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2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5 : 포위망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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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5권 12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5 : 포위망 속에서


포위망 속에서

“현암군,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사적인 문제긴 하네만… “

박신부가 조용히 현암에게 말을 건네자 현암은 말없이 고개 를 끄덕이며 물었다.

“승희… 이야깁니까?”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앞만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승 희와 준후는 비행기 표를 알아보기 위해 밤인데도 시내와 공항 등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박 신부와 현암은 다쳐서 움직이기 힘들고 남의 눈을 끌 수 있기에 둘을 보낸 것이지만, 지금 박 신부의 말투를 보니 이때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린 듯했다.

“그렇다네. 그리고 자네 문제이기도 하고 말야.”

박신부가 말하자 현암은 어깨를 약간 들썩이며 월향검을 꺼 내 손에 꼭 쥐었다.

“승희는 내 딸과 같은 아이일세. 그리고 우리의 뜻을 끝까지 따라주는 고마운 동료이기도 하네. 그런 아이를 너무 지치게 만 드는 것도 좋지 않은 일 아니겠나?”

그러자 현암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가 대답했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감 없는 현암군이라? 허허…… 원참.”

박신부가 악의 없이 웃자 현암도 따라서 맥없는 소리로 허허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그래도 정말 자신 없습니다. 정말로…….”

돌연 현암의 말문이 터졌다.

“승희의 마음, 저도 잘 압니다. 저는 지금 승희를 괴롭히고 있 는 거나 다름없죠. 그러나 승희의 마음을 받아도 되는지 아닌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네가 승희에 대해 아무 마음이 없었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걸세.”

“아뇨, 좀 다릅니다. 하하. 솔직히 …………… 저는 처음부터 승희에게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현암은 맥없이 웃으며 말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원래 늑대였습니다. 모르셨어요?”

“몰랐는걸? 허허.”

박신부가 웃자 현암도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신부님・・・・・・ . 저 고해성사를 해야겠습니다.”

“나는 이제 정식 신부가 아닐세.”

“하지만 저도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세례 받은 사람만 고해 성사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면 가짜 신부에게 가짜 신자가 고해성사를 한다는 건가? 주여, 용서하소서. 허허.”

“그러면 가짜 신부님께 가짜 신자가 가짜 고해성사를 한다고 해두죠. 고해성사란 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면서요? 그 래서 하려는 거니 흉내라도 내 주십쇼. 뭐 기도 같은 건 하실 필 요없구요.”

박 신부와 현암은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한편으 로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둘 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싸움꾼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굳이 아무한테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다 이야기하죠, 뭐. 제가 닦은 공력은 도혜선사님께 받은 겁니다. 아시죠?”

“알고 있네.”

“도혜 선사님은 물론 스님이셨고요. 그렇죠?”

“그렇네. 자네는 가짜 고해를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퀴즈를 내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좌우간 그 때문에 제가 받은 공력은 일종의 동자공(功)*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자공? 그게 뭔가?”

“동자공은 순수한 양기로 상승되는 공력입니다. 아주 정순하 고 강하지만…………… 여자를 접하면 깨어지는 공력입니다. 성행위는 물론이고, 신체적인 애정 접촉조차도 위험합니다.” 

박신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정말인가?”

“아뇨.”

“무슨소리인가?”


