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18화 – 짐 들어 주는 일
항상 궂은일을 찾아다니는 퇴마사들에게도 아늑한 주말이 될 것이 분명한, 유난히 조용한 토요일 저녁이었다. 언제 어느 때 달려 나 가 괴이한 존재들과 대적할지, 또 그러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그들이다. 군대 간 애인 외출 나오기만 기다리듯, 전쟁터로 떠 난 병사 휴가 나오기만 기다리듯 이를 악물고 버텨낸 인고의 시간, 그 결실을 따려 승희가 손 내밀 기회가 왔다. 저녁 시간에 퇴마사들 의 아지트인 박 신부의 집을 찾아온 승희는 박 신부 앞에 버티고 앉 아 뭔가를 끈덕지게 조르고 있었다. 박 신부는 인자해 보이는 미소 를 짓고 있었으나 내심 당황스러운 듯 쩔쩔매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승희야, 내 맘대로 되는 일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 니. 그러니…….”
박신부가 이야기하자 승희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빤히 보이는 울상을 지으며 계속 졸랐다.
“하지만 어떻게 해요. 내일 장볼 게 너무 많은데, 저 혼자 짐을 다들고 다니라는 말씀이세요?”
“배송시키면 되지 않을까? 왜 굳이 현암을 데리고 가려고?”
“그러면 신부님이 들어 주실래요?”
“그거야…….”
혹시나 박 신부가 정말 나설까 봐 승희는 얼른 말했다.
“신부님은 저보다 한참 어른이신데 제가 어떻게 그런 부탁을 드리겠어요. 또 준후는 아직 어린데다 꼬마고요. 그러니 현암 군밖에 없지 않아요?”
“하아. 그렇지만…………”
박 신부는 난감한 듯 입을 다물었다. 승희가 바라보자 박 신부는 무안한 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런 사적인 일까지 내가 어떻게 시키겠어? 네가 직접 이야기해보지 그러니?”
그러자 승희는 성질을 부렸다.
“왜 안 했겠어요. 하지만 그 돌덩어리는 눈 하나 깜짝 않는다고요. 세상에, 여자가 도움을 청하는데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는 인간 은 그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 매몰찬 돌덩어리는 포기하고, 짐을 줄이거나 배달시킬 방법 을 찾는 게…………..”
“신부님!”
승희가 화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박 신부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승희의 표정은 단호했다. 하는 수 없 이 박 신부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정 그러면 내 한번 이야기는 해 보마 하지만 가고 안 가고는 전 적으로 현암 군의 의사에 달렸으니…………….’”
“그러지 말고요. 신부님, 현암 군이 다른 사람 말은・・・・・・ 그러니까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만, 신부님 말씀은 잘 듣는다는 거 저도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신부님이 말씀해 주셔야 된다고요. 예? 그 래 주실 거죠? 네? 네? 네?”
승희가 노골적으로 애교까지 떨자 박 신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 었다. 박 신부는 사실 승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다.
승희와는 친딸이나 다름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다. 박 신부의 친구 이자 승희의 부친이었던 현웅 화백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지만 승 희는 구김살 없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보아 왔던 사이 기에 더욱 스스럼이 없었을 수도 있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 딸들하고만 가까웠어. 미라도 그랬고 지금은 승희가……………. 승희가 없었다면 너무 적적했겠지.’
승희는 현암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현암은 박 신부가 보기에 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건실하고 굳건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 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명의 퇴마사, 그리고 분별력을 가진 성인이자, 능력을 갖춘 사람, 성실하고 고매한 성품을 가진 인 격체로서의 의미일 뿐이다.
자신이 가진 내력과 도가의 수련에 얽매여 있는 현암은 눈곱만치 도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박 신부가 승희 를 따뜻하게 생각하는 것에 못지않게 현암도 마음속 깊이 위하고 있 었다. 두 사람이 실제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할 것이 박 신부였지만, 박 신부가 보기에 실제로 그렇게 될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승희가 말한 대로, 이런 면에 있어서 현암은 돌덩어리나 진배없었 다. 자칫 두 사람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불화로 갈라질 가 능성도 있고, 그것은 박 신부가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럴 확 률 정도가 아니라 현재대로라고 하면 미래가 확정되어 있는 것과 마 찬가지였으므로, 박 신부는 애써서 승희와 현암이 지나치게 가까워 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허나 승희는 그런 박 신부의 마음을 모르는 듯 혹은 알면서도 상관 없다는 듯 부득부득 요구해 왔다. 승희 또한 어디에 내놔도 떨어지 지 않는 미모와 성격과 재능을 갖춘 여자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 진 희귀한 능력 때문에 퇴마사들 외에는 속을 터놓고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승희에게 있어서 유일한 남성은 현암인데, 현암은 승희 에게, 아니 거의 어떤 여성에게도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 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듯한데 자제심이 워낙 강해 드러내지 않고 지구가 망할 때까지라도 참을 사람이다. 그런 생각으로 박 신부가 몰래 한숨만 쉬는데 승희는 여전히 졸라 댔다.
“별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짐 들어 주는 일인데요. 아니, 그 정도 도 이야기 못 해 주신단 말이에요? 정말요? 정말 그러실 거예요?”
박 신부는 생각했다. 자신들은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살고 있 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렇게 여유를 누릴 기회가 자주 찾아오 는 것도 아니다. 승희가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부리는 이유를 박 신 부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다음 단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훤히 보였 다. 간청하다가 조를 것이고 급기야는 화를 내고 삐친 척하다가 마 지막에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섭섭하다며 공격해 올 것이다. 그쯤 되 면 아무리 핑계를 짜내도 소용이 없다.
박 신부는 우는 여자에게는 꼼짝을 하지 못한다. 그 단계까지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박 신부는 포기하고 말았다.
“알았다.”
