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4화 – 용(龍)과 봉(鳳) 4 : 대혼전
대혼전
다음 날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과천의 놀이동산은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날따라 유달리 사람들이 많아 돌아다니기 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평상복을 입고 그 안을 혼자서 천천히 배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숨어서 윌리엄스 신부의 주변을 살폈다.
처음에 일행은 황 교수와 수아를 데리고 오지 않으려 했다. 그 러자니 수아를 돌보기 위해 연희가 남아야 했고, 연희를 남기자 니 황 교수와 연희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돌봐 줄 사람 을 또 남긴다는 것도 문제가 컸다. 그래서 결국은 아예 모두가 함께 아지트를 나섰다.
혹시라도 현암이나 준후가 돌아올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아지 트에는 과천 놀이동산에 갔다는 쪽지를 남겨 두었다. 황 교수와 연희와 수아는 놀이동산 구석에 있는, 그러나 다른 일행의 시야 안에 있는 장소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기로 약속했다. 일행은 가급적 남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윌리엄스 신부 주변 에 있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다.
승희와 바이올렛은 같이 행동하며 승희는 주로 투시를 행하 고, 바이올렛은 그 주변을 살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남의 눈에 띄지 않거나 장비를 감추기 위해 아침부터 열심히 뛰어다니고 머리를 굴려 놀이동산에 잠복(?)했는데, 방법들이 자못 기발했다.
로무드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커다란 첼로 케이스를 끌고 다녔다. 물론 그 안에는 첼로가 아닌 전설의 활, 간디바가 숨겨 져 있었다. 그리고 이반 교수는 어느새 평소의 신사 차림이 아니 라 반바지에 모자를 쓰고 큰 배낭을 멘 유럽인 배낭 여행객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커다란 배낭 안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성난큰곰과 박 신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 대편에 투시력을 가진 자가 있었으므로, 서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숨바꼭질을 하듯 잠복하기로 상 의한 것이었다.
이반 교수는 아예 능력이 없었고, 바이올렛은 약간의 능력이 있기는 했지만 방심하면 투시에 걸려들 수도 있었다. 성난큰곰 과 박 신부는 둘 다 정신력이 극도로 강해, 남의 투시에 걸려들 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몰랐지만 좌우간 놀이동산 안에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성난큰곰과 박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없 자 나머지 일행은 대체 그들이 어디로 숨었을까 궁금하게 여겼 다. 일행 중 덩치가 가장 크고 눈에 잘 띄는 두 사람이 감쪽같이 숨었다는 것은 묘한 흥미를 자아냈다.
박 신부는 헤어지기 전에, 세크메트의 눈을 달라고 승희에게 말했다. 승희는 안 그래도 현암의 소식이 궁금하고 걱정되었기 에 자신이 계속 현암의 상황을 주시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그 것을 박 신부에게 넘겨주고야 말았다.
다섯 시가 되어 가자 승희는 슬슬 투시를 시작했다. 능력자의 마음은 투시가 되지 않지만(그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투시가 되 지 않는 자가 능력자라는 뜻이었다), 승희는 이 방법을 사용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능력자를 가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 자면 정신력의 소모가 극심해 저녁때가 되어서야 투시를 시작한 것이었다.
투시를 행하자마자 승희는 깜짝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 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럴 수가!”
“왜 그러죠?”
바이올렛이 덩달아 놀라며 묻자 승희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이렇게 많은 능력자들이 …………….”
“무슨 소리예요?”
다급한 목소리로 승희는 바이올렛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서 신부님과 성난큰곰을 찾아요! 큰일 났어요! 수십 명의 능력자들이 있어요! 너무나 위험해요!”
승희는 무척이나 조급했다. 언뜻 보았는데도 자신의 주변에만 사십 명에 가까운 능력자들이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 은 숫자의 능력자들이 모여든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승희는 놀란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만치에서 아이스크 림을 들고 웃고 있는 중년 부부.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 같아 보였고 아이까지 하나 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은 분명히 능력자였다.
또 저쪽에서는 사진사가 카메라와 삼각대와 광고 간판을 주렁 주렁 목에 걸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 한국인 같아 보 이는 그도 능력자였다.
롤러코스터가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면서 그 안에 탄 외국인 연인들이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연인 같아 보였지만 그 들도 능력자였다.
가장 무서운 것은 풍선을 들고 깡충깡충 뛰어가는 열두서너 살 정도의 깜찍한 아이였는데, 그 여자아이는 앞의 사람들보다 더더욱 투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내 투시력이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절대 이럴 리 가 없는데…………!’
