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5

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5


5

이시도는 할슈타일 후작을 보고 있었고, 할슈타일 후작은 쳉을 보고 있었고, 쳉은 미를 보고 있었고, 미는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차이의 경우, 레드 서펀트의 이물에 서서는 결빙되지 않았을 뿐 얼음이나 다름없는 차가운 북해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북해의 바닷물을 닮 아 있었다.

연쇄의 고리에서 쳉이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비웠다. 캡스턴 옆에 놓인 물통에 앉아 다리를 조금 흔들고 있던 미에게 다가선 쳉은 그녀의 오 른쪽 갑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오른쪽을 선택한 이유는 왼쪽에는 아달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는 고개를 조금 돌려 쳉의 덥수룩한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빗질 좀 해라. 바람 맞아서 엉망이잖아. 저 사람들처럼 머릿수건을 하는 건 어때?”

“네가 거기 앉아 있음으로 해서 이 배의 선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건 아니?”

“응? 무슨 말?”

“이 배의 선원들은 자이펀 인들이야. 목이 마르다는 이유로 네게 다가와 좀 비켜달라고 말할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지.”

미는 히죽 웃고서는 물통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들에게 레이디를 상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치자. 그들도 세상의 반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로 살 수는 없을 텐데?”

“무시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오히려 너무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걸지도. 난 잘 모르겠어. 음. 언젠가 일스의 술집에서 모래바람 냄새 풀풀 풍기는 상인 친구와 대작하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자이펀 인들은 다른 여자들에게는 눈길도 보내지 않는 만큼 자기 아내에게는 퍽 살갑게 대해 준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더군……

쳉은 자신의 모자란 이야기 실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미를 상대로 할 때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쳉은 자신이 들었던 소박한 이야 기들을 천천히 말했고, 미는 여러 가지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눌하지만 꾸밈없이 말하는 쳉과 풍부한 표정을 짓지만 별 참견은 없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미 두 사람의 모습은 삭막한 북해의 바다 위라는 공간 속에서 이질적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하오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포마스트 아래에 기대서서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코에서 나오는 숨결이 그대로 하얀 안개가 되어 얼굴을 가렸 고, 꽉 다물린 입보다는 가슴 앞으로 엇갈린 두 팔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후작은 팔짱을 낀 채 오른손 검지로 왼쪽 이두근을 톡톡 두드 리고 있었다.

큼직한 방한 외투로 몸을 감싸고 눈 바로 위까지 후드를 내려쓰고 있던 이시도는 고물에 서서 그런 후작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시도는 후작의 손 가락이 어떤 낯익은 박자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후작을 한참 동안 관찰하던 이시도는 갑자기 오른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는 오른손 을 왼쪽 손목으로 가져갔다.

‘맥박이군.’

그때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시도를 흘긋 보았다. 이시도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쥔 채 머쓱한 얼굴이 되어 후작의 눈길을 받았고, 후작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본 후작은 이시도의 행동을 이해했다. 후작은 팔짱을 풀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입술에서 하얀 숨결과 함께 혼잣말 같은 말이 몇 마디 섞여 흘러나왔다.

“부질없군…… 살아 있는 척하고 있어.”

이시도는 이 바이서스 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시도는 그에게 몇 마디 얘기를 걸어봐야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괜스레 포마스트의 돛줄을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갑판원들에게 별 필요도 없는 지시들을 내리기도 하면서(“단추를 더 단단히 잠가! 감기 들면 어쩌나!”) 자연스럽게 후작에게 다가왔 다.

후작은 그런 그에게 속아주는 척했다. 이시도는 후작 바로 곁에 다가서서는 후드를 뒤로 넘기고 두 손에 입김을 호호 불며 말했다.

“어이구, 지독한 날씨입니다. 할슈타일 씨. 갑판에 그렇게 서 있으셔도 괜찮으십니까?”