* 아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평생 정욕을 참은 자는 그 성적인 에너지를 한곳 에 모아 보통의 공력을 쌓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힘을 낼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 을 동자공이라 부른다. 단, 이 동자공을 연마한 사람이 여자와 관계를 하거나 정 신적, 육체적으로 강한 접촉을 하면 공력은 깨어져 보통의 힘없는 사람으로 돌아 가게 된다. 물론 전설로만 전해지는 가상의 술수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 것만은 틀 림없습니다. 저는 모험을 할 수 없었어요. 공력이 없으면, 저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힘도 없죠. 더구나 저를 위 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선사님의 유산마저 제가 없애는 꼴이 되 고 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위험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저도…………… 저도 건장한 남자입니다. 여자에 대 한 생각이 없을 수가 없죠. 더구나………… 미칠 지경이었단 말입니 다. 승희 같은 여자가 바로 옆에 항상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아 까 고백했지만 저는 실상은 여자에 대한 흥미도 남 못지않게 많았습니다. 그러니 억제해야만 했죠. 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잊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승희는…………… 처음부터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 았습니까? 물론 제 마음을 함부로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만 에 하나라도 그런 마음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 남편이 되어 주거나 애인이 되어 줄 수 없으니까요. 속마음으로 는 간절하게 바랐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마음까지 굳 게 변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겁니다.”

현암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그러나 박 신부는 오히 려 점점 환하고 자애로우면서도 어딘가는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는 딱딱하게 굳어져 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달 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승희의 마음, 저도 압니다. 아주 우습게도 제가 굳어 갈수록 승희는 점점 더 저를 따르게 되었지 요. 신부님・・・・・・ . 그건 아주 즐거운 고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헤 어 나갈 길은 없었습니다.”

현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박 신부는 조용히 현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월향에 대해서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신부님은 월향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지요?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월향에 대한 마음 도 저는 진정입니다. 물론 월향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영혼이었 으며, 만나자마자 칼에 틀어박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월향이야말로 제가 접할 수 있는 단 하나 의 여자라고 봤습니다. 월향에게는 마음만이 중요할 뿐, 남편이 나 애인이 되어 주지 않아도 좋았고, 단지 느낌으로 통하고, 서 로 접하고 있는 그 느낌만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리고 월향과 저 는 처음부터 마음을 열어 놓고 있어야 했기에 둘 사이에 어떤 비 밀도 없습니다. 맨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 우 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것은 자네가 이야기한 적이 없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다 압니다. 월향과는 수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요. 그녀는…………… 월향은 저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도 월향을 좋아하고요.”

“그건 잘 알고 있네.”

“그래서 ………… 저는 더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 승희의 마음 을 알고,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연애 감정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월향의 마음도 잘 알며, 소중하지만 그것이 누이나 어머니 같은 감정인지, 동료 의 식인지, 아니면 연애 감정인지 고민하면 할수록 혼동되고 헷갈 리기만 합니다. 저같이 천성이 늑대 같은 녀석에게는 플라토닉 러브 같은 말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거겠죠.”

박신부는 아무 말하지 않고 현암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도는 더운 나라였지만 새벽바람은 그래도 썰렁했다. 휙 하고 바람이 일어 땅을 쓸고 지나가는 것을 보던 현암이 이윽고 고개를 저으 며 말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을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러면 안 되기 때문에 너무 억제하고, 너무나도 스스로를 속이고 마음을 가두어 두었어요. 이제는 저마저도 모르겠습니다.” 현암은 말을 이어 가다가 괴로운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차라리 승희가 백호 씨를 좋아했더라면……………”

“그런 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닐세.”

박신부가 조용히 말하자 현암은 괴로운 듯 벤치를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신음하듯 내뱉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진정으로 누군가 를 좋아하는데 정작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원하고………… 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런 악순환이 왜 이리도 흔하고, 왜 자꾸 반복되는 걸까요?”

“세상이란 그런 것일세. 낳고 자라고 죽고……………. 좋아하고 미 워하고 증오하고 ・・・・・・ .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모든 것이 공허해지지 않겠나…?”

박 신부도 천천히 말하다가 안경을 닦았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구먼.”

“글쎄요…………. 틀리면 어떻게 하죠?”

“자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대로 하게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진정으로 바라지 않고는 절대 옳게 행동할 수 없다네. 반대로, 진정으로 바라는 대로 하면 절대 틀리지 않을 걸세. 적어도 자네 에게는 말일세.”

“그래야겠죠. 이제는 시간도 별로 없으니………… 마지막까지 찜 찜하게 있고 싶지는 않아요.”

