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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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10화


제9장. 신목오호(神木五號)

그날 밤.
진산월은 남들이 모두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다음 조용히 임영옥의 방을 찾아갔다.
그가 그녀의 방문을 조용히 두드리자 안에서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진산월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임영옥은 아직 옷도 벗지 않은 채 침상머리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진산월이 조금 전 아무도 모르게 그녀에게 살짝 오늘 밤에 찾아가겠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 자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촛불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다.
어두운 밤. 흐릿한 촛불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진산월은 이제껏 팔년 동안 수백, 수천 번이나 그녀를 보아왔으나 깊은 밤에 금시라도 꺼질 듯 흔들거리는 촛불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만큼 자신을 매혹시키는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진산월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임영옥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사형이 저를 보자고 한 건 오후에 사형이 운자개를 따라갔던 일 때문인가요?”

진산월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사매는 눈치가 빠르군.”

임영옥은 진산월이 운자개와 함께 어디론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에는 필시 곡절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진산월이 밤에 조용히 임영옥을 찾아온 것은 그때의 일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한데 진산월은 왜 굳이 다른 사람들 모르게 임영옥에게만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때 나와 운자개가 누군가의 전음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는 건 알고 있지?”

“그래요.”

“사실은… 그때 내게 전음을 보낸 사람은 사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

“그가 누군데요?”

“악자화(岳子華).”

진산월의 음성은 조용하고 나직했으나, 임영옥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렸다. 그녀는 아름다운 봉목(鳳目)을 크게 뜬 채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되물었다.

“악… 사형(岳師兄) 이라고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영옥의 눈빛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성품은 차분하고 침착해서 좀처럼 놀라거나 경동(驚動)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악자화’라는 한 마디에 이처럼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심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악자화!

그 이름은 임영옥과 진산월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특히 임영옥에게는 더더욱 잊혀질 수 없는 이름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악자화를 만나게 된 과정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산월이 악자화의 전음을 받은 것은 막 그가 후원으로 뛰어들어 남봉 엄쌍쌍을 암습하려는 운자개를 제지한 다음이었다. 운자개는 분노한 함성을 내지르며 그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때 그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곧 동쪽으로 나와라.”

밑도 끝도 없이 들려온 그 음성에 진산월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장문사형?”

정해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진산월은 그 전음이 자신에게만 들려온 것임을 깨닫고 막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그때 갑자기 운자개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들을 힐끗 노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금시라도 덤벼들 듯 하던 운자개가 돌연 밖으로 나가자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운자개도 전음을 받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전음의 주인은 운문세가의 고수란 말인가?’

그가 순간적으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다시 예의 그 전음이 들려왔다.

“무얼 망설이느냐? 지금 당장 나오너라.”

그 음성을 듣자 진산월은 마음을 굳히고 정해와 임영옥을 돌아보았다.

“곧 돌아올 테니 이곳을 잘 지키고 있거라.”

이어 두 사람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방을 벗어나 반쯤 무너진 담장을 훌쩍 뛰어 올랐다. 한데 그가 막 담장 위에 올라서려는 순간,

쐐액!

갑자기 어디선가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차가운 섬광 두 줄기가 진산월의 양쪽 관자놀이를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섬광의 날아드는 속도가 워낙 빠르고 갑작스러웠던지라 진산월이 기척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섬광은 그의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진산월은 황급히 소맷자락을 휘둘러 그 섬광들을 떨어뜨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갑자기 근처의 멀지 않은 숲속에서 회색 그림자가 번뜩이더니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던 두 개의 섬광이 맥없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버리고 말았다.

따땅!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십여 장 밖으로 튕겨진 섬광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리검(袖裡劍)이었다. 회색 그림자는 두 개의 수리검을 쳐내며 빠르게 진산월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진산월은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따라 오너라.”

진산월은 그 음성이 조금 전에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것과 같은 사람의 것임을 알아차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십여 장 밖에서 운자개가 허겁지겁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운자개는 무언가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진산월은 조금 전에 자신을 암습했던 사람이 바로 운자개였음을 알아차렸으나, 그가 대체 무엇을 보고 저렇게 놀라고 겁에 질려 달아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나 더 이상 생각을 굴릴 겨를이 없었다. 모든 의문은 자신의 앞을 질주하는 회색 그림자를 따라가면 풀릴 것이다.
진산월은 이렇게 생각하며 주저없이 회색 그림자를 따라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빠르군.’

