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1장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 프롤로그
프롤로그
회색 산맥의 최고봉 미주르는 고집 센 늙은이처럼 북녘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주르가 뿜어내는 둔중한 은광은 대륙의 북쪽 끝, 산들의 고향 드라일 산맥에 대한 그리움처럼 북방의 넓은 하늘을 가로질러 은은히 뻗어가고 있었 다. 북녘 하늘을 온통 실버 비리디언(은빛 도는 청록색)으로 물들이며 퍼져나간 미주르의 은광은 오로라와 망각의 이사의 처녀들의 베틀에 걸려 극광의 천을 짜는 날실로 바뀐다.
그 은광이 시작되는 장소, 미주르의 희푸른 산자락 아래, 세 명의 기수들이 서 있었다.
두꺼운 구름을 힘겹게 뚫고 내려온 햇살이 그들에게 떨어졌다.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악몽인 미주르 산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도 세 명의 기수에게 햇 살의 축복은 넘칠 만큼 쏟아져도 좋을 것이다.
선두에 선 남자는 얼어붙은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어깨에 남아 있는 눈을 털어내었다. 눈은 대개 부드러운 것이다. 남자의 손길도 가볍게 시작되었 다. 하지만 남자는 곧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흘 동안 어깨에 쌓여온 눈은 얼음덩이나 다름없었다. 체온에 녹아 옷감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얼어붙은 눈인 것이다. 남자는 더 거센 동작으로 자신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퍽. 눈송이가 아니라 얼음 가루가 비산한다.
제정신을 가진 자가 보았다면 자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친 동작이었지만 얼어붙은 손에도, 얼어붙은 어깨에도 별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 한 사내는 그 단조로운 동작을 계속하며 눈 아래 넓은 선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상지 왼쪽의 언덕 위에 외로이 서서 회색빛 하늘을 이고 있는 오래된 석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나, 그란?”
자신의 몸을 후려치고 있던 그란은 고개를 조금 돌렸다.
등 뒤에는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말에 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 찢어진 눈꺼풀의 남자는 조금 마른 체격 에 초췌한 표정이었지만 어깨를 편 자세로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옆의 붉은 머릿결을 찰랑거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그 녀는 인간이 저렇게까지 떨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맹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란은 잠시 측은한 눈초리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껴입었으면서 얼어 죽는 시늉을 하나?”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우흐히흐…… 고양이가 껴, 껴입었다고 추위, 추위 안 타는 거, 거…………, 우에이!”
“우에이? 허헛.”
그란은 여자의 괴이한 기침 소리에 잠시 실소하고는 고개를 들어 회색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흘에 걸쳐 회색 산맥을 돌파했다. 그들의 모든 추억과 지나온 날들의 아름답고 슬픈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난 나흘 동안 이 룩한 일만으로도 감탄을 선사해 마땅할 것이다.
그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석비를 바라보았다. 즐겁다고는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흘에 걸쳐 가장 야만스러운 자연의 횡포 속을 묵묵히 걸어온 끝인지라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교수대조차도 반갑게 보여야 할 처지였다. 설령 그 끝에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로 교수대에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임을 그란은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저 석비는…………, 인간을 넘어선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있음에도 석비의 거대한 위용은 그대로였다. 차라리 탑처럼 보일 지경이다. 까마득한 높이로 꼿꼿하게 서 있는 석비는 대 지를 문자판으로 삼은 해시계의 시침 같았다. 그란은 대지에 그려지는 석비의 그림자를 보며 아연해했다. 세월의 손가락이 얼마나 스쳤을까. 미주르 에서 불어온 눈보라와 폭풍은 석비의 모서리를 모질게 깎아놓았지만, 높이 50큐빗에 달하는 석비는 세월보다 더 오래 간직되기를 열망하는 내용을 담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회색 바위들 사이에 서서 회색 얼굴로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휘우웅. 산바람이 그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바위틈에 쌓였던 눈가루들이 휘날려 올라 잠시 주위가 어지러웠다. 바람은 그란의 주의를 끌어보려는 듯 주위를 맴돌았지만 그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석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곧 흥미를 잃고서는 위로 살짝 날아올랐다.
거대한 석비를 바라보고 있던 그란은 텁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씌어 있는 거지?”
다시 약간 날카로운 두 번째 사내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Hegemonia. di reacrize guef forew-laer.”
곧이어 여자가 반쯤 졸도할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말 좋은 말, 말이야! 가슴 깊이, 가슴 깊이 새겨두고 시, 싶어. 그런데 그게, 그게 무슨 뜻인데, 운차이?”
운차이라 불린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헤게모니아. 당신의 운명은 다시 쓰여진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우, 우, 운명이 다시, 다시 쓰여진다고? 조, 좋지. 얼어 죽을 운명만 아니라면 좋겠, 좋겠네.”
선두에 섰던 그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운명의 변화를 공언하고 있는 석비를 바라보았다. 석비는 마치 자라나는 것처럼 보였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라나 마침내 하늘을 찔러버릴 듯한 모습.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안도감을 느끼게 해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란은 싸늘하게 말했 다.
“다시 쓰여진다고? 만일 처음부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차이가 조용히 대답했다.
“다시 쓰여질 것도 없겠지.”
운차이의 말을 마지막으로, 바람은 그들의 대화를 더 듣지 못했다. 인간으로 따지면 본능과 유사한 무엇이 바람으로 하여금 남으로 불게 만들었다. 바람은 한쪽 지평선에서 반대쪽 지평선까지 이르는 그 거대한 망토를 펄럭이며 조용히 남으로 날기 시작했다.
그녀는 북풍이 되었다.
저먼 회색 산맥의 짙은 우수를 담은 날씨는 남쪽의 바이서스 임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바이서스의 수도 바이서스 임펠의 하늘은, 인간의 표 정에 비유하자면 주변의 친구들이 모조리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볼 만한 표정이었다. 그 하늘 아래 사람들의 얼굴도 그와 닮아 있었다.
햇살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날씨였지만 봄철 특유의 약간 미지근한 바람이 흐느적거린다. 북풍은 이 돌의 도시에 들어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고 북녘에서 태어난 이 점잖은 바람은 바이서스 임펠의 골목골목에 불고 있는 좀더 인상적인 바람에 놀랐다.
엄숙한 부인네들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돌진하려는 개구쟁이들을 붙잡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네들 에게 귀를 붙잡힌 개구쟁이들은 그들의 짧은 생애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굉장한 구경거리를 놓치게 되어 몹시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귀를 붙잡아 줄 어머니가 없는 성인 남자들은 약간의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의해 그 구경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으므 로.
바이서스 임펠의 칼브린 로(路).