후작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이시도는 벙글 웃음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이서스 분이 어떻게 자이펀의 배를 타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시도를 보았다. 이시도는 먼저 후작과 자신의 거리를 확인한 다음 말을 이었다.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요. 이 배는 자유 무역선이고 게다가 여긴 자이펀의 해역도 아닌 만큼, 우리들이 설 령 바이서스의 국왕을 태웠다고 해도 그것이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면 자이펀의 군부도 크게 화낼 수는 없거든요. 투덜거리기는 하겠지만.”

이시도는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후작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잠시 후 이시도가 조금 당황하게 되었을 때 후작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다.”

“예?”

“나도 이것이 바다 위를 떠가는 배인 이상 선적이 어딘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대답이 되었는지.”

이시도는 잠시 이것이 화를 내야 될 일인지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무엇에 대해 화를 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시도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도 이미 늦었다고 할 시점까지 아무 반응을 보이지 못했고, 할슈타일 후작은 그런 이시도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쳉과 미를 바라보았다.

쳉은 이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갑판에 주저앉은 쳉은 물통에 앉은 미의 다리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앉아 있었고 미는 쳉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그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아대고 빗어대고 있었다. 쳉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미의 턱을 보다가 조금 졸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신차이 선장을 쳐다보는 거니?”

“이건 질투다. 쳉은 질투를 하고 있어. 미는 이제 비극적인 삼각관계의 가련한 희생물이 될 거야. 흐음. 한번쯤 그런 것도 해보고 싶었어.” “저,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봐. 멋진 대사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야. 어디 보자…………, 먼저 쳉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신차이 선장과 결투해라. 알았지? 그럼 미가 쳉 의 팔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할게. 별빛마저 드문드문한 캄캄한 밤이라도, 그대 설령 내 앞에 있지 않더라도, 미의 두 눈이 멀어버릴지라도, 미의 눈 동자는 언제나 쳉의 모습을 반사할 것을 믿지 못하니?”

“내가 감동적이라고 말하면 웃을 거지?”

“당연하지. 골렘이 감동 어쩌고 하면 미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웃어.”

“사실, 닭살 돋아.”

“그러라고 한 말이야. 자, 이제 계란 낳아봐.”

쳉은 묵직한 한숨을 토해 냈고 미는 그런 쳉의 머리카락을 더욱 헤집으며 깔깔거렸다. 잠시 후 미는 쳉의 머리카락에 엉켜버린 소매 단추를 풀어내 느라 조금 투덜거렸고 그 동안 쳉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참아야 했다.

“많이 아팠어? 잘 참네. 착하다.”

“상으로 대답이나 해줘.”

“대답? 아아, 아까 그 질문. 글쎄다. 미는 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볼까.”

미는 다리를 흔들면서 다시 이물에 서 있는 신차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바다야.”

“바다?”

“응……, 바다야. 신기해. 미가 들판에서 자라나 그런지 몰라도 꽤 신기하게 느껴지네.”

“뭐, 처음으로 본 뱃사람에게 느끼는 신비감을 말하는 거니?”

“그건 아닐 테지. 이 배엔 뱃사람들이 많이 있잖아. 어디, 시무니안을 보자. 시무니안의 대지엔 계곡이 있고 산이 있고 언덕이 있고 강이 있겠지. 그 림 오세니아의 바다는? 그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바다는 평평해. 지금 여기서 파도 치는 이야기는 하지 말기.”

막 그 이야기를 꺼내려던 쳉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미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며 말했다.

“땅을 닮은 사람은 그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겉으로 다 드러나겠지. 그래서 그 사람에겐 풍요로운 과수원 같은 부분도 있을 테고 오르기 힘든 산 같은 모습도 있을 테지. 마음속의 깊은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계곡 같은 부분도 있을 테고 다져지고 흩어져 황야처럼 바뀐 부분도 있겠지. 그게 땅을 닮은 사람이겠지. 하지만 바다를 닮은 사람은 일단 모든 부분이 똑같이 평평해.”

“평평하다?”

“응. 미 말이 이상하지? 미 머릿속에도 좀 모호한 개념밖에 없어서. 그러니 말이 이상하더라도 용서해라. 용서 안하면 때릴 테야. 뭐…………, 이렇게 사 람을 나눠보았지만 저 사람에겐 그게 통하지가 않네. 선장님은 완전히 바다 그 자체야.”