원래 신법(身法) 방면에서는 별다른 소질이 없던 그였다. 종남의 제자들 중 신법이 가장 빠른 인물은 방취아였다.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신법에 관한 한은 아주 특출난 재질을 가지고 있어서 종남의 비전(秘傳)인 비연신법(飛燕身法)을 상당한 경지까지 익히고 있었다.
진산월은 예전에 방취아가 머리에 물동이를 지고 한 번에 오장을 날아가는 것을 보고 굉장히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을 날아가고 있는 회색 인영은 한 걸음에 적어도 칠팔 장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임이 분명했다. 벌써 오리(五里) 가까이나 치달려 왔는데도 상대는 멈출 줄을 몰랐다.
진산월은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와서 숨쉬기도 힘이 들 정도였다. 동쪽으로 얼마쯤 가니 하나의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났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던 회색 인영은 그 대나무 숲이 시작되는 초입에 도달해서야 겨우 몸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짙은 회의(灰衣)를 입고 키가 훤칠한 사나이였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 허리아래까지 늘어 뜨렸고, 양쪽 소맷자락이 유난히 넓어서 더욱 시선을 끌었다. 회의 사나이는 번쩍이는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회의 사나이의 얼굴을 본 진산월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졌다. 회의 사나이는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를 만난게 뜻밖이냐?”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런데도 너는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목소리를 듣고 혹시 당신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소.”

회의 사나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했다.

“확실히 너는 예전부터 좀처럼 놀라지 않는 성격이었지. 하지만 오 년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는데도 단번에 내 목소리를 알아듣다니 과연 대단하구나.”

회의 사나이의 이름은 악자화(岳子華)라 했다. 섬서성(陝西省) 보계(寶鷄) 태생으로, 진산월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그는 진산월보다 육개월 늦게 종남파에 들어왔으며, 어린 진산월과 임영옥을 대신해서 맏형 노릇을 했다. 기재(奇才)가 탁월하고 무공에 대한 집념이 강해서 임장홍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나 삼 년후 그는 돌연 종남파를 뛰쳐 나왔고, 그 후로 진산월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는커녕 소식 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 악자화가 오 년만에 불쑥 진산월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진산월은 오 년만에 다시 만난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왜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는지… 하나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불쑥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왜 나를 불렀소?”

그의 어조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낮게 가라앉아 있어서 퉁명스러워 보이기 조차 했다. 악자화는 차갑게 빛나는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얄팍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나를 만난게 반갑지 않은 모양이로군.”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아니오. 단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 조금 의아했을 뿐이오.”

“궁금할 것 없다. 다른 일로 이곳에 왔다가 너희들을 발견하고 불러낸 것 뿐이니.”

진산월은 악자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단지 그뿐이오?”

악자화의 입꼬리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어찌 보면 차가운 비웃음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오랫동안 참았던 일을 해치우게 된 회심의 미소 같기도 했다. 또 어찌 보면 먹이를 둔 늑대처럼 사나운 웃음 같기도 했다.

“너에게 갚아야할 빚도 있고 말이야.”

“나에게 빚이 있단 말이오?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상관없다. 너와 내가 그 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다면 말이지.”

“나는 물론 잊지 않고 있소.”

“나도 그렇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진산월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간은 침울해 보였다. 악자화 또한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지만, 눈빛은 오히려 한층 더 차갑고 음산하게 굳어져 있었다. 한참 후, 악자화는 이상하리만치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이곳으로 불러낸 이유는 한 가지 충고를 해주기 위해서다.”

“……”

“앞으로 두 번 다시 천봉궁의 일에 개입하지 마라.”

“천봉궁?”

“천봉궁과 우리 사이의 일에 끼어 들지 말라는 뜻이지.”

“우리라니?”

악자화는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가 슬쩍 오른손을 휘둘렀다.

쉭!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을만큼 미약한 음성과 함께 진산월의 발밑에 무언가 새하얀 물체가 날아와 떨어졌다. 그 물체를 확인한 진산월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졌다. 그것은 손바닥 크기만한 작은 목검(木劍)이었다. 특이하게도 목검은 거무튀튀한 흑색 빛을 띄고 있었는데, 검신(劍身)의 하단 부분에 백발 노인의 좌상(坐像)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의 손잡이 부분에는 <오(五)>라는 숫자가 정교한 솜씨로 파여 있었다. 진산월은 이 흑목검(黑木劍)을 처음 보았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목검에 대한 소문을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것이다.

