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5화 – 그들이 살아가는 법 5 : 사과씨앗

퇴마록 외전 5화 – 그들이 살아가는 법 5 : 사과씨앗


사과씨앗

다음 날이었다. 벽 쌓기를 하다 시장기를 느낀 현암은 방으로 돌 아왔다. 코펠에 물을 받으려다 보니 박 신부가 준 사과 상자가 보였 다. 현암은 웃으며 코펠을 내려놓고 사과 하나를 꺼냈다. 씻는 것도 귀찮아 대충 팔에 슥슥 문지른 다음 아삭하고 깨물자 시큼하면서도 아릿한 단맛이 박 신부의 마음처럼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현암은 준후의 기척을 느꼈다. 처음에는 이 꼬마가 어디로 사라졌 는지 도대체 감도 잡을 수 없었는데, 박 신부의 집에 차차 적응을 하 며 마음을 안정시키자 감각이 예민해져서인지 준후의 기척도 희미 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준후는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 숨어서 움 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 꼬마는 무슨 주술이라도 쓰는 것인지 (물 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냥 자신을 투명하게 만들든지, 혹은 주 변과 동화되어 보이지 않게끔 만드는 것 같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사각지대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기 도 했다.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현암도 결코 보통 사람은 아닌지 라 이제는 준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현암은 다시 한번 사과를 덥석 베어 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녀석도 먹고 싶은가? 근데 왜 오지 않지? 그냥 가져다 먹으면 될 텐데.’

현암은 자기가 먹던 사과를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사과 상자를 뒤적였다. 그중 가장 붉고 맛나 보이는 사과를 골라 들어 보이며 말 했다.

“준후라고 했지? 이거 먹어라.”

현암이 말했으나 준후가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척 을 느낀 이상 마음먹고 준후를 찾아내려면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해서 아이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암은 싱긋 웃으며 자기가 먹던 사과를 서둘러서 와삭와삭 베어 먹고는 다시 상 자를 열어 제일 좋은 사과만 골라냈다. 여섯 개의 사과를 한꺼번에 들고 방문 앞에다 늘어놓았다. 현암이 일어나 등을 돌리자, 등 뒤에서 준후의 기척이 슬쩍 느껴졌다.

‘수줍음을 타는 건지 아니면 내가 무서운 건지. 거참. 꼬마들한테 는 이럴 때 뭐라고 해야 되지. 이거 원・・・・・・ 말하기가 쑥스러워서.’ 

현암은 그냥 싱긋 웃으며 사과를 와삭와삭 베어 먹었다. 박 신부에 게는 라면만 먹어도 끄떡없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사실 라면이 라면 신물이 나는 터였다. 그러기에 더 맛있는지도 몰랐다. 현암이 집어 든 사과를 먹어 치운 다음 다른 사과를 집는데 아주 저 멀리, 건 물의 반대편 끝 방 즈음에서 아주 미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아 삭아삭 하는, 현암보다는 훨씬 조그맣고 조심스럽게 먹는 소리가 났 다. 분명 준후가 혹시라도 들릴까 숨어서 사과를 갉아 먹고 있는 소 리였다.

‘뭐가 그리 수줍어서’

현암은 웃으며 거침없이 와삭와삭 사과를 먹었다. 보통 사람에게 는 절대 들리지 않을 것이지만 예민한 현암의 귀에는 흐릿하게나마 준후가 사과 먹는 소리가 들렸다. 장난처럼 그 소리에 나름대로 박 자를 맞춰 가며 사과를 먹었다. 현암의 입가에 점점 커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현암은 사과를 먹어 힘이 났는지, 아니면 뭔가 각오를 했는지 여태 까지 천천히 미련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 쌓아 가던 벽돌을 훨씬 빠 른 속도로 쌓기 시작했다. 시멘트를 개어 벽에 발라 매끈하게 단장 까지 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였다.’

박 신부에게도 아직 과거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 러나 현암은 벽돌담을 쌓는 것을 동생 현아를 매장하는 것과 흡사한 기분으로 하고 있었다. 매장이라기보다는 추도하는 기념비를 세웠 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자기 마음속 외에 현아를 생각하는 마음을 둘 거처를 만들어 남은 미련을 떨쳐 보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 불어 그것으로 자신이 낸 구멍, 자신의 마음에 뚫렸던 구멍을 메워 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쌓아 가는 것일 지도…………….

‘나는 이제 새 길을 가련다. 신부님은 좋은 분이셔. 그리고 이제는 외롭지 않을 거야…………….’

현암은 미소를 지으며 시멘트를 다듬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 렀다. 서러움이나 한이 맺힌 눈물이 아니라 애틋하고도 정감이 넘치 는, 감격에 겨운 눈물이었다.

벽에 시멘트를 다 바른 후에는 한 점 흠집이 없도록 깨끗하게 다듬 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후련했다. 자제하고 있지만 원 래 성질은 몹시 급한 현암이다. 마음 같아서는 성질대로 방 안쪽에 벽지도 바르고 벽 바깥쪽에는 페인트칠도 하고 싶었지만 시멘트가 마르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현암이 새로 쌓은 벽에서 눈을 돌 리자 마당 끝에 흰 한복을 입은 준후가 보였다. 박 신부와 같이 있을 때 빼고 준후가 현암 앞에 혼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었다. 물론 준후는 현암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당 한 모퉁이 에 쭈그리고 앉아 흙장난이라도 하는 것인지 뭔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현암은 왠지 모르게 호기심이 들었다.

‘뭐, 흙장난하고 놀 나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신동에 주술이 세다고 해도 애는 애인가?’