바이서스의 제3대 국왕이자,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은 네 명의 왕 중 가장 빈약한 체구를 자랑했다는, 그래서 훗날 그의 동상이나 초상화를 바라보는 후대인들로 하여금 당혹감을 감추기 어렵게 만든 에리네드 대왕의 오른팔 칼브린 장군의 이름이 붙은 대로다. 4두 마차 여섯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무지막지하게 넓은 대로였지만 오늘은 그렇게 넓어 보이지 않는다. 세어보려고 들었다가는 두통을 느끼기 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칼브린 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북풍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억제는 충분히 길었고, 마침내 군중 속에서 씩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긴장된 얼굴로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던 수도 경비 대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르르 빠져나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준비된 흥분 속으로 돌입했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두 번째 외침과 세 번째 외침까지는 구분이 되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저 끔찍스럽게 거대한 포효 소리로 뭉쳤다. 시민들은 악다구니를 쓰듯이 외쳤 고 주위에 늘어선 지붕은 들썩들썩, 새들은 포로롱포로롱 날아올랐고 집안에서 어머니에게 붙잡혀 산수 공부를 하고 있거나 혹은 탈출 계획을 짜고 있던 아이들은 더 못 참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놈아! 어딜 가!” “으아아, 10분만! 5분만 보고 올게요!” “고맙구나, 아들아, 나를 웃기려는 거지?” “으아아! 나 엄마 자식 아니죠?” “어머나! 그걸 누가 말해 줬지?” “엄마아악!”
대로에 운집한 사람들은 관습이 요구하는 죄의식과 이성이 요구하는 흥분감 사이에 부대끼며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관습: 그들은 귀족의 사 유재산에 대해 침을 흘릴 수 없다. 이성: 서커스는 시민들의 그렇게 많지 않은 위락물 중 대표적인 것이다.
바이서스에서 서커스는 대대로 문화 귀족의 소유물이다. 귀족들은 사냥개나 말, 사냥매, 전속 악단 등을 육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도에서 서커스 단을 육성한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서커스단은 귀족의 재력과 품위, 사교 활동에 지대한 도움을 준다. ‘트리키 서커스단의 광대는 모둘빼기로 일곱 을 넘는다더라.’’핫하! 조스마인 서커스단의 광대는 아홉을 넘는다고!’ ‘금번 저희 여식아이의 결혼식에 백작님의 서커스단을 보내주셔서 무한한 영 광으로 생각합니다.’‘오오, 자네의 아들이 드디어 어전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내게 작은 서커스단이 있으니 자네 아들에게 축하연을 해주고 싶군.’ 그리고 귀족가의 집사들은 연말회계 정리에서 서커스단의 명목으로 된 수입금을 보며 흐뭇해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품위를 수준 높게 유지하고, 광 대들은 귀족가에 고용됨으로써 생계를 수준 높게 유지하고, 시민들은 서커스를 보면서 마음의 안정감을 수준 높게 유지하고, 그리고 귀족가의 집사 들은 행복하게 장부를 덮는다. 바이서스의 서커스는 모두를 즐겁게 만든다.
어제까지는 그러했다.
오늘 아침 이 유서 깊은 칼브린 로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원래 교통량이 많은 길이었 으니까. 그러나 모여든 사람들이 질서 있게 줄을 맞춰 서자 경비 대원들은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닷없이(정말 느닷없이 라고밖에 표현할 말 이 없다.) 서커스단의 민영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불거져 나오자 이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게 되었다. 경비 대원들은 발 빠르게 시위대 앞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는 돌발 행동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들 자신이 먼저 돌발 행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버린 얼굴들이었다.
각계의 반응: 먼저 아직 이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몇몇 귀족을 제외하고 나머지 귀족들의 경우에는 모두들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귀 족이 아니라면 누가 서커스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광대들은 거취 문제로 곤혹스러워했다. ‘도대체 서커스단이 민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렇다면 그때의 생활수준은 귀족가에 매여 있었을 때보다 더 높아질 수 있는가?” 그리고 집사들은 기민하게 시위 주동자를 찾기 시작했다. ‘도 대체 어느 벼락 맞을 녀석이 귀족의 재산을 깎아먹겠다는 시도를 벌이고 있는 거야!’ 시위대 앞을 막아선 수도 경비 대원들은 5분에 한 명꼴로 미친 듯이 상부에 연락병을 보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법조계 인사들은 근엄한 얼굴로 서커스단의 소유권이 귀족에게 독 점되어 있는 것은 법률적으로 하등 지지받지 못하는 일이며 오로지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 그러나 관습은 퍽 소중한 것이므로 함부로 평가내릴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논평을 거부했다.
이 일대 소란과 혼란 가운데, 그러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사람은 북풍의 주의를 끌었다. 북풍은 발 뒤꿈치를 살짝 들어 날아올랐다.
지금 칼브린 로 옆에 있는 작은 펍의 2층 발코니에서 커피 잔을 앞에 둔 채 꾸벅꾸벅 조는 척하면서 아래를 훔쳐보던 한 명의 중년 사내가 히죽이 미 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 사내는 중간 정도의 체구였지만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편한 옷을 입고 있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왠지 그에게서는 황야의 향취가 느껴진 다. 약간 쇠락한 듯하지만, 분연히 일어서면 만인이 겁에 질리고 말 잠재된 힘의 분위기가 그에게서는 풍겨 나왔다. 하지만 지금 현재 그의 모습은 봄 철의 온기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듯한 자세였고, 그래서 북풍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 펄럭거리는 망토를 살짝 틀어쥐었다.
그때 아래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서커스는 시민의 것이다! 귀족은 서커스를 해방하라!”
“서커스를 해방하라! 서커스를 해방하라!”
“귀족들은 광대들에 대한 착취를 중지하라! 광대들을 해방하라!”
“광대들을 해방하라! 광대들을 해방하라!”
중년 사내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시위는 인정에 호소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었다. 귀족가의 압제에 눌려 자유를 잃은 채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며 강요된 노동에 시달리는 광대들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실제로 양식 있는 광대라면 이 말에 어이없어할 것이다.).
그때 중년 사내의 뒤쪽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꽤 시끄럽군요. 안으로 옮기시겠습니까, 칼 씨?”
칼이라 불린 중년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펍의 주인장이 겨드랑이에 소반을 낀 채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태도와는 달 리 그 얼굴은 아래의 시위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흥분에 도취되어 벌겋게 변해 있었다. 칼은 그 얼굴을 보고서는 다시 히죽 웃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리테들 씨.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떠드는 거지요?”
칼은 마치 그가 이 시위를 배후 조종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질문했다. 그리고 점잖은 칼 헬턴트 씨가 이 시위의 배후 조종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하는 리테들은 흥분해서 대답했다.
“아, 그야 광대들을 귀족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지요.”
“광대들을 해방시킨다고요? 왜죠?”
“아니, 모르십니까? 귀족의 광대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글쎄요. 아시다시피 저는 수도의 사정에 밝지 못합니다만.”
“아니, 그럼 정말로 귀족들의 서커스단에서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끌어 모아 물 대신 강제로 식초를 먹이고 침대 대신 상자 곽에 처넣어 자게 하고 말을 안 들으면 굶기며 채찍으로 때리곤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 시위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요.”