“신목령…”

진산월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악자화는 처음과 변함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신목령이다.”

신목령! 강호의 만마(萬魔)를 굴복시킨다는 마도의 우상, 신목령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신목오호(神木五號)다.”

신목령의 주인은 물론 신목령주(神木令主)다. 신목령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제일인(魔道第一人)이며, 강호무림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는 휘하에 모두 열두 명의 사자(使者)를 두었는데, 그들을 일호(一號)부터 십이호(十二號)라고 불렀다. 신목오호라면 열두 명의 사자들 중 다섯 번째 서열이라는 뜻이었다. 오 년전에 종남파를 떠났던 악자화가 뜻밖에도 신목령의 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악자화는 다시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진산월의 발밑에 꽂혀 있던 신목령이 마치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려 끌려가듯 그의 소매속으로 스르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는 좀처럼 놀라지 않는 진산월도 이순간 만큼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접인신공(接引神功)?”

접인신공이란 내가(內家)의 상승수법(上乘手法)중 하나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를 내가의 진기(眞氣)를 이용하여 끌어오는 절학(絶學)이었다. 공력이 한 갑자(甲子)가 되기 전에는 감히 시전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뛰어난 신공인 것이다. 강호의 거대문파라 해도 접인신공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을 정도의 고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예전의 악자화는 비록 무공의 재질이 뛰어나고 누구보다도 성취가 빨랐지만, 그 내공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었다.. 그런데 불과 오 년만에 접인신공을 펼칠 정도로 공력이 상승되어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악자화는 신목령을 다시 소맷자락 속으로 회수한 후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 알겠느냐? 네가 천봉궁을 돕는 것은 본령에 대항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악자화는 신목령의 십이사자(十二使者)중 일인(一人)이었다. 다시 말하면 신목령에는 그와 비슷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고수가 최소한 열두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악자화가 보여준 접인신공의 일수(一手)로 볼 때, 이것은 그야말로 신목령이 얼마나 무서운 고수들이 운집한 집단인지를 여실히 나타내주고 있었다.

“만일 오늘 이곳에 온 사람이 내가 아니고 십이사자 중의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희들은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되었을 것이다.”

진산월은 악자화가 결코 허언(虛言)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맛이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운문세가의 둘째 공자(公子)는 당신이 불러 들인거요?”

악자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문세가는 내 지시를 받고 있다. 평상시라면 우리의 행사(行事)를 방해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악자화의 입가에 다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가 너라면 한 번은 봐줄 수 있다. 이걸로 예전에 지은 빚을 갚은 셈이니까.”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우리 사이에 빚 같은 건 없었소. 당신이 굳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 일로 당신이 나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면 이번 일로 없던 것으로 합시다.”

“과연 너다운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마음의 빚은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제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거리낄 게 없다는 뜻이다.”

“당신은 원래 그랬소.”

악자화는 입꼬리를 비틀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차가운 웃음이었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일은 비록 내가 나서서 막아주었지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천봉궁과의 일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마라.”

진산월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만약 부득이하게 끼어들게 된다면?”

순간 악자화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산월을 쏘아보다가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 날이 바로 종남파가 강호에서 사라지는 날이다.”

너무도 섬뜩한 말이었다. 그 음성은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안에 담겨 있는 진득한 살기와 결연한 의지는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단지 조용하게 웃을 뿐이었다.

“염두에 두겠소.”

악자화는 눈쌀을 찌푸린 채 냉랭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내 말을 명심해라. 본령에 거역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너무 담담해서 어찌 보면 악자화의 말을 별로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산월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악자화가 말하는 뜻을 충분히 파악했을 뿐 아니라 그 말이 결코 틀리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는 쉽사리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다.

악자화는 한참 동안이나 진산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너와 나는 완전한 남남이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슬쩍 소맷자락을 휘두르자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미끄러지듯 칠 팔 장을 움직여 근처의 죽림(竹林) 위로 훌훌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줄이 매달려 있어 그 끈을 잡고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탈포양위(奪袍讓位)라는 것으로, 천하무림에 산재한 수 백 종의 신법(身法)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 힘든 일종(一種)이었다.

