・・・・・ 오라…….”
윌리엄스 신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저것은 그 어떤 것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저것처럼 강한 것은 처음 봅니다….”
그 말에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그리고 ・・・・・・ 그 빛에는…………… 전혀…… 전혀 악함이 없습니다.”
또다시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러자 윌리엄스 신부는 멍한 표정으로 박 신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고반다는 나쁘지 않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그럼 이 제 어떻게 해야…….”
말을 맺지 못하는 윌리엄스 신부를 쳐다보며 박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내 박 신부는 조용히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사이 윌리엄스 신부가 이반 교수와 성난큰곰에게 고반다의 이야기를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똑같이 혼란에 빠졌다.
승희도 갈피를 못 잡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반다의 몸에서 나 오는 오라는 너무도 찬란했다. 더구나 고반다는 오십 년 동안 작 은 칠판으로 몇 마디를 적는 것 외에는 말도 하지 않았고 거짓말 한 적도 없다니. 그렇다면 칼키파가 획책하는 무서운 일들을 고 반다가 시켰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무런 보상도 없이 타보트를 순순히 내준다고 했다.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박 신부를 믿지 않을 순 없었으니 그야말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고반다는 착한 사람인데, 그 밑의 놈팡이들이 나쁜 놈들 아닐까? 그래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닐까?’
일단 승희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고반다는 준후를 찾을까? 고반다가 준후를 어떻게 알며, 왜, 무슨 도움을 청하는 걸까?’
도무지 승희는 의문이 가시지 않아 불쑥 아쉬람으로 밀고 들 어갔다. 이반 교수가 흠칫하며 말리려 했지만 승희가 아무런 생 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것이라 그럴 겨를도 없었다. 승희 는 현암의 소식이 없어 잠도 자지 못해 경황이 없는데다 고반다 의 오라를 보고 나자 갑자기 긴장이 풀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 았다.
승희가 들어가자고반다는 빛을 뿜으면서 구석에 볼품없이 드 러누워 있다가 서서히 일어나 앉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 정했다.
대뜸 승희가 물었다.
“당신 부하들 중에 나쁜 자들은 없나요?”
그러자 노인은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부하들이 하는 일을 당신은 아나요?”
‘다는 알 수 없다.’
“당신이 세상을 망하게 하려 한다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사실 승희의 이런 질문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으며, 멍청한 수 준의 질문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물음에 고반다는 급히 칠판에 단호하게 휘갈겨 썼다.
‘아니오’
순간, 고반다는 칠판을 떨어뜨리고 몸을 쭈그렸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자 두 꼬마가 달려와 승희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말로 뭐라고 마구 떠들면서 화난 표정으로 승희를 아 쉬람 밖으로 몰아냈다.
승희는 멍한 표정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승희가 밖으로 나가자 꼬마들은 밖의 사람들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함부로 들어오지 마세요! 고반다 님은 몸이 안 좋으시니까!”
그러고는 아쉬람의 거적때기 같은 문을 휙 닫아 버렸다. 몇 송 이의 꽃들이 그 통에 너울너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멍한 표 정을 짓고 있는 승희에게 윌리엄스 신부가 물었다.
“대체 무슨……?”
승희는 주절주절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윌리엄스 신부 등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 지 않았다. 다만 박 신부의 미간이 조금 더 찌푸려지는 것 같았 다. 그 모습을 보고 승희는 무안해져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저 아래쪽에서 카르나가 걸어 올라왔다.
“어떠셨습니까?”
그는 아까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런 카르나에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반다 님이 뭐라 분부하신 일은 없으십니까?”
“타보트를 내주신다고 하셨소. 당신에게 말하면………”
윌리엄스 신부가 말하자 카르나가 이내 물었다.
“그냥요?”
“그렇・・・・・・소, 그냥…….”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드리지요.”
“정말이오?”
카르나가 너무도 흔쾌하게 대답하자 윌리엄스 신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번엔 이반 교수가 나섰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줄 어떻게 아시오?”
카르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거짓말을 한다면 조금 더 그럴듯하게 했겠죠.”
