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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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1권 – 2장 시인의 귀환 4


4

하탄의 궁전. 궁전은 하나의 집이지만 집이 아니다. 좋은 집이 가져야 될 요건은 당연히 그 거주자의 보호와 안락한 생활의 제공일 것이다. 그러나 하탄의 궁전은 하탄을 보호하거나 하탄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하는 장소가 아니다. 하탄은 하탄이자 궁전이자 자이펀이며 세계이고 우주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탄의 집인 하탄의 궁전 역시 집이라고 부르기는 좀 쑥스러운 점이 많다. 하탄의 궁전은, 하탄이 그곳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숭배자들을 만나고 그 외 일상생활을 하는 ‘장소’일 뿐이다. 하탄에겐 집이 없다(대자연의 집은 무엇인가?).

그래서, 지금 하탄의 궁전 2층 흑옥의 방에서 노성을 지르고 있는 내무 대신 무라스는 절대로 하탄의 집에서 소란을 부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 은 아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소! 이토록 방자할 수가 있단 말이오?”

내무 대신 무라스. 전임 내무 대신 알리가 전선 시찰 중 간악한 바이서스 레인저들에게 붙잡혀 자결하지도 못한 채 포로가 되어버렸기에 그의 빈자 리를 인수하게 된 전 내무 고등관, 즉 완전한 ‘공무원’이다. 따라서 명가들이 득시글득시글한 궁전에서 불가피하게 부족한 입지를 완고한 보수성과 툭 튀어나온 턱으로 메워보려 애쓰는 인물이다. 지금도 무라스는 턱을 불쑥 내민 채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있었다.

“지금 이 나라가 어떤 상황이오? 만민이 하나 되어 하탄의 영광 아래 온 국민이 옥쇄할 각오로 싸워도 오히려 부족한 바가 있소! 그런데 전선의 전사 들을 뒷바라지하지는 못할망정 해괴한 결투 놀음으로 명가들의 후손을 도륙하여 민심을 흉흉케 만들다니, 세상에 이런 불측한 짓이 어디 있단 말이 오? 지금 당장 신차이 발탄을 체포, 능지처참에 처할 것을 요구….”

“무라스 내무 대신. 이 자리는 국무회의 자리이지 죄를 논하고 벌을 정하는 재판소가 아닙니다. 국무회의란 나라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자리요.” 

본인에겐 그럴 의도가 없었을지 모르나, 통상 대신 클라이의 말은 통상 대신의 말이나 국무 회의의 일원의 말이라기보다는 다키다스의 벼락의 계승 자의 말처럼 들렸다. 국무 회의의 신참자인 무라스는 불편한 표정으로 클라이를 바라보다가 곧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방자한 자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게 이 자리에서 검토될 만한 사안이라고 보시는 거요?”

무라스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 억세 보이는 턱을 국방 대신 함과 외무 대신 리라마인의 중간쯤을 향하게 놓으면서 말했다.

“저는 그자가 명가의 후계자들과 결투를 벌이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키다스의 벼락을 흠모하지 않는 자는 없겠지만 그 같은 광인도 다키다스의 벼락을 경외할지 의심스럽군요.”

클라이의 입술이 조금 뒤틀렸다. 아주 조금. 하지만 다음 순간 외무 대신 리라마인의 말이 없었다면 클라이가 폭언을 퍼부어 대었을 것은 짐작하기 쉬운 일일 것이다.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리라마인은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이 자리의 중대성을 말씀하시는 통상 대신의 말씀도 옳습니다만, 그자가 저지르고 다니는 일을 지나치게 가벼이 보는 것도 경솔한 일일 것 같습니 다. 두루두루 살피는 것이 해로운 경우는 없는 법이니까요. 제가 알기로 그자는 라이브스의 자손이지만 발탄의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만. 맞습니까, 가다론 님?”

교육 대신 가다론을 대화로 끌어들임으로써 국무 회의장의 최고령 대신의 위엄을 빌리는 리라마인 외무 대신의 작전은 적절했다. 약간 길어지고 있 는 회의 때문에 쿠션에 반쯤 기댄 자세를 취하고 있던 대신들은 모두 자세를 바로하며 예의 있는 태도로 가다론의 말을 기다렸다. 가다론 교육 대신 은 한껏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하오. 불미스러운 일이지만.”

“당시 그 일에 관여되셨다고 들었는데요.”

전시의 국무회의에서 교육 대신이 발언권을 가지는 경우는 적기에 가다론은 적이 만족했지만, 여전히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맞소. 내가 그자의 아버지 로발을 달래어 아내를 내치지 못하게 했지. 로발 라이브스, 라이브스의 바람이 자이펀에 바친 무수한 무사 가운데 그만 한 자는 없었소. 어찌하여 헬카네스는 그에게 그런 시련을 주었던지. 그것도 신혼의 단꿈에서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들은 분들도 있고 듣지 못한 분 들도 있겠지만, 그 신차이가 라이브스의 이름을 계승하지 못한 것은 그자의 어머니가 머맨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후에 낳은 아이이기 때문이오. 의심이란 무서운 것이오. 한 인간의 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갈 만큼.”

“그렇다면 그자에겐 머맨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누구의 질문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가다론 교육 대신의 이맛살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누가 알겠소? 하지만 내 의견을 묻는다면 그때 로발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마찬가지요. 로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인간과 머맨의 혼혈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그 어떤 책에도 없었소.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종족이란 말이오. 그래, 말과 소가 서로 교접하는 것이 가능키나 하오?”