현암이 천천히 다가서자 준후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주춤하며 어깨를 움찔하는 모습을 본 현암은 씩 웃어 주었다. 그러자 준후가 말했다.

“표정이 풀렸네요.”

짧은 말이었지만 현암은 뜨끔한 느낌을 받았다.

“풀리다니?”

준후는 곁눈으로 현암을 한참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무서웠어요. 그러니까 현암 님・・・・・・ 현암 아저씨……” 

“형이라고 불러, 인마.”

현암은 격의 없이 웃으며 말했으나 준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인마라뇨! 좋지 못한 표현이에요. 저에게 격의 없음을 나타내려 는 뜻임을 알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함부로 쓰시는 것이 제 귀에는 거북하게만 들리네요.”

조그마한 녀석이 장황하고도 까탈스럽게 말하자 현암은 어이가 없었으나 다시 한번 씩 웃었다.

“알았다. 그러니 형이라고 불러라. 내가 나이가 많지 않냐?”

준후는 대답 않고 다시 흙만 파기 시작했다. 현암은 조용히 한 발 짝 다가갔다. 준후도 고개는 돌린 상태였지만 현암의 발걸음을 느꼈 는지 살짝 어깨를 움찔하다가 흙을 만지기 시작했다.

현암은 조금 더 다가가려다 멈칫 서서는 조심스레 준후에게 말했다.

“너, 내가 무섭냐?”

그러자 준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무서웠어요.”

“어어. 이거 마음 아프네. 왜? 내가 못된 사람 같아 보였어?”

준후는 당황스러웠는지 말을 약간 더듬거렸다.

“아니요. 하지만・・・・・・ 그러니까. 뭐랄까…………… 그 손에 한 방 맞으 면 나는 그냥 ・・・・・・ . 나 같은 건 그냥・・・・・・ . 나 겁쟁이 아니거든요? 그래도 어떻게 겁이 안 날 수가…”

아까의 장황한 표현력은 어디 갔는지 준후가 주섬주섬 말하자 현 암은 밝은 음성으로 하하 웃었다.

“나는 네가 더 무섭거든? 어떻게 사람 손에서 불이 나오고 전기가 나오냐.”

준후는 여전히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기가 아니라 뇌전이에요. 뇌전. 불도에서는 금강이라고도 부르 고 법어로는 바즈라예요. 물론 제가 아직 미숙하여 제대로 된 바즈 라의 기운을 뽑아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아아, 그만 그만. 그래, 그런 신기한 것도 아는 애가 이게 무섭다고?”

현암이 손을 들어 보이자 준후는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럼 안 무서워요? 아니 사람이 어떻게 맨주먹으로……………”

현암은 휴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아무나 때릴 사람 같냐?”

준후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럼 내가 아무한테나 주술을 쓸 애처럼 보여요?”

현암은 다시 한번 웃으며 양손을 활짝 들어 보였다.

“졌다. 네 주술보다 말재주가 더 무섭네?”

준후도 슬쩍 웃었지만 지지 않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솔직히 나도 형…… 이제 형이라 불러도 되죠? 형의 그 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어요.”

현암은 말했다.

“뭐가?”

준후는 잠시 망설이듯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리다 말했다.

“예전의 형 표정요.”

“왜?”

“글쎄요. 세상 다 산 것 같이 보여서요. 난 그게 무서워서…………….” 

현암은 자기 마음속의 갈등을 이런 어린 꼬마 녀석이 대번에 짚어 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렇게 신기해할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따지자면 자신도 그렇고, 오라라는 것을 뿜는 박 신부도 그렇고, 여기 있는 준후는 한 술 더 뜬다. 일반 사람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모여 있다. 그러니 어지간한 일들은 신기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현암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에게도 보일 정도로 내가 티를 냈구나.”

“뭐, 그냥…….”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니?”

“예.”

“역시……. 이젠 마음의 짐을 조금 던 것 같아서.”

“그랬나요?”

준후가 말하며 허리를 폈다. 현암이 보니 흙바닥에는 준후가 손댄 자국만 남았을 뿐 아무것도 없다.

현암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 했니?”

준후는 대답 대신에 자기가 손자국을 낸 곳에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불경 같은 것을 한참 외웠다. 분위기 가 이상하게 심각한 것 같아서 현암은 말도 꺼내지 못했다. 준후는 한 참이나 염불인지 독경인지를 외더니 말없이 등을 돌리며 가려 했다. 현암이 준후를 불러 세웠다.

“준후야.”

“네?”

준후가 아까보다는 훨씬 선선해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현암이 물었다.

“다시 묻는데, 너 뭐 한 거니?”

“묻어 준 거예요.”

“묻어? 뭘?”

“어제 먹은 사과 씨앗요.”

“웅? 그・・・・・・ 그걸 다?”

그러자 준후는 또 깐깐한 표정을 짓고는 현암을 가르치기라도 하듯 길게 늘어놓았다.

“무릇 생명을 지닌 것은 뭐든 귀한 거예요. 사과가 열매를 맺은 것은 씨앗을 퍼뜨리기 위함이니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저는 그렇게 배우며 컸어요.”

“그러니까 그게…..”

현암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이답지 않게 엄청 똑똑 한 꼬마와 입씨름을 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았다. 무의미하다기보 다는 솔직히 백 번 붙어 봐야 백 번 다 자신이 지는 결과만 나올 것 같다.

“준후야.”

“예?”

“너, 착한 녀석이구나.”

“그, 그게 뭘요・・・・・・ . 그냥 당연히 제가 할 바를…..”

“형이랑 좀 놀까?”

“예? 아니, 놀다뇨, 그게 무슨……. 전, 전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