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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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10화


승강구로 뛰어든 오닉스는 계단 전부를 뛰어넘어 단숨에 중갑판에 내려섰다. 육중한 몸이 떨어지자 갑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오닉스는 잠 시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러 형태의 배의 구조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바람처럼 움직인 오닉스의 몸은 잠시 후 노 잡이석의 입구 쪽에 나타났다.

노잡이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컴컴한 노잡이석에 나타난 완전무장의 검은 전사는 말로 표현되는 것보다 더한 박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노 예석 한쪽에 서 있던 노예장은 꺽꺽거리는 불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닉스 나이트!”

오닉스의 마스크에 뚫린 구멍 속에서 눈만이 번쩍이며 노예장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오닉스는 한손을 들어 간략하게 손짓을 보내었다. 노예장과 노예들 모두 알아볼 수 있는 손짓이었다. ‘모두 노를 놓고 엎드려라.’ 그러나 노예장은 그 손짓을 거부했다. 대신 노예장은 레보스호에 오른 이후로 한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퇘! 웃기지 마라! 나는 너처럼 목숨이 아까워 노스윈드의 개가 되지는 않는다!”

오닉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것은 뱃사람이 할 수 있는 모욕 중에선 최상급의 모욕 중 하나이다. 배는 목숨을 빼앗기 위해 달려드는 바다로부 터 뱃사람을 보호하는 유일한 피난처이며 그들의 어머니다. 따라서 뱃사람들은 절대로 배에 침을 뱉지 않는다.

오닉스는 아무 말 없이 노예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노예장은 급한 대로 옆에 던져두었던 채찍을 들어올려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닉스의 걸음이 잠깐 멈추었지만 그야말로 잠깐이었을 뿐이다. 오닉스는 눈앞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채찍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곧장 걸어갔다. 노예장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해적의 손목을 겨냥했다.

‘저 도끼를 떨어트려야 돼!’

차아악! 노예장이 휘두른 채찍이 오닉스의 손목에 감겼다. 노예장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 그 얼굴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의심 에 일그러졌다. 오닉스는 손목에 감긴 채찍채로 손을 위로 들어올렸고, 그래서 노예장은 앞으로 확 끌어당겨졌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노예장의 정수리를 향해, 오닉스는 세심하다 싶을 정도로 침착하게 도끼날을 가져다 박았다.

뼈와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가벼운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쪼개진 노예장의 몸은 오닉스의 배틀 엑스 아래 로 무너져내렸다. 불쾌하다는 듯이 노예장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오닉스는 손을 들어올려 조금 전의 손짓을 다시 보내었다. ‘모두 노를 놓고 엎드려라. ‘

노예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오닉스를 기쁘게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닉스는 노를 팽개치고 화다닥 머리를 숙이는 노예들을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노가 멈춰지며 레보스호는 이제 완전히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그런 레보스호를 향해 그랜드파더호와 물수리호, 바다사자호도 주위를 포위해 들어왔 다. 그리고 먼 바다에서는 질풍호와 페가서스호가 포신이 녹아버릴 정도의 포격을 가해 두 척의 카밀카르 배를 멀리 쫓아내고 있었다. 기함 레보스호 가 완전히 무력화된 이상 다른 두 척의 배도 노려봄직하건만, 질풍호와 페가서스호는 해적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냉정함으로 두 척의 배를 쫓아내기 만 했다.

레보스호의 갑판에 쓰러진 슈마허는 다 끝장났다는 심정이었다. 배는 포위되었고, 몰려든 해적선들에서는 해적들이 끝도 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노 는 완전히 정지했고 돛은 찢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총체적 절망 속에서도, 슈마허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바로 옆에 앉아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오는 라이온의 존재였다.

“이봐. 서 슈마허라고 했던가. 탁 깨놓고 대화 한번 해보자. 죽어가는 기분이 어때? 난 그게 항상 궁금했어. 물론 나도 죽을 테니까 언젠가는 알게 될 기분이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 그러니 이왕이면 죽어가는 자네가 동정을 베풀어 내게 자네 기분을 설명해 주면 좋겠구먼. 뭐라더라. 살아온 나날이 휙 지나간다던가? 정말 그래? 응? 정말 옛날 일들이 빠르게 지나가나? 아, 그래. 손발이 차가워진다고도 하던데. 그건 어때? 응? 자네 죽어가고 있잖 아. 죽고 나면 말 못하니까 상세하게 설명해 봐. 집중력을 가지고, 약간만 주의를 기울여보란 말이야.”

