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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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2화


서장(序章) 2. 무림첩(武林帖)

<천하 무림인(武林人)에 고(告)함. 금번 서장(西藏) 천룡사(天龍寺)와의 결전에 즈음하여 다음달 보름에 숭산(嵩山)의 오유봉(五乳峯)에서 중원 무림인들의 뜻과 힘을 뭉치기로 하였으니 많은 강호동도(江湖同道)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소림사(少林寺) 삼십육대 방장(方丈) 대방(大方). 무당파(武當派) 삼십이대 장교(掌敎) 현령(玄靈).>

제1장. 내자불선(來者不善)

“아함!”

낙일방(駱一方)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했다.
차가운 날씨인데도 한낮의 햇살은 제법 따사로워 햇살을 쬐고 앉아 있자니 전신이 나른해지며 졸음이 쏟아져왔다.
평소의 낙일방이라면 주저 없이 그 자리에 코를 쳐박고 잠에 취해 버렸을 것이다. 하나 오늘만은 아무리 제멋대로인 낙일방이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야말로 대사형(大師兄)이 종남파의 이십일대 장문인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종남파가 쇠락해 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한때는 관중(關中)에서 제일 가는 문파(門派)였다.
그러니 언제 하객(賀客)들이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하품을 하다말고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방명록(訪名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제길… 이거 해도 너무 하는군. 정말 너무해.”

벌써 해가 거의 정오에 다다라 곧 취임식이 거행될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찾아온 손님의 수는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중 다섯 사람은 종남산 일대의 주루를 경영하는 주인들이었고, 무림인(武林人)은 겨우 넷 뿐이었다.
그들 중 가장 명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해야 종남 일대에서나 겨우 이름이 알려진 철조수(鐵爪手) 위일상(魏逸商) 정도이고, 나머지는 듣도 보도 못한 떠돌이 낭인(浪人)들 뿐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책상을 들고 정문에 나가 반나절이 가까워 오도록 방명록을 펼쳐들고 있었건만 성과가 이 모양이었다.
그러니 성질 급한 낙일방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마침 그의 투덜거림을 듣기라도 했는지 저 멀리서 한 떼의 인마(人馬)가 나타났다.
낙일방은 눈이 번쩍 뜨여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똑바로 하고 짐짓 진지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인마는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 다섯 명인데, 하나같이 눈빛이 날카롭고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옳지. 이제들 오는군.’

낙일방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표정으로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낙일방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인물은 얼굴에 구레나룻이 가득하고 체격이 우람한 사십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옆구리에 청강장검(靑剛長劍)을 매고 있었는데,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거만스럽고 무례해 보여 낙일방은 첫 인상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손님은 손님인지라 낙일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디서 온 분들 이신지요?”

구레나룻의 중년인은 말 위에 올라탄 채 그를 힐끗 내려보다가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알 거 없다. 그놈은 안에 있겠지?”

낙일방은 중년인의 건방진 태도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예? 그놈이라니요?”

“진산월인가 뭔가 하는 놈 말이다.”

낙일방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니 이 자식이?’

아무리 종남파가 몰락했다고 하나 당당한 한 문파의 장문인을 이놈 저놈 하다니 낙일방처럼 성질 급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진산월은 낙일방이 천하에서 가장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이었다.
구레나룻 중년인의 뒤에 있는 비쩍 마르고 왼쪽 뺨에 칼자국이 나 있는 장한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하는 낙일방의 얼굴을 보며 킬킬거렸다.

“흐흐… 이놈아!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 전에 어서 빨리 네놈의 엉터리 장문인 녀석을 불러와라!”

낙일방에게 더 이상의 인내(忍耐)를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마침내 낙일방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탁자를 뒤엎고는 앞으로 달려나왔다.

“이런 제기랄. 나중에 사형에게 혼나는 한이 있어도 도저히 못 참겠다!”

낙일방은 땅을 박차고 튀어 올라 가장 앞에 있는 구레나룻의 중년인을 향해 탈성퇴(奪星腿)의 수법으로 발길질을 했다.

낙일방의 공력은 사실 그렇게 뛰어난 것이 아니었으나, 분노에 가득 찬 그의 발길질은 나름대로 상당한 위력이 있었다.

하나 구레나룻 중년인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허리를 비틀어 너무도 수월하게 낙일방의 탈성퇴를 피했다.

동시에 허공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낙일방의 오른쪽 다리를 덥썩 움켜잡더니 그대로 이 장 밖으로 집어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했던지 낙일방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쿵!

“크윽!”

볼품 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나가떨어진 낙일방은 짤막한 신음과 함께 몸을 꿈틀거리더니 다시 벌떡 일어났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낙일방의 눈알이 새빨개졌다.

