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87화 : 파천이 메타트론에게

황제의 검 – 187화 : 파천이 메타트론에게


파천이 메타트론에게

수호자와 선발대의 합류로 연합군은 안정을 찾았다. 옛용에 판드아의 제왕에 수호자까지 가세한지라 메덴에 모인 연합군은 영계에 불어 닥쳤던 환난의 바람이 여기서 멈출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이제 패주했던 적들마저 제거해 불안요소를 잘라버렸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 수뇌는 다른 생각을 가진 듯싶었다.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라미레스였다. 그는 수뇌들에게 카오스를 말하는 동안, 수호자는 옛용과 판드아의 제왕과 함께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이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평화는 요원하기만 하오.”
수호자의 말에 판드아의 제왕도 동의했다.
“물론입니다. 그는 끝가지 포기할 자가 아닙니다. 그가 싸우려 하면 어찌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와의 싸움에 영계 전체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 건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영계를 담보로 원하는 걸 얻으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판드아의 제왕은 지금까지도 메타트론에게 패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부담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맡은 지위가 막중하면 할수록 패배는 더욱 치명적이다. 그의 패배가 아니었다면 어찌 마르시온이 제왕의 권위를 넘볼 수 있었겠는가.
그가 이겼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단 한 번의 패배, 그것이 가져다 준 상처는 너무도 크고 깊었다.
옛용은 붉은빛 중에 머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용천에서 나오지 않았던 그가 분신이나마 보내온 것만으로도 큰 사건이라 할만했다. 옛용은 파천을 말했다.
“그는 왜 아직 오지 않는가?”
수호자가 대답했다.
“곧 올 것이다. 비밀차원에서 수습해야 할 일이 있어 우리만 먼저 왔다.”
“메타트론은 그의 몫이다. 그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누구도 하지 못한다. 카오스도 마찬가지.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그의 싸움이다.
판드아의 제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령체를 완성했다고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하나에 우리 전부를 걸어도 좋단 말인가? 옛용의 신뢰가 그처럼 깊다니…….’
영계에 모습을 보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지금까지 그가 파천의 이름을 들은 것만 해도 수십 번이 넘었다. 아니, 그 이상 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를 말하곤 했다. 옛용도 때때로 그를 언급했다. 수호자도 그를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잔의 철인 유스티안의 설명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었다. 판드아의 제왕은 원령체를 완성한 파천이란 존재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메타트론의 실체를 경험했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천님이 메타트론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수호자는 파천에 대해 이렇게 단언했다.
“그에게 드리운 운명의 무게만 아니라면 그를 이길 자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보이지 않는 한 그가 지닌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메타트론이 제 입으로 파천보다 작다고 시인할 정도로 그는 무한대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가 의도적으로 카오스를 이곳으로 보냈다고 하셨으니 분명 대책이 있을 것이고, 메타트론도 그를 두려워한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파천과 수호자와 메타트론이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판드아의 제왕은 모른다. 수호자는 간략하게 파천의 현 상태를 설명했다.
이들의 시름이 깊어 갈 때 수뇌회의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라미레스가 말한 카오스란 이해불가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고, 메타트론이 주는 부담감 때문이기도 했다. 라미레스는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고 했다.
“제왕의 군대나 마계의 잔당만 신경 쓰면 됩니다. 혹 그들이 공격해 오더라도 방어를 위한 소극적인 공격이지 절대로 과하게 그들을 상대해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만…… 이미 결정된 일이니 될 수 있는 한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제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번 기회에 불안거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일텐데 좀…… 이해할 수 없군요. 대체 누구의 뜻입니까?”
“파천의 당부였습니다.”
“으음.”
“그렇군.”
로메로로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카오스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았으면 합니다만…… 그래야 대처할 방법이 생길 듯합니다.”
라미레스는 난감해했다. 설명을 들었고 당시엔 이해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답하려니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아난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난다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가 이해하고 있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겪은 카오스는 분명한 인격체이면서도 어떤 현상에 더 가까운 그런 존재였습니다. 마령 정도로 이해하시는 게 빠를 겁니다. 그는 우리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절대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것 아냐? 그렇게 절망을 줄 필요까진 없었을 듯싶은데 말야.”
라미레스는 수뇌회의에서 아난다가 한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듯싶었다. 옆에 있던 소군이 아난다를 대신해 항변했다.
“뭐가 지나쳐요? 되려 모자랄 정도죠.”
“소군 말이 맞습니다. 카오스란 놈은 진짜…… 뭐랄까…… 악마란 게 있다면 그놈에게 딱 어울릴 겁니다. 생각만 해도 으스스한 것이…… 앞으로도 꽤나 오래갈 것 같네요.”
카이로는 약간 익살맞게 페리칸의 의견에 자기 생각을 덧붙인다.
“메타트론이라도 한 수 접어줘야지, 아암, 그렇고 말고. 루시퍼는 거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아, 그리고 방금 생각난 건데…… 카오스란 놈과 메타트론을 섞어놓으면 전 무조건 항복할겁니다.
파천이 한 열 명쯤 있다면 모를까, 그 전엔 신이 와도 무조건 그 앞에 가서 싹싹 빌 겁니다.”