어떻게 이렇듯 많은 능력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일까? 능력자 중에는 외국인도 많았지만,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국인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될 것이다. 검은 편지 결사에 이토록 많은 동양인 능력자가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침착하라.
갑자기 어디선가 성난큰곰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성난큰곰은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능력이 있 었으므로 승희는 그에게 급히 자신이 알아낸 상황을 설명해 주 었다.
승희의 말에 성난큰곰도 놀라는 것 같았지만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전해 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점토판을 교환한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간 것 같다. 어느 한 집단에 이렇게 많은 능력자들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다. 아마도 상당한 무리들이 점토판을 노리고 몰려든 모양이다.
‘그럼 어떻게 하죠? 아이고, 저쪽에 또 세 명이나 있네. 지금까 지 내가 느낀 것만 마흔여섯 명째라고요! 우리가 이들 모두를 상 대할 수는 없어요!’
승희는 아찔해졌다. 물론 이쪽의 전력도 현암과 준후가 빠졌 다고는 해도 여섯 사람이나 되니까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들까지 합해 오십 명이 넘는 능력자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이 공원은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그런 승희의 기분을 느꼈는지 성난큰곰이 넌지시 말했다.
이들 모두가 같은 집단은 아닐 것이다. 만약 이들이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해 있다면 어느 누구도 경솔하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 하니까. 더군다나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싸움을 벌이 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상황을 봐가면 서 대처하면 된다.
그 말을 듣자 승희는 약간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두근거리 는 가슴은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 성난큰곰이 다시 말 했다.
나와 신부님은 잘 숨어 있다. 여기 온 자들은 모두 나름대로 정체를 감추려고 위장했지만, 우리가 가장 깊숙이 숨어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니 너무 걱정 말고 주위를 경계하라.
‘다른 사람들에게는요?’
내가 모두 전하겠다. 다들 그리 멀리 있지 않으니, 내가 마음속의 음 성으로 전달할 수 있다.
성난큰곰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승희는 다시 불안해졌다. 어 제 황 교수가 도착한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으니 아무리 길게 잡 아도 스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여자가 아라와 준호를 잡아간 것은 기껏해야 스무 시간 전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면 못 올 것은 없겠지만, 어떻게 이토록 빨리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능력자들은 서서히 늘어나 이제는 거의 칠십명에 이르렀다. 시간은 훌쩍 지나 여섯 시가 되었다. 이런 추세 로 나가다가는 능력자들이 백 명 넘게 모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 였다. 정말로 아찔한 일이었다.
일곱 시가 되자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놀이동산 방송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으 니 질서 있게 출구로 나가 달라는 말이었지만, 사람들은 별로 신 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놀이동산 측에서도 다급해졌는 지 벌어진 상황을 그대로를 방송했다.
“손님들께 알립니다. 손님들께 알립니다. 조금 전, 동물원에서 사자 두 마리가 우리를 넘어 놀이동산 쪽으로 탈출했습니다! 지 금 조련사와 경찰이 출동중입니다만, 사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르 니 손님 여러분들께서는…………….”
방송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무서운 혼란 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놀이동산 손님은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 들이었다. 그런데 사자가 탈출했다는 소리를 듣자 모든 사람이 경악하여 어서 빨리 나가려고 출입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밟고 밟히는 아수라장이 연출되었을지 모르지만, 공원의 직원들이 총출동해, 사자들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는 함부로 오지 않을 것이니 질서 있게 퇴장해 달라고 호소했다. 사자가 사람에게 덤비지는 않을 테지만, 마취총을 발사해 사자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피해 달라는 방송 역시 계속 흘러나왔다.
그래도 사람들은 무서운 속도로 밀려들었고, 직원들이 정리에 안간힘을 썼는데도 몇몇 사람들이 다친 것 같았다. 다행히 큰 사 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친 사람들도 사자가 무서웠던 지 모조리 도망쳐 나가 공원은 순식간에 텅텅 비어 버렸다.
직원들도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서둘러 대강 확인한 다음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사자가 돌아다니는 곳에 어슬렁거릴 사 람은 없을 것이고, 직원들이라고 사자가 두렵지 않을 까닭이 없 을 테니까 말이다.
시각은 일곱 시 사십 분을 조금 넘기고 있었다.
물론 승희는 나가지 않고 구석진 곳에 숨어 있었는데, 근처에 숨어 있던 바이올렛이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누군지 정말 기막힌 솜씨로군요. 이거…………… 아무래도 거래가 힘들어지겠는데요?”
“무슨 소리죠?”