그 말에 이반 교수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카르나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고반다 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좌우간 저를 따라오십시오. 타 보트를…………….”
그때 아래쪽에서 탕 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총소리 같았다. 모두는 워낙 맥이 빠진 상태여서 그 못지않게 바짝 긴장했다.
일행을 보면서 카르나는 얼버무리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별것 아닌 …….”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아래쪽에서 우박 같은 총소리 가 들려왔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수십 명이 총을 무차별로 난사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카르나도 안색이 변하면서 박 신부 일행을 내버려 두 고 급히 아쉬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고반다 를 들쳐 업고 두 시동을 꼬리에 단 채 급히 산 아래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박 신부가 성큼성큼 카르나의 뒤를 따라 산 아래쪽으로 내려 가려 하자 윌리엄스 신부가 박 신부를 말리려 했다.
“신부님! 그리로 가시는 것은………….”
그러나 박 신부는 윌리엄스 신부의 손을 뿌리치고는 중얼거리면서 아래로 달려갔다.
“막아야 해! 이건 막아야…………!”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달려가는 박 신부에게 윌리엄스 신부가 물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승희에게 외쳤다.
“승희야! 좀 알아봐 주렴!”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아스러운 것은 승희도 마찬가지였다.
“뭘 말이에요?”
그러자 박 신부가 헐떡이며 걸음을 멈추었다. 박 신부가 멈추 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사실 다리를 저는 박 신부가 카르나를 쫓아간다는 것은 무리였고, 이미 카르나는 산 아래쪽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박신부가 그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저기 말이다.”
아직까지 산 아랫자락은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쪽에서 다시 총성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총 성이 들려오자 박 신부가 말했다.
“산 아래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진 모양인데……………. 나는.. 나는 믿을 수가 없구나.”
그 말에 승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너무 멀어요. 최대 사백 미터 정도는 접근해야 알 수 있어요. 삼백오십 미터 이내라면 더 좋고요.”
솔직히 승희는 총성이 울리는 곳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승희의 마음을 알지 못한 이반 교수가 말했다.
“사백 미터라면 보통 총의 유효 사거리는 대강 벗어난 정도요. 그러니 크게 위협적이진 않을 거요.”
그러나 승희는 내키지 않는 듯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이반 교수가 박 신부에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왜 그리 서두르십니까?”
이반 교수가 묻자 박 신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현암 군이 저쪽에 있는 것 같소. 아…………… 하지만 아직 승희에 게는 말하지 마시오. 위험한 상태인지도 모르니까…………”
“예?”
“그리고 많이 …………… 너무 많이 온 것 같소. 이것은…………….”
“누가 많이 왔다는 겁니까?”
“우리가 만났던 자들이 거의 다 모인 것 같소. 나는 투시력은 없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소. 저 아래에는 아녜스 수녀가 있고, 검은 지하드도 있는 듯하오! 그리고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자들 도 수없이 느껴집니다! 지난번 놀이공원에서 모였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능력자들이 있소!”
“예? 그렇게 많은 자들이…………? 혹시 타보트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오! 어떻게든 해 보아야…….”
말을 하다가 박 신부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 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우리가 어떻게?’라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정찰하는 것이라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 여기고, 그들도 박 신부의 뒤를 따라갔다. 더군다나 현암이 와 있는 듯하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 다. 박 신부의 당부대로 승희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숲을 벗어나자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가 이내 야트막 한 고개가 나왔다. 이 고개를 올라서면 산 아랫마을이었다. 그곳 에 도착하자 승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맞아요……………. 아주 많아요……. 능력 없는 자들도 많지 만・・・・・・ 수없이 많은 자들이 숨어 있어요……………..”
그 말을 하다가 승희는 갑자기 비틀거렸다. 안색이 창백했다. 승희 옆에 있던 윌리엄스 신부는 승희를 부축하려 했지만 승희 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고개 위로 올라섰다. 박 신부도 고개 위 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반 교수가 외쳤다.
“올라가면 안 되오! 총이…………….”