진산월은 그런 신법이 있다는 말만 들어 보았을 뿐,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실제로 본 탈포양위는 말로 듣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신비롭고 절묘해 보였다.

조금 전에 보여준 접인신공의 일식과 이번의 탈포양위 신법으로 보아 악자화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정고수가 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대체 어떻게 무공을 수련해야만 불과 오 년만에 저런 고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악자화의 신형은 순식간에 대나무 숲을 뚫고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악자화가 사라진 곳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텅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오른손으로 뒷통수를 긁었다.

“일이 닥치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되겠지… 그나저나 사매가 많이 기다리겠군.”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객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가 막 죽림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쉬악!

미약한 파공음과 함께 싸늘한 경력(勁力)이 그의 코앞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진산월은 옆으로 두 걸음을 황급히 움직여 그 경력을 피했다.

순간,

스슥!

눈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그의 앞에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가긴 어딜 가느냐? 하룻강아지 같은 놈!”

싸늘한 호통과 함께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인영을 본 진산월의 눈쌀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얼굴 가득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진산월을 쏘아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금 전에 악자화에게 쫓겨 도망쳤던 운자개였던 것이다.

운자개는 피처럼 붉은 혀로 백지장처럼 창백한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사악하게 웃었다.

“네 놈이 감히 본 가의 일을 방해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유달리 안면이 새하얀 운자개가 세모꼴 눈을 번뜩이며 붉은 혀를 낼름거리는 광경은 한 마리의 독사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가지 않았소?”

“흐흐… 오호사자께서 무슨 일로 네 놈을 비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눈 밖에 난 이상 네 놈과 종남파는 결코 온전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그거 참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는군.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실력이 있겠소?”

자신의 위협에도 진산월이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느긋한 모습이자 운자개의 눈꼬리가 쭉 치켜 올라갔다.

“네놈이 오호사자를 믿고 큰소리를 치나 본데 이제 곧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그때 문득 진산월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눈부신 백의를 입은 준수한 미남자가 뒷짐을 진 채 우뚝 서 있었다.

백의 미남자의 나이는 진산월과 엇비슷해 보였다. 코가 약간 매부리코인 것을 제외하고는 누가 보기에도 감탄할 만큼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백의 미남자는 입가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를 매단 채 진산월을 태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백의 미남자는 빙긋 웃었다.

“하하… 당신이 당대(當代)의 종남파 장문인이오?”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한데 귀하는…?”

백의 미남자는 그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계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섯 째 형이 예전에 종남파에 잠깐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 그런 연분(緣分) 때문에 오늘 당신들을 순순히 보내주려는 것 같군.”

“……”

“그런데 당신은 운이 너무 나빴소.”

“그게 무슨 말이오?”

백의 미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재수 없게도 나를 만났단 말이지. 나는 다섯 째 형과 다른 사람이거든.”

진산월은 백의 미남자가 말한 다섯 째 형이 악자화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악자화의 신분이 신목령의 오호사자이니, 그렇다면 백의 미남자도 역시 신목령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불쑥 물었다.

“당신은 몇째 사자요?”

백의 미남자의 얼굴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어떤 표정보다도 싸늘하고 냉혹한 미소였다.
그가 웃고 있는 것은 단지 습관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구호(九號). 남들은 나를 옥면절정(玉面絶情)이라 부르지.”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얼굴은 관옥(冠玉)과 같고 마음은 사갈(蛇蝎)과 같으며 하룻밤에 스물두 명의 고수를 살해했다는 그 조화심(趙華心)이오?”

백의 미남자는 활짝 웃었다.

“그래. 맞았소. 내가 바로 옥면절정 조화심이오.”

그는 비록 웃고 있었지만, 진산월이 보기에 그것은 한 마리 늑대가 먹이를 앞에 두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비록 강호의 경험이 거의 없었으나, 옥면절정 조화심에 대한 소문은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조화심은 몇 년 전부터 강호에 혜성처럼 나타난 살성(殺星)으로, 이목구비가 준수하기 그지없으나 일단 손을 쓰면 절대로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 잔혹한 솜씨를 지니고 있어 많은 무림인들에게 공포스런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육개월 전, 조화심은 동정호(洞庭湖) 일대에서 오랫동안 기반을 닦고 있던 수경방(水鯨幇)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불과 한 시진 만에 방주(幇主)인 신경(神鯨) 포일락(鮑日落)과 스물한 명의 수경방 고수들을 모두 도륙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은 당시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대혈사(一大血事)로, 그 뒤로 사람들은 조화심이란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기 일쑤였다.
그동안은 아무도 그의 진실한 신분내력을 알지 못했는데, 놀랍게도 희대의 살성으로 알려진 조화심도 신목령의 십이사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화심은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진산월을 향해 다가왔다.