“이렇게 공교롭게 사자가 탈출할 수 있겠어요? 분명 누군가가 손을 쓴 거예요.”
“고의로 사자를 탈출시켰단 말인가요?”
“틀림없을 거예요.”
“그 여자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 여자가 했을 리 없어요. 그 여자는 아무래도 혼잡한 곳에서 재빨리 점토판을 교환해 가려고 한 것 같은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죠.”
“그럼 그자들은 왜 사람들을 모두 빠져나가게 한 걸까요?”
“아마도 싸울 생각인지도…………….”
승희는 바이올렛의 말을 듣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럼 ・・・・・・ 전쟁이군요…….”
그때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 다. 동양인도 많았고 서양인도 많았으며, 아랍이나 인도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나 흑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아주 늙은 중국인 노인부터 열두서너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소녀까지 사람 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 사자 따위를 겁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 는 듯했다. 모두가 나름대로 능력자들이었고, 또한 서로를 조금 씩 알아보는 것도 같았다.
아무튼 그 숫자는 도합 칠십 명이 넘었으며, 이렇게 많은 능력 자들이 한데 모인 것은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단 한 가지 문 제가 되는 점은 그들 모두가 경계심과 살기에 가득 차 있다는 것 이었다.
“사자를 풀어 놓은 게 누구냐?”
갑자기 큰 덩치의 외국인이 영어로 소리를 쳤다. 그는 북구 쪽 악센트가 강했지만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한 것 같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잘한짓이지.”
이번에는 중국 노인이 쪼글쪼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모두 다 눈치채고 있는 판인데, 그렇게 몸들을 사릴 필요는 없지 않겠소? 다들 나와보시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사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뭔가 목적을 지닌 사람들 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굳이 몸을 감추려 애쓸 필요가 없을지 도 몰랐다. 그때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조련사와 마취 총을 든 경찰들은 이제 신경 쓸 것 없소. 자, 우리 대화를 해 봅시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소리쳤다.
“기자들도 모두 잠들었소. 조용히 이야기를 해 보실까?”
누군가가 손을 써서 사람들을 내보내기 위해 사자를 풀어 놓 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자를 잡기 위해 안으로 들어오려는 조련 사 등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안은 외부인들에게는 완전한 공백 구역이 된 셈이었다.
그때 연인으로 보이는 외국인 커플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렇다면 우리, 평화적으로 해결해 보죠! 정말정말 많이 모였군요………. 어쩌면 이렇게………….”
“이건 음모요!”
별안간 아주 칼칼하고 대단히 서툰 영어로 키가 장대 같은 흑 인 한 명이 소리쳤다. 그는 정말로, 어떻게 그럴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촌스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평생 옷을 입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줄이야! 이건 우리 모두를 끌어들 인 함정이라 할 수 있소!”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소리를 질렀다.
“함정이면 어떻단 말야! 난 그 ‘물건’을 찾아야겠어! 순순히 손 떼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그에 이어서 중국 노인이 쐐기를 박듯이 소리쳤다.
“모습을 감춘 자는 아마도 흑심을 품은 자겠지! 좋소! 모습을 감추었다가 발견되면 내 무조건 그자부터 공격하겠소! 다른 사 람들도 그러길 바라오! 방금 소리 지른 사람, 그 말에 책임을 지 시오!”
“찾을 수 있다면 찾아보………………”
목소리가 다시 울리다가 갑자기 으악 하는 비명 소리가 짧게, 아주 짧게 들려왔다. 이윽고 그쪽이 잠잠해졌다.
중국 노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이미 경고했소.”
그때 한 사람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는 체구가 큰 유럽인이었는데, 연희와 아라, 준호와 수아 중 한 사람만 있었어도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칼 하겐이었다.
“용화교에서는 사람을 함부로 죽여도 된다고 가르칩니까?”
칼 하겐은 아직 붕대며 반창고로 전신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그가 확실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변장을 했기 때문에 하겐의 그 모습 역시 다친 것이 아니라 변장한 것일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칼 하겐은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용병처럼 일하는 마법 사로, 아는 사람은 적지만 그쪽 계열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 히는 강자였다.
“흥! 당신 같은 용병 마법사가 감히 우리 교를 입에 올리다니!”
중국 노인의 말에 하겐이 곧바로 되받아쳤다.
“나는 할 말은 해야겠소! 여기 있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서 로 모를 테고, 적대적인 파벌에 속해 있을 수도 있소. 그러나 지 금 여기서 싸움을 벌인다면 누가 죽고 다칠지 알 수 없는 일일뿐 더러, 공연히 종파들 간에 원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 행동은 자제합시다!”
