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4화 : 적과 포로, 어머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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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74화 : 적과 포로, 어머니와 딸


적과 포로, 어머니와 딸

소집한 것도 아닌데 여러 명의 수뇌들이 로메로를 찾아왔다. 그들 중 청함을 받고 온 이는 단 하나, 칠성 대덕뿐이었다.
나머진 포로가, 그것도 마계 수뇌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되는 거물급 포로가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몰려온 자들이었다.
“그래서 어쩔 셈입니까?”
포로가 자발적으로 입을 열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을 한 후였다. 그러자 몇몇이 관심을 표명하며 그렇게 물어왔다.
“대덕께서 맡아주셨으면 합니다만 … .”
로메로는 하룬과 영계를 위해서라면, 마계에 대한 작은 정보라도 얻어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어떤 악랄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보다는 다른 방도를 찾아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목적이 숭고하다 해도 수단이 깨끗하고 정당하지 못하다면 설사 후에 성취했다 해도 지탄과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포로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로메로는 생각했다.
해보는 데까지는 설득해보고 나서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리라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대덕이 물었다.
“제가 어찌하면 됩니까?”
“설득해주세요.”
“해보긴 하겠지만 기대는 갖지 마세요. 때로 한 번 닫아 건 마음의 문은 그 어떠한 힘으로도 열수가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이 되고 맙니다. 어쨌든 만나는 보지요.”
대덕이 로메로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가자 안에 남은 자들의 불만이 이어졌다.
“적에게 저런 예우를 하다니 가당키나 한 일이야?”
“입을 열지 않는다면 열게 하면 될 것을 이럴 때보면 로메로님도 답답한 데가 있다니까.”

로메로를 따라 들어선 작은 방에는 마계의 수뇌 중 하나라는 지위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풋풋하고 화사한 여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대덕은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다 무엇에 놀란 것인지 전신을 파르르 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 걸음 뒤에 떨어져 있던 로메로가 그 모습을 보곤 의아함을 드러낸다. 헤렘도 로메로와 같은 심정이었다.
대덕이 물었다.
“이름이 … 혹시 … 헤렘이 아닌가 … 요?”
대덕의 입에서 ‘헤렘’이란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로메로도 충격에 빠져들었다.
‘헤렘, 헤렘이라니. 그럼 저 아이가 파천님의?’
헤렘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헤르파와 라아그 그리고 헤렘. 이 이름은 하룬의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루시퍼의 양자와 양녀로 마계의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파천과 설란, 라미레스와 대덕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적이지만 적일 수 없는 친숙한 이름.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름 앞에 비극이란 의미를 같이 떠올려야만 했다.
아직은 제대로 부딪힌 것이 아니라 어찌 될지 아무도 장담 못하지만 그 결말이 좋으리라 여기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영계의 사람들에게 자식과 부모란 혈육의 의미는 그다지 친숙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절절함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는 하고 있었다.
“화아구나, 화아가 맞지?”
헤렘은 예전에 자신이 화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이자는 누구인가?
대덕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던 헤렘은 내심 고개를 젓고 말았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노라 확신할 수 있었다.
예전 헤렘은 화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오빠들과 함께 자신의 부모인 파천과 설란 그리고 천마와 적루아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대덕의 모습은 적루아의 모습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덕은 확신했다. 화아가 분명했던 것이다.
“오, 이 일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대덕의 탄식엔 이유가 있었다. 로메로의 눈빛도 심하게 흔들렸다.

로메로의 소집령에 응해 모여든 수뇌들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천을 따라 비밀차원으로 떠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여 있는 자리였다. 설란과 대덕, 제왕들 중 하나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포로에게서 현 마계의 내부 사정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수뇌들은 더할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 앞에 말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강압적인 수단으로 헤렘의 입을 열게 하자고 주장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찌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여기 어미인 설란이 있었고 그 아버지가 다른 이도 아닌 파천이다.