라이온은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서는 이런 돼먹지 않은 말을 끊임없이 주절거려 슈마허를 반쯤 돌아버리게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깨가 끊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슈마허는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라이온이라 불리는 이 미친 녀석의 입을 뭉개버릴 수만 있다 면 악마와 거래하는 것도 크게 나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만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슈마허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너 미쳤지?”

“응? 우리가 전에 언제 만났던가?”

“내가 너 따위 녀석을 언제 만났다는 거냐.”

“그럼 내가 미친 거 어떻게 알고 있지?”

슈마허는 자신이 왜 아직도 졸도하지 않을 정도의 굵은 신경을 가지고 있는지를 원망했다. 졸도했다면 이 미친놈의 종알거림을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때 엄청난 깨달음이 슈마허를 엄습했다. ‘아니다. 이놈은 내가 졸도하면 깨워놓고 중얼거릴 놈이다.’ 슈마허가 자신의 깨달음에 아연해하는 동안에도 라이온은 신기하기 그지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신기한데. 아, 자네 점도 칠 줄 아나? 잘됐군! 죽기 전에 내 올해 운수가 어떨지 좀 봐주지 않겠어? 나도 자네 운수를 봐주겠어. 뭐, 바보라도 짐작 할 수 있겠지만, 자네 운수는 볼장 다 봤지. 배는 격침되고 부하는 모두 잃고 자네는, 오, 맙소사. 난 사랑에 빠졌어!”

슈마허는 순간 소름 끼치는 기분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설마? 그러나 라이온의 눈은 그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불안함이 슈마허를 엄습했고, 그래서 슈마허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고, 공주님! 이 발칙한 놈!”

승강구 쪽에서 나타난 오닉스는 겨드랑이에 율리아나 공주를 끼운 채 나타났다. 율리아나 공주는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짐짝처럼 취급당 하는 것을 감수하고 있었다. 라이온은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필마온 기사단장에게 시집 가신다는 카밀카르의 그 공주님이신가 보군?”

라이온은 오닉스의 겨드랑이에 끼어 있는 율리아나 공주를 향해 화려한 동작으로 머리를 숙여보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자유호의 갑판장 라이온이라고 합니다. 설마 대륙에 소문이 자자한 공주님을 뵐 줄은 몰랐군요.”

율리아나 공주는 성심 성의껏 대답함으로써 라이온을 놀라게 만들었다.

“반가워요, 라이온 씨. 제 몸가짐이 이상한 것에 대해 너무 허물치 말아주세요. 불가항력이랍니다.”

라이온은 그만 킬킬거리고 말았다. 죽을 때도 농담을 할, 마치 노련한 사내 같은 공주님이로군. 라이온은 오닉스를 향해 시선을 보내었다.

‘내려드리 죠.’

그러나 오닉스는 그런 라이온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뱃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라이온은 당황한 목소리로 오닉스를 제지했다.

“어? 이봐요, 오닉스 선장! 뭐하는 거요?”

오닉스는 잠시 라이온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뱃전 끝으로 다가갔다. 그때 선교 위에서 건장한 해적 서너 명에게 깔려 있던 엘리엇 선장이 고 함 질렀다.

“아, 안 돼! 저놈, 공주님을 바다에 던지려고…………”

율리아나 공주가 가장 먼저 엘리엇 선장의 말에 반응했다.

“꺄아악!”

그제서야 오닉스가 뭣 때문에 뱃전으로 다가가는지를 깨달은 율리아나는 발버둥을 치며 반항했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있는 오닉스의 굵은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라이온은 황급하게 외쳤다.

“멈춰요!”

오닉스는 부릅뜬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일단 오닉스를 정지시키기는 했지만 라이온은 앞이 막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시골뜨기 뱃놈을 어 떻게 말린다? 흑기사호 한 척으로 사트로니아 해양청을 공황 상태에 빠트렸던 전력을 가지고 있던 대해적 오닉스 나이트였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구 식 뱃사람이었다. 노스윈드의 휘하에 소속된 후에도 그의 미신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고, 그래서 오닉스는 지금 배에 여자가 타면 재수 없다는 미신 에 따라 공주를 바다에 던지려들고 있는 것이다. 라이온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제기랄, 당신은 키 드레이번 선장님의 허락 없이는 이 배의 어떤 것도 건드릴 수 없어!”