하지만 하겐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중국 노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칼키파! 타미륵(彌勒) 따위를 숭배하는 놈들이 …………!”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여 기 모인 자들은 서로 다른 종파나 집단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았 다. 더구나 그 종파들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고 있었다. 용화교와 칼키파가 대표적이었으며, 그들은 성당 기사단이나 장 미 십자회 등의 기독교계 집단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어새신 같은 이들은 아랍권이었고, 많은 사람들 을 암살해 왔으므로 역시 많은 파벌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적이 었다. 그것은 마녀 협회나 검은 편지 결사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불더미 속에 화약을 쌓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당한 위험한 일이었다. 하겐을 비 롯해 몇 명의 평화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자 각자는 남을 해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무기 를 휘두르고 주술을 사용할 기세였다.
다행히 아직까지 총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총기가 없어서라기 보다. 이 상황에서 총기를 휘둘렀다가는 당장에 모든 사람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위기가 몹시 험악해졌지만 싸우는 사람들조차 자 신이 원한을 가진 자만을 공격할 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 아가지 않도록 애썼다. 그렇지 않았으면 대혼전이 벌어져 단번 에 절반 정도는 죽음을 당했으리라.
한편, 승희와 바이올렛은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 그리고 로파무드에게 바짝 달라붙어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아직 그들 에게 달려드는 자들은 없었지만, 상황은 몹시 심각했다.
하겐은 상황을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몇 사람을 불렀다. 퇴마사 일행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문제가 되는 종파나 집단에 속하지 않는 일종의 프리랜서로, 하 겐이 진작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 같았다. 그 사람들과 한데 모 이자하겐이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가 힘을 모아 공격하겠소!”
“네가 무슨 참견이냐!”
“나도 죽기 싫기 때문이오! 이대로 우리가 싸운다면, 우리 모 두 무사할 수 없소!”
승희는 하겐을 보며, 저 사람은 그래도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 이구나 생각하면서 옆을 보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죠?”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 그리고 바이올렛은 하겐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바이올렛이 승희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하겐이라고 해요. 프리랜서 주술사라 할 수 있는데 대단 한 사람이죠. 꼭 좋은 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아요. 사람됨은 진지하고 좋다고 하던……”
그 말을 듣고 난 후 승희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 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성난큰곰과 박 신부는 어째서 아직도 찍 소리 없이 잠잠하게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하겐이 다시 고함을 쳤다.
“우리 모두는 지금 속고 있는 거요! 어떻게 우리 같은 사람들 이 모두 한곳에 모일 수 있겠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심 한우연 아니오?”
“그래서 어쨌단 말이오?”
“우리는 모두 다른 파에 속해 있으며, 몇몇 사람들은 서로 상 당한 원한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싸움을 벌이 기 시작한다면 승자도 패자도 없고, 모조리 떼죽음을 당할 뿐이 오! 여러분,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당신들은 대체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소?”
“그걸 알아서 뭐하느냐?”
누군가가 소리쳤지만 하겐은 그에 지지 않고 크게 외쳤다.
“혹시 당신들은, 검은 편지를 받은 것 아니오?”
그 말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하겐이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검은 편지 결사가 음모를 꾸민 것 같군요. 당신들의 정체를 나는 대강 압니다. 나 같은 일을 하다 보면 견문이 넓어지죠. 장미 십자회, 용화교, 칼키파, 어새신, 마녀 협회에다 이단 심판소분들까지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얻 은 정보는 비밀스러울 텐데, 어떻게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모였 는가 말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깔깔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누비면서 다가왔다.
승희와 이반 교수 등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바로 어제 그들과 겨루었던 붉은 머리의 여자였다. 이렇게 많은 능력자들이 모여 있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너무나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걸어왔기 때문에 오 히려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똑바로 승희 앞까지 걸어와서는 입을 열었다.
“약속 시간이죠?”
“당신・・・・・・ 당신은……..”
승희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이반 교수가 무섭게 안색을 찡그리면서 나섰다.
“당신이 이런 일을 벌인 건가?”
“그랬다면 어쩔래요?”
그 순간 윌리엄스 신부가 무섭게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윌리 엄스 신부는 흡혈귀의 힘을 최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여자는 예 상외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윌리엄스 신부에게 손목을 잡혔다.
곧바로 바이올렛은 아주 조그마한 권총을 꺼내 여자를 겨누었 다. 그 권총은 바이올렛이 틀어 올린 머리칼 속에 감쪽같이 숨길 정도로 상당히 작았다. 게다가 그녀가 그 총을 꺼내는 것을 아무 도 보지 못했다.