미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도망칠 수가 없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쳉은 얼굴을 들어 미를 보았지만 앞으로 늘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미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쳉이 볼 수 있는 것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의 입술뿐이었다. 미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그림 오세니아께서 손을 내미셨으니…………. 하긴 그분밖에 안 계신 건가.”

미는 고개를 조금 돌려 후작을 곁눈질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팔짱을 낀 채 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렌차께서도 꼼짝할 수 없게 되었고, 음, 그럼 그덴 산의 거인도 포기하셨겠구나. 그림 오세니아께서도 많은 힘을 쓰시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그 과묵하고 고요한 분이 직접 나설 생각을 하셨다는 건 대단해. 그분이니까 이만큼이나 도움을 베푸실 수 있겠지. 워낙 강력한 분이니까. 하지만 늦게 내밀어진 그 손길은 오래가지 못하겠지. 이제 곧……”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미는 쳉의 얼굴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말이야,”

“응?”

“미가 진짜로 도움 받고 싶은 것은 얼간이 쳉이야. 미는 무지무지 바보라서, 쳉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메에에에!”

미는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쳉은 바로 그 때문에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쳉은 그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고, 정의될 수 없는 감정 에 시달리는 것은 쳉에겐 항상 낯설었다. 그래서 쳉은 한참 동안이나 굳은 얼굴을 한 채 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쳉의 두 볼을 살짝 붙잡은 미는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미가 투정을 너무 심하게 부렸나 보다. 그 얼굴로 울면 보기 흉할 거야. 웃어라.”

쳉은 입술 양끝을 힘들게 위로 끌어올렸다. 미는 그 얼굴을 보고는 죽어라고 웃어대다가 그만 물통에서 굴러 떨어졌다. 쳉이 당황하여 미를 부축하 기 위해 일어섰을 때 마스트 끝에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Sarle Lo…!”

이시도, 할슈타일 후작, 신차이 선장, 그리고 쳉과 그의 품에 안겨 반쯤 일어서던 미 전부가 마스트 끝을 올려다보았다. 신차이와 이시도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떠올라 있었다. 신차이가 고함질렀다.

“Ir rivhepjan?”

“Rigkeel un borthas! rene..?”

말끝을 잠시 흐리던 감시원은 다시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미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쳉에게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잘은 모르겠는데, 배가 보인다고 하는 것 같군.”

“와, 배? 다행이네. 그런데 선장님은 왜 저런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그 배가……”

쳉은 얼굴을 돌렸고 미는 쳉의 옆얼굴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좌초한 것 같다는데?”

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좌초라고?”


쳉의 자이펀 어 번역은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었다. 이 주위의 바다에 암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으므로 좌초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 무 상관이 없었다. 이시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배가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크라켄이 나타나서 배를 붙잡아 집어던진 걸 까요?”

시선을 돌려 주위의 바다와 빙산을 살펴보던 신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낭만적인 상상이지만, 그건 아닐세. 빙산에 끼인 거야.”

“예? 빙산이오?”

“저기 저쪽의 빙산을 자세히 보게. 심하게 부서졌지? 그리고 목재들이 몇 개 보이는군. 배는 저 빙산과 이쪽의 빙하 사이에 끼인 거야. 멍청하게 일 부러 들어온 것은 아니겠지. 그때는 안전해 보였을 거야. 하지만 배가 들어서자마자 빙산이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빙하와 빙산은 배를 양쪽에서 밀어붙였을 거야. 마치 비틀어 짜내듯이. 그래서 어느 순간, 배는 격하게 튀어올랐지. 그때 배의 하중 때문에 빙하가 무너지며 저렇게 빙하 위로 내동댕이쳐진 거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냐.”

이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하 위에 모로 쓰러져 있는 배를 바라보았다.

배는 양쪽 뱃전이 거의 박살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부러진 돛대는 멀찌감치 나뒹굴고 있었고 흩어진 배의 의장들과 선구들은 반파되어 눈 속에 박혀 있거나 빙하 바닥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튕겨져 나온 선원들의 시체가 얼음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개중에는 이곳이 고독한 세계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시체들도 있었다. 이시도는 다시 의아스러운 얼굴로 신차이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뭐가……”

“백곰이 한 짓이야.”

