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3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3화


비명보다 더 소름 끼치는 침묵들이 다림의 대로를 적시고 있었다.

생각 없이 문을 나서던 사람들은 그대로 대문 앞에 주저앉았다. 대로를 달리던 수레는 재빨리 골목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골목길의 교통 흐름을 최악 으로 몰고갔다. 주점 앞쪽의 긴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들은 공중으로 치솟아 정녕 10년이나 20년 만의 일일 것이다 의자 뒤로 몸을 날려서는 머리만 내민 채 대로를 바라보았다. 울음을 터뜨린 아이들은 큼직한 치마폭에 감싸여 어딘가로 사라져 갔고 청년들은 짝사랑하던 처녀들의 앞쪽을 막아서며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약간의 빈익빈 부익부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수십 명의 추종자들의 보호를 받는 처녀가 있는가 하면 외로이 서 서 귀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하는 처녀도 있었다. 하지만 대로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존재는 처녀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기에 그 모든 상황 은 숙녀의 자존심에만 상처를 줄 뿐 그녀들의 목숨이나 명예 등에는 아무 위험이 없었고 따라서 목숨을 걸고 처녀의 앞을 막아서는 청년들의 갸륵한 애정은 빛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고요한 소란 위로 한 꺼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키 드레이번의 오른손에는 복수가 들려져 있었고 칼집은 없었다.

이슬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앞을 비춰주고 있었다. 비에 젖은 코트 자락이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고 철벅거리는 발자국이 향하는 곳에는 폴라리스 정부 청사가 회색빛 얼룩처럼 서 있었다.

정부 청사 앞에는 몇 명의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도 위병근무를 설 때 비가 오다니 일진 더럽다느니 하는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던 그 들은 이제 비 따위야 별 대단한 문제도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일진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들 중 상급자였던 한 사내가 얼어붙은 얼 굴로 말했다.

“정지. 여기는 폴라리스 정부 청사요. 용건이 있습니까?”

키는 창 두 개 거리쯤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대답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복수를 든 키의 오른손과 비어 있는 왼손이 옆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경비병들은 모두 창을 고쳐 잡았지만 키는 그들을 쏘아본 채 양 손을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키는 두 팔을 좌우로 펼친 채 잠시 호흡을 골랐다.

다음 순간 복수는 왼손으로 옮겨져 있었다.

경비병들은 신음을 흘렸다. 이성적인 설명을 찾는 그들의 안타까운 노력은 가까스로 해답을 만들어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칼을 휘두른 것이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빗방울 때문에 그 수평 베기는 더욱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마법처럼 보였다.

“비켜라.”

경비병들이 서로를 밀치며 악다구니를 쓰며 비켜난 가운데 키는 정부 청사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매서운 기세로 날아오른 도끼는 통로 천장에 박혔다. 콰각! 오닉스 나이트는 천장을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키 드레이 번이 방금 그 도끼를 날려보낸 복수를 천천히 회수하고 있었다.

오닉스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고 키는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통과해 그대로 걸어갔다. 오닉스는 두어 번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양손으로 허 리를 짚은 채 한심스럽다는 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저걸 어떻게 도로 뽑아내느냐를 놓고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저쪽에서 신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오, 오닉스…… 선장. 괜찮은 거 같으니 나, 나 좀 부축해 줘… 응? 통로가 흔들려서 못 일어나겠어.”

오닉스는 조용히 걸어가서는 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킬리는 빙긋 웃고는 그 손을 잡았다. 똑바로 서서 통로 벽에 기대서게 된 킬리는 턱을 매만지 다가 다시 비명을 올렸다.

“오후 ᅳ 망할! 턱 깨졌겠네. 사람 말하는데 그냥 후려치냐.”

“크럴 출 알코 있었잖아.”

오닉스와 킬리 선장은 옆을 돌아보았고 한 손에 부러진 칼을 든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돌탄 선장을 발견하고는 히죽 웃었다. 돌탄 선장은 부러진 검을 팽개친 다음 웃고 있는 킬리 선장에게 끔찍한 언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마스크 때문에 비웃음을 보이지는 않은 오닉스 나이트는 대신 빠 른 손짓을 보내었다.

