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90화 : 완전자의 세계와 최후를 준비하는 사람들
완전자의 세계와 최후를 준비하는 사람들
한바탕 꿈이라면 좋겠다.
꿈에서 깨어 현실에 다다를 수 있다면, 그 꿈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축복 가득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지러이 헤매던 길 돌이켜 이제 돌아왔노라’ 라는 말을 진정 기쁨으로 토해낼 수만 있다면, 하얗게 내려앉는 빛을 옷인 양 두르고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내어 보이며 ‘내 마음이 평안하다’ 고백할 수 있다면.
헤르파는 이제 환아가 되어 있었다. 그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가 했던 말들과 행동들 그리고 슬픔에 잠긴 눈, 저기 싸움터의 중앙에서 빛나는 모습을 하고서 메타트론을 아이 다루듯 하는 아버지 파천을 향한 시선엔 신뢰가 가득했다.
다가온 어머니 설란의 손을 꼭 부여잡고 말 대신 눈빛으로 서로를 담았다. 하지만 부족했다. 참았던 눈물이 양 볼을 적신다.
라아그도 대덕과 라미레스 사이에 서 있다. 그들은 모습은 달라졌지만 마성이 사라져 회복된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난 적을 만났는지 예상 밖의 변수에 부닥쳤는지 파천이 힘을 쓰지 못하고, 메타트론이 연합군을 쳐오기 시작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헤르파는 파천을 불러보고 싶었다. 아빠, 아빠라고. 지금껏 부르지 못했던 부를 수 없었던 것까지 더해 불러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고뇌에 찬 얼굴을 보았다. 헤르파는 기원했다.
‘마지막이라도 좋습니다. 용서를, 용서를 구할 수 있게 해주세요. 부모님께 제가 했던 말들이, 그 모든 말들이 진심이 아니었노라고, 그 말만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는가? 환아는 마지막 남은 한 손으로 화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들은 힘도 잃었다. 루시퍼가 죽으며 그들에게서 마력도 사라졌다.
환아와 화아는 눈을 감았다. 무서웠다. 죽음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그들에겐 두려운 일이었다. 라미레스와 아난다, 카이로, 페리칸, 소군 등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만 언제 메타트론의 손길이 자기들에게 미칠지 모른다. 연합군의 수뇌들 중 쓰러지는 자들을 보았다.
라미레스가 파천을 불렀다.
“파천! 모두 죽일 셈이냐? 네가 막지 못하면 아무도 하지 못한다. 네가 포기하면…… 희망은 없다.”
라미레스는 파천이 생각에 잠겨 있는 걸 보고 포기한 걸로 본 것 같았다.
그와 견줄 이 아무도 없다. 그것은 확인된 바다. 문제는 제왕의 구슬. 그것을 깨트려야 한다. 아니면 뺏기라도 해야 한다.
라미레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해보자.’
라미레스의 몸이 그 자리에서 희미하게 흐려지는가 싶더니 아예 없어져버렸다. 그걸 본 아난다가 짚이는 게 있었던지 탄식했다.
“또다시 되풀이되는구나.”
어느 쪽으로 치우쳐 갈까. 이쪽으로 가면 안전한가? 아니면 반대편인가. 그도 아니면 가지 말까.
가만 서 있으면 되려나. 이런 고통들, 슬픔들, 아픔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겪지 않을 수 없나. 나아갈 뿐 되돌아오지 못한다. 삶의 순간은 끊임없이 전진하고 꼭 그만큼의 흔적을 남긴다.
더러 깨어나 외치는 이 있고, 더러는 아득한 심연에 제정신을 맡기고 어기적대는 이도 있고, 생각일지언정 끊임없이 과거의 좋았던 한때로 회귀하는 이도 있다.
서로 옳다고 믿는 바가 다르며, 가는 길도 달라 저리도 부딪치고 싸우는가. 아난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할 만큼 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다시 파천을 돕겠는가!”
그 말을 들었던가.
소군이 방긋 웃는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거렸는데. 자, 다들 한바탕 어울려보죠.”
그들이 나섰다. 지금껏 설란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렸던 자들이 나선다. 미루어 상황을 살펴 뜻을 정하는 이들이 아니다. 파천이 곤경에 빠졌다. 그러니 일어서는 것뿐이다.