“이 빌어먹을 놈!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낙일방은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다시 벼락같이 구레나룻 중년인을 향해 덮쳐갔다.

낙일방은 중년인의 어깨높이로 뛰어 오르며 두 주먹을 번갈아 가며 다섯 번이나 휘둘렀다.

이번의 공격은 상당히 날카로워 언뜻 보기에도 위력이 대단해 보였다. 하나 구레나룻 중년인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엉성한 오강감계(五剛坎桂)는 처음 보는군.”

그는 말 위에 앉은 채로 오른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어 낙일방의 주먹과 주먹이 움직이는 공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손은 너무도 수월하게 낙일방의 공세를 뚫고 들어와 낙일방의 멱살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이어 조금전과 똑같은 동작으로 그대로 그의 몸을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콰당!

낙일방은 거의 삼 장이나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낙일방은 철퇴에 맞은 개구리 마냥 두 팔과 두 다리를 쫘악 벌린 채 한동안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못 했다.

“끄응…”

한참 후에야 낙일방은 머리를 흔들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바닥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났을 때는 이미 구레나룻 중년인과 그의 일행들은 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은 후였다.

낙일방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덩치만 큰 미련한 곰같은 놈! 다음에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버리고 말테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내뱉으며 씨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런데 그놈이 내 초식을 어떻게 알았지? 더구나 파해법(破解法)을 알지 못했다면 그토록 수월하게 뚫을 수가 없었을 텐데…”

조금 전에 그가 사용했던 초식은 종남파의 절기인 장괘장권구식(長掛掌拳九式) 중에서도 제법 위력이 강맹한 오강감계(五剛坎桂)라는 무공이었다.

낙일방이 비록 장괘장권구식의 오묘한 조화를 모두 터득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중 오강감계의 초식에는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던 터였다.

그런데도 구레나룻 중년인의 손에 너무도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낙일방의 얼굴이 점차로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그래. 그거야. 그놈이 사용한 그 수법은 바로 유운비수(流雲飛手)였어.”

낙일방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표정이었다.

“그놈이 어떻게 본 파(本派)의 절기를 알고 있을까?”

유운비수는 종남파에서도 익힌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 상승(上乘)의 절정수법(絶頂手法)이었다.

낙일방 조차도 사부가 생전(生前)에 펼친 모습을 한 두 번 보았을 뿐, 아직 익히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이 생면부지의 중년인의 손에 의해 펼쳐지다니 낙일방으로서는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낙일방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듯 정신없이 안으로 달려갔다.

진산월이 연락을 받고 연무장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두기춘(杜期春)과 응계성(應戒星)이 사이좋게나란히 바닥에 누워 있는 광경이었다.

두기춘은 그렇다 치고 응계성마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진산월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응계성은 여덟 명의 사제들 중에서 매상(梅霜) 다음으로 무공이 고강한 인물이었다. 장내에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두 사람 말고도 몇 명의 인물이 더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진산월을 발견하고 급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대사형… 아니 장문인. 어서 오세요.”

정해(程解)였다.

정해는 아직 장문인이란 호칭이 낯설은 지 음성이 조금 어색했다. 하나 진산월은 내색하지 않고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된 일이냐?”

정해는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누가 찾아와서 장문사형을 만나게 해달라고 행패를 부립니다.”

진산월의 시선이 연무장의 한쪽에 우뚝 서 있는 다섯 명의 장한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한 사람씩 얼굴을 훑어보다가 구레나룻 중년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맨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은 채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제일 두드러져 보였던 것이다.

정해가 옆에서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바로 저잡니다. 저자가 응사형(應師兄)과 두사제(杜師弟)를 때려눕혔습니다. 그런데…”

진산월은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정해의 음성이 한층 나직해졌다.

“저자가 사용한 수법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한가?”

정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꼭 본 파의 무공 같습니다. 확실친 않지만…”

말을 하면서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은 정해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지금도 그는 ‘꼭’ 이라고 말하면서도, 뒤에 가서는 ‘확실치 않다’ 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이런 경우에도 정해의 말은 거의 어긋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진산월은 짤막하게 물었다.

“무슨 무공인지 알겠느냐?”