설사 당사자인 파천이 이 자리에 있고 그가 직접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다 해도 모두가 합심해 막아야 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하룬은 마계와 제왕의 군대 소식에 너무 목말라 있었다. 무엇이든 건져내야 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할 어떤 비책을 강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현재의 정세를 잘못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꼼꼼히 따져볼 최소한의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 마계에서 헤렘이 누리고 있는 지위를 감안하면 더할 수 없이 좋을 적임자라 할 수 있었다. 저절로 복덩이가 굴러들어 왔건만 그걸 외면해야 하는 거시다. 대덕에게 말을 전해 들었지만 설란은 아직 화아를 찾지 않았다. 이곳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나무랄 사람이 하나도 없을 텐데 굳이 부득부득 우기며 이곳에 함께 하고 있었다.
로메로는 아까부터 설득해서 얻을 게 없다면 포기하자는 말만 거듭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레고스도 마찬가지였다.
“루시퍼의 마력에 영향을 받고 있으니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 하지만 해봐야지.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적임자는 오직 천주뿐이고.”
설란을 이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란은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자신할 수 없었다. 예전에 겪어본 바로도 그랬었다.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말로 가슴을 적셔줄 수 있겠는가?
설란이 모두에게 하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지금은 … 내 욕심만을 내세울 수 없는 때임을 잘 알아요. 여러분들이 그 아이를 적으로 … 대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그것이 현실이니까, 하지만 저는 … 그럴 수 없어요. 그 아이가 부모를 외면해도 저는 그럴 수 없 … 어요. 어떤 결정을 내리신다고 해도 저는 따르겠어요. 그러니 저희들은 개의치 마시고 … 그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해도 … 여러분들을 원망치는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시선을 피하며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설란의 빈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대덕도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설란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문을 열면 화아가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대덕이 망설이고 있는 설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던지 아니면 지금의 현실에 상심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인지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쌌다. 둘은 같은 심정이었다.
“휴우.”
설란은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달랬지만 눈빛만은 숨길 수 없었다. 벌써부터 눈알이 발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헤렘의 실종을 접한 헤르파와 라아그 그리고 라넷은 하룬이 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수라의 보고가 사실일 가능성이 많았다.
라넷은 보고가 늦게 올라왔다는 이유로 아수라와 나찰들을 문책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쯤 그 일로 엄청난 곤욕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라넷이 물었다.
“어쩔 거야?”
라아그는 헤렘이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확인된 일도 아니잖아. 기다려봐. 헤렘은 돌아올 거야. 반드시 돌아올 테니 걱정들 마.”
라넷은 현실적인 문제를 짚고 나섰다.
“헤렘이 모든 걸 발설한다 해도 본계에 그다지 큰 타격은 없어. 대신 저들이 우리의 현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니 전략을 세우는 데 좀더 유리한 국면이 되는 건 분명하겠지. 그리고 헤렘을 내세워 무리한 요구라도 해온다면 골치 아프기도 하고. 후에 루시퍼님이 이 일을 아신다면 …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거야.”
라아그가 화를 버럭 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설사 헤렘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들 입을 열 것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진해서 열지는 않겠지. 하지만 하룬엔 여러 경향의 강자들이 많아. 입을 열게 할 방법은 우리 수단보다도 더 다양하다고 봐야해. 구출해내는 건 힘들 거고 … 참,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지금껏 말이 없던 헤르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 간다.”
“뭐?”
“무슨 소리야?”
헤르파가 다시 말했다.
“내가 간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미쳤어?”
“그 말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라넷과 라아그는 헤르파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뱉어낸 말일 거라 생각했다.
“헤렘을 적들의 손에 둘 수는 없다. 나 혼자 가서 헤렘을 구해내겠다. 만약 … 살려서 데려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 죽여서라도 데려 오겠다. 어쨌든 내가 책임진다, 그러니 아무 말 마라.”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냐. 너마저 포로가 되겠단 말이야? 그럼 본계는 누가 이끌고?”