“그렇군요.”

이시도는 오한이 돌았다. 신차이는 차분한 얼굴로 미를 돌아보았다.

“내려서 확인해 보고 싶겠지요?”

“예.”

미의 담담한 얼굴은 신차이를 의아하게 했다. 파랗게 질려 있지도, 턱을 딱딱 부딪히지도 않았다. 분명 슬픈 얼굴이었지만 미에겐 불안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신차이는 고민을 중단하고는 이시도에게 말했다.

“선원 열 명, 단단히 무장시켜서 보트에 태우도록. 시체를 찾아 백곰이 되돌아올지도 모르니까. 탐사는 내가 맡을 테니 배의 지휘를 담당하라.” 

“선장님께서요?”

“그래. 저 빙하 위로 상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군.”

하지만 신차이의 걱정은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보트를 내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쳉에게 다가가서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넸고, 쳉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 그러자 후작은 쳉을 들어올려 빙하 위로 집어던졌다.

레드 서펀트의 갑판원 전원이 입을 쩍 벌린 가운데, 극지의 하얀 하늘을 우아하게 날아간 쳉은 얼추 60큐빗쯤을 날아 눈더미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쳉이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서자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은 후작에게 보냈던 시선보다 몇 곱절 더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쳉에게 보냈다. 아 무리 두터운 방한복이 충격을 완화시켜 주었다 하더라도, 60큐빗이라면 목뼈를 부러뜨리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신차이 선장은 신음 소리를 토해 냈 고 이시도의 경우에는 목검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사이의 수평선의 완성을 기념하기에 적당한 상대를 드디어 만났군..

선원들은 졸도할 듯한 표정이 되었고 갑판장 모하메드는 잘 안 되는 헤게모니아어로 할슈타일 후작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수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번엔 반대쪽으로 말입니다.”

후작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극지의 바다에 집어던져질 뻔한 이시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쳉은 난파된 배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배의 닻에 밧줄을 묶었다. 이로써 불안정하나마 계류 장치가 구성되어 레드 서펀트는 빙하 바로 옆에 정선하게 되었다. 후작은 이시도에게 짧 은 요구를 몇 개 더 했고 잠시 후 세 가닥 밧줄이 빙하 위의 쳉에게 던져졌다. 쳉은 그 밧줄 모두를 난파된 배의 곳곳에 묶었다.

그래서 조사대는 밧줄에 매달린 채 안전하게 빙하 위로 내려설 수 있었다. 선원들인 만큼 밧줄을 타고 바다 위를 지나가는 것을 어려워하는 자는 아 무도 없었고, 미의 경우엔 후작의 등에 단단히 묶인 채로 밧줄을 건넜다. 아달탄만은 밧줄을 탈 수 있는 재능이 없었는지라 갑판에 서서는 슬픈 표정 을 지은 채 주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모두가 빙하 위에 내려서자, 사람들은 난파선으로 걸어갔다.

난파선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자마자, 이시도는 불만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고약하지 않은 죽음도 드물겠지만, 이런 식의 죽음은 정말 고약하군.”

순백의 빙하 위에 펼쳐진 지옥도에 선원들은 아연했다. 부서진 배의 목재들에 짓눌린 희생자의 몸에서 튀어나온 내장이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간혹 대책 없이 앞뒤 없어지기도 하는 이시도는 그 내장을 걷어차 보았고, 얼어붙은 고깃덩이들이 부서지며 흩어지자 선원들은 분노의 외침을 토해 놓았다. 하지만 걷어찬 이시도 본인의 얼굴이 가장 심하게 핼쑥해져 있었기에 선원들의 질타는 길지 않았다. 그 동안 이곳저곳을 살피던 쳉은 선체 아래의 바람을 많이 타지 않을 위치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선원들은 모두 몰려들었다.

흰 눈밭의 일정 부분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쳉은 장갑을 벗고는 검게 변한 눈을 한 움큼 들어올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 덕였다.