“말과 당나귀는 가능하지요.”

대신들은 모두 무의식중에 실소를 머금었다. 가다론은 말을 꺼낸 사람, 즉 무라스 내무 대신을 매섭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소. 허나 내무 대신도 알겠지만 노새는 말과도 다르고 당나귀와도 다르오. 그러나 신차이는 엄연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소. 그 모습이 바로 그의 내력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증거요.”

“저희 족장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머메이드가 뭍에 올라와 남자들을 유혹할 때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고 하던데요.”

무라스는 여전히 굽히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가다론이 대갈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조용히 좌중을 정돈시키는 말이 들려왔다.

“논의의 방향이 조금 어지러워지는 듯합니다.”

국방 대신 함이었다. 꼿꼿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는 군인의 풍모를 한껏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상당한 피로에 젖어 있었다. 그는 피로한 눈을 조금 깜빡거리며 좌중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국무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엊그제 저녁에 전해 듣고는 전선에서 이틀 동안 밤을 새워 달려왔습니다. 지금 전선의 후방에 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부랑자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좋겠지만, 제가 듣고서 전선의 운용에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논의 사항이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언젠가 하탄이 가인(歌人)이 되었어야 할 인물이라 평했던 사람답게, 국방 대신 함의 말투는 무사의 말투라기보다는 사막의 황혼을 노래하는 문인의 말투 같았다. 하지만 억센 턱과 재단사를 애먹이는 장대한 어깨는 그의 말투에 박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라스마저도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 여 보였을 정도였다. 함은 몸을 조금 돌려 법무 대신 라브다하를 바라보았다.

“그 신차이라는 선장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면 정화 대원들로 하여금 그를 체포, 처벌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업무를 보다가 펜이 무디면 그 시선으로 펜끝을 깎아서 쓴다는 농담이 따라다니는 법무 대신 라브다하는, 그 살기 어린 눈빛과는 달리 온화한 인물 이다. 그러나 라브다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을 때 대신들 중 그 누구도 오늘 라브다하 법무 대신의 심사가 좋을 거라고는 믿지 않게 되었다.

“그 사나이에겐 원칙적으로 범법 사실이 전혀 없소. 만일 자이펀 내의 어떤 세력일지라도 그를 체포, 혹은 구금하겠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이펀의 사 법 정의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겠소.”

평소의 법무 대신답지 않은 강경한 말투를 들은 함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른 대신들이 모두 시선을 회피하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있군. 국방 대신 함은 다른 대신들의 반응을 살필 겸 되도록 느릿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범법사실이 없다고요?”

“신차이 발탄이 죽인 모든 명가의 자손들은 그 사나이와의 결투에 동의했소.”

“전부 공식적인 결투였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결투의 대상이 그렇게 많다니, 그렇다면 그자는 결투를 취미 삼아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 공식적인 결투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원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 가능한지…………… 지금까지 몇 건의 결투가 있었습니까?”

“네 건이오.”

함은 휘파람을 불려다가 이곳이 전선이 아니라 국무 회의장임을 깨닫고는 자신을 억눌렀다.

“대단하군요. 무적의 무사로군요! 전부 명가라고 하셨지요?”

“하심, 그리거스, 트리그로스, 코다슈의 수장들이오. 그 가문들이 명가인지 아닌지는 국방 대신께서 판단하시오.”

함은 잠시 고민해 보았다. 만일 그라면 하심의 시미터나 그리거스의 롱 파이크, 트리그로스의 클로, 코다슈의 팔치온과 연속으로 싸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아니, 그보다 저렇게 많은 가문들과 동시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 가능한가?

“결투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습군. 국방 대신께서 그것을 내게 묻다니. 그래, 국방 대신께서는 라센 법을 모른단 말이오?”

함은 다시 의아해졌다. 이야기의 방향이 헝클어지고 있는 것이다.

“라센 법…………, 그건 알고 있습니다. 독자인 경우나 같은 가문에서 이미 병역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병역에서 제외된다는 내용 아닙 니까?”

법무 대신은 갑자기 번득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은 대신들이 라브다하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고서는 다시 한번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잠시 후 라브다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발탄 가문의 운차이에 대해서는 아시오, 국방 대신?”

“예? 잘 모릅니다만.”

“발탄 가문은 한때 유력한 명가였소. 조금 전 거론된 신차이 선장의 출생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지. 그 사건 이후, 발탄 가문은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 게 되었소. 웃기는 짓거리지. 그래서 국방 대신도 그 명가의 이름을 모르는 것일 게고.”

젊은 국방 대신 함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라브다하는 목이 메말라 오는지 생침을 삼키며 말했다.

“어쨌든 발탄 가문은 쇠락했소. 그런데 그 가문을 이을 마지막 자손으로 운차이 발탄이라는 자가 있었소. 독자였지. 영특한 아이였소.”

함은 잠시 당황한 눈으로 법무 대신 라브다하를 바라보았다.

“친척 되십니까?”

라브다하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손자요.”

다시 주위를 둘러본 함은 라브다하의 외손자가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렸음을, 그리고 거기에는 이 자리에 있는 대신들 중 많은 수가 관계 되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라센 법이라, 그렇다면.

“독자였다면, 그자는 당연히 징병되지 않았겠군요?”

“아니, 징병되었소. 영광스럽게도 닐림의 날개에 들어갔지.”

함은 숨을 들이켰다. 닐림의 날개라니.

