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근원


행복의근원

……근래에 겪으신 망측한 불행들에 대해 가슴 깊이 유감의 염을 느낍니다. 제가 조사해 본 결과, 체오는 의심하신 것처럼 백작님을 암 말로 착각한 것이 맞습니다. 예? 아, 물론입니다. 누구에게도 조사 결과 를 말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간의 정 신 조작을 통해 체오에게 사실을 가르쳐주었으니, 이제 안심하고 그 말 을 타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조금만 방심하면 꼭걷 어차게 된다고 하시던(발가락은 잘 나으셨는지요.) 그 문턱과 백작님을 향 해 역류한다는 그 화장실에서는 어떤 마법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으 며, 또한 저주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턱과 화장실 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불현듯 과거에 제가 겪었던 어떤 사건이 떠올 랐습니다. 백작님의 경험과 제가 겪은 사건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연관성이 있는 듯합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잠시 그 일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황혼의 꿀 빛 베일이 세상을 부드럽게 덮는 시각, 어디서 저녁 식사 에 내놓을 빵을 굽는지 구수한 냄새가 풍겨온다. 만인에게 성스러운 하루가 만인의 방식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가운데 고요히 밤이 찾아들 고 있었다. 밤은 마법의 시간 추억이 현재의 수면 위로 숭어처럼 힘차 게 뛰어오르는 시간. 약간 모자란 이의 약점도 덮어주고 뛰어난 이의 모습은 더욱 황홀하게 치장하는 어둠이 찾아드는 이 우아한 시간. 왜 나는 온몸에 진분홍빛 점액을 뒤집어쓴 대마법사의 자가당착적 인 폭언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파문이다! 이 멍청한 녀석, 손이 두 개라는 것이 변명이 되냐!” 자신의 실수를 제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스승의 특권이라 믿는 것 은 핸드레이크의 자유다. 같은 논리로 사부의 충고를 먼 데서 들려오 는 닭 울음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그의 제자인 나의 특권일 것이다. 어 쨌든 나는 인간이 서툴고 느리게나마 진보하는 동물이라고 믿고 싶고, 그래서 핸드레이크의 비논리적인 말들이 내 귀 옆을 지나쳐 흘러가도 록 내버려 둔 채 솥을 들여다보았다.

핸드레이크가 무엇을 만들 계획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 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핸드레이크가 내게 퍼붓고 있는 원 망과 불평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솥 안에서 뻐끔거리며 식 어가고 있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역겨운 진분홍빛 물질은 누구의 눈에 도 실패작으로 보이리라. 그 물질이 바로 핸드레이크의 몸을 뒤덮고 있는 물질이며 또한 내 몸에 묻어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저 솥을 씻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맛이 싹 달아난다.

핸드레이크는 저것이 저렇게 되어버린 이유로 내 손이 두 개라는 것 을 들고 있었다. 참 일찍도 알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실패의 상황은 이 러하다. 오늘 정오 무렵부터 황혼까지 계속된 이 기나긴 실험에서 핸드 레이크는 유피넬과 헬카네스도 짐작하지 못할 이유로 시약 다섯 개를 동시에 집어넣어야 했던 모양이다. 그는 두 개의 시약을 집어 들었고 나에게 나머지 세 개를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병 두 개를 들 어 솥 안에 부은 다음 몸을 돌려 세 번째 시약을 집어 들었다. 다시 솥 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나는 경악으로 하얗게 굳은 핸드레이크의 얼 굴을 발견했다. 솥 안의 용액이 폭발하기 직전 나는 사부님에게 화장실 의 위치를 알려주려 했던 것 같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머리와 얼굴에 묻은 점액들을 문질러 떼 냈 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 씻고 배불리 먹고 잠이나잤으면 좋겠다. 하 지만 불행하게도 그때 핸드레이크가 결심을 내렸다.

“알았다. 손이 두 개인 것이 문제라는 거지? 엉? 그런 소리 안 나오게 해주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잠자코 봐.”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쇠솥을 집어 들어 머리에 쓰는 나를 보고 핸드레이크는 으르렁거렸다. 경멸 어 린 몸짓으로 나를 무시한 핸드레이크는 선반과 상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분홍색 점액 덩어리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달리는 모습은 별로 어여쁜 것이 아니었다. 온갖 잡동사니들을 찾아낸 핸드레이크는 그것들 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는 곧장 주문을 외웠다.

방향성이 없는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한 순간, 핸드레이크가 탁자 위 에 집어 던진 물건들이 중력을 무시하며 떠올랐다.

핸드레이크의 손짓과 몸의 움직임, 그리고 주문을 외는 목소리의 고 저에 따라 물건들이 제멋대로 춤을 췄다. 막자가 뒤뚱거리고 주걱이 까 불거렸다. 삼발이가 다리 세 개 달린 해파리인 양 꿈틀꿈틀 날아다니 고 각종 마법 보석들이 소용돌이쳤다. 크고 작은 약병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모습은 천구의를 떠오르게 했다. 당장이라도 복잡한 연쇄 충돌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개체를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강력한 마 법을 준비하는 것 같다. 그런 판단을 내리자마자 연구실 밖으로 도망 치지 않은 까닭은, 사부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 아니라 문까지 다가가 는 동안 어떤 물건에 뒤통수를 맞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문이 끝났다. 쾅 하는 소리와 과도한 연기와 함께.

귀를 막았던 손을 떼고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바라보자 허공을 떠 다니던 물건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조금 전엔 보지 못했던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반지였다. 쿨럭거리며 연기를 토해 내던 핸드레이크는 그 반지를 집어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사부님의 진심은 잘 알았지만 저는 그런 취향이…..”

“닥치시고 어서 끼세요. 제자님.”

“실험도 안 해보고요?”

“무슨 소린가? 지금 하고 있잖나”

실험동물이 되었다. 상대가 우리 사부님이기에 격하된 것인지 격상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투덜거리며 반지를 받아들었다. 아무래 도 약지에 끼는 건 내키지 않았기에 오른손 중지에 끼웠다. 주먹을 얼 굴 가까이 가져와 보니 참으로 멋대가리 없게 생긴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질은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고 기묘하게 따뜻하다는 느낌 이 들었다. 방금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핸드레이 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손으로 반지를 문지르며 이렇게 말해. 하나와 같은 하나.” 

시동어인 모양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내 유언일 테고, 나는 꾸물거리다가 사부님의 호통을 들은 후에야 주저하며 말했다.

“하나와 같은…… 사부님?”

“외워!”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시동어를 말했다.

“하나와 같은 하나.”

온갖 끔찍한 일을 상상했지만, 어떤 치명적인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 다. 나는 실눈을 뜨고 주먹을 바라보았다. 반지는 조금 전 내가 끼워둔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 반지를 끼고 있는 내 손 또한 그 대로였다. 그때 왼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요?”

저건 핸드레이크의 목소리가 아닌데? 그런데 굉장히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곳이 있는 목소리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분홍색으로 젖어 있는 볼품없는 모습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나와 같은 체격에 키도 비슷하다. 그리고 손에는 나와 똑같은 푸른 반지를 끼고 있었다. 목 위에는 솔로처의 얼굴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건 나다.

“너 누구야!” “너 누구야!”

내가 비명을 지른 순간 저편 솔로처도 나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또 다른 나라니? 그런데 저 녀석 목소리가 이상하군.

“아하 알았다. 가짜였군. 내 목소리가 아냐.”