그때 성난큰곰이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이반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 위로 올라가면 바로 마을이므로 총 격전이 벌어지는 곳에 상당히 접근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고 개 위로 올라서지 않으면 현장을 볼 수가 없었다. 이반 교수는 할 수 없다 포기하고 그 뒤를 따라 고개턱으로 올라섰다. 산 아랫자락의 광경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것도 희귀한 장면 이 아니라 현대인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혼돈. 박 신부 일행이 지 나왔던 평화로운 산자락은 승희에게, 과거 TV에서 보았던, 내전 이 벌어진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을 연상시켰다.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들고, 나무와 오두막은 화염에 휩싸여 맹렬한 기세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땅에 걸레처럼 엎어져 있는 사람들의 몸에서는 기분 나쁠 정도로 피 같지 않아 보이는 피가 냇물처럼 고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방은 총성과 고함. 폭음과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가득 차 정 작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늘마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은 엄폐물에 숨어 가면서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해 댔고, 허름한 옷차림의 수많은 사람들 이 총에 맞아 짚단처럼 힘없이 풀썩 쓰러지거나 혹은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다가 쓰러졌다.
그런데 박 신부를 더욱 아찔하게 만든 것은 총에 맞고 쓰러지 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고반다의 술사들이 아닌 평범한 신도들 이라는 점이었다. 박 신부는 서둘러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어떻게든 저 사람들을
대뜸 이반 교수가 박 신부를 붙잡으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오.”
“하지만…………….”
박 신부는 어떻게든 해 보려고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총알이 휙휙 스치고 지나가는 저 아래쪽의 광경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전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은…….
“이건…….”
박 신부는 흐릿해져 가던 옛 기억을 다시 붙잡았다. 젊은 시 절, 자신이 겪은 월남전의 모습과 지금의 광경은 너무도 흡사했 다. 잊어 가던 과거의 아픈 기억. 박 신부는 불현듯 아랫배에 통 증을 느꼈다.
박 신부가 몸을 움츠리자 성난큰곰과 이반 교수가 급히 박 신 부의 몸을 밀쳐냈다. 통증이 삽시간에 박 신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고, 박 신부는 그 자리에 쓰러져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 었다.
“아니 …………! 신부님!”
이반 교수가 놀라서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를 부르려 했으나 그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승희는 이곳의 지옥 같은 광경을 보자마자 거의 실신 상태가 되어 윌리엄스 신부가 짊어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무섭다거나 상황에 질려서가 아니었다. 직접 보기 전까지 승 희는 주술사나 초능력자만 투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혹한 현 장을 눈으로 보게 되자, 예전보다 훨씬 민감해진 그 투시력은 쓰러져 죽음을 향해 치닫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가득 찬 절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승희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아아! 안 돼! 안 돼!”
승희는 열에 들뜬 사람이 헛소리를 하듯 간헐적으로 비명을 질러 대며 무작정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런 승희를 윌리엄 스 신부는 눈물을 삼키면서 있는 힘을 다해 찍어 눌렀다.
윌리엄스 신부의 앞은 돌로 쌓아 올린 담이 있어서 어느 정도 총알을 막아 주었지만, 담 높이가 워낙 낮아 고개만 쳐들어도 머 리가 날아갈 지경이었다. 그 옆 담벼락에는 성난큰곰과 이반 교 수가 박 신부를 안전한 곳으로 밀어 눕히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옆과 뒤로도 총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포위당한 것 같았다.
“저격병이오!”
이반 교수가 외쳤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산탄도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정확히 조준하여 날아오는 총알이 훨씬 더 무서웠다. 저격 범위에서 벗어나려면 몸을 엄폐할 곳부터 찾아야 했다. 그 런데 그런 장소는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고개 뒤로 도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그들이 목표물로 점찍 힌 이상 저격병에게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어, 그야말로 멋진 사냥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할 수 없이 이반 교수는 윌리엄스 신부, 성난큰곰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박 신부와 승희를 걸머지고 달려서 엄폐가 가능한 어느 무너진 집과 담장 뒤편으로 뛰어들었다.