“조심해라, 천사들이 듣고 있다가 신에게 가서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그러냐?”
카이로가 장난스럽게 몸을 움찔거린다.
“에이, 설마 아무리 천사들이라도 농담도 구분 못할까!”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앓는 소리를 해댄다.
“방금 전 했던 말은 농담입니다, 농담!”
페리칸과 카이로가 주거니 받거니 장난을 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설란과 대덕이 있는 곳이었다. 헤르파와 헤렘이 당한 일을 들었던지라 설란을 위로하러 가는 중이었다.
연합군은 수련자들의 처소로 쓰였던 건물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설란은 카이로와 페리칸의 익살스런 농담에도 웃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대덕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예전 같았으면 귀계의 칠성과 천상계의 천주 사이에 그려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녀들뿐만 아니라 지금 한자리에 모인 자들은 그런 영계의 관계가 아닌 인간세에서의 인연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더 크게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만약 마계의 유입으로 중단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면 이들은 다시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파천이란 존재를 중심으로 서로 만나게 됐고 서로를 확인했다.
그런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기억을 드러내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가 결국엔 지워버렸을 것이다.
소군은 설란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일부러 예전 인간세에서의 기억을 입에 올렸다. 그녀는 파천을 처음 봤을 때의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솔직히 그때 사부님의 첫인상은 전설적인 천마의 진전을 이었다던가 신임교주라는 뭐 그런 위엄보다는…… 장난꾸러기, 천방지축, 사고뭉치, 고집불통, 이단아 뭐 이런 단어들이 먼저 연상됐어요. 이후엔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땐 사부보다는 오빠나 됐으면 더 좋겠다 이런 생각이었죠.”
“그랬냐? 난 처음 솔직히 뭐 이런 건방진 녀석이 다 있나 싶었는데, 크크크.”
페리칸이 키득거리며 웃고 있자 카이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난 별로 기억이 없어.”
소군이 톡 쏘아 붙였다.
“바보였으니까 그렇지.”
“뭐!”
“사실이잖아. 형아, 히히히히. 바보였다가 제정신이 돌아왔으니 제대로 기억할 리가 없지.”
소군이 바보스러웠던 율극의 흉내를 내며 놀렸다. 점잖은 아난다도 그들의 추억에 동참했다.
“나도 말한 건 많지요. 천마의 무공만 쓰시니 그게 그렇게 섭섭하더군요.”
라미레스가 잘난 척한다.
“그야 네 무공보다 내 것이 아무래도 한 수 위니까 당연하지. 또 모양새가 일단 멋들어지잖아.”
“그런 점에선 제 것도 그다지 뒤지진 않습니다.”
“뭐야? 그럼 지금이라도 한번 해볼까?”
그들이 애쓰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설란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이때 페리칸이 갑자기 설란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주모, 주모께서 상심하시면 속하들이 지존을 뵈올 낯이 없사옵니다.”
“하하하하.”
“큭큭큭.”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맑았다. 서로의 마음은 닿아 있었다. 설란의 슬픔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길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아는 이 하나도 없다.
그날에 모두 웃어보자고, 그렇게 환하게 한번 웃어보자고, 그것이면 좋았다. 웃음 한 자락만으로 충분한, 그것 하나만 가질 수 있어도 행복하.
그들은 지금 웃는다. 울음 섞인 웃음을 바보처럼 실실 흘리고 있다. 우리 가는 곳 어디냐고, 그곳에 가면 좋으냐고,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웃을 수 있느냐고, 누구 하나 물어보는 이 없다. 그저 바보처럼 웃으며 때론 울며 지금껏 기다려 왔다.
길이 있기에 걷노라. 걸을 수 있기에 가노라. 가다보면 나올 것이라 믿으며, 그렇게 억척스레 가고 또 가봤더니 나오느니 한숨뿐, 흐르느니 눈물뿐.
그들의 기다림은 파천에게 모아져 있었다. 눈물 씻겨줄 이,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바보처럼 믿으며 바보처럼 그를 기다린다.
설란이 말했다.
“그가…… 해줄 거라 믿어요.”
라미레스가 확신을 보탰다.
“그라면, 그라면 해낼 것이다.”
활짝 웃는 소군의 입에서 모두를 울렁이게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물론이죠.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지존이잖아요.”

파천이 영계에 들어섰다. 아퀴나스를 제외한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을 대동하고 그가 첫발을 디뎠다.
그는 천사들을 보고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들앞에 대천사장 미카엘과 여섯 대천사가 큰 날개를 펼친 채 나타났다.
둥그렇게 둘러선 그들에게선 친지를 굴복시킬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광휘는 그들 자체로서 획득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배후에 신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헤르바르트는 생각했다.
자신들을 경계하기 위해 천궁이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마카엘이 첫마디를 여는데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아닌 파천을 향해서였다.
“준비는 마쳤습니다.”
오! 이게 무슨 일인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의외의 일에 당황한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파천이 천궁과 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니 뜻밖의 사건이었다.
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대들이 아니면 곤란할 뻔했다. 이 일은 나만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다.”