“뭐라고?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핸드레이크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만들 해. 이 멍청한 것・・・・・・ 들, 자네・・・・・・ 들 둘 다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똑같다니요? 전혀 다른데요?”

“전혀 다르다고 느끼는 그게 자네 목소리야 솔로처. 사람은 자기 목 소리를 잘 모르지. 다른 사람들은 목에서 입 바깥으로 나온 소리만 듣 지만, 자신은 목에서 입으로 나가는 소리와 목에서 귀로 곧장 가는 소 리를 한꺼번에 듣기 때문이야.”

아, 참. 그렇다. 마법을 배우던 초기에 내 목소리를 허공에서 울려 퍼지게 해본 적이 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사부님은 지금 들려줬던 설명을 들려줬었다. 알고 있는 사 실도 떠올리지 못한 걸 보니 꽤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때 다른 내가 말 했다.

“그러면 저 친구도 나도 다 솔로처란 말입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걸 물어주는군. 아니, 당연한 건가?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이번엔 이렇게 말해. 진짜는 하나다. 역시 반지를 문지르며 “

나와 나는 동시에 외쳤다.

“진짜는 하나다!”

그리고 나는 하나가 되었다.

잠깐 동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왼쪽에 있는 또 한 명의 나 를 보고 있는 솔로처였고 또한 오른쪽에 있던 또 한 명의 나를 보고 있 는 솔로처였다. 결과적으로 양쪽에 또 다른 내가 있었던, 즉 세 명의 내 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둘로 나누어졌던 나의 기 억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설명 을 요구하는 얼굴로 사부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핸드레이크는 만족 한 얼굴로 말했다.

“성공했군.”

….실험이었다는 말, 농담이 아니었군. 나는 핸드레이크에게 오른손 중지를 들어 올렸다.

“사부님 이거 도대체 뭡니까?”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 아닙니다.”

들켰군.

“실수였습니다. 이 반지 도대체 뭡니까?”

“손이 두 개뿐인 부족한 제자를 위한 스승의 배려지.”

“일반적으로 손이 두 개라는 것이 단점으로 취급되지는 않을 텐데요.”

“지금 여기선 단점이야. 이젠 시약 세 개를 한꺼번에 붓지 못한다는 소리는 못 하겠지?”

증명되었다. 우리 사부님은 천재다.

“사부님. 그냥 아무 그릇에나 다섯 개의 시약을 부어서 혼합한 다음 솥에 부으면 안 됩니까?”

“저, 저저,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어, 어어어, 없다! 마, 마, 말도 안돼!”

그래도 되는 것이었군. 아시겠는가? 천재란 다섯 개의 시약을 동시 에 투입해야 하는 경우 그것들을 한 그릇에 섞는 대신 즉석에서 제자 를 한 명 늘리는 마법을 만들어내는 작자다. 핸드레이크는 더듬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그, 그러면 어서 나, 나뉘어라! 청소하려면 두 명이면 더 좋겠지. 그 래. 두 명으로 나뉘면 이 난장판을 치우기도 더 편하단 말이야. 그러니 까 두 배로 편하지. 알겠냐? 네 사부는 거기까지 생각한 거다.”

“아, 네.”

우, 네.

“그런데 이거 안전한 겁니까? 저 지금 둘로 나누어졌던 저들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둘 다 저 자신인 겁니까?”

“아니. 하나만 진짜다. 그러니까 하나로 합쳐지는 시동어가 ‘진짜는 하나다’인 거지.”

“그러면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지요? 오른쪽? 왼쪽?”

“나도 몰라.”

“예?”

“무슨 상관있냐?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짜라는 차이밖에 없어. 그 외엔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그러니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잖아. 어서 나뉘어서 청소나 해.”

엄청나게 무책임한 언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덜거리며 둘로 나 뉜 직후 나는 사부님이 대단히 현명하게 행동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실수로 그랬겠지만.

걸레를 짜며, 나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궁금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저편에서 솥을 비우고 있는 솔로처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자 꾸 나를 흘끔거리는 것이 나 자신을 보는 듯하다. 아, 이런 나 자신을 보는 것이 맞군. 그렇다면 저 친구의 속마음도 나와 똑같겠군.

‘내가 진짜일까, 저 녀석이 진짜일까. 아니다. 알 필요가 없어. 어차 피 하나로 합쳐지면 둘 다 내가 된다. 진짜의 기억만 살아남고 가짜의 기억은 사라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어. 두 기억이 모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짜라도 합쳐지면 진짜의 일부가 되고 진짜라도 역시 진짜의 일부가 되는 거다. 따라서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안다고 해서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어. 알면 신경만 쓰일 뿐이지.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그렇지?”

나는 솔로처에게 말했다. 솔로처는 움찔하다가 피식 웃었다.

“맞아. 물론 내가 뭐라고 제안할지는 너도 알겠지?”

“그래”

실험식을 적어둔 메모를 검토하던 핸드레이크가 뚱한 표정으로 우 리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동시에 사부님께 미소를 지었다. 똑같이 생긴 제자 두 명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업적 임에도 불구하고 핸드레이크를 조금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핸드레이 크는 입술을 약간 비죽거리고는 다시 메모로 눈을 돌렸다.

다른 나, 결국 나 자신이 제안하려는 것은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였다. 알고 싶지 않다. 아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와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로 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물론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바람에 한곳에 서 충돌하거나 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나와 나는 손발 이 잘 맞았다(바보스러운 말투다.). 청소는 빠르게 끝났고 나와 나는 한 마음으로(아아, 젠장. 당연히 한마음이지.) 핸드레이크를 애처롭게 바라보 았다. 제발 이 빌어먹을 실험은 내일로 미루고 씻고 맛있는 저녁 먹고 푹 자자고 말해 주세요. 사부님.

“청소 끝났나? 그럼 시작하세.”

장미와 정의의 오렘이여. 급한 주문 들어갑니다. 궁정마법사 연구실 에 정의가 바닥났습니다.

핸드레이크는 도무지 제지할 엄두를 낼 수 없는 확고하고 투철한 태 도로 실험 준비를 갖춰나갔다. 어쩔 수 없이 나와 나는 그의 실험 준비 를 도왔다. 차라리 빨리 끝내도록 돕는 것이 낫겠다는 결심으로 자위 를 해보았지만, 그래도 한마디는 하고 싶었다.

“사부님.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엇을 위한 실험입니까?”

“크크크. 알고 싶은가?”

저쪽에 있던 솔로처가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세상은 아직 아름다워요. 사부님.”

“누가 세상을 끝장낸다고 그랬냐. 오히려 이 실험이 성공하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거다.”

내가 질문했다.

“어떻게요?”

핸드레이크는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행복의 근원을 찾아낼 생각이다.”

“예? 도대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부님이 찾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고 말할 테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라고 말할 텐데요. 그 리고 그 외에도 맛있는 음식이나 충분한 수면 등 무수히 많은 대답이 가능할 테고요.”

“돈이나 권력 같은 시시한 대답도 있을 테고? 그렇게 말할 거라 짐작 했지.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길이나 저런 길로 가야 한 다고 말하면서 그 길에 매달릴 때 길을 무시한 채 목적에 곧장 도달하 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지.”

다른 내가 말했다.

“선구자 말씀이군요.”

“그렇다네. 솔로처.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이런저런 길을 시험해 볼 때 그것을 무시한 채 행복 그 자체에 곧장 도달할 생각이네. 행복의 근원을 움켜쥔다면! 생각해 보게. 솔로처, 그것이 어떤 일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제자의 소박한 행복을 갈취하면서 행복의 근원을 찾아낸다는 도덕적 모순을 눈감아주기로 한다면, 또한 그 실현 가능성 에 대한 비관적 전망도 잠시 옆으로 치워둔다면, 이것은 짝을 찾을 수 없이 원대한 계획이다. 결국 행복이야말로 모든 삶의 유일무이한 목표 니까.

