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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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8화


제7장. 혈라장인(血羅掌印)

독고황의 흑살조력은 정말 무서웠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응계성은 옆구리가 길게 찢어진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같았다. 응계성은 장검을 뽑아들고 필사적으로 독고황의 흑살조력에 맞서갔으나 그 악마같은 손가락은 그의 검세(劍勢)를 너무도 수월하게 뚫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응계성의 전신은 유혈이 낭자했다. 누가 보기에도 그가 독고황의 손에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상원건은 금시라도 응계성이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아 절로 초조한 안색이 되어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하나 진산월의 표정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어 응계성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상원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급히 진산월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떻소? 무슨 방법이라도 써야 하지 않겠소?”

하나 왠걸? 진산월은 별반 표정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응사제는 잘 싸우고 있군요.”

상원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보아도 그가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응계성은 독고황의 조영(爪影)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왼쪽 어깨 부근이 피투성이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독고황의 손가락이 한 치만 더 내려갔어도 응계성의 왼쪽 어깨는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저… 저런!”

상원건의 입에서 다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응계성은 더욱 절박한 상황에 몰려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독고황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상원건은 자신이 나서서 도와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는 동안에 응계성은 용케도 아슬아슬하게 독고황의 살인적인 공세에서 빠져 나와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은 이미 갈가리 찢겨진 채 피로 물든 앞가슴을 송두리째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소?”

상원건은 진산월이 뻔히 응계성의 위기를 보면서도 그를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자 다급한 마음에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진산월은 뒷통수를 긁적였다.

“뭐….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군요. 앞으로는 나아질 겁니다.”

그의 태평스럽다 못해 천연덕스러운 말에 상원건은 대꾸할 말을 잊어 버린 듯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허 참… 정말 모를 사람이로군.’

그는 정 안되면 자신이라도 나설 요량으로 장내의 격전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장내의 상황은 아직도 일방적인 독고황의 우세였다. 하나 잠시 격전을 주시하던 상원건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응계성은 팔을 쳐들 힘도 없어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어야만 했다. 하나 의외로 응계성의 움직이는 모습은 조금도 지치거나 다친 사람 같지 않았다. 분명 응계성이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지만 그의 몸놀림이나 움직임이 느려지기는커녕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민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경과될수록 조금씩 더 빨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독고황은 여전히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응계성을 몰아치고는 있었지만 처음과 같은 매서운 맛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가슴 부근에 상처를 입은 후로는 별다른 부상도 당하지 않은 것 같은데…’

상원건은 혹시나하여 더욱 안력을 돋구어 앞을 바라보았다. 독고황의 손가락은 금시라도 응계성의 목덜미를 움켜쥘 듯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의 이 초식은 귀조색혼(鬼爪索魂)이라는 것으로, 독고황이 가장 자신하는 무공 중 하나였다. 조금 전에 응계성은 이 초식에 의해 하마터면 왼쪽 어깨뼈가 송두리째 박살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데 지금 응계성은 독고황의 손가락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벌써 몸을 옆으로 한 자쯤 이동하여 장검을 내찌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몰리던 응계성의 첫 번째 반격이었다. 응계성이 내찌른 일검(一劍)은 별다른 변화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단지 빨랐을 뿐이다. 무언가 검빛이 번뜩하는 순간 독고황은 시퍼런 장검이 엄밀한 조영(爪影)을 뚫고 자신의 코앞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자식이 아직도 반격할 힘이 남아 있었나?’

독고황은 흠칫하여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응계성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며 연거푸 천하삼십육검중의 천하성산(天河星散), 천하도괘(天河道掛), 천하비사(天河飛寫)의 세 초식을 전개했다. 그의 검초는 질풍같이 빠르고 날카로워 전혀 완만하면서도 장중한 천하삼십육검의 초식 같지 않았으나 그만큼 위력이 대단했다. 독고황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물러서지 않고 양 손가락을 구부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응계성의 장검을 움켜잡으려 했다. 지금까지 응계성은 독고황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을 피해왔으나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둘러갔다.

까깡!

독고황의 손가락과 응계성의 장검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신 터져나왔다.

“윽!”

응계성은 손에 쥔 장검을 통해 엄청난 충격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확실히 정면으로 격돌하게 되면 독고황의 막강한 공력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독고황 또한 오른쪽 소맷자락이 반 자쯤 잘리는 바람에 오른손이 팔목 부근까지 훤하게 드러나 보였다. 독고황은 이름도 없는 풋내기인 응계성에게 소맷자락이 잘려나가자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같은 살심(殺心)이 끓어올라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놈이 정말?”