“과하신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명령을 준행할 따름입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단 하나, 신뿐이다. 파천이 신은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신과 파천 사이에 외부에 알려진 적이 없는 어떤 묵계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파천은 수호자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미카엘.”
“네, 말씀하십시오.”
“이 하늘은 누구의 것인가?”
“모르겠습니다.”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그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이것을 자기 것이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 말이 옳은가, 틀린가?”
“옳지 않습니다.”
“그를 어찌해야 하나?”
“그 생각을 바로잡아 줘야 합니다.”
“어떻게 바로잡지?”
“그것이 틀리다는 걸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러자면 주인을 드러내야 할 텐데. 주인이 누군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저는 모르지만 파천님은 아십니다.”
“그래. 그 일을 해야 한다. 이 하늘과 이 땅이 누구의 것인지 온 세상에 드러내려 한다. 신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닌, 이 세상이 누구의 것인지를 모두가 알게 해야 한다.”
“파천님은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런가?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 좋다. 그래서 자신이 없다.”
“아닙니다. 그 이유 때문에 파천님은 해내실 것입니다.”
“그런가?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네.”
“고맙다, 날 믿어줘서. 다시 한 번 부탁하겠다. 내가 결심하기 전에는 지켜보기만 하라. 내 결심이 서면 그때 그대들 할 일을 하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미카엘과 대천사들이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파천과 미카엘 사이에 오간 대화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다. 파천이 그들의 침묵을 깨트렸다.
“가자.”
“파천! 너와 천사들 간에 과거에 어떤 묵계가 있었던 거지?”
“너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과 난 대화를 나눴던 적이 없다. 나는 그들에게 요청한 적이 없다. 그들은 내게 약속한 바가 없다. 암시일 뿐이다.”
“……?”
파천이 앞섰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풀 길 없는 의문을 지닌 채 파천을 향해 의혹의 시선을 던지며 묵묵히 따랐다.

귀계가 먼저 메덴을 공격해 왔다.
그들만의 단독공격은 의외였다. 그들의 전력은 연합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옛용은 수호자에게 일렀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나섬이 옳지 않다. 저들의 싸움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을 겨루는 다툼일 뿐이다.”
수호자도 동의했다.
귀계의 칠성은 용감했다. 그들을 맞이한 건 선발대였다. 선발대를 라미레스와 아난다가 이끌었다. 그들만으로도 귀계는 어려움을 겪는다.
“한 치도 물러서지 마라. 여기가 우리 죽을 자리다.”
“뒷걸음치지 마라. 더 이상의 치욕을 당할 바엔 죽는 것이 낫다.”
“힘을 내라. 우리도 약하지 않다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주자.”
칠성의 독려하는 외침은 처절했다.
라미레스와 아난다는 선발대를 반구형으로 정렬시켰다. 그들은 귀계의 전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술법도 수단도 그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워낙에 실력차가 나서 단숨에 적을 메덴 밖으로 몰아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발대는 파천의 당부를 기억하며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옛용의 음성이 한창 싸움 중에 몰입해 있던 자들의 귓가를 울렸다.
“무엇을 위해 싸우나. 누구를 위해 싸우는 것인가.”
정신없이 제 몸을 혹사시키는 귀계의 군대에 그 소리가 들릴리 없다. 그럼에도 옛용은 하던 말을 멈추지 않는다.
“옛날엔 모두가 하나였다. 나는 그곳에 그대들과 함께 있었지. 그대들은 너무도 순수해서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기뻤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즐거움을 나눴다. 누구 하나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아니, 그런 개념 자체를 몰랐다.
서로 구별하지 아니하고 높은 자리, 낮은 자리 구분이 없었다.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말하는 내용도 틀렸지만 그 모두가 내겐 한 소리처럼 들렸다. 아름다운 조화였다…….”
옛용의 말은 차차 선율같이 들렸다. 작게 은은하게 들리는 소리가 함성을 누르고 막혔던 귀를 뚫었다. 조금씩 거기에 집중하는 자들이 늘어날수록 멈춰서는 이가 늘어 갔다.
“소망은 하늘에도 땅에도 두지 아니하고 마음은 미움을 보지도 사랑에만 집착하지도 않고, 서로를 느끼며 서로를 원했다. 천사들의 질투가 시작되어 그대들을 때로 유혹도 했지만 그것은 더 큰사랑에 그만 허물어지곤 했었다.
우리가 갖지 못한 사랑이 그대들에겐 무한했다. 지혜는 나의 것이 아니고 원래는 그대들의 것이었다. 내가 그대들에게 주었던 것은 지식이었다. 그 지식 또한 그대들에게서 나온 것. 나는 지금도 그때를 기억한다.
처음으로 하늘을 보며 두려움을 드러냈을 때 그대들의 얼굴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처음으로 땅을 보며 욕심을 낼 때 그대들은 추악해 보였다.
나는 기억한다. 그때부터 그대들은 더 가지지 못해 아쉬워했고 경쟁적으로 다투며 서로의 소유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지나간 때를 아쉬워하며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 기억이 그대을의 자유를 뺏었다. 그 기억이 그대들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 기억이 시간을 만들어냈고, 그 기억이 죄의식을 키워 갔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대들만 변화하고 그대들만 달라지고 있었다. 그 변화가 싸움을 만들었다. 그 싸움은 죽음을, 소멸을, 그대들에게로 가져 왔다.