오닉스는 키 드레이번이라는 이름에 확실히 반응했다. 그의 검은 마스크 뒤에서 끔찍한 신음이 터져나온 것이다.

“끄흐으음!”

그러나 오닉스는 공주를 내려놓으려 들지는 않았다. 두 눈으로 한층 격렬한 분노의 불길을 피워대며, 오닉스는 보라는 듯이 뱃전에 한쪽 발을 척 올 렸다. 라이온은 입술을 깨물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스르릉. 검이 울리자 오닉스의 눈에 의혹이 스치고 지나갔다. 라이온은 그런 오닉스를 향해 차 갑게 웃어주었다.

“해볼 테면 해봐.”

오닉스는 아무 말 없이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칼날을 세워 오닉스의 마스크를 겨냥하며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의 그 잘난 마스크를 찢고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고함 지르게 만들어주고 싶었지. 그 여자를 던져봐. 맹세컨대, 당신 몸에서 그 여자 몸무게만큼 잘라내어 그 여자를 뒤따르게 하겠어.”

슈마허는 조금 전까지도 자신을 돌아버리게 만들고 있던 사내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당혹했다. 그리고 배틀 엑스를 거머쥔 오닉스 의 손은 하얗게 변했다. 오닉스는 입매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지만, 라이온은 그런 오닉스의 얼굴을 보며 무시무시하게 웃었다. 그때 율리아나 공주가 의혹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저, 미안하지만 라이온 씨.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라이온은 오닉스의 동작을 세심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잠깐만요, 공주님. 지금 상황이 급한지라……”

“저도 급해요. 당신이 제 체중을 어떻게 아세요?”

오닉스는 하마터면 율리아나 공주를 놓칠 뻔했고, 혀를 깨문 라이온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이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 저, 공주님. 실례였군요. 사과드립니다. 물론 저는 공주님의 체중을 모르죠. 하지만, 그 왜 눈대중이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당신 눈이니까 눈대중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입 밖으로 말하는 건 안 돼요!”

“물론입니다. 예, 지당하지요. 어찌 그런 무례를. 음음.”

라이온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슈마허에게 낮게 속삭였다.

“이보게, 슈마허. 자네 공주님도 만만찮군. 거의 나만큼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슈마허는 대신 침묵으로 라이온의 말에 찬성했다. 그때 식스 1등 항해사가 레보스호의 선상으로 건너왔다. 식스는 오 닉스와 라이온을 쳐다보고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둘 다 그만두시오. 오닉스 선장, 라이온 갑판장.”

퍽이나 우스운 입장에 빠져버린 오닉스는 잠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겨드랑이에 낀 공주와 라이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확 고했고 오닉스는 다시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식스는 오닉스가 보내는 손짓을 보고서는 관자놀이를 꿈틀거렸다. 오닉스는 먼저 검지로 식스를 가리켜보인 다음,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가, 다시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너는 내게 명령할 권한이 없다.’ 식스는 격노한 나머 지 뭐라고 말할지도 모르게 되어버렸고, 그 틈을 타 오닉스는 율리아나 공주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라이온은 잇소리를 내며 돌격 자세를 취했고 공주는 소리 높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멈춰라, 오닉스 선장.”

율리아나 공주의 비명 끝에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 하나가 연결되듯이 들려왔다. 오닉스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고 오닉스의 허리를 향해 태클하 려던 라이온 역시 황급히 멈춰 섰다.

자유호의 선교에서 한 사내가 오닉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색 외투로 몸을 감싼 키 큰 남자였다. 외투 아래에서 거대한 칼자루의 끝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지만 이 사내의 경우라면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검을 뽑아들 필요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그저 두툼한 왼손을 칼자루 끝에 얹어둔 채 오닉스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눈매에는 광기와 열정, 그리고 이글거리는 욕망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엘리엇 선장은 뱃사람이라면 꿈에서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인물을 실제로 보게 되자 신음을 토했다.

“노스윈드……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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