“두 사제를 쓰러뜨린 수법은 잘 모르겠지만 응사형이 당한 것은 본 파의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중 천하수조(天河垂釣)를 장(掌)으로 변환시킨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빨라서 정확히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정해가 초식이름까지 말할 정도면 틀림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새삼스런 눈으로 구레나룻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생면부지의 인물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붉고, 미간(眉間)이 좁아서 성격이 화급해 보였다. 코도 크고 입술도 두꺼웠는데, 귀는 반대로 얇아서 흔히 말하는 박복(薄福)한 인상이었다. 한데 반대쪽 귀를 보니 그쪽 귀는 의외로 귓볼이 아주 두툼하고 길었다. 이제 보니 구레나룻 중년인은 전형적인 짝귀였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종남파의 무공에 능통하고 짝귀인 인물은 그가 알기로는 이 넓은 천하에서도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구레나룻 중년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전에 선사(先師)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노해광(盧解廣) 사숙(師叔)이 아니십니까?”

구레나룻 중년인의 눈가가 한차례 거세게 꿈틀거렸다.

“네 사부가 내 이야기를 했다고?”

“그렇습니다.”

“흐흐…. 가소로운 일이군.”

구레나룻 중년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이미 오래 전에 자기 손으로 내쫓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무능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네 사부가 죽기 전에 그래도 용한 일을 했군 그래.”

정해를 비롯해 주위에 늘어서 있던 종남파의 문하(門下)들이 일제히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선사를 모욕하는 상대의 무례한 언동(言動)에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바뀌지 않은 채 처음과 다름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선사께선 십오 년 전에 사숙을 내보내신 것을 오랫동안 후회하고 계셨었습니다.”

구레나룻 중년인은 입가를 실룩거리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웃기는 소리 마라! 네 사부가 어떤 작자인데 후회 같은 걸 하겠느냐? 그는 아마 내가 진작에 죽은 줄로 알고 있었겠지만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건재하다! 오히려 나를 내쫓은 그가 먼저 죽어 버렸으니 이게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고 무엇이냐, 크하하하!”

구레나룻 중년인은 한동안 미친 듯한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구레나룻 중년인, 노해광은 진산월의 사부인 태평검객(太平劍客) 임장홍(林長弘)의 유일한 사제였다.

하나 십오 년 전, 임장홍은 그를 종남파에서 내쫓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임장홍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그것이 치정(癡情)에 얽힌 일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노해광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입가에 한 줄기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네놈은 내가 왜 갑자기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겠지?”

진산월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십오 년만에 불쑥 나타난 노해광이 결코 좋은 뜻을 품고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는 이번 일이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오늘은 진산월이 장문인이 된 길(吉)한 날이다.

이런 날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누구라도 원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엄연한 자신의 사숙이 아닌가?

하나 상황은 진산월의 희망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노해광은 입가에 한 줄기 음산한 미소를 떠올리며 진산월을 노려보았다.

“흐흐… 나는 잃어버린 내 장문인 자리를 되찾으러 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사람의 안색이 대변했다.

안색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진산월 뿐이었다.

진산월의 배짱이 남들보다 월등히 좋아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원래 쉽사리 놀라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다.

“장문인 자리를 되찾으시겠다니요?”

그가 담담한 음성으로 되묻자 노해광은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귀가 먹었느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말해 줄테니 귓구멍을 잘 뚫고 똑똑히 듣거라! 나는 네놈의 사부에게 빼앗긴 장문인 자리를 오늘 다시 되찾으려고 왔단 말이다.”

모두들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노해광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폭갈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 따위가 어찌 본 파의 장문인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언제 나타났는지 낙일방이 이마에서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달려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노해광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노해광의 눈꼬리가 쭈욱 치켜 올라갔다.

‘저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사숙인데 자신의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 사질(師姪)에게 이놈저놈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구에서 처음 볼 때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던 놈이라서 한 번 더 자기 손에 걸리게 되면 단단히 쓴 맛을 보여주리라고 결심하고 있던 터였다.

노해광은 눈가에 살기등등한 기세를 내뿜으며 낙일방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그의 뒤에 서 있던 비쩍 마르고 왼쪽 뺨에 칼자국이 나있는 장한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노형. 노형은 이제 곧 장문인이 될 신분인데 아래 것들과 드잡이질을 하면 체면이 뭐가 되겠소? 저 못된 송아지의 버릇은 내가 고쳐 주리다.”

노해광은 그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장노제(張老弟)의 말이 옳네.”

칼자국 장한은 입가에 징그런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낙일방을 향해 다가왔다.

“이봐, 애송이. 이분은 네놈의 하나뿐인 사숙이시고 이제 곧 장문인 자리에 오르실텐데 말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낙일방이 분기탱천하여 막 발작하려는 순간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방, 물러나라.”

낙일방은 씨근덕거리며 칼자국 장한을 노려보았으나 진산월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진산월은 칼자국 장한은 쳐다보지도 않고 노해광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지위는 선사의 유명(遺命)이신지라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보다 사숙께서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노해광은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따로 원하는 거라니? 난 그런 거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장문인 자리뿐이다.”