이반 교수는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배낭을 눌렀고, 곧바로 배 낭에서 은빛 총구가 튀어나와 여자를 겨누었다. 이 모든 일은 단 이 초도 걸리지 않고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반 교수는 여자를 보고 위압감 있는 목소리로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죽어도 이 총은 자동 조준되어 발사되오. 당신이 아무리 재빨라도 분당 팔백 발의 총탄을 모두 피하지는 못할 거요.”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저항도 하지 않았고,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 다만 손목이 아픈 듯 인상을 약간 찌푸릴 뿐이었다.
“놀라운 물건이군요. 과연 스웨덴의 흡혈귀 사냥꾼 이반 교수 의 이름에 어울리는군요.”
여자는 이미 무서울 정도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윌리엄스 신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성공회에 흡혈귀의 힘을 사용하는 신부가 있다는 말은 들었 지만……. 정말이었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반 교수와 함께 행동 하는지 모르겠네요.”
“수다 떠는 건 질색이니, 잔소리 말고 애들을 내놔.”
우습게도 수다와 가장 친숙한 바이올렛이 정색을 하며 여자에 게 눈을 부라렸다. 그럴 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승희는 하마 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으르렁거리는 바이올렛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가 생글 생글 웃으며 이반 교수를 쳐다보았다.
“교수님이 죽으면 총이 자동으로 나간다고요? 그럼 나는 죽어 도 아무 일 없겠군요?”
“무슨 소리지?”
“잘 들어요. 내가 죽으면 아이들도 자동으로 죽습니다. 교수님 만기계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 말에 윌리엄스 신부를 비롯한 세 사람은 잠시 승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승희는 어쩔 도리가 없어 여자에게 물었다.
“애들을 어디다 두었지?”
“점토판은 어디 있나요? 세 개 모두 가져왔겠지요?”
그녀가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장내의 소란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능력자였고, 그 안 에는 투시력이나 천리안, 초인적인 청각을 지닌 사람들이 얼마 든지 있었다. 그들 모두는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을 노리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헌데 그 점토판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무 리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났다고 해도 여기에 더 관심을 기울일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 등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가 이 많은 사람들의 손에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정말 지독한 여자다………………
이반 교수는 이 여자를 당장 벌집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못 내 원망스러웠고, 윌리엄스 신부는 선량하기 그지없는 성직자 였음에도 이 순간에 살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여자를 죽이면 아이들이 위험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 바이올렛과 이반 교수 등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수십 명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교환하지 않겠다면 그만둬요. 아…………. 애들 시체를 또 어디다 갖다 버리나……………. 황산으로 녹여 버릴까?”
그 순간, 윌리엄스 신부가 뭔가 결심한 듯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여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서 애들이 있는 곳을 말해!”
윌리엄스의 험악한 말투에 여자가 웃으면서 받았다.
“내가 직접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그러면서 여자는 슬쩍 싼 것을 풀고 점토판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승희 일행은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든 자들이 목숨을 걸고 점토판을 노리는 이 상황에서 점토판을 꺼내어 일부러 확인까지 하다니. 더구나 이 여자가 죽 으면 아이들도 위험하다고 했으니, 지금부터 이 여자를 공격하 는 자들을 자신들이 막아내야 할 처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수십 명의 능력자들을 뿌리치고 과연 이 여자를 보호 하면서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때 이반 교수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곧이어 배낭의 손잡이를 철컥거리자 배낭에서는 아까의 총구와 는 다른 총구가 삐져나왔고, 배낭의 손잡이 부분에서는 짤막하 고 두꺼운 기이한 형태의 총이 빠져나왔다. 그것을 손에 들고 이 반 교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이오. 그러나 내 총에 대해 말해 두고 싶소. 내 손에 든 것은 벨지움콘바인으로, 위쪽 총열 한 방 이면 코끼리 세 마리를 쓰러뜨릴 수 있는 산탄이 나가고, 아래쪽 총열에는 장갑차도 관통하는 APDS탄이 장착되어 있소.
배낭 왼쪽의 총은 분당 팔백 발이 발사되는 발칸포이고, 오른 쪽은 움직이는 목표는 무조건 쏘아 대는 분당 육백 발의 엘리 기관포요. 특히 오른쪽의 총은 내가 목숨을 잃는 순간부터 자동 작동되며, 내 배낭에는 천팔백 발의 탄환이 들어 있소. 그리고 니트로글리세린도 일 리터가량 들어 있는데, 내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선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이반 교수는 재빨리 말한 다음,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사숙녀 여러분, 긴 이야기 들어 주셔서 고맙소. 내 앞을 막 고 싶은 분들께 참고가 될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이반 교수가 어떻게 그처럼 강력한 무기를 총기 휴대가 허용되지 않는 한국에 들여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반 교수는 모든 화기를 아주 작은 조각으로 분해하여 사방에 흩어 들여왔 는데, 가령 어떤 부품은 가방 손잡이에, 어떤 부품은 노트북 컴 퓨터의 하드디스크 옆에 붙여서 들여온 것이었다.