“불가능합니다. 닐림의 날개에 어떻게 독자가 들어간단 말입니까?”

그때 리라마인 외무 대신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법무 대신님. 그는 독자가 아닙니다만.”

라브다하가 눈을 돌려 바라보았을 때 자이펀의 외무 대신은 한기를 느껴야 했다. 정말 눈빛으로 펜을 깎을지도 모르겠군.

“아아, 물론이오. 독자가 아니지. 독자가 닐림의 날개에 들어갈 리는 없지. 절대로!”

함은 라브다하의 목이 가볍게 떨리고 있는 점을 주목했다.

“독자가 아니라고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차이 선장이 있으니까.”

함은 그제서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가문 살해로군.

한 사내의 아내에 대한 의심이 이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악영향을 이끌어내고 있었던 것이군. 함은 입맛이 써오는 것을 느꼈다. 쿠션에 몸을 깊이 파 묻으며 함은 대신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았다. 저들 중 누가 영광스러운 독배를 피하기 위해 하나의 명가를 파탄시킬 결심을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 그래서 함은 자신의 관심을 신차이라는 그자에게로 옮겨갔다. 호기심이 가는 작자인데.

함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국방 대신 함이 국무회의를 빠져나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대신들은 그때까지도 열과 성을 다해 자이펀에 대한 그들의 충정을 불사르고 있었지만 함은 매우 피로하다는 점을 들어 정중하게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흑옥의 방의 거대한 문을 빠져나온 함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곧 어디선가 나타난 노예의 손이 망토를 입혀주자 함은 그대로 하탄의 궁의 복잡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함은 정원으로 나와 졸란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졸란의 밤하늘은 기괴할 정도로 검은 밤바다 때문에 오히려 밝게 보였다. 그 청회색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달을 바라보던 함은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 기척을 느꼈다.

함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직 예법에 익숙지 못한 어린 노예인가? 내일 당장 노예의 목이 달아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함은 조용히 그 인기척 을 무시함으로써 노예의 목숨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둔하시군, 함.”

여인의 목소리. 함이 느낀 경악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경악은 총 세 가지 놀라운 상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노예(아닐지도 모른다.) 가 말을 걸었으며, 둘째 여자(이건 확실하다.)가 말을 걸었으며, 셋째 국방 대신 함의 둔감함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함은 그 목소리가 아는 목소리임을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지체되는 시간은 여인으로 하여금 함의 둔감함을 보 다 확실하게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이거 봐, 함. 못 본 사이에 가는귀라도 먹었나?”

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온통 칠흑으로 감싸인 여자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망토, 검은 로브. 핏기 없는 얼굴마저도 회색에 가까운 그녀의 모습은 밤 가운데 또 하나의 밤이었다. 함은 약간 어눌하게 말했다.

“시오네인가.”

시오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싸늘한 눈으로 함을 마주볼 뿐이었다. 함은 다시 말하기에 앞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지만 국방 대신 함이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여서 좋을 것은 없다. 게다가 이곳은 아무도 그 수효를 모르는 노예들이 숨어서 오가는 하탄의 궁전 아닌가.

시오네는 그런 함의 모습을 보다가 빙긋 웃었다.

“아무도 없으니 걱정 마. 이 주위의 노예들은 다 조용히 있도록 만들어놓고 널 기다린 것이니.”

함은 움찔하면서 시오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시오네의 입가를 유심히 살피던 함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예를 마셨나.”

“무슨 상관이람. 아무도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 하탄의 노예잖아.”

“……시체는 잘 치웠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오네의 약간 날카로운 고함 소리를 듣고서야 함은 자신이 실언을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하탄의 궁전이다. 노예가 죽어 넘어진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며, 그것보다는 하탄의 궁전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이 더 큰일이다. 따라서 노예들은 동료 노예의 의문스러운 죽음 따위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그것을 재빨리 치우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틀림없이 밤의 암흑에서 나타난 손이 시체들을 치웠을 것이다. 끔찍한 소문이 좀 나겠지만, 노예들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점잖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함은 찌푸린 눈으로 시오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너 같은 암흑의 딸에게는 다시없는 연회장이겠군. 몇 명을 마시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뒤처리까지 말끔하게 해주는 장소이 니. 혹시 평소에도 이곳을 자주 이용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아. 하탄의 노예들은 워낙 흔적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붙잡기도 귀찮거든.”

시오네는 별 어조의 변화도 없이 대답했지만 함으로써는 불쾌해지는 대답이었다. 감정을 억누른 함은 턱을 조금 들며 말했다.

“그렇더라도, 일단 밖으로 나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흥. 소심한 녀석.”

함은 뭐라고 반박해 주려다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몸을 돌린 순간 뱀파이어에게 등을 노출시키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가 제비초리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목 뒤가 아플 정도로 경직되어 왔다. 이런, 제길. 그러나 여기서 다시 몸을 돌리거나 하는 것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 는 짓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함은 조금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발걸음을 떼었다.

등 뒤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자신의 거친 발소리뿐이었다. 뱀파이어가 발소리나 호흡 소리 따위를 낼 까닭은 없겠지. 게다가 시오네이잖은가. 함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릴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두뇌로 몰려야 할 피는 모조리 심장 쪽으로 몰려드는 것 같았 다. 쿵쿵. 가슴 속에서 사납게 고동치는 맥박이 함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결국 함은 좀 무리스럽게 몸을 돌렸다. 제3자가 보면 대무 중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거친 몸놀림이었다.