“하지만, 음. 이런 솥에 뭘 좀 넣고 끓여서 세상을 극락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핸드레이크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도 도전하지도 않는 주제에 ‘이럴 거다, 저럴 거다’라고 말하는 작자들의 모임에 가입하기로 한 건가? 아니면 도전 자체의 의미를 잊어 버릴 정도로 늙은 건가? 물론 세상을 당장 바꿀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주 작은 행복의 근원이라도 손에 쥘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성공이야.”

핸드레이크는 더 이상의 반론이나 의견을 허락하지 않는 태도로 실험을 재개했다. 어쨌든 이 실험의 목적은 알게 되었고 또한 그 목적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것도 알았으니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와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매달렸던 실험을 반복했다.

한 번 해봤던 일이고 내가 두 배로 늘어났기 때문에 첫 번째 시도보 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실험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그것이 더 빠른 성공을 의미한다고 여기며 흥분했다. 물론 내게는 더 빠른 저 녁 식사와 목욕, 취침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나 또한 빠른 진행을 환영 했다. 그래도 첫 번째 실험이 실패했던 지점, 즉 시약 다섯 개를 집어넣 어야 하는 단계가 되었을 무렵에는 저녁 식사보다는 취침 준비에 훨씬 어울리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오로지 자신의 마법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와 내가 세 개의 시약을 동시에 투입해야 한다고 고 집을 부렸다. 늦어버린 저녁을 생각하니 논쟁을 벌이기도 귀찮았다. 그 래서 핸드레이크와 나와 나는 주의 깊게 다섯 개의 시약을 동시에 투 입했다.

고맙게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솥 안에서 끓고 있는 액체의 모 습도 첫 번째 실패보다는 훨씬 보기에 덜 괴로운 모습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솥 안에서는 대단히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배가 고파서 인지 자꾸만 먹을 것의 냄새로 생각되었다.

핸드레이크는 기뻐하며 마지막 단계로 들어섰다. 핸드레이크가 복잡한 주문을 외우자 솥 안의 내용물들이 극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것을 액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위로 솟아오르는 액체 는 없으니까. 솥 위로 한 큐빗쯤 솟아오른 그 물질은 갖가지 모습으로 변화했다. 나무, 손, 뿔, 사다리, 꽃……. 물론 이것은 구름의 모양에 이 름을 붙이는 것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핸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높아지 고 낮아지는 것에 따라 그것의 모습도 바뀌는 것 같았다. 어떤 부분에 서는 순간적인 기화가 일어나고 어떤 부분에서는 반대로 응결이 일어 났다. 수증기가 피어나면서 동시에 조각들이 부서져 아래로 쏟아졌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끝없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나뭇가지 사이를 춤추는 반딧불처럼 어떤 빛이 나타났다. 아니, 발광하는 물고기라고 해야 할까. 형태가 계속 변하는 어항 속에 서 빛나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같다. 혹은 혈관을 따라 불빛이 흐르 는 어떤 신비한 짐승의 모습 같기도 하다. 언제 나타났나 하고 바라보 았을 때 그 빛은 두 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세 개, 네 개로 늘어나 다가 더 이상 세는 것이 힘들어지는 지경까지 늘어났다.

핸드레이크의 영창이 낮아지고 빨라졌다. 작은 북을 빠르게 두드리 는 것 같았다.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 중에는 당연히 벙어리나 말더 듬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음치도 드물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 지만 위대한 마법사들은 대부분 노래도 잘 부른다. 핸드레이크의 긴박 한영창은 나와 나를 긴장 속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나와 나는 호흡을 힘들어하며 솥 안의 물체를 바라보았다.

핸드레이크가 갑자기 두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짧은 단어를 내던진 순간 그것이 최후의 변화를 일으켰다.

수증기와 비산하는 파편, 그리고 정신없는 빛 때문에 그것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직 솥 안에 남아 있는 것과는 완 전히 다른 무엇이 된 것은 알 수 있었다. 곧 그것은 아이의 손으로도 어 렵잖게 움켜쥘 수 있는 조그마한 크기로 바뀌었다. 솥 위의 허공에 떠 있는 그것을 가리키며 핸드레이크가 외쳤다.

“병을 가져와서 저걸 담게! 마개 있는 걸로!”

내 쪽에 빈 유리병이 있었다. 내가 그것을 집어 들자 저쪽의 솔로처 가 곧 집게를 내밀었다. 역시 손이 잘 맞는다. 나는 집게 끝에 병을 물 려주었고 그러자 솔로처는 허공에 떠 있는 그것 아래로 병을 조심스럽 게 가져갔다. 병을 위로 들어올려 그것을 담은 솔로처는 집게를 내 쪽 으로 돌렸고 나는 병에 재빨리 마개를 끼워 넣었다.

핸드레이크가 한숨을 내쉬며 두 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솥 안에 있는 물질은 이제 평범한 찌꺼기로서 가만히 출렁이고 있었다. 핸드레 이크는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탁자 위에 놓게. 조심해서.”

핸드레이크와 나와 나는 곧 탁자 옆에 몰려서서 유리병을 들여다보 았다. 아쉽게도 내용물은 여전히 알아보기 어려웠다. 소용돌이치는 수 증기와 맥동하는 빛 사이로 무엇인가가 얼핏얼핏 보이긴 했지만 아무 래도 형태가 계속 변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이게 행복의 근원입니까?”

핸드레이크는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말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먹어야지.”

먹는 거였나. 혹시 환각제 같은 것을 만든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을 때 핸드레이크가 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쪽의 내가 말 했다.

“제가요?”

“물론이지. 나는 관찰을 해야 하니까.”

또 실험동물이냐. 저쪽의 내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다.

“좀 웃기지만, 하자.”

“할 수 없군.”

그리고 나는 자신과 가위바위보를 했다.

거울을 상대로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다면? 내가 가위를, 그리고 다 른 내가 바위를 내밀었을 때 패배감보다는 얼떨떨한 위화감을 느꼈다. 저편의 나 또한 승리감과는 다른 느낌의 감정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렸 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병을 집어 들었다. 다른 내가 말했다.

“바로 삼키지 말고 일단 맛을 봐.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뱉고.”

“내가 너야. 나도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다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레이크는 뱉는다는 말에 콧방귀를 탕탕 뀌었지만 참견하지는 않았다.

나는 병마개를 연 다음 행복의 근원이 뛰쳐나갈까 봐 손바닥으로 덮었다. 하지만 행복의 근원은 병 안에서 자기 변태를 계속할 뿐 밖으 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병 위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무 냄새가 안 나는데. 흐음. 그럼 먹겠습니다.”

나는 병을 입에 대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행복의 근원은 병 안에서 꿈틀거릴 뿐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후 루룩 빨아들였다.

각자 다른 이유에서지만 핸드레이크와 다른 나는 눈이 튀어나올 정 도로 긴장하여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그럴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싶 었지만 입안에서 느껴지는 기분이 달갑잖았다.

“아무 맛도 없어요. 그런데 계속 움직이니까, 어, 기분이 이상하네 요.”

“걱정 말고 삼켜. 아주 행복해질 테니까.”