“둘이면 충분해. 너와 라넷, 둘이서 잘 협의해서 결정해. 그리고 난 …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온다.”
라넷은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라아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어물쩍 넘어가면 헤르파는 정말로 하룬으로 갈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차라리 구출할 거라면 작전을 짜서 하룬에 침투 가능한 전력을 모두 동원하고 기습을 하는 편이 나아.”
라넷도 차라리 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겠지만 헤렘을 구출해낼 가능성은 그나마 있어보였다. 하지만 헤르파의 의지는 단호했다.
“이 일은 내 일이다. 헤렘을 구출해내기 위해서 전력을 동원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헤르파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수수방관할 수도 없었다.
라넷이 화가 나 소리쳤다.
“너 정말 무책임하구나. 정신 차려, 넌 마계군 총사령관이야. 너 하나의 명령에 본계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해. 루시퍼님께서 네게 전권을 일임했을 때는 그만큼 널 신뢰하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런데 넌 겨우 헤렘 하나에 이렇게 흔들리는 거니? 그런 거야?”
“겨우, 헤렘 하나라고?”
라아그는 라넷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헤르파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라넷이 한 것이다.
“그래. 지금은 전쟁 중이야. 적에게 잡힌 포로 하나를 구해내기 위해서 사령관이란 자가 일시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적진에 뛰어들어 포로가 되겠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야? 헤렘은 죽었어,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버려.”
“닥쳐! 네겐 … 그렇게 쉽게 … 버릴 수 있는 아이인지 모르지만 … 난 아냐. 내 목숨보다도 마계의 운명보다도 내겐 헤렘이 더 중요해.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싸우는 이유가 뭔지 알아?”
라넷의 눈엔 헤르파가 반쯤 실성한 것처럼 비춰졌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냉정하고 침착했으며 흔들림이 없던 예전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라아그가 헤르파의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나섰다.
“그만해. 알았으니 그만 하라고. 자, 둘 다 진정하고 그만들 해. 그리고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방법을 생각해보자. 같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보면 방법은 얼마든지 나올 거라 믿어.”
라넷은 헤르파의 눈 속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운명을 읽었다. 그건 번개처럼 짧은 순간에 지나간 직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라넷은 충격 중에 빠져들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이건 내 착각일 뿐이야.’

떨림을 보이는 설란의 눈과는 달리 헤렘의 눈은 침착했다. 약간 지쳐 보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갑갑한 상황 때문이지 심정적인 갈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란은 좀더 다가갔다.
그리고 헤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나란히 했다.
헤렘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약간은 경계하는 빛도 내비쳤다. 무슨 수작인가를 부리려는 게 아닌가 하는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설란은 헤렘의 손을 끌어다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따뜻했다.
“뭐 하는 거지?”
헤렘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설란은 가만 헤렘의 눈을 들어다보고만 있었다. 헤렘은 설란의 표정에서, 눈빛에서 전해지는 감정이 낯설었다. 둘 사이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그 흐름엔 분석의 잣대로는 불가해한 운명의 끈이 이어져 있었다.
‘눈에서 흐르는 저건?’
그랬다. 헤렘은 눈물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눈물을 흘려본 기억도 없다. 슬프거나 우울하다는 감정의 상태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깊이 젖어본 적이 없었다.
제 손을 잡고 왜 눈물을 흘리는 건지,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도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부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기분이 그다지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화아로구나. 정말, 내 딸 화아로구나.”
헤렘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루시퍼가 어머니라고 했던 자.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모습이 달랐다. 그때는 초라해보였었다. 지금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초췌하고 지쳐있는 모습이어서 그랬을까? 어쨌든 자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알아챈 헤렘이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엄마 … 야?”
놀라운 일이었다. 뒤에 있던 대덕까지도 헤렘의 반응에 놀라워했다. 설란이야 오죽할까!