“이봐, 시오네.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

왼발은 진행 방향을 향하고 오른발은 옆으로 향하며 상체는 뒤로 돌린 극히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함은 굳어버렸다. 시오네의 희디흰 얼굴이 그의 얼 굴 바로 앞 한 뼘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시오네의 숨결이 함의 목을 간질였다. 비릿한 피 냄새가 섞인, 축축한 숨결이었다. 시오네의 눈은 흘러내 린 머리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조금 떨구고 있다. 아니, 떨군다기보다는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고 해야 할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그 자세는 함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 턱의 각도는 마치 키스할 때의 각도와 비슷했다. 그리고 시오네의 입술의 모 습 역시 그러했다. 조금 벌어진 채 앞으로 도드라진 입술은 회색빛으로 번뜩였다.

“뭐지?”

시오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가려진 채였으나 입술 가장자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은 이 어두운 밤에도 잘 보였다. 극히 창백한 얼굴 이었고, 극히 가까웠으니까. 시오네의 머리카락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는 퀴퀴하면서도 숨 막힐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썩은 꽃잎에서 나는 냄새가 이와 같을까.

“좋겠어.”

대폭 생략된 시오네의 말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함은 잠자코 기다렸다.

“젊고, 활기에 넘치는군. 터져나갈 것 같은 생명력, 노예와는 비교할 수 없어. 젊은 장군. 전선을 질타하는 젊은 피가 꿈틀거리는걸. 하하하.”

“장군이 아니다. 국방 대신이지.”

시오네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을 생각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녀의 팔이 서서히 올라왔다. 함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시오네의 팔이 함의 어깨에 올라오고, 그리고 그의 목 뒤로 시오네의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들이 서로를 찾아 얽혀드는 동안에도 함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오네는 얼굴을 들었다. 머리카락이 좌우로 흐트러지며 시오네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곧장 함을 향해 쏘아져왔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검은 고깃덩이 같은 혀가 미끄러져 나왔다. 마치 단 것을 맛보는 것처럼 시오네가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는 동안에도 함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내려 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고동치고 있었다. 문득 그는 오늘이 셀레나의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오네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 피에서는 어떤 향기가 날지 궁금해.”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함은 거칠게 시오네를 밀어버렸다. 뱀파이어였기에 인간보다 월등히 강인한 힘이 있었지만 시오네는 함이 미는 대로 밀려나 며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킬킬킬! 말도 나누고, 이젠 손도 대는군! 자이펀의 방패, 하탄의 주먹이여. 뱀파이어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할 건가?”

함은 서슬 푸른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다가 몸을 돌렸다. 시오네는 여전히 누가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킬킬거리다가 웃음을 참으며 은 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생각난 것이 뭐지?”

“……넌 닐림의 날개지. 운차이 발탄이라고 아나?”

“알지. 너무 잘 안다는 것이 문제일 만큼.”

시오네의 말투에 섞인 적개심은 분노에 떨고 있던 함에게도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함은 다시 몸을 돌려 시오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닐림의 날개 대원이었어. 그리고 붉은 땅 작전에서 내가 데리고 다녔던 꼬마고.”

붉은 땅 작전이라는 말이 나오자 함은 심사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닐림의 날개 주도 하에 실시된 그 작전은 수많은 어린 아이의 혼을 바쳐 끌어낸 신의 힘으로 적진을 오염시킨다는 끔찍스럽기 짝이 없는 작전이었다. 닐림의 날개는 하탄 직속의 부대였기에 함으로선 그 작전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람났지.”

“전향했다고?”

“그래. 그것뿐만이 아니야. 녀석은 바이서스의 떨거지들과 결탁해서 크라드메서 도발 계획도 훼방 놨어. 닐림의 날개 대원인 것이 천만 다행이지. 그렇잖았다면 녀석의 가문은 멸문 당했을걸.”

함은 크라드메서 도발 작전이라는 말에는 조금 전과 달리 등골이 오싹해져야 했다.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의 본질이 그를 엄습해 왔던 것이다. 은은 한 달빛 속에서 함은 한기를 느꼈다.

시오네는 정통파 암살자다. 심지어 나라 하나를 암살해 버릴 정도의 암살자.


이루릴은 눈을 뜨면서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꿈속에서 계속 느껴져 오던 불쾌한 감각은 깨어나자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주위는 깜깜하면서 차가웠다. 동시에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다. 이루릴은 바닥을 대충 만져보고서 이곳이 석조 건물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별빛만으로 거미줄을 헤아릴 수 있는 엘프의 눈으로도 주위를 보기 어려웠던 것은 이곳이 어떤 건물의 지하이거나 밀실이라는 증거일 것이 다. 하지만 이루릴이 그것 때문에 불쾌감을 느낀 것은 아니다. 이루릴이 느끼는 불쾌감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이루릴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 내게로 와 내 눈꺼풀을 들어올려 다오.”

빛의 정령 윌로위스프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루릴은 살포시 웃어버렸다. 그래. 감금하려면 정령을 부르게끔 내버려두지는 않았겠지. 그게 합리적이 니까. 정령과 강제로 단절되었다는 것이 그녀가 느낀 불쾌감의 원인이었다.

이루릴은 별다른 실망도 느끼지 않은 채 가볍게 일어났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주위를 더듬어볼 두 개의 손이 남아 있으니까 실망할 까닭은 없었다. 그것이 엘프의 사고방식이다.