칼은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몹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칼은 전혀 모르는 척, 그러니까 식초를 먹이는 거야 뼈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것이고 상자에 들어가는 것은 마술의 속임수 연습이고 굶는 것은 체중 을 줄이기 위한 것이고 채찍은 밧줄 묘기 연습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경악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테들은 더욱 흥분해서 갖가지 기 괴한 소문들을 들려주었고(모 서커스단의 여자 곡예사는 아이를 셋이나 지웠다더라, 모 서커스단은 장의사의 단골이라더라, 다리를 부러뜨린 곡예사는 마법사에게 연구 재료로 팔린다더라.), 칼은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 헛소문들이 전적으로 칼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리테들도, 그리고 숨어서 듣고 있던 북풍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때 다시 우렁찬 목소리가 선창했다.
“광대도 사람이다! 귀족의 노리개가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도 우리가 죽고 나면 그런 취급을 할 것인가! 그럴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내버려둘 것인 가!”
“으아아!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시위대는 극도의 흥분 상태로 빠져들어 갔고,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도 경비 대원들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즉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것이다. 겁에 질린 상대의 모습은 시위대를 억누르고 있던 마지막 장애물을 치워버리는 역할을 했고 사람들은 곧장 앞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서커스를 해방하라! 광대를 해방하라!”
용맹한 수도 경비 대원들은 줄행랑을 칠 때도 민첩했다. 시위대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칼의 옆에 있던 리테들 씨는 “실례하겠습니 다…………” 어쩌고 웅얼거린 다음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시위대의 다음 행동을 구경하기 위해서 내려간 것이리라. 칼은 싱긋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칼은 다시 내면을 관조하는 자세로 돌아가 버렸고, 북풍은 그 천성대로 빠르게 그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북풍은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갖추었다. 남쪽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커피 잔이 다 비워졌을 때쯤, 발코니로 통하는 문을 통해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들어섰다. 날아오르려던 북풍은 주춤했고 칼은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퍼시발 군.”
퍼시발 군이라 불리는 이 사내의 체구는 정말 대단했다. 북풍을 붙잡아 둘 정도로. 그러나 오거를 연상시키는 그 얼굴엔 칭찬에 당혹해하는 순진한 표정이 떠올랐고, 칼은 미소 지었다. 샌슨 퍼시발은 머쓱한 표정으로 마주 웃으며 칼의 맞은편에 앉았다. 막대한 엉덩이에 짓눌린 의자가 불길한 신 음을 내뱉었지만 샌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이고, 이 짓, 두 번은 못하겠습니다.”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북풍은 조금 전 대로에서 고래고래 선창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샌슨은 이마에서 땀을 훔 치며 말했다.
“자, 이제 끝난 것입니까?”
“그런 것 같네.”
“그럼 말씀해 주실 차례군요. 켁켁! 아이고, 목이야.”
“말씀이라니?”
“도대체 왜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야 되는 겁니까? 원. 이런 짓이라면 후치 녀석에게 맡기면 더 잘할 텐데. 도대체 그 굉장하다는 이유가 뭡니 “까?”
“글쎄…………, 음, 퍼시발 군. 자네가 탑을 쓰러뜨려야 될 일이 있다고 생각해 보게. 즉각 탑으로 달려가 부딪치겠는가?”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대답했다.
“그 탑의 재질이 뭐냐에 달린 문제군요. 일반적인 탑이라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귀족들을 무너뜨려야 된다면?”
“글쎄요? 조나단 아프나이델 씨가 말씀하시길,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우거나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다더군요. 아, 그렇 잖아도 그분께서 왜 이런 해괴한 짓을 하시는지 여쭤보라고 하시던데요.”
지금 바이서스 임펠의 한적한 펍에서 바이서스의 귀족계 전체를 무너뜨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당사자들은 태연한 태도들이었다. 대단한 자신감들. 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가. 자네는 그분 때문에 질문하는 것이었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음? 그 말의 의미가 뭐죠?”
“아, 아닐세. 어쨌든 그런 방법도 있지. 하지만 그런 방법은 부작용도 크네. 귀족들에게 위기의식을 줘서 오히려 그들을 단결시키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좀 돌아가는 방법이지만 부작용이 없는 수단을 강구하는 거라네.”
“음. 기억하기 좋게 요약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러지. 나는 지금 탑의 작은 기와를 들어내고 있네. 기와를 들어낸다고 해서 탑이 무너질 리는 없지. 그 다음에는 천천히 서까래를 들어내고 기둥에 조금씩 흠집을 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격을 가해서 탑을 쓰러뜨릴 생각이네.”
샌슨은 잠시 멍한 얼굴로 칼을 마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약이 너무 심하게 된 겁니까, 아니면 제가 좀 모자라는 겁니까?”
“하하……, 글쎄. 음. 자네가 귀족이라고 생각해 보게. 보잘것없는 광대들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불미스러운 소문의 원흉이 된 귀족 말일세.” 샌슨은 자신의 이마를 딱 치며 말했다.
“아아! 조금 이해하겠습니다.”
칼의 계획은 단순했다. 귀족들로 하여금 자랑거리였던 서커스단을 오히려 부담스러운 짐으로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높은 서커스 관람 료에 불평을 터뜨리는 서민들의 속마음과 맞아떨어져 조금 전과 같은 시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었다(물론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은 고통 받는 광대들을 위 해 분연히 일어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칼은 싱긋 웃었다.
“자랑스럽네. 귀족들은 보잘것없는 서커스를 버리겠지. 그리고 자네가 열심히 살핀다면 귀족들의 재산들이 하나씩 하나씩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 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걸세. 귀족 소유의 서커스? 시민에게 돌려줄 것. 귀족 소유의 사냥터? 농사꾼에게 돌려줄 것. 귀족 소유의 공방? 공인들에게 돌려줄 것. 귀족 소유의 도서관? 그건… 돈은 없으면서 책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돌려주면 좋겠는데. 하하.”
샌슨은 빙긋 웃으며 동시에 감탄했다.
“그렇군요. 칼은 귀족들의 발밑을 조금씩 파낼 생각이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좀 이상한데요?”
“뭐가 말인가?”
샌슨은 목을 좀 가다듬은 다음 주의 깊은 태도로 질문했다.
“저, 엊그제 귀족원에서 모직 길드의 전매권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습니까? 귀족들은 길드장에 피선임될 수 없다는 전통이 위법이라는 결정 말입니 다.”
“그렇지.”
“그리고…………, 칼이 그 결정이 통과되도록 한 거지요?”
“그렇지.”
“왜 그렇게 한 거죠? 모직 길드는 돈을 갈퀴로 긁어 들이는 곳입니다. 바이서스의 모든 모직 제품을 그곳에서 다룬다고요. 귀족들의 기반을 무너뜨 릴 생각이시라면, 왜 귀족이 길드장이 될 길을 열어주신 겁니까?”
샌슨의 질문이 끝나자 칼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은 질문일세. 자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지극히 깊어 졸도할 지경일세, 하하하!”
샌슨은 웃고 있는 칼의 얼굴을 불안하게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칭찬하신 거죠?”
“하하. 퍼시발 군. 모직 제품은 지금으로서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 하지만 그건 조만간 끝장이야.”
“예?”