“정말요? 와,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제 팔에 알통 생겼을 거라고요.”
승희는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승희의 속마음이 어디 있는지 뻔히 아는 박 신부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예? 짐 들어 주는 일요?”
현암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박 신부는 난처한 듯 꾸물거리며 눈 치를 살폈다.
“그래, 승희가 아무래도 짐이 많다고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탁할 사람이 자네밖에 없어서 말이네. 도 와주겠나?”
현암은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뭐, 그렇다면 당연히 가야죠.”
“음, 그래. 고맙네.”
“뭘요, 그냥 짐 들어 주는 일인걸요.”
“그래, 짐 들어 주는 일이지. 그러니까….. 아니, 됐네. 됐어.”
현암이 정말로 눈곱만큼도 다른 생각이 없어 보이니 박 신부는 말 을 잇기도 어색하고 덧붙여 말하기도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옆에서 빤히 바라보던 준후가 말했다.
“현암 형, 짐 들어 주러 간다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짐이 아주 많거나 무거운 모양이야.”
“그런가?”
준후는 눈만 깜짝였으나 티 없이 맑은 눈망울에 뭔가 야릇한 의혹 의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차라리 이 꼬마가 목석같은 현암보다 눈 치가 빠른지도 몰랐다.
“자자, 현암 군. 준비됐어?”
다음 날 아침 승희는 8시도 채 되기 전에 박 신부의 집으로 쳐들어 왔다. 물론 일요일이라고 해도 늦잠을 자는 법이 없는 현암이었지만 승희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승희는 내심 뿌듯했다. 저 돌덩어리 같은 인간은 고개를 까딱하는 것조차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바로 들려온 현암의 말은 승희의 기대를 산산이 깨뜨렸다.
“너, 오늘 장보러 가는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쇼핑하러 갈 거야. 짐 들어 주기로 한 거 잊었어?”
“어, 잊지 않았지. 그런데 그게…”
현암은 여전히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승희를 찬찬히 들여 다보았다. 현암의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단순히 물건을 사러 나가는 복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껏 멋을 낸데다 여기저기 화려하게 꾸민 액세서리도 평범한 것들로 보이지 않았다.
“물건 나르고 짐을 드는 데 그런 옷을 입고는 불편하지 않겠어? 더 편한 옷을 입고 가는 게……….”
현암의 말에 부아가 치민 승희는 톡 쏘아붙였다.
“짐은 현암 군이 들 거잖아!”
“그래도 물건은 내가 아니라 네가 사잖아. 그런데 왜………….”
“됐어요. 어서 가기나 합시다.”
“승희야.”
“왜?”
“너 말이지. 너하고 나하고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몇 살이나 차이나는지 알…….”
“아 됐네요. 아저씨! 이렇게 불러 드릴까? 현암군이라고 불러 주면 고맙게 생각하지 못할망정…..”
‘저런 멋대가리 없는 돌덩어리 같으니라고……………’
“그만하자.”
현암이 재빨리 포기하자 승희는 눈을 흘겼다.
승희는 중얼거렸으나 뒷말은 속으로 집어삼켰다. 고지식한 현암에게 대놓고 말했다가는 눈을 부릅뜰 것 같아서였다. 무섭지는 않았으나 현암의 마음을 건드리는 자체가 승희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쨌든 박 신부의 당부도 있고 해서 현암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 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왼쪽 팔목에 월향검을 차는데 승희가 돌아보 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현암군!”
“승희야, 제발 현암 군이라 부르는 건・・・・・・ “
“현암 구운!”
승희는 다시 한번 못을 박듯 말하며 다가와 현암이 입으려는 후줄근한 점퍼의 옷깃을 톡톡 찔렀다.
“지금 말야. 바깥 날씨가 아주 화창해. 그런데 이렇게 온몸을 칭칭감고 나갈 거야? 덥지도 않아?”
그러나 현암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난 덥고 추운거 잘 안 가린다. 난 이게 편해.”
“편하긴 뭐가 편해! 내가 불편해. 지금 봐. 내가 이렇게 공들여 빼입었는데 현암 군이 이런 차림으로 따라오면 어떨 것 같아?”
“그게 뭐, 무슨 상관인데?”
“휴, 안 어울린다는 생각 안 들어?”
승희가 쏘아붙였으나 현암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짐 들어 주러 가는 건데, 뭘.”
“하아.”
승희가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승희는 지나 가는 사람이 한 번쯤 뒤돌아볼 만큼 예쁜 미모지만 눈매가 날카로 워, 눈을 치뜨면 무서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눈을 치뜬 승희가 말했다.
“보는 내가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으니 그 옷 벗어 반팔 옷으로 갈아입어.”
“반팔?”
“왜, 반팔 싫어? 현암 군도 준후 같아? 꽁생원?”
“어, 왜 나를 가지고 그래요?”
어느새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준후가 볼멘소리를 했으나 승 희는 꼬마의 말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현암에게 훈계하듯 말 했다.
“현암 군. 이런 더운 날씨에 저렇게 누덕누덕한 걸 걸쳐 입고 백화 점 돌아다녀 보세요. 도둑으로 오인받아요. 그런 추한 꼴 보이고 다 른 사람에게 부담 주고, 보는 사람 덥고 땀나게 만들며 다니고 싶으 세요? 네? 현암 아저씨?”
승희가 까탈스럽게 따지자 현암은 귀찮은 듯 겉옷을 벗었으나 여 전히 긴소매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승희는 다 시 한번 덧붙여서 말했다.
“현암군, 내가 아까 반팔 옷으로 입으면 좋겠다고 했지? 말했어, 안 했어?”
“승희야.”
현암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띠며 말했다.
“하지만 왼팔에 월향검이 있잖아. 내가 긴팔 입는 거, 월향을 가리려고 한다는 거 아직도 모르니?”