“재로군.”

“재?”

이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쳉은 손을 툭툭 턴 다음 다시 장갑을 끼며 말했다.

“생존자가 있었군요. 혹심한 추위 때문에 그들은 이 설원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작을 태웠습니다. 선체의 파편들이지요. 잠깐..

쳉은 몇 발자국 걸어간 다음 선체의 부서진 부분을 살펴보았다.

“이건 용골 같은데…………. 아무리 봐도 커다란 배의 용골일 수는 없군요, 크기나 뭘 보든. 보트의 용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서진 모습을 보니 절대 로 사고로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톱질해서 잘라낸 거죠. 왜 보트를 부순 거지? 보트를 패서 장작으로 삼지 않아도 목재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썰매군.”

신차이 선장이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대답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리자 신차이는 아무 말 없이 땅을 가리켰다. 그곳엔 나무 조각과 구부러진 못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신차이는 그것들 이외에 더 확실한 증거를 드러내 보였다. 신차이가 허리를 숙이고 눈을 조금 걷어내자 설원 위로 두 개의 곧은 선이 나타난 것이다.

“이 눈은 오래된 것이 아니야. 얼어붙지 않은 새 눈이지. 썰매 자국 위에 눈이 살짝 덮인 거야. 사막에서 우리들도 간혹 사용하는 거지. 썰매를 만들 기로 했다면 커다란 배보다는 보트 쪽이 다루기 편했겠지.”

이시도는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배의 선원들은 모두 돌았군요. 보트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와야 되지 않습니까?”

신차이는 잠시 고민스러운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쳉을 보았다. 쳉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하지.”

쳉은 곧 시체들을 일일이 들여다보았다. 이시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신차이에게 다가서서는 자이펀 어로 질문했다.

“무슨 말씀을 나누신 겁니까?”

“이시도 군. 몇몇 시체에서는 사고가 아닌 다른 죽음의 원인이 나타날지도 몰라.”

“예?”

“자네 말마따나 그런 미친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을 선원이 많으니까. 목숨줄인 보트를 부수겠다는데 자네라면 찬성하겠나? 하지만 썰매는 만들어졌 어. 나와 쳉은 그런 결정이 내려졌을 때 어떤 폭력적인 사태가 야기되지 않았을까 의심하네.”

이시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신차이를 보다가 다시 쳉을 보았다. 잠시 후 쳉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꽤 되는군요.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잠시 동안 사람들은 발견된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배는 비극적인 사고를 맞이해서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빙하 위에 집어던져졌다. 사고 당시에 많은 선원들이 죽었겠지만 생존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불을 피워 몸을 녹이면서 생존 수단을 강구해 보았을 것이다. 거기서, 썰매를 제작하자 는 의견과 보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 상충했을 것이다. 싸움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죽음을 당한 다음에 썰매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 은 배에서 꺼낼 수 있는 것들을 다 꺼내 썰매에 실은 다음 이곳을 떠나갔다.

이시도는 그 추리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썰매? 흐응. 이 근처의 지리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썰매를 타고 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는 장소가 있나 보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설원에서는 식량을 구할 수 없어요. 보트를 타고 가야 낚시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북부 뱃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 습니다만, 나로서는 그런 바보 같은 의견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한정된 보트 승선 인원 때문에 싸움이 났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걸 로 싸움이 난다고요?”

신차이는 이시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 증거는 추론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그 추론은 보편적인 이성의 뒷받침을 받고 있지 못했다. 그때 할슈타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대륙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보트가 낫겠지.”

“뭐요?”

이시도는 부루퉁하게 질문했다. 하지만 이시도는 할슈타일 후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 대답을 알아차렸다. 이시도는 기막힌 어투로 말했다. “아니, 그럼 그들은 북쪽으로의 여정을 계속했다는………?”

“그거라면 썰매가 낫지.”

선원들은 잠시 아연한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시도가 그들 모두의 심정을 대표해서 말했다.