“글쎄 ・・・・・・ “

박신부는 말끝을 흐리면서 계속 안경을 닦았다. 그러나 박신 부는 단순히 안경만 닦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닦고 있는 것 같았 다. 하지만 현암은 그쪽에 눈길을 주지 않고 먼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준후와 승희가 달려왔다.

“비행기표는 못 구했어요.”

승희가 먼저 약간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남미로 가는 비행 기 편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이틀 전에 출발했 기 때문에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승희는 몇 번을 갈아타고라 도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은 바람에 직 원들이 별로 없어서 자세히 알아볼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죠?”

준후가 풀이 죽은 듯 어깨를 늘어뜨리자 박 신부가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튼 공항으로 가 보자꾸나. 거기서 조금 더 찾아보는 수밖에.”

“돈 가진 건 있으세요?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려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승희가 묻자 박 신부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내 카드도 펑크 났다고요.”

승희가 안달하자 현암이 되받았다.

“정 안 되면 밀항이라도 해야지.”

“원참…….”

“좌우간 가보자.”

현암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준후가 현암을 부축하려 하자 박 신부가 준후를 불렀다.

“준후야, 네가 나 좀 부축해 주렴.”

준후는 아무 생각 없이 박 신부를 부축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승희가 현암 앞에 서게 되었다.

승희가 현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혼자 걸을 수 있지?”

“어…? 아니, 몹시 아픈데?”

“흠..”

승희는 한참 현암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현암의 팔을 잡고 일 으켜 세워 주었다. 박 신부와 준후는 걸음을 빨리하여 벌써 저만 치로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승희가 물었다.

“현암군, 신부님한테 무슨 부탁했어?”

“부탁?”

“이거 왜 이러는 거야? 할 말 있으면 당당하게 해. 그런 것도 해본 사람한테 부탁해야지, 신부님같이 순진한 분한테 부탁하 니깐 너무 속 보이잖아.”

현암이 좀 당황하여 어물쩍거리자 승희가 피식 웃으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현암의 웃옷 주머니를 툭 건드렸다.

“라이터 잘 가지고 있다며?”

“어……? 응…….”

“그럼 됐어.”

“승희야……. 이야기 좀 할까?”

승희는 웃으며 현암을 부축한다기보다는 다정하게 옆에 붙어 섰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서 가던 준후는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박 신부에게 물었다.

“택시라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박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 더 걷자꾸나.”

박 신부와 준후는 한참을 더 걸었다. 몇 대의 택시가 지나갔지 만 박 신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승희가 달려와서는 두 사람을 지나쳐 가려고 했 다. 박 신부와 준후가 깜짝 놀라면서 승희를 붙잡았다.

“누나, 왜…..?”

승희는 준후를 보고 힘없이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냐.”

“아니 ・・・・・・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라니깐. 어? 저기 택시 온다.”

승희가 얼른 눈물을 쓱쓱 닦고는 택시를 세웠다. 택시가 그들 옆에 서자 뒤에서 현암이 따라왔다. 그러자 승희는 아무 말 없이 앞좌석의 문을 열고 탄 다음 문을 쾅 닫았다. 준후는 박 신부를 부축하여 뒷좌석에 태우고 현암까지 태운 후 차에 올랐다.

공항까지 가는 동안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암 의 얼굴은 슬픈 것 같아 보였고 박 신부의 얼굴도 착잡해 보였으 며 앞좌석에 앉은 승희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아서 어떤 표 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준후는 도대체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인지 의아했지 만 분위기에 눌려 택시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말도 꺼 내지 못했다.


공항에 들어설 때에야 준후는 승희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는 이미 승희의 얼굴이 담담해진 후였다. 그러나 승희의 얼굴은 어 딘지 모르게 무표정해 보였다. 공항에 들어서서도 현암과 승희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 신부도 조용했다.

“저…………. 비행기 편을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신부님이나 승희 누나가 …………….”