파천과 지금껏 함께 해왔던 동료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아난다를 중심으로 소군, 카이로, 페리칸이 주축이 된 선발대였다.
라미레스는 벌써부터 메타트론의 배후를 노리고 접근 중이었다. 수호자의 힘을 교묘하게 비틀어버린 메타트론의 여력이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 돼 있는 판드아의 제왕을 다시 구겨버렸다.
“커억.”
그는 또 일어섰다.
“이래 봐도 원령체다. 너는 예전에도 날 죽이지 못했다. 얼마든지 받아주마.”
벌떼같이 덤벼드는 사람들. 죽여도, 죽여도 몰려드는 사람들. 물리쳐도, 물리쳐도 그만큼 채워지는 사람들.
메타트론은 파천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젠 정말 질려서 쓸어버리고 싶은 맘뿐이었다.
“지겨운 것들.”
제왕의 구슬을 제 생명인 양 한 손에 꽉 움켜쥐고서 한 명씩 불거져 나오는 자들을 해치운다.
모두는 서로 제 곁을 내주지 않으려고, 먼저 죽으려고 덤비는 자들 같다. 그것이 어찌 공을 세우려고 전장을 누비는 자들과 비교함이 마땅하겠는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제 자신이 죽어 잠시라도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일념이었다.
전세를 찬찬히 살며보면 코모라는 연합군의 외곽을 치고 있었고, 메타트론은 적극적인 학살을 주도하기보다는 파천에 대한 위협용으로, 또는 제 분수도 모르고 먼저 덤벼드는 자들만 상대했다.
점차 쓰러져 가는 시체들이, 생명 놓는 자들이 즐비해져 갔다.
연합군의 수뇌들이고 지휘를 받는 자들이고를 떠나, 형시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그들은 규칙 없이 마구잡이로 덤벼들었다.
파천은 그 처절한 참상의 현장을 넋 놓고 본다. 그러다 환아와 화와, 설란과 눈이 마주쳤다.
수호자가 메타트론의 앞을 막았다.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메타트론. 그럼 또 뒤를 잡는다. 맞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메타트론을 잡을 방법이 없다.
이때 라미레스의 회심의 일격이 메타트론의 등을 가격했다. 그 순간 라미레스의 다른 한 손이 제왕의 구슬로 뻗었다. 하지만 메타트론이 그 정도 경계심도 없겠는가. 라미레스가 어낙에 출중해 얻어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생명인 구슬을 놓칠 만큼 허점이 많은 건 아니었다.
되려 메타트론의 역습을 허용해 라미레스는 훌훌 날아갔다.
수없이 뇌어보아도, 아무리 아니라고 해봐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있다. 메타트론을 라미레스가 넘지 못하듯이 선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침 라미레스로 인해 기회를 얻은 선발대가 쿠사누스의 날개를 활짝 펼친 채로 메타트론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집중시켰다. 메타트론은 공중 높이 뜬 채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무모한 자들을 응시했다.
“흥.”
콰콰콰쾅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듯 떨쳤는데도, 보호막과 화신체에도 불구하고 땅 속까지 파고들며 처박혔다.
그들은 다시 일어서고자 바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하나씩 둘씩 일어섰다.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일어서고 또 일어설 것이다. 메타트론은 슬슬 짜증이 났다.
수호자의 공격만도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인데 다른 놈들까지 귀찮게 하니 부아가 났던 것이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메타트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메타트론이 사라졌다. 갑자기 공격 목표를 잃어버린 자들이 우왕좌왕했다.
파천은 한곳에서 구슬을 깰 수 있는 방법에 몰두해 있었다. 그가 껴서 돕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는 지금 사력을 다해 그런 충동을 이기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예기치 못한 변수는 그의 치밀한 계획에도, 있을 수 있는 모든 변수를 포함한 계획에도 지금의 상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지금대로라면 그가 준비한 마지막 계획도 물거품이 된다. 무조건 제왕의 구슬을 없애야 승부가 가능해진다.
파천도 메타트론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가 어디로 움직였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방비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메타트론은 환아와 설란 등의 뒤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여길 봐라. 그리고 파천, 너도 여길 봐라. 모두 멈춰!”