나는 눈을 감고 행복의 근원을 삼켰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행복의 근원이 목구멍 안쪽으로 넘어가는 기분은 그다지 유쾌한 것 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느낌뿐이었다. 가만히 기다려보았지만 뭔가 달라지는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나와 핸드레이크가 기분이 어 떠냐고 번갈아 물어보았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 었다. 핸드레이크가 좌절하고 다른 내가 기뻐했을 때(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실패했으니까.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탁자 위에 빈 병을 내려놓다가 그것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와 장창!” 병이 깨지며 유리 조각이 튀었고 핸드레이크는 깜짝 놀라며 뒤 로 물러났다. 그 발이 아직까지 뜨거운 솥을 걷어찼다. “악!” 솥이 뒤집 혔고 핸드레이크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뛰었다. “쾅, 데그르르” 솥은 구르며 내용물을 사방에 흩어놓았고 핸드레이크는 나를 넘어뜨렸다. “우앗!” 찌꺼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와 핸드레이크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다가오던 다른 내가 빈 솥을 밟고 쫙 미끄러졌다. “사람 살려!” 돌진하는 솔로처를 돌아본 핸드레이크가 경악하여 외쳤다. “멈춰라!” 불가능한 요구다. 멋지게 미끄러진 솔로처는 구석에 놓여 있던 양피지 무더기에 충돌했다. “내 코!” 확 날아온 양피지들 중 일부가 솥을 끓이 고 있던 불 위에 떨어졌다. “불이야!” “제기랄, 물 가져와!” 물동이로 달 려가려던 나는 탁자 모서리에 허벅지를 호되게 찍었다. “……!” 비명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파서 한쪽 다리로 팔짝팔짝 뛰었다. 바닥이 미 끄러울 땐 추천하기 힘든 동작이다. 나는 다리를 하늘로 향한 채 나가 떨어지다가 가까스로 서가를 붙잡았다. 그러나 서가는 야속하게도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 어?” “쿠쾅!” 탁자가 서가를 받쳐주었기에 간 신히 납작해지는 꼴은 면했지만 쏟아져 나온 책과 도구들이 내 몸을 난타하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온몸에 멍이 든 채 헐떡거리며 서 가 아래에서 기어 나오자 불타는 양피지 무더기가 보였다. “화르르르!” 그리고 그 곁에서는 핸드레이크가 바닥의 물을 발로 걷어차는 한심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던 솔로처가 외쳤다. “사부님, 그러지 마세요!” 그때 나도 양피지 무더기 속에서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금속통을 발견했다. 가열된 금속통에 물이 닿으면・・ 면…… “퍼펑!” “히엑?” 핸드레이크는 날아온 물벼락과 불티의 폭풍에 맞아 뒤로 나동그라졌고 나와 저쪽의 나는 황급히 머리를 숙여야 했 다. 그래서 날아가 버린 금속통이 무엇을 명중시켰는지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충돌해서는 안 될 물건에 부딪혔다는 것은 분명 하다. 고막이 날아갈 것 같은 폭음이 들려왔으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하던 것치곤 상황을 잘 설명한다고? 내 가 기억하는 것이 거기까지라는 말이다. 정신이 나간 나와 나,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그 이후부터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엄청 나게 소란스러웠고 위험한 것들이 치명적인 속도로 날아다녔고 곳곳에 서 불가사의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본 그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가위가 두 날을 다리처럼 놀리며 도망치는 그 장면은? 또한 핸드레이크는 왜 불타는 책에서 글자들이 뛰쳐나오는 장면을 본 것일까? 핸드레이크의 목격담에 의하면 그 글자들은 일렬로 줄을 서서 물을 퍼 날랐다고 한다. 다른 내가 본 장면만이 유일하게 설 명이 가능했다. 솔로처는 어느 순간 다섯 명의 솔로처가 더 있었다고 맹세했다. 아마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던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면 세 명이 서로의 머리를 부딪쳤을지도……………

어느 순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재난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나와 함께 핸드레이크를 얼싸안은 채 연구실 구석에 주저앉아 헐떡거리고 있었다. 캄캄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 서 핸드레이크가 주문을 웅얼거려 빛을 만들어야 했다. 핸드레이크가 천장에 붙여놓은 빛이 드러내 보인 광경은 참으로 의기소침한 것이었 다. 부서지고 깨지고 찢어지고 부러지고 끊어지고 타고 젖은 사물들이 서로를 멸시하고 있었다. 가장 난폭한 드래곤이 우리에게 구제 불능이 라는 평가를 내려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그 압도적인 무질서 가운데 있는 우리 셋 또한 사람의 타락상에 관한 시각적 표본이 필요한 자들 에게 호평받을 전시물이었다. 기적적으로 사지를 분실한 사람은 한 명 도 없었지만 모두들 흠뻑 젖어 있었고 옷에는 검댕과 탄 자국이 가득 했으며 자잘한 상처들로 흉악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핸드 레이크가 말했다.

“끄, 끝난건가?”

주어가 없었지만 마땅하게 주어로 삼을 만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 다. 어쨌든 끝난 모양이다. 다른 내가 말했다.

“이 연구실이 위험하게 이럴 줄은, 아니, 이렇게 위험할 줄은 미, 미 처 몰랐는데요.”

“망할, 망할 녀석. 후, 훅, 평소에 정리 정돈을 잘했으면 이런 일은 어 없었을 거 아냐”

“사부님. 그건 제가 매, 매일같이 요구하던 건데요? 제발 정리 좀 해 두자고 여러, 여러 번 말씀드, 드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는 지, 지금이 가장 완벽한 상태라고 하시면서……”

“아냐, 아냐. 정리 정돈의 문제가 아니야. 만일 그랬다면 벌써 오래전에 우리들은 치명적인 사고를 겪었어야 했지.”

“그래서 조금 전에 겪었잖습니까.”

“진작 그랬어야 한다는 거야. 이건 아무래도 솔로처가 먹은 행복의 근원과 관계된 사건이야.”

연구실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었지만, 핸드레이크가 제기한 가설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나는 수상함 만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행복의 근원을 먹었는데 이렇게 불행한 일 이 일어날 리는 없을 텐데요.”

핸드레이크는 어깨를 으쓱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동작의 70퍼 센트 정도만 완수한 상태에서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입을 떡 벌렸다. 나 와 다른 나는 핸드레이크가 실험 실패의 책임을 제자에게 돌릴 기발한 방법을 떠올렸겠거니 생각했지만, 핸드레이크는 그러지 않았다. 핸드레 이크는 격한 동작으로 다그쳤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네? 네? 행복의 근원을 먹었는데 이런 불행이 일어날 리 없다고・・・”

“바로 그거였어! 성공이다!”

핸드레이크는 화산 같은 기세로 일어섰다. 격정적인 기쁨에 두 팔을 집어 던지며 핸드레이크는 외쳤다.

“행복의 근원은 불행이었어!”

심장에 북해의 바람이 불어닥치는 것 같다.

얼어붙다시피 한 나와 다른 나는 기뻐 날뛰고 있는 대마법사를 바 라보았다. 기뻐하는 스승을 보는 제자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 겠지만 그건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다. 나는 제자가 아니다. 젠 장. 실험동물이다. 행복의 근원이 불행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먹은 것 ………

“사부님, 그걸 제게 먹인 겁니까!”

다른 나도 분개하여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때 핸드레이크가 외쳤다. 

“잠깐! 둘 다 움직이지 마!”

다른 내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핸드레이크는 부릅뜬 눈으로 나와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누가 병을 떨어뜨렸던 솔로처인가?”

“어, 전데요?”

