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8화 – 보이지 않는 적 2 : 두 번째 방문

퇴마록 외전 8화 – 보이지 않는 적 2 : 두 번째 방문


두 번째 방문

“그 집에 또 가는 겁니까? 송아지만 한 개가 있는데도요?”

비탈길을 터덜터덜 올라가며 현암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오늘은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아예 비탈길 아래에 차를 대야만 했 다. 그러니 긴 언덕길을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 런 이야기를 더 나누게 된 셈이다.

현암의 말에 박 신부가 대답했다.

“그・・・・・・ 그 개 송아지만 하지는 않더군. 내가 잘못 봤네. 그러니 더 트집 잡지 말고.”

“어휴. 트집 잡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그 집에서 뭔가 느껴지신 겁니까?”

박신부는 힐끗 현암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는 아직 그렇게 영감이 발달하지 못한 것 같군.”

“예, 뭐. 사실은 거의 없다시피 하죠.”

현암은 왼팔 소매를 걷어서 거기에 차고 있던 월향검을 살짝 보이며 말했다.

“이걸 눈가에 대면 월향이 힘을 빌려 주는지 살짝은 보입니다만.

저 혼자 힘으로는 특별히 그런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양의지체라 상단전에 공력이 안 들어가서 그런 걸 테죠.”

“그러면 그동안 몇 번 만난 상대들은 어떻게 느꼈지?”

“옛날에 도혜 선사님이 주신 부적이 있었죠. 해동밀교에서 만든 겁니다. 한데 그건 이미 다 써 버렸어요.”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현암의 왼손에 채워져 있는 월향을 편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그 칼・・・・・・ 항상 차고 다녔었나?”

“예. 지난번 해동밀교엔 싸우러 갔던 게 아니라서 그냥 갔었지만요.”

“그건 좀…….”

“왜 그러시는데요?”

“그 칼에 한 여인의 영혼이 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상대에게 휘두르는 건 좀・・・・・・ 좀 그렇지 않을까?”

박 신부가 조심스레 말했으나 현암은 월향에 있어서만큼은 날카 로운 반응을 보였다.

“신부님, 귀신 붙은 칼이라고 싫어하시는 거죠? 아무래도 신부님 이 믿는 바와는 상치되는 면이 있으니…………….”

“아니, 아니. 나는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은 아닐세. 하지만 말이 야. 그 칼의 경우에는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

현암은 말했다.

“글쎄요, 저도 어떻게 해서라도 승천이든 성불이든 그게 아니면 천국으로라도 보내 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됩니다. 방법도 모르겠고. 저주가 붙어서 절대 안 풀린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예.”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걸 무기로서 휘두르는 건……. 어떻게 보면 여자의 몸을 무기로 쓰는 것 아닌가? 그게 아무래도……………” 

“여자가 아니라 칼입니다. 이미 월향은 여자라기보다는 칼이라고 요. 그리고 분명…….”

현암은 말끝을 흐리다가 말했다.

“월향 스스로가 어떤 일에 쓰였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습니다. 말 이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어요. 심심해서 그러는지, 절 돕고 싶어서 그러는지, 뭐라도 해 보려는 의지가 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현암이 한참이나 말하자 박 신부는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내가 진정 그 칼을 미워한다고 믿지는 않겠지? 다만 그건 위력이 강한 만큼 남의 눈에 띄기도 쉬워.”

“그건…… 그렇군요.”

“더 뭐라고는 않겠네만 사용해야 된다면 조심해서 사용하게.”

박신부가 말하자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비탈길만 올라갔다. 조금 더 걷다가 현암이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그런데 왜 영력을 느끼는 것에 대해 물으셨죠?”

“그거야 자네가 왜 자꾸 그 집을 찾아가는지 물어보니까 그런 거 아닌가?”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왜 그 집을 자꾸 찾아가시는데요?”

“영력이 느껴지니까.”

“그 집에서요? 그런데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던데요. 할머니 성 격이 괴팍하지만 이상할 정도는…… 아, 이상은 하지만 그런 면으 로 이상한 것 같지는 않고요…….”

“글쎄. 그러니 나도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분명히 뭔가가 느껴지 는데 이거다 할 게 없으니. 아주 미약하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 는 것 같지만 분명히 느낌이 오긴 해. 특별한……..”

박신부가 뭔가 더 말하려다가 마는 것을 현암도 느꼈지만 대수롭 지 않게 말했다.

“그게 어느 정도 느낌입니까? 표현하시기 어렵겠지만 설명을………………”

“그러니까 뭐랄까.”

