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3화
제2장. 사형사제(師兄師弟)
낙일방의 올해 나이는 열일곱. 호남성(湖南省) 형양(衡陽) 태생이었다. 호남(湖南)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낙일방은 전형적인 호남사람이었다. 그는 성격이 불같고 화가 나면 자신을 잘 억제하지 못했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아홉 살 때 어머니가 계부(繼父)와 재혼(再婚)을 해서 함께 살았다. 하나 삼 년도 되지 않아 그는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후 이 년 동안 하남성(河南省) 일대를 떠돌아다니다가 임장홍을 만나 종남파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고집이 세고 화를 잘 내서 사형제들 중 어느 누구와도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나마 정해가 가끔 그의 말벗이 되어 줄 뿐이었다. 그런 낙일방이 이상하게도 진산월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따랐다. 일전에 정해는 그것이 하도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여덟째. 너는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면서 대사형 말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잘 따르는 거냐?”
낙일방은 그답지 않게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난 세상에서 대사형이 제일 좋거든요.”
“왜?”
“내가 아무리 화를 내거나 잘못을 해서 일을 저질러도 꾸짖거나 야단치지 않는 사람은 대사형밖에 없어요. 사형 같으면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때 정해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나도 그래서 대사형을 좋아하지.”
낙일방의 말마따나 진산월은 좀처럼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낙일방이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화병(花甁)을 깨뜨렸을 때도, 두기춘이 몰래 사부의 서재에 침입해서 사부가 따로 남겨놓은 비급(秘及)이 없나 뒤적거리다가 등잔을 엎질러 불이 나서 서재를 홀랑 태웠을 때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마다 그는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이것 참 안된 일이로군.”
하고 중얼거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형제들 중에는 뒤에서 그를 ‘나보살(懦菩薩)’이라고 부르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낙일방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진산월의 걱정 어린 얼굴이었다. 그래서 낙일방은 기분이 좋아졌다. 진산월은 낙일방이 눈을 뜬 것을 보고 물었다.
“몸은 어떻느냐?”
낙일방은 히죽 웃었다.
“이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대사형.”
그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나 진산월이 채 제지하기도 전에 그는 오만 가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으윽!”
몸을 움직이는 순간, 전신의 구석구석이 망치로 다져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특히 옆구리와 명치끝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진산월은 가만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억지로 일어날 건 없다. 그냥 누워 있거라.”
낙일방은 몇 번 더 일어서려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포기하고는 힘없이 누워버렸다.
“제길… 그런 놈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다음에 만나기만 하면 그냥…”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음에 그자를 만나면 이길 자신이 있느냐?”
낙일방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급히 말했다.
“그럼요. 다음에는 기필코 그놈의 다리를 분질러 버리고 말겠어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물었다.
“네 무공은 그자의 적수가 되지 않는데 무슨 수로 그를 이기려느냐?”
“그건….”
낙일방은 무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기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장욱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한 일격을 너무도 간단하게 피해내고 자신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다루던 장욱의 실력은 확실히 자신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풀죽은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네가 그자에게 펼친 것은 장괘장권구식 중의 천전만권이었지?”
낙일방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천전만권은 빠른 속도보다는 다양한 변화를 위주로 한 초식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낙일방은 진산월이 묻는 의중을 몰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급하고 호승심(好勝心)이 강해서 변화무쌍한 초식은 잘 익히지를 못한다.”
자신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은 낙일방도 알고 있었다. 비단 성격이 급할 뿐만 아니라 참을성도 별로 없어서 사형제들 중에서 무공의 진척 속도도 가장 느린 축에 속했다. 특히 종남파의 성명절기(成名絶技)인 천하삼십육검은 장중(壯重)하면서도 변화무쌍한 검법이었기 때문에, 불같은 성격의 낙일방에게는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낙일방은 천하삼십육검보다는 오히려 그보다 위력이 훨씬 떨어졌다고 알려진 장괘장권구식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다급한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위력이 강한 천하삼십육검보다는 손에 익숙한 장괘장권구식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성격이 급하다는 것은 물론 커다란 단점이기도 하지만 잘만 이용하면 좋은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낙일방은 귀가 번쩍 뜨여 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너는 빠르고 강력한 무공을 펼치기에는 오히려 남들보다 적합한 체질이다. 너도 검(劍)보다는 권법(拳法)이나 장법(掌法)을 익히는 것이 더 편하지 않느냐?”