“그렇다면 자네에게 한 말이야. 움직이지 마.”

“예?”

핸드레이크가 손을 어지럽게 흔들며 말했다.

“미안, 솔로처, 일단 내 말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말게. 자넨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면 안 돼. 조금 전 자네는 병 하나로 이 재난을 일으켰단 말이야.”

가슴이 안쪽으로 오그라드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핸드레이크의 지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나와 핸드레이크가 조심스럽게 내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참기 힘들었다. 나는 씩씩거리며 그들을 노려보았고 그들은 나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또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서로 를 쳐다보았다. 다른 내가 먼저 통분의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사부님. 이 난장판이 다른 제가 떨어뜨린 병 하나 때문에 일어났다고요?”

“그럼. 이 연구실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병 하나 떨어뜨려서 이런 난장판이 될 수는 없지. 어처구니없는 불행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어. 바로 솔로처가 먹은 것이 그 불행이란 말이야.”

“하지만 사부님이 만드신 것은 행복의 근원이잖습니까!”

대들 듯한 다른 나의 기세에 핸드레이크는 약간 방어적인 얼굴로 말했다.

“솔로처. 음. 행복의 근원이 바로 불행이야.”

“행복의 근원이 불행이라고요?”

“어디 보자.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래. 찬 잔은 채울 수 없고 빈 잔은 비울 수 없다는 거지.”

왜 우리 사부님이 갑자기 헐스루인 공주님처럼 말씀하시는 걸까. 다 행히 우리 사부님은 부연이라고는 하지 않는 헐스루인 공주님과 달리 설명을 덧붙였다.

“바꿔 말하면 행복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고 불행한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는 없다는 거야. 물론 자네는 더 행복하다거나 더 불행 하다는 말이 있다고 하겠지. 그래. 그런 말이 있네. 하지만 그건 공허한 말이야. 어떤 행복한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져서 더 행복해졌다면, 그에게서 그것을 박탈하면 다시 행복해질까? 아니지. 그 사람은 불행해질 거야. 반대로 어떤 불행한 사람에게 어떤 짐이 주어져서 더 불행해졌다 면, 그것이 제거되면 다시 불행해질까? 글쎄. 아마 행복을 느낄 거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맞는 말이다. 그래서?

“따라서 사람의 마음속엔 행복의 눈금 같은 것은 없다는 거지. 찬 잔은 비울 수 있을 뿐이고 빈 잔은 채울 수 있을 뿐이야. 둘 중 하나일 뿐이야. 마찬가지로 행복한 이는 불행하게 할 수 있고 불행한 이는 행 복하게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 행복의 근원은 불행이야. 물론 불행 의 근원은 행복이고!”

맞는 말이다. 세상에는 쌍을 이루는 말이 있다. 차다 뜨겁다, 높 다-낮다 무겁다 가볍다, 밝다- 어둡다, 기타 등등. 이런 말들이 쌍을 이루는 까닭은 상대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쪽 이 없으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는 말들이다. 따라서 한쪽이 다른 쪽 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행복하다-불행하다 또한 이런 말 에 속한다.

따라서 행복의 근원은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바로 내가 먹은 것이다.

“그걸 이제 아신 겁니까? 실험까지 끝난 후에야?”

다른 나의 지적에 핸드레이크는 갑작스럽게 학문하는 길의 어두운면에서 방황 중인 제자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어, 실험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 뒤처리가 남았으니까. 저 솔로처의 문제가 있잖아.”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내 처지를 고민해준다니 환영할 노릇이다. 핸드레이크는 수염을 꼬며 말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지금 자네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상태, 그러니까 아주 불행한 상태라는 건데.”

“알려주시지 않았으면 모를 뻔했군요.”

“투덜거림이 즐겁긴 하지만 도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 잠자코 있 게. 잠깐만. 그렇다면 불행의 근원을 한 번 만들어볼까? 그걸 자네에게 먹이면 중화가 될지도 모르지.”

다른 내가 비관적으로 말했다.

“사부님 지금 연구실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폐허를 다 치우고 정리하려면 며칠은 걸릴 텐데 그동안 계속 다른 저를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도리상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불가능합니 다. 며칠 동안 기다리려면 뭘 먹거나 마시거나 해야 할 텐데, 혹 빵 먹다 가 목이 메어 죽는 불행이 일어나면 어쩝니까?”

오, 맙소사. 소름 끼치는 전망이다.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핸드레이크도 이것이 여유를 두고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을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대책은 천재 대마법사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석화시켜둘까? 돌로 만들어두면…………….”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말문이 막혔다. 고맙게도 핸드레이크는 스스로 그 제안을 거부했다.

“아냐. 석화되었다가 안 풀려나는 불행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어라? 잠깐만.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뭐가 말씀이십니까?”

핸드레이크는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핸드레이크가 말했다.

“고약하게 되었군. 솔로처, 어, 사실 사람이란 참 까다롭고 관용이 없는 동물이지. 무슨 말이냐 하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유한할 지언정 불행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한하다는 거네. 따라서 자네가 아무 일도 해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네에게 아무 일도 해줄 수 없어. 그게 곧 불행을 부르게 될지도 모르니까.”

사부님이 내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행복해졌다. 꼭 내가 행복을 받아들이기 적합한 상태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다 른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누구보다 도 나를 구제해야 할 이유가 큰 자신의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해주지 않는 것도 곧 불행이잖습니까. 인생에 비틀거릴 때 부축해 줄 사람 하나 없다는 것보다 더 큰 불행도 별로 없을 겁니 다. 그렇잖습니까?”

핸드레이크는 동의의 몸짓을 해 보였다.

“그럴듯한 말을 하는군. 하지만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매우 까 다로운 것임을 인정해야 해. 솔로처, 행복한 사람들은 다 비슷비슷하지 만 불행한 사람들은 천차만별이지. 왜냐하면 행복은 건강, 좋아하는 직 업, 마음의 평화, 건전한 재정, 말썽 안 피우는 가족과 친구 등 아주 많 은 것이 충족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희귀한 상태지만 불행은 그중 하 나만 결핍되면 된단 말이야. 사람이 관용이 없는 동물이라고 말한 건 그 때문일세.”

행복의 근원이 불행이라는 것도 떠올리지 못한 마법사치고는 꽤 정확한 행복관이다. 핸드레이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듯 약간 도취된 어투로 말했다.

“따라서 불행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대단히, 지극히, 경이적으로 많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건 솔로처의 불행으로 이어지게 될 거야”

“그럼 그냥 효력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립니까? 아니, 일단 그게 효력 이 떨어지거나 하는 물건입니까?”

“영원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으니 언젠가는 효력이 떨어질 거야. 따라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긴 한데, 문제는 효 력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다는 것이군.”

“그럼 아무 소용이 없잖습니까.”

“걱정 마. 어떤 스승도 불행에 빠진 제자를, 그게 설령 제자의 반쪽이라도 내버려 두지는 않아.

……음? 제자의 반쪽?”

자신의 말에 놀란 핸드레이크는 나와 다른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금 후 그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잖아?”

내 얼굴이 허옇게 질렸던 것 같다. 다른 나의 얼굴이 그렇게 바뀌었 으니까. 다른 나는 핸드레이크의 얼굴이라도 움켜쥘 것 같은 태도로 말 했다.

“사부님, 사부님, 진정하세요. 자, 당신은 바이서스의 궁정마법사 핸드레이크이며……”

“지금 뭐 하는 건가?”