칼은 샌슨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나직한 어조로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자네 말마따나 모직 길드는 돈을 갈퀴로 긁어 들이는 곳이지. 그리고 위법 결정이 난 이상 많은 귀족들이 모직 산업에 뛰어들겠지. 그리고 모직 산 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게 될 때, 귀족들은 모직 산업과 함께 석양으로 물러난 노인네 신세가 될 거야……………. 하하……”
샌슨은 눈을 커다랗게 끔벅거리다가 간신히 이해에 도달했다.
“모직 산업이 망한다고요?”
칼은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양은 끝이야. 앞으로 10년 이상은 절대로 못 가. 면직 제품이 그 뒤를 잇게 되겠지…………. 모든 전쟁에는 공통점이 있는 법. 전쟁이 끝나면 인구가 폭 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는 경지 면적의 부족을 야기하게 될 테고 양모 산업은 자연히 위축되게 될 터…………. 양모 산업은 귀족들의 참여 덕분에 마지막으로 한번 빛난 다음 급격히 몰락하게 될 테고, 전 재산을 양모에 투자한 많은 귀족들은 연쇄 도산하게 되겠지. 그런 종 류의 비극에는 비장미도 없지만, 황혼의 빛을 띠는 것들이 대부분 가지는………… 메마른 슬픔은 충분하겠지…
칼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거의 졸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듣고 있던 샌슨은 오싹함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좋은 친구 칼은 옹색한 모습으로 허름한 펍의 발코니에 앉은 채로 담담한 자신을 담아 10년 후의 미래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웅얼거리던 칼은 갑자기 기지개를 켰다.
“으음. 졸리는데.”
샌슨은 조금 전에 느꼈던 약간의 오싹함을 잊고 대신 측은함을 느꼈다. 칼은 요 며칠 제대로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귀족원의 모직 길드장 건과 이 시위를 준비했다. 샌슨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잖습니까. 이제 뒤처리는 제게 맡기고 들어가 쉬시지요.”
칼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로넨 휴리첼 씨는 시위대에 그대로 있겠지?”
“예..”
“그럼 휴리첼 씨께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다가 오후 적당한 시간에 어제 알려준 서커스단 중에서 자의로 하나를 골라서 공격하라고 전하게. 많은 수 를 공격할 필요는 없네. 하나만 공격하면 돼. 귀족 녀석들, 조금 오싹하겠지.”
“그건 어제도 말씀하셨던 겁니다.”
“중요하니까 또 말하는 거잖나. 그래. 음…………,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칼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어서 샌슨은 그가 잠든 줄 알고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칼은 천천히 일어났다.
“아, 그래. 논문이 있었지.”
“예? 논문이오?”
칼은 일어나서는 다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서는 말했다.
“으아하하암. 쩝, 그래. 논문 하나를 써야 돼. 우생학에 대해. 근친 교배는 열성 인자의 대량 발생을 야기하므로 우생학적으로 불리함, 어쩌고저쩌 고. 오크 산수 공부하는 소리를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야 되지. 참 재미없는 일이지만.”
“아니, 뜬금없이 논문이라니요?”
칼은 씩 웃으며 샌슨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응, 한 두어 달 뒤에 귀족들의 사촌간 결혼을 금하는 법률을 귀족원에서 통과시킬 생각이네. 그때 참고 자료랍시고 제시할 것이 필요하거든.”
“예? 아니……”
칼은 그야말로 해맑게 웃었고 그래서 샌슨은 다시 오싹함을 느꼈다.
“아, 기대해도 좋네. 귀족들의 피를 좀 흐려줄 생각이네. 그리고 근친간의 결혼을 통해 가문의 재산을 계속 보존하는 것도 방해해 주고.”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귀족들은 대개 같은 귀족들끼리, 심지어는 종종 사촌 간에 결혼을 한다. 그것은 품위의 문제도 있지만 실속의 문제도 있다. 같은 가문 내의 남녀끼리 결혼하는 것은 가문의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보호하는 의미가 있다. 칼은 바로 그것을 깨뜨릴 의도임을 고백한 것이다. 샌슨은 떨 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칼이 그런 논문을 쓰면 누구나……”
“물론 내 이름으로 발표할 리는 없지.”
“그러면?”
칼의 눈에 갑자기 빛이 번득였고 샌슨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칼은 샌슨의 곁을 지나치며 한가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기억해 두게. 저 용맹 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 공의 이름으로 발표할 생각이네. 나 는 그런 글 쓴 적이 없다는 식으로 말해서 산통 다 깨서는 안 돼.”
수식어가 지나치게 길었기 때문에 샌슨은 조금 후에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맙소사, 카아아알!” 조금 전에 고함을 너무 많이 지른 덕분에 샌슨의 비명 소리는 대단히 듣기 거북했다. 칼은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북풍을 놀래게 만들었다.
“바람이 남으로 부는군……………”
북풍은 훔쳐듣고 있던 것을 들키고 말았다는 말도 안 되는 당혹감을 느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망치듯 빠른 속력으로 남으로 날기 시 작했다.
자유로운 비행은 갈색 산맥에 접어들어 난관에 봉착했다.
복잡한 것이 싫다면 단순히 산맥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갈색 산맥은 단순히 산맥이라 불릴 만한 지형을 넘어서는 무엇임에 분명했다. 지 리학자들의 말로는 대륙 중앙 조산대)에 해당하며 마법사들의 말로는 마나 월에 해당하는 이 갈색 산맥은, 바람에게는 그녀의 습기를 모조리 빨아내는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흡수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습기 찬 바람은 갈색 산맥에 부딪혀 일종의 푄현상을 일으킨다. 높은 고도로 올라가는 동안 바람 속의 습기는 모두 빗방울로 응결되어 떨어지며, 따라서 능선을 넘은 바람은 건조하고 메마른 바람이 되어 갈색 산맥의 남 쪽 사우스그레이드의 대기를 바스락거리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지금 갈색 산맥을 넘어서는 북풍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휘우우웅.
휘우우웅.
갈색 산맥은 요지부동이었고 그 이마를 감도는 산 폭풍은 가혹했다. 사용될 수 없는 언어들로 이루어진 역경을 거친 끝에, 북풍은 간신히 갈색 산맥 을 넘어섰다. 갈색 산맥을 넘기 위해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그녀는 기진맥진한 채 숨을 돌렸다.
북풍은 습기를 머금기 위해 낮게 날기 시작했다.
이파실 시의 상공을 날고 있던 그녀는 무언가에 주의가 끌렸다. 정신을 수습한 다음 주위를 돌아본 북풍은 이 메마른 대기 속에 울리는 맑은 목소리 에 주의를 기울였다.
“저쪽이다! 잡아!”
상당히 다급한 어투였지만, 북풍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다급한 어투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맑고 명랑했던 것이다. 마치 재미있는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북풍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이런, 빌어먹을! 카리스 누멘께 맹세코 네놈 두뇌가 상쾌한 바람을 쐬게 해주겠다!”