“내가 하마.”

박신부가 다시 절뚝거리면서 준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준후 가 박 신부를 부축하려는데 승희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나섰다. 그러고는 박 신부를 부축하여 거의 끌다시피 저쪽으로 가 버 렸다.

준후는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듯한 느낌으로 현암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현암은 여전히 말없이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형, 혹시 승희 누나랑……………”

싸웠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저만치에서 들려온 승희의 비명 소리에 준후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현암이 무섭게 몸을 날렸고 준후도 빙그르르 몸을 회 전시키면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그쪽에는 각 양각색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 는지 구경하려고 둥글게 모여 벽을 둘러진 것처럼 보였다. 

“잠시만! 잠시만요!”

준후와 현암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중앙으로 가려고 빽빽이 모여 선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러다가 중앙에 도 착하는 순간, 현암과 준후는 땅바닥에 앉아 있는 박 신부와 승희 를 발견했다. 그리고 수십 자루의 총구도.

“어……?”

준후는 놀라 눈을 크게 떴고,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보니 그 수십 명의 사람들은 단순히 구경거리를 보려고 모여든 것이 아니었다. 중앙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총을 지니고 있었고, 그 수십 자루의 총구는 모두 승희와 박 신부를 향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구경꾼들이 아닌 한 패거리였 던 것이다.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 여자, 아이, 노인, 게다가 국적마저도 달라 보이는 이 모든 사람들이 전부 한패였 다니.

“대책이 없군.”

현암이 힘없이 말하며 손을 드는 순간, 준후는 몸을 빙글 돌리 면서 은신술을 써서 순간적으로 몸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 리고 현암의 팔을 잡고 몸무게를 싣자 현암은 공력을 쓰면서 준 후의 몸을 들어 올려 인간 벽 밖으로 던지려고 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고 총구를 승희와 박 신부에 게로 더욱 들이댔다. 그것을 보고 현암은 할 수 없이 다시 한번 긴 한숨을 쉬며 준후를 내려놓았고 준후도 은신술을 풀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현암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오십 명도 넘어 보이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원을 이룬 상태 그대로 움직 이기 시작했다. 현암과 준후는 총구에 밀려 승희와 박 신부와 함께 원의 중앙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 원이 다시 통째로 움직였 다. 그리고 네 사람에게는 각각 열 개 정도씩의 총구가 겨누어졌다.

“이거 꼼짝없이 잡혔군. 그자들이 공항을 지키리라 예측했어야 했는데…………….”

현암이 담담하게 말하자 말하지 말라는 듯 현암의 몸에 총구가 더 바짝 들이밀어졌다. 그러자 현암은 약 올리듯 영어로 말 했다.

“이렇게 둘러싸고 총을 일제히 쏴 대면 우리만 아니라 너희도 다 죽을걸?”

그들 중 뚱뚱하고 작달만한 늙은 노파가 현암에게 총을 들이 대며 받았다.

“한번 해 볼까?”

그 눈초리가 하도 무시무시해서 현암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 았다. 그때, 준후가 현암과 박 신부에게 재빨리 눈짓을 하면서 눈을 세 번 빠르게 깜박이며 발을 한 번 절룩거렸다. 세 발짝 후 라는 신호였다. 한 발짝을 옮기자 현암이 숨을 들이마셨고 두 발 짝을 옮겼을 때 박 신부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 발짝째 발이 떨어지는 순간 승희도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준후가 발을 쾅 세게 굴렀다. 그와 동시에 박 신부 의 몸에서 투명한 오라 막이 확 번져 나왔다. 그리 강한 기세는 아니었지만 오라 막 때문에 박 신부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 이 중심을 잃고 마구 흔들리는 통에 총구가 아무렇게 사방으로 빗겨나갔다.