독고황은 거친 숨을 뿜어내며 흑살조로 응계성의 목덜미를 찍어왔다. 이번에 그는 분기탱천하여 전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올렸기 때문에 거무틱틱하게 변한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응계성은 아직도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하고 팔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독고황이 무서운 기세로 자신에게 달려들자 절로 긴장하여 옆으로 미끄러지듯 세 걸음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반격은 상당히 날카로워서 싸늘한 검기(劍氣)가 금시라도 독고황의 가슴을 가를 듯이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상원건은 응계성이 의외로 독고황의 흑살조에 쓰러지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그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을 보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슬쩍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진산월은 처음과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묵묵히 장내의 격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쪽에 서 있는 낙일방을 손짓해 불렀다.

“일방. 이리 오너라.”

낙일방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장문사형. 무슨 일입니까?”

진산월은 낙일방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무어라고 소근거렸다. 낙일방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상황이 끝나면 계성과 함께 이곳에서 나를 기다려라.”

“장문사형은요?”

“나는 객잔의 후원에 가봐야 겠다. 조금 전에 정해와 사매를 그곳으로 보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쪽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진산월이 이곳을 낙일방에게 맡기고 객잔이 있는 곳으로 갈 듯 하자 상원건이 급히 그를 불렀다.

“정말 이대로 두어도 괜찮겠소?”

그의 말뜻은 아무리 응계성이 지금 잘 싸우고 있다고 해도 응계성과 낙일방 만으로 독고황을 당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조금 고생이야 하겠지만 그는 잘 해낼 겁니다. 그보다 후원 쪽의 상황이 아무래도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때 비로소 상원건은 객잔의 후원쪽에서 희미한 고함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주위를 둘러보니 한쪽에 서 있던 백의공자의 모습이 어느 사이엔가 보이지 않았다. 상원건은 응계성과 독고황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백의공자가 사라진 것을 짐작도 못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이런 창피막심한 일이 있나? 도대체 내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거야. 그나저나 이자의 심계도 보통이 아니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짐작해서 미리 사람들을 그쪽으로 보내다니…’

상원건은 한결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소. 어서 가보시오. 이곳은 내가 지켜보겠소.”

그의 말속에는 여차직하면 자신이라도 뛰어들어 돕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원쪽으로 몸을 날렸다. 상원건은 멀어져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장내를 주시했다. 그때 장내의 상황은 커다란 격변을 일으키고 있었다. 독고황의 흑살조력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응계성은 서너 초를 잘 버텼으나 결국 독고황의 막강한 내공력이 담긴 흑살조를 막지 못하고 위급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원래 독고황의 흑살조는 심후한 내력(內力)을 바탕으로 빠르고 강맹한 위력으로 상대방을 격살시키는 수법이기 때문에 일단 한 번이라도 약세를 보이게 되면 상대는 기세상 도저히 만회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응계성은 전력을 다해 천하삼십육검의 검초를 펼쳐 독고황의 공세 속을 벗어나려 했으나 독고황의 흑살조는 더욱 날카롭게 그의 전신을 짓쳐들어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조차 없었다.

“제길… 빌어먹을….”

응계성은 이를 악물며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나 결국 독고황의 손가락에 왼쪽 옆구리를 가격당하고 말았다.

파아….

그의 옆구리가 너덜너덜해지며 핏물이 뿜어나왔다. 응계성은 한순간 너무도 극심한 통증에 얼굴이 핼쓱해 졌으나 이내 악에 받쳐서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마구 독고황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놈! 죽여 버릴테다!”

독고황은 막 일격을 성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단숨에 응계성을 쓰러뜨리려다 그가 오히려 물불을 안가리고 덤벼들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그는 얼떨결에 뒤로 주춤거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하나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될 줄이야…. 응계성은 원래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오기와 집념이 강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거듭 독고황에게 부상을 당하자 솟구치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젊은 혈기(血氣)가 폭발하여 생사(生死)를 도외시한 채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앞에서 비록 한 걸음이지만 뒤로 물러서고 말았으니 그것은 실로 독고황 답지 않은 실수였다. 평상시의 독고황이라면 물론 이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리 매섭게 공격해도 응계성이 끈질기게 저항하는 바람에 몸이 많이 지쳐서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이다. 독고황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물러서던 몸을 옆으로 움직였으나 그때는 이미 응계성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든 후였다.