박신부는 판자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일세, 내겐 확실히 느껴진다 네. 영적인 기운이라는 것은 아주 약간이지만 어디에나 퍼져 있어. 이 주변에도 아예 느껴지지 않는 집은 별로 없을 정도지.”

“얼마나 강한 느낌이냐가 문제겠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예를 든다면….”

박 신부는 손을 들어 손가락 반 마디 정도의 틈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영력의 수준이 보통 이 정도라고 한다면.”

그러더니 박 신부는 손가락을 조금 들어 올려서 손가락 마디 삼분의 이 정도의 틈을 만들어 보였다.

“그 집에서는 이 정도가 느껴지더란 말이지.”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큰 차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현암 군. 하지만 이게 중요해. 평균적으로는 별문제 없다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약간이라도 평균보다 높으면 조사해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네. 작은 차이니까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 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지 누가 아는가. 그러니 세밀히 살펴봐야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렵고 지루한 일이야. 무슨 영장을 가지고 수색하는 것도 아니 고 남의 집 문을 부술 수도 없잖은가. 그러니 뭔가 핑계를 대서라도 방문해야 되지 않겠나?”

수긍은 했지만 현암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두 번째인걸요. 할머니도 오늘은 문을 잠그셨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 걱정일세.”

현암이 눈을 빛냈다.

“제게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만………….”

“음?”

“잘만 하면 그 집에 들어가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이번 에는 신부님이 할머니를 맡아 주셔야 됩니다. 살펴보는 건 제가 하죠.” 

“그래야 되나?”

“신부님이 둘러보셨지만 찾아낸 것이 없잖아요.”

“그렇긴 했네.”

“그러니 오늘 다시 찾아보신다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고 장담할 수 도 없잖습니까. 오늘은 제가 한번 둘러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좋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문은 어떻게든지 열 테니까 신부님은 할머니를 붙잡고 계세요. 성당에 나오라고 설득을 하시든, 또는 예 수님을 믿으라고 하시든, 신부님 마음입니다.”

“이보게, 현암군. 난 신앙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네.”

“그렇게라도 붙들어 두셔야죠. 그리고 그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 같고요.”

박 신부는 약간 얼굴을 굳혔다.

“자네 어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구먼. 오늘은 나보고 당해 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절대로요!”

“흠…….”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오늘은 제 가 둘러보는 편이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아서 제 시력 좋은 거 이제는 아시죠?”

현암이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기자 박 신부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할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기억해 두겠네, 현암 군.”

“어휴, 무섭습니다. 기억하지 마세요. 하하.”

현암은 슬쩍 받아치며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철문은 잠겨 있었지만 해결책은 간단했다. 오른손으로 담장을 잡고 공력을 조금만 넣어도 수월하게 담을 뛰어넘을 수 있 다. 그냥 들어가 개를 침묵시키고 자물쇠를 연 다음 다시 담을 넘어 나오면 그만이다. 그러고는 당당히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잘되었지만 역시나 할머니는 어제보다 더 길고 굵은 지 팡이를 들고 뛰어나왔다.

“야, 이 목사 놈아.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내가 이래 봬도 전에는 신내림을 받은 적도 있다고! 내가 교회 같은 데 나갈 것 같아?” 

할머니가 악다구니를 쓰고 박 신부가 그 앞에서 쩔쩔매는 사이 현 암은 어제 박 신부가 돌아갔던 뒤뜰로 들어가서 집 안을 유심히 살 펴보았다.

현암의 시력은 남보다 월등할 정도로 높기 때문에 흐린 창문 너머 로 보아도 안을 똑똑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월향검 을 눈가에 갖다 대고 영의 자취가 없나 찾아보기도 했다. 몇 분에 불 과했지만 그런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은 단출하고 초 라한 집의 방 내부도 창 너머로나마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조금도 수 상한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게 있다면 전화국에서 지급 되는 단말기가 마루에 하나 있다는 것 정도였다. 허리가 굽은 할머 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고는 그 단말기 하나였으나 할머니 라고 PC 통신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어차피 전화국에 신청만 하 면 나오는 단말기가 특이한 단서가 될 리는 없었다.

결국 허탕을 친 현암이 뒤뜰에서 나오자 할머니에게 들들 볶이고 있던 박 신부는 기대가 가득 찬 눈빛을 현암에게 보냈다. 그러나 현 암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박 신부는 풀이 죽 어서 버티던 것을 멈추고 노파에게 밀려나듯 의식적으로 뒷걸음쳤 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밖으로 쫓겨나자마자 문이 거칠게 닫혔다. “에이, 육시럴 놈들! 썩을 놈들! 또 오기만 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뜰을 지키고 있던 개는 현암이 나갈 때까지 개집 구석에 틀어박혀 깽 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


집 밖으로 쫓겨나자마자 박 신부는 현암에게 물었다.