낙일방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요, 대사형. 저는 주먹으로 싸우는 게 더 좋습니다.”
“조금 전에 보니 너의 장괘장권구식은 그런 대로 쓸만하더구나. 하지만 아직도 모자란 점이 많이 눈에 뜨인다.”
낙일방은 진지한 자세로 듣고 있다가 급히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천전만권이나 조운육환(彫雲六環) 같은 초식은 비록 절묘한 묘용(妙用)이 있지만 변화가 너무 복잡해서 너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조금 전에도 천전만권보다는 홍안척령(鴻雁剔翎)이나 천성탈두(天星奪斗) 같은 빠른 초식을 구사했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초식들로 장욱 같은 고수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요?”
진산월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승부(勝負)란 단순히 무공의 고하(高下)만으로 판가름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순간적인 임기응변이나 반드시 이기겠다는 승부욕 같은 것도 승부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지. 같은 초식이라도 어떤 배합을 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낙일방은 새삼스런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에 진산월은 말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공에 대한 진척도 다른 사형제들보다 월등히 빠르지도 않았다. 또 남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검을 들고 다른 사람과 비무(比武)를 한 것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진산월의 입에서 승부(勝負)에 대한 제법 확고한 철학(哲學) 같은 말이 흘러나오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대사형 같으면 아까 장욱과 싸웠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나라면 무조건 피했을 것이다.”
낙일방은 뜻밖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피해요?”
“오늘 같은 날에 남과 실랑이를 벌인다는 것은 승패(勝敗)의 여부를 떠나서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낙일방은 정말 대사형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또 낙일방 다운 일이었다. 누가 시비를 걸어오면 죽든 살든 피하지 않고 맞받아주는 것이 낙일방의 성격이었다.
“꼭 그놈과 싸워야 한다면요?”
“그래도 피해야지. 아직은 그보다 실력이 뒤쳐지니까.”
낙일방은 고집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반드시 싸워야 한다면요?”
“그래도 피해야지. 그때 너는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낙일방은 끈질겼다.
“그래도 그놈과 싸우겠다면요?”
“그래도 피해야겠지. 그때 그자는 너에게 달려오면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先占)하고 있었으니까.”
낙일방은 침을 한 번 삼킨 후 다시 물었다.
“만약 오늘 같은 날이 아니고, 그놈보다 실력도 뒤떨어지지 않고, 미리 싸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고,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면요? 그렇다면 대사형 같으면 어떻게 싸웠겠어요?”
마침내 진산월은 피식 웃으며 그의 이마를 툭 쳤다.
“그렇게 그자를 꺾고 싶으냐?”
낙일방은 두 눈을 매섭게 빛내며 힘주어 말했다.
“그놈의 이빨을 모조리 부러뜨리고 갈비뼈를 모두 꺾어 버리고 다리를 분질러 땅바닥에 패대기 칠 때까지는 나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거에요.”
“그렇게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나라면… 우선 그의 왼쪽으로 돌며 천성탈두의 식으로 옆구리를 공격하겠다.”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왼쪽으로 돌아야 하지요?”
“그자는 오른손잡이라서 왼쪽이 아무래도 수비가 허술하거든. 그러면 그자는 왼쪽 팔을 구부려 내 손을 막은 후 몸을 돌리며 오른손으로 내 관자놀이를 치려고 하겠지. 그때 철판교(鐵板橋)의 신법으로 뒤로 누으며 원앙각(鴛鴦脚)으로 그자의 턱을 가격하겠다. 그자는 다음의 두 가지 중 한 가지 방법으로 피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요?”
“뒤로 훌쩍 물러나거나 아니면 반대로 나의 우측으로 쓰러지며 팔꿈치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걸 어떻게 막지요?”