쐐쐐쐐!

마치 수십 개의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음향과 함께 응계성의 검에서 노도와 같은 검광(劍光)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순간에 응계성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절초인 천하도도(天河濤濤)와 천하성진(天河星辰), 천하비사(天河飛瀉)를 거푸 전개한 것이다. 그 세 절초는 천하삼십육검 중에서도 강맹하고 번개같이 빠른 초식들이었는데, 이렇듯 연환(連環)으로 이어서 전개하니 그 위력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독고황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전력을 다해 옆으로 몸을 날리며 응계성의 검을 피하려 했다. 하나 그의 몸이 검세(劍勢)를 채 반도 빠져나가기 전에 응계성의 검은 그의 가슴을 피범벅으로 만들고 말았다.

“큭!”

독고황의 커다란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응계성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계속 그에게 바짝 다가서며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팟! 팟!

승부(勝負)는 순식간에 갈라졌다. 독고황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는 가슴이 반쯤 갈라진 데다 옆구리와 허벅지, 그리고 관자놀이 부근에 삼검(三劍)을 맞아 전신에 유혈이 낭자했다. 그야말로 한 순간의 방심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응계성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는 독고황을 내려 보며 마구 소리쳤다.

“덤벼! 덤벼! 이 자식! 죽여 버리겠어!”

그가 금시라도 빈사상태의 독고황을 난도질 해 버릴 듯 하자 낙일방이 뒤에서 다가와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응사형. 됐어요. 이제 끝났어요.”

응계성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너도 봤지? 저놈은… 저놈은 선사를 모독했어!”

“됐어요, 사형.”

“죽여버려야 돼!”

“됐어요.”

낙일빙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몇 차례나 거친 숨을 몰아쉬고서야 응계성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는지 얼굴이 점차로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상원건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동안 우두커니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일방적으로 몰리던 응계성이 단숨에 무림의 일류고수인 독고황을 쓰러뜨린 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일단 흥분하자 선불맞은 멧돼지마냥 거칠게 날뛰는 그의 성격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성격이 너무 급해서 탈이고 또 한 사람은 흥분하면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져서 문제로군. 게다가 그들의 장문인이란 사람은 느긋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니… 정말 희한한 일이야.’

상원건은 십여년 만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종남파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닌 것 같아 괴이하면서도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이자들을 따라다니면 최소한 심심하지는 않겠군.’

그는 싱겁게 피식 웃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네. 종남파의 천하삼십육검이 그토록 난폭하게 펼쳐지는건 처음 보았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으나, 말속에 비웃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확실히 조금 전 응계성이 펼친 초식들은 빠르다 못해 난폭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나 그만큼 위력적이었다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었다.

원래 천하삼십육검은 유유(悠悠)하면서도 웅후함을 지닌 검법이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천하삼십육검을 가장 정통적으로 익혔던 사람은 태평검객 임장홍이었다. 그가 천하삼십육검을 펼칠 때면 그 깨끗한 자세와 도도하면서도 유려한 초식의 흐름에 누구 나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물론 너무 부드러워서 승부를 가르는데는 약점이 있었지만, 정말 멋진 검법이라는데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나 임장홍의 제자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천하삼십육검을 각자의 성격에 맞게 익혔다. 임장홍이 그들을 가르칠 때 결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는 천하삼십육검을 정통적인 방식으로 익힌 자신이 결코 무림의 절정검객(絶頂劍客)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씁쓸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종남의 제자들이 펼치는 천하삼십육검은 비록 똑같은 형식에 똑같은 검로(劍路)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위력이나 외형상의 형태는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투검자 매상이 검을 펼칠 때면 아주 무시무시했다. 천하에 다시 없는 마검(魔劍)을 보는 것 같아 누구나가 섬뜩해 했다. 소지산은 마치 도(刀)를 휘두르듯 천하삼십육검을 펼치곤 했다. 그의 검은 그리 빠르지 않았으나 대신 아주 막강한 힘을 담고 있어서 공력이 약한 사람은 일검(一劍)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었다. 반면에 응계성의 검법은 아주 빨랐다. 빠른데다 그의 불같은 성격이 한 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져서 그야말로 너죽고 나죽기 식의 생사지검(生死之劍)이 되고 말았다. 낙일방은 검법에 대한 조예가 사형제들 중 가장 뒤떨어져서 오히려 장괘장권구식을 더 즐겨 사용했고, 방취아의 검은 비록 다른 사형제들같은 냉혹함이나 웅후함, 난폭함은 없었으나 아주 영활한 맛이 있었다. 종남파에서 도망친 두기춘의 검법은 또 달랐다. 그는 잘생긴 외모 만큼이나 초식에 신경을 써서 자세를 중요시했다. 때문에 그가 펼치는 검법은 깨끗하고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예전에 매상은 두기춘이 검법을 연습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건 검법이 아니라 춤이야. 진짜 싸움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그의 말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두기춘이 너무 허식(虛飾)에만 신경을 쓴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형제들 중 가장 임장홍과 닮은 것이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임장홍만큼 유려(流麗)하고 느리게 검을 펼쳤다. 그의 검은 너무 느려서 어찌 보면 답답할 정도였으나, 임장홍은 그것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너는 강호를 진동시키는 일류검객이 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본 파(本派)의 좋은 장문인이 될 수는 있겠다.”

