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1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1화



굼실 떠오른 태양이 노련한 무사처럼 그 햇살을 휘두르자, 아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수평선 이쪽을 덮어 나갔다. 바다를 가로질러 뱃전 을 넘은 햇살은 조그마한 소녀의 속눈썹에도 내려앉았다. 소녀는 간지럽다는 듯이 눈살을 찡그렸다가 눈꺼풀을 들어올렸고 그러자 그녀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던 햇살이 투명하게 부서졌다.

벨로린은 눈을 떴다.

그녀는 알버트 선장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울다 지친 그녀의 볼은 핼쓱해져 있었고 마구 흩어진 머리카락은 볼과 목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벨 로린은 갑판을 짚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똑바로 앉은 벨로린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배들의 아침 활동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가을이라 아침은 늦고 그래서 선원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삭구를 돌보거나 무장을 가다듬거나 하고 있었다. 항구 바깥쪽에 두 개 함대가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면면에 긴장감이 감돌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늘상 하는 일 을 붙잡은 그 손은 느릿하면서도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낮은 태양 때문에 그림자들은 길게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런 그림자들의 숲 속에서 그들 의 모습은 먼 시간 속의 다른 생물들처럼 보였다.

벨로린은 멍한 얼굴로 항구의 아침을 둘러보았다.

벨로린은 그림자져 검은 돛대를 오르고 있는 하얀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벨로린은 입에 못을 문 채 무언가를 못질하는 선원을 보았다. 옆에서 비추 고 있는 햇살 때문에 그들은 불가마니 속의 질그릇처럼 보였다. 벨로린은 마지막으로 태양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다. 벨로린은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내었다. 그러나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벨로린은 소리없이 울며 입매에는 함뿍 미소를 담았다. ‘그들은 동정받을 만한 생물이야.’

벨로린은 몸을 돌려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았다. 이 아침 속에 흩뿌려진 그림자들은 알버트 선장의 몸 위에서 감출 것을 감추고 드러낼 것을 드러내 어 그의 모습을 섬뜩한 시체에서 돛대에 기댄 채 일광욕을 하는 노선장의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안녕, 알버트.”

안녕. 벨로린.

대답은 그녀 자신이 떠올리는 것이었지만 벨로린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다. 벨로린은 마치 견습 선원이 된 것처럼 똑바로 일어서서 경례를 붙이며 말 했다.

“좋은 아침이군요. 선장님. 햇살이 참 곱죠?”

모든 밤은 빛나는 여명을 약속하지.

“예. 선장님. 당신들에게도 여명은 찾아올 거예요.”

가장 어두워 새벽을 잉태할 만한 밤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올 거예요. 선장님. 아직 셋 남아 있어요.”

그들에게 너무 과한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보이. 그들의 선택이 무엇이든 우리는 아쉬워할지언정 탓해서도 안 되고.

벨로린의 상상 속에서 알버트 선장은 견습 선원에게 말하듯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견습 선원)라는 말을 들은 벨로린은 활짝 미소 지었다.

“저는 소년이 아닌데요. 선장님?”

어흠. 호칭에 약간 문제가 있군. 하지만 선장님이 보이라면 보이인 거야.

“잘 알겠습니다. 선장님!”

벨로린은 다시 경례를 붙이며 기운차게 몸을 돌렸다. 부두 쪽을 보게 된 벨로린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부두는 꽤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은 부두에 늘상 있는 종류의 소란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서로 부딪혀 으르렁거리고 멱살잡이라도 하겠다는 듯 이 험악한 얼굴로 서로를 쏘아보곤 했다. 그 소란을 바라보던 벨로린은 그것이 몇십 명의 사내들이 야기하고 있는 소란임을 깨달았다. 입을 꾹 다문 채, 하지만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는 사내들은 군항 쪽을 향해 무턱대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결같이 망토를 단단히 조이고 거기에 후드까지 덮어쓴 모 습이었다. 벨로린은 의아한 심정으로 그들이 누군가 생각했다.

곧 답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벨로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벨로린은 재빨리 몸을 돌려 질풍호를 바라보았다. 질풍호의 갑판 위에서도 선원들이 한가로이 오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벨로린은 곧 고함을 지르 려 했다. 그러나 입을 벌리기 직전, 벨로린은 가까스로 말을 삼킨 다음 뱃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질풍호를 향해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스우는 아침 식사 후의 노곤함을 이기지 못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스우는 근엄하고 엄숙한 자들이 벌이고 있는 복잡한 게임들에 대해서는 한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 사실에 대해 안타깝게 여긴 적도 없다. 스우의 주된 관심사는 세끼 식사를 제때 먹을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고 죽기 직 전까지만 그것이 보장된다면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불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 역시 죽음 바로 위에 널빤지를 깐 채 평생을 살아가는 수부인 데다가 거기에 덧붙여 교수대와 너나 하는 사이인 해적이었으므로.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 순간 스우라는 이 단순한 인물에게 상당히 흥미로운 임무를 던져주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은 스우는 옆을 돌아보았다. 죽 움직이던 시선이 물수리호에 도달했고 그리고 거기서 멈췄다. 스우는 눈살을 잔뜩 찡그린 채 물수리호를 직시했다. 아직 말도 한 번 못 붙여본 검은 소녀 – 스우는 어쨌든 소심한 인물이었다가 그를 향해 ‘오닉스식’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어라, 저 꼬마가 저걸 언제 익혔지?’

스우는 놀라워하며 그 손짓을 해석했다. 손짓은 정확했고 문장은 완벽했다. 해석을 마친 스우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러나 곧 스우는 튕기듯 몸을 돌 려 주승강구를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으로 운명이 스우에게 던져준 임무는 끝났다.)

잠시 후 갑판으로 뛰어올라온 트로포스 선장은 곧 매서운 눈으로 물수리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스우가 보았던 손짓이 반복되었고 트로포스는 거 기에 대한 질문을 손짓에 담아 보내었다. 흥분한, 그리고 서두르는 손짓이 돌아왔고 트로포스는 부두 쪽을 바라보았다. 트로포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낮게 외쳤다.

“노예장! 최고 전투 속도!”

사태는 급했고 그래서 트로포스는 노예장에게 직접 외치며 타륜을 향해 달려갔다. 당황한 선원들을 향해 트로포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

부두 쪽에서는 서 퀵핸드가 이를 갈며 후드를 확 젖혔다. 질풍호에 갑작스러운 소요가 일어났다 싶은 순간 그 노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롱 갤 리어스의 전투 속도 돌입은 범선이나 다른 배와는 비교가 안 된다. 서 퀵핸드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거리가 아직 멀지만 움직이게 되면 더 곤란해진다.

“사격 준비!”

그의 주위에 있던 수십 명의 기사들은 일제히 바다 쪽을 향해 달려갔다. 아침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이 당혹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부두 끝에 도 달한 기사들은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그들의 망토가 일제히 등뒤로 넘겨졌다. 그리고 망토 아래에서는 핸드건을 쥔 손들이 뻗어나와 바다를 겨냥했다. 고막을 날려버릴 듯한 굉음이 부두의 아침을 갈가리 찢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