모든 이들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멈춰 섰다. 코모라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왜 저걸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한탄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메타트론은 비열한 본능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를 제어해줄 마음의 고삐는 풀어버렸고 들끓는 격정을 재울 방법은 없다.
“참으로 지금 상황과 어울리는 제격의 인질들이군. 이들의 죽음이라면…… 내 제안을 거부한 네게 적당한 선물이 되겠군. 어떤가, 내 자상한 배려가.”
메타트론은 웃었고 지켜보는 자들은 뼈아픈 울음을 삼키고 있다. 수호자가 외쳤다.
“그만두라, 메타트론. 그들에게 손대면 너도 죽는다.”
“호, 그럼 지금까지 날 죽이고자 공격한 게 아니란 말이었군. 그러셨어? 그냥 형식적으로나마 저들을 지지한다는 생색이나 내려고 그랬다니 어쨌든 반갑군.”
메타트론은 수호자를 비웃고, 수호자는 비열한 행동마저 서슴지 않는 메타트론을 경멸했다.
“파천은 하지 못하지만 난 할 수 있다.”
“뭘?”
“난 이제 널 보는 것도 너와 대립하는 것도 신물이 난다.”
“이대로…… 네 눈앞에서 사라져주지.”
“……!”
“못할 것 같으냐?”
수호자는 지금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은 피식 웃었다.
“자살하시겠다고? 하하하하.”
믿지 않는다.
“저기 카오스는 어쩌고? 그리고 파천이 죽으면 저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얌전하게 여기서 물러날 것 같으냐? 마음대로 해봐.”
수호잔는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제발, 그런 비열한 짓은 하지 마라. 넌 이렇지 않았다. 적어도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지금껏 싸워 왔다. 그런데…….”
“됐다. 그만해. 저들을 봐라.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겠다는 날 향해 저주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날 증명하기 위한 싸움이, 최후의 승리가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난 지금껏 그어놓은 선을 지켜왔고 단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혼자다. 천궁에서 쫓겨나 사람들 틈에 숨을 때처럼 말야. 생각해보니 나 혼자 아무리 애써보아도 후에 날 인정해줄 존재가 하나도 없더란 말이야.
이제는 나도 내 본능에 충실하겠다. 너희들이 아프면 난 희열을 느끼고 너희들의 고통으로 위로받고 너희들의 슬픔으로 난 만족하겠다. 이제부터 그러기로 했다. 이 아이.”
환아의 머리를 한 손에 움켜쥔 메타트론.
“이 아이는 루시퍼의 소유물이었지. 루시퍼의 것이면 내 것이지. 나머지 이 두아이들도 마찬가지고. 파천에게 물어보지.
파천 제 생각은 어떠냐? 내가 이 아이들을 죽인다 해서 네가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일은 없겠지? 내 것을 내가 어떻게 쓰든 네가 관여할 일은 아니잖아?”
파천은 환아의 볼을 적시고 있는 눈물을 보았다. 그때도 그랬었다. 잘못을 해 파천에게 호되게 야단맞고 굵은 눈물을 펑펑 쏟았던 적이 있었다.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소리. 나는 아직 잊을 수 없다.’
“아…… 빠.”
환아가 파천을 불렀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아들의 부름인가. 파천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환아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래 말…… 해라.”
환아는 눈물을 쏟곤 있었지만 울먹이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엔 무서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환아는 메타트론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말했다.
“전 아빠를 믿어요. 만약…… 이대로 죽게 된다 해도 아빠 잘못이 아니잖아요. 원망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전 지금껏…… 단 한 번도 원망해본적도 없어요.
저, 다시 우리들 집에 가보고 싶어요. 여긴 너무 낯설어요. 다시 갈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올까요?“
파천은 한동안 말을 못했다. 라미레스가 악을 써댔다.
“메타트론, 나와 싸우자. 아이들을 놔주고 나와 싸우자. 아니, 아니다. 날 죽여라. 내가 인질이 되겠다. 그 아이들은 제발…….”
역시나 인질이 되어 있는 설란의 항변이 이어졌다.
“우리 모두를 죽인다 해도 당신 뜻은 이뤄지지 않을 거예요. 저 많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마찬가지죠. 당신 의지를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다면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죠. 안 그런가요?”