그리고 화약은 공항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이반 교수는 그 자 체로는 무해한 화약의 원재료를 식품 병이나 밀폐 용기에 담아 수송한 다음 다시 합성했다.
그 때문에 이반 교수는 자신이 갈 나라마다 이러한 짐들을 한 보따리씩 미리 소포로 부쳐 놓아 물품 보관소에 두었다가, 필요 하면 나중에 찾아 쓰는 방법을 택하곤 했다. 지금 이곳에 지니고 온 무기들은 여태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반 교수가 소유 한 총기 회사의 모든 기술을 집약시킨 최고의 걸작품들이었다. 사람들은 이 무시무시한 화기의 설명을 듣자 그만 질려 버린 듯했다. 제아무리 능력자라 해도 총알을 막아 낼 재주는 없었다.
그래도 권총이라면 조준되는 것을 눈썰미로라도 피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한 기관총이라면 막아 낼 자신이 없었던 것 이다. 특히 이반 교수가 죽은 다음에라도 자동 발사된다는 총에 이르러서는 대처할 방법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순간 뭔가 강렬한 느 낌이 드는 것 같아 승희는 급히 눈을 감고 힘을 썼다.
돌연 이반 교수의 몸이 휘청했고 이반 교수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재빨리 바이올렛이 그를 부축했다.
그때 사람들의 무리 중 저만치 떨어져 있는 세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눈과 머리 등을 부둥켜 잡고 넘어져 버렸다. 한 사람은 어린 소녀였고, 한 사람은 나이 든 할머니였으며, 또 한 사람은 아주 순박하게 생긴 농사꾼 타입의 남자였다.
그들이 쓰러지자 승희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 세 사람 은 모두 염력이나 저주 같은 것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자들이라 몰래 이반 교수를 해치려 했다.
승희는 재빨리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힘이 오는 방향을 감지해 세 사람을 염력으로 쓰러뜨린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도 능력자라서 염력이 통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귀신도 모 르게 염력을 쓰는 사이에 다른 힘이 뚫고 들어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승희의 힘이 파고들 수 있었다.
“암암리에 염력 같은 걸 쓰면 저 꼴이 될 줄 알아!”
승희가 매섭게 외치자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수 사건과 키건의 일로 승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주술 사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해져 있었다.
승희와 이반 교수가 기선을 제압하는 동안, 윌리엄스 신부는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여자가 수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살폈고, 바이올렛도 여자의 머리에서 총구를 떼지 않았다. 이대 로라면 능력자들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 여자를 죽여!”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승희와 이 반 교수는 누군가가 총을 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참이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순간 와당탕 소리가 나면서 총을 든 두 사람이 들고 있던 총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무서운 힘으로 집어 던진 것이다. 깜짝 놀라서 보니 성 난큰곰이었다.
성난큰곰은 좀 안된 일이기는 하지만, 동물 인형 옷을 입은 마스코트맨을 기절시키고 동물 인형 옷을 걸쳤다. 조금 작아 보 이기는 했어도 이것 외에는 그의 큰 덩치를 자연스럽게 숨길 방 도가 없었다. 허나 그때까지 마스코트 맨의 행동이 너무 어색하 고 무뚝뚝해서 승희는 몰라도 다른 사람의 시선은 피할 수가 없 었다.
성난큰곰은 혼란의 순간에 교묘하게 목을 움츠리고 인형의 머 리를 떼어낸 채 엎어져 있어, 누가 보아도 인형 안에 든 사람이 나가면서 내팽개친 인형으로 보게끔 위장한 것이다. 첫 번째 위 장은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어려웠으나 두 번째 위장은 인디 언의 전설을 참고한 성난큰곰의 기지에 의한 것이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총을 쏘려고 하자 성난큰곰은 더 이상 주저 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 아슬아슬하게 두 남자를 날려 버린 것 이었다. 총알은 허공을 스치고 빗나갔으나 그 순간, 모든 능력자 들이 긴장해 다시 와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의 능력은 대단했고 심지도 굳센 자들이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는 누가 자신을 해치려는지 알 수 없어 전 전긍긍하게 마련이라 조금의 불씨만 당겨져도 금방 싸움이 벌어 지는 것이었다.