“그래. 엄마다. 엄마야.”
“왜 이제야 온 거야?”
설란은 서러움에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가슴 밑바닥에 억눌러두었던, 고여 썩어버린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올랐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파도는 설란의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하지만 대덕은 보았다. 헤렘의 눈빛 속에, 한 겹 허물 속에 감춰진 회심의 미소를.
‘저 아이는 화아가 아니다. 루시퍼의 마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헤렘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아이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 이제 … 라도 만났으니 … 되었어. 다시는 … 다시는 내 품에서 떼어 … 놓지 않을게.”
설란은 격정에 북받쳐 뜨겁고, 헤렘은 이와 반대로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지켜보는 대덕은 그렇게 느꼈지만 설란은 제 감정에 젖어 묘한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설란을 헤렘이 불렀다.
“엄마.”
“응.”
“오빠가 기다려.”
헤렘의 오빠라면 헤르파를 말한다.
“오빠가 날 찾고 있을 거야. 나 … 오빠한테 돌아가야 해.”
“환 … 아에게로?”
“응. 환 … 아 오빠한테 가봐야 해. 나 돌아가도 되지?”
설란은 대답을 못했다.
“내가 돌아가지 못하면 환아 오빠가 곤란해져. 엄마도 알 거야. 마계의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내 실수로 환아 오빠가 다칠지도 몰라. 그러니 엄마, 날 돌아갈 수 있게 해줘. 해줄 수 있지?”
설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화아가 돌아가지 못하면 환아가 다친다. 이 말만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어찌 설란이 그렇게 해주겠노라 약속할 수 있으랴!
“안 돼? 그렇게 해 줄 수 없어?”
말 못하는 설란을 대신해 대덕이 답을 했다.
“안 돼. 너는 여기 있어야 해.”
“왜? 난 여기 있기 싫은데 왜 여기 있어야 해?”
“네가 먼저 찾아 왔으니까. 넌 포로야. 포로를 풀어주게 되면 네 엄마 입장이 곤란해져. 그래도 좋니?”
대덕의 되물음에 헤렘도 말문을 쉽게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담아두진 않았다.
“어쩌지 …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오빠한테 큰일이 생길 텐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뭔데?”
“네가 최대한 협조하면 돼. 그럼 널 돌아갈 수 있게 해주마.”
“그만둬. 내가 입을 열 것 같아! 흥, 엄마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어. 우린 적이야, 적일뿐이었어. 뭘 알고 싶은데? 말해줄까? 그런데 어쩌지? 난 아는 게 하나도 없거든. 호호호호 … .”
헤렘은 틀렸다고 생각했던지 말투부터 달라져 있었다.
경멸에 찬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차가운 어조로 설란의 마음을 후벼 팠다.
“착각하지 마. 단 한 번이라도 당신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 같아? 인간들에게서 내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난 받아들일 수 없었어.
내 아버지는 루시퍼야. 내겐 그분 외에는 섬겨야 할 존재가 없어. 그 눈물이 위선이라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내 입을 열겠다고? 얼마든지 해봐.”
도가 지나치다고 판단한 대덕이 설란을 밖으로 이끌었다. 설란은 울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는 듯이.
“보내 줘! 보내 달란 말야.”
헤렘은 설란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악을 써대다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지쳤는지 금세 풀이 죽어 있었다.

헤렘은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자력으로 탈출을 꿈꾸긴 틀렸고 풀어주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각오를 다져두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내 입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닥 기대가 남아 있긴 했다. 좀 전에 찾아왔던 어머니란 자 그리고 헤렘이 인정하진 않으나 자신의 아버지였던 자, 파천. 그가 이곳 하룬의 최고지도자란 사실을 헤렘은 상기해냈다.
‘어쩌면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날 일반 포로처럼 다루진 못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하룬 지도부에 협조하는 척이라도 할까? 그랬다가 기회를 틈타 탈출을 시도해보면 … .’