이것은 진산월의 검법을 본 임장홍이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때 임장홍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상원건이 막 웃으면서 낙일방과 응계성을 향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쾅!

갑자기 주루의 후원쪽에서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져나왔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그들이 채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후원의 한쪽 벽면이 부서지며 누군가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앗? 정사형!”

낙일방이 나온 사람을 보고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자욱한 먼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쓰고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정해였던 것이다. 정해는 품속에 누군가를 반쯤 끌어안다시피하고 있었다. 처음에 낙일방과 응계성은 정해가 안고 있는 사람이 그들의 사저(師姐)인 임영옥인줄 알았다. 하나 자세히 보니 그들이 처음 보는 여자였다. 머리를 허리부근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짙은 남색 경장(輕裝)을 한 젊은 여인이었는데, 안색이 유달리 창백해서 한 눈에 보기에도 몸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정해는 남의여인을 부축해 밖으로 나오다가 낙일방 등을 보자 손짓을 했다.

“빨리….”

낙일방과 응계성은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형. 이 여자는 누구에요? 그리고 사저는…”

낙일방이 채 묻고 싶은 말을 반도 하기 전에 정해는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의 등뒤를 가리켰다.

“사저는 안에 있다. 빨리 들어가서 사저를 도와 주어라.”

낙일방은 더 묻지 않고 채 가라앉지도 않은 먼지속을 뚫고 안으로 몸을 날렸다. 응계성은 막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다 정해를 보며 물었다.

“장문사형은?”

“장문사형은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아니 이곳에 없다니….?”

정해는 마음이 급한지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우선 안에 들어가서 사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자식들의 무공이 만만치 않아서…”

“그 자식들?”

응계성은 도무지 영문을 몰랐으나 정해의 얼굴이 워낙 다급해 보여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해는 그제서야 한시름을 덜은 듯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상원건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안고 있는 여인의 상세(傷勢)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군. 내가 좀 봐도 되겠나?”

정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의여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상대협. 그렇지 않아도 상대협께 도움을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상원건은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강호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우선은 남의여인의 상태를 살피는데 주력했다. 남의여인은 생각보다는 상당히 앳띤 얼굴이었다. 키가 늘씬해서 멀리서 보았을 때는 이십대 초반으로 생각되었으나, 막상 가까이서 보니 열여덟을 넘지 않은 소녀임이 분명했다. 상원건은 남의소녀가 자신의 딸인 상소홍과 비슷한 나이일거라고 짐작했다. 남의소녀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유난히 짙은 눈썹을 하고 있었는데, 앵두 같은 입술을 꼬옥 깨물며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는 모습이 당차면서도 귀엽고 깜찍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입가로는 한 줄기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원건은 그녀의 맥문(脈門)을 짚고는 깜짝 놀랐다. 맥이 너무도 가늘어서 금시라도 끊어질 듯 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별다른 외상(外傷)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상원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소저. 어디를 다쳤소?”

남의소녀는 이마에 진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입술을 깨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상원건은 노련한 인물답게 즉시 짐작하는 것이 있어 다시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가슴이나 배에 부상을 입었소?”

남의소녀의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남의소녀는 몇 번 망설이는 듯 하다가 상원건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만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오, 배요?”