“그자가 뒤로 물러나면 재빠르게 물구나무를 하여 일어서며 그자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어 홍안척령의 일식을 공격하면 된다. 또 우측으로 쓰러지며 팔꿈치 공격을 해올 때도 역시 물구나무를 하여 일어서며 위에서 아래로 단봉조양(丹鳳朝陽)을 전개하면 그자는 피할 수 없게 된다.”
낙일방은 손뼉을 탁 쳤다.
“그렇군요. 다음에 그놈을 만나면 꼭 그런 식으로 싸우겠어요.”
진산월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철판교를 펼칠 수 있느냐?”
낙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요.”
“그럼 철판교로 뒷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누으며 원앙각을 펼칠 수 있느냐?”
낙일방의 얼굴에 조금 자신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그럼 철판교로 원앙각을 펼치다가 다시 물구나무로 일어설 수 있느냐?”
낙일방의 얼굴이 다시 변했다.
“그… 그건….”
“그럼 철판교로 원앙각을 펼치다가 물구나무로 일어서며 바로 상대를 향해 홍안척령이나 단봉조양의 공격을 할 수 있느냐?”
낙일방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상대를 이길 방법을 알고 있어도 그걸 실행시킬 실력이 없으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만다. 너는 우선 철판교를 완벽하게 익혀서 어떤 자세에서도 물구나무로 일어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그자와 싸워볼 수 있지.”
낙일방은 한참동안이나 입술을 꼬옥 깨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진산월을 쳐다보며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늘부터 죽도록 철판교를 연습하겠어요.”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홍안척령과 단봉조양도 잊지 마라.”
“알겠어요.”
“그럼 쉬거라.”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막 진산월이 방을 나가려는 순간 낙일방이 그를 불렀다.
“대사형.”
진산월이 그를 돌아보자 낙일방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진산월은 빙긋 웃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거지 뭐.”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타타탁!
칼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은어(銀魚)의 몸이 순식간에 갈라지며 껍질이 벗겨지고 뼈가 발라진 다음 토막쳐졌다.
스슥!
능숙한 손길이 토막쳐진 은어의 흰 살 위에 소금과 후춧가루를 뿌려댔다. 그런 다음 칼은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타타타탁!
거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상하(上下)로 움직이는 칼날의 아래에는 돼지고기 살덩이가 놓여 있었다. 돼지고기는 눈 깜빡할 새 잘 다져져서 은어살과 마찬가지로 소금과 후춧가루 세례를 받은 다음 한쪽으로 치워졌다. 다음에는 야채였다.
삭! 삭!
죽순(竹筍)은 직사각형으로 잘려지고, 파는 어숫하게 썰어졌다. 당근도 익숙한 손길에 의해 꽃 모양으로 썰어져서 죽순과 파와 함께 뜨거운 물 속으로 던져졌다. 한쪽 불에는 기름이 끓고 있었다. 능숙한 손길은 도마 위에 은어의 살을 곱게 펴고 그 위에 다진 돼지고기를 엄지손가락만큼씩 떼어놓은 다음 돌돌 말았다. 그것에 갈분(葛粉)을 묻히고 다시 계란을 씌워 끓고 있는 기름에 튀기기 시작했다.
치치칙!
기름의 온도는 그리 뜨겁지 않아 다진 돼지고기가 쌓여진 은어의 살은 곧 노란 빛깔로 튀겨진 후 건져졌다. 잘 삶아진 야채를 건져 차가운 물로 씻은 후 갈분을 물에 풀어 걸직한 국물을 만들고 몇 가지 양념을 한 다음 튀긴 은어살과 야채를 접시에 담고 국물을 그 위에 끼얹었다.
탁!
능숙한 손길은 완성된 요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 먹어봐.”
탁자 앞에는 흰옷을 입은 아리따운 미소녀가 앉아 있었다. 미소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빛깔과 모양이 보기만 해도 군침을 돌게 할 만큼 먹음직스러웠다. 미소녀는 젓가락을 들고 튀김을 한 조각 꺼내 입안으로 가져갔다. 눈을 감은 채 몇 번인가 씹은 다음 그것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탄성 한마디.