두개골이 쪼개지기 전에는 두뇌에 바람이 닿기는 어렵다. 북풍은 이 해괴한 협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둘러보기 시작했고, 곧 이파실 시의 넓은 길을 달려가고 있는 두 개의 크고 작은 형체를 발견했다. 펑퍼짐한 로브 자락을 양손으로 걷어든 채 달리는 젊은이는 아무리 보아도 프리스트의 모습 이었으나, 첨언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프리스트답지 못한 동작으로 달려가고 있는 프리스트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거대한 배틀 액스를 마치 지휘봉 휘두르듯이 휘두르며 달려가는 드워프의 모습은 북풍에게 꽤나 감명을 주었다. 주위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파실 시의 시민들도 꽤나 감명 받은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인간과 드워프는 지금 무언가를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북풍은 그들을 앞질러 나아갔고, 곧 그들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를 깨닫고 아연해 했다. 그러나 그녀가 놀람을 표현하기도 전에 젊은 프리스트가 여전히 쾌활한 어투로 외쳤다.
“하하하! 이 녀석! 드디어 잡혔다. 나와요, 아프나이델!”
북풍은 추격 대상의 앞쪽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오는 하얀 로브의 젊은이를 볼 수 있었다. 젊은이는 광대뼈가 약간 도드라진, 평소라면 근엄할 듯 한 얼굴의 마법사였는데 지금은 전혀 근엄하지 않았다. 아프나이델이라 불린 그 마법사는 두 팔을 벌려 길을 막듯이 하기는 했지만 그 얼굴에는 걱정 과 불안, 위기의식이 넘치도록 담겨 있었다. 그는 프리스트와 드워프의 추격 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자, 이제 막혔단다. 그러니 그만 달아나는 게 어떻겠니… 오지 마! 젠장!”
추격 대상은 두 팔을 벌려 앞을 막아선 아프나이델을 보더니 주춤하며 달리던 것을 멈췄다. ‘그것’은 긴 목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고, 뒤를 쫓아오는 프리스트와 드워프의 모습은 북풍이 보기에도 끔찍스러웠다(프리스트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끔찍하지 않았지만 그 옆의 드워프의 경우에는 오거에게라도 잠시 물 러나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는 반응을 야기하기에 충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심을 굳혔다. 재빨리 몸을 돌린 ‘그것’은 앞을 막아선 아프나이 델에게 달려들었고, 아프나이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물리면 꽤 아플 듯한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캬아아악!”
겁에 질린 아프나이델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리고 말았다.
“오, 안 돼. 파이어볼!”
“히익! 파이어볼이라고!”
추격하던 드워프는 기겁하며 땅으로 몸을 날렸다. 파우우욱! 아프나이델이 쏘아낸 거대한 불의 공은 비록 발악하듯 발사한 것이지만 목표물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숙달된 솜씨. 하지만 ‘그것’은 가볍게 날개를 퍼덕여 옆으로 몸을 피했고 그러자 불의 공은 곧장 그 뒤의 젊은 프리스트와 땅에 쓰러진 드워프에게 날아갔다. 드워프는 미친 듯이 외쳤다.
“제레인트! 막아라! 안 되면 몸으로라도 막아!”
화르르르! 공기를 불태우며 무섭게 날아드는 파이어볼 앞에서도 제레인트라 불린 프리스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우선 드워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엑셀핸드! 그런 식으로 속마음을 노출하는 것은 노련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고요.”
제레인트의 눈은 드워프를 보고 있었지만, 날렵하게 움직인 그의 손은 품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휘황찬란한 디바인 마크를 꺼냈다. 제레인트는 허리 를 크게 뒤틀며 팔을 당겼다. “으아아압!” 기합과 함께 제레인트는 디바인 마크를 쥔 손을 힘껏 앞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아프나이델이 쏘아낸 파이어볼은 제레인트의 손에 부딪히며 맹렬한 폭음을 내었다. “오, 맙소사. 유피넬이여!” 이파실 시의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 한가운데서 일어난 이 전대미문의 광경에 기겁했다. 제레인트는 파이어볼을 쳐낸 것이다.
튕겨나온 파이어볼은 허공을 향해 끝없이 쏘아져 올라가 잠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뜨는 듯했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휙 쳐들어 하늘을 보더니 자 신의 위업에 감탄하며 외쳤다.
“테페리, 좋았어요!”
훗날 이파실 시에는 그들의 도시를 지나던 한 프리스트의 믿기 어려운 전설적 위업에서 유래된 독특한 구기 종목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채를 손에 들고 날아드는 공을 쳐내는 그 구기 종목의 이름은 그 놀라운 전설 속에 ‘테페리, 좋았어요!’라고 외쳤다는 프리스트의 고함으로부터 유래되었 는데, ‘테페리나이스’라는 이름이 길다고 여긴 게으른 후손들에 의해 축약되어 장차 다른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어쨌 든 당장 목숨의 구원을 받게 된 엑셀핸드라는 이름의 드워프는 한숨으로도 땅을 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듯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죽을 뻔했네…………. 으아아악! 저 빌어먹을 녀석, 붙잡아!”
제레인트는 잠시 이 호칭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혼동을 일으켰다.
“누구요? 아프나이델? 아니면…..”
“물론 저 조상 망신 혼자 다 시키는 녀석!”
엑셀핸드가 가리키는 ‘그것’은 지금 아프나이델 앞에 주저앉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것’ 역시 제레인트가 보여준 이 놀라운 묘기에 넋을 잃 고 있었던 것이다. 엑셀핸드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프나이델은 앞에 멍청하게 앉아 있는 ‘그것’을 보고서는 퍼뜩 좋은 기회임을 깨달았다. 아 프나이델은 조심스럽게 ‘그것’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것’역시 엑셀핸드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야아압! 잡았⋯⋯을 수도 있었어. 으윽, 턱이야.” 아프나이델의 회심의 기습은 빗나 갔고, ‘그것’은 땅에 턱을 박은 아프나이델의 등을 넘어 달아났다. 황급히 달려온 제레인트는 아프나이델을 부축하며 밉살스럽다는 듯이 ‘그것’, 그러 니까 골드 드래곤의 웜링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 못된 녀석아! 돌아오기만 해봐라, 목에 개목걸이를 채울 테다!”
“캭캭!”
골드 드래곤의 웜링은 그 품위 저조한 협박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펄럭거리며 부지런히 달려갔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비늘은 성체와 마찬가 지였지만, 날개는 덜 자라 아직은 도마뱀과 혼동되지 않도록 해주는 차이점 외의 역할은 못하고 있다. 그 머리도, 다른 동물의 새끼에 비교하자면 멋진 비율이었지만 몸에 비해 볼 때는 아직 좀 커다란 편에 속해 전체적인 인상을 앙증맞아 보이게 한다. 크기는 대략 커다란 개와 송아지의 중간 정도. 설령 아프나이델이 붙잡았다 손 치더라도 오랫동안 붙들어 놓지는 못했을 것이 확실했다. 그 거대한 횡포가 달려가는 곳에서는 펄쩍 뛰어오르는 사 내, 자지러지는 계집아이, 경비 대원에게 물동이를 집어던져 버리는 처녀, 물동이에 맞아 기절해 버리는 경비 대원 등이 발견되었다.
