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6화
바라미는 가공할 속도로 남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파도를 가로지르고 있는 거대한 흰 뱀이었다. 가끔 먼 곳에서 야간 항해를 하던 선박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소란을 일으키곤 했지 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달리 용감한 어떤 배는 밤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는 흰 서펜트(?)를 추적하기도 했지만 3L의 배가 아닌 바에야 그 속도 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쉬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폴라리스 방향으로 맹렬하게 헤엄치고 있는 돌연변이 서펜트에 대해 항해일지에 언급해 두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끊어질 듯한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지만 온몸을 때리고 있는 파도와 물결은 바라미에게 아무런 자극이 되지 못했다. 바라미는 힘껏 자맥질을 했 다. 거대하고 흰 몸이 칠흑색 바닷속으로 잠겨들며 수면에는 거대한 물보라만 남았다. 바라미는 단숨에 수천 피트 심도까지 내려갔다. 수압이 그녀의 몸을 짓눌러 오그라들게 만드는 그 순간에도 바라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천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라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천연덕스럽게 엘핀을 말하는 오스발을 보는 것은 그녀에게 잔 혹한 고문이었다. 천년의 무게가 한 순간에 압축되어 그녀를 후려친 순간 그리움을 가진 하이마스터는 맹렬한 속도로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 었다.
그 이름을 그녀 앞에서 말한 사람은 천년 만에 오스발이 처음이었다.
에레로아, 친구, 그녀의 본명을.
선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트로포스는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스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스우는 들고 온 도끼를 선장에게 건네었고 트로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으니 가서 쉬거라.”
“알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스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서 선장실을 나갔다. 트로포스는 잠시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도끼를 바라보았다. 스우가 목수에게서 빌려온 투박하고 작은 손도끼였다. 트로포스는 그 무게를 가늠해 보듯 조금 휘두르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트로포스는 침대로 다가 갔다.
침대에는 세야의 아카나가 놓여 있었다.
트로포스는 세야의 아카나를 들어올려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잠시 세야의 아카나와 도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 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트로포스는 피식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내 왼눈을 고쳐볼걸.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열한 번을 다 채우다니.”
무심히 말하던 트로포스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열한 개의 흰 점이 둥글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 원은 불완전했다. 열한 개나 되는 점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많은 점들이 있었기에 열두 번째 자리 의 공백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트로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채운 것이 아냐.’
트로포스는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등을 덮으며 고개를 돌렸다.
‘볼 필요 없어.’
트로포스는 왼손을 쥔 채 한참 동안 세야의 아카나를 바라보았다. 결심이 선 것 같았고, 그래서 트로포스는 오른손을 뻗어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러 나 지팡이를 고정시키기 위해 별 생각 없이 왼손을 뻗은 트로포스는 다시 왼손을 보게 되었다. 트로포스는 흠칫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불완 전한 원은 눈꺼풀 속에서도 보이는 것 같았다.
‘열두 번째가 남았잖아.’
‘절대로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너 지금 지팡이에 대해 말하는 거야, 아니면 내일에 대해 말하는 거야?”
‘이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과는 달라. 이건 마법의 지팡이고 수상하기 짝이 없어.’
‘역시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젠장, 그렇다면 왜 쓸 때마다 점이 생기냐! 아무 일도 없다면 이 수상한 점도 생길 리가 없잖아!’
‘사용 회수 표시일 수도 있지. 12번 사용하고 나면 스스로 부러질지도 모르지. 과민 반응하는 것 아닐까?’ ‘…….’
‘한 번 남았는데, 아깝잖아?’
‘그렇잖아? 언젠가 이것을 부러뜨린 것을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몰라.’
트로포스는 눈을 떴다. 그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오른손에 쥔 도끼를 힘껏 쳐들었다.
아르파데일은 누군가가 흔드는 것을 느끼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더 이상 유모가 필요하지 않게 된 이후로 그녀를 이렇게 깨운 사람은 아무 도 없었기에 아르파데일은 꽤 당황한 상태기도 했다. 침대 옆에서 그녀를 흔들던 사람은 곧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
“맙소사…………. 유리?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야?”
