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0권 양대호리(兩大狐狸)편 : 1화
제90장. 작전계획(作戰計劃)
밤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와서 사방을 온통 검은 장막으로 휘감아 버렸다. 드넓은 자은사의 경내도 고요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자은사의 후원을 은밀히 움직이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의 신법은 물 흐르듯 유연하고 민첩해서 어둠 속에서 보니 마치 한 떼의 유령(幽靈)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인영들은 후원을 가로질러 자은사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저곳이 확실한가?”
세 인영 중 중앙의 인영이 묻자 가장 앞서 달리던 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자은사에서 시체를 안치할 만한 곳은 저곳밖에는 없으니까요.”
세 인영은 곧 건물에 도착하여 주위를 살피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가로 세로 오 장쯤 되는 장방형(長方形) 공간으로, 한쪽에 불단(佛壇)이 있었고 불단 앞에 이십여 개의 관(棺)이 일렬로 쭉 늘어져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수십 개의 관을 본다는 것은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닐 것이다. 하나 세 명의 인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관들이 놓여진 곳으로 다가갔다.
“저것이로군.”
인영들 중 하나가 불단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관을 가리켰다. 그 관은 여타 관보다 한 배 반쯤 컸는데, 질 좋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져서 한눈에 보기에도 특별한 신분의 시신이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 인영은 미끄러지듯 그 관 앞으로 다가갔다. 세 사람은 관을 내려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중앙의 인영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열지.”
좌측의 인영이 그를 제지했다.
“소제가 관 뚜껑을 열 테니 형님께서는 상흔(傷痕)을 확인하십시오. 빙백검의 흔적을 알아볼 사람은 형님뿐이지 않습니까?”
“알겠네.”
중앙의 인영이 물러나자 좌측의 인영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관 뚜껑을 잡았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무거운 관 뚜껑이 소리도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관 안에는 황색 승포를 입고 양손을 앞가슴에 가지런히 놓은 노승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좌측의 인영이 관 뚜껑을 잡고 있는 사이에 중앙의 인영은 노승의 시신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는 손을 내밀어 노승의 곱게 여며진 옷자락을 풀어 목 부분을 드러나게 했다. 노승의 옷자락을 헤치던 그의 손이 무심결에 노승의 아래턱에 살짝 닿았다.
그 순간 중앙의 인영의 안색이 홱 변했다. 손가락에 닿은 노승의 턱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바로 그때, 미동도 않고 누워 있던 노승의 눈이 번쩍 뜨여지며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안광이 번들거렸다. 대경실색하여 막 몸을 피하려던 중앙의 인영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가슴에는 노승의 양손이 깊숙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중앙의 인영의 입으로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 나왔다. 다른 두 명의 인영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 그들의 바로 옆에 있는 시체의 관 뚜껑이 부서지며 하나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쳐 왔다. 그것은 너무도 찰나의 일인지라, 그들이 피하려 했을 때는 어느새 그들의 머리 위로 그물 같은 섬광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섬광들이 수십 개의 도광(刀光)이라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들의 몸에서 핏줄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가공스럽게도 도광이 채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살이 먼저 갈라지며 핏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끄윽!”
“허억!”
그들은 전신에 핏물을 뒤집어쓴 채 자신들을 암습한 정체 불명의 그림자를 노려보더니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의 몸은 수십 개의 칼날로 난도질한 듯한 처참한 상흔으로 뒤덮여 있었다. 중앙의 인영은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손을 내려보고 있다가 노승을 노려보며 쥐어짜듯 물었다.
“너…… 너는…… 누구……”
노승은 양손을 그의 가슴에 꽂은 채 사이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 지옥에 가거든 사익에게 물어 봐라.”
다음 순간, 중앙의 인영은 자신의 가슴이 갈가리 찢거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입을 딱 벌렸다. 몇 차례 격렬한 몸부림을 치던 그의 몸은 이내 힘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해천팔검 세 사람이 소리 없이 실종되어 수많은 무림인들을 의혹에 빠지게 한 사건의 전말이었다.
아침 햇살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동중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다운 잠을 자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모처럼 깊은 잠을 자고 났더니 머리 속이 개운해지기는커녕 더욱 헝클어져서 어젯밤 일들이 꿈결처럼 생각되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어 문이 열리며 방취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잘 잤어? 동 사질(董師姪)?”
방취아는 침상에 누워 있는 동중산을 보자 방긋 웃었다. 동중산은 황급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방 사고(龐師姑).”
“괜찮아. 누워 있어.”
안으로 들어오는 방취아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가 들려 있었다.
“어젯밤에 아무 것도 안 먹고 자서 출출할까 봐 죽을 끓여 왔어.”
“그러실 필요까지는……”
“괜찮다니까 그러네.”