그리고 그대들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그대들 자신을 잊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다시 묻겠다. 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움을 하나? 이제 잊을 때가 되었다. 그대들을 속박하고 있는 규칙들을 차라리 모두 잊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이 없었을 때 그대들은 행복했다. 그대들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을 괴롭히지 말라. 그대 하나가 세상보다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이제 제발…… 그만들 하라!”
싸움은 멈춰졌다. 왜 싸움을 하다 중단했는지 그들로서도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놓아버리고 싶었다. 손 안에 쥐고 있는 것, 마음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털어내버리고 싶었다.
그때 마르시온이 귀계의 후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전에 없이 흉포한 모습으로 귀계의 사람들을 도륙내며 전진해 왔다.
제왕의 군대 뒤에는 메타트론과 루시퍼 등이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섰다. 드디어 메타트론이 메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드디어 나타났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수호자는 기이한 예감에 전율했다. 그와 하나였다가 둘로 나뉘어졌다. 그 둘은 하나에서 비롯되었기에 공통적인 것도 있었다.
그것들이 서로를 원하는 것인가? 유난히 수호자는 흥분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의 저 차가움이 자신을 향한 비수가 되어 꽂혀 오는 것 같았다.
선발대는 분노했다. 마르시온의 악랄한 손짓은 어김없이 죽음을 부르고 그 현장은 붉게 물들었다. 피는 생명이다. 피가 흘러 죽음을 그렸다. 라미레스가 마르시온의 앞을 막아서고 선발대가 쿠사누스들을 밀어붙였다.
연합군의 진영에서도 강자들이 앞 다투어 튀어나오며 제왕의 군대를 몰아붙였다. 다른 의미의 살육이었으나 그것 또한 엄연한 죽음이었다. 비틀린 존재의 웃음은 그래서 더 흡족했다.
메타트론이 웃는 소리가 메덴의 하늘을 울렸다. 그 소리가 높아질수록 죽어 가는 자의 수가 늘어 간다.
천마이자 바알세불 그리고 라미레스의 이름을 가진 손길은 마르시온을 향해 거침없이 펼쳐졌다. 둘은 처음 격돌했다. 라미레스를 불붙게 한 투지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더욱 강해지는 그의 특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엔 막상막하, 접전이라 할 수 있었지만 충돌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라미레스는 가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마르시온은 라미레스의 싸우는 방식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그도 영계의 강자들이 화신체로 싸우는 걸 즐긴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 대해보니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눈이 핑핑 돌아가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공격이 많았다. 타격 위주의 공격은 그를 무척 당황스럽게 했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건 싸움에 있어 유리한 입장을 선점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였다.
라미레스만큼 싸움을 많이 해본 이는 드물다. 그의 이처럼 풍부한 전투 경험이 유난히 돋보이고 있었다.
“네 놈은 살려둘 가치가 없다.”
쉬쉬식
파팡
정수리를 노리고 위에서 내리꽂히던 자가 어찌하여 밑에서 갑자기 출몰하는가? 분명히 막았다고 여겼는데 왜 그의 펼쳐진 손바닥이 내 가슴을 때리고 있는가!
퍼펑
“끄억. 이, 이놈!”
마르시온은 힘을 사방으로 폭출시켰다. 라미레스가 타격을 위주로 한 공격이라면 마르시온은 범위 공격을 주로 했다.
“이, 이 미친놈.”
자신이 펼친 힘을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온다. 예상치 못했던지라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턱을 걷어차였다.
다행히 그도 호신막을 사용하고 있었다곤 하지만 순간 턱이 박살난 듯한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컥.”
라미레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따라붙으며 위에서 아래로 가슴을 찍고 그 상태로 프리즈마를 폭출시켰다.
퍼펑
갈비뼈가 박살났고 가슴이 너덜너덜해졌다. 마르시온은 정신이 번쩍 났다.
‘이대로…… 가면 난 저놈에게…… 죽는다.’
두려움이었으리라. 마르시온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며 몸을 선회했으며 곧바로 뒤로 몸을 빼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돼 위로 솟구쳤다 다시 뒤로 빠져나간다.
거의 발악적으로 몸을 이동시키고 앞을 바라보니 라미레스는 멀찍이 떨어져서 히죽 웃고 있었다.
“내가 인간세에 있을 때 너 같은 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곤 했지. 지랄 염병을 떨어라.”
마르시온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리가 없다. 하여간 기분이 나쁘긴 했나 보다.
“으아아아아.”
그의 주변에 있던 수하들이 영문도 모르고 그가 뿜어낸 공격에 속절없이 몸이 터져 나가는 비운을 겪는다.
그는 일으킨 힘을 가일층 증가시켰다. 연쇄작용을 일으키는지 폭발은 더 큰 폭발을 불러 왔다. 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인지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아난다와 카이로, 페리칸이 마르시온의 주변을 차단시켰다. 그것을 본 라미레스가 이를 악물며 고함쳤다.