또다시 준후가 발을 구르자 반질반질하게 연마된 땅바닥이 마치 물결처럼 파도를 치면서 사방으로 출렁거려 그들 주변의 수 십 명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재빨리 현암과 승희는 박 신부와 함께 땅에 엎드렸다. 요란한 총소리가 순식간에 공항 내부를 가득 메웠다. 어떤 것은 권총, 어떤 것은 엽총에 기관까지 있었으나 그 총구들의 대부분은 허공으로 쏘아졌다. 박 신부의 오라 막에 총구가 밀린데다가 준 후의 지동술로 넘어지면서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몇 발은 아슬아슬하게 현암과 박 신부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 나갔고 승희의 머리 바로 위로도 한 발이 지나갔지만 네 사람은 천만다행으로 총알을 맞지 않았다.

엎드린 상태에서 현암이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양팔을 활짝 옆으로 벌리며 펼쳐 내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현암 앞에 있는 자들의 다리를 걸어 우르르 넘어뜨렸다. 그 일격에 넘어진 자들만도 열댓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뒤쪽에 있던 자들 중 넘어지지 않은 자들이 급히 자세를 가다 듬으면서 총을 겨누려 했지만 그들 중 일곱 명이 비명을 지르면 서 총을 떨어뜨렸다. 승희가 염력으로 그들의 손목에 있는 신경 계통을 긁어 버린 까닭이었다.

다음 순간, 준후가 소매에서 부적 수십 장을 꺼내 허공에 흩뿌리자 그 부적들은 모두 저절로 불이 붙으며 살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달라붙었다. 그자들은 상당히 훈련을 받은 자들 같았지만 불덩어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눈앞으로 닥쳐드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쪽에 있던 자들 중 절반 정도는 반사적으로 총을 떨어뜨리 고 얼굴을 가리면서 부적 뭉치를 손으로 잡으려고 했고, 절반 정 도는 총을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가요!”

준후가 외치면서 엎드린 승희와 박 신부의 몸을 현암에게로 밀쳤다. 미끄러져 오는 박 신부의 옷자락을 왼손으로 잡은 현암 은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있는 힘껏 밀었다. 비록 부상을 입었고, 제대로 쉬지 못했어도 현암의 공력은 세 사람의 몸을 밀어내기 에는 충분했다.

세 사람의 몸은 마치 썰매를 탄 것처럼 땅바닥에 미끄러져 순 식간에 수십 미터를 나아갔다. 박 신부가 아직도 약하나마 오라 막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나 옷이 바닥에 별로 긁히지 않 아서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준후는 세 사람이 미끄러져 사라지자 기운이 나서 급히 몸을 일으키면서 양손을 딱딱 퉁겼다. 그때 이미 몇 사람은 다시 자세 를 가다듬고 준후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는데, 돌연 그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비명 소리와 함께 저만치로 내던져졌다.

준후의 부름을 받고 나타난 리매 두 마리가 한꺼번에 네 사람을 집어 던진 것이다. 반투명한 리매 두 마리가 무시무시한 소리로 포효하자 공항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공항 청사를 가득 메운 총소리에 놀라 다들 도망치는 데 정신 이 없어서 리매를 보지 못했지만, 퇴마사들을 잡으려는 자들은 그것을 보고 더더욱 놀라 얼굴에 불붙은 부적이 달라붙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턱대고 총을 쏘아 댔다. 리매들은 커다란 몸집으로 준후의 앞을 막아서서 그 총알을 모조리 몸으로 받아 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리매라 할지라도 총을 수십 방 맞고서는 버틸재간이 없었다. 리매들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 져 버렸지만 그때는 준후가 자세를 가다듬고 만부원진을 쓰기 위해 부적 뭉치를 있는 대로 꺼낸 다음이었다.

준후가 백여 장에 달하는 부적들을 한꺼번에 뿌리며 진언을 외우자 부적들에 불이 붙어 타들어 가면서 구형(形)의 진을 이 루더니 이내 빙글빙글 회전하는 거대한 공이 되어 추적자들을 덮쳐 갔다.