그동안에도 고반다 측 사람들은 총알에 밀려서 계속 뒤로 도 망치는 상황이라 총알은 점차 가까이로 쏟아져 왔다. 어느 틈에 그들은 그 와중에 휩쓸리고 말았다.
“신부님! 혹시 총에 ……………?”
간신히 한숨 돌리게 되자 이반 교수가 물었다. 그러나 박 신부 는 대답할 수 없었다. 놀라서 확인해 보니, 다행히 박 신부의 몸 에는 외상이 없었다. 하지만 박 신부는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반 교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성난큰곰이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지금 박 신부는 스스로의 기억과 싸우고 있다.
박신부는 서서히 쓰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박 신부가 쓰러지자 이반 교수와 성난큰곰은 서둘러 눈짓을 교환했 다. 그 두 사람은 박 신부가 총에 맞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주 술로 암암리에 타격을 입었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무력도 불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반 교수는 서둘러 배낭의 끈을 풀며 성난큰곰이 대신 지고 있던 여분의 배낭까지 받아서 손에 들었다. 그러자 성난큰곰은 용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던 쓰러진 마차로 달려간 작은 아이의 부타가 있었다. 아이는 한쪽 팔이 총에 맞아 너덜거리며 간신히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마차를 한 손으로 잡아 단숨에 뒤집었다. 뒤쪽에 숨어 있던 용병들 중 두 명이 놀 라서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한 명은 마차에 깔린 듯했 다. 부타가 된 아이는 그 용병에게 달려들어 그를 순식간에 종이 처럼 갈가리 찢어 버렸다.
수십 명의 부타들이 밀려들자 능숙한 용병들도 어쩔 줄 모르 고우왕좌왕하다가 십여 명이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 등은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지금 벌어지는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에 눈만 멍하니 크게 뜬 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뒤쪽에 떨어져 있던 부타 하나 가 인기척을 느낀 듯, 박 신부와 이반 교수가 있는 쪽으로 달려 왔다.
“제길! 왜 이리 오는 거야!”
이반 교수가 화를 버럭 냈다. 사실 이반 교수는 냉정한 판단 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싸움이 처참해도 지금 끼어들면 좋을 것 이 없었다. 박 신부도 아직 무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고,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 판 단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타가 덤벼드는 이 상황 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을 더 숨겨 보았지만 부타가 냄새를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배낭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지난 번 키건에게서 얻어 낸 갑옷 나이트 아머였다. 이 갑옷은 총알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주술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만약을 대비해 가져왔던 것인데, 지금이 이것을 사용할 때라고 성난큰곰은 판 단한 것이다.
두 사람이 서둘러 준비를 갖추는 동안 윌리엄스 신부는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 승희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사이에도 총알은 우박같이 쏟아져서 공포에 빠져 우왕좌왕 하던 고반다의 참배객은 거의가 시체가 되어 버렸다. 남은 자들 은 고반다의 추종자들로, 상당한 실력자들이라 그리 수는 줄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간헐적으로 알 수 없는 무기를 던지기도 하 고, 주술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 같았지만 의외로 소극적이었다. 사실 총알이 빗발치면 그 어떤 주술사나 능력자도 막기 힘들 었다. 하지만 고반다의 부하들은 승희가 판단한 대로 무척 많았 으며 그중에는 대단히 강한 능력을 지닌 자들도 많은데 왜 저항 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을 이처럼 무차별적으 로 습격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반 교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격 솜씨들이 보통이 아니군.”
성난큰곰은 사격이나 전술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라 의아한 듯 이반 교수를 바라보았다. 물론 손으로는 열심히 나이트 아머를 껴입으면서 이반 교수 역시 재빨리 총의 부품들을 결합하면서 말을 이었다.
“마구 쏘아 대는 것 같지만, 노출된 목표물들을 틀림없이 명중 시키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숙련된 자들이오. 용병일지도……………”
우왕좌왕하는 자들은 술사들이 아닌데 왜 총을 난사하는 것인가? 고 반다를 따르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는 건가?