“너 같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해.”
라미레스가 몸을 감싸고 파란 불꽃이 생겨났다. 그는 무모했다. 적어도 마르시온에겐 그렇게 보였다.
“그 짓이 이번에도 통할 것 같으냐?”
마르시온은 라미레스의 입 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는 걸 보았다. 웃고 있다. 뭔지 모르지만 불안했다. 그래서였을까 전 방위로 뿜어지던 힘을 라미레스에게로 집중시켰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파란 불꽃을 두른 라미레스의 몸이 또다시 빨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헉.”
상대를 놓친 마르시온이 헛바람을 삼킨 바로 그 찰나!
마르시온이 공격을 범위 공격으로 전환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라미레스의 갈고리 같은 두 손이 마르시온의 등짝을 파고들었다.
푸욱
“끄어억…… 이, 이럴…… 수가.”
마르시온은 고개를 숙여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푸른 불꽃에 휩싸인 강철 같은 두 손이 가슴 부위 밖으로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라미레스가 마르시온의 귀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쯤 되면 한마디 더 해야지? 믿을 수 없다, 라고 말이야. 자, 이제 약속을 지키겠다. 난 너랑 다르거든.”
촤악
라미레스의 손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했던 말처럼 마르시온을 두 쪽으로 찢어버렸다.
라미레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양손에 프리즈마를 모아 조각난 마르시온의 흔적을 태워버렸다. 허망한 최후였다. 방심한 것도 아니고,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운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하필이면 그의 상대가 라미레스였고 또 하필이면 그런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것이 제왕 마르시온의 최후를 결정하게 된 이유의 전부였다.
쿠사누스들 중 최강이라 불리던, 그것만으로 만족 못해 반란을 일으켜 제왕이 되었던 마르시온의 최후 치고는 너무도 초라했고 비참했다. 그의 죽음은 곧바로 쿠사누스들을 동요케 했다.

싸움은 슬슬 종결지어지고 있었다. 귀계는 메덴 쪽으로 움직여 전투의 범위에서 빠져 있었고, 마르시온을 잃은 제왕의 군대는 급속하게 무너져 갔다.
살아남은 쿠사누스들 중 하나가 외쳤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그들은 메덴으로 진입해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들 뒤를 쫓아나가려는 자들을 아난다가 제지했다.
“그만두세요. 도망가게 내버려두세요.”
쿠사누스들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고 생각했다. 지도자를 잃은 군대는 형편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메타트론에게로 퇴각하고 있었다.
뒤에서 적들이 추격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허겁지겁 도주했다. 그곳에 유일한 방주가 있다는 듯이. 허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구원의 도피처가 아닌 죽음의 선고였으니.
“모조리 죽여라. 하나 남김없이.”
메타트론의 고저 없는 메마른 음성이 살아남은 자들이 가야 할 길을 그들 대신 선택했다. 루시퍼와 아사셀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런 자리에 빠질 수 없다는 듯이 카르마도 뒤늦게 따라나섰다.
쿠사누스들이 죽어 가며 겨우 남긴 마지막 말들은 그들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대변했다.
“이, 이 악마…… 들.”
“이 원통함을…….”
“내가 죽어서도…… 끄억.”
모두가 죽었다. 그 처절한 학살의 현장을 메덴은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너무도 깔끔한 솜씨였다. 한 번 손짓에 수십 명이 죽어갔다. 그들 중 카르마는 특히 어떻게 하면 더 고통을 안기며 죽일 수 있을까를 연구라도 하는 듯이 잔인했다.
차마 볼 수 없었던 헤르파와 라아그가 고개를 돌린 데 반해 헤렘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살짝 붉게 충혈된 의미는 뭘까? 그녀만이 알 일이었다.
메타트론이 메덴 안으로 깊숙하게 접어든다. 그를 막아서는 이 하나 없었다. 그의 뒤에 루시퍼가 따르고 곁에 헤르파와 헤렘, 라아그가 똑바로 정면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아사셀이 오른편에, 카르마가 왼편에 섰다. 선발대도, 연합군의 수뇌들도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다가오는 발걸음은 어디 유람이라도 온 것처럼 한가롭기만 했다.
수호자와 판드아의 제왕이 무리들 가운데서 앞으로 나오자 선발대가 그 옆에 가 섰다.
메타트론과 수호자가 마주 보았다. 둘 사이엔 전에 없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수호자가 먼저 입을 열어 뜻을 밝혔다.
“끝내는…… 해야겠느냐?”
“무엇을 할까? 내 마음을 알 것이니 물음이 덧없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너와 내가 지금껏 달려온 평행선만으로도 부족하냐?”
“내게 구하지 마라. 네가 내게로 오면 된다. 나는 물었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천이 광명을 얻은 것을 대답이라고 한다면 성의가 없는 것이지.”
“끝내 대답이 없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다면?”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무참하게 부셔버린다.”
“그래서 얻는 게 뭐지?”
“내 그리움은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흔들려 후회를 만들고 흔들려 상심을 낳았다.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길.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이리 힘겹거늘 내게 그 이상을 요구하지는 마라.”