아르파데일은 힘들게 일어나 침대머리에 기대어앉았고 그러자 율리아나는 언니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르파데일은 머리카락을 대충 매만지며 창 문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창문 바깥은 파르스름했고 테이블에는 유리가 켜둔 것이 분명한 초가 불타고 있었다. 아르파데일은 다시 동생을 돌아보았 다.
“지금이 새벽 맞는 거지?”
“밤의 아름다운 그림자며 아침의 씨앗. 그래, 새벽이야.”
“근위병들과 시녀는 어떻게 통과한 거야? 아니, 관두지. 네가 깨우겠다고 말했지?”
아르파데일은 크게 하품을 하다가 문득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유리? 너 술 마신 거니?”
“레프토리아 한 병.”
“그럼 너 지금 밤새 술 마시다가 자는 사람 깨워놓고 주정부리고 있는 거니?”
“아닌 것 같아. 나도 자다가 일어난 것이거든. 목이 말라서 눈을 떴고, 그러고는 곧장 달려온 거야. 지금 꼭 말해 둬야 할 것이 있어서. 그러니까 술 마시고 주정부리는 것은 아냐.”
“그래도 맑은 정신은 아닐지 모르겠네. 하지만 다시 잠들기도 어렵겠군. 그래. 이런 새벽부터 자던 사람 깨워서 꼭 말해야 되는 것이 뭐야? 혹시나 ‘언니 알지? 나 언니를 사랑해’ 등의 것이라면 당장 시녀들 시켜 널 찬물 속에 던져버리………”
“나 시집갈래.”
아르파데일은 약 10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동생을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피로하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두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 을 터뜨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입술은 이상하게도 미소 같은 것을 짓고 있었다. 아르파데일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침대 옆의 줄을 잡아당겼다.
“일단 정신 좀 차려야겠다. 율리아나.”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아르파데일은 차를 가져오도록 한 다음 율리아나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율리아나는 언니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걸어 갔고 잠시 후 두 자매는 침실 옆에 있는 서재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곧 시녀가 차를 가져다놓고 나갔다.
“일단 좀 마셔.”
율리아나는 순순히 차를 한 모금 마셨지만 곧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르파데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시작하지. 시집가겠다고 했니? 누구에게?”
“볼지악 자작.”
율리아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고 아르파데일은 잠시 신음을 흘렸다.
“으흐음. 그런 엄청난 일을 술 마시다가 결정했단 말이군.”
“술 마시다가는 아냐. 조금 전 눈을 뜨는 순간 ‘아, 휘리 노이에스에게 시집가야겠구나’는 생각이 들었어. 눈을 뜬 것이 먼저인지 생각을 떠올린 것 이 먼저인지 잘 모르겠어. 어쨌든 그래서 곧장 여기로 달려온 거야.”
“꿈속에서 생각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왜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니?”
“물론.”
“그래? 대답해 봐. 왜 휘리 노이에스지?”
“잊고 있었는데 나 그 남자한테서 프로포즈 받았어.”
아르파데일은 뭔가가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하지만 율리아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그 남자 나를 납치하고 싶다고 했어. 장미 꽃다발로 위협해서 백마가 끄는 마차로 그 정도면 괜찮은 프로포즈 아냐? 내가 자서전이나 회 고록 쓰게 되면 써먹어야지.”
아르파데일은 멍한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율리아나는 간략하게 자신과 휘리의 만남에 대해 설명했다. 아르파데일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 덕이게 되었다.
“알겠지? 그 프로포즈를 받은 것도 벌써 몇 달 되었고, 그러니 나 같은 요조숙녀라면 슬슬 대답을 해줄 때가 되었잖아. 내 대답은 ‘납치해 줘요!’야 서 발도? 나보다 훨씬 훌륭하고 그 분의 덕에도 어울리는 고아한 숙녀분 만나게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해 줄 뿐. 안녕히, 발도 로네스.”
아르파데일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무심히 질문했다.
“오스발은?”