“다섯째 형은 당신을 용서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우리 일을 방해한 이상 당신은 반드시 보상을 해야 돼. 그게 바로 우리의 철칙(鐵則)이지.”

그는 단지 몇 걸음을 떼어놓았을 뿐이지만,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 살기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위의 공기조차 차갑게 식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운자개가 갑자기 앞으로 성큼 나섰다.

“닭을 잡는데 굳이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 녀석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조화심은 운자개를 힐끗 돌아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새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져 마치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군.”

운자개는 그의 승낙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입가에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진산월을 향해 다가왔다.

“이놈아. 시시한 종남파의 무공 따위로 감히 본가에 대항하다니 단단히 각오해라!”

진산월은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운자개는 그를 향해 살기등등한 기세로 다가오다가 이 광경을 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우냐?”

진산월은 빙그레 웃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오. 단지 당신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해주고 싶을 뿐이오.”

운자개의 눈썹이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충고라고?”

진산월은 돌연 정색을 했다.

“이대로 몸을 돌려 돌아간다면 당신은 무사할 수 있을거요.”

운자개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멀뚱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하나 이내 이를 부드득 갈며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정말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로군.”

“정말로 무서운 건 하늘이 아니오.”

“그럼 무엇이냐?”

“사람이오.”

“사람? 바로 네 놈을 말하는거냐?”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나를 무서워할 리가 있겠소?”

운자개는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럼 누구를 가리키는 거냐?”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한 줄기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나다.”

그 음성을 듣자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운자개의 안색은 흙빛이 되어 버렸다.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이 장 떨어진 대나무 옆에 한 사람이 우뚝 선 채로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짙은 회의를 입고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그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사라졌던 악자화였다.
원래 악자화는 운자개가 진산월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장내에 나타났다.
조화심이 살기를 거두고 순순히 물러난 것도 악자화의 출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하나 운자개는 진산월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악자화는 얼음장같은 눈으로 운자개를 쏘아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히 운문세가로 돌아가라고 지시했을 텐데…”

운자개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렸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얼굴로 조화심을 돌아보며 안타까운 구원의 눈빛을 던졌다.
조화심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다.
어찌 보면 그는 아예 악자화의 출현도, 운자개가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운자개는 조화심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자 점차 울상이 되어 식은 땀을 뻘뻘 흘렸다.
악자화의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이 슬쩍 조화심을 향했다.
그때 갑자기 조화심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섯째 형도 악취미로군. 남이 좋아하는 일은 두고 보려 하지 않으니…”

그는 진산월을 쳐다보며 예의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한 말은 취소야.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군.”

그는 한 차례 손을 까닥거려 인사를 한 후 휑하니 몸을 돌렸다.

“여기는 별로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섯째 형, 있다가 봅시다.”

그가 바닥을 가볍게 차자, 그의 신형은 한 줄기 포물선을 그리며 십여 장 너머로 쏘아져갔다.
몇 차례 몸을 날리지도 않았는데, 어느 새 그의 신형은 아득히 멀리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놀랍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가공할 신법(身法)이었다.
믿었던 조화심이 전혀 도움의 손길도 주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리자 운자개는 그야말로 도살장에 끌려온 돼지처럼 사색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견디지 못하고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오… 오호 사자님… 저… 저는 원래 그냥 돌아가려고 했으나 도중에 구호 사자님이 자꾸 추궁을 하시는 바람에 어… 어쩔 수 없이…”

악자화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듯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려라.”

“예..? 예…”

운자개는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허겁지겁 떠나버렸다.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자 악자화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떠나기 전, 악자화는 진산월을 힐끗 돌아보며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잊지 마라.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죽이겠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겠소.”

악자화는 한 번 더 진산월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본 후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숲속으로 날아갔다.

“흐음…”

그제서야 진산월은 뜻모를 한숨을 내쉰 채 잠시 그 자리에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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