“안 돼요. 언젠가 그렇게 되실 거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천재나 대마 법사는 그렇게 될 확률이 높으니 천재 대마법사인 사부님은 당연히 두 배로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지금은 미치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 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윽!”

강력한 지팡이질로 다른 나의 정수리를 어루만져준 핸드레이크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치긴 누가 미쳤다는 거야.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야.”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죠?”

“나는 ‘재미있는’이라고 말했네. 솔로처.”

그게 그거지.

“어쩌면 내 선견지명이 빛나는 순간이 될지도 모르겠군.”

맙소사, 대피해!

“자네는 지금 둘로 나뉘어 있어 바로 그게 해결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군.”

다른 내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게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가 되지요?”

핸드레이크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팔짱을 끼고 잠깐 동안 침묵했다.

“좋아. 이런 거야. 내가 이미 말했듯이 자네들 중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짜야. 그런데, 만약 불행을 먹은 자네가 가짜라면 자네들은 그냥 합쳐지면 돼.”

“예? 어째서 그렇지요?”

“그거야 가짜니까 그렇지.”

“하지만, 아까 합쳐졌을 땐 저희 둘이 보고 경험한 것에 대한 기억이 다 남았는데요.”

핸드레이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솔로처를 쳐다보았다.

“맞아. 그런데?”

“어, 그렇다면 진짜의 경험이든 가짜의 경험이든 모두 남게 된다는 말이잖습니까. 그럼 진짜의 불행이나 가짜의 불행도 모두 남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 행복이 자신의 것인 것만큼이나 불행도 자신의 것이니 까.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진짜 솔로처의 불행도 아니고 가짜 솔로처의 불행도 아니잖아. 그건 내가 만든 불행이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핸드레이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핸드레이 크는 수염을 꼬며 말했다.

“자네는 가짜 자네를 일하게 하며 놀고 지낼 수 없는 것처럼 가짜 자네에게 불행을 가져오게 할 수도 없어. 그건 진짜 자네가 해야 할 일 이니까. 따라서 가짜 솔로처는 자기 것도 아닌 불행을 가지고 진짜 솔 로처에게 합쳐질 수 없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어. 만약 불행을 먹 은 것이 진짜라면 진짜는 계속 뱃속에 불행을 가지고 있게 될 거야. 그 런데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군. 합쳐진 후의 상태를 보면 누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겠지만 그건 이미 늦지.”

내가 말했다.

“합쳐보고 잘못되면 다시 분리하면 안 됩니까?”

“이보게, 솔로처, 소금과 물을 섞은 다음 둘로 나누면 소금과 물이 아니라 두 그릇의 소금물이 나오는 법일세. 우리 경우에 비춰 말한다 면 불행한 솔로처가 둘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때는 정말 방법이 없어 지는 거지. 그러니 묻겠어. 누가 진짜인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느닷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악덕이지만 그 내용이 심히 당혹스러운 경우엔 더욱 나쁘다. 다른 내가 당황하여 말했다.

“이 마법은 사부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에게 물어보시는 겁니까?”

“물론 이 마법은 내 것이지. 하지만 솔로처에 대해서라면 누구에게 물어봐야겠나?”

다른 나는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나를 돌아보았을까. 내 가 곧 너이며 따라서 네가 할 말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 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싶다면 저 나도 그 말을 떠올릴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정말 할 말 없다. 다른 내가 말했다.

“저는 제가 진짜 같은데요. 하지만 저기 있는 저 솔로처도 자기가 진 짜같다고 느낄 겁니다. 그렇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래.”

핸드레이크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아마 자기 마법의 완벽함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는 모양이지만 차마 그것을 입 밖에 내놓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핸드레이크는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힘들겠지만 이건 자네 외엔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솔로 처.”

“그렇습니까?”

“그래. 자네 자신을 찾는 일이니까. 생각을 좀 해봐. 자네를 진짜 자 네이게 하는 것을 찾아내게.”

나를 진짜 나이게 하는 것?


무엇이 나일까? 지상에 있는, 그리고 이전에 있었거나 앞으로 있을 셀 수 없이 많은 남자와 여자들 중 한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 나는 나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나 또한 그 런 것 같다. 나와 다른 나는 확인 삼아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 했고 우리의 기억이 형태와 범위, 정확도 면에서 완전히 일치함을 확인 했다. 희망? 역시 서로에게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똑같다. 다른 사 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설명하기 위해선 항상 많은 낱말이 필요한 것과 달리.

가치관 지식 열정? 개성? 습관 모두 똑같다.

제기랄, 취미 식성? 말투? 버릇?

모두 똑같다.

실망하긴 이르다. 내가 찾은 것들은 쌍둥이들이라면 일치할 수 있는 것들이다. 유달리 우애가 깊어 언제나 함께 행동하는 쌍둥이들이라면 기억에서 버릇까지 전부 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누가 자 신인지 몰라 당황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뭔가가 있기는 한 걸까?

당신이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을 때, 정말 당신이 꿈에서 깨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이 당신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꿈속의 인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현실성이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대개의 경우 꿈속에서 당신은 아주 이상한 현 상조차도 비판 없이 수용한다. 꿈속에서 당신은 꿈이 현실적이라고 믿 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다른 나 또한 엄지와 검지로 양쪽 이마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져 있 었다.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생각하면 한 사람보 다 낫다는 것은 토론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지만 이 경우엔 해당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똑같으니까 한 사람이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나 다 름없다. 먼저 좌절하여 말한 사람은 나였다.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부님.”

핸드레이크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고는 말했다.

“쉽게 포기하지 마. 자넨 배 속에 있는 불행의 영향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런 영향이 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무언가를 논증하기 위해선 그것보다 우월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 자신을 논증하기 위해선 저보다 우월해야 합니다. 모순이라고요.”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지.”

핸드레이크는 수긍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야. 논리 자체가 나에게서 시작하는 거니까 논리로 나를 논증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도끼에 속한 도끼날로 도 낏자루를 깎을 순 없는 법이니까. 논리는 옆으로 치워두고 그냥 느껴보 라고.”

“느껴보라고요? 하지만 제 느낌은 제가 진짜라는 겁니다.”

다른 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내 변호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쪽 저도 그렇게 느낄 테고요. 느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 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말게. 그것이 바로 불행의 영향일 거야. 직관 이나 감을 무시해선 안 돼. 비록 바로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훨 씬 어렵겠지만, 그래도 도전해야 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심 같은 것 은 잠시 접어두고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도록 해봐.”

이젠 자이펀 검객 같은 소리를 하신다. 그리고 나는 기운이 더욱 빠 지는 것을 느꼈다. 핸드레이크가 핸드레이크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 은 결국 그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좌절과 실망을 담아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경악한 핸드레이크와 다른 나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리고 나는 내가 하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지만 가장 빠른 것은 생각이라는 옛 수수께끼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행동이 내 의지 대신 관성과 결탁하는 쉬운 선택을 해버렸기에, 나는 그러지 않으려 하면서 탁자를 툭 건드렸다.

불행이 꽃이라면 우리는 무르익은 봄에 떨어졌음이 분명하다.

이런소식전해드리게돼서유감입니다내돈내놔라더러운배신자뭐라 고그렇게말하지않았잖아뱀이다나임신했나봐사람살려아냐그잔이아니 야불이야사형수가바뀌었어빌어먹을술병이비었잖아나를사랑한다는그 말은무슨뜻이었어속았다그러고도당신이아버지라고할수있어폭락했어 도둑이야바지속에바퀴벌레가들어왔다!