아르파데일의 손이 딱 멎었다.
잠시 후 아르파데일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테이블 주위를 돌아 율리아나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동생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소리없이 울던 율리아나 는 언니가 이끄는 대로 그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유리,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알았어.”
그리고 두 자매는 모두 침묵했다.
태양이 떠올라 율리아나의 젖은 볼을 비출 때, 율리아나는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 함대를 준비해 줘.”
“전투 함대라고?”
“그래. 나도 폴라리스 정벌에 참가하겠어. 참가라기보다는 입회겠지만, 어쨌든 가겠어.”
“유리.”
“어차피 폴라리스는 휘리에게 줄 지참금이라며? 그러면 함대는 출발해야 될 거 아냐. 그리고 나도 거기 가는 거야. 그러고는 정복지 폴라리스에 앉 아 프로포즈를 보내지 뭐.”
“그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는 없어.”
“아니, 해야겠어. 이건 내 마지막 선물이야.”
“선물이라니?”
그가 더 이상 키 드레이번에게 쫓겨다닐 일이 없도록, 그래서 행복한 그의 자유를 노리도록, 그 미친 남자를 죽여버리겠어, 라는 대답은 율리아나에 게만 들렸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월 25일. 필마온 기사단은 오랜 금제를 깨고 페리나스 해협을 벗어났다. 통상 있어왔던 노략질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써 절대로 해적질에는 나서 지 않는 기함 지브라호가 함대의 선두에 서 있었다.
남해를 오가던 배들에 의해 발견된 이 소식은 그 즉시 전 대륙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이 해에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았던가 하며 전율했다. 교회 기 사단인 필마온 기사단이 움직인 것은 분명 법황의 명령에 의한 것이리라 판단한 각국은 펠라론에 대해 질문서와 항의서한을 폭포처럼 쏟아내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당혹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펠라론이었다. 퓨아리스 4세는 떨리는 손으로 발도 로네스의 서신을 읽었다.
‘슈팔데 두 펠라론의 영광 아래에서. 이하늘 아래 주님의 자녀의 대적(敵) 악마의 소행이 뻔뻔스럽게 행하여지고 있음은 주님의 자녀들의 다시 없 는 슬픔이며, 아울러 주님의 기사이자 두 번째 슈팔데인 필마온 기사단에게는 다시 없는 모욕일 것입니다. 이에 필마온 기사단은 언제나 교회를 수호 하고 악을 토벌하기 위해 들어왔던 검을 다시 들어 저 악마의 상징인 물수리호와 그 선장인 알버트 렉슬러, 그리고 흑마법사인 트로포스를 정벌하고 자 합니다. 무운과 축복을 바랍니다.’
“개자식, 불행과 저주나 받아라!”
아리스 4세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활의 법황이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두 번째 급보가 날아들었다. 바로 다음날인 10월 26일, 스톰라이더호를 기함으로 하는 카밀카르 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항로는 얼마 전 백색 서펜트가 목격되었던 곳, 바로 폴라리스 방향이었다.
필마온 기사단과 달리 카밀카르의 목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필마온 기사단과 카밀카르 함대가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암묵적으로 연합 함대를 결성한 것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그리고 그들을 동시에 움직이게 만든 장본인은 이레다벨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끝은 짧은 거야.”
휘리는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바탈리언 남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예?”
“아무리 긴 노래라도 시작과 끝은 짧지. 노래가 길다는 것은 중간이 길다는 거야. 그리고 그건 모든 사물에 통용되는 말이지. 막대기가 길다? 막대기 의 중간이 너무 긴 거야. 삶이 짧다? 삶의 중간이 너무 짧은 거지. 키가 크다? 머리끝과 발바닥은 괜찮은데 그 중간이 너무 긴 거야. 시작과 끝은, 언 제나 같은, 한 순간의 번득임. 중간이라는 건 시시한 거야. 시작과 끝이야말로 놀라운 기적이지.”
휘리는 씩 웃었다.
“긴 노래보다는 강렬한 끝이 좋지. 그들에게 기적을 선물할 때가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