성난큰곰이 마음속으로 이반 교수에게 묻자 이반 교수가 고개 를 저으며 무섭게 인상을 썼다.
“그런 것 같지도 않소. 저들은 사람들이 단순히 시야를 가린다 는 이유로 모조리 쏘아 죽이고 있는 거요! 지독한 놈들! 닳고 닳 은 용병들이 분명하오!”
그때 승희가 막 정신을 수습했다. 승희의 고통은 죽어 가는 자 들에 대한 고통이 전파되어 나타난 것이므로, 시야에 있는 대부 분의 사람들이 숨을 거두자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승희가 정신을 차리자 윌리엄스 신부는 기뻐하면서 서둘러 여기 서 빠져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승희는 고개를 저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 같았지만 승희의 눈에는 또 다른 공포가 어려 있 었다.
“안 돼요! 지금… 지금 무서운 것이………!”
“무서운 것?”
윌리엄스 신부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들은 지금 총격전에 휘말려 버렸다. 그보다 무서운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다 가 다음 순간, 윌리엄스 신부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무차별적인 총격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이한 소리가 울리자 선혈을 흘리면서 쓰러졌던 자들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몸에 구멍이 뚫렸거나 팔이나 손이 떨어져 나간 사람 들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과거에 보았던 좀비와 흡사했지만 그들 모두가 혀를 길게 빼 물고 있다는 점에서, 외관상으로 좀비와는 조금 달랐다. 솔직히 좀비보다 더 끔찍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윌리엄스 신부가 중얼 거렸다.
“부타(인도어로 죽은 영혼을 지칭함)! 부타로구나. 신이여…”
“부타……?”
승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되묻자 윌리엄스 신부는 성호를 그 으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건……………. 좀비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오! 좀비는 조종받는 인 형이지만, 부타는 악에 물든 영혼을 그대로 몸에 남겨 두어 …………… 고통을 느끼고, 고통스러울수록 더욱더 강해지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오!”
윌리엄스 신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수십명에 달하는 죽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지르면서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마구 달려 갔다.
그 속도만 보더라도 조종을 받아 느릿느릿 움직이는 좀비와는 달랐다.
부타는 좀비와 달리, 죽은 영혼이 몸에 남아 있는 존재였다. 물론 이성은 상실한 상태지만 죽었을 때의 고통과 증오심을 그 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부타는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좀비 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였다.
총알이 더더욱 빗발치듯 쏟아졌지만 부타들은 하나도 넘어지 지 않았다. 총에 맞은 부타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고 몇 발 짝씩 물러서거나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일어나 더욱 미친듯이 달려갔다.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그 고통에 반발하는 증오심이 솟구쳐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부타의 무서운 점 이었다.
부타들이 엄폐물 쪽으로 접근해 오자 조준 사격을 하듯 규칙 적으로 들리던 총소리가 마구 난사해 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 러나 부타들은 총을 맞을수록 더 빨리 움직였고, 훨씬 더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용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던 쓰러진 마차로 달려간 작은 아이의 부타가 있었다. 아이는 한쪽 팔이 총에 맞아 너덜거리며 간신히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마차를 한 손으로 잡아 단숨에 뒤집었다. 뒤쪽에 숨어 있던 용병들 중 두 명이 놀 라서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한 명은 마차에 깔린 듯했 다. 부타가 된 아이는 그 용병에게 달려들어 그를 순식간에 종이 처럼 갈가리 찢어 버렸다.
수십 명의 부타들이 밀려들자 능숙한 용병들도 어쩔 줄 모르 고우왕좌왕하다가 십여 명이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 등은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지금 벌어지는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에 눈만 멍하니 크게 뜬 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뒤쪽에 떨어져 있던 부타 하나 가 인기척을 느낀 듯, 박 신부와 이반 교수가 있는 쪽으로 달려 왔다.
“제길! 왜 이리 오는 거야!”
이반 교수가 화를 버럭 냈다. 사실 이반 교수는 냉정한 판단 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싸움이 처참해도 지금 끼어들면 좋을 것 이 없었다. 박 신부도 아직 무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고,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 판 단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타가 덤벼드는 이 상황 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을 더 숨겨 보았지만 부타가 냄새를 맡았는지, 아니면 직감으로 알았는지 똑바로 달려들고 있었다.