뒤뚱뒤뚱 달려온 엑셀핸드 역시 제레인트의 반대쪽에서 아프나이델을 부축하면서 노한 목소리로 구슬프게 중얼거렸다.
“저 막돼먹은 녀석이 드래곤 로드의 핏줄이라니! 오오, 도대체 드래곤 로드를 뵐 면목이 없군 그래.”
주위의 이파실 시민들은 못된 돼지나 개를 쫓는 사람의 모습과 골드 드래곤의 웜링을 쫓는 사람의 모습에 별 차이점이 없다는 사실에서 당혹감을 느 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골드 드래곤의 웜링을 마치 못된 애완동물이나 되는 것처럼 쫓아다니는 일행의 모습이 얼마나 기괴한가를 깨달았고, 감 히 일행에게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인간과 드워프의 일행은 대로의 저편으로 달아나며 캭캭거리는 웜링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주위 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북풍은 이 광경의 결말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쪽으로부터의 소환은 그녀의 발길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북풍은 잠시 젊은 프리스트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든 다음 남으로의 발길을 재촉했다.
남녘으로 날수록, 북풍은 극도의 흥분을 느꼈다.
주위의 거대한 힘은 남으로 나는 북풍을 거칠게 방해해 왔다. 그것은 기상학자들이나 선원들이 말하는 편서풍으로, 그녀의 진로와는 완전히 반대되 는 방향으로 행사되는 힘이다. 하지만 북풍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북에서 태어난 그녀는 원래 극지 편동풍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중위도까지 만 불 수 있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쪽의 오팔 빛 바다가, 갈매기와 희구(希求)의 그림 오세니아가 그녀를 부르고 있 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편서풍의 거대한 힘을 뚫고 제트 기류의 강력한 흐름을 피하며 남으로 치달았다.
역풍 속을 날며 북풍은 거의 소멸될 뻔했다. 그녀를 부르는 남쪽의 소환은 한시도 끊이지 않았지만 미주르로부터 기나긴 여행을 거친 그녀로서는 편 서풍의 강력한 방해를 뚫고 지나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까마득한 하늘의 대평원을 거칠 것 없이 휩쓸고 다니는 제트 기류는 북풍을 갈가리 찢을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북풍은 굽히지 않았다.
열사의 사막은 모든 것이 잠든 대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북풍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지독한 복사열에 덥혀진 뜨거운 사막의 공기는 미 친 듯이 상승하며, 실제로 사막은 세상의 다른 곳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풍이 부는 지역이다. 저 거대한 사구와 기괴하게 깎여나간 기암괴석들 은 사막이 아니면, 미친 듯이 치닫는 사막의 바람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장관이다. 광란스러운 사막의 바람은 북풍을 혼까지 파괴시키려 들었 다. 그리고 그 위를 지나치는 모든 바람에게서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수분을 빨아내는 사막의 건조한 모래들은 북풍에게는 지옥이다. 그러나 북풍은 돌아가지 않는다. 그림 오세니아의 소환은 돌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맹렬히 치달은 그 돌진의 끝에서, 북풍은 갈가리 찢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볼 힘마저 잃은 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림 오세니아의 소환은 잔인할 만큼 선명했지만 북풍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지쳐버린 북풍의 귀에 비몽사몽간에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끼루룩, 끼루룩.
갈매기! 북풍은 번쩍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코를 스쳐가는 짠 내음에 놀란다.
그녀는 이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그녀의 치맛자락 아래로 바다의 빛깔은 연한 버밀리온(주홍색). 한쪽 수평선에서 다른 쪽 수평선까지 펼쳐진 선홍색의 바다 위로 투명하고 가벼운 파 도가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실성할 듯한 희열을 느끼며 북풍은 진저리쳤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한없이 넓은 해원에 조용히 직선을 긋고 있는 터 무니없이 작은 범선이 보인다. 버밀리온의 바다 위로 범선의 돛은 눈이 시리도록 흰 실버 화이트. 바람은 기절할 듯이 기뻤지만 먼저 침착하게 그 망 토를 펼쳤다.
범선은 자이펀 특유의 바컨틴이다. 흔히들 자이펀 바컨틴이라 부르는 배로서 세 개의 마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포마스트에는 횡범(橫帆)을, 메인마스 트와 미즌마스트에는 종범(縱帆)을 달고 있다. 그리고 포마스트의 거대한 횡범에는 거대한 문장이 채색되어 있었다. 이 문장은 다른 나라에서라면 독 특한 것을 좋아하는 귀족의 배나 전함 등에서나 간혹 발견되는 것이지만, 자이펀의 뱃사람들은 하나 예외 없이 모조리 자신들의 배에 문장을 그려 넣 는다. 망망한 대해에서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선박의 안전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도 있지만, 해상 결투도 불사하는 자이펀 인의 배짱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 여기 있으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은 곧장 달려오라.’
지금 북풍의 발 아래 유유히 항해하고 있는 자이펀 바컨틴의 문장은 온통 붉은색의 돛에 희게 그려진 서펀트의 모습이었고, 그래서 흥분한 북풍의 눈에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북풍은 범선을 향해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대한 돛에 그려진 서펀트의 모습이 더욱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서펀트의 모습은 거의 실물대였고 돛을 가득 메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체를 쓰다듬던 북풍은 더욱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선박의 의장은 그 배의 연륜에 비례하여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야만의 제도(諸島)를 돌아다니며 발견한 신상이나 조각품들을 배의 선수 상으로 사용하는 풍습은 이미 오래 전에 쇠퇴했지만, 오랜 항해 동안 발견되는 진귀한 물건들로 배를 장식하는 것은 아직도 그 배와 그 선장에게 자 부심을 준다. 그런데 이 배의 의장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이물 위로 높게 하늘을 겨냥하고 있는 선수상 역시 서펀트의 모 습이다. 당장이라도 꿈틀대며 배 앞으로 튀어나갈 듯이 긴장된 그 모습은 북풍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 배의 균형은 도대체 어떻게 맞춰져 있는 것 일까? 이물에서 뱃전을 따라 주욱 돋아난 것은 아무리 보아도 이빨이다. 그것도 등고래나 돌고래의 이빨 같은 것은 아니다. 그 거대하면서도 날카로 운 이빨 역시 서펀트의 이빨이었다.
배를 휘감아 돌던 북풍은 이 배가 혹시 서펀트잡이 배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바람인데.”
메인마스트 아래에 주저앉아 있던 사내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사내는 가벼운 동작으로 훌쩍 일어서서는 눈부시도록 흰 돛 사이로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주위에 있던 선원들은 모두 사내에게 눈길을 보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은 순조로운 오후, 조타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 선원들에게 는 거의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선원들은 갑판 여기저기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고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 사내의 모습 은 선원들 모두에게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려나?
사내는 강철 막대를 연상시키는 질기고 가느다란 체격이었다. 상의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적갈색으로 그을린 상체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강인해 보이는 오른손에는 긴 검을 들었는데, 그 재질이 독특했다. 투박하면서도 가벼워 보이는 그 검은 목검이었다.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묶고 있 었지만 턱수염의 색깔이 붉은 것을 보면 머리 색깔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옆에서 한가로운 동작으로 밧줄을 감고 있던 선원 하나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시도 씨?”