진산월은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것 참 곤란한 일이군요.”

노해광은 막 화를 내려다가 이 모습을 보자 내심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한 문파의 장문인이 어떤 자리인가?

그야말로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탐을 내는 지고(至高)의 위치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라면 사생결단을 내서라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쓸 텐데 눈앞의 이 키가 크고 몸집이 좋은 녀석은 단지 뒷통수만 긁적거리고 있을 뿐이니 어이가 없다 못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노해광은 화를 내야할지 웃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두 눈에 힘을 주며 종(鐘)이 울리는 듯한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네가 정녕 이 사숙을 무시하고 장문인 자리에 눌러 앉으려느냐?”

이번에 그는 은근히 목소리에 공력(功力)을 실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장내가 온통 그의 목소리로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내공이 약한 정해와 두기춘 등 몇몇 종남의 문하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내당(內堂)쪽에서 몇 개의 인영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종남파의 장문인이 취임하는 자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 찾아온 하객(賀客)들이었다.

하객들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달려나오다가 종남파의 문하들이 몇 사람의 낯선 인물들과 대치해 있는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 중 진령(秦嶺)일대에서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철조수 위일상은 노해광의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장한들을 보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저… 저자들은 천남사살(天南四煞)인데… 저들이 어찌 여길…”

그의 음성을 듣자 모두의 시선이 노해광의 뒤에 우뚝 서 있는 차가운 인상의 네 명의 장한들에게로 쏠렸다.

천남사살은 멀리 강남(江南)일대에서 악명(惡名)이 자자한 인물들로, 무공이 고강하고 수법이 잔혹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일대흉인(一大兇人)들이었다.

그중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인물이 대살(大煞) 장욱(張旭)이었고, 그 옆의 눈이 날카로운 자가 이살(二煞) 전평(展平), 덩치가 커다란 인물이 삼살(三煞) 도송(都松), 그리고 체구가 가장 작은 인물이 천남사살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는 사살(四煞) 팽일기(彭一忌)였다.

그들은 강남에서만 횡행(橫行)할 뿐, 강북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노해광과 함께 불쑥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대살 장욱이 위일상을 돌아보며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용케도 우리를 알아보는 자가 있군. 우리가 누군지 안다면 우리의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알텐데…”

위일상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갑자기 진산월을 향해 급히 포권을 했다.

“지…진 장문인. 나는 아무래도 바빠서 이만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소. 그럼….”

이어 그는 진산월의 답례도 받지 않고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나갔다.
다른 하객들도 진산월의 눈치를 살피더니 앞을 다투어 인사를 하고는 떠나버렸다.
순식간에 장내에는 종남파의 문하제자들과 노해광 일행만이 동그마니 남게 되었다.

낙일방은 이 광경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런 제기랄. 이게 무슨 짓들이야? 무림의 고수라는 놈들이 천남사살이란 이름에 꽁무니를 빼다니…”

장욱이 낄낄거리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헤헤… 그런 네놈은 얼마나 대단한가 한 번 보자!”

그는 단번에 사오 장을 날아 낙일방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낙일방은 상대의 놀라운 신법(身法)을 보고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오히려 이를 갈아붙이며 덤벼들었다.

“좋다, 이놈! 종남파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

그는 장괘장권구식 중의 천전만권(千纏萬捲) 수법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장욱의 가슴팍을 후려쳐갔다.
장욱은 괴소를 터뜨리며 오른손을 슬쩍 들어 낙일방의 공세를 허물어뜨리고는 왼쪽으로 빙글 돌며 그의 허리춤을 세차게 걷어찼다.

“헤헤… 이것도 무공이라고 펼치느냐?”

낙일방은 상대의 발길질에 허리를 강타 당하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큭!”

하나 그가 채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어느새 장욱의 다른쪽 발이 날아와 그의 숙여진 아래턱을 사정없이 가격해 버렸다.

쾅!

“커억!”

커다란 비명과 함께 낙일방의 몸이 허공에서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장욱은 잔인하게도 바닥에 쓰러져 아직 채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있는 낙일방의 얼굴을 다시 발로 강하게 걷어찼다.

“이 버릇없는 자식! 이제 이 어르신네의 무서움을 똑똑히 알았느냐?”

낙일방의 얼굴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어 퉁퉁 부어 올랐다.
낙일방은 일그러진 얼굴로 바닥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이 마른 장작같은 놈아…. 겨우 이 정도로 나를 굴복시킬 줄 아느냐?”