“모르긴 내가 왜 몰라!”
승희는 팩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너무 큰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목소리를 낮춰서 다시 말했다.
“짐 들어 주러 가는데 꼭 차고 가야 되겠어? 짐하고 싸우러 가? 거 기다가 잘못하면 금속 탐지기 같은 데 걸려. 몰라서 그래?”
그 말을 듣자 현암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현 암은 조심스럽게 월향검을 팔목에서 풀더니 책상 서랍에 소중히 간 직했다. 물론 뒤에서 눈꼬리를 이마 끝까지 곤두세우고 입술을 앙다 물고 있는 승희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가자.”
현암이 월향검을 수습하고 몸을 돌리자 승희의 표정은 생글생글 웃는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어쨌든 칼에 딸려 있는 찜찜한 처녀 귀신을 떼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오케이!’
승희는 속으로 생각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현암에게 애교 있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가자! 현암군.”
그러자 현암은 또다시 멋대가리 없이 말했다.
“짐 들어 주러 가는 걸 뭘 이렇게 호들갑을.”
승희의 왼쪽 눈 밑이 약간 씰룩였으나 내색하지 않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현암은 어슬렁어슬렁 승희의 뒤를 말없이 따르다가 멈 첫 서며 말했다.
“그런데 승희야.”
언짢아진 승희가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돌리자 현암이 조금 멍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반팔 입어야 한다고 했잖아.”
“아…… 그, 그거・・・・・・ 응. 그래야지. 얼른 갈아입어. 저 앞에서 기다릴게.”
“승희야.”
승희가 바라보자 현암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오늘 이상하다.”
“뭐? 내가 뭘?”
“아니, 쇼핑하러 간다면서 차림도 그렇고・・・・・・ . 내 옷차림에 대해서 참견하는 것도 그렇고. 야, 너 혹시…………….”
승희는 잠시나마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현암이 말했다.
“무슨 좋은 일 있니?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휴・・・・・・ . 기대한 내가 바보지…………..’
승희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현암 아저씨. 아저씨도 밥통 같은 남자분들 중 하나세요오?”
“무…… 무슨 소리야?”
“여자가 치장하는 게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라 생각하세 요? 바보 같은 남자분들처럼? 정신 차려, 현암 군. 여자가 치장하는 건자기 기분에 따라 멋 내려고 하는 거야! 현암 군도 역시 바보였어?”
“흠흠……. 그렇다 쳐도 누구 만날 때 치장하는 건 사실이잖아.”
승희는 언성을 높였다.
“얼른, 옷이나 갈아입어!”
원래부터 이렇게 철없는 승희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 드물다는 기대 심리가 촐싹거리는 소녀처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승희 스스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스 스로 느끼기에도 자신은 평소와 달랐고, 그것이 승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승희는 성질을 내며 방문을 쾅 닫고는 밖으로 나와 발을 구르며 속으로 외쳤다.
‘현암군. 이 바보 둔탱이, 돌덩어리. 콱, 그냥……..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이 언제 또 온다는 보장은 없다. 부끄럽더라 도, 난관이 있어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승희가 현암을 끌고 간 곳은 백화점이었다. 현암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승희 뒤만 따라오고 있었으나, 승희는 백화점에 들어서자마 자 뭐가 그렇게도 신이 나는지 쉴 새 없이 현암에게 조잘거리며 말 했다.
“저거 봐, 저거 참 예쁘지? 가서 보자. 응?”
현암은 아무 말도 없이 터덜터덜 승희의 뒤를 따라 섰다. 승희는 한참 동안 매장의 물건을 이것저것 들여다보기도 하고, 매장 점원과 이야기도 하고 간혹 깔깔거리며 웃기도 한다.
무슨 화장품이며 브랜드며, 승희가 알고 있는 기이한 지식이 그렇 게 많을 줄은 몰랐다. 갖가지 외국어가 총동원된 명칭들에 무슨 재 질이 어떠니 뭐라 뭐라 하는 성분이 어떠니 그래서 뭐에 좋고 뭐에 좋다는 이야기까지 쏟아져 나오는데 공대 출신인 현암도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 현암에게는 복잡한 주술이나 기공 고서보다도 더 난해한 마법 연구처럼 들렸다. 현암은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현대의 마법이네. 현대의 연금술이고 현대의 샤머니 즘. 기적이구먼. 점원 말대로라면 화장품만 발라도 불로불사하겠다. 원, 참.’
그런 식으로 1층의 매장을 하나도 빠짐없이 돈 후에 에스컬레이터 에 올라섰다. 현암도 터덜터덜 뒤를 따라 올라탄다. 2층은 약간은 다 르지만 현암의 눈으로는 뭐가 다른지 구별할 수 없는 또 다른 매장 들이 그득하다.
승희는 유쾌하고 자유롭게 뛰논다. 뛰논다고 하면 화내겠지만 현 암의 눈에는 정말 승희가 물 만난 고기가 뛰노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암은 지루할 뿐이었지만, 승희가 즐거우면 됐지, 하는 생각으 로 묵묵히 뒤만 쫓을 뿐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점심때쯤 되자마 음속에 의아함이 차올랐다. 평상시 승희는 조금만 오래 걸어도 숨을 헉헉대며 힘들고 지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암보다도 훨씬 더 활기차게 뛰어다니는데, 벌써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데도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공으로 단련된 현암의 다리가 조금씩 저려 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현암은 생각했다.
‘불가사의다.’
그러면서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만약 백화점에서 악령이 나온다면 다른 사람을 부를 것도 없이 승희 혼자 퇴치하고도 남겠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엉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승희는 즐거운 듯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환한 얼굴로 돌아다닌다. 그냥 그런 승희의 얼 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현암은 여전히 터덜터덜 걸어서 승희의 뒤를 따라다녔다. 어느덧 점심때가 가까워졌다.