“정말 맛있어요!”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미소녀는 다시 튀김 몇 점을 정신없이 집어먹었다.
“음… 이렇게 연하고 쫄깃한 맛은 처음이군요. 이 요리의 이름은 뭐에요?”
“계화어권(桂華魚卷).”
미소녀는 다시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잡고 술병째 입 속에 틀어넣었다.
“꿀꺽…. 꿀꺽…”
여자답지 않은 모습으로 술병을 나발 째 들이키고는 다시 정신없이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진산월을 올려보며 손짓했다.
“사형도… 드세요.”
진산월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앞치마를 푸르고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럼 나도 조금 먹어볼까?”
이어 눈부신 속도로 젓가락을 놀려 요리를 입 속으로 가져갔다. 두 남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얼마 되지 않아 그토록 수북했던 요리는 빈 접시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미소녀는 배가 찼는지 젓가락을 멈추고 만족한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
“아! 정말 잘 먹었어요.”
술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는데도 그녀는 별로 취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진지한 표정으로 빈 접시에 남은 국물 한 점까지 깨끗이 닦아먹고 있었다. 미소녀는 탁자에 턱을 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삐죽거렸다.
“대사형은 다 좋은데 너무 먹을 걸 밝혀서 탈이에요. 장문인 체면에 접시 바닥까지 닦아 먹다니 남들이 이걸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요.”
진산월은 접시가 반질반질 해질 때까지 싹싹 훑어 먹고는 입맛을 다셨다.
“원래 음식을 앞에 두고는 신분이나 체면을 따지는 게 아니다. 군자(君子)의 사락(四樂)중에도 식도락(食道樂)이 으뜸인걸 모르느냐?”
미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락이요?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남들은 삼락일지 몰라도 나는 한 가지 낙(樂)이 더 있다.”
미소녀는 낄낄거렸다.
“정말 대사형다운 말이군요. 군자사락? 그 중에서도 식도락이 으뜸이라니… 깔깔…”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제서야 취기(醉氣)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달덩이 같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깜찍스럽고 귀여운 데가 있었다. 진산월은 깨끗해진 접시를 아쉬운 듯 내려놓으며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너의 먹는 양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 정도 양으로도 제법 흡족하게 먹을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음식이 모자라니 말이다.”
“그게 모두 대사형의 음식솜씨가 너무 좋아서에요. 내가 만일 대사형처럼 뚱뚱해진다면 그건 모두 대사형 잘못이니 대사형이 책임져야 해요.”
“책임지라니? 어떻게 책임지란 말이냐?”
진산월이 되묻자 미소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마 취기가 더욱 오른 탓이리라.
“그건 대사형이 알아서 생각하세요. 그나저나 사저(師姐)는 지금도 상복(喪服)을 벗지 않고 있나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하지만 이제 조만간 벗게 될 것이다.”
미소녀는 눈을 반짝거렸다.
“왜 그렇죠?”
“이달 보름에 숭산 오유봉에서 무림대회(武林大會)가 열린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요.”
“사매는 나와 함께 그 대회에 가기로 했다. 그러니 늦어도 그전에는 탈상(脫喪)을 하게 될 것이다.”
“언제 출발하는데요?”
“삼사일 후쯤.”
미소녀는 다시 급하게 물었다.
“누구누구를 데려갈 생각이죠?”
“사매와 정해, 일방, 그리고 계성이다.”
미소녀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저는요?”
“취아(醉兒). 너는 안된다.”
미소녀는 쌍심지를 돋우며 말했다.
“사저는 되는데 왜 나는 안된다는 거에요?”
진산월은 정색을 했다.
“사매는 예전에 소림사에 가본 적이 있고 몇몇 무림명숙(武林名宿)들과도 어느 정도의 안면이 있다. 그래서 함께 가는 것이다.”
“다른 사형들은요?”
“정해는 꾀가 많아서 이번 여정(旅程)에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방은 한때 하남성에 살아서 그곳의 지리에 능통하니 길 안내를 시키기에 제격이고, 계성은 매이제(梅二弟)를 제외하고는 무공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데려가려는 것이다.”