거대한 불공이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날아오자 추적자들은 공 포에 질려서 달아났다. 그사이 준후는 힐기보법을 써서 무시무 시한 속도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 현암과 박 신부를 따라잡았다. 준후가 낙지생술로 달려가던 상태에서 덜컥 제자리에 못 박혀 서면서 현암과 박 신부를 잡자 두 사람은 그 기세를 빌려 멈추어서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승희가 박 신부의 등에 부딪쳐 멈추자 현암은 손에 힘을 주어 승희를 번쩍 들어서 세워 놓았다.

“뛰어요!”

준후는 다시 딱딱 손을 튕기면서 외쳤다. 그러자 다시 두 마리 의 리매가 으르렁거리면서 허공에 나타나 추적자들을 향해 날 아가는 것이 보였다. 준후와 현암 등은 물론 그다음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볼 필요도 없었다.

재빨리 공항 밖으로 뛰어나오는 순간, 준후와 현암, 그리고 박 신부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공항 문 앞에 언제 나타났는지,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아녜스 수녀였 다. 그리고 뒤에는 무색 화상과 열여섯 명의 승려가 있었다. 게 다가 언제 모여들었는지 국적과 나이와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인 수십 명, 아니 근 백여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전혀 예기치 못한 인물들이 끼어 있었다. 퇴마 사 일행과도 구면인 백제암의 사천왕과 성곤, 근호, 무련 비구니 등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퇴마사 일행은 너무도 놀랐다.

“어……? 아니, 어째서…………….”

준후가 놀라 중얼거리자 현현일로와 이로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이놈! 장준후!”

그에 무색 화상도 한마디 거들었다.

“정말 당신들 대단하군. 칠십 명의 총을 든 성당 기사단원들을 순식간에 따돌리다니. 하지만 어차피 당신들은 도망칠 수 없소.” 현암은 입술을 깨물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현암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력을 쓴 탓에 기혈이 들끓고 있었고, 선혈을 토해 내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현암 자신은 언제 피를 토했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박 신부도 얼굴빛이 밀랍같이 변했고, 자꾸만 다리가 꺾이려 하고 있었다. 준후 역시 급하게 많은 술수를 썼고 부적마저도 한 꺼번에 써 버렸기 때문에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는 아녜스 수녀와 무색 화상 두 사람도 뿌리치기 어려울 판인데, 하물며 이 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상대한다거나 따돌린다는 것은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무색 화상이 다시 나섰다.

“우리는 당신들을 해치고 싶지 않소. 다만 당신들이 나흘 동안만 조용한 곳에서 쉬어 주면 그뿐이오.”

“준후 녀석은 우리가 데리고 간다!”

일로가 카랑카랑하게 소리를 쳤다.

그러나 아녜스 수녀는 일로를 무시한 듯, 박 신부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당신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어요. 이제 그만 항복해요. 당신들은 절대 페루로는 못 가요.”

그 말에 현암은 눈살을 찌풀였다.

“페루……?”

그러자 아녜스 수녀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되받았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안데스 산맥의 …………….”

아녜스 수녀의 말을 끊으며 현암이 소리쳤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혹시 ………….”

“협조자가 있었죠. 당신들 친구조차 당신들이 틀렸다는 걸 인정했어요. 그러니 헛된 저항은 하지 말아요. 조금이라도 저항한 다면 …………… 그때는…………….”

현암 곁에 있던 승희가 화를 못 이겨 외쳤다.

“역시 바이올렛! 이 할망구가…………!”

날카로운 눈길로 승희를 쏘아보며 아녜스 수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조용히 해. 한마디라도 더 떠들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아 니, 더 떠들라고. 그래야 너희들을 당당히 죽일 수 있으니깐.” 

협박에 가까운 그 말을 듣고 승희는 지지 않고 외쳤다.

“네가 뭔데? 수녀복을 입고서도 하는 말은 참 곱군그래? 하늘이 무섭지 않아?”