“아, 재밌었다.”
승희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현암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승희야?”
“왜?”
승희가 한껏 기분 좋게 웃자 현암은 혹시나 기분을 건드릴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야. 됐어.”
“아니, 뭔데? 그러지 말고 말해 봐.”
“너 말이지, 음, 말해도 돼?”
“아니, 뭔데 그래?”
“너, 나 짐 들어 달라고 불렀잖아.”
“그랬지.”
“근데 짐이 하나도 안 생기는걸?”
그 말을 듣자 승희는 아주 우습다는 듯 깔깔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아이고, 현암 군도 참. 여기는 말이야. 명품 매장이야, 명품. 이게 얼마나 비싼 줄 알아?”
현암은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기에 가격표를 눈여겨본 적도 없다. 현암의 시력이면 아무리 작게 써진 글자도 읽을 수 있겠지만 볼생 각이 없었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다. 현암이 고개를 젓자 승희는 웃었다.
“그러니 이렇게 구경만 하는 거지 뭐.”
현암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구경만 하는 게 뭐가 재미있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즐거운거 아니야?”
“글쎄올시다, 현암 군. 하지만 난 즐거운걸? 나뿐만이 아니야. 여 기 있는 여자들 거의 그래.”
“그런・・・・・・ 거야?”
현암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짐 들어 주는 일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한번 한 약속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한 다고 믿는 현암이니까. 터덜터덜 승희의 뒤를 따를 뿐이다.
백화점 식당가에서 간단히 점심을 마친 승희는 바야흐로 본격적 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품 매장이 아닌 다른 매장을 돌면서 이 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오전과 똑같은 움직임이었지만 다른 면이 있다. 이번에는 실제로 물건을 구입한다.
현암은 오전 내내 돌아다니고도 지치지 않는 승희의 체력에 경의 를 표할 지경이 되었다. 거기에 현암에게 대신 얹는 쇼핑백과 상자 의 숫자는 점차 늘어 갔다. 처음에는 양손으로 몰아 쥐고 걷다가 그 것으로는 부족하여 급기야 양손을 모아 밑에서 받쳐 들듯이 수많은 상자와 쇼핑백 들을 떠안은 채 곡예를 하듯 걸어야 했다.
사람이 아니라 크리스마스트리가 된 기분이었다. 더더욱 현암을 당혹하게 한 것은 승희가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말할 때였다. 현암은 심드렁하게 다녀오라고 했지만 승희는 날카롭게 현암을 째려보며 눈총을 주었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 달라는 뜻인 것 같은데, 이렇게 짐을 주렁주 렁 얹은 모습으로 화장실 앞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 수 없이 뒤를 따라 화장실 앞에 섰다.
옆을 살짝 돌아보니 현암과 비슷한 처지의 남자들이 보였다. 그럴 듯하고 훤칠한 차림이었지만 여자 화장실 앞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 은 왠지 위축되고 쪼그라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제일 위축되 는 것은 현암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쇼핑백이나 가방을 몇 개씩은 들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트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짐을 들고 있는 것은 현암밖에 없었다.
무겁거나 힘들거나 지쳐서가 아니었다. 남들이 잠깐씩 힐끗거리 는 시선은 한없이 무덤덤해 보이는 현암에게도 그렇게 따가울 수가 없다. 하물며 화장실에 간 승희는 나오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부아 가 치밀었는데, 조금 더 지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만두고 짐을 내팽개친 채 뛰어들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그러다 만에 하나 아무 일 없었을 시에는 여자 화장실로 뛰어든 치한 취급 이나 받을 것이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억지로 서 있었다. 현암의 곁에 서서 다소 우울하거나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비 슷한 처지의 남자들도 하나둘씩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짝을 이뤄서 떠나갔다. 몇 명은 새로 오기도 했지만 현암만큼 오래 서있 는 사람은 없었다. 새로이 기다림의 대열에 합류한 남자 중 하나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흐뭇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나는 승리자노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선포하는 것 같아만 보여 옆에 선 현암 은 더 갑갑하다. 이유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버티기가 힘들다. 그러 다보니 별생각이 다 든다. ‘폭자결로 바닥을 뚫고 그냥 떨어지 고 싶다. 그러다 지옥까지 뚫고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현암은 걱정도 되고 다른 사람들 눈빛도 따갑고 기다림에 도 지쳐서 점점 속이 타들어 갔다.
‘삼분만 더 기다려 보자.
맞은편에 저만치 보이는 시계를 좋은 시력으로 꿰뚫어 보며 현암 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삼 분이 지났다. 그래도 승희는 나오지 않는다. 전에 없이 크게 마음이 무너져 자신이 스스로 했던 맹세를 깨뜨리기에 이르렀다.
‘이 분만 더.’
막상 여자 화장실 안에 있는 승희는 볼일을 끝내고 느긋하게 벽에 반쯤 기댄 채 나름대로 시간을 죽이는 중이다.
‘이 정도면 될까? 아니, 조금 더 기다려야 돼.’
승희가 바라는 것은 간단하다.
화장실에서 최대한 버틸 때까지 버티면 현암은 걱정을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승희도 안다. 몹시 초조하고 불안할 것이다. 어쩌면 혹 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자 화 장실에 함부로 뛰어들 수 없는 일이니 현암은 애만 바짝바짝 탈 것 이다. 승희는 자기도 모르게 씩 웃었다.
‘그러다가 착 나타나면 완전히 구세주처럼 보이지 않겠어? 그러면 제아무리 목석이라도 무슨 반응이 있겠지.’