잠시 후 이루릴은 이곳이 어떤 건물의 지하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놈의 기운이 매우 강력하게 느껴졌지만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소환 에 응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모든 정령을 한꺼번에 강제하려면 쉽지 않을 텐데.

그래서 이루릴은 걱정을 느꼈다.

“저 정령 안 부를게요! 힘드실 텐데 그만 하시죠?”

우당탕. 뭔가 요란한 소리가 울려 이루릴은 깜짝 놀랐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한 채로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후 어둠 속으로 빠르게 빛들이 지나치며 허공에 직사각형의 빛줄기가 생겼다. 벽에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문은 매우 천천히 열렸고, 끝까지 열리지도 않았다.

이루릴은 얌전히 서 있었으므로 곧이어 들려온 말은 전혀 필요 없는 것이었다.

“문으로 다가오지 마시오. 다섯 개의 석궁이 겨누고 있소.”

“예? 아아. 문으로 다가서면 쏠 거란 말이군요. 그러니까 협박, 아니, 경고라고 하나요? 그걸 하신 거지요?”

•그렇소.”

상대가 내뱉는 한숨 소리는 지하의 밀실에 길게 울려퍼졌다. 잠시 후 문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며 빛을 지웠다. 그림자는 계속 늘어났고, 이 윽고 지하실 안으로 다섯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들어선 사람 중 하나가 손을 들어올렸을 때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태초의 반역자, 비밀의 원수. 지순한 진리의 광휘여.” 이윽고 그가 입을 열 자 이루릴은 깜짝 놀라며 그를 말렸다. 상대는 정령을 불러들이려 하고 있었다.

“아니, 안 돼요. 여긴 정령이………….”

팟! 이루릴이 제대로 말을 맺기도 전에 윌로위스프는 허공에 떠올라 지하실 전체를 파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였다.

이루릴은 그 익숙한 빛 속에 떠오른 상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깡마른 체구에 털가죽 옷을 걸치고 있어 마치 산사람이나 북부의 목동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얼굴 가득한 수염은 면도를 하려고 해도 면도날이 먼저 부러져버릴 듯한 뻣뻣함을 자랑하고 있었고 앞으로 구부정하게 휜 허리는 왠지 쇠락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얼굴에서 번득이는 눈은 매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루릴은 자신의 추측을 말해 보았다.

“정령사로군요. 당신이 저를 방해하고 있던 사람인가요?”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 정령사는 눈을 치켜떠서 이루릴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왠지 불안하게 보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더 불안했 다.

“그렇소, 에, 엘프. 타고난 정령사를 상대하게 되어, 되어 음, 모, 몹시 불안했는데, 평가해 보시겠소? 내, 내 솜씨가 어떠하오?”

“퍽 훌륭하세요. 아, 저는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정령사의 얼굴에 환한 표정이 떠오른 것과 나머지 네 남자의 얼굴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물든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늙은 정령사의 허리에 조금이나마 힘이 들어가면서 그의 눈높이가 조금 높아졌다.

“나, 구다이요. 그런데? 정말, 괘, 괜찮단 말이지? 정말?”

“예. 당신은 정령들을 강제하고 있어요. 제 부름에는 대답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거죠?”

“그렇지, 그래!”

“놀라워요. 저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마력이 한곳에 비정상적으로 집중되길 거부하듯이, 정령들 또한 자연스럽 게 돌아다니는 것이 세상을 위해 더 좋은 일이 아닐까요? 정령들이 꺼리는 장소는 죽은 장소라 생각합니다만.”

“다, 당신 말이 옳소. 물론이오! 나, 나 또한 음, 7, 70년이야. 70년 동안 저, 정령을 상대해 온 사람인데, 이런 걸 좋아, 좋아할 리야 없지. 미안하게 생각하오. 정말이오.”

“아아, 제가 알지 못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나 보지요.”

이루릴은 상냥하게 말했으나 늙은 정령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정령사는 노인 특유의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진, 모진 일이지. 왜 이래야 하는 건지. 음, 음. 저, 정말 이러면 안 된다고. 그들이 슬퍼해. 슬퍼한다고. 이, 이런 일은 잘못된 일이야. 이래서, 이 래서는 안 되지, 그럼.”

“구다이 당신 감정은 알겠지만, 좀 조용히 해 주시겠소?”

잠자코 있던 네 명의 사내들 중 하나가 입을 열자 늙은 정령사 구다이는 화들짝 놀라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구슬픈 눈으로 입을 연 사내를 올려다 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방구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재빨리 눈가를 스치는 것은 엘프의 밝은 눈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볼 수 있었다.

구다이의 입을 다물게 한 남자는 기다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원래 흰색일 듯한 로브는 윌로위스프의 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고 남자 의 안색도 푸르게 변해서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얼굴처럼 보였다. 이루릴은 상대의 로브를 대충 살피고는 말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이곳은 그랜드스톰인가요?”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그렇소, 숲의 딸이여.”

“프리스티스 에델린이 저를 기절시킨 것은 기억해요. 그녀가 저를 여기로 데려왔나 보군요. 당신이 그녀 대신 사과할 건가요?”

프리스트는 피식 웃었다.

“그러지는 않을 거요. 에델린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 것이 바로 나니까.”

이루릴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럼 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과하셔야 되는 것이군요.”

이루릴의 말에 가장 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늙은 정령사 구다이였다. “키키킬!” 구다이는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꺾었다. 보통은 시비 로 들릴 수 있는 대화도 엘프의 화법을 거치게 되면 그럴 수 없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프리스트들도 무의식중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루릴은 인간들의 반응에 잠시 의아해하다가 말했다.

