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13화 – 준후의 학교 기행 2 : 등굣길
등굣길
시간은 어김없이 지나 날은 또 밝아 왔다. 준후는 여전히 옷이 꽉 낀다. 맨살이 드러나서 낯부끄럽다며 구시렁댔지만 입놀림과는 달 리 표정이 밝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들뜬 기분임이 틀림없 다. 그러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뒤에서 준후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 는 박 신부의 얼굴에는 근심만이 가득했다. 보다 못해 현암이 박신 부에게 속삭였다.
“제가 준후와 같이 가겠습니다.”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너무 젊어.”
“형이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처음 전학 갈 때 형이 가는 경우가 어디 있나. 남 시선을 끌기 쉽 네. 그리고 자네도 젊은 사람이 아침부터 빈둥거리고 다니는 걸로 보일 거고.”
“뭐, 그렇게 보라면 보라죠. 저 어차피 빈둥거리는 놈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 아닐세. 아무리 그래도 아빠나 엄마가 같이 가는 게 보통 아닐까? 그러니 사제복만 입지 않으면 그래도 내가 가는 편이…………….”
“신부님.”
“왜?”
“신부님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데요. 아버지가 아니라.”
“흠흠.”
박신부는 헛기침만 했다. 현암은 재빨리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 없었다.
“준후, 아직 어립니다. 그러니 제가 가도 될 겁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어떻습니까?”
“하지만 그 학교 교장과는 내가 아는 사이인데, 내가 가야지 안 그러면…….”
현암이 간단히 타개책을 내놓았다.
“같이 가죠.”
“우르르 몰려가는 것도…………….”
“뭐, 맘대로들 생각하라죠. 최대한 안전하게 가야 합니다. 혹시 압니까. 누가 자리를 비워야 할 경우가 생길지.”
박 신부도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그럼 그럴까?”
“그러죠.”
사실 이렇게 신경 쓰는 편이 비정상일지도 모르나, 남들과는 다른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논의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결국 준후는 박 신부와 현암에게 호위받 듯 둘러싸인 채 첫 등굣길에 나서게 되었다.
준후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학교 가는 길에는 박 신부가 자신의 차를 태워 주었다. 굳이 차를 타고 가지 않아도 될 거리였지만 첫 등 교고, 준후에게 뭔가 하나라도 해 주고 싶어서, 나아가서는 우르르 몰 려가는 부끄러움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려는 눈물겨운 시도 였다. 학교 문 앞에 도착할 즈음 준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와, 아이들이 참 많아요.”
학교 주변인데 등교 시간에 아이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준후는 저렇게 많은 숫자의 아이들을 보는 것이 처음이다. 최대한 준후가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만을 바라는 현암은 안타까우면서도 일 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상한 티 내지 마라. 당연한 거다.”
준후는 그 말에 현암을 잠시 노려보다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는 걱정되어 힐끔힐끔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지만 현암 은 아예 엄해지기로 작심한 것 같았다. 아마도 준후를 걱정하는 마 음에, 또 박 신부가 워낙에 온유한 성격이기 때문에 스스로 엄한 형 같은 역할을 자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준후는 그런 현암이 당연히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러나 준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또 악역이라 해도 그런 역할이 필요하다 여겨지면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 현암이다. 박 신부조차 아이의 심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 한다. 특히나 사내아이의 경우는 더 모른다. 모르면 차라리 조심스 레 나서지 않는 것이 박 신부의 성격이다. 그래서 박 신부는 운전에 만 집중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후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현암 형.”
“왜?”
“저, 저게 여자아인가요?”
현암이 다시 돌아보니 준후는 의아하고 아주 곤욕스럽고 기이하 다는 듯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는 한 여자아이를 창 너머로 바라보 고 있었다. 현암이 보기에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것 말고는 하나 도 특별할 것 없는 보통 여자아이였다.
‘준후라고 해도 여자애에 대한 호기심은 있는 건가? 역시…………….’
현암이 생각하는데 준후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 머리 꼴 좀 보라지. 여자라는 건 역시…….”