상원건이 다시 묻자 남의소녀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왼쪽… 아랫배에…”

상원건은 내심 난처했다. 왼쪽 아랫배에 난 상처라면 옷을 찢지 않고서는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 언제까지고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남의소녀의 안색은 급속도로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상원건은 결심을 굳히고 남의소녀를 향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저. 이대로 두면 상처가 악화되어 치명적인 일이 벌어질지 모르오. 내게도 소저와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어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구료. 그러니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상처를 치료해야 겠으니 부디 용서하기 바라오.”

상원건이 슬쩍 자신의 딸을 들먹거린 것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였다. 과연 남의소녀는 처음에는 눈에 성난 빛을 떠올렸으나, 상원건의 뒤에 서 있는 상소홍을 보더니 화난 기색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상원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의소녀의 아랫배쪽 옷자락을 길게 찢었다.

찌익!

짙은 남색 경장이 찢겨지자 눈부시도록 하얀 속살이 살짝 드러났다.
정해는 눈치빠르게 벌써 저만큼 떨어진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하나 남의소녀의 얼굴에는 수치심의 기색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상원건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일부러 무시한 채 계속 옷을 조금씩 찢어갔다. 거의 그녀의 배꼽이 드러나 보일 즈음에서야 상원건은 손을 멈추었다.

“으음….”

그의 입을 뚫고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앙증맞도록 귀여운 배꼽 바로 밑에 시뻘건 색의 장인(掌印) 하나가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붉은 색 장인은 소녀의 새하얀 속살에 대비되어 마치 피를 뿜어내는 것처럼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혈라인(血羅印)….”

상원건은 한 눈에 그 장인이 마도(魔道)의 십팔대장공(十八大掌功)에 속해 있는 가공할 혈라인임을 알아보았다.
혈라인은 내가(內家)의 호신강기(護身?氣)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마공(魔功)으로, 그 위력이 악독하고 잔인하여 누구나가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는 무서운 장공이었다.

“혈라인으로 어린 소녀의 아랫배를 가격하다니…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악독한 심보로군.”

상원건은 혈라인 자체 보다는 혈라인을 시전한 자의 냉혹한 손속에 더욱 치를 떨었다.
그는 한동안 남의소녀의 아랫배에 새겨져 있는 혈라인의 장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익힌 사람의 화후(火候)가 칠성(七成)정도 밖에 되지 않아 몸안의 경맥(經脈)을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았군.”

하나 그의 말과는 달리 남의소녀의 상태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시전한 사람의 공력이 조금만 높았다면 남의소녀는 단전(丹田)부위의 경맥이 완전히 파괴되어 즉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상원건은 품속에서 누런 빛이 나는 환약(丸藥) 하나를 꺼내 남의소녀의 입속으로 넣어 주고는 장인이 새겨진 부위의 혈도 십 여군데를 빠른 손길로 눌렀다.
그 손이 어찌나 빨랐던지 남의소녀는 배 부분이 따끔따끔 할 뿐, 그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었다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런 후에 상원건은 뒤를 돌아보며 상소홍을 불렀다.

“홍아야. 이리 오너라.”

상소홍은 눈을 크게 뜬 채 지켜보고 있다가 상원건이 자신을 부르자 황급히 다가왔다.

“아빠. 왜 그러세요?”

상원건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리로 와서 이분 소저의 상처 부위를 추궁과혈(推宮過穴) 하도록 해라.”

상소홍은 잠시 샐쭉하는 표정이었으나 상원건의 엄격한 눈길을 받자 이내 쪼르르 달려와 남의소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세를 정좌(正坐)하고 내공을 운기(運氣)해라.”

“알았어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공력을 일주천(一週天)하여 손가락 끝에 공력을 모은 다음 내가 말하는 혈도 부위를 주물러야 한다.”

상소홍은 상원건의 음성이나 표정이 사뭇 진지한 것을 보고 자신도 괜히 긴장이 되어 바닥에 바른 자세로 앉은 다음 가전(家傳)의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상원건은 곧 혈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인영(人迎), 마천(麻泉), 중완(中脘), 기해(氣海), 횡골(橫骨), 지음(至陰)….”

대략 십 여개의 혈도 이름을 숨도 쉬지 않고 부른 다음 상원건은 상소홍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혈도들을 돌아가면서 계속 지압해라.”

상소홍은 힐끗 상원건을 돌아보았다.

“언제까지요?”

“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그때가 언제인데요?”