‘트로포스는?’

“명치에 한 팡 먹코 촐토.”

“두캉가 선장은 어찌됐어?”

킬리가 질문했을 때 저쪽에서 두캉가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나이를 괜히 먹는 건 아니라네.”

두캉가 선장은 뒷짐을 진 채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오닉스와 돌탄, 그리고 킬리 선장은 멀쩡한 두캉가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두캉가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나이가 되면 다가오는 것이 잔물결인지 대해일인지 정도는 구별하는 법이지. 키 선장을 보자마자 하리야의 방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고는 옆으 로 비켜섰네.”

킬리 선장은 당혹하여 외쳤다.

“자, 잠깐. 그러면 그 말은 안했다는 겁니까?”

“자네들이 할 텐데 꼭 나까지 해야 하나?”

두캉가는 유들유들하게 말했고 오닉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발로 바닥을 꽝꽝 굴렀다. 그가 억울해하는 것은 충분히 동정받을 만한 일일 것이다. 조금 전 오닉스는 한손으로 쥔 도끼로 복수를 막은 채 다른손으로 재빨리 손짓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 묘기를 시도하느라 목이 날아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도끼만 잃는 것으로 끝났고 그래서 오닉스는 자신이 꽤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슷한 묘기를 시도하다가 칼을 부러뜨리고 필사적 으로 몸을 날렸다가 다리를 삔 돌탄 선장 역시 거친 자마쉬 사투리로 왈왈거렸고 말하던 도중에 턱을 얻어맞은 킬리는 아예 뒤로 돌아서 벽을 긁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캉가 선장은 태연하게 말했다.

“시끄러워. 부축해 줄 테니까 어깨나 이리 기대. 돌탄 선장. 이제 하리야 순서인가.”

소파에 앉은 바스톨 장군은 흥미롭다는 듯이 방 가운데 선 키 드레이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대해적을 처음 보았고 그 젖고 음산한 모습에 약 간 당혹한 상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키는 그에겐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맞은편에 서 있는 하리야에게 말했다.

“열쇠를 내놔라.”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빌어먹을. 그 개소리는 이미 네 번이나 들었다. 닥치고 열쇠나 내놔.”

하리야는 다섯 번이 아니고 왜 네 번인가 고민하다가 오닉스 선장이 손짓을 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부탁입니다. 차라리 돌아오시지 않으셨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모습을 보이시고서 그대로 떠나버리는 것은 곤란합니다. 우리는 커다란 위기에 처 해 있습니다.”

“너희들의 위기지 내 위기는 아냐. 누구에게 덤터기 씌우는 거야?”

“이건 선장님의 나라입니다.”

“달라고 한 적 없다!”

“뭐,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드릴 거니까요.”

하리야는 침착하게 말했고 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하리야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하리야는 그가 뭐라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리야는 몸을 돌려 소파로 걸어간 다음 바스톨 장군의 옆에 앉았다.

“앉으시겠습니까?”

태연히 말하고 있었지만 하리야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키는 방 가운데 꼿꼿이 선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빗물에 젖은 복수는 음흉 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냉정을 잃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탁자 아래의 발은 칼집 끝을 조심스럽게 밀고 있었다. 칼자루를 뽑기 좋은 위치로 옮겨놓은 바스톨 장군은 냉철하게 키의 몸짓을 관찰했다.

키는 복수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바스톨 장군은 약한 미소를 지었다. 칼을 뺏길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물론 바스톨 장군은 자신이 복수를 쥘 수 있는지 확인해 보 고픈 생각은 없었고 하리야는 아예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하리야는 바스톨 장군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먼저 소개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사트로니아의 바스톨 엔도 장군님이십니다. 바스톨 장군님? 키 드레이번이십니다.”

“만나서 영광이오. 키 선장.”

키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바스톨 장군과 하리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가운데 키는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는 젖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 사 이에서 땅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자는 거냐, 하리야.”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뭘 어떻게 하라고?”