다시 싸움이 일어나자 하겐 일행과 승희 일행은 각각 싸움을 진정시켜 보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태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 지 않았다.
그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던 로파무드가 난데없이 나타 났다. 그녀는 첼로 케이스를 버리고 간디바를 들고 있었는데, 대 뜸 활을 높이 허공에 치켜 올리더니 활줄을 세 번 딩딩딩 겼 다. 그 활 소리는 마치 수정 잔을 두드리는 것처럼 무척이나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사방으로 울려 퍼졌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때문에 막 싸움을 하려던 자들조차 놀라면서 무의식중에 로파무드를 쳐다보았다. 로파무드는 가냘프지만 큰 소리로 외 쳤다.
“만약 모두가 싸우고 싸워서 다 죽기를 바란다면 내가 모두 다 죽여 주겠다!”
그러면서 로파무드는 허공을 향해 빈 활을 당겼다. 순간 화살 이 없음에도 그곳에서는 보라색의 빛줄기가 저절로 맺혀 갔는 데, 거기서 쏘아져 나오는 기세가 너무나도 대단했다. 주변에 있 는 능력자들이 상당한 사람들이었음에도, 그들은 그 기세에 눌 려 뒤로 황급히 물러나면서 몸을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브라흐마스트라! 브라흐마스트라!”
특히 인도인 계열의 주술사들은 아예 안색까지 변하면서 체면 불고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간디바다! 저 활은 간디바다! 그렇다면 저것은 정말 브라흐 마스트라일 것이다!”
그때 칼키파에서 온 것 같은, 체구가 큰 인도 노인이 소리쳤다.
* 브라흐마의 힘을 담은 아스트라, 아스트라 중에서도 최강의 위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브라흐마스트라를 쓴 자는 즉시 힘이 다해 죽는다! 너는 그걸 모르느냐!”
이에 지지 않고 로파무드가 맞받았다.
“어차피 너희 모두와 싸울 힘이 없으니 다 같이 죽으면 그만이다!”
승희나 이반 교수 등은 ‘브라흐마스트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 했지만, 그 말에 소름이 쫙 끼쳤다. 브라흐마스트라는 아스트라 중에서도 최고의 능력을 지닌 것으로, 삼라만상을 파괴할 수 있 다는 전설을 지닌 아스트라였다. 사실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것 은 불가능하지만 주술 중에서 최고의 위력을 발하는 수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하바라타』의 수많은 전투 중에도 영웅들은 브라흐 마스트라만은 거의 쓰지 않았고, 브라흐마스트라의 주문을 시작 하는 것만으로 전쟁에서 항복을 받는 예까지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로파무드가 과거의 영웅들처럼 그렇게 강대한 주술을 쓸 수 없다고 여겼지만, 그녀의 활은 인도 최고의 주술적 무기인 간디바였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두를 몰살시키는 정 도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로드는 그 술법을 활에 건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듯, 몸을 떨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칼기파의 노인이 다시 외쳤다.
“저 여자는 저걸 못 쏴! 쏘면 저들 편까지 몰살이다! 절대로 쏘지 못해!”
그 말에 로파무드는 무척이나 분노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이 를 갈았다. 사실 로파무드는 화살을 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을 죽음의 구덩이로 몰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능력자들이 로드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로파무드 는 이를 악물면서 정말 화살을 당길 것처럼 자세를 취했고 활에 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더더욱 강해졌지만, 그들은 설마 하는 생 각으로 점점 다가왔다.
성난큰곰이 강신술로 몸을 크게 부풀리며 위협하듯 그 앞을 막으려 했지만 상대가 너무도 많았다.
그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승희와 이반 교수가 있는 쪽 으로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날아든 것이다. 윌리엄 스 신부가 흡혈귀의 힘을 이용해 한 명을 쳐냈고, 승희는 염력을 사용하여 두 명을 나뒹굴게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바이올렛을 후려쳐 쓰러지게 만들었으며, 다른 한 명은 이반 교수의 배낭을 통째로 뽑아내고 말았다. 그 사람은 용화교의 인물 같았는데, 거의 전설에나 나오던 경공 수 법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실로 무술의 달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에게서 점토판을 빼앗으려 했는 데, 놀랍게도 여자는 웃으면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점토판을 내주었다. 점토판을 쥔 남자는 공중제비를 연속 세 번이나 넘으면서 사람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려 했지만, 어디선가 날아 온 줄 달린 작은 갈고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남자가 중심을 잃은 사이 그의 몸에 두 개의 단검과 세대의 독침, 그리고 자두만 한 철환이 한 대 박히면서 그 즉시 남자의 숨을 끊어 버렸다. 즉사한 남자의 손에서 점토판이 떨어지는 순 간, 세 명의 사람들이 몸을 솟구쳐 그것을 잡으려 했다.