오로지 그 계획 하나를 실행하기 위해서 승희는 거금을 투자했다. 짐 들어 달라는 핑계로 끌고 왔는데 짐이 없으면 쑥스러울 테니 카 드 한도가 바닥을 칠 때까지 긁어 대며 이것저것 사들였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 세워놨으니 제아무리 목석같은 현암이라 도 자기가 튀어 나가면 반응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효과 였다. 오래 기다릴수록 효과가 커질 수 있겠지만, 어느 한도를 넘어 가버리면 아예 도망쳐 버리든지 뛰어든다든지 하는 곤란한 사태가 터질지도 모른다.
‘에이, 현암 군이 어떤 사람인데. 더 기다려야지. 좀 더 기다려도 될 거야. 그래서 안심하고 안도하는 표정을 꼭 봐야겠어. 그걸 정말 보고 싶거든. 헤헤.’
그런 생각을 하며 승희는 안에서 자기도 지겨워 죽겠는 것을 억지 로 참고 버티는 중이다. 벌써 거의 사십 분째다.
승희는 기대에 찬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현암은 조금 떨어져 있었 지만, 짐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덕분에 화장실 앞의 굽이를 돌 자마자 눈에 들어왔다. 승희가 다가가 최대한 애교스럽게 웃으며 말 했다.
“현암군, 오래 기다렸지?”
돌아보는 현암의 눈에는 승희가 기대했던 구세주를 보는 듯한 눈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헤어졌을 때와 똑같은 무덤덤하고 답답한 눈빛……. “
“응.”
하다못해 ‘괜찮아’라거나 ‘왜 이리 오래 걸렸어. 걱정했잖아’라는말이라도 나왔으면 좋았으련만 현암은 딱 한마디만 한다.
“나왔구나.”
“뭐가 나왔구나야!”
승희는 화를 벌컥 냈다. 그럼에도 현암은 무덤덤할 뿐이다.
“어? 왜?”
“몰라앗! 좌우간 현암 군은…….”
승희가 성질을 부리며 앞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조금 전까지 시계 를 보며 초조하게 기다린 현암이다. 하지만 승희가 나오는 순간 현 암은 초조한 표정을 싹 지우고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현암의 마음도 무겁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가 없다. 현암은 짐을 든 채 승희의 뒤를 쫓았다. 승희는 애써 생각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화가 몹시 치밀어 올랐다. 현암이 뒤쫓아 오거나 말거나 성큼성큼 마구 걷고 에스컬레이터도 현암을 기다리지 않고 탄다.
짐을 잔뜩 들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현암은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이 불편하다. 하지만 승희의 뒤를 따르지 않기도 그렇고 힘과 균 형 감각이 뛰어나니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묘기처럼 쌓은 짐덩어리 를 안고도, 앞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쇼핑백 하나 떨어뜨리지 않 는다.
물론 사람들과 부딪힌 적도 없다. 누가 자세히 관찰했다면 묘기라 고 할 만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볼일이 바빠, 짐을 많이 들고 가는 사람 정도는 아무도 길게 눈길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단박에 뛰듯이 성큼성큼 걸어간 승희가 도착한 곳은 백화 점 배송 창구였다. 현암은 뒤를 쫓아 간신히 따라온다. 배달 센터 앞 에 도착하자 승희가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려놔, 현암 군.”
현암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혹은 로봇처럼 무뚝뚝하게 짐을 바 닥에 내려놓는다. 그러자 승희가 백화점 직원에게 배송을 요청한다. 백화점 직원 몇 명이 카트를 끌고 와서야 간신히 담을 만한 양이다. 현암은 승희에게 말했다.
“배송시킬 거였어?”
그렇다면 직접 해도 될 것 아니냐는 것처럼 들려서 승희는 앙칼지 게 눈을 치켜뜨며 언성을 높인다.
“그럼 내가 저걸 여기까지 들고 올 수 있을 것 같아? 현암군이니 까들었지. 난 무거워서 들지도 못한다고!”
현암은 고개만 끄덕인 채 뭐라고 대꾸도 하지 않는다. 승희는 그 게 더 답답하다. 차라리 화를 내고 따지고 든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는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이 돌덩어리 같은 인간은 고개만 까딱거 릴 뿐이지 석상과 다를 바가 없다.
‘정말로…….’
승희가 한숨을 내쉬지만, 현암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다.
‘아휴, 할 수 없지.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아… 내 카드, 그걸 어떻게 메우지?’
속으로는 울상이 되었지만 승희는 애써서 표정을 바꾼다. 여자의 변심은 빠르다.
“현암군, 이제 됐어.”
“그래? 그럼 가는 거야?”
“아니, 어쨌든 여기까지 오느라고 힘이 되어 주었는데, 내가 현암군 힘들게 한 것 같지?”
현암이 가만히 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한다.
“승희, 너…….”
“왜에?”
승희가 나름대로 애교를 부리며 묻는데 현암이 툭 던지듯 말한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거지?”
승희의 마음이 또 한 번 상처받았다. 하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아니, 현암군 고생했는데 그냥 보낼 수 있어? 따라와, 따라와.”
“음? 나는 이만 들어가서 수련을………….”
“아이, 따라와.”
승희는 현암의 소맷자락을 잡으려고 했다. 여자가 남자의 손목이 나 손을 덥석 잡는 것은 아무래도 쑥스러운 일이다. 친구처럼 친한 관계일 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승희처럼 현암을 마음에 두 고 있을 때는 오히려 주저하여 다른 남자 손목 같으면 서슴없이 잡 았을 것을 잡지 못한다.
그래서 그 대신 애교스럽게 소매를 잡으려고 한 것인데, 생각해 보 니 현암의 윗옷을 벗겨서 반팔차림을 시킨 것이 바로 자기다. 당연히 소매가 있을 리 없다. 승희는 자기도 모르게 슬쩍 내밀던 손을 거두고 앞장서서 걸었다. 현암 같은 돌덩어리에게는 이러니저러니 설 명하는 것보다 그냥 움직이는 편이 편하다.