장욱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는 다시 몇 차례 더 낙일방의 몸을 세차게 걷어찼다.
낙일방은 얼굴을 양팔로 에워싼 채 꼼짝없이 장욱이 걷어차는 대로 맞고 있었다.
장욱은 대 여섯 번이나 더 발길질을 한 다음에야 겨우 발을 멈추었다.

“이래도 할 말이 있느냐?”

낙일방의 온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낙일방은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장욱을 올려보았다.

“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 같은 건 한 주먹 거리도 안된다….”

“이놈이 정말?”

장욱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오른발을 들어 낙일방의 얼굴을 밟았다.

“어억…”

낙일방의 입이 벌어지며 부러진 이빨이 시뻘건 피에 섞여 흘러나왔다.
장욱은 낙일방의 얼굴을 짓이겨 버리려는 듯 계속 발로 밟다가 그대로 발꿈치로 그의 명치를 찍어 버렸다.

쾅!

낙일방은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퉤! 별 정신나간 놈 다 보겠군.”

장욱은 혼절한 낙일방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그제서야 발을 들어 올렸다.

“사제!”

정해가 재빨리 다가와 낙일방의 몸을 끌어안았다.
장욱은 다시 히죽거리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이해 하라구. 나는 저런 버르장머리없는 애송이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라서 말이야.”

이살 전평이 옆에서 킬킬거렸다.

“크크… 대형(大兄) 잘못이 아닙니다. 이게 모두 저 애송이 놈의 버릇을 잘못 가리킨 저놈 사문(師門)의 탓 아닙니까?”

“맞아. 제자를 보면 그 스승을 안다고… 태평검객인가 하는 작자가 얼마나 한심한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가는군 그래.”

이어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통쾌한 듯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케헤헤헤…!”

진산월은 묵묵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노해광에게로 돌렸다.

“사숙께서 원하시는 게 이런 겁니까?”

노해광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장문인 자리를 순순히 내놓을 건지 그것만 말해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사부님의 유명인지라 내놓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닙니다. 정말 달리 원하시는 게 없습니까?”

노해광은 눈을 부라렸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네놈이 순순히 내놓겠느냐?”

“제가 생각하기에 합당한 것이라면 드리겠습니다.”

진산월이 의외로 흔쾌히 말하자 노해광은 잠깐 머뭇거렸다.
장문인 자리가 자기한테 돌아오리라고는 노해광도 애초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종남파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는 하나, 한때는 구대문파에서도 혁혁한 명성을 떨쳤던 전통 있는 명문정파(名門正派)가 아닌가?
그런 문파의 장문인 자리가 억지나 강짜로 될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노해광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렇듯 불쑥 찾아와서 시비(是非)를 거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도 그것을 짐작하고 있기에 두 번이나 원하는 게 무어냐고 물어본 것이다.
노해광은 마침내 자신의 진짜 목적을 밝히기로 했다.
그는 한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돌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왕령(大王嶺)일대에 있는 네 개의 주루(酒樓)를 내게 넘겨라.”

그 말에 종남파 문하들의 얼굴이 모두 흙빛으로 변했다.
정해가 재빠르게 다가와 진산월에게 소근거렸다.

“거절해야 합니다, 장문사형. 그곳은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득원 입니다.”

진산월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종남파가 구대문파에 속해 있을 때는 진령 일대의 대다수 상권(商圈)이 종남파에 귀속되어 있었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섬서성(陝西省) 제일의 거부(巨富)는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나 종남파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종남파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해져서 상권을 하나 둘씩 빼앗겨, 지금은 대왕령과 조암령(祖庵嶺) 일대의 일곱 개 주루 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왕령에 있는 네 개의 주루는 모두 크고 번창해서 현재 종남파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노해광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 네 개의 주루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정해가 다시 속삭였다.

“조암령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는 절대로 본 파의 살림을 꾸려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언제 초가보(焦家堡)에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초가보는 진령이북(秦嶺以北)에 새로 생겨난 문파로, 요즘 급속도로 세력을 키워 종남파를 위협하고 있었다.

정해의 말을 들었는지 노해광이 재빨리 말했다.

“초가보쯤은 내가 물리쳐 줄 수 있다. 대왕령의 상권을 내게 주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남은 물론 앞으로도 장문인 자리는 다시 넘보지 않으마.”

‘이런 뻔뻔한…’

정해가 막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진산월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요.”

노해광은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정말이냐?”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

노해광은 급히 물었다.

“대신 무엇이냐?”

진산월은 노해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무런 빛도 담겨 있지 않아서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강호경험이 많은 노해광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런 눈으로 노해광을 응시하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아오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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