“내 기억들은 허무의 공간 속에 흩어져 사라졌거늘 너만 왜 유독 집착하나, 왜!”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반드시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내가 왜 하필이면 이쪽 길을 택했을까? 나도 궁금했던 적이 많았다. 결론이 뭐였는지 아나?
나 역시 피해자라는 거였다. 하필이면 내가 지목되었을 뿐. 난 그의 뜻을 위해 선택된 도구에 불과했던 거야.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그에겐 필연이겠지만 나에겐 우연일 뿐이라서 비극이지.
나는 수단이고 이들 사람들은 목적이고…… 나는 버려졌고 이들은 선택되고 축복 받았다. 그 차이는 크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이유가 될 만큼 말이야.”
“네 말이 모두 맞다 치자. 떠올려봐, 네 처음을. 네가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엔 똑똑히 들린다. 네 슬픔을 나는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아냐. 방법이 틀렸다. 비뚤어진 의지는 이제 너도 모르게 조금씩 망가지고 허물어져 전혀 다른 존재를 만들어냈다. 부정할 수 있나?”
“맞아. 그래서 안타깝다. 나도 중단하고 싶을 때가 많아. 하지만 그래서 내가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 난 확인하고 싶다. 그가 아니면 안 된다. 파천, 그래. 그가 어느 적어도는 내 의문에 답이 되었다는 것도 맞고 그를 통해 이들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너와 나, 옛용 그리고 저 어리석은 천사들까지도 모두 이용물에 불과하다. 왜 그래야 하지? 왜 우리는 항상 두 번째고 왜 우리는 목적이 되면 안 되지?”
“네 주장은 확산될 힘을 잃었다. 아무도 네 의견에 동조하지 않아. 나조차 설득시킬 수 없는 억지요, 집착이다. 네 오만을 언제까지나 참아주기엔 우리 인내심이 바닥났다.”
“잘 되었군. 수호자, 혹시…… 그것 알고 있나? 너와 나는 사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 나는 이들과 날 적극적으로 분리 시켜 날 증명하지만 넌 일치를 통해 잠시 도피한 것뿐이야.
넌 착각하고 있어. 마치 사람이 되었다는 듯이 생각하고 말하지. 이들을 대변하고 보호하고 가르치고 이끌면서 그들 중에 포함되기를 갈망해 왔어. 하지만 넌 결단코 그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래서 고독은 더 커져만 가지.
대지는 입술을 다물었고 하늘은 얼굴을 돌린 지 오래다. 애써봐야 소용이 없기는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 준비된 내 대답은 언제나 한 가지뿐이야.”
“뭐냐?”
수호자는 긴장했다. 설득은 필요 없다. 오래 전부터 메타트론은 이 순간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뜻을 꺾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파천을 통해서 수호자와 승부했다. 그 싸움에선 메타트론이 졌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재를 일정 부분은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 남았다.
“내가 정해놓은 방식으로 싸움은 계속된다. 그가 누구든 날 방해하고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의문이 없을 때까지, 만족될 때까지 내 싸움은 중단되지 않는다.
내 결은 지금껏 유보되었었다. 내 끈질긴 질문에 신이 대답하기를 기다려 왔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침묵했고 그래서 난 그를 부정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건 이제 단 하나. 실종된 신을 대신해 내가 신이 되겠다. 그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겠다.
신은 더 이상 이들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잘 들어, 수호자. 네가 날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들에겐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가져도 된다.
내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통치를 인정하기만 하면 더 이상의 구속은 없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이냐!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가 주어지는 것이지.”
수호자는 할 말을 잃었다. 메타트론의 흥분은 고조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메덴을 흔들 정도로 커졌다.
“먼지는 산이 되기를 재촉하지 않고 바람에 저항하지도 않는다.”
파천이었다. 그가 왔다.
그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을 이끌고 선발대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 소리들을 메타트론의 말이 삼켜버렸다.
“무슨 뜻이냐?”
“거부할 수 없는 순리다. 너 홀로 거꾸로 가려 해도 아무도 따르지 않으니 이뤄질 수 없다. 사라진 모든 것을 생각해 보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라. 네 눈앞에서 사라졌다 해서, 보이지 않는다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제가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해도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네가 헤아리고 있는 것 너머에는 그보다 더 큰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다 보지 않고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주장하지 마라.
신이 침묵하고 있다고 했나? 신은 단 한 번도 침묵한 적이 없다. 신을 찾나? 네가 찾는 그런 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신이 실종되었다고? 눈을 감고서 보이지 않는다고 투정부리지 마라. 신은 네 안에, 내 안에 처음부터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있어 왔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마치 네가 세상의 중심인 듯이 여기지 마라. 너 하나 없어진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세계의 주인이 되겠다고? 신에게서 이 세계를 뺏겠다고 했나?
신은 단 한 번도 이 세계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그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신은 최초의 동인이면서 그 스스로 파동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펼쳐서 이 세계를 만들었고 그는 스스로를 비우면서 우리를 채웠다.
우리 안에 그가 있고 그 안에 우리가 있다. 서로 구별할 수 없는 일체이거늘 어디서 신을 찾는 거지? 그런데 왜 너에겐 신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만나볼 수도 없는 걸까?