“그러고도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은 그들은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을, 추위와 기아와 혹한이 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선원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후작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신차이는 설원의 지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평선을 향해 뻗어가고 있을 테지만 눈 아래에 묻혀 보이지는 않는 썰매 자국을 추적하듯이. 잠시 후 신차이는 무겁게 말했다.

“귀함한다.”


레드 서펀트로 돌아온 다음 신차이 선장은 할슈타일 후작과 미, 그리고 쳉을 선장실로 불러들였다. 쳉은 신차이가 어떤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 것이 정확하게 어떤 말일지는 떠올리지 못했지만, 어쨌든 쳉은 신차이가 이대로 돌아간다고 말했을 때도 미가 배에서 내리겠다고 말했을 때도 놀라 지는 않았다.

신차이는 묵묵히 미를 바라보다가 쳉에게 말했다.

“미 양은 내리면 죽을 겁니다. 미 양 혼자서는 여기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전해 주시오.”

“혼자는 아닐 거야.”

신차이는 이 말이 쳉이 아닌 할슈타일 후작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조금 의아한 기분을 받았다. 신차이는 후작을 보기에 앞서 쳉의 얼굴을 똑바 로 보았다. ‘당신이 그녀의 연인 아니었소?’ 그러나 쳉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신차이는 후작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하선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에 대해 감사하겠네.”

“그렇다면 말을 바꾸지요. 당신들 두 명은 여기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솔직히 신차이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쳉은 ‘두 명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차이는 더욱 깊어지는 의아함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신차이는 후작을 향해 조용하지만 엄숙한 경고를 담아 말했다.

“나는 승선원의 신변을 책임져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선장입니다. 당신들이 하선한 다음에야 무슨 짓을 하든 마음대로지만, 하선하는 그 시점까 지는 당신들의 목숨은 당신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건 내 책임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임에 따라 당신들의 하선 요구를 수락하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조금 떨구고 있던 쳉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문장이 흘러 지나갔다.

‘하지만 늦게 내밀어진 그 손길은 오래 가지 못하겠지. 이제 곧……………?’

쳉은 생각했다. 신차이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쳉은 자신의 생각에 만족했지만, 그 생각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에 곧 불만족 스러워졌다.

후작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하선하겠습니다.”

신차이는 불퉁한 얼굴로 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미는 잠시 옆을 바라보았고, 그 다음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늘 안일지도 모르겠어요.”

신차이는 이번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미는 다시 한번 아달탄을 바라본 다음 말했다.

“아니, 조금 후라고 말해야겠네요.”

신차이는 저 아가씨는 나를 놀리는 거요?”에 해당하는 말을 쳉에게 할까 생각했다. 바로 그때 갑판 쪽에서 들려온 이시도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 가 아니었다면 신차이는 별 무리 없이 그 말을 쳉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차이는 목검을 쥐며 벌떡 일어서다가 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 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달탄은 귀가 좋거든요. 이제 마지막 조력자께서 오셨군요. 그림 오세니아, 모든 인간들의 강력한 아버님이여,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 보실까요? 미도 그분이 누구일지 궁금해요.”


엑셀핸드는 이끼 낀 언덕에 앉아 빙해의 바다에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바람은 별나다 할 정도로 거칠었다. 수염 한 올 한 올을 파고드는 바람에 엑셀핸드는 곤혹스러워했다. 제멋대로 날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다음, 엑셀핸드는 텁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어떤가, 이루릴.”

그의 옆에 서 있던 이루릴은 역시 머릿결을 쓸어 넘긴 다음 먼 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멩이를 바다에 투척하고 있군요. 저것은 그림 오세니아를 대상으로 감행하는 폭력인 것일까요? 그가 왜 그림 오세니아에게 비난하는 마음을 가 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냐. 그냥 울적해서 하는 짓일 거야. 별 의미는 없이.”

“아아, 저기엔 별 의미가 없나요?”

“그래. 저 종족들이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이 그러하듯.”

엑셀핸드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루릴을 올려다보았다.

“자넨 알고 있었나?”

엘프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는 좀 부족한 방식이었지만 이루릴은 엑셀핸드의 질문을 이해했다. 더군다나 이루릴은 그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모 습까지 보여주었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던가요?”