방취아는 침상 옆의 탁자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는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갑자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방 사고……”
동중산은 그녀의 행동에 놀라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때 그는 그녀의 가늘게 떨리는 음성을 들었다.
“정말 잘됐어. 살아 돌아와서 정말 잘됐어……”
“…”
동중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뺨이 닿은 옷 부분이 축축해졌다. 동중산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녀는 이내 소맷자락으로 손을 훔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뜨거울 때 먹어. 빨리 나아야 초가보 놈들을 혼내 줄 수 있잖아.”
동중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취아는 빨갛게 된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짓더니 그의 손을 한차례 잡아 주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의 모습이 방밖으로 사라졌는데도 동중산은 침상 위에 앉은 채 그녀가 나간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동중산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서 기약도 없는 도망자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잠을 잘 때도 경계심을 늦출 수 없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깨어나지 않아도 되었고, 음식을 먹을 때도 독살(毒殺)당할 걱정에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동중산은 그녀가 남기고 간 접시를 들고 죽을 먹기 시작했다. 한 모금씩 먹을 때마다 전신에서 활력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죽 한 그릇을 모두 비운 동중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방안에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장문인……”
동중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진산월은 부드러운 손길로 제지했다.
“그냥 있거라.”
“제자가 어찌……”
“우리 사이에 그런 격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냐?”
동중산은 일어서는 걸 포기하고 반쯤 일어난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삼 일이면 거동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삼 일이라…… 빠듯한 시간이군.”
“방 사고에게 들었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종남산으로 가실 계획이라면서요.”
“그렇다. 그 문제로 너와 이야기할 것이 있다.”
동중산의 파리한 안색에 한 줄기 밝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말씀하십시오. 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명(身命)을 바쳐 해내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 지금 본산의 현 상황을 그래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너일 것 같아서 물어 보는 것이다. 네가 생각하기에 지금 우리의 전력(戰力)으로 본산을 되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느냐?”
동중산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진산월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제자가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의 인원으로 본산을 되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
“어제 보았던 장문인의 무공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본산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소 사숙과 방 사고, 그리고 제자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어려운 일입니다. 틀림없이 적지 않은 사람이 희생될 텐데, 지금의 본파 실정으로 그중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린다는 건 너무 커다란 손실입니다. 그런 위험을 각오하면서까지 굳이 무리하게 서둘러서 본산을 되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지금 본산을 되찾으려 한다는 건 너무도 위험천만하고 무고한 일이지.”
동중산은 진산월이 자신의 말에 선뜻 수긍을 하자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장문인께선……”
“그래서 나는 더욱더 지금 본산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뜻밖의 말에 동중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진산월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높은 무공이나 많은 인원이 아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필사(必死)의 각오와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굳건한 자신감이다. 지금 물러선다면 비록 당장은 희생을 피할 수 있겠지만, 본산을 되찾고 본파를 재건시키는 일은 더욱 요원(遙遠)해질 것이다.”
“…”
“하나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본산을 되찾게 되면 우리에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들에겐 어쩌면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그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동중산은 한동안 진산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채 허공을 응시하며 우뚝 서 있는 진산월의 모습은 무엇으로도 굽힐 수 없는 거대한 천신상(天神像) 같았다. 동중산은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산월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너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의 희생을 최소화시키면서 본산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물어 보기 위해서 말이다.”
“제자도 아까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본산을 지키기 위해 초가보에서 파견한 사람은 검패 양전을 비롯하여 모두 오십 명 가량 됩니다. 그들 중 무시하지 못할 일류고수들의 수만 해도 열다섯 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정면으로 그들과 격돌해서는 별로 승산(勝算)이 없다고 봅니다.”
동중산의 말은 조금 틀렸다. 별로가 아니라 아예 승산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대왕루의 일로 그들이 경각심을 느끼고 더욱 강한 고수들을 파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해야 할 일급고수들의 숫자가 스물에서 스물다섯 명은 된다는 가정하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지. 양전 외에 주의할 자들은 누구누구냐?”
“현재 본산을 지키고 있는 고수들 중에서는 양전과 칠객 중의 귀혼적(鬼魂笛) 악평(岳平), 독수금륜(獨手金輪) 낙무인(洛無忍), 그리고 팔수 중의 신망(神?) 곡풍(曲馮)과 혈붕(血鵬) 시일해(柴日海) 정도입니다. 하지만 대왕루에서 낭패를 당한 이상 적어도 사패 이상의 고수가 파견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패 이상이라면……”
“쌍염라(雙閻羅)와 오대호법(五大護法)이지요.”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쌍염라는 알겠는데, 오대호법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군.”