왜 너는 버려졌다고 유기되었다고 포기되었다고 느끼는 걸까? 아무리 신이 널 부르고 외쳐도 네가 엉뚱한 곳을 보며 귀 기울이지 않으니 그럴 밖에. 네가 신을 오해하고 있는 한 네게 영원히 신은 침묵하는 것이 되고 만다. 너와는 영원토록 관계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
“괴변이다. 난 신을 섬겼던 존재다. 그와 함께 했으며 그의 뜻을 청종하고 실행했다. 그런 내게 그런 괴변을 늘어놓다니.”
“그래. 네 말도 맞다. 지금도 저 천사들이 신과 함께 하는 것처럼 너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났던 신과 내가 만났던 신이 같을까? 저들 천사 하나하나가 만나는 신이 제각각이다. 그는 너 같은 이가 아니다. 제한시키지 마라.
신을 어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리요, 이곳에 있다 저곳에 있다 하겠느냐! 신은 이 우주 만물 모든 곳에 머물면서 그 자체이며 또한 완전하게 독립된 인격체이기도 하지. 최초의 동인이며 파장이며 개체의 입자이기도 하고, 너도 신이고 나도 신이다.
이 우주를 한 손에 넣고 비비면 신이 된다. 가루로 부서진 것들을 펼쳐놓으면 이 우주가 된다. 아직도 모르겠나?”
파천은 자신의 손 안에 한줌 고운 가루를 만들어냈다. 그는 그것을 허공 중으로 훅 뿌렸다.
“자, 이것을 보라. 이 가루는 흩어져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바닥에 뿌려져 보이지도 않는 가루들이 다시 파천의 손 안으로 모였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물을 만들었다. 물이 섞이자 가루는 하나씩 엉겨 붙으며 덩어리가 되었고 그것은 한 덩이 반죽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가루들이 이제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과 지금이 네 눈에 다르게 보인다 해서 둘은 애초부터 다른 것이라 하겠느냐?
우리도 이와 같으며 우주도 이와 같다.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조건이 충족될 때, 물과 가루가 만났을 때 이 반죽이 된 것처럼 우리도 이처럼 최적의 결합 상태이다. 이 결합이 해체되면 죽었다고 하고 소멸되었다고 한다.
허나 실상은 전체로 환원된 것뿐이며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이런 무수히 많은 반죽덩어리들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네가 그렇게도 갖기를 원하는 바로 이 세계다.
이 세상에 멈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고 멸한 것은 다시 생겨난다. 그 순환의 고리는 그 어디서도 발견된다. 예외는 없다. 또한 독립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개체는 그 혼자서 조재하지 않고 서로 전체 가운데서 교류하고 있으며 그로서 생명을 얻는다.
그럼 궁금하겠지. 왜 신은 자신을 펼쳐서 이런 일을 되풀이할까? 왜 최초의 동인이면서 파장이며 입자이기도 한 건가? 왜 그는 계속적으로 이런 일을 반복하는가?
그럼 하나 묻자. 넌 왜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나? 지향하기 때문이다. 첫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지향하는 것은 신의 의지가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이지. 사랑은 맹목적이다. 사랑은 확장된다. 순수한 사랑엔 이유가 없다. 흐르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생명력이 사라진다.
루시퍼가 없애버린 인간세엔 그와 가장 유사한, 가장 비슷한 모습이 존재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그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가듯 너무도 자연스런 것이다.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의 의지다.”
“그럼…… 카오스는? 카오스는 뭐지? 그런 비틀린 존재가, 또 나와 같은 이가 어떻게 나올 수 있지? 네 말처럼 내 안에 신이 있고, 그런 씨앗이 심겨져 있다면 어찌 신을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이지?
카오스는 왜 모든 걸 파괴시키려 하지? 어떻게 파동이 인격체가 되어 이런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냐! 그 또한 신의 의지란 말이더냐?”
“큰 그림이 있다. 너무도 커서 가까이 가면 무엇을 그렸는지조차 알 수 없다. 전체를 수만 개, 수십만 개로 나눠놓았다고 치자. 그 작은 조각 한 부분을 들고 그 전체를 추측할 수 있을까?
전체의 그림이 아무리 조화롭고 아름다운 걸 표현했다고 해도 그 한 조각의 그림은 형체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수도, 추악할 수도, 의미조차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카오스 자체로만 놓고 보면 그것이 전체에서 필요 없는 조각, 버려도 좋을 조각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있어야 할 위치, 역할의 차이일 뿐, 전체에서 보면 그 역시 버려질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파천은 몇 가지를 더 얘기했다.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은 영원처럼 더뎌 보인다. 하지만 신의 의지 안에서 그것이 동시적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필요 없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단지 그렇게 느낄 뿐이다.
파동의 전달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최초의 동인에서 내게까지 오는 단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신에게는 동시적인 것이 왜 내게는 그렇지 않을 걸까? 그것은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 때문이다.
나와 관계하는 파동의 양은 무한대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시간의 정체다…….