“여러 가지로 바쁘셨겠습니다만 휘리 노이에스의 이야기는 들어보셨겠지요?”

키는 여전히 머리를 감싸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리야는 일단 그것을 긍정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자가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 유명한 휘리의 서신이 날아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이건 거의 예정된 수순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의 적 전부를 데리고 있고 또한 호시탐탐 그의 발뒤꿈치를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질풍호가 목도리도마뱀들을 잡으러 간 것도 그에 대한 공격 수 단의 확보 차원에서였습니다. 트로포스 선장에게 들으셨지요?”

키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의 머리에서는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리야가 설명하는 동안 바스톨 장군은 생애의 적수의 유품이 라고도 할 수 있는 복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밀고 내려온다면 그것은 거의 산사태에 비견될 수 있을 겁니다. 그 엄청난 사태를 막기 위해 우리는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야 됩니다. 한마디 로, 우리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노스윈드 함대에서 해주셨던 역할을 다시 폴라리스에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벨군은 휘리 노이에스를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을 것이 필 요합니다.”

“주님을 믿지 그러나, 신부?”

키의 냉랭한 말투에 하리야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하지만 하리야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주님을 믿었고 지금도 물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기에 그 분께서 자신의 자녀들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들 거라는 허황된 생 각은 못합니다. 오히려 저는 그 분의 진노를 두려워하고 그 분의 슬픔에 부끄러워합니다. 다가올 전쟁에서 제가 저지를 폭행과 기만과 살인들이 그 분을 얼마나 슬프게 만들지. 키 선장님. 제가 어떻게 이것을 성전(聖戰)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키는 여전히 머리를 감싸쥔 채 땅을 향해 말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뭐요, 바스톨 장군?”

“무슨 말씀이시오, 키 선장.”

“폴라리스에서의 당신의 역할은, 혹은 목적은 뭐냐고 묻는 거요.”

“물론 휘리 노이에스 격파요.”

“그가 사트로니아를 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바스톨 장군은 잔잔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하드루스 대통령과 나는 그가 만드는 제국이 사트로니아에도 위험이 될 거라고 믿고 있소. 우리는 하이낙스의 교훈을 잊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는 휘리 노이에스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되기 전에 격파할 생각이오. 물론 현재로서는 거꾸로 격파되었고 그래서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소만, 우리의 뜻은 폴라리스의 뜻과 통하고, 그래서 나는 현재 폴라리스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키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려 하리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놈이 원하는 것은 뭐냐. 왕이 되라는 건가?”

“그런 명칭은 사용할 수 없겠지요. 키 선장님께서 등극하시면 폴라리스 또한 제국의 공적 제1호가 될 테니까요.”

“잡소리 집어치우고 간단히 말해. 왕이 되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다림 교외에 이상한 건축물이 생겨났다.

원형의 울타리 비슷한 것이었는데 그 높이가 장장 20피트, 폭은 10로드 가량이었다. 울타리 한쪽에는 거대한 문이 하나 있었고 그 문은 단단히 잠 겨져 있었다. 그리고 울타리 위쪽에는 건장하다는 말도 약간 모자랄 듯한 사내들이 올라앉아 있었다. 사내들은 울타리 안쪽을 바라보며 고함을 지르 고 있었고 울타리 안쪽에서는 사나운 포효와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리저드라이더들이 잊혀진 탑 섬에서 포획해 온 목도리도마뱀들을 조련시키고 있었다. 리저드라이더의 용어로는 ‘선을 보는’ 것이지만 이 온화한 용 어에 걸맞지 않게 울타리 안쪽에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난폭함이 계속되고 있었다. 벌써 몇 명의 리저드라이더들이 울타리 바깥의 안전 지대에 드 러누워 있었다. 조련중 팔다리가 부러진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울타리 안쪽을 들여다보며 껄껄거리고 있었다.

목도리도마뱀의 경이적인 도약력 때문에 안쪽의 공터 역시 20피트 깊이로 파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깊은 구덩이 가운데서는 몇 명의 리저드라이더 들이 목도리도마뱀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꼬리! 꼬리 조심해!”