그러면 자동으로 따라온다. 역시 현암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끄 러미 승희의 뒤를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뒤를 따라간다.
승희가 잡은 택시에 올라탄 다음에야 현암은 승희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말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희 는 현암에게 말하는 대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월미도 가 주세요.”
그제야 석상이 간신히 입을 연다.
월미도? 인천이잖아.”
“응! 왜?”
“아니 왜 거기까지 가?”
“바다 보고 싶어서.”
“난 짐 들어 주러 온 거니까 먼저 가면 안 될……..”
“현암 군이 짐 들어 준 게 고마워서 그러는 건데……… 사람 성의를 꼭 이런 식으로 무시해야 돼?”
승희가 살짝 눈을 흘기며 말하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진 현암은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가지, 뭐.”
말로는 ‘가지, 뭐’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가고 싶지 않아 죽겠는데’ 하는 눈치가 행동에 너무도 적극적으로 묻어 있다. 승희는 눈썹을 곤두세워 심술궂은 표정이 될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누그러뜨린다.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었다면 안쓰러울 정도의 노력이다. 일이 꼬 이려고 그러는지 하필이면 그날따라 길까지 막혔다. 어느 구간에서 사고라도 났는지 정체가 상당히 심했다. 심해도 보통 심한 게 아니 었다.
요금이 올라가면 좋아할 택시 기사조차도 미안한 기색을 띠며 계 속 가도 괜찮겠냐고 승희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았다. 승희도 속으로 는 열불이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죠, 뭐. 그냥 가 주세요.”
승희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내가 이러려고 그 공을 들여서 이 돌덩어리를 끌고 나온 게 아닌 데. 아, 짜증 나. 정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옆에 앉은 현암은 묵묵히 승희 반대편 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석상 이 된 것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다. 꼼짝도 않는 정도를 넘어서서 정말 석상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그야말로 손 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가끔씩 깜박이는 눈망울이 없었다면 정말 석상으로 변해 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석상 노릇 한번 제 대로 하려는지 대화는커녕 입술도 까딱 않는다. 운전기사는 둘이 싸 운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아예 입을 봉했다. 그래서 정체에 가로막힌 긴 시간 동안 택시 내부는 침묵과 정적만 쌓이고 쌓여 간다. 승희는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터질 뻔했다.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닌데. 이럴 시간 없는데………
‘아, 정말 이게 뭐야.’
하지만 승희의 답답한 속도 모르고 교통 정체는 풀리지 않는다. 누 가 사고를 낸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른다. 허나 누군 가의 실수로 이런 것이라면, 또 승희가 속으로 그 ‘누군가’에게 읊어 댄 저주가 통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필경 편안한 종말을 맞이하지 는 못하리라. 그 정도로 승희의 조바심은 심했다.
해가 저물다 못해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다음에야 조금씩 정 체가 풀리기 시작했다. 길이 막히지 않았다면 한 시간 남짓이면 갈 거리를 벌써 네 시간째 굼벵이처럼 꿈지럭거리며 몇 센티미터 단위 로 나아갔을 뿐이다. 그래도 막힌 것이 터지자 그런대로 전진하여 마침내 월미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무는 정도가 아니라 깜깜해 진 이후였다. 승희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저녁노을이 좋다고 했는데. 아, 씨, 정말.”
승희가 자기도 모르게 성질을 부리려고 하자 그때까지 뒤만 따라 오던 현암이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
“밤바다도 보기 좋아.”
승희가 안쓰러워 보여 한 말인지 동정으로 한 말인지 아니면 그냥 나오는 대로 한 말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석상’의 말 한마디에 승 희의 활기가 살아났다.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 응, 그래. 운치 있어. 별도 보이겠지?”
그러나 현암은 아까 준 기대를 거두어 가듯 인정머리 없이 말한다.
“별 잘 안 보여. 요새는 매연 때문에………….”
“현암 군. 너무해. 꼭 그렇게 말해야 돼?”
현암은 여전히 석상처럼 표정조차 변하지 않는다. 간신히 현암의 말에 기운을 얻어 어떻게든 분위기를 추스르려다가 다시 기분을 잡치게 된 승희는 이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뭐라고 이야기 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앞장선다.
이미 어두워져 깜깜했으나 승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바닷가라고 백사장을 찾아보려 했으나 월미도는 거의 개발이 끝난 지역이라 지리를 잘 모르는 승희로서는 쉽게 백사장을 찾을 수 없 었다. 놀이공원 비슷한 것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도저히 찾을 엄두가 안 난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다.
아침부터 백화점에서 무리한 다리가 이제는 아프다 못해 서서히 저려오기 시작했다. 승희는 오기로 성큼성큼 걷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근처 구석진 곳의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다.
한껏 멋을 내느라 무리하게 굽이 높은 새 하이힐을 신었더니 발꿈 치도 까진 것 같고 발톱 한쪽도 콕콕 쑤시는 게 깨지기라도 한 것 같 았다. 그런데도 현암은 아무 말 없이 터덜터덜 걸어와서 승희의 옆 에 털썩 주저앉는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본다. 불행하게도 눈앞의 바다 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어지럽게 산재된 월미도 카페 주변의 조 명들과 잘 보이지 않는 시커먼 섬 그림자만이 눈에 들어올 뿐, 기분 좋게 파도치는 수평선도 보이지 않는다. 자리를 잡아도 정말 잘못 잡았다.
“아휴.”
승희는 한숨을 쉰다. 승희가 한숨을 쉬건 말건 현암은 가만히 앉아 있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원망스럽다 못해 미워서 죽을 지경이다. 생각 같아서는 달려들어서 얼굴을 손톱으로 박박 긁어 놓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현암이 순 순히 받아 줄 사람도 아닐 것 같고, 화가 난다고 정말 그럴 승희도 아 니다.