현암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이건 분명 이상한, 그리고 신경 써야 할 반응이다. 현암은 급히 준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준후야, 너 여자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러자 준후는 건방진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형은 내가 그 정도로 바보인 줄 알아요? 을련 호법님도 계셨고・・・・・・ 아무리 절에서 지냈다고 해도 여자가 뭔지는 안다고요.”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근데 뭐가 신기했지?”
“여자애는 처음이거든요.”
“그래? 그러면 네 생각에는 여자란 뭐니?”
준후는 지체 없이 말했다.
“요물요.”
“주, 주, 준후야. 그건…….”
준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더욱 기세 좋게 말했다.
“여자라는 것은 불도의 정진을 막는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죠. 여자라는 존재는 반드시 기피하고 멀리해야만 될 요물 같은 존재라 고 배웠어요. 그리고 스님들 말씀을 들으니 그중에서도 최악은 여자 아이며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반드시 멀리하고 경계 해야만 하는 존재라더군요.”
“후…… 준후야.”
현암은 ‘그건 덜 된 스님들 이야기고!’라며 고함이라도 지르며 울 고 싶었으나 준후는 오히려 그런 현암을 달래려는 듯 말했다.
“에이, 걱정 마세요. 여자애라는 것들이 아무리 그래도 저를 어떻 게 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아무리 무섭고 교활한 존재라도 전 겁나 지않…….”
현암은 얼굴빛이 퍼렇게 돼서 박 신부에게 슬쩍 말했다.
“신부님.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서………………”
현암에 못지않을 정도로 허옇게 질린 박 신부도 말했다.
“그, 그럴까 그럼?”
그러자 준후의 얼굴이 질렸다.
“아, 아니에요! 농담한 거예요! 제가 왜 모르겠어요! 여자애들도 나와 같은・・・・・・ 그러니까 친해질 가능성도 조금은 있는, 가련하게 여겨 보살펴 주어야 할 그런 존재라는 걸 저도 알……”
조금은 나아졌지만 현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서 차 돌립시다, 신부님.”
준후는 또 펄쩍 뛰었다.
“아, 잘…… 잘못했어요. 현암 형! 신부님! 그게 아닌 거죠? 여자 애들도 그냥 나와 똑같은,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란 거죠! 알았으 니 제발…….”
현암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거워지는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준후야.”
“?”
“지금 네가 한 말. 절대 잊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해.”
“예, 예.”
준후는 학교 앞까지 와서 행여 돌아갈까 봐 겁나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현암 형…….”
“왜?”
“다른 아이들도 주술 쓰나요? 드물어도 그런 애가 있다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많으니 쉽게 친해질 수 있을……”
대답 대신 현암이 앓는 듯한 소리로 탄식하자 준후는 쩔쩔매며 말했다.
“저, 여자애라고 해도 차별 없이 가르쳐 줄게요. 오행술이나 부적술이라도・・・・・・ . 그러면 되는 건가요?”
견디다 못해 과묵한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준후야.”
“예?”
박신부는 전에 없이 노골적으로 말했다.
“학교 가기 싫으냐?”
“아…… 아, 아뇨.”
조수석에 있던 현암이 뒤돌아보며 엄하게 말했다.
“네가 뭘 이상하게 생각한 건지, 스스로 생각해 보렴.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예?”
“우선 가장 중요한 것 딱 한 가지만 말하겠다. 들어 줄래?”
“네.”
“네가 보통 아이들과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네.”
“음, 그래. 그러니 어지간하면, 아니,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말을 아껴라.”
“예?”
“입 다물고 있으라고!”
현암은 조금 언성을 높였다가 미안한 생각에 언성을 낮추었다.
“아마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을 거고,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다. 허나, 웬만해서는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지 마. 일단은 참아라. 무조건 참아. 궁금해도 참고, 의심스러워도 참고, 그리고 어떤 일이 있 어도 네가 가진 능력 같은 건 눈곱만큼이라도 보여선 안 돼. 그건 당 연히 알겠지?”
“그,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형.”
준후는 다소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현암이 몇 번 이나 신신당부를 하는 동안 박 신부는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운전만 하다가 이윽고 운동장 한편 구석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세.”
박신부가 몹시 피곤한 것처럼 말하자 현암은 준후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