이시도라 불린 사내는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가볍게 어깨에 올리면서 말했다.
“바람에서 육지 냄새가 나는데.”
선원은 꼬고 있던 밧줄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구가 가깝잖습니까?”
“아니, 틀리다. 이건…………, 희한한데, 초원의 냄새인가.”
“예?”
선원의 눈이 더욱 의아한 빛을 띠었고, 일등 항해사 이시도 사이록 곁을 맴돌던 북풍은 저 바이서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소스라쳤다. 그녀 가 태어난 미주르 산자락은 사이들랜드 대평원의 발치에 있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당혹한 그녀는 이시도에게서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둔중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북풍과 이시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선실로 통하는 주승강구 쪽에서 걸어나오 는 또 다른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내는 이시도에 못지않은 체구였는데 대략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도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게다가 눈살을 찌푸린 채 바람을 바라보는 선원들이 대개 그러하듯 사내의 눈가에도 무수한 잔주름이 새겨져 있어 사내를 더욱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건강한 얼굴이었고 거동 역시 불필요한 동작 없이 기운차고 절도 있었다. 가벼운 셔츠 차림에 이시도와 마찬가지로 목검을 지녔는데, 그의 경우에는 뽑아드는 대신 등에 장비한 채였다.
북풍은 그의 얼굴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어디선가 봤어. 바람은 그런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북풍이었고 따라서 그녀가 보아온 모습들은 모두 휙 지나쳐온 광경들이었지만, 지금 갑판에 올라오는 사내의 얼굴은 그녀의 추억 속의 어느 얼굴과 꽤나 유사했다.
‘미주르 산기슭의, 그 남자.’
북풍은 자신의 기억력에 뿌듯함을 느꼈다. 미주르 아래에서 보았던 남자들 중 하나가 지금 이 남자와 몹시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냉랭한 눈으로 보고 냉랭한 말투로 말하는 남자.
갑판에 올라선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시도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이시도 군?”
“별일 아닙니다, 선장님. 바람이 좀 이상해서.”
일등 항해사 이시도는 깍듯한 예의를 담아서 선장에게 보고했다. 선장은 의아쩍은 눈으로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바람이? 뭐가 이상하다는 말인가?”
이시도는 잠시 주춤했다. 대답을 하자니 선장의 비웃음을 사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장은 실없는 대답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늦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이시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 바람은 딱 좋습니다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메인마스트 아래에 주저앉아 있던 사내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사내는 가벼운 동작으로 훌쩍 일어서서는 눈부시도록 흰 돛 사이로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주위에 있던 선원들은 모두 사내에게 눈길을 보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은 순조로운 오후, 조타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 선원들에게 는 거의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선원들은 갑판 여기저기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고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 사내의 모습 은 선원들 모두에게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려나?
사내는 강철 막대를 연상시키는 질기고 가느다란 체격이었다. 상의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적갈색으로 그을린 상체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강인해 보이는 오른손에는 긴 검을 들었는데, 그 재질이 독특했다. 투박하면서도 가벼워 보이는 그 검은 목검이었다.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묶고 있 었지만 턱수염의 색깔이 붉은 것을 보면 머리 색깔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옆에서 한가로운 동작으로 밧줄을 감고 있던 선원 하나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시도 씨?”
이시도라 불린 사내는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가볍게 어깨에 올리면서 말했다.
“바람에서 육지 냄새가 나는데.”
선원은 꼬고 있던 밧줄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구가 가깝잖습니까?”
“아니, 틀리다. 이건…………, 희한한데, 초원의 냄새인가.”
“예?”
선원의 눈이 더욱 의아한 빛을 띠었고, 일등 항해사 이시도 사이록 곁을 맴돌던 북풍은 저 바이서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소스라쳤다. 그녀 가 태어난 미주르 산자락은 사이들랜드 대평원의 발치에 있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당혹한 그녀는 이시도에게서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둔중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북풍과 이시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선실로 통하는 주승강구 쪽에서 걸어나오 는 또 다른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내는 이시도에 못지않은 체구였는데 대략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도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게다가 눈살을 찌푸린 채 바람을 바라보는 선원들이 대개 그러하듯 사내의 눈가에도 무수한 잔주름이 새겨져 있어 사내를 더욱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건강한 얼굴이었고 거동 역시 불필요한 동작 없이 기운차고 절도 있었다. 가벼운 셔츠 차림에 이시도와 마찬가지로 목검을 지녔는데, 그의 경우에는 뽑아드는 대신 등에 장비한 채였다.
북풍은 그의 얼굴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어디선가 봤어. 바람은 그런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북풍이었고 따라서 그녀가 보아온 모습들은 모두 휙 지나쳐온 광경들이었지만, 지금 갑판에 올라오는 사내의 얼굴은 그녀의 추억 속의 어느 얼굴과 꽤나 유사했다.
‘미주르 산기슭의, 그 남자.’
북풍은 자신의 기억력에 뿌듯함을 느꼈다. 미주르 아래에서 보았던 남자들 중 하나가 지금 이 남자와 몹시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냉랭한 눈으로 보고 냉랭한 말투로 말하는 남자.
갑판에 올라선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시도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이시도 군?”
“별일 아닙니다, 선장님. 바람이 좀 이상해서.”
일등 항해사 이시도는 깍듯한 예의를 담아서 선장에게 보고했다. 선장은 의아쩍은 눈으로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바람이? 뭐가 이상하다는 말인가?”
이시도는 잠시 주춤했다. 대답을 하자니 선장의 비웃음을 사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장은 실없는 대답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늦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이시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 바람은 딱 좋습니다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선장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상한 냄새라고?”
이시도는 곧이어 쏟아져 나올 웃음에 대비했지만 선장은 웃지 않았다. 대신 선장은 팔짱을 끼더니 턱을 조금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고, 그러고 나서 선장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북풍은 그녀의 몸에 코를 들이대고 체취를 맡으려 드는 선장의 행동에 당황해 얼굴을 붉혔지만 특별히 제지를 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과연 선장이라 불린 이 사내가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지에 더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북풍은 잠시 선장의 주위를 조용히 휘감아 돌았다.
선장은 눈을 감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눈을 떴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자 이시도는 발끝에 힘을 준 채 호통에 대비하기 시작했으며 주위의 선원들은 괜히 바쁜 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장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원의 냄새로군.”