“찾아낸 게…… 없나?”

“글쎄요. 제 눈에도 특별난 건 보이지 않던걸요. 다만…………….”

“다만, 뭐?”

“방 안에 통신 단말기가 있더군요.”

“단말기?”

“예, PC 통신 하면 전화국에서 빌려 주는 기계 말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지?”

박 신부는 자못 심각했지만 현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저 할머니가 PC 통신을 한다는 의미죠.”

박 신부는 김이 빠진 듯 말했다.

“연세와 어울리진 않지만 그게 특이한 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도 그렇게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럼, 뭐?”

“그러니 별거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 다만…………… 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자 현암은 말했다.

“네. 그랬죠. 그런데… 이제는 제가 조금 더 조사하고 싶네요.” 

현암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대문 한쪽 옆에 있는 우편함을 바라 보았다. 우편함의 입구가 좁아서 손을 집어넣진 못할 것 같았다. 박 신부는 현암이 우편함을 쳐다보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뒤져 볼까 했었지만 남의 우편물을 함부로 보는 것도 그렇 고, 손이 들어가지 않으니 안 될 것 같아.”

현암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두고 보십시오.”

현암은 오른 손바닥을 활짝 펴서 우편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 치시킨 후 태극기공 중의 ‘흡吸)’자 공력을 발했다. 보통 사람은 꿈 도 못 꿀 일이지만 워낙 현암의 공력이 막대한지라 아주 약간의 힘 만 사용했는데도 우편함 안에 있던 우편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현암 의 손에 달라붙었다. 그것을 보고 박 신부의 눈이 커졌다.

“오, 신기하군, 마술인가?”

“마술이 아니라 공력을 운용한 겁니다. ‘흡’ 자결이라고, 공력을 빨아들이는 힘으로 전환시키는 거죠. 별거 아닙니다.”

“자네는 별거 아니라고 말하지만 정말 신기한걸.”

“원, 신부님도・・・・・・ . 전 신부님 오라가 더 신기…………….”

“아, 됐네. 됐어. 그건 그만두고…….”

박 신부는 현암의 손에 붙어 있는 우편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의 우편물들을 이렇게 함부로 보는 것은 죄가 분명하지만…………….”

박신부는 급히 성호를 그었다.

“주여, 용서하소서.”

박신부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뭐, 할 수 없지. 이 정도는 주님께서도 용서해 주실 테지…….”

현암은 그런 박 신부가 순진해 보여서 살짝 웃었다.

“훔쳐 가는 것도 뜯어 보는 것도 아니고, 살짝 겉봉만 보겠다는 건 데요. 뭘.”

현암은 우편물들을 한통씩 들여다보았다. 박 신부는 기대감을 가 지고 말했다.

“혹시 누군가에게 편지가 왔다면 아는 사람들 주소와 이름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혹시라도 그중에 뭔가 관련된 사람이 있을지도” 

현암은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불행하게도 없는 것 같네요. 전부 고지서 아니면, 관공서에서 발 송된 간행물, 광고 우편물 같은 거예요.”

현암이 말하자 박 신부는 낙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현암이 고지서 한 장을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한 장은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한가, 현암 군?”

현암이 박 신부에게 보여 준 것은 전화 요금 고지서였다. 현암은 거기에 적힌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요……………..”

박신부가 보니 고지서에 ‘223,740원’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전화 요금이 많이 나왔군.”

“예, 그렇죠.”

현암은 다시 아래 칸의 세부 사항 항목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은 시외 통화, 국제전화 요금 등을 세분화하여 표기하는 칸이었는데 다른 항목은 모두 ‘0’이었다.

“그러니까 일반 전화만 이십이만 원어치 한 셈이라고? 그렇게 할 수가 있나? 이상해 보이는데?”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닙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나?”

“PC 통신이 일반 전화 회선을 사용하기 때문에 통신을 오래 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 정도 요금이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다더군 요. 물론 보통은 집에서 혼나고 말지만요.”

박신부는 현암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게 뜻하는 게 뭘까?”

현암은 맥없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할머님이 PC 통신을 거의 매일, 그것도 오래 하신다는 거죠. 그것 말고는 특별한 게 없네요.”

“글쎄. 할머니가 PC 통신을 이렇게 오래 한다는 건 확실히 드문일이긴 하지. 그런데 그렇다 해도……”

박 신부는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건 영적인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잖아!”

현암이 넌지시 말했다.

“우리의 퇴마행에서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아아, 제발 그만두게, 현암 군.”