‘아, 정말 이 돌덩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승희는 그래도 포기하기 싫어 헛된 망상까지 하기 시작한다. 지나 가던 불량배라도 집적거려 주지 않나. 그러면 설마 현암 군이 가만 히 있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게 해서 현암 군이 나를 구하고 나면 기 분이 풀리려나. 아, 제기랄. 그렇다고 불량배가 내 마음대로 소환되 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허나 아무리 무뚝뚝한 석상이라도 단 하나, 승희가 믿어 의심치 않 는 것이 있으니 불량배 따위는 백 명이 모여도 현암의 손가락 하나 당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치졸한 망상조차도 태연히 즐길 수 있 는 건지 모른다. 그런 승희의 마음을 천지신명이 읽기라도 한 듯 저 만치에서 껄렁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 저게 뭐야? 오, 경치 좋은데? 아가씨 예쁘네.”
이렇게 후진 표현을 정말 현실에서 쓸까 싶을 만큼 싸구려 말투지 만 승희에게는 반갑기 그지없다. 승희는 현암이 옆에 있기에 당연히 두려움 따위는 애당초에 있지도 않다.
어쩌면 그런 것 때문에 이 무뚝뚝한 돌덩어리를 절대 떠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물론 단순하게 힘만이 아니라 이런 무뚝뚝한면까지 포함해서 좋게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어쨌거나 하루 종일 실패만 계속하다가 간신히 찾아온 행운(?)의 기회다. 승희는 놀 란듯 현암의 옆에 바싹 몸을 붙이며 말한다.
“어머머, 어떻게 해? 불량배인가 봐.”
그러나 현암은 흘끗 돌아볼 뿐 대답이 없다. 남자들이 저쪽에서 비 척거리며 다가오는데, 모두 세 명이다. 보아하니 그런대로 차림새들 이 깔끔한 것이 승희가 애당초 바랐던 불량배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술 이 많이 취해서 술김에 몇 마디 장난을 하는 것 같다. 더구나 옆에 남 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무안한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고 한다.
‘아! 세상에 저것들. 불량배도 못 되니? 세상에 불량배가 이렇게 귀했어?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살기 좋았다고?’
승희에게는 적어도 불량배가 없는 지금 이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 진다. 현암은 다시 고개를 똑바로 돌려 앞만 볼 뿐 뭐라고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부아가 치민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들을 향해 소 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놈들아! 멀쩡히 있는 여자 희롱하냐? 여자한테 무슨 소리야? 너희 깡패야? 양아치야?”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언성을 높여 시비를 걸자 술 취한 남자들이 기가 막힌 듯 돌아보며 힐끔거린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드세서 그런지 애당초 두려움을 갖지 않아서 그런지 우습게도 그쪽이 겁을 먹고 주춤거리는 것 같다.
승희는 속으로 욕했다.
‘아후, 저런 바보들. 여자가 무서워?’
속으로 갖은 욕을 해대니 겉으로 표현도 더 드세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승희는 아예 목청을 더 높여 버린다. 어정쩡하게 안 되면 화끈하게 자극시킬 생각이다. 어떻게든 이 돌덩어리를 움직이게 하 기 위해서.
현암은 그제야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리려는 듯했지만, 승 희는 불량배 아닌 불량배들에게 더욱 소리를 질러대며 그들을 화나 게 만들었다. 화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슬며시 불량배가 되게끔 기 세를 북돋아 주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아주 이상한 말싸움이었지만 결국은 참다 못해서, 혹은 술기운에 의해서인지, 그중 하나가 반팔 차림인데도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 을 하며 다가왔다.
‘휴…… 됐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쉰 승희는 현암에게 조바심 나는 척 말했다.
“현암군, 어떡해?”
현암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 멋있다. 현암군.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현암이 앞을 막아서자 다가들던 사람은 주춤했으나 동료가 위험 에 빠진 것처럼 생각되자 나머지 두 사람도 달려왔다. 세 사람이 에 워쌌지만 현암은 그들을 무심한 눈길로 쳐다볼 뿐 팔조차 들어 올리 지 않았다.
승희는 의아했지만 그래도 현암의 실력을 의심치는 않는지라 겁 내지 않았다. 머릿수가 많은 것을 믿었는지 맨 처음 나섰던 남자가 주먹을 휘둘러 현암에게 달려들었다. 승희의 눈에조차 슬로 모션처럼 보일 정도로 느려 터진 일반인의 주먹인지라 승희는 현암이 어떻 게 그것을 막을까만 흥미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 며 남자의 주먹은 그대로 현암의 얼굴을 후려쳤다. 현암은 고개만 조금 옆으로 돌렸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 이거 뭐야? 완전 물이네?”
조금 용기를 얻은 듯 나머지 두 사람도 다가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서 거침없이 현암의 온몸을 정신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현암이 꼼짝도 않고 반항도 안 하니, 스트레스 해소용처럼 생각되는 모양이었 다. 정작 그 광경을 지켜보는 승희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현암군, 왜…… 대체 왜?’
현암은 까딱도 하지 않은 채 꼿꼿이 선 채로 맞고 있었다. 보다 못 해 승희는 핸드백을 꽉 쥐며 현암을 구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자들은 승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때리는 데만 집중했다.
승희는 억울해서 남자에게 달려들면서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애 염명왕의 힘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꼼짝도 않고 서서 맞고 있던 현암이 승희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승희에게 손을 벌려 보인 몸짓은 그만두라는 뜻이 분명했다. 승희 는 울상이 되었지만 남자들은 킥킥거리며 계속 현암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현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승희만을 엄격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절대 안 된다는 무언의 신 호만 보내고 있었다. 승희는 계속 맞는 현암이 안쓰러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뭐야, 현암 군. 뭐야, 도대체… 바보…………… 바보……”
승희가 눈물을 보이는 순간, 현암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 간 퍽퍽 하고 내리치던 소리가 갑자기 빡! 뚝! 하는 소리로 바뀌었 다. 그와 동시에 현암을 때리던 세 남자가 주먹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손!!”