첫 번째 리저드라이더는 뛰어올라 피했지만 두 번째 리저드라이더는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휘둘러진 꼬리에 맞아 쓰러졌다. 쓰러진 사내에게 곧장 목도리도마뱀의 머리가 날아왔지만 사내는 노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냄새 나는 입 저리 치우지 못해!”

쾅! 사내는 다른 리저드라이더처럼 쇠징을 박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또한 가공할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된 일격을 맞은 목도리도마뱀이 비틀거리 는 가운데 사내는 날쌔게 일어났다. 안전 지대에 있던 부상자들은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고 울타리 위에 걸터앉아 있던 리저드라이더들은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었다.

울타리 위에 걸터앉아 있던 리저드라이더들 중에는 록소나 기사 서 하빈저의 모습도 보였다.

서 하빈저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루고 있는 목도리도마뱀만큼이나 난폭한 리저드라이더들도 약간의 존경심을 품 은 채 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견학을 요청한 서 하빈저가 10분도 되기 전에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목도리도마뱀이 아니라 견학석의 그 까마득한 높이 때문에라도 하빈저는 분명 재미있어하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런 표정은 일부러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서 하빈저는 옆에 앉아 있던 건장한 리저드라이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인상적인 생물이군요. 서 파르치.”

“인상적? 흥. 저건 죽여주는 생물이오. 목도리도마뱀 타던 라이더들은 말 못 타지.”

“그렇습니까. 느려서 그런가 보지요?”

“느리고 둔하고 멍청해. 마치 꽃띠들하고만 놀다가 예순 살 먹은 할마시하고 자게 된 기분이랄까? 음훼훼훼!”

음탕한 말을 꺼내놓은 서 파르치는 사납게 웃었고 서 하빈저는 곤혹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케온의 서 파르치가 한때의 적이었던 서 하빈저나 록소나 기사들을 비웃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 파르치 역시 서 하빈저의 대범한 자세를 존중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그냥 원래 가지고 있던 감상이었다. 서 파르치가 덧붙이듯 꺼낸 말 또한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뭐, 당신네들 록소나 기사들의 말 다루는 재주는 대단하더군. 이렇게 잘난 체해도 사실 댁들에게 두 번이나 지지 않았소.”

“우리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시메리우스에서는 날씨의 덕도 보았습니다.”

서 파르치는 히죽 웃고는 약간 어려워하는 투로 말했다.

“뭐, 전쟁이었고 명령을 수행한 거였으니, 서로 얼굴 붉히지는 맙시다.”

“물론입니다.”

그때 저 아래쪽에서 환성이 올랐다. 서 하빈저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고 리저드라이더들 중 하나가 도마뱀 위에 올라앉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미 몇 번 보았던 광경이라 하빈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조련을 위해 오랫동안 굶은 데다가 노련한 리저드라이더들의 연속적인 공격 을 받자 목도리도마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주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도마뱀 위에 올라탄 리저드라이더는 한 손을 위로 치켜올리며 함성을 질렀고 울타리 바깥과 위쪽의 모든 사내들은 새로 탄생하게 된 이 커플에게 열띤 박수를 보내었다.

힘센 사내들이 달려들었고 울타리의 거대한 문이 위로 올라갔다. 안쪽 공터에 있던 목도리도마뱀은 주인을 태운 채 20피트의 높이를 훌쩍 뛰어올랐 다. 아직 안심할 수는 없기에 바깥에는 길들여진 목도리도마뱀들에 올라탄 리저드라이더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새로 길들여진 목도리도마뱀은 준비된 목장 쪽으로 사라져 갔다. 서 파르치는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또 한 커플이 탄생했군. 언제봐도 이 광경은 감동적이란 말이오.”

서 하빈저는 잔잔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솔직히 그는 저 흉측한 생물과 인간의 커플을 서 파르치만큼 감동적으로 볼 수는 없었고, 그런 자신에 대해 별로 안타깝게 여기지도 않았다. 서 파르치는 울타리 뒤쪽을 향해 외쳤다.