“닥치라고 했어!”

느닷없이 아녜스 수녀가 예의 한 줄기 냉기를 승희를 향해 뿜 어냈다. 그러나 현암이 왼손을 뻗고 준후가 오른손을 뻗어 동시 에 그 냉기를 쳐냈다. 그 틈에 승희가 또다시 소리쳤다.

“너 같은 거야말로 파문감이야! 너 같은 게 무슨 성직자야? 바 티칸에서 네가 한 짓을 알면 너야말로 파문감이라고! 아니, 종교 재판감이야!”

아녜스 수녀가 독이 올라 다시 매섭게 손을 쓰려고 하는데 무 색 화상이 슬며시 그 앞을 막아섰다.

“이제 되지 않았소? 구태여 살생할 필요가 어디 있소? 이미 잡힌 자들이니 그만해 둡시다.”

준후가 눈을 돌려 보니 어느새 열여섯 명의 승려들이 그들의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다란 나무 지 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준후는 그 지팡이가 총보다도 훨씬 무서 울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현암이 문득 한숨을 쉬더니 박 신부에게 말했다.

“이젠 정말 끝이군요…….”

그 말은 진정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한 음절, 한 음절 절망감 과 슬픔이 가득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는 지, 아니면 너무 낙담해서인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승희는 박 신부와 현암이 그토록 낙담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다시 욕이라도 퍼부으려는 찰나………….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공항 문 양옆에 박혀 있던 커다란 유리창 수십 장이 동시에 터져 나가면서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어 닥쳤 다. 실로 엄청난 기세였다.

공항 문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무서운 바람과 함께 깨어진 수천 개의 유리 조각이 날아들자 모두가 혼비백산 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술사나 능력자였는데도 대부분 은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렸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름대로의 방 법으로 바람을 막아냈다.

열여섯 명의 용화교 승려들은 창문에 가까이 있었으나 눈부시 게 빠른 동작으로 지팡이를 돌려서 유리 조각과 바람을 쳐냈다. 그 틈에 지팡이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자 퇴마사들을 둘러싸고 있던 포위망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런데 주변 수십 미터 반경 의 유리창이 동시에 깨어졌는데도 정작 퇴마사들의 등 뒤에 있 던 유리문만은 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네 사람은 무엇인가 에 끌려서 뒤로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현암이 박 신부와 승희를 잡고 다시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아녜스 수녀가 당황하여 무시 무시한 열기를 내뿜었다.

“어딜!”

준후가 그 앞에 뛰어들면서 재빨리 삼매신수(三神)의 검 은 물안개를 쏘아 내어 아녜스 수녀의 열기를 받아 냈다. 그러자 열기와 습기가 부딪쳐 순식간에 거대한 증기 구름이 피어올랐 다. 그때 무색 화상이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준후에게로 몸을 날 렸고 현현이로도 동시에 몸을 날렸다.

아녜스 수녀를 상대하는 순간에 세 사람이 달려들자 준후는 깜짝 놀랐다. 하물며 그 세 사람 모두 고수 중의 고수가 아닌가? 준후는 급히 리매를 불러내고는 힐기보법을 써서 문 안으로 뛰 어들었다.

허나 두 마리의 리매가 허공에 나타나려는 순간, 무색 화상이 손바닥을 뻗었고 현현일로와 이로는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 리매를 잡았다. 무색 화상의 손에 맞은 리매는 그대로 사라졌고 일로와 이로의 손에 잡힌 리매는 놀랍게도 두 조각으로 찢어져 버렸다.