“흐음.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도 너희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잖아. 그러니 이보다 더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너희들을 용납하고 너희는 안 된다고 하니 말이야.”
“신은 당신을 용납하는데 당신은 그러질 못하는군요. 그러니 우리가 당신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죠.”
메타트론은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대덕이 말을 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해보세요. 당신이 상대해야 할 존재는 신과 파천이에요. 나머지는 당신의 머릿속에서 지우세요. 그런다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죠.”
카오스가 메타트론을 비웃었다.
“마음을 모질게 먹기에 난 또 이제야 제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 그렇게 여려서야 뭔들 이루겠어? 자, 네 손으로 못하겠거든 그들을 내게 넘겨라.”
가까이 오는 카오스. 그 전에 파천이 먼저 움직였다. 파천은 메타트론을 노려보며 한자 한자 뱉어내듯 힘주어 말했다.
“다시 해보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이들을 죽일 테니 네가 막아라. 그러면 되겠구나.”
그건 억지였다. 파천이 설사 방법을 찾았다 해도 구슬이 깨지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면 아이들과 설란 대덕은 죽어있을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다.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
파천은 마지막 결행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느꼈다. 더 이상 지체하면 더 큰 피해가 생긴다.
“너도 날 이기지 못하고, 나도 널 이기지 못한다. 저들도 마찬가지. 너희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가지고 날 위협할 수 있겠다고 믿겠지만 천만에! 옛용, 듣고 있나?”
“말하라.”
파천이 갑자기, 뜬금없이 용천에 있는 옛용을 부르지 않는가?
“부탁이 있다.”
메타트론은 때 아닌 파천의 엉뚱한 말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옛용의 침묵이 길어지자 파천이 재촉했다.
“완전자의 세계를 열어 다오!”
메타트론이나 카오스 같은 이들에게도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건 있었나 보다. 절대로 그럴 것 같지 않던 이들이 허둥댄다. 메타트론이 다급하게 말했다.
“완전자의 세계를 열라니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중 하나인 헤르바르트도 얼굴이 핼쑥해졌다.
“완전자의 세계가 열리면 어찌 되는지 알고서하는 소린가? 그리고 옛용이 완전자의 세계를 열 수 있었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어떻게 돌아가는 분위기지?]
[보아하니 저들 간에 이미 약속이 있었던가 본데.]
[단순히 협박하기 위해서인 것 같진 않다. 여기 그냥 있어도 되겠나?]
[설마하니 정말로 완전자의 세계를 열까?]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메타트론이 옛용을 불렀다.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나?”
“약속한 적은 없다. 파천은 내게 네 요구를 들어주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요구해 올 줄이야.”
“그랬…… 군. 그러니깐 지금 그걸로 날 위협하는 거냐, 파천! 그런거냐? 하하하, 공멸하자고? 바라던 바다. 어디 해보시지. 옛용, 파천의 말대로 완전자의 세계를 열어. 모두 다 같이 소멸하는 거야. 하하하하하.”
파천이 재차 옛용을 재촉했다.
“완전자의 세계를 열 생각이 없나? 그런 건가?”
옛용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도 지금껏 상황을 유심히 살펴 오기는 했다. 그리고 예전에 둘에게 모두 그러한 약속을 한 적도 있었다.
정확하게 하자면 파천은 메타트론의 요구를 들어주라고만 했었다. 허나 그것이 곧 완전자의 세계를 여는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요구를 해오진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완전자의 세계를 열면 세계는 사라진다. 펼침은 중단되고 전체로 환원되어버린다. 초기화! 그것을 파천이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니 옛용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뜻에 동참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민을 거듭했다. 파천이 자기에게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옛용이 뜻을 밝혔다.
“파천, 완전자의 세계를 열면 저들도 삶을 잃는다. 너희들의 싸움에 저들까지 휘말리게 해 기회를 잃게 할 순 없다. 정말 그것을 원한다니…… 실망이다. 메타트론도 원치 않는 걸 네가 원하다니 광명을 얻었다는 네가 어찌 그런 요구를 해올 수 있지?”
“나를 신뢰할 수 없나?”
“그것과는 별개다. 난 너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완전자의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지가 메타트론에게 예속되는 한이 있어도 기회는 이어져야 한다. 외부의 힘으로 저들의 삶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 네 요구를 거절하겠다.”