“상자 몇 개 남았나?”

“하나 남았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맞선이군요.”

“알았어. 시작하지.”

잠시 후 저쪽에서 몇 명의 사내들이 낮고 거대한 수레 하나를 밀고 끌면서 다가왔다. 수레 위에는 거대하고 튼튼해 보이는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멀 리서부터 그 상자가 요동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서 파르치는 감탄했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힘 좋은 놈이군. 그렇게 굶었는데 아직도 발광을 하네? 이봐! 안쪽의 팀, 교대해! 싱싱한 놈들이 상대해야겠다.”

사다리가 내려지고 조금 전까지 안쪽에서 뒹굴던 사내들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방호복과 쇠장갑 등을 다른 리저드라이더에게 건네었고 그것을 건네받은 사내들이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상자를 실은 수레가 다가와 문에 꼭 밀착되었다.

상자는 그때까지도 요동치고 있었다. 문을 다루던 사내들 외에 몇 명이 더 뛰어왔고 그들은 상자에 달라붙어 그것을 문 쪽으로 억세게 밀었다. 먼저 문에 밀착되어 있던 슬라이딩 도어가 위로 빠져나왔고 신호와 함께 울타리의 문이 위로 올라갔다.

서 하빈저는 대포가 쏘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울타리 문이 열리자마자 거대한 목도리도마뱀이 날듯이 튕겨져나왔다. 미리 문 양쪽으로 피해 있었기에 안쪽의 리저드라이더들은 공격 대상이 되진 않았지만 그들도 목도리도마뱀의 엄청난 기세에 꽤 놀란 얼굴들이었다. 포환 같은 기세로 공터에 들어선 목도리도마뱀은 반대쪽 벽에 몸을 들이박고 말았지만 별 충격도 없다는 듯이 곧 몸을 돌렸다. 도마뱀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잠시 낮은 자세로 주위를 훑어보았고 그러자 지금까지의 도마뱀들에 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 즉 몸 옆쪽으로 흐르는 보라색 줄무늬가 확연하게 보였다. 마치 보라색 화염처럼 물결치는 그 무늬를 보던 서 파르치 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허이구, 저놈이군.”

“아십니까?”

“섬에서 저놈 잡을 때 두 명의 라이더가 거의 죽을 뻔했소. 라이더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지. 오기로 잡아온 건데, 젠장. 길들일 수 있을 지 솔직히 의심스럽군. 이봐! 안쪽 팀! 조심해. 그리고 석궁수들은 장전해 놔라. 저놈은 좀 겁난단 말이야. 자, 누가 나서겠나?”

울타리 주위의 리저드라이더들은 안쪽의 목도리도마뱀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서 하빈저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 파르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봐. 아무도 안 나서는 거야?”

“저, 서 파르치. 아무도 저 목도리도마뱀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죽여야죠. 도리가 있습니까?”

하빈저의 질문에 파르치는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고 하빈저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치는 다시 울타리를 죽 둘러보며 나설 자가 없 냐고 외쳤지만 리저드라이더들은 탐탁찮은 표정들만 지어보였다. 서 하빈저는 무서워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들이라고 생각 했고, 또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다른 백부장들이 안 데려간 신병들 인수해 가야 하는 백부장의 얼굴과 비슷하다고도 생각했다. 서 파르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저런 드센 놈하고 전쟁에 뛰어드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야. 석궁수! 준비해. 그리고 안쪽의 놈들은 벽에 붙어라.”

석궁수들은 장전된 석궁을 들어올렸다. 목도리도마뱀은 안쪽에 있는 사내들을 노려보느라 석궁수의 움직임은 보지 않고 있었다. 서 파르치는 짧게 명령했다.

“정신 바짝 차려. 한번에 보내야 한다. 설맞춰서 발작하게 만들면 석궁수들 모두 나한테 끔찍한 꼴 당할 줄 알아. 하나, 둘·

“방호복 좀 빌려주겠나?”

