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3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3화


필마온 기사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남해의 뱃사람들을 진감케 만드는 노스윈드 함대의 등장이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세척? 세 척이라니?”

“저놈들 그 서펜트를 너무 믿고 있나 보군.”

“다른 배들 다 뛰어나오게 만들어주지. 자유호까지!”

‘자유호’를 말할 때 필마온 기사들의 어조에는 약간의 경의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말들에는 가소로워하는 심정이 가득 담겨 있었 다. 필마온 기사들이 기세를 드높이는 동안에도 발도 로네스는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서 발도의 명령에 따라 지브라호는 뒤로 물러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그 외 8척의 배는 좌우로 갈라지며 다가오는 노스윈드 함대를 포위 하는 진용을 갖추었다. 바다사자호의 선상에서 두캉가 선장은 물러나는 지브라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잘 알고 있군. 네 녀석이 목표라는 것. 좋아. 멈춰라.”

두캉가 선장의 명령에 따라 페가서스호와 흑기사호도 조용히 정선했다. 두캉가 선장은 배들을 그렇게 내버려둔 채 대사의 방향을 가늠했다. 그리고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두캉가 선장은 벌써 몇 개월째 다림 앞바다를 관찰해 왔다. 그만큼 관록 있는 뱃사람이 아니더라도 조수의 흐름쯤은 파악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두캉가 선장은 머지않아 썰물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썰물을 이용하여 단숨에 적진을 뚫고 들어가 기함 지브라호를 잡 는 것이었다.

‘대사가 충분히 소란을 피운다면, 그리고 썰물을 이용한다면 뚫을 수 있다.’

그때 바라미가 바다사자호의 좌현을 지나쳤다. 두캉가 선장은 요란하게 일어나는 물보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마온 함대의 좌측을 향하던 물보라가 사라졌다. 대사가 깊이 잠수한 것이다. 물보라가 사라진 순간부터 필마온 함대 우익 쪽의 선원들은 손에 땀 을 쥔 채 배 밑바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필마온 함대의 최우익 함선 블루바론호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바닷속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물수리호의 선상에 있던 벨로린은 두 귀를 틀어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귀를 막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그녀에게 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바라미가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알았다’. 벨로린은 앞으로 허물어졌고 알버트 선장의 발치에 얼굴을 비비며 온 몸을 떨었다.

“안 돼, 안 돼………… 그만둬, 바라미…………!”

하지만 벨로린은 다시 한번 알았다. 바라미는 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다시 한번 블루바론호의 용골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벨로린은 상체를 일으키며 외쳤다.

“하지 마!”

조금 전 들려온 비명에 경악하던 킬리 선장은 벨로린의 고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다시 한번 필마온 함선이 진동하며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나 왔다. 사람이 내는 것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동물의 것도 아닌, 마치 바다 그 자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였다.

킬리는 귀를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맙소사, 주여!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들을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 섬뜩하면서도 몸서리쳐지도록 슬픈 비명에 넋을 잃었다. 공격을 당한 블루바론호의 선원들조차도 공포보 다는 치밀어오르는 연민에 진저리를 쳤다. 두 번째 공격은 첫 번째에 비하면 훨씬 약했다. 선원들은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으며 주저앉거나 뱃전 너머 로 몸을 내밀었다. 뱃전 너머로 몸을 내민 선원들은 한결같이 차라리 세 번째 공격이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최소한 배 아래에서 이 끔찍한 비명을 질 러대는 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므로. 하지만 두 번째 공격 이후 바다 아래는 고요해졌다. 필마온 선원들은 비명의 여운에 몸을 떨며 서로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조금 후 다시 세 번째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함선은 첫 번째나 두 번째보다는 훨씬 약하게 흔들렸고 블루바론호의 선원들은 세 번째의 비명 을 들으며 기뻐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림 앞바다의 모든 사내들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울 수 없는 사내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벨로린은 목뒤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그녀의 시야는 부옇게 바뀌어 있었고 그래서 벨로린은 힘겹게 눈 주위를 닦았다. 알버트 선장의 얼굴을 올려다본 벨로린은 그의 메마른 볼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아…… 아버지?”

거떻게 죽어 있는 알버트 선장의 볼 위로 흐르는 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벨로린은 자신의 목 뒤를 만져보았고 그곳이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벨로린 은 멍한 표정으로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녀를 돕고 싶은가, 보이?

“선장님?”

그녀를 돕고 싶은가?

벨로린은 한없이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래요, 선장님. 그녀를 돕고 싶어요. 그녀는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두캉가 선장에게서 다른 남자를 봤어요.”

벨로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저 바보를 돕고 싶어요.”

나도 그렇다, 보이.