이시도는 순간 카레한 탑의 꼭대기에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선장이 그의 말을 뒷받침했기에 주위의 선원들에 대한 이시도의 입지는 순간적으로 세 배쯤 상승했고, 따라서 그가 자이펀의 수도에서도 가장 높은 카레한 탑에 올라선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해도 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주위의 선원들 은 이시도에게 찬탄의 눈길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시도의 머릿속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초원의 냄새를 맡는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아서 긴가민가하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씩씩하게 말했지만 이시도의 머릿속에는 이미 항해가 끝난 후의 조촐하면서도 뭔가 비밀스러운 술자리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그 술자리에 는 놀랍게도 선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시도로서는 단 두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선주도 동석할 것이다. 그리고 선장은 뿌듯한 목소리로 이시도를 소 개한다. “상당히 유능한 친구랍니다. 이 친구는 바다 한가운데서 초원의 냄새를 알아차리더군요.” 놀라운 눈길로 이시도를 바라보는 선주. 그리고 선 장은 피로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잖아도 은퇴하고 싶었습니다만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안심하고 은퇴할 기회를 잡은 것 같군요.” 놀랍게도 선장은 차기 선장으로 이시도를 지명한다! 선주는 예의를 알기에 선장을 만류하려 들지만 이미 이시도에게 홀딱 반한지라 그 만류는 절실하지 못하다. 품위 있는 사양과 몇 번의 거절 끝에 이시도는 선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임 인사를 위해 선주의 집에 들른 이시도는 놀 랍게도 선주의 따님을 보게 되며, 그 순간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시도가 생각을 가족계획에 대해서까지 진행시키고 있을 무렵, 선장은 그윽한 눈으로 이시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꽤나 개코로군, 이시도 군.”
주위에서 긴장된 얼굴로 선장과 일등 항해사 이시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선원들은 모조리 폭소를 터뜨렸고 이시도마저도 히죽 웃고 말았다. 물론 이 시도는 우스워서 웃는다기보다는 마땅한 다른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짓는 엉터리 미소였는데,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은 북풍을 즐겁게 만 들었다. 북풍은 선장의 주위를 다시 한번 돈 다음 서서히 날아오를 채비를 갖췄다. 바로 그때였다.
“녀석을 삼킨 황야의 바람이지…………. 빌어먹을!”
선장의 입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과격한 말이 튀어나왔다. 북풍은 이 느닷없는 모욕에 놀라서 화를 내는 것도 잊었다. 아니, 화를 내기는커녕 겁 을 집어먹고 달아날 지경이었다. 선장의 눈빛은 맹포했다.
문득 북풍은 선장의 과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육지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대양의 폭풍을 가로질렀던 사나이며, 빙원에서 불어오는 한파 속에 서 전방을 주시하던 남자였다. 눈앞으로 거대하게 다가오는 해적 깃발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던 남자이며 단 한 가지 이유, 오로지 떠나기 위해서 만 석양에 불타오르는 놀빛 항구로 들어서는 남자였다. 그리고 북풍은 그가 마침내 파도에 삼켜져 영원히 대지에 뼈를 묻지 못할 것임을 당연하게 느 꼈다.
레드 서펀트 호의 선장 신차이는 모든 점에서 선장이었으며, 그리고 선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장 신차이는 하늘을 쏘아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고개를 내리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선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신 차이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고는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일등 항해사 이시도에게 낮고 강하게 외쳤다.
“풍향은 좋군, 이시도 군!”
이시도는 꿈에서 깨어나듯 움찔하며 대답했다.
“예, 예! 선장님!”
“삼각돛 모두 펴고 앞돛은 모두 접는다. 보스플릿의 노래가 듣고 싶군. 지금부터 최고 속력으로 항구를 향한다!”
“예! 선장님!”
이시도는 씩씩하면서도 쾌활한 동작으로 경례를 붙였다. 신차이 선장은 일등 항해사의 이 작은 장난에 관대한 미소를 보내주었고, 이시도는 몸을 돌 려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삼각돛을 모두 편다! 앞돛 모두 접는다! 선장님께서 보스플릿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신다! 제군들, 보스플릿이 부러질 때까지 달려보자! 삼각돛 모 두 펴고 앞돛 모두 접는다!”
“예! 항해사님! 삼각돛 모두 펴고 앞돛 모두 접는다!”
선원들은 쿵쾅거리며 모두 포마스트와 보스플릿[第一斜穡]으로 달려갔다. 선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외쳤다.
“조타수!”
“예! 선장님!”
“진로는 북북서. 거기로 고정하라! 졸란까지 전속력 항해다!”
“알겠습니다! 진로 고정합니다!”
배는 그 선수를 북북서로 고정시켰다. 북풍이 불고 있었지만 포마스트의 횡범을 모두 접은 레드 서펀트 호는 보스플릿의 삼각 종범만으로 역풍을 거 스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물의 제1사장은 역풍을 향해 겨누어진 검처럼 날카롭게 곤두섰다. 바람을 가로지르는 보스플릿에서 검을 휘두르는 듯 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파, 파, 파파파, 파아아아앗! 곧이어 보스플릿에서는 역풍의 노래, 보스플릿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배가 가속함에 따라 이물에 서는 하얀 물보라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배의 마법 같은 설계에 의해 물보라는 모조리 좌우로 갈라져 튀어오를 뿐 갑판에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선원들은 환호를 올렸다. “이이야호!” 작지만 강력한 선체 전체가 파도를 넘나들며 피치를 시작했다. 배는 용틀임하며 나 아갔고, 선원들은 중량감을 상실시키는 속도감에 도취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이펀 선원들이고, 판자 한 장 아래의 지옥에는 별 관심이 없는 작자들이 다.
위로 날아오른 북풍은 순식간에 발 아래로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밀리온의 바다 위로 거칠게 그어진 흰 항적이 눈부시다. 배는 아득 한 수평선을 향해 걷잡을 수 없는 속력으로 나아갔다. 예리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항적은 마치 붉은 바다를 절단하는 날카로운 검처럼 보인 다.
북풍은 문득 그 배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하지만 북풍은 북쪽으로 불 수 없다. 북쪽으로 부는 바람은 북풍이 아니다. 심지어 북풍은 멈출 수도 없다. 멈춰 있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왜 이렇듯 끈질기게 남으로 날아왔는가?
그녀는 북풍이기 때문이다. 북풍은 ‘남쪽’으로 ‘날아가는 바람이다.
그래서 북풍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남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대해원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익사자(死者) 그림 오세니아 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한없이 펼쳐진 물결뿐이다.
물결은 잔잔히 부서지고 있었지만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다. 고요하다. 일렁거리는 물결뿐이다.
북풍은 아직도 날고 있다.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날아야 할 리가 없다. 북풍은 남쪽으로 날아가는 바람이다. 하지만 남쪽이란 무엇인가. 그녀가 5분 전에 날고 있던 하늘은 그녀가 10분 전에 날고 있던 하늘의 남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북쪽이다. 북풍은 고개를 돌려 남쪽이었던 북쪽 하늘을 바라본다. 저 하늘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한때 저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 날아왔지만, 이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하늘이다.
그리고, 그런 비행이 계속된다.
또다시 남쪽 하늘이 북쪽 하늘로 바뀐다.
그녀는 아직도 날고 있다.
의지도 없고 희망도 없다. 잠시 찾아왔던 기쁨은 이제 돌이켜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거짓된 추억으로 변질되었다. 그녀는 오직 타성으로 날 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날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림 오세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미 수평선도 사라졌다. 북풍은 더 이상 낮과 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힘들게 느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빠르게 사라졌고, 그로부터 북풍은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오로지 끝없이 펼쳐진 물결, 그리고 적막.
그녀는 아직도 날고 있다.
그녀는 날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