고개를 젓고 만다.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탈출을 위한 위장이라지만 그런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마계를 배신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다른 데 있었다.
‘지금쯤이면 내 실종을 오빠들도 알게 되었을 텐데 …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면 어쩌지.’
누구보다도 헤르파를 잘 파악하고 있는 헤렘은 그 점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한편 헤르파는 카르마를 만나고 있었다. 그에게 헤렘을 구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침투한다면 들키지 않고 구출해낼 자신은 없었다. 헤렘이 있는 곳까지 가는 건 모르겠지만 무사히 빠져나오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카르마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기대감은 카르마가 아사셀보다 강할 것이란 추측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르마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시큰둥하게 말했을 뿐이다.
“흥미 없어.”
돌아 나오던 헤르파는 결심을 굳혔다.
‘결국엔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헤렘, 조금만 기다려라.’

라아그와 라넷은 더 이상 헤르파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체념하고 있을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룬을 향해 떠나는 그를 전송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라넷이 몇 번이나 강조한 얘기는 이랬다.
“준비를 해둘 테니 언제든 위급한 일이 생기면 내게 연락을 취해라.”
공격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겠다는 라넷과 조심하란 말을 잊지 않는 라아그를 뒤로하고 헤르파는 그곳에서 사라졌다.

빛과 어둠. 극한의 팽창이 대립하는 경계점은 선발대원들을 하나로 잇는 선과 맞물려 있었다.
점차 가중되는 압력이었지만 아직은 견디기에 무리가 없었다. 어둠은 침묵하지 않고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으며, 물러가지 않고 빛에 거세게 저항했다. 수호자와 라미레스, 아난다 등 몇몇이 주요 위치를 점하고 밀려드는 압력을 해소시키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이런 식의 싸움에 신경이 쓰였던지 라미레스가 툴툴거렸다.
“이것 슬슬 짜증이 나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싸움인데다가 끝없는 소모전인 건 말할 것도 없고 결정적으로 위협을 해소할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 답답했던 것이다.
부수고 태우고 찢어놔야 싸움이 끝났던 기존의 상식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 적잖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건 선발대 전원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엔 우습게보았지만 지나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공간은 이길 수 없다.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이 씁쓸하고 억울하고 분했다.
모든 사유하는 존재들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경험을 끌어오기 마련이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똑같은 상황이 있었던가를 찾아보고 없다면 최대한 유사한 조건들을 검토해서 해결책을 마련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수호자의 시도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의 과거 가운데서도 그다지 신통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취한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근원적인 방책은 될 수 없다.’
그로서도 처음 대하는 기이한 성질이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자체가 생명을 얻은 것 같다.’
파괴되지 않는 끈적거림,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신묘한 변화, 끝없는 압박, 점차 가중되는 힘.
결국 선발대가 마지막으로 취한 방법을 서로의 힘을 교류시켜 일종의 보호막을 치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힘의 소모를 막기 위함이었다. 현재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이 될 순 없었다.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보호막과 접한 경계점은 쉬익 쉬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요동치며 꿈틀댄다. 형형색색을 띤 공간은 단일 성질로 이뤄진 것도 아니다. 마치 무수한 생명체가 그 안에서 포효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푸시시식
어느 한 지점에서 첫 번째 위험의 징후가 나타났다. 보호막의 일부가 일그러지며 외부 기운이 조금씩 침투해 들어오는 게 모두의 눈에 분명하게 포착된 것이다. 수호자가 힘을 증폭시켰다.
파악
수호자가 뿜어낸 거력은 일시에 경계선을 백 장 너머까지 밀어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쿠와아아악
꿰애액
기분 나쁜 비명과도 같은 포효소리가 사방에서 크게 울리더니 금세 더 한층 강화된 압력이 선발대 전원에게 골고루 전해졌다.