상소홍은 다시 조잘거리다가 상원건이 두 눈을 부릅뜨자 급히 입을 다물고는 그가 말한 혈도들을 지압하기 시작했다.
인영혈과 마천혈은 목 부위에 있는 혈도들이고, 중완혈은 가슴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상소홍은 혈도들을 주물러 나가다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다음에 주물러야 할 혈도들은 기해혈과 횡골혈인데, 이것들은 모두 여인의 아랫배에 있는 혈도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같은 여자의 몸이라고는 하나 다른 여자의 중심부근을 만진다는 것은 걸끄러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물며 처녀의 몸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하나 그녀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남의소녀의 아랫배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은 언제부터인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만지는 사람이 이 정도이니 당하는 당사자는 오죽 하겠는가?
남의소녀의 안색은 그야말로 붉다 못해 푸르죽죽 해져서 안스러울 정도였다.
하나 상원건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은 채 남의소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상소홍이 남의소녀의 혈도를 세 번째로 지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남의소녀의 몸이 세차게 부르르 떨리며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욱 창백해졌다.
상소홍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추려 했다.

“멈추지 말고 계속 해라!”

상원건이 버럭 호통을 지르자 상소홍은 황급히 옴추리던 손을 계속 움직였다.

“끄윽….”

남의소녀의 입에서 괴이한 신음이 새어나오며 그녀의 입가로 시커먼 죽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아랫배에 나 있던 붉은 색의 장인이 점점 검은 색으로 변해갔다.
상소홍은 자신의 손가락에 닿는 남의소녀의 몸이 화롯불처럼 뜨거움을 느끼고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상원건의 말대로 손을 멈추지 않고 추궁과혈을 계속했다.
일순,

“합!”

상원건이 낭랑한 기합을 내지르며 혈라인의 장인을 향해서 일지(一指)를 내뻗었다.

팟!

그의 가운데 손가락에서 하얀 섬광이 뿜어나와 혈라인의 장인 한복판에 그대로 격중되었다.

“악!”

그 순간 남의소녀는 고통에 가득찬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됐다. 이제 손을 멈추어도 된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자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상소홍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소홍은 긴장이 풀려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리며 상원건의 품속에 쓰러져 버렸다.
상원건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고했다. 네 추궁과혈 덕분에 조양지(朝陽指)로 그녀의 몸 속에 있는 혈라인의 나쁜 기운을 모두 태워 없앨 수 있게 되었다.”

상소홍은 상원건의 품속에 안긴 채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빠가 조금 전에 시전하신 것이 바로 조양지로군요.”

상원건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조양지를 본 지 무척 오래되었지?”

“벌써 십 여년도 넘은 것 같아요. 그 무공은 언제 가르쳐 주실래요?”

“허허… 지금 네 공력으로는 어림없다. 공력이 최소한 반 갑자(甲子) 이상이 되기 전에는 가르쳐 줘도 펼치지 못하는게 조양지다.”

상소홍은 입을 삐쭉거렸다.

“피! 또 그 소리… 그럼 나는 파파 할망구가 되어서야 그걸 익힐 수 있겠군요?”

“하하… 그렇기야 하겠냐만 적어도 앞으로 몇 년간 열심히 수련하지 않으면 힘들게다.”

상원건은 자신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상소홍을 부드럽게 떼어 놓으며 남의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남의소녀의 아랫배에나 있던 붉은 색의 장인은 어느 사이엔가 거의 사라져 아주 희미한 붉은 빛만이 은은히 보일 뿐이었다. 상원건은 찢어진 옷자락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가리며 정해를 불렀다.

“이보게. 이리 좀 와보게.”

정해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남의소녀를 바라보고는 그녀의 안색에 조금씩 혈색이 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탄성을 터뜨렸다.

“상대협의 무공은 과연 고명하시군요. 저는 이 소저가 대체 무슨 수법에 당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원건은 씁쓸하게 웃었다.

“상처가 그런 곳에 나 있으니 자네가 알아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이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정해는 그제서야 퍼뜩 생각이 난 듯 후원쪽을 바라보았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이럴게 아니라 우선 저 곳으로 가시죠. 그 곳에 가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정해는 상원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후원쪽으로 달려갔다.

“홍아야. 이분 소저는 네가 안고 오너라.”

상원건은 상소홍을 향해 짤막하게 말하고는 자신도 휑하니 몸을 돌려 정해의 뒤를 따라갔다.

“아빠! 내가 어떻게 이 여자를… 아이 참, 아빠!”

상소홍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의소녀를 들쳐 업고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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