물수리호의 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노 또한 움직이지 않았지만 물수리호는 제자리에서 빙글 돈 다음 수평선을 향했다. 트로포스 선장과 킬리 선장, 그리고 돌탄 선장 과 다른 모든 노스윈드 해적들이 그 모습에 놀랐지만 정작 물수리호의 선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온몸을 향해 그 냥 나아가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갑판 아래에서 노잡이들은 조용히 노를 쥐었고 갑판원들은 말없이 돛대를 치우고 무기를 집어 들었다. 포수들은 입을 다문 채 대포를 장전했다. 그리고 그 모든 침묵의 움직임 속에서 벨로린은 홀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왜 돕는 거죠, 선장님?”

네가 원하고, 그녀가 원한다.

“선장님?”

그렇다. 보이. 그것뿐.

“선장님?”

대답은 없었다.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이물에서는 파도가 세차게 갈라지고 있었고 움직이기 시작한 물수리호의 노들은 사납게 수면을 베어 내고 있었지만 그 갑판 위에서 알버트 선장, 돛대에 못 박힌 시체의 얼굴은 평온하고 영원처럼 고요했다. 벨로린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심장에 못 박힌 키 드레이번. 그렇기에……..”


“돌격!”

두캉가 선장의 외침과 함께 바다사자호와 페가서스호, 그리고 흑기사호의 노가 일제히 수면을 때렸다. 세 척의 배는 움직이자마자 이미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그 방향은 필마온 함대의 우익 쪽이었다. 필마온 함대는 응전 태세를 취했지만, 그 속도는 느렸다. 그들은 혼란되어 있었고 허둥대고 있었다. 그러나 노스윈드 함대를 지휘하고 있는 두캉가 선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두캉가 선장은 필마온 함대의 우익을 우회하여 후열에 있는 지브라 호에 단숨에 육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필마온 기사단 역시 해적류의 전투에 능숙한 이들이었다. 혼란에 빠져 있는 블루바론호는 노스윈드 함대를 방해하지 못했지만 지브라호는 선수를 왼쪽으로 틀며 함열의 좌측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표정하게 함열을 바라보던 발도 로네스는 기다리던 순간이 오자마자 벽력처럼 외쳤다. 

“함대 돌격!”

필마온 함대의 노들이 거칠게 당겨졌다. 그들은 배후로 돌기 시작한 노스윈드 함대를 내버려둔 채 부두를 향해 돌격했다. 두캉가 선장의 눈꺼풀이 꿈틀했다.

“우리를 무시하겠다고?”

“네가 차린 식탁에는 앉지 않는다, 두캉가 선장.”

발도 로네스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자유호는 움직이지 않고 질풍호는 항행 불능인 상태에서 그는 지브라호 단독으로도 세 척의 전함과 속도 경쟁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발도는 함대의 다른 배들로 하여금 기함을 보호하는 대신 다림 부두를 공격하게끔 했다.

기함을 공격함으로써 다른 전함들도 모두 한 자리에 묶어두려 했던 두캉가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며 선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부두는 내버려둬! 우리는 지브라만 잡는다. 부두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질풍, 그리고 자유호가 있다!”

바다사자호와 흑기사호, 그리고 페가서스호는 두캉가 선장의 명령에 따라 지브라호를 향해 육박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는 물수리호 또한 지브라 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발도 로네스는 옆에 놓아두었던 석궁을 들어올렸다. 석궁의 쿼렐 끝에는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묶여 있 었다.

외성 위에 있던 바스톨 장군은 앞바다 쪽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에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들었던 소리가 도저히 이 세상의 소리 같지 않았기 에 바스톨 장군은 오닉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닉스의 얼굴 역시 몹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본 바스톨 장군은 자신이 헛소리를 들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오닉스 선장?”

오닉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마스크 대신 코 위까지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두 개의 구멍을 뚫어 시야를 확보한 모습이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평상시보다는 훨씬 생동감 있는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다시 평원 쪽을 바라보았다.

다벨군은 강철의 레이디의 사정 거리 밖에서 땅바닥에 앉은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 처절한 비명에 놀란 듯 웅성거리고 있 었지만 대열은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편으로 멀리 녹색의 기사는 말에 오른 모습으로 가만히 성벽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 을 보며 바스톨 장군은 가까스로 지금이 전투중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다벨군은 바스톨 장군이 성벽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공격해봄직한 모습이었지만 용기병들을 상실했기에 장 군은 전략을 펼칠 수 없었다. 남은 군대를 투입했다가 혼전이 일어나면 강철의 레이디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되므로 바스톨 장군은 마냥 기다릴 도리밖 에 없었다. 바스톨 장군은 용기병들의 배신에 마음 아파하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갑자기 오닉스 선장이 바스톨 장군의 어깨를 확 잡아채었다.