“농담이었습니다. 신부님. 기분 상하진 않으셨지요?”

“괜찮네. 그런데, 그러면 무슨 다른 수가 없겠나?”

현암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집을 뒤져 봐야 아무것도 찾을 수 없고, 할머님도아무 말도 해 주시지 않으니.”

현암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차라리 PC 통신에 들어가서 할머님이 뭐 하시는지 보는 건 어떨까요?”

“난 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인데, 거기 들어가서 어떻게 할머님을 찾 는다는 거야?”

“그거야 간단하죠. 아이디를 검색하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고, 공 개된 대화방 같은 데 있으면 말도 걸 수 있죠. 우린 이미 할머니한테 찍힌 셈이니 이편이 접근하기에 편할지 모릅니다.”

“아, 그런가? 그거 좋은 방법이군. 그런데 아이디는 어떻게 알고?” 

그러자 현암도 막막해졌다.

“그건……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후우. 그러면 아무 소용없지 않은가?”

“그러게 말입니다.”

현암도 낙담한 듯 전화 고지서와 다른 우편물들을 도로 우편함에 넣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현암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말 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직접 할머님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는 PC 통신을 통해서 말을 붙이는 게 쉽기는 할 겁니다. 어떻게 되었든 아 이디만 알아내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아이디를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아닌가.”

“알아낼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 할머님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고, 우린 이미 얼굴도 알려졌는데…….”

현암의 머리에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한데 말입니다. 신부님.”

“뭔가, 현암 군?”

“제게 뭔가 떠오르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만.”

“오오, 그래? 자네가 이렇게 꾀주머니일 줄은 몰랐네. 어서 말해보게.”

“글쎄요. 꾀주머니는 아닌데요. 그냥 궁하니까 그런 건데・・・・・・ 글 쎄, 그게…….”

현암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것을 보고 박 신부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안경을 치켜 올렸다.


현암이 생각해 낸 방법이라는 것은 간단했지만 가능성이 높았다. 다름 아닌 준후를 이용하는 것이다. 현암과 박 신부는 할머니에게 얼굴이 팔려 있으니 얼굴을 모르는 준후를 보낸다. 더군다나 할머니 라면 응당 똘똘하고 귀엽게 생긴 아이를 좋아할 것이라는 심리적인 전술도 포함된 작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아이디라는 게 뭐죠?”

준후가 물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PC 통신이라는 것을 하려면 통신 사이트에 접 속이라는 것을 해야 되거든? 그때 만드는 일종의 이름인데………….” 

“사이트는 뭐고 접속은 뭔데요?”

“아. 그러니까 사이트라는 건 통신선으로 여러 사람을 연결해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네트워크는 뭔데요?”

“아……”

현암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준후에게 이런저런 제반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이 어쩌면 할머니에게서 아이디를 알아내기보다 더 어 렵지 않을까 싶었다. 더구나 준후가 호기심을 가지고 앞서 나가며 꼬치꼬치 캐묻자 설명해 주는 현암은 너무 힘들었다. 지친 나머지 잠시 쉬려고 나온 현암은 거실에 앉아 신문을 보던 박 신부에게 반 쯤 농담 삼아 물었다.

“신부님・・・・・・ “

“왜 그러나?”

“신부님의 능력 중에 남의 마음 읽는 건 없습니까?”

박신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신문을 넘기며 웃었다.

“그런 능력 있으면 벌써 썼네. 난 자네야말로 그런 능력 없나 생각해 보았네만.”

“힘쓰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런 쪽으로는……………. 그런데 혹시 준후는 안 될까요?”

“글쎄, 준후라고 해도 꼭 안다는 법은 없지. 내가 알기론 그건 주술의 영역을 넘어서네. 초능력이라 할 수 있고 선천적인 거니 아무 리 준후라도 무리 아닐까?”

“초능력요?”

“음. 그런 사람들도 있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염동력이라는걸 가진 이가 있고.”

“와. 놀랍네요.”

“이봐, 난 자네가 더 놀라워.”

“전 되레 신부님이나 준후가…………… 흠흠. 그만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소모적인 반복은 그만하세.”

“예예.”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런 투시력을 가진 사 람은 없어.”

“그렇겠지요. 하하. 그런 게 흔할 리가 없겠죠?”

“당연하지. 지금 우리 세 사람이 모인 것만 해도 벌써 일반적인 밀 도는 훨씬 초과했어. 더 이상은 확률적으로도 무리 같네.”

“그런 게 있으면 편하겠지만…….”

“헛된 망상 하지 말고 그냥 우리 할 수 있는 바대로 노력하는 게 최고일세. 원래 계획대로나 하게.”