“어쨌든,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먼저 성함을 말해 주세요.”

“도스펠이라 부르시오.”

다른 세 명의 프리스트들은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이루릴은 프리스트 도스펠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과하실 건가요?”

“그럴 생각은 없소.”

“뭔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으신가 보군요.”

“그렇소.”

“당신의 이유의 희생자인 저를 위해서, 그 이유라는 것을 들려주시겠어요?”

도스펠은 대답에 앞서 이루릴의 안색을 뚫어지게 살폈다. 언젠가 에델린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에델린과 마찬가지로 도스펠 역시 엘프의 얼굴에 떠 오른 거짓말의 증거가 어떤 것일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궁금하오. 당신이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무엇에 관해서 말씀이죠?”

되물어 오는 이루릴의 어투에는 조금의 의혹이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도스펠은 속으로 뇌까렸다. ‘그녀는 엘프이지 않은가.’ 도스펠은 목을 가다듬은 다음 천천히 말했다.

“그랜드스톰은 대륙 곳곳에 파견된 형제자매들의 도움으로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소. 그래서 다른 수도원이나 신 전과는 달리 정보를 관리하는 분야가 따로 필요할 정도지. 나는 그런 업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오. 대륙 각지에서 보내오는 형제자매들의 전갈 은 먼저 나를 통해 정리되고 이후 하이 프리스트께 보고되오.”

이루릴은 별 대답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도스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신께로 향하는 정진의 길에 비한다면 소박한 업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선별된 양치기임을 감안할 때 신의 어린 양들의 동정 에 귀를 곤두세워야 되는 것은 당신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게요. 나는 그 업무를 맡은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 처지라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며 도스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스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만일 인간이었다면 도스펠의 말이 계 속 헛도는 것을 보며 뭔가 끔찍스러운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루릴은 잠자코 기다리며 모든 말을 받아들였다. 심 지어 이루릴은 20년 넘게 서류만 들여다봐서 눈이 나빠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도 조금 느꼈다.

도스펠은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근자에 나는 이상한 것을 느꼈소.”

이루릴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해 버렸다.

“눈이 안 좋아지셨군요. 오랫동안 서류를 보셔서…..”

“……그게 아니오.”

도스펠은 옆과 뒤에서 들려오는 킬킬거림을 무시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내가 이 땅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서신이나 서류, 꿈 등의 정보들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소. 그런데 그런 정보들을 정리하 는 도중에,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동향을 느꼈다는 말이오.”

“어떤 동향인가요?”

도스펠은 다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두툼한 턱이 꽤나 만지작거리기 좋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루릴은 그 턱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 렇게 두꺼운 턱도 있구나. 그때 도스펠은 말했다.

“파멸의 동향이오.”


프리스티스 에델린은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사실 조금 무료할 정도였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그랜드스톰에는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도스펠의 방까지 그녀를 안내한 수련사 같은 경우에 는 드래곤 로드와 상대하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모습을 그리려는 화가에게 멋진 모델이 되어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선배님’, ‘자매님’ 어쩌고 하긴 했지만 에델린은 ‘덤벼라’, ‘살려줘’ 등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지우들이라도 반겨주었으면 좋으련만, 하이 프리스트나 몇몇 고위 프리스트들 이외엔 만나볼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에델린은 그녀를 안내한 수련 사에게 되도록 부드러운 음성으로 몇몇 형제나 자매의 근황을 물어보았지만 대개들 포교 여행을 떠났거나 전선으로 나갔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래서 에델린은 그 수련사를 돌려보내고 홀로 도스펠의 방에 앉아서 방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도스펠의 책상 위에는 그 뒤에 누가 앉아 있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많은 두루마리와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랜드스톰의 방이라고는 믿기 어 려울 정도로 밋밋한 사각의 벽과 단순한 창틀, 책장에 다 못 들어가 구석구석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는 책더미, 그리고 기능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제멋대로 배치되었다고 할 여러 개의 책상들은 마치 마법사와 제자가 한바탕 실험이라도 벌이기 직전의 연구실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랜드스톰의 척추와도 같은 곳이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그랜드스톰의 작은 신경점들인 수도원이나 신전, 포교 중인 프리스트들 은 그들이 보고 느낀 모든 것을 한 점 수정이나 첨삭 없이 그대로 이곳으로 보내며, 도스펠은 부하들과 함께 그 정보들을 세세히 관찰한다. 다루는 정 보의 깊이는 비교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그 신뢰성만은 대륙 어느 국가의 정보기관보다 낫다. 적어도 이곳에선 2중 간첩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는 일 은 꿈도 꿀 수 없으니까. 가장 순수한 프리스트의 정신만이 공간을 뛰어넘어 그들의 정신(속이거나 꾸밀 수 없는)을 이곳으로 보낼 수 있다.

에델린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난잡한 방을 뿌듯한 감정으로 바라보았다. 웨스트그레이드를 향해 바쁘게 여행하던 그녀에게 내려온 도스펠 의 명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엘프 이루릴과 접촉하여 그녀를 기절시킨 후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게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라.’ …차라리 도둑 길드에서 나이트호크들에게 내리는 명령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그랜드스톰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이 방에서, 에델린은 그 명령 이 잘못된 것일 수 없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에델린은 그녀가 도스펠에게 던질 질문보다는 그녀가 겸허히 수용하기 위한 설명을 기다리 며 무료한 심정을 달래고 있었다.