어떤 시간보다 신장력이 우수한 것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수 도 바이서스 임펠의 최고참 거지가 사심 없이 동전을 던져주고 싶어 할 만한 모습이 되어 연구실 곳곳에 널브러지게 되었다. 비장미 넘치는 광 경이지만, 이 장면을 소재로 삼고 싶어 할 음유시인은 없을 것 같다. 핸 드레이크가 잔해 속에서 신음했다.

“드디어 예언자들이 진짜인지 알 수 있게 되었군…………… 오늘에 관한 예언을 남긴 예언자가 최소한 한 명은 있어야 해.”

다른 내가 의리 있게 외쳤다.

“솔로처, 솔로처? 살아 있나?”

“살아 있어. 고마워. 후우. 역시 너뿐이군.”

“다행이군. 그럼 죽여주겠어!”

“……그럼 살해야, 자살이야?”

살해인지 자살인지를 하겠다는 다른 나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잔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핸드레이크가 힘겨운 걸음으로 그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나 또한 그를 도와주기 위해 일어서려 했다. 하지 만 내 모습을 본 솔로처는 질겁하여 외쳤다.

“안 돼! 도와주지 않아도 돼. 제발 움직이지 마. 그랬다간 정말로 모 든 예언서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에 적혀 있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 라. 가만히 있어!”

솔로처를 끌어내던 핸드레이크가 의아한 얼굴로 질문했다.

“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인가?”

“맨 마지막 장에는 보통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운운하는 말이 들어가니까요.”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내가 잔해 아래에서 빠져나온 다음 우리들은 잠시 기막힌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를 비추고 있는 조명이 마법에 의한 것이었기에 주위가 어두워 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구실의 정경이 놀랍도록 잘 보였다. 앞서의 재 난이 일어났을 때 떨어지거나 쓰러지거나 깨질 물건들은 다 떨어지고 쓰러지고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재난이 남긴 무질서는 압도적 이었다. 이 연구실에 그런 물건들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물건들이 흡사 종유석이나 석순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천장에서 진득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액체들은 어떤 식성 복잡한 괴물의 위장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도 느끼게 해주었다. 다른 내가 처량하게 말했다.

“이 난장판을 다 치우려면 제가 서른 명은 있어야겠군요.”

“그렇게 많이 나누는 것은 좀 위험하네. 솔로처. 왜냐하면……”

“농담이었습니다. 아니, 일단 합치고 난 후에는 다시는 나뉘지 않을 겁니다.”

“뭐, 그렇게 생각해도 탓할 일은 아니군. 이걸 치우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겠지.”

다른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니요?”

“이런 소란이 일어났으니 누구라도 오지 않겠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만, 이곳은 일반론이 허용되는 곳이 아니다.

내가 말했다.

“이 궁성에 있는 사람들 중엔 올 사람이 아무도 없을걸요.”

“왜?”

“여긴 마법사의 연구실이잖습니까. 목숨이 몇 개쯤 되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이런 무시무시한 곳에 얼굴을 들이밀겠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에 일어났던 소란들은 그런 생각을 더욱 굳어지게 했을 테고요. 아무도 안 올 겁니다.”

그때 다른 내가 말했다.

“한 사람은 제외하고.”

“뭐?”

“한 사람은 제외해야겠다고. 문 쪽을 봐.”

그 말을 따르기 전에 문이 어느 쪽에 있는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가 까스로 연구실 입구 쪽을 본 순간 다른 내가 한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 다. 이 궁성에는 마법사의 연구실에도 태연히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최소한 한 명은 있다.

연구실 입구에 서서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있는 것은 잠옷 차림의 헐 스루인 공주였다.

풀어내린 머리카락은 허리를 덮고 풍성한 잠옷은 열다섯 살치고도 조그마한 몸에서 커튼처럼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에는 뭔가 커다란 것이 끼어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자 그것이 베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헐스루인 공주가 하품을 하더니 베개를 앞으로 내 보였다.

“이건 베개예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얼빠진 얼굴로 공주를 바라 보았다. 헐스루인 공주는 애처롭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말 했다.

“자다가 나왔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가져왔지만, 역시 당신들에 겐 그런 암시를 알아차릴 상식이 없군요. 하긴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 면 한밤중에 별님들이 놀라 하늘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소란을 피우지 는 않을 테죠. 그래서 나는 이걸 집어던지는 용도로 전용하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비겁한 승부는 싫으니, 자, 당신 베개를 뽑아요. 누가 먼저

상대할 거죠? 솔로처? 핸드레이크? 솔로처?

잠깐, 솔로처가 둘?”

헐스루인 공주는 베개를 다시 옆구리에 끼우고는 우리들의 모습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곧 헐스루인 공주는 어머 하듯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착한 솔로처와 나쁜 솔로처?”

“아니요”

“그럼 5월 솔로처와 11월 솔로처?”

흥미로운 이분법이군.

“진짜 솔로처와 가짜 솔로처입니다.”

“정말로 그런 시시한 경우인 것은 아니겠죠?”

“그런 시시한 경우입니다. 죄송합니다.”

“실망이군요.”

헐스루인 공주는 정말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나와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연구실을 둘러본 헐스루인 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진행형인가요, 종결형인가요?”

넋이 빠져 있던 핸드레이크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종결형이요. 희망 사항이 그렇다는 말이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던 거죠?”

“꽤 긴 이야기인데. 공주님.”

헐스루인 공주는 그런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쓰러진 의자 하나를 똑바로 세운 공주는 그 위를 깔끔하게 털었다. 얌전히 의자에 앉은 공주는 베개를 무릎 위에 얹어놓고는 대마법사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핸드레이크는 신음을 흘렸다.

“긴 이야기라고 하면 보통은 앉아서 듣겠다고 하는 대신 일단 사람들을 불러다 준 후에 듣겠다고 할 거요, 공주, 상대가 도와줄 사람들을 필요로 할 땐 말이오.”

헐스루인 공주는 갸우뚱했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은 피해를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재난의 원인으로 의심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피해를 입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그런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그건 우리가 곧 재 난의 원인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당연해서 반박할 수 없는 의심이라 는 점에서 가슴 아프다. 물론 핸드레이크는 반박했다.

“가당찮은 오해로군. 우리는 재난의 피해자지 원인이 아니요. 그러니까……”

환란이 재현되었다. 고맙게도 말에 의해 처음엔 그저 변호를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던 핸드레이크는 그만 이 야기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를 훌륭한 인격 자라고(이를 갈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차마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인정할 사람은 혹 있을지언정 그를 훌륭한 연대기 작가라고 말할 사람 은 없을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정확성을 조금의 주저 없이 희생시켜 극 적 아름다움의 불쏘시개로 삼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우리가 겪 은 것이 연구실의 사고가 아니라 마법계 전체의 비참한 퇴보가 아니었 나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영리한 헐스루인 공주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다.

“상심한 것은 알지만 그냥 실험의 부작용에 불과한 일이 많이 과장되고 있는 것 같군요.”

핸드레이크는 부작용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런 말은 핸드레이크가 아무런 계획 없이 일을 벌이는 사람인 듯한 인 상을 준다.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그런 사람이다. 헐스루인 공주는 넓은 소맷자락으로 눈 주위를 비비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어요. 궁정마법사님 들을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고, 혹 그렇지 않다 해도 졸려서 더 들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도 하루 종일에 밤 시간까지 상당히 소비해서 실험을 하셨다니 좀 자는 것이 좋겠어요. 그것이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에 다가 가는 좋은 방법일 거예요. 더 안전하기도 하고.”