파천은 사실 옛용이 이렇게 나올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 또한 집착을 끊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핑계를 대지만 그 역시 이대로 세계가 초기화되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옛용이 거절하리라 짐작했다면 다른 방법도 준비해뒀을까?
메타트론은 참으로 애석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네 마지막 시도가 허사가 되었구나.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완전자의 세계를 여는 방법은 또 있다.”
믿기 힘들었다. 옛용도 믿지 않았다.
“미카엘!”
미카엘의 큰 음성만이 메덴을 울렸다.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됐지?”
“준비는 끝났습니다.”
“고맙다.”
메타트론이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
“완전자의 세계는 다른 방법으로도 열 수 있다. 사람들과 천사들의 염원이 모아지면 완전자의 세계는 열린다. 왜 옛용만이 그일을 할 숭 있는지 아는가?”
그걸 알고 있는 이 하나도 없었다.
“옛용은 천사들과 사람의 중간적인 존재다. 그 둘을 이어줄 수 있는 존재지. 왜 옛용을 지금도 용천에 가둬뒀을까?
너희들은 자유로운데 왜 그만 가둬두고 감시 받았을까? 그가 완전자의 세계를 열 수 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그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이 세계를 언제든 멸망시킬 수 있다는 사실로 시험받아 왔다. 그 막중함 부담감에 스스로 지운 짐까지 지고서 얼마나 버거워했을까 짐작이 간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어느 때나 완전자의 세계가 열리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완전자나 신, 둘 중의 하나가 동의해야만 완전자의 세계는 열린다.
완전자는 동의할 수 없고, 신은 침묵한다. 그러니 완전자의 세계는 결정된 때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
“……?”
그럼 무얼 어쩌겠단 말일까? 열리지 않는다면서 그것을 열겠다니. 메타트론은 그때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너, 네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래. 역시 판단이 빠르군.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람들과 천사들의 염원을 한데 모아 완전자의 세계를 열 수 있다.”
파천은 곧장 영계에 퍼져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메덴에 있는 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메타트론은 확신할 순 없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고 판단했다. 지금 인질들을 붙잡고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만에 하나라도 파천의 말이 사실이라면 완전자의 세계는 열릴 것이고, 그 순간 모든 건 사라지고 만다.
다급해진 건 카오스나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궁지에 몰린 자들은 뜻을 하나로 했다.
“힘을 합해 파천을 죽이자.”
제왕의 구슬이 있는 한 파천의 공격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무기력했다. 자신감을 얻은 자들이 파천을 향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버려두라.”
파천은 자신에게 염원을 보내달라는 부탁만 되풀이했다. 라미레스가 모두에게 파천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파천을 믿는다면 그 뜻에 따르자.”
세계의 공멸. 그것을 염원하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을까? 천사들의 염원이 파천에게로 먼저 전달되었다.
파천은 눈을 감고 원령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그러자 온 세계에 가득한 혼란한 사람들의 마음과 여과 없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아직 불안해하는 자, 의심하는 자, 강력하게 반발하는 자 등. 그들의 의지는 제각각이었다. 파천은 다시 영계 전체의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호소했다.
“완전자의 세계를 열면 이 세계는 사라진다. 이 세계에 속한 그대들도 모두 사라진다. 허나 믿어라. 그 사라짐은 잠시일 뿐이다. 나를 신뢰할 수 없다면 신을 신뢰하라. 그리고 그대들 자신을 신뢰하라 그 믿음으로 내게 염원을 모아다오.”
조금씩 전달되는 염원의 양이 커졌다. 메타트론의 공격이 먼저 시작됐다. 파천의 원령이 제한 받고 있었기에 방어도 신통치 않다.
집요한 공격이 파고든다. 파천은 뭇매를 다 감당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염원의 전달이 더뎠다. 서서히 늘어나곤 이었지만 기대치에 비하면 턱도 없이 적었다. 그것만으로는 완전자의 세계를 열기엔 역부족이다.
메타트론과 한때는 동료였던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적으로 마주서야 할 운명의 숙적 카오스의 매섭고 서늘한, 적의에 찬 공격이 연달아 파천의 전신을 두드렸다.
터지고 뒹구는 동안에도 파천의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는 사람들의 신념에 집중했다.