바스톨 장군은 당황하여 오닉스를 보았고 오닉스는 바다 쪽을 가리켰다. 바스톨 장군은 먼바다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불꽃을 보며 당황했다.

“저건 데샨 카라돔의 신호탄인데. 화살에 묶어 쏘나 보군. 그런데 뭣 때문에………… 으음?”

바스톨 장군은 황급히 몸을 돌려 초원을 바라보았다. 초원에서는 다벨군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그들이 지금껏 기다리던 것이 저 신호임을 깨달았지만 그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장군은 재빨리 그레고리에게 명령 을 내렸고 그레고리는 깃발을 꺼내어 흔들었다.

하지만 포환은 날아오지 않았다.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은 외성 쪽의 깃발 신호를 보았지만 거기에 응할 수가 없었다.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는 다가오는 필마온 함대를 향해 포문을 돌리고 있었다. 육지에는 성벽이 있지만 바다에는 그런 것이 없고, 따라서 그들이 어느 쪽을 공격해야 되는가는 자명했다.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은 거의 비슷한 시각에 짧은 명령을 외쳤다.

“발사!”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로부터 80개의 화염이 예리한 부채꼴을 그리며 뛰쳐나갔다.

수평선으로부터 수십 개의 물기둥이 동시에 솟아오르는 장관이 펼쳐졌다. 여덟 척의 필마온 전함들 중 유난히 앞으로 돌출했던 혼벡스호는 무수한 직격탄을 맞아 이물이 거의 사라지는 강렬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이물 쪽으로 바닷물이 차들어가자 혼벡스호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 다. 선원들은 재빨리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갑판 아래에 묶여 있던 노예들과 갑주를 입고 있던 기사들은 비명을 올렸다. 이윽고 영구히 바닷속에 잠겨 있는 롱 갤리어스의 키가 물방울을 흩뿌리며 하늘로 치솟는 극히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박의 무게 중심은 뒤쪽에 맞춰져 있고 혼벡스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기울어지는 혼벡스호의 선체 안에서는 포가에서 풀 려난 대포들이 굴러다니며 선체 이곳저곳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위로 떠오르던 혼벡스호의 선체는 허공에서 천둥 같은 파열음과 함 께 두 동강나버렸다.

촤ᄅᄅᄅ ·룽!

강력한 물보라가 일어나 주위의 전함들에 물벼락을 쏟아놓았다. 혼벡스호는 허공에서 허리가 끊어진 채 두 부분으로 나뉘어 바닷속으로 떨어졌고 이 전대미문의 광경을 본 필마온 기사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공격을 가했던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의 포수들도 이런 식으로 파괴되는 배는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토해놓았다.

혼벡스호는 침몰하면서 필마온 함대의 돌격 대형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거창한 파괴는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필마온 전함들을 뒤흔들었다.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장전을 명령했다. 느리디 느린 터릿 갤리어스는 접근전에 취약하기 때문에 되도록 상대를 접근시키 지 않고 싸워야 한다. 순식간에 재장전이 완료되었고 다시 두 전함은 혼란에 빠진 필마온 함대를 향해 불의 창을 무수히 날려보내었다.

부두에 도착한 하리야 선장은 앞바다의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브라호는 항구 바깥쪽에서 3L의 배다운 교묘한 회피 기동을 계속하며 세 척의 전함을 희롱하고 있었지만 두캉가 선장은 뚝심 있게 지브라를 몰아대고 있었다. 게다가 뒤늦게 도착한 물수리호가 합세하게 되자 지브라호는 더욱 움직임의 폭을 제한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구 안쪽에서는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가 다가오는 필마온 전함들에게 남해 해전사에 길이 남을 만 한 맹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하리야는 지브라호를 추적중인 네 척의 배가 돌아온다면 바다 쪽의 공격은 대충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문제는 육지 쪽의 다벨군이었다. 외성 방향을 돌아본 하리야는 바스톨 장군에 대해 생각했다. 튼튼한 성벽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수비할 병 력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장군이 과연 언제까지 다벨군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리야는 거의 고통스럽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 다. 어떻게 바스톨 장군에게 보내어줄 병력이 없을까?

생각에 빠져 있던 하리야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하리야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성이 울린 직후부터 부둣가에는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귀 가 찢어질 듯한 포성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산해 보였다. 그 기이한 고요함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물체가 있었다.

바닷물 위를 넘실거리는 흰 천은 마치 커다란 해파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출렁거리는 실버블론드.

하리야는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민 채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온몸을 잡아당기는 물의 저항을 뿌리치며 하리야는 팔을 쭉쭉 뻗었다. 다섯 번째로 팔을 휘둘렀을 때 그의 손은 물 위에 떠 있는 부드러운 것에 부딪 혔다. 하리야는 발로 물을 차며 눈앞에 떠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젖어 있는 실버블론드 너머로 하리야는 희게 굳어 있는 라미의 얼굴을 발견했다.