문이 열렸고 에델린은 일어섰다. 도스펠은 약간 피로한 표정으로, 그러나 여전히 턱을 어루만지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에델린을 보자 환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기다렸나, 에델린?”

“아니오. 도스펠.”

도스펠은 손을 내밀었고 에델린은 허리를 굽혀 그의 오른 손등에 접근했다. 거대한 덩치의 에델린이었기에 엄숙해야 할 그 동작은 매우 어색하고 엉 뚱한 것이 되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도스펠은 에델린이 어린 트롤로서 이 신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대해 왔 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도스펠은 책상 뒤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서류 더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옆의 책상 위로 대충 서류 더미를 옮겨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에델린 앞에서는 격식을 별로 따지지 않았다. 에델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앉으라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의자 에 앉았다.

“어려운 일 잘 해주었네. 고마워, 에델린.”

“천만의 말씀입니다.”

“음. 많이 놀랐겠지?”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녀를 부르는 목적도 그렇지만, 왜 기절까지 시켜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짐작하기 어렵군요.”

도스펠은 손을 조금 내저으며 말했다.

“알아, 알아. 그녀는 엘프지. 그런 폭력을 동원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흠. 어쩌면 그냥 이곳으로 와달라는 초청장만 보냈어도 그녀는 얼마든 지 찾아왔을지도 모르지.”

“그 점, 의심하지 않아요.”

에델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고 도스펠 역시 싱긋 웃었다. 하지만 도스펠은 곧 얼굴을 딱딱하게 만들며 말했다.

“하지만 에델린, 내 의심이 맞다면 우리는 폭력보다 더한 것을 동원하게 될지도 몰라.”

에델린은 조금 놀랐지만 별 질문 없이 설명을 기다렸다. 도스펠은 찌푸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내려 에델린을 똑바로 바라보았 다.

“이 방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무조건 비밀일세. 맹세하겠나?”

“도스펠의 턱에 걸고 맹세하겠어요.”

에델린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고 도스펠은 자신이 또 턱을 만지작거렸다는 것을 깨닫고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는 책상 위를 휘휘 둘러보다 가 서류 한 부를 찾아서는 에델린에게 내밀었다.

“먼저 그걸 좀 읽어보게.”

에델린이 받아든 서류에는 굵고 훌륭한 필체로 ‘바이서스·자이펀 전쟁 발발 후 인구 동향 변화 분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델린은 이 필체만 보고 서도 서류의 작성자가 도스펠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류는 두껍고 상당히 복잡한 통계 자료와 숫자들로 점철되어 있어서, 에델린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도스펠은 조금 초조한 표정이었지만 에델린이 그녀의 굵은 손가락을 보기 좋게 놀리며 서류를 다 읽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 다.

에델린이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자 도스펠은 곧장 질문했다.

“어떤가?”

“예? 어떤가…… 라니요?”

“뭐 이상한 거 없었나?”

에델린은 무릎 위에 놓인 서류의 표지를 한번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트롤의 얼굴이었지만 도스펠은 그 표정 을 잘 알고 있었다. 도스펠은 조금 짜증난 표정으로, 하지만 끈기 있게 질문했다.

“그거, 그러니까 7페이지를 다시 한번 보게. 신생아 숫자에 대한 것 말일세.”

에델린은 서류를 다시 뒤적거리지는 않았다. 그녀도 그 숫자는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격감하고 있더군요.”

“그게 이상하지 않더냐고.”

“도스펠, 전쟁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전선으로 몰려갔어요. 신생아 출생 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물론 그럴 수도 있네. 하지만 자넨 그 숫자들을 자세히 보지 않았군. 전쟁이 벌어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야. 하지만 지난달과 그 전달에 비 교해서, 이번 달의 신생아 출생 숫자를 보게.”

에델린은 서류를 다시 뒤적거렸다. 잠시 후 에델린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좀 심하게 줄었군요.”

“그래. 어떤 한 시기의 인구가 급작스럽게 바뀌는 것은 가능하지. 전쟁이나 전염병, 대재난이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비율은 그대로 있으면서 출생 숫자만이 그토록이나 갑자기 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일세. 알겠나?”

“예…………, 그렇군요.”

도스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다른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에델린은 그 서류를 받아들고는 의아함을 느꼈다. 서류에는 ‘바이서스 산업 구조: 축산 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도스펠의 설명을 듣고서는 더욱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그건 다 볼 필요는 없어. 28페이지 가축 두수를 보게나.”

“예……, 음. 가축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군요. 하지만 말이나 소 등은 전쟁 때문에 징집을 당해서……………”

“아냐, 아냐. 그것도 마찬가지일세. 내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가축들도 새끼를 낳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네. 알겠어?”

“예?”

도스펠의 대화는 맥락에는 맞았다. 하지만 이해는 전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에델린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사람도 가축도 모두 자손을 적게 낳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도스펠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네.”

“이해할 수가 없는 말씀이군요. 사람과 가축 양자가 모두 그런 현상을 보이고 있다면 그건 무슨 전염병 같은 것도 아닐 테고…………. 아니, 임신을 방해 하는 전염병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영아 사망을 일으키는 무슨 병이라도?”

“아니야! 영아 사망이 아니란 말이야. 말 그대로 출생 자체가 줄어드는 것일세. 그렇다고!”