세 명 중 한 명은 칼로, 한 사람은 주먹으로, 한 사람은 손바닥 으로 서로 상대를 쳐 갔는데 먼저 주먹을 휘두른 사람이 손바닥 에 맞았고, 칼을 찌른 사람은 손바닥을 휘두른 사람의 어깨를 찔 렀다. 그러나 손바닥을 쓰는 사람은 상처를 입었어도 전혀 꿈쩍 하지 않고 칼을 든 사람을 후려쳐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 대단히 용맹스러운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쇠 채찍과 아주 날카롭고 종잇장같이 가는 칼에 의해 하반신이 토막 나 즉사하고 말았다.
점토판은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졌지만 점토판이 가는 곳마다 피가 튀고 이십 초도 지나지 않는 사이에 여섯 사람이 참혹하게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어쩌면 저, 저럴 수가.”
너무나도 참혹한 광경에 승희 일행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 다. 그때 로파무드가 피를 울컥 토하며 땅에 쓰러졌다. 그녀는 브라흐마스트라의 기운을 쏘아 내지 못하고 흩어 버려 심한 내 상을 입은 것이었다.
성난큰곰은 황급히 그녀를 들쳐 업고 승희 쪽으로 달려왔다. 그때는 아무도 로파무드나 승희 그리고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하겐마저 점토판을 향해 몸을 날리 고 있었으니까.
승희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어서 애들을 내놔!”
여자가 웃으며 승희에게 말했다.
“알려 주면 너희가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염려 마. 애 들은 지금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점토판은 지팡이를 든 한 노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번 개같은 속도로 사람들을 피해 놀이동산 중앙에 서 있는 어느 입 간판 뒤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 순간, 별안간 입간판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그 안에서 강대한 빛줄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노인은 그 빛줄기에 붙잡힌 것처럼 되어 허공중에 멈춘 채 꼼 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박 신부가 서서히 몸을 움 직여 노인의 손에 들린 점토판을 손에 잡았다.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제일 변장을 잘한 사람은 박 신부 였다. 박 신부는 가장 의외의 장소에 가장 의외의 변장을 하고 있었다. 박 신부는 간판으로 변했던 것이다. 놀이동산의 중간에는 동물원에 들어온 새 동물들을 소개하는 커다란 입간판이 있 는데,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간판 안이 무척 좁아 체구가 큰 박 신부는 몸이 끼여 꼼짝도 못할 정도였지만, 그곳에서 꼬박 열 시간을 서 있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상황을 기다렸다.
만약 박 신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낌새를 풍겼다면 날고 기는 능력자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지만, 그들은 물론이 고승희조차 전혀 감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실로 상상을 초월하 는 인내력이었다.
노인을 쫓아 달려오던 사람들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박 신부 를 향해 무기들을 찔러 갔다. 네 자루의 칼과 무엇인지 설명하기 도 힘든 기괴한 무기를 포함해 일곱 개나 되는 무기가 박 신부를 향했다.
승희는 미처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으며, 이반 교수는 기이한 소리를 질렀고, 윌리엄스 신부는 그만 다리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 순간, 박 신부가 눈을 감자 이전의 연녹색보다 훨씬 연한 빛의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이전보다 훨씬 빛이 약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연한 오라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오라 안에 들어가자 모든 무기들의 속도가 눈에 띌 정도로 느려지면서 궤도가 휘어져 박 신부의 몸을 맞 히지 못하고 빗나가 버렸다. 박 신부를 공격한 일곱 사람들은 아 주 강한 능력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합공을 이렇게 간 단히 막아낼 사람이 있을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터라 모 든 사람은 덜컥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어서 오라의 반탄력 때문에 무기를 휘둘렀던 일곱 사람의 몸이 모두 허공에 붕 뜨더니 뒤로 나가떨어졌다. 곧이어 박 신부 는 눈을 번쩍 뜨면서 커다랗게 소리쳤다.
“더 이상의 살생은 하지 마시오! 그리고 잘 들으시오. 나는 이 제 음모를 모두 파악했소!”
그러면서 박 신부는 힘을 주어 손에 들고 있던 점토판을 산산 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그의 손에는 승희에게 얻었던 세크메트 의 눈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