조급해하는 적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염려와 근심을 보았다. 그런 중에서 끊임없이 보내지는 염원을 또한 느꼈다.
파천은 제왕의 구슬을 슬쩍 쳐다보았다. 먼저 처리해야 한다. 원령을 결집시키고 흡수하는 원리를 역으로 짚어 가다가 그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제왕들이 이것을 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원령체였던 그들이 굳이 이런 걸 만들어 위험을 불러올 이유가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들의 대립 가운데서 제왕들은 느꼈던 것이다. 불완전한 원령체로 인한 폐해가 어느 정도로 크고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그들은 이것을 통해 후세에 있을지 모르는 불완전한 원령체로 인한 혼란을 예방하고 견제할 목적으로, 이것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완전한 원령체라면 그 곤란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불완전한 원령체와 완전한 원령체와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집중의 차이였다. 순수한 집중은 잡념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순수한 집중으로 일으킨 원령은 특정의 단일 성질로 대표되지 않는다.
원령의 결합. 완전한 원령체가 아니면 원령 간의 결합을 시도하다 그 충돌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면 원령화가 진행된다. 원령의 결합은 그처럼 원령체에게도 고도의 정밀한 작업이었다.
파천은 원령의 결합을 시작해 갔다. 결합은 내부적으로 진행되어야만 했다. 의지의 선행이 먼저 있은 뒤에 외부적으로 표출돼 야 구슬의 영향권에서 자유롭다.
그 전에 표현되면 소용이 없다. 파천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씩 분리시켜 갔다. 감정상태를 안정시켰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자신을 놓아버렸다. 이제 그에게는 목적도 그 목적을 지탱하고 있는 의지도 지향도 사라졌다. 그는 그로서만 존재했다.
무엇과 관계된 그가 아닌 처음의 순수한 동기만이 그 안에 남았다.
그는 이제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초의 자극을 받아들이기 위해 막 의지를 개방시키는 상태와도 같았다.
그 순간 원령이 하나가 된다.
원령은 즉각 뒤섞여 충돌 없이 새로운 원형을 만들었고 그것을 모방한 새로운 변형들이 생겨났다.
연쇄적인 결합과 분해는 무한히 확장돼 갔다.
이런 중에도 메타트론 등의 공격은 파천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어느 시점이 되자 마치 제왕의 구슬이 파천의 원령을 삼켜버렸듯이, 자신들의 타격이 파천에게 그대로 흡수돼버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변화는 그들을 긴장시켰고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메타트론의 손에 들려 있던 구슬에서 또다시 푸른 용과 붉은 용이 출현했다.
두 마리의 용은 처음의 싸움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 메타트론은 알 수 있었다. 그냥 의미 없는 영상이 아니라 그 싸움의 결과가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이 크다는 것을.
푸른 용은 점점 더 커져 가더니 급기야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가 되어버렸고 붉은 용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결국엔 푸른 용이 붉은 용을 삼켜버렸다.
창
구슬에 금이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다.
메타트론은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파천이 자신들을 향해 고요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끝났다.’
예감은 빨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것이 있었다.
파천은 카오스의 실체를 담고 있는 코모라를 먼저 노렸다. 머뭇거리는 코모라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입이 쩍 벌어지며 검은 피를 쏟아낸 코모라는 힘없이 쓰러졌다. 그때 분리가 일어났다. 파천은 외부를 차단시켰다. 카오스를 가두기 위함이었다. 카오스의 실체는 형체조차 분명치 않은 검은 안개 같았다.
“흐으으으, 키케로 널 얕본 것이 통한의 실수였다.”
그걸 이제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메타트론도 공격을 멈췄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도 팔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더 이상 공격해본들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오스가 메타트론을 다시 유혹했다.
“너의 몸을 내게 다오.”
메타트론은 거절했다.
“네놈을 받아들일 바엔 나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겠다. 파천, 네가 이겼다. 완전자의 세계를 열면 어차피 사라질 운명, 저항해봐야 소용없겠지.”
카오스가 외쳤다.
“메타트론을 죽이면 키케로는 소멸한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죽어버린 희망의 불씨를 힘차게 당긴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메타트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잊어버린 게 있었다. 파천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그가 메타트론의 소멸을 용인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