“그럴 겁니다. 그들은 모두 최근에 포섭한 자들이니까요. 초가보의 보주가 직접 공을 들여 초빙한 자들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무공 실력이 사패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했다. 초가보의 세력은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막강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세력 확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능히 강호의 어떤 거대문파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초가보를 공격하는 것은 고사하고 초가보에 빼앗긴 본산을 되찾는 일조차도 현재로는 거의 무망(無望)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 방법을 찾아내어야 한다. 진산월은 동중산이 그 방법을 찾아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
“제자에게 한 가지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우리에게도 한 가닥 길이 보일지 모릅니다.”
진산월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동중산은 번쩍이는 외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며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죽은 시신들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시신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술잔을 기울이고 담소를 나누던 동료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백동일은 냉정하기가 얼음장 같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난 사람처럼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독응 위지독은 안색이 새파앟게 질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백동일은 그것이 더욱 못마땅해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몸이 불편하면 먼저 돌아가게. 이곳에 있어 봤자 아무 도움이 안 될 테니.”
위지독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백동일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무림인이 시체를 보고 놀란데서야 말이 되는가? 칼을 잡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미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각오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 각오도 없이 강호로 뛰어들었다면 지금이라도 칼을 놓고 조용히 물러나면 되는 걸세.”
위지독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한결 가라앉은 표정이 되었다.
“두려워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다만 저들 중 몇 사람은 제게는 형제와 같은 사이여서 가슴이 아프군요.”
“어차피 마찬가지야. 우리도 언제 저런 꼴로 나뒹굴게 될지 모르지. 그러니 조금 먼저 갔다고 해서 아쉬워할 필요는 없네.”
위지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불만도 없지는 않았다.
‘당신은 친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겠지. 하지만 막상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닥친다면 생각이 조금 틀려질걸.’
하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백동일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위지독은 그런 사실을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의 비위를 거슬린다는 건 죽음을 각오하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동일은 턱으로 시신들을 가리켰다.
“상흔(傷痕)들을 조사해 보세. 대체 누가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일세.”
시체들은 좁은 골목길의 반경 오 장 정도 되는 공간에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시체의 수는 모두 여섯 구였다.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숫자도 아니었다.
하나 그 시체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중 네 사람은 초가보의 팔웅에 속한 인물들이었으며, 한 사람은 총관 중 하나였고, 마지막 한 사람은 사패 중의 일인(一人)이었다.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는 초가보에서도 이들 여섯 사람은 능히 일류로 분류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특히 권패 봉월은 초가보뿐 아니라 당금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권법(拳法)의 고수(高手)였다.
그런 봉월이 온몸을 벌집처럼 난자당한 채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는 광경은 보는 이들을 경악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위지독은 사수의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그들 중 섬표 곽일명과 폭호 고잔은 특히 그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들은 고향도 서로 가까웠고 나이도 동갑이어서 서로를 타인(他人)으로 여기지 않았다.
친형제들과도 같았던 그들의 비참한 시신 앞에서 위지독은 깊은 슬픔과 흉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느꼈다.
곽일명의 몸에 나 있는 상흔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목의 뒤에서 앞으로 장검에 관통된 자국이 생생하게 나 있었다.
그 상처가 잘려 나간 부위는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장검이 날아드는 위세가 얼마나 강력했으면 목을 관통한 흔적이 이토록 깨끗하단 말인가?’
곽일명은 팔수 중에서도 신법 면에서는 위지독과 함께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렇게 빠른 신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검이 자신의 목을 앞뒤로 관통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고잔의 시신은 더욱 참혹했다.
고잔은 가슴이 한 일(一) 자로 그어진 채 완전히 갈라져서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경악과 공포의 빛이 너무도 뚜렷하게 나 있어서 죽는 순간에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고잔의 가슴에 나 있는 상처도 절단된 면이 너무도 깨끗했다.
가슴 부위는 흉골(胸骨)을 비롯한 뼈가 많아서 깨끗하게 잘려지기 힘든데, 이들을 살해한 자는 마치 진흙이라도 자르듯 가볍게 베어버린 것이다.
광마 철력과 취원 이세기의 시신은 훑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배가 갈라지고 머리가 쪼개진 시신을 봐서 무엇하겠는가?
위지독은 강호무림에서 이와 같은 검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일시지간 떠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석총관의 말로는 이들이 종남파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하나 종남파의 잔당 중에서 이런 실력을 지닌 고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아마도 운 나쁘게도 이들은 중도에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무서운 고수를 만났음이 분명했다.
강호무림에서 검법(劍法)의 최고수로는 모두 세 사람을 꼽을 수 있다.
무림구봉(武林九峯) 중의 일인이며 검봉(劍峯)이라 불리는 화산파의 장문인 육합신검(六合神劍) 용진산(龍眞山), 환우사마(?宇四魔) 중의 일인인 검마(劍魔) 금옥기(琴玉璣), 그리고 마도제일고수인 신목령주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라면 아마 사수 정도는 어렵지 않게 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이 무엇이 아쉬워 장안의 외진 골목에 나타나 이들을 살해한단 말인가?