박신부는 딱 잘라 말했다.


현암이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노력한 덕에 준후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임무라고 하기엔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래도 준후는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좋아했다.

그날 밤 준후는 막 잠자리에 들려는 현암을 쫓아와 말했다.

“현암 형! 저도 이제 참여하는 거죠? 퇴마사 된 거죠?”

“어. 그건 아냐.”

“나도 돕잖아요!”

“어휴, 넌 다만・・・・・・ 그러니까…………… 뭐랄까…………… 아주 한정적으로 이번 일에 대해서만 도움을 주는 거야.”

“그러면 다음부터는 또 나만 빼놓고 가는 거예요?”

“아마도 넌 공부하래두.”

“공부 충분히 했거든요? 혼자 집에 있으면 얼마나 심심한 줄 알아요?”

준후가 다시 불평했는데 이것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암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하지만 어쩌겠니. 우리 일이 이런걸.”

“글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내가 해도 아무 상관없는 일 같은데.”

“어이, 그렇지 않아! 위험하다니까!”

“할머니 만나서 이야기 끄집어내는 게 위험하다고요? 제가 더 잘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현암 형 아니었어요?”

“어? 이번 일 말한 거였어? 이건 이번에만 해당되는 아주 특수한 경우고, 그러니까…………….”

준후는 어떻게 들었는지 박 신부가 현암에게 했던 말도 꼬투리 삼아 따지고 들었다.

“위험한 일은 백 번에 한 번 정도고 나머지 아흔아홉 번은 보통 이런 식의 별 볼일 없는 식의 일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나는 못 하게 해요? 내가 가진 능력이 박 신부님이나 현암 형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방면에 다양한……”

“준후야, 넌 아직 어리잖아.”

“현암 형.”

“왜?”

“지금 신부님하고 현암 형이 하는 건 확실히 선행 맞죠? 착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그럼 나이 어리면 착한 일 하면 안 되는 건가요?”

준후가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자 현암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다른 말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말야, 어린애들을 위험한 일에 나서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이건 어른들 일…….”

그러나 준후는 또 따지고 들었다.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죠, 아이들은 보통 어른보다 약하니까요. 그러니 보호를 하는 거겠죠?”

“그・・・・・・ 그렇다고 할 수도…….”

“그런데 현암 형, 내가 정말 약하다고 생각해요?”

현암은 말문이 막혔다.

“내 손에서 불이며 뇌전 나온다고 나보고 무섭다고 한 게 누구였죠?”

“그・・・・・・ 그래도 말이지…………. 그건 내가 그냥 한 말이고……………. 이 런 일 하다 보면 주술 말고라도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어. 엄청난 인내심이나 그런 것이 요구될 수도…….”

“나 혼자 가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같이 가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 고 싶을 뿐이라고요. 나도 퇴마사의 일원이 되었고 생일잔치도 같이 했잖아요. 그런데 집구석에 혼자 내버려 두고 두 사람만 돌아다니면 정말 나는, 나는…….”

준후가 울먹거리자 현암은 답답해졌다. 현암은 다가와서 준후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며 말했다.

“준후야, 네가 무슨 마음인지 알아. 네가 착한 것도 알고. 하지만 말이지, 이것만은 알아 두렴. 우린 결코 널 잡아 두거나 괴롭히려고 이러는게 아니란다. 정말 네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가 조금 더 크고 세상 경험이 많아지면 얼마든지 나서게 할 수 있어. 그 렇지만 그때까지는 적어도…………….”

“분명 내가 필요해질 때가 올 거예요. 당장 내일만 해도 내가 필요 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준후야, 그것은….. 다만……..”

“위험한 일에는 안 나서면 되잖아요. 하지만 나도 도움이 되고 싶 다고요. 정말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그러면 너도 수련을 하렴. 너도 분명 힘을 그냥 얻게 된 건 아닐 테고 필경 고된 수련을 해서 얻어진 힘일 텐데 그것들을 묵혀 두면 점점 무디어지지 않겠니? 너는 말야, 장래가 있어. 아이가 보호받아야 하는 이유는 약하다는 데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장래를 기대한다 는 데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지금 가진 엄청난 능력에 만족하 지 말고 조금 더 능력을 쌓으렴.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우리를 능가하는 더 멋진 일을 해. 그러면 되는 거야.”

현암이 애써 진심으로 말하자 준후는 간신히 수그러지는 것 같았 다. 아직도 불만스러운 모양이었지만 진심을 담은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비정상적으로 말재주가 좋은 녀석이라 반박하려면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현암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을 반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날 밤은 무사히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