미소녀는 그의 말에 반박할 곳을 찾지 못하자 입술을 삐쭉거리며 연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사형은 모르겠지만 낙사형은 또 보나마나 가다가 사고나 칠 텐데 꼭 데려가야겠어요? 그리고 응사형은 성격이 못되고 불평불만이 많아서 데려가 봐야 별 재미도 없을 텐데….”
진산월은 이번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웃기만 했다.
미소녀는 다시 조잘거렸다.
“내가 따라가야 가는 도중에도 심심하지 않을 텐데… 밥도 짓고 빨래도 잘하는 내가 따라가야 하는데…”
미소녀가 연신 진산월의 눈치를 살피며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자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너를 데려가야 할 이유를 다섯 가지만 말해 보아라.”
미소녀는 손가락을 흔들며 잽싸게 대답했다.
“그야 쉽지요. 우선 나는 여자니까 밥도 잘하고….”
“또?”
“가는 도중에 사형들의 옷이 더러워지면 빨래도 해주고…”
미소녀는 손가락을 열심히 세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는 바느질도 할 줄 알고… 술도 잘 마셔서 사형들이 심심하지 않게 대작(對酌)해 줄 수도 있고…”
진산월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또…. 또….”
미소녀는 코를 쫑긋거리며 끙끙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무엇보다도 예쁘잖아요. 이제 됐죠? 이렇게 모두 다섯 가지에요.”
진산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말한 건 한 가지도 너를 데려갈 이유가 되지 않는다.”
미소녀는 발끈하여 그를 꼬나보았다.
“왜요?”
“첫째로 식사는 주루에서 해결할 테니 밥을 지을 필요가 없다.”
“빨래는요?”
“옷은 몇 벌씩 가지고 갈 테니 빨 필요가 없을 게다. 그리고 그런 일은 너보다는 일방이 더 잘하지.”
미소녀는 조바심 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나불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게다가 네 바느질 솜씨가 어떻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지. 너에게 옷을 맡기느니 아예 새로 한 벌 사는 게 더 나을 게다. 술은 우리끼리 마셔도 충분하고… 우리는 미인계(美人計)를 쓰러 그곳에 가는 게 아니니 네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너를 데려갈 이유가 되지 않는다.”
미소녀는 잔뜩 심통 난 표정이 되었다.
“쳇…. 정말 대사형은….”
미소녀는 귀여운 코를 이리저리 실룩거리며 뺨이 퉁퉁 부어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진산월을 노려보며 뾰족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대사형은 왜 사저는 사매라고 부르면서 나한테는 사매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거에요?”
진산월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식 웃으면서 뒷통수를 긁었다.
“그것 참 곤란한 질문이군.”
“웃지만 말고 빨리 말해요. 그건 바로 나를 우습게 보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 단지 사매가 두 사람인데 그중 네가 더 어리기 때문에 그냥 이름을 부르는 거란다.”
미소녀는 여전히 뾰로통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가 더 어리다니요? 대사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진산월은 다시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그것 참’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종남파의 아홉 제자 중 제일 막내인 방취아(龐醉兒)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그녀에게 나이를 물어보면 그녀는 항상 ‘여자의 나이를 알아서 뭐 하느냐’고 쏘아붙이고는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결코 나이를 밝히려 하지 않으니 아무도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일전에 낙일방이 계속 끈질기게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자,
“그렇게 알고 싶으면 말해주죠. 내 나이는 열 살은 넘고 아직 육십은 되지 않았어요. 이제 됐죠?”
라고 말하는 바람에 일장 웃음이 터진 적이 있었다.
그 뒤로 그녀의 나이는 종남파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가 되었으며, 모두들 그녀를 ‘미수낭자(未壽娘子)’, 즉 나이를 먹지 않는 낭자라고 불렀다.
미수낭자 방취아는 한참 동안이나 진산월을 득달하다가 진산월이 오늘 저녁에 최고의 닭고기 요리를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겨우 그를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