“바라미!”

라미는 마치 시체 같았다. 하리야는 급히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이 라미와 부딪힌 순간 라미는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토했다. 하리야는 엉겁결에 바라미를 확 떠밀고 말았다. 조금 전처럼 거대한 비명은 아니었다. 쇠약해진 라미는 마치 목이 졸린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 었다. 부릅뜬 그 눈은 핏발이 선 채 하리야를 쏘아보고 있었고 그 동안에도 그녀의 몸은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하리야는 다시 다가서려 했다.

“안 돼… 안 돼, 제발 오지 마…………… 오지 마!”

하리야는 헤엄치는 것을 멈췄다. 라미는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하리야가 다가오는 것을 더 무서워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의아해하던 하리야는 곧 해답을 떠올렸다.

하리야는 두 발로만 헤엄치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품속에서 힘들게 커다란 책을 꺼낸 하리야는 잠시 짧게 고민하다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리야는 물이 허락하는 한 팔을 뒤로 끌어당기며 입 속으로 짤막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그리고 하리야는 성전을 집어던졌다.

날아간 성전은 곧 풍덩 하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파문 두세 개가 생기다가 곧 사라진 다음 하리야는 라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라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하리야는 두 팔을 힘있게 끌어당기며 라미를 향해 헤엄쳤고 라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리야는 그대로 라미의 뒤쪽으로 헤엄쳐간 다음 등뒤로부터 라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하리야는 한 팔만으로 헤엄쳤다. 라미는 하늘을 보며 누운 자세로 하리야에게 끌려갔다. 그녀의 옷이 넓게 펼쳐져 물 위에 거대한 삼각형을 그렸고 그 속에서 라미는 고요히 누워 있었다.

하리야는 저편의 바닷가를 향해 힘있게 헤엄쳐 갔다. 라미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글쎄요.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폴라리스를 위해 성유물을 매매하더니 이젠 악마를 위해 성전을 포기하는구나.”

“그렇게 되었군요.”

“언젠가 너를 유혹할 바에야 너를 죽여달라고 했었지?”

“기억합니다.”

“네 신앙의 증거는 너 자신뿐이라는 건가, 하리야? 성유물도, 교회도, 성전도 필요없고 주님과 주님을 믿는 너 자신만 있으면 된다는 거야?” 

하리야는 말없이 팔을 끌어당겼다. 물살이 옆으로 갈라지며 하리야와 라미, 그리고 흰 옷은 느리지만 꾸준한 속도로 해변을 향해 헤엄쳤다.

하리야가 다시 말문을 연 것은 그들이 해변가 바위 위에 도달했을 때였다. 하리야는 라미를 바위 위로 끌어올려 눕힌 다음 그 옆에 주저앉았다. 라미 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바라미.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판데모니엄의 지배자야.”

하리야는 해전을 바라보며 건성처럼 말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사랑을 받는 피조물이지요.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당신을 괴롭히는 것을 원치는 않으실 겁니다. 성전을 휘둘러 형제의 두개골을 깨버리는 것이 용서되지는 않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바람이구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라미는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포성은 치열했지만 다림의 하늘은 맑았다. 라미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려 하리 야를 보았다. 하리야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여전히 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앞바다를 향해 고 정되어 있어 라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옆얼굴과 바닷물이 방울져 흐르는 턱뿐이었다.

그들이 머물러 있던 바위 옆으로 파도가 잘게 부서졌다. 그 소리를 듣던 라미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아무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바람….”

라미의 손이 옆으로 떨어지듯 내려와 하리야의 손등에 올려놓아졌다. 하리야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라미를 보았다. 라미는 자신의 손을 하리야의 손등에 올려놓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국경으로도, 철탑으로도 바람은 막을 수 없겠지. 바람은 그 자신의 규칙에 의해 불어갈 뿐. 바람을 이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바람을 가로막는 것 도 없지. 너는 바람이구나.”

라미는 긴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무로군.”

“바람과 나무요?”

“나는 너를, 복수를 선택하겠다. 하리야.”

하리야는 그 말에 약간 놀랐다. 그것은 벨로린이 킬리 선장에게 한 말과 같았다. 그러나 하리야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기 전 라미가 먼저 말했다.

“너에게는 아무 도움도 못 되겠구나. 어쨌든 지금 당장은 말이야. 미안해.”

“바라미.”

“아냐. 내 이름은 에레로아. 이제 너의 친구지. 나를 친구로 여겨줄 수 있겠어?”

하리야는 뭐라 말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에레로아의 손을 쥐고 있었고, 그의 입은 미소와 함께 말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에레로아.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