“흐음. 어떻게 짐작했지?”

“글쎄요. 한 드워프가 한 엘프에게 바람이나 쐬러 언덕에 올라가자고 말한다면, 그 산책이 산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되 는 일이겠지요. 드워프에게는 산책을 하는 취미가 그렇게 많지 않고, 엘프와 더불어 하는 드워프의 산책이란 더욱 난센스라고 여겨지네요.”

엑셀핸드는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이루릴은 살포시 웃었다.

“정직하게, 드워프답게 말씀하세요.”

“자네 말이 옳아.”

“알고 있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예감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겠습니다.”

“예감이라. 쳇. 좀 쉽게 말해 보겠나.”

“그녀는 이 북쪽으로 오며 점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그녀는 이 북쪽에 다가왔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을 느낀 것이겠지 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여정 전부가 거꾸로 보이더군요.”

“거꾸로 보였다고?”

“예. 저는 인간이나 드워프들처럼 시간의 전후에 크게 신경 쓰는 종족은 아니니까요. 드래곤 로드께서 왜 당신들에게 자신의 여식을 맡겼을까요? 당 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시간 순서는 이렇겠지요. 드래곤 아일페사스는 당신들과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 북쪽까지 찾아왔다. 하 지만 엘프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북쪽까지 찾아오기 위해, 드래곤 아일페사스는 당신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아아!”

엑셀핸드는 등 뒤에서 들려온 신음 소리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그들의 등 뒤에 머쓱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제레인트와 에델린, 그리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란, 하늘을 쏘아보고 있는 운차이, 방글방글 웃고 있는 네리아,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하스,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돌맨 등이 주욱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어, 어떻게 너희 놈들 전부 다…..?”

“산책 나온 거야.”

운차이는 강철 같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지만 제레인트는 훨씬 정직했다.

“아, 하하. 예. 음. 이루릴 양도 말씀하셨지만, 드워프가 엘프에게 산책이나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괴상하게 여겨졌기에 따라와 본…………, 엑셀핸드, 그 렇다고 그런 표정을 짓지는 마세요.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엑셀핸드는 벌컥 화를 내며 파이프를 피워 물었다. 그 사이에 제레인트는 이루릴에게 다가섰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드래곤 로드께서는 아일페사스를 보내어 이 사태에 대처하게끔 하신 건가요?”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의 첫 번째 이유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께서 모시는 테페리만 해도 그렇겠지요. 테페리께서는 갈림길의 신이십니다. 하지만 갈림길은 시간의 문제이지 않나요? 걸음을 멈췄다면, 앞 에 갈림길이 몇 개가 있든 아무 상관이 없지요.”

“그건 이해합니다.”

“시간은 모든 신들의 존재의 첫 번째 원인이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시간을 멈추려고 마음먹었을 경우, 신들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없겠지요. 가장 강력한 신 그림 오세니아께서 마지막으로 미 양을 도왔지만 그 강력함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이 시점에서 미 양을 도울 종족은 하 나밖에 남지 않아요. 세상에 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종족, 아직까지도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는 종족……”

“아아, 드래곤!”


이시도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단어의 무게에 헐떡거렸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이시도가 기울였던 노력은 가공한 것이었다. 그래서, 불쌍하게도, 이시도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미 인지한 이름을 뒤늦게 말하게 되었다.

“골드 드래곤!”

순백의 빙산과 검푸른 바다 위로, 골드 드래곤의 황금빛 거체가 춤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승강구를 뛰쳐나온 신차이는 문득 사위가 누르스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온통 흰 북해의 바다에는 눈이나 얼음 때문에 많은 백색 반사광이 넘쳐난 다. 따라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푸르스름한 밝은 빛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주변은 마치 사막에 온 것처럼 누르스름한 빛으로 가득했 다. 하늘을 본 신차이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백로 같군.’

처음 본 순간 신차이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드래곤을 처음 본 것이 아니다. 이제리스의 서펀트와는 직접 싸워봤고, 블루 드래곤 지골레이드의 공습에 가까운 방문도 받았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은 그들과 또 달랐다.