경계선은 다시 선발대로부터 3장 이내로 좁혀졌다. 잘게 찢어진 불길이 되어 공간의 미세한 틈을 흐르며 거리를 좁혀 온다. 그것을 보고 누가 살아 있다 하지 않겠는가?
일순이라도 방심하면 가차 없이 전신을 태워 버릴 게 분명했다. 선발대 중 비교적 약한 몇은 벌써 힘에 겨운 듯 점차 가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도 놀라운 일이었다. 본신의 진력을 소모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체력이 소진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진력을 끊임없이 짜내고 있다지만 지친다는 건 얼른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놀란 건 그들 자신이었다. 이제야 모두는 상황 급박하다는 걸 체감했다.
“이놈은, 이놈은 우리의 힘을 조금씩 뺏어 가고 있어.”
소군이 질러낸 소리였다. 그녀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충격과 두려움의 기색이었다. 진정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대는 고스란히 수호자에게로 집중됐다. 라미레스가 빠르게 쏟아낸 말은 수호자를 향해 있었다.
“방법이 없습니까? 타개책이 없어요?”
수호자는 답을 내지 못했다.
캬아악
주변 공간의 압박이 심상치 않았다. 발악하듯 몰아붙여 왔다.
“으으으 … .”
선발대원 몇몇의 입에서 견디기 힘들어하는 신음마저 토해졌다. 팡의 전신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가 선발대 중 최초로 반응을 보였다. 옆에 있던 바로크가 그걸 발견하고 작게 말했다.
“견디기 힘이 들면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
팡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럴 수 없다. 작은 힘이라 해도 나 하나가 빠져나가면 분담해야 할 몫이 더 커진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저 상태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겠는가? 쿤사가 다시 거들었다.
“힘을 비축했다가 다시 들러붙으면 되잖아. 어서 하라는 대로해.”
하지만 그 하나가 아니었다. 두름을 선두로 베븟, 로이, 찬다마나, 이레네까지 견디기 힘든 지경까지 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악물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힘에 겨워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다.
팡도 고집을 부리며 바로크와 쿤사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다. 라미레스가 오기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끝까지 한번 해보자. 모두 힘을 내. 우리는 선발대야. 영계의 희망이라는 걸 잊지들 마라.” 수호자가 한발 앞서나갔다. 그걸 본 라미레스와 아난다도 한 걸음 나섰다. 카이로와 페리칸도 반걸음을 디뎠다.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 압력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까?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
거센 바람이 불었다. 선발대의 머리칼이 잔잔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걸치고 있는 옷까지 찢어질 듯 펄럭이게 하는 힘차고 시원한 바람이 몰려왔다.
근원지는 그들이 점하고 있는 공간과 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 변화를 감지하고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자신들을 압박하던 힘이 감소하였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다.
파천이었다. 기다리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등장이 반가웠지만 선발대는 먼저 그 생각부터 했다.
파천의 능력이 절대에 가깝다는 것을 엿보았던 그들이었음에도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저 놀라운 신위를 보라. 파천은 한 손을 들고 마치 천신이라도 되는 양 주위를 쓸어보고 있었다. 선발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렇게도 악착같았던 악마의 울부짖음 같던 정체불명의 기운이 모조리 파천의 한 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카아악
꽤액
귓가를 헤집어놓는 듣기 싫은 괴성이 치역하게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발악에 지나지 않았으며 너무도 무력하게 파천에게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모조리 빨아들인 파천의 손이 한바퀴 원을 그리더니 아래로 내렸다가 힘차게 떨쳤다.
파파파파팟
이번엔 반대로 파천에게서 바람이 뿜어져 나왔는데 선발대원들 옷깃을 가볍게 흔들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신들을 괴롭혀 왔던 압력은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파천이 자신들에게로 다가온다. 입가에 머물고 있는 희미한 미소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한참이나 그렇게 얼이 빠진 얼굴로 있었을 것이다.
“우와.”
“야호.”
소군과 카이로 등 몇 명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는 자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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