아무리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라 힘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 강력한 리매를 단번에 없애 버린 세 사람의 능력을 보 고준후는 깜짝 놀랐다. 사실 무색 화상은 불가의 공력이 있었고 현현이는 도가의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잡귀나 정령에 가까운 리매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준후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안으로 굴러 들어가듯 하 면서 다시 그들을 막아서려 했다. 그러나 세 사람뿐만 아니라 아녜스 수녀까지도 몸을 날려 준후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 넷을 동시에 상대한다면 제아무리 준후라도 삼십 초를 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준후가 무슨 수를 쓰기도 전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곧이어 요란한 굉음이 울리자마자, 준후 는 어찌할 틈도 없이 그 사람에게 잡혀서 현암 쪽으로 던져졌다. 그 사람의 손은 너무도 빨라서 준후는 방비할 틈조차 없었다. 준후가 날아가면서 언뜻 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현현 이로와 무색 화상이 언제 밀려났는지 저만치에서 비틀거리고 있 었고, 아녜스 수녀의 몸도 뒤로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준후가 놀란 것은 그 막강한 네 사람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밀려 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타난 사람이 너무 뜻밖의 인물이었 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그는 아하스 페르츠, 즉 해밀튼이었다. 그리고 재빨리 공중제 비로 땅에 내려서는 순간, 준후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라와 준호를 보고 또다시 놀랐다. 더군다나 더 놀라운 일은, 저만치에 서 어서 달려오라고 손짓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연희였다! 

“연희 누나?”

준후가 놀라서 멍하니 서 있는데, 준호와 아라가 얼른 준후를 잡아끌었다.

“나중에 말해!”

둘은 다짜고짜 준후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보니 황달지 교수가 승희와 함께 박 신부를 부축하여 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현암은 로파무드를 등에 업은 시타 교수가 부축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준후가 정신없이 달리면서 묻자 아라가 헉헉거리면서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비행기! 빨리 가야 돼!”

준후가 멍하니 달리면서 보니, 사방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원숭이 떼와 개, 비둘기, 소 등의 동물들이었다. 공항 직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아라가 술수를 발휘해서 동물 들을 긁어모아 공항을 마비시킨 것이리라.

출국 수속을 하는 곳도 텅 비어 있었고 간혹 쓰러진 직원들과 경관들이 보였다. 아하스 페르츠의 짓이라면 당연하겠지만, 거 의 저항도 못해 보고 당한 것 같았다.

일사천리, 아무도 가로막는 사람 없이 그들은 활주로까지 달 려 나갔다. 그러자 저만치에서 쌍발기 한 대가 이륙하지 않고 주 위를 선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달리다가 너무나 지쳤는지 박신 부가 쓰러지자 시타 교수가 현암을 연희와 승희에게 넘기고 황 달지 교수와 함께 박 신부를 거의 짊어지다시피 하고 달렸다.

순간, 비행기의 문이 열리더니 조그마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였다. 수아가 뭐라고 외치자 갑자기 박 신부의 몸이 허공에 뜨더니 마술처럼 술술 날아서 비행기 쪽으로 갔다. 정령 들이 한 일이겠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러자 현암도 기운을 내어 달렸고, 마침내 일행은 비행기의 안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장거리 달리기를 한 셈이라 모두들 숨 이 턱에 닿았고 승희는 현기증까지 일어나서 쓰러질 듯 의자에 앉았다. 그들이 다 오르자마자 비행기는 선회하여 활주로로 향 했다.

그때 저만치에서 아하스 페르츠가 날듯이 달려왔다. 비행기는 그를 기다려주는 듯 잠시 서 있었으나 아하스 페르츠는 마구 떠 나라는 듯 손짓을 했다. 곧이어 그의 뒤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녜스 수녀와 그 일행이리라.

그들 중 한두 명이 총을 쏘아댔지만 역효과가 났다. 총소리가 나자 공항 경비대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려온 것이다. 이미 쌍 발기는 활주로에 들어섰고 아하스 페르츠는 실로 놀라운 속도로 거의 날다시피 하여 비행기를 따라잡아 문고리에 매달렸다.

그가 매달려 안으로 들어오자 비행기는 활주로를 미끄러져 올 라 이륙했다. 한숨 돌린 준후가 언뜻 보니 뒤에 남은 추적자들은 공항 경비대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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