‘혹시 용진산이 소요검객 사익의 죽음을 본보(本堡)의 소행으로 알고 이들을 살해한 것은 아닐까?’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지나친 억측이 아닐 수 없었다. 용진산은 행동거지가 침착하고 과묵하기로 유명한 인물로, 화산에서 내려온 적은 극히 드물었다. 용진산이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굳이 자신이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이 간단히 수하 제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검마 금옥기와 신목령주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검마 금옥기는 살인을 한 다음 꼭 시신의 귀를 잘라 가는 습관이 있었고, 신목령주의 한목신검에 당한 시신은 전신이 꽁꽁 얼어붙어 있어 한눈에 식별이 되었다.
‘그들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위지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동일을 쳐다보았다. 백동일은 권패 봉월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괴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무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을 본 것처럼 넋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냉정하기 그지없는 백동일에게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위지독은 의아함을 느끼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흉수에 대해 무얼 알아내셨습니까?”
백동일은 그 자리에 못박인 듯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 불쑥 소리쳤다.
“손익의 시체를 살펴보게.”
“예?”
“손익의 시체를 살펴보라니까!”
위지독은 백동일이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은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당혹스런 얼굴로 손익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그와 백동일이 신분의 차이가 난다 해도 이런 식의 태도는 너무 심한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흥분한 거야?’
위지독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말대로 손익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손익의 시신은 그야말로 참혹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전신에 수많은 피구멍이 뚫려 있어서 온몸의 피가 모두 밖으로 흘러 나온 것 같았다. 그중 어느 하나 치명상이 아닌 곳이 없었다.
‘이건 정말 심하군. 한두 군데만 찔러도 충분했을 텐데 이토록 잔인하게 살해하다니…… 손익과 깊은 원한을 맺은 자의 소행인가?’
위지독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백동일이 다시 물었다.
“상흔이 모두 몇 군데인가?”
위지독은 상처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스무 군데입니다.”
“구멍이 뚫리지 않고 검날이 스친 상처는 빼게.”
위지독은 손익의 몸을 다시 한 번 훑어보고는 이내 가슴 부위의 상처 세 개가 여타의 것과는 틀린 것을 알아냈다.
“가슴의 검흔(劍痕) 세 개가 조금 틀립니다. 그걸 빼면 모두 열일곱 개로군요.”
백동일은 잠깐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좀더 자세히 찾아보게. 틀림없이 하나가 더 있을 걸세.”
위지독은 그가 왜 이렇게 상흔의 숫자에 연연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어 다시 찬찬히 시신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문득 손익의 귀밑이 유난히 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부근의 머리카락을 치워 보니 귀밑으로 하나의 깊은 검흔이 드러나 보였다.
“아! 여기 하나 더 있습니다. 똑 같은 모양의 상흔이 열여덟 개로군요.”
백동일의 목소리가 갑자기 조금 떨렸다.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백동일은 갑자기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위지독이 의아하여 쳐다보니 그는 허공을 올려다본 채 혼자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이 어찌나 험악하던지 위지독은 감히 말을 붙여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봉월이 열여덟 개, 손익이 열여덟 개…… 그럼 삼십육방(三十六方)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위지독은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백동일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백동일의 얼굴은 귀신(鬼神)이라도 본 듯 핼쑥하게 굳어져 있었다.
“삼십육방을 모두 점(點) 할 수 있는 초식은 하나뿐인데…… 설마 그걸 익힌 자가 나타났단 말인가?”
한참 동안이나 허공을 노려보며 무언가를 정신없이 중얼거리던 백동일의 두 눈에 무시무시한 신광이 번뜩거렸다.
“어찌되었건 상관없다. 그자가 누구든 내 손에 죽는다는 건 변함이 없다. 내 손으로 반드시 숨통을 끊어 놓고야 말 테다!”
그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오는 음성은 듣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할 정도로 악기가 서린 것이었다. 위지독은 평생을 도산검림(刀山劍林)에 살아오면서 두려움을 모르던 인물이었으나, 백동일의 이런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 오는 것을 느꼈다. 백동일은 위지독이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냉혹하고 독기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위지독이 가장 어려워하는 초가보의 수석총관조차도 백동일을 보고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누구라 할지라도 백동일과 원한을 맺었다면 결코 두 발을 뻗고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백동일은 결코 용서나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위지독은 그 말에 절실히 공감했다. 지금 그는 사수와 손익, 봉월을 살해한 흉수에 대해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을 가졌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백동일 같은 사람이 노리고 있다면 그자의 인생도 참으로 고달프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사 그자가 자신의 철천지원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