이반 교수가 보다 못해 막 조립한 벨지움콘바인의 산탄을 쏘 아서 그 부타를 넘어뜨렸다. 이반 교수의 산탄은 용병들이 쓰는 총알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영화에 나오는 7호 엽총탄 같은 것과 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이라 그것을 맞은 부타는 순식간에 보 기에도 참혹할 정도로 벌집처럼 부서졌지만, 벌집이 된 상태에 서도 속도조차 죽이지 않고 곧장 달려왔다.
이반 교수는 다급한 나머지 땅에 엎드린 후 등에 메고 있던 엘 리컨 기관포의 스위치를 움켜쥐었다. 놀라는 일이 거의 없는 이 반 교수가 그 정도로 당황할 만큼 부타의 몰골과 속도는 위협적 이었다.
우르릉 하면서 번개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탄피가 삽시간에 우박같이 사방으로 날리는 순간 달려들던 부타는 조각조각이 나 서 흩뿌려지고 말았다.
이반 교수는 급히 총의 스위치를 멈추었다. 위력이야 굉장했 지만 탄약 소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뒤처졌던 다른 부타들도 용병들 쪽으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길! 이런 식으로 쏘다간 몇 명 상대하지 못해!”
이번에는 성난큰곰이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인디언 비전 의 주술 주문이 읊어지자 그들의 앞에 몽롱한 연기처럼 무엇인 가가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안개처럼 허공에 뭉쳐서 동물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기이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달려들던 부타들이 그 기운에게 덤벼들어 허공으로 팔을 내 저으며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성난큰곰이 만든, 알 수 없는 연기 같은 형상이 일순 사라져 버렸는데도 부타들은 환각에 빠 졌는지 자기들끼리 싸웠다.
“뒤로 물러섭시다!”
성난큰곰이 오랜만에 입을 열어 직접 목소리를 냈다. 그는 커 다란 덩치의 박 신부를 가볍게 짊어지고, 이반 교수의 짐까지 한 손으로 들고는 뒤로 달려서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가 있는 곳까 지 달려왔다.
그사이에도 부타들과 용병들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용병들은 몹시 당황한 듯했지만, 그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장비들도 만만치 않았다. 최초의 부타들의 역습으로 열 명 가까운 희생자 가 나왔음에도, 그들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둥글게 돌면서 일종의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고반다 측의 부타 술사도 만만치 않 았다. 부타들도 바싹 쫓아가는 것을 멈추고 대오를 갖추는 것처 럼 자리를 지켰다. 용병들은 누군가의 지휘를 받는 듯, 순식간에 포위망을 형성해 조여들었다. 이번에 앞장선 몇 명의 용병들은 화염 방사기를 걸머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이반 교수가 혀를 찼다.
“제길! 전쟁이군!”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떻게 백주에 이런 짓을…………….”
“여긴 오지요! 부근에 여기 말고 다른 마을은 아예 없는데, 누가 총성을 듣겠소?”
이반 교수가 씹어 내뱉듯이 말하자 윌리엄스 신부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좀비라면 효과가 있겠지만…………… 부타들에게 불은…………….”
윌리엄스 신부가 말을 맺기도 전에 화염 방사기가 무시무시한 불꽃을 부타들을 향해 뿜었다. 순식간에 앞장섰던 부타들의 몸 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부타들은 쓰러지지 않고 발작적으 로 불길이 쏘아지는 곳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화염 방사기를 지고 있던 용병들이 놀라 더욱 강한 불꽃을 집 중시켰지만 부타들은 몸이 타들어 감에도 놀라운 속도로 달려들 어 용병들에게 매달렸다. 처참한 비명과 함께 용병들이 메고 있 던 가스통이 부타의 몸에 붙은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해 버 렸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용병들의 가스통도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그 일대는 불길이 휘몰아치는 지옥이 되어 버렸다. 불길은 순식간에 승희 등이 있는 곳까지 밀려왔다. 성난큰곰 이 밀어닥치는 열기를 나이트 아머를 껴입은 자신의 큰 덩치로 막아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모두가 큰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폭발 속에서도 부타들은 반 이상이 살아남아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지독하군!”