골드 드래곤은 커다란 황금의 날개를 좌우로 펼쳐 하늘을 가린 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긴 오른쪽 발은 아래로 뻗고 왼발은 살짝 굽힌 모습이었 다. 신차이가 그 모습에서 백로를 떠올린 것도 당연하다. 다만, 지금 저 골드 드래곤을 백로에 비유하자면 그 발 아래의 레드 서펀트 호에는 종이배의 비유를 붙여야 된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나 선원들은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윤곽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골드 드래곤의 황금빛 몸에서는 빛이 가득 뿜어져나와 주위의 빙산을 황금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드래곤의 발만 닿아도 레드 서펀트는 간단히 침몰해 버리겠지만, 선원들은 동공을 파고드는 황금빛의 위엄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골드 드래곤의 한쪽 발이 메인마스트 꼭대기에 닿았다. 골드 드래곤은 그렇게 섰고, 배 위의 누구도 사기 같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드래곤은 느닷없이 사라졌다.

지골레이드의 예를 이미 당했던 선원들은 재빨리 선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바이서스 어로 구성된 비명 소리는 그들의 머리 위로부터 들려 오게 되었다.

“우어어! 아, 아빠! 우와아! 너무 높아요! 배가 손바닥만 해!”

레드 서펀트 호의 씩씩한 선원들은 씩씩하게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다. 메인마스트 꼭대기에는 조그마한 블론드 소녀가 필사적인 자세로 돛대에 찰 싹 달라붙어 있었다. 저 높이에 서면 배는 자신의 두 다리 사이로 조그맣게 흔들리는 나무 조각처럼 보이지. 이시도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만족 해했다. 저 소녀의 비명 소리는 합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시도는 다시 입을 벌렸다. 저 소녀는 뭐지?

그러나 신차이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골드 드래곤이십니까?”

돛대 위로부터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신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 맙소사, 드래곤 살려!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 번째 목소리이자, 오아, 말도 안 돼! 드래곤들의 첫 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 우와, 너무해!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페사스야! 살려줘요!”

“………이시도 군. 구해 드리도록.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드래곤께서 추락사하시는 진귀한 광경을 보고 싶네만.”

이시도의 날렵한 손길에 의해 아일페사스는 안전하게 레드 서펀트의 갑판 위에 서게 되었다. 헐떡거리던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은 아일페사스는 주 위의 선원들의 면면을 둘러본 다음 위엄 있게 행동하는 것을 포기했다. 심통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리던 아일페사스는 선원들 틈에 끼여 서 있는 쳉과 미, 아달탄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일페사스는 미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미는 미소 띤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마주보았다.

“턴빌에서 봤지. 너예요?”

미는 잠깐 머뭇거렸다. 옆에 서 있던 쳉이 나직한 목소리로 아일페사스의 바이서스 어를 번역해 주자 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드래곤이시네요.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쳉은 미의 헤게모니아 어를 재빨리 바이서스 어로 통역했다. 아일페사스는 눈꺼풀을 크게 깜빡였다.

“당연? 뭐가 당연한데?”

“어렴풋이……………, 마법사 아니면 드래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는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어요. 그때 턴빌에서도 마법사를 보았지 요. 그래서 마법사 쪽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감히 드래곤을 직접 뵐 거라고 믿기는 어려웠거든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네요. 첫 번째는 당신이 저에게 뭔가를 설명해 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 두 번째는 여기 이 청년의 통역 실력이 엉망진창이라 는 것. 어느 쪽이니?”

쳉은 머쓱하게 웃지도 않고 억울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충실하게 아일페사스의 말을 통역했다. 미는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가지 대답이 있어요. 지금의 이 인연을 설명할 자는 세상에 없다는 것, 그리고 쳉의 통역 실력은 미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 미는 바이서스 어를 모르니 쳉이 똑바로 통역하는지 못하는지 알 도리가 없네요.”

“흐음……, 알았어요.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미는 고개를 돌려 빙하 위에 쓰러져 있는 배와 그 너머 설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북으로, 컴퍼스의 바늘이 향하는 그곳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