석궁수들은 가까스로 석궁을 위로 들어올렸고 그 중 한 명은 하늘을 향해 발사하고 말았다. 서 파르치는 먼저 짧은 욕설을 퍼부은 다음 뒤를 돌아보 았다. 그리고 파르치는 당혹해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방호복 좀 빌려달라고 했네. 이왕 죽일 거라면 내가 한번 도전해 봐도 되겠지?”

서 파르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하빈저를 돌아보았지만 서 하빈저 역시 비슷한 표정만을 보내오고 있었다. 서 파르치는 자기 머리를 몇 번 친 다음 힘들게 말했다.

“잠깐. 그러면 저걸 타보겠다는 말이십니까?”

“그런 의미로 말했네.”

“목도리도마뱀을 타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제 곧 경험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방호복을 빌려주면.”

“무슨 정신 나간…………!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흐음. 나는 그래도 약간 이름이 난 말 조련사야. 그걸로는 안 될까?”

“저건 말이 아닙니다, 전하!”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 하빈저도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전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도마뱀을 타시겠다고요?”

빌레스 커리돈, 록소나의 왕이자 현재 폴라리스의 유명한 망명객이며 언제나 별명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은 남자는 빙긋 웃었다.

“마왕이 목도리도마뱀을 타는 것은 웃긴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웃기는 일이었고 서 파르치가 보기엔 왕좌 수복의 비원을 달성하지 못하고 타향에서 죽은 어느 왕에 관한 슬프면서도 웃기는 전설을 만 들어내기에 딱 좋은 수단이었다. 그래서 서 파르치는 왈왈거리고 깽깽거리다가 아예 입을 닫고는 아무 말도 안 들린다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 만 마왕은 계속해서 졸라대었고 그러자 리저드라이더들도 약간씩 그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서 파르치는 자신의 부하들이 ‘한번 타게나 해보지요?” 등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느끼고는 미간을 더욱 찡그렸다. 물론 그들의 속셈은 한번 골탕먹어봐라는 것이겠지만 우두머리인 서 파르치는 타국의 왕 에게 함부로 그런 장난을 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때 서 하빈저가 나직하게 말했다.

“부탁입니다. 서 파르치. 방호복을 전하께 빌려주십시오.”

서 파르치는 불쌍하게도 몇 초 동안 말을 제대로 못했다. 가까스로 말문이 열리자마자 서 파르치는 빌레스 국왕을 훔쳐보며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 다.

“서 하빈저. 당신이 왕위 계승자셨소?”

“예? 아…… 무슨 말씀을. 하하. 전하를 시해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의 부탁을 들어주십사 하는 겁니다.”

“왜요?”

서 하빈저는 상대방이 난폭하고 순수해서 좋지만 그래서 좀 답답한 데도 있다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는 겁니다. 저분의 불 같은 성정에서는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 내실 수 없었겠지요. 마 왕이 목도리도마뱀을 탄다. 이 정도면 꽤 놀라운 화해의 제스처 아닐까요.”

“어, 그런 거요?”

“예.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저 분은 가장 사나운 야생마도 쉽게 다루시는 분이니 보통 사람들보다는 덜 위험할 겁니다.”

그리고 서 하빈저는 서 파르치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아래쪽을 향해 외쳤다.

“전하! 제가 석궁을 잡겠습니다. 조금만 위험해 보이면 바로 쏘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선 제가 위험의 범위를 언제나 확대 해석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마왕 빌레스는 껄껄 웃었다.

“자네 같은 안전 제일주의자가 석궁을 잡는다면 저놈에게 너무 미안한 일인데? 어쨌든 안심은 되는군.”

서 하빈저는 다시 서 파르치를 돌아보았고 서 파르치는 뭐 씹은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파르치는 아래쪽을 향해 외쳤다.

“전하.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 서 파르치?”

“죽지 마십시오. 젠장. 다음에, 우리가 나라를 다 되찾고 나서 진짜로 한번 붙어봐야 될 거 아닙니까?”

이 리저드라이더다운 난폭한 승낙에 빌레스는 역시 마왕다운 사나운 응수를 보내었다.

“물론 언제라도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네. 그렇다면 이건 전력 탐색이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