에델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도스펠을 바라보았다. 도스펠이 이렇게 흥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도스펠은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분명하네. 사람과 가축, 그 양자 모두 출생 비율이 현격하게 떨어지고 있어. 다른 생물들에 대해서 조사해 보기는 어렵지만, 만일 다른 생물들도 모 두 조사해 본다면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걸세.”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모르겠어. 하지만 생각해 보게. 출생이 있으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지?”

또다시 나온 황당한 질문. 계속되는 당황 속에 에델린은 반쯤 포기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부모가 있어야겠지요.”

“맞아! 부모가 있고, 그들이 사랑을 나눠야 되네!”

흥분 속에서 외치던 도스펠은 에델린이 고개를 조금 돌려 외면하는 것을 보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도스펠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말했다.

“흠. 흐음. 자네도 요점은 이해하겠지. 음………….., 출생은 부모가 있어야 되네. 그렇다면, 어떤 요건에서 출생이 줄어들 수 있을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 을 걸세. 결혼, 흠, 그리고 가축이라면, 에, 짝짓기지. 그런 것이 없으면 출생도 없다는 말일세. 알겠나?”

에델린은 그랜드스톰에서 듣기에는 좀 거북스러운 단어들 때문에 어색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후, 에델린은 도스펠의 말을 완전히 이 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에델린은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설마!”

도스펠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에델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곳니를 번득이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그럼 순결과 엘프의 그랑엘베르가 이 나라에 대해 무슨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설마…………, 설마 세이크리드 랜드 같은 것 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물론 자이펀 인들이 게덴의 힘을 빌어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을 시도한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랑엘베르 의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을………… 그건 말이 안 돼요!”

“왜 말이 안 되지?”

“이런 어이없는…………, 자손의 출생을 줄여서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것은 너무 기간이 길게 걸려요. 극히 소모적이잖습니까!”

“나는 자이펀 인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네.”

에델린은 이번에도 도스펠의 대답을 단번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역시 갑작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는 에델린 을 향해 도스펠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랑엘베르는 엘프들의 신일세. 엘프들이 자이펀 인들의 디바인 웨펀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없을 만큼 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일단 거 기 좀 앉게나.”

에델린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세이크럴라이제이션, 혹은 디바인 웨펀은 이론적으로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신의 힘이 지상에 펼쳐지게 만드는 일련의 복잡한 의식이다. 자이펀 이 선택한 것은 까마귀와 질병의 신 게덴이었다. 달도 없는 으슥한 밤, 어디선가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내, 혹은 늙은이, 어쩌면 젊은 처녀가 마을 한 가운데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파묻는다. 미리 복잡한 의식이 있었고 선별된 제물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짐작일 뿐, 자이펀이 가져오는 것은 의식의 증 거인 디바인 마크뿐이다. 단순하고 소지도 간편하다. 땅에 묻는 일이 어려울 이유는 없다. 그리고 다음날 해가 떠오르면 마을은 인간에게 알려진 모 든 질병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지나치게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는 초기의 대량 살상이 끝나면, 본격적인 공포가 찾아든다. 죽은 자들은 대지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흩어진 자신의 영혼을 거머쥐려는 몸짓으로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채, 그들은 언데드 몬스터가 되어 산 자를 습격한다.

히스테릭한 반응들. 게덴의 디바인 마크가 아님에도 단지 몸에 디바인 마크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여행자의 숫자도 많았다. 선교에 종 사하고 있던 프리스트들은 극히 상반된 두 가지 대우를 받아야 했다. 질병을 치료하며 언데드 몬스터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구원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 의심 없이 디바인 마크를 소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수상쩍은 파멸의 메신저로 대우받으면서, 그래도 그들은 수많은 전설을 만들었다. 사우스그레이드에서 질병과 맞서 싸우다가 순교한 프리스트가 없는 종단이 없을 지경이었다. 에델린 역시 디바인 웨펀의 공격을 받은 도시에서 수많은 좀비들과 싸웠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찾고자 하는 사람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며 가멸찬 집념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사람이 숨긴 것을 사람이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디바인 웨펀의 공격은 결국 격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숫자로 셀 수 없는 것들의 희생 속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그런데 그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이 다시 시도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자이펀 인이 아니라 엘프들의 손에 의해서, 그랑엘베르의 힘으로?

“절대로 아닙니다. 이 숫자만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을 수는 없어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예. 엘프들이 왜 그런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들이 인간들의 숫자를 줄여버리고 싶은 생각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은 자이펀 인들이 사용했던 게덴의 힘과는 그 경우가 많이 달라요. 자이펀 인들은 자신들과 많은 거리가 있는 바이서스였기에 마음 놓고 게덴의 힘을 펼친 것이겠지요. 에델브로이여, 그들의 죄를 기억하소서. 하지만 엘프들은 우리 바이서스에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 역시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엘프들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들 역시 자손을 생산하고……….”

“그들의 인생은 길지. 좀 기다렸다가, 그러니까 인간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든 다음에 다시 자손을 생산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많은 시간의 낭비는 아 니야.”

“……하지만 그들이 그럴 까닭이 없잖아요!”

“그 까닭을 알아내고 싶어서 이루릴 양을 데리고 오게 한 거야. 알겠나?”

에델린은 자신이 주먹을 꽉 깨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내렸다.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 이루릴에게 그런 이야기를 질문하셨어요?”

“응.”

“그녀가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 말도 안 하더군.”

에델린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엘프라면 무언은 가장 확실한 긍정이다. 도스펠은 우울함과 자신감이 뒤섞여 매우 이상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에델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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