암시가 나를 이루고 있는 핵심의지의 무의식 속에서 선택되어지고 겨루게 되는데 그들 중에서 의지의 현 상태에 가장 적합한 최적의 것을 고르게 되고 이것이 운명이 된다. 그래서 운명은 내 의지에 따라, 파동의 교류 값에 의해 항시 변한다. 그렇기에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에는 반드시 자극과 이탈과 파동이 수반되는데 반대로 이탈하지 않으려는 저항력도 생긴다. 이것이 불안이고 그래서 현존재들은 무의식 중에 신을 끊임없이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파천의 긴 설명은 끝이 났고 그 중에 절반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이것도 자극이다. 씨앗은 심어졌고 언젠가는, 뜻하지 않은 특정한 때에 발아하게 되니 그것만으로 내 사명은 다했다.’
이제는 선택만이 남았다. 삶이란 언제나 선택을 강요한다. 누구도 그 순간을 외면할 수 없다. 좋든 싫든 끊임없이 그 순간을 맞이해야 하며 얼마나 깨어 성실하게 성심을 다해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 파천은 선택을 기다렸다.
이처럼 공교로운 일이 또 있을까? 모두가 메타트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때에 카오스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카오스가 영꼐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비밀차원에서 질릴 만큼 겪어본 선발대는 분위기만으로도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자들은 아직도 메타트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메타트론의 관심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비밀차원의 지도자들도 신경을 썼다. 파천만은 여전히 침착했고 태연했다.
카오스는 마령의 본주 케플러를 메덴으로 이끌었다. 케플러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른다. 플로렌서와 백여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메덴 입구에 다다랐다. 카르마도 카오스가 장악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주목했다.
카르막 덮친 것은 헤르파와 헤렌이었다.
그들 둘은 저항할 새도 없이 카르마에게 제압되었다. 그들 둘을 품안에 안고 파천과 메타트론에게서 신속하게 간격을 벌리는 카르마.
참으로 영악한 자였다. 메타트론이 그를 슬쩍 쳐다본다. 파천도 그를 주시했다.
메타트론이 카르마의 의향을 물었다.
“그 아이들을 어쩌려고 그러지?”
“흐으, 허튼 수작을 부리면 이것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
“네게 하는 협박인가? 그렇다면 잘못 짚었다. 난 그 애들이 어찌 되든 전혀 상관없으니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카르마는 당황했다. 메타트론이 그렇게 나오자 골치가 아파진 것이다. 위협이 돼야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다. 전혀 거리낌이 없다면 인질이 품안에 있어봐야 별 효력이 없었다.
메타트론도 신경이 전혀 안 쓰이는 건 아니었다. 헤르파와 헤렘의 안전 때문이 아니라 카오스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 때문이다.
어쨌든 그로서도 카오스를 제거하든 몰아내든 봉인하든 무슨 수단을 부려보려면 파천의 도움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번엔 메타트론이 파천을 회유할 차례였다.
뻔한 요구인지라 좀 찔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카오스에 대한 대책은 있나?”
“있다면?”
“그를 제거하는 데까지 한시적으로 제휴를 요청하지.”
“제휴라…… 그건 쌍방이 서로 이득을 기대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일 텐데?”
“물론 네게도 이득은 있다. 나와 카오스를 동시에 상대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이득이고…… 필요할 경우 내가 널 도우니 또한 이익이지.”
참 대단한 이득이었다. 메타트론은 본격적으로 파천을 회유, 아니 협박했다.
“잘 들어라, 파천. 이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니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난 너와 수호자와 대립하고 싶지 않다. 너도 알다시피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럴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 나도 최대한 자제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겠다.
영계로 봐서도 내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쁠 건 없지. 끝까지 방해하겠다면 나 또한 그냥 넘어가진 않는다.”
이번엔 수호자가 물었다.
“어떻게 할 거라는 거지?”
“날 섬길 자들은 메덴을 제외하고도 넘칠 만큼 충분하다. 네가 보는 앞에서 이들을 하나씩 소멸해 간다면 과연 네가 견딜 수 있을까? 네 가족, 친구, 동료들을 말야. 넌 그런 걸 견디지 못하지. 난 널 잘 알고 있다.”
“참으로 졸렬하고 치사한 협박이로군.”
수호자는 꼬집는 말을 메타트론은 무시하고 넘겼다.
메타트론의 협박은 파천의 제안을 거절한 것과 진배없었다.
메타트론의 선택을 파천은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신중하게 결정하라.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내게 후회란 없다. 한 번 내린 결정은 번복하지 않는다.”
파천이 이번엔 카르마에게 물었다.
“넌 내게 무엇을 요구할 참이지?”
“좀더 기다려봐. 뭘 요구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니까. 함부로 움직이면 이 녀석들의 생명은 없다. 그러니 가만있는 게 좋을 거야.”
카르마는 이 자리에서 내세울 만한 게 그다지 없는 존재였다. 그보다 강한 자는 수두룩했다. 한눈팔 입장도 아니었기 때문에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거겠지.”
“너희들을 상대할 자는 따로 있다.”
메타트론은 당연히 코모라를 말하는 것이라 여겼다.
“코모라라는 멍청한 비밀차원 놈이겠군.”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메타트론. 그에게 두려운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