“뭐, 뭐야 이건?”
“돌덩어릴 친 것 같잖아. 어이구, 부러진 거 같아.”
삽시간에 현암의 몸이 돌덩어리나 쇠뭉치처럼 변해 버려 세 사람 모두 동시에 손을 다친 것이다. 그러자 현암은 가만히 세 사람에게 다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더 하지그래?”
“와악!”
세 사람은 현암의 태연한 태도보다도, 여태까지 그렇게 두들겨 팼 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긁힌 상처 하나 없는 현암의 얼굴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덤덤하지만 뭔가 무섭기 그지없는 눈 빛도. 세 사람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몸을 질질 끌며 뒤로 도망가 다가 급기야는 비명을 지르며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현암은 뒤쫓지도 않고 손 하나 까딱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보고 있 었을 뿐이다. 갑자기 뒤에서 승희가 현암의 뒤통수를 핸드백으로 퍽 갈겼다. 현암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승희는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뭐야 도대체. 현암군, 바보같이 왜 맞고 있어? 왜!”
“하나도 안 아팠거든.”
현암이 태연하게 말했지만 승희는 계속 울면서 소리를 질러 댔다.
“바보, 바보!”
“승희야, 사람들에게 함부로 힘을 쓰면 안 되잖아. 사실 내가 공력을 쓴 것도 그래서는 안 되는………….”
승희는 참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바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지? 나는 현암 군이 맞는 게 싫단 말 이야. 왜 그깟 것들에게 맞고 있어? 안 아프면 다야? 기분은 안 나 빠? 그깟 것들이 그렇게 무시하는데, 현암 군은 자존심도 없어?”
현암은 그 말에 조금 고개를 숙였으나 천천히 말했다.
“나도 자존심은 있다.”
“그럼 뭐야, 왜 바보같이 맞고만 있어? 응? 그러고도 남자야? 응?”
현암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이럴 때 세우는 자존심이 아니다.”
“몰라. 난 모른다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 걱정은 조금 도 안 해 주는 거야?”
현암은 뭐라 할 말이 없어서인지 입만 굳게 다물고 있었다. 승희는 성질을 못 이겨서 힐 굽이 부러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쾅쾅 발을 구르며 외쳐댔다.
“어차피 현암 군은 짐 들어 주러 온 것뿐이지? 나도 짐덩어리나 마찬가지인 거지? 아, 정말・・・・・・ 정말로・・・・・・ 난, 난…….”
승희는 주르륵 눈물을 흘리더니 부러진 굽을 한 채 절뚝거리며 달려가 버렸다.
승희가 몸을 돌리자마자 현암의 무뚝뚝하게 굳은 얼굴이 안타까 운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현암은 손을 내밀려는 듯이 오른손을 약간 들어 올리다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내렸다. 그사이 승희는 엉엉 울면서 저만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현암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지며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현암은 승희가 간 반대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며 두어 발자국 옮기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방파제 언덕의 끝은 바다가 보이긴 했지만 청량하지도 않았고, 풍경도 그럴 듯하지 않았다.
매연 때문인지 구름 때문인지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현암은 무 심코 옆에 있는 돌멩이를 하나 들고 모랫바닥에 낙서를 했다.
‘승희’
두 글자를 쓴 현암은 옆에 기다란 작대기 두 개를 그어 등호 표시를 했다. 그리고 그 옆에 다시 몇 자를 썼다.
‘승희= 짐덩어리’
현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돌을 들어 그 밑에 썼다.
‘짐 들어 주고 싶다. 언제까지나……’
거기까지 쓰다가 현암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몸을 일으켜 발로 쓱쓱 비벼 낙서를 지워 버렸다. 낙서만 지워진 게 아니 라 땅이 살짝 파일 정도로 힘주어 문댔다. 그리고 손에 들었던 돌을 저 멀리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
현암의 힘을 받은 조그마한 돌은 총알처럼 날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갔다. 현암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항상 무표정하고 덤덤하던 현암의 얼굴에 이렇게 깊은 수심이 드 리워진 것을 승희가 봤다면, 어쩌면 기뻐했을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승희 앞에서는 현암은 결코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현암도 눈치 없는 석상은 아니다. 도리어 눈치라면 빠른 편에 속한 다. 오히려 그렇기에, 승희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현암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무뚝뚝한 돌덩어리라고 한승희의 표 현은 현암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은 것인지도 모른다. 현암의 마음은 그게 아니더라도, 그게 맞다.
‘돌덩어리….. 그래, 난 돌덩어리일 뿐………….’
새벽녘이 되어서야 현암은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 심 어린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박 신부는 그때까지 책을 읽으며 태 연히 현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힘이 없나, 현암 군?”
현암은 조금 망설이다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짐 들어 주는 일이 너무 힘들더군요. 승희는 무사히 잘 도착했을까요.”
“안 그래도 승희가 전화했다네. 자기가 먼저 왔다며 자네 잘 왔는 지, 그리고 미안했다고 전해 달라는군.”
“아.”
현암의 안색이 잠깐 밝아지는 듯하다가 곧 필사적인 노력에 의해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쉽게도 박 신부는 그 짧은 순간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알아차렸다 해도 박 신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가는데 준후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형,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응. 짐 들어 주다가.”
“그래요. 그런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죠?”
“아니, 기운이 없지는 않아…………….”
현암은 애써 준후에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말이지. 준후야.”
“네?”
“짐 들어 주는 것보다, 짐 안 들어 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렵더라.”
“네? 무슨 말 하는 거예요, 형?”
그러자 현암은 슬픈 미소를 띠며 조용히 얼버무렸다.
“넌 아직 몰라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