이반 교수는 부타들의 지독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저 쪽에서도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용병들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때, 갑자기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누군가의 외침이었는데, 현암의 사자후에 필적할 만큼의 커다란 목소리였다.
“네놈들은 누구냐?”
그 목소리는 강한 인도 악센트가 섞인 서툰 영어로 외치고 있 었기 때문에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롭게 대답하 는 자는 당연히 없었다. 오히려 대답 대신 기분 나쁜 소리를 내 면서 로켓탄이 부타들을 향해 날아갔다.
이반 교수는 로켓탄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발사음과 파열 음만을 듣고도 그 무기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었다. 그는 급히 모든 사람들에게 담벼락에 붙어서 바싹 엎드리라고 외쳤다. 다 음 순간 사방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발사된 로켓탄은 휴대용 LOW (경량 대전차 로켓탄) 였다. 그것들은 고폭탄이 아니라 대전차탄이었기 때문에 관통 효과는 뛰어날지 몰라도 폭발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렇 지 않았으면 박 신부 일행이 조금 떨어진 담벼락 뒤에 숨어 있었더라도 크게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그러나 폭발에 의한 압력과 엄청난 폭음은 그들을 압박해 꼼짝도 할 수 없게 했다.
제아무리 부타들이라 해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라 그 폭 발에 배겨 내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사방 으로 흩어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는 고반다 측의 술사 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듯, 문득 사방에서 음산하게 주문 같 은 것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주문은 마치 메아리가 지듯이, 그 지역 전체를 웅웅 하며 에워쌌다.
그 소리를 듣자 성난큰곰의 안색이 변했다.
“이건……!”
성난큰곰이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사방에서 들려오던 소리들이 맹렬하게 서로 울리면서 급속도로 증폭되어 갔다. 성난큰곰과 윌리엄스 신부는 제각기 있는 힘을 다 쏟아 내어 주위를 그 울림 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했다.
성난큰곰은 자연력을 빌린 토템의 기운들을 불러 사방을 에워 싸고 윌리엄스 신부는 기도문을 외우면서 나름대로 극도의 오라 를 펼쳤다. 박 신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윌리엄스 신부 의 오라력도 많이 증가되어 성난큰곰의 주술이 미처 메우지 못 한 간극을 오라력으로 메우는 정도가 가능했다.
그러는 중에도 수십, 수백 명의 술사들이 한꺼번에 발휘하는 듯한 그 무시무시한 음파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지 않더라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버릴 정도의 강력한 음 파였다. 과거 히루바바가 도곤족을 이용해 사용했던 음파술만큼 은 아니었지만, 그때처럼 힘을 한 점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드넓은 지역 일대를 한꺼번에 뒤덮어 버린다는 점에서 더욱 가 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성난큰곰과 윌리엄스 신부가 진땀을 흘리면서 음파에 저항했 지만 이반 교수와 승희의 고통은 지독했다. 이제 주변은 음파술 뿐만 아니라 어떤 주술을 썼는지, 대낮인데도 사방이 어두워져 갔다. 그것도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붉은 기가 감도는, 핏빛의 무시무시한 어둠이 하늘을 덮어 갔다.
그때 이반 교수는 급히 전화를 걸어 지금의 상황을 호텔에 남 아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통화 도중에 점점 소 리가 흐릿해지더니, 급기야 연락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이게 어찌 된 거지? 고장인가?”
이반 교수가 답답한 듯 전화기를 두드리자 성난큰곰이 말했다. 아니다. 주술 때문이다………………
성난큰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그도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구 체적으로 이유를 들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상황이 말할 수 없이 위험하다는 예감이 뚜렷이 밀려들었다.
“위험해…….”
윌리엄스 신부가 중얼거렸다.
“이런 큰 주술을・・・・・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