모든 마음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침대에 내 몸을 덮어주려면 먼저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었다. 핸드레이크가 말했다.

“물론 나도 이제 이 바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려면 먼저 솔로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오.”

“그럼 해결하세요”

“그건 나한테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왜요?”

핸드레이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솔로처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공주님. 물론 이 마법은 내가 만 든 것이지만 솔로처에 대한 것이라면 솔로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 아니오. 누가 진짜인지 알아내는 일은 솔로처가 해야 하지.”

그리고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고. 잠깐 동안 잊고 있었던 좌절 이 다시 날아드는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려 할 때 헐 스루인 공주가 이상한 말을 했다.

“그게 왜 솔로처가 해야 하는 일이죠? 행복의 근원은 불행이잖아 요.”

“그게 무슨 말이오, 공주?”

헐스루인 공주는 핸드레이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 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핸드레이크와 다른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주의 행보를 바라보 다가 공주가 나에게 가까워지자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 심정을 배려해서인지 그들이 사용한 어휘 어디에도 공주가 극악무도한 변태 살인광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내용은 없었지만, 그 말 들을 외치는 그들의 표정과 말투는 정확히 그런 의미였다. 심정적으로 동감이었기에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헐스루인 공주는 왼손을 들어 부정적인 말들을 물리쳤다.

내 앞에 똑바로 선 헐스루인 공주는 잠깐 동안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공주의 속마음을 읽는 것보 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공주님. 빨리 멀어지세요. 무슨 불행이 닥칠지 모릅니다.”

헐스루인 공주는 어깨를 으쓱였고, 내 말을 무시했다. 공주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헐스루인 공주는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공주의 입술이 떠난 후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볼을 만지려다가 그것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다른 나와 핸드레이크 또한 괴이 하기 이를 데 없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헐스루인 공주가 입을 열 었지만, 그것은 설명이 아니었다.

“이젠 쉬도록 해요. 솔로처.”

“공주님?”

헐스루인 공주는 자상하게 미소지었다. 열다섯 살 소녀의 미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냥 기쁜 미소도 아니었다. 헐스루인 공주는 조용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나의 곁을 지날 때 헐스루인 공주 는 옆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뻗어, 마치 골목대장이 나무 작대기로 담벼락을 치는 것 같은 동작으로 다른 나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이쪽이 진짜예요.”

다른 나는 소스라치듯 놀랐고 핸드레이크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공주는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입구를 빠져나갔다. 조금 늦게 정신을 차린 핸드레이크가 공주의 뒤를 따라갈 듯 몸을 움 직였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다른 나의 모습을 보고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다른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중지에 낀 반지를 바라보 던 다른 나는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을 본 나는 그가 무슨 일 을 할 작정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논평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핸드레이크가 만류의 몸짓을 할 때 다른 내가 반지를 문지르며 말했다.

“진짜는 하나다.”

나는 하나가 되었다.

결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잠깐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공주의 말을 믿고 반지를 문지른 것도 나였고 뱃속에 불행을 담은 채 불안해하던 것도 나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불행을 내버려 둔 채 합쳐진 걸까, 불행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걸까? 핸드레이크가 알려주 었다.

“저기!”

사부님이 가리킨 곳에는 기억에 생생한 불행이 허공에 둥둥 떠 있 었다. 불행을 목격한 사람의 적절한 반응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나는 환 호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병을 집어 들어 불행에게 다가 가는 핸드레이크를 보고는 나 또한 긴장했다. 핸드레이크가 병 안에 불 행을 가두는 데 성공한 후에야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핸드레이크 또한 병을 바라보며 이마를 닦았다. 불행은 병 안에서 복잡한 변화를 계속하며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핸드레이크는 문득 생 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공주는 어떻게 진짜를 찾아낸 거지?”

다시 한번, 나는 웃고 싶었다. 나는 헐스루인 공주가 어떻게 진짜를 찾아내었는지 몰랐지만, 또한 나는 그것을 짐작하고 있기도 했다. 상반 된 기억 때문에 잠깐 혼란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말했다.

“아마도 제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부님.”

핸드레이크는 내 괴상한 화법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핸드레이크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움직였다.

내가 말했다.

“헐스루인 공주님은 진짜 저를 찾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공주가 진짜 자네를 찾았잖아.”

“아닙니다. 공주님은 진짜 저를 선택하셨지요.”

핸드레이크가 당황한 것만큼이나 나 또한 당황했다. 자신의 기억에 놀라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핸드레이크가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찾아낸 것이 아니라 선택했다고?”

“예. 선택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도 궁금하다. 어떻게? 내가 말했다.

“행복의 근원이 불행이라면, 나의 근원은 너일 테니까요.”

“어? 뭐라고?”

나는 스스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부님의 말씀과 달리 나를 찾기 위해선………… 나의 가장 깊은 곳 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달해야 할 곳은…… 너입니다. 예. ‘너’입니다. 진짜 저를 찾아야 하는 사람은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입 니다. 절대로 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헐스루인 공주님은 저를 대신해 서………… 진짜 저를 선택하신 겁니다. 불행을 먹지 않은 쪽이 진짜여야하기 때문에 그 솔로처를 선택하셨지요. 그러자 그 솔로처가 진짜 솔로처가 된 겁니다.”

“되었다고? 하지만 원래는 뭐였는데?”

“원래요? 똑같은 두 솔로처 중 하나였지요. 사부님이 그렇게 만드셨 잖습니까. 둘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핸드레이크는 불평인지 고민인지 알기 어려운 소리를 내며 웅얼거렸 다. 그러다가 핸드레이크는 눈살을 심히 찡그리며 말했다.

“자네 말인즉슨,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자기가 자신이라 는 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이로군. 그렇다면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 라는 거냐?”

핸드레이크의 질문은 타당했다. 나 또한 그런 의심에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의 일부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자기는 자신의 주인입니다.”

“어째서?”

“값을 치르고 가진 것만 자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물 받은 것 도자기 것이지요.”

“선물?”

“예. 선물이지요. 나는 네가 주는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네게 너를 선물할 수도 있겠지요.”

나와 핸드레이크는 잠깐 동안 내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금 후 궁정마법사와 그의 제자는 동시에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더 이상 말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는 핸드레이크의 손에 들린 병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 손짓에 핸드레이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거니 정리 정돈도 제대로 못하는 제자의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둘 수는 없지.”

“정리 정돈에 대해서는 드릴 말이 아주 많은데……”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 치워야지! 이걸 다 치워 놓고 난 다음에 쉬도록 하자! 그리고 이건 내가 안전한 곳에 보관하겠 다.”

가혹한 노동의 요구에 나는 신음을 흘렸다. 하루 권장량 이상의 재 난을 겪은 후니 그냥 밤과 꿈의 추종자가 되고 싶지만 핸드레이크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기분을 느끼며 마법 빗자루 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 는 핸드레이크의 손을 돌아본 다음 사부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내 예견이 틀리지 않으리라는 직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두서없이 장황한 이야기로 심기를 어지럽혀 드리지 않았나 걱 정됩니다. 백작님. 당시 저는 사부님께서 그 불행을 장래의 쓰임에 대비 하여 비장하려 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쨌건 제가 기억하기로 그 불행은 보기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신비한 효능을 가진 비약이라 말하며 누군가에게 먹이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좀더 교활하게 굴고 싶다면 행복의 근원이라고 맹세하며 먹일수도 있겠지요. 그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여쭙겠습니다, 백작님. 혹 저희 사부님의 비위를 건드리신 일이 있으신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