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0권 양대호리(兩大狐狸)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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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0권 양대호리(兩大狐狸)편 : 6화


제95장. 결전전야(決戰前夜)

남호가 우려하던 일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닥치고 말았다.
그들이 평안객잔의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막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방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승려를 보았다.
남호는 그들의 손에 들린 선장과 머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계인(戒印)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소림사에서 온 승려들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두 명의 승려는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승들은 소림에서 온 정화와 정선이라 하오. 조일평, 조 시주에게 긴히 여쭐 말씀이 있는데, 어느 분이 조 시주이시오?”

조일평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나요.”

두 명의 승려 중 얼굴이 동그랗고 눈빛이 유달리 반짝이는 승려가 조일평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하더니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뵙게 되어 반갑소. 소승들이 이른 아침에 이렇게 불쑥 조 시주를 찾아온 것은 며칠 전에 취미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묻고 싶은 점이 있기 때문이오.”

조일평의 대답은 너무나 단호해서 무뚝뚝해 보였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달리 할말이 없소.”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매몰찬 대답을 듣고 난 다음에는 하를 내거나 아니면 아예 질문을 포기하고 돌아서 가 버릴 것이다. 하나 그 승려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 시주가 말하기 싫어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아마도 화산파에 적지 않은 시달림을 당했겠지요. 하지만 소승들은 소승들대로의 해야 할 책무가 있으니 양해해 주기 바라오.”

상대가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는데 조일평도 무작정 아무 말도 않겠다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뭐요?”

“조 시주는 굉지 사조를 뵈러 왔다가 취미사에 혈겁이 벌어진 것을 알았다고 했소. 조 시주가 취미사에 온다는 것을 굉지 사조께서 미리 알고 계셨소?”

조일평은 뜻밖의 질문에 날카로운 눈으로 그 승려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달포 전에 미리 서신(書信)을 보내 이맘때쯤 찾아 뵙겠다고 알려 드렸소.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요?”

“조 시주가 취미사를 찾아오는 날과 사 대협이 굉지 사조님을 뵈러 온 날이 똑같았소.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소승은 우연치고는 너무도 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조일평은 한동안 그 승려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교차하면서 거센 불똥이 튀는 듯했다.

“스님의 법명(法名)이 무어라고 하셨소?”

“아미타불, 소승은 정화라고 하오.”

조일평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나, 음성에는 한 줄기 강인함이 담겨 있었다.

“정화 스님, 간단하게 말하겠소. 나는 강호(江湖)에서 벌어진 일에 우연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내가 정 의심스러우면 언제든지 덤비시오. 기꺼이 상대해 주겠소.”

정화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조 시주의 반응은 너무 직선적이구려. 소승은 감당하기 어렵소.”

“나도 더 이상의 번거로움은 감당하기 어렵소. 단순히 혈겁을 처음 발견했다고 흉수 취급을 받는 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소. 그러니 다음에 올 때는 내가 흉수라는 증거를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내 검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오시오.”

정화의 동그란 얼굴에 한 줄기 붉은 홍조가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것이 조일평의 직선적인 말에 화가 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정화는 한차례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소승이 조 시주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조 시주가 혈겁을 발견한 최초의 증인(證人)이기 때문에 좀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려는 것뿐이오.”

조일평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번졌다.

“혈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내가 아닌 다름 자였더라도 이런 추궁을 받았을지 의심스럽군. 굉지대사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대로 각별함을 느끼고 있는 사이였소.”

“그 점은 소승도 알고 있소. 단지 우리는 조 시주께서 당시 현장을 목격하시고 난 후에 무언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않았나 궁금했던 거요.”

“내가 흉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흉수가 상당한 검술의 달인(達人)이며, 흉기로 빙검의 일종을 사용했다는 것뿐이오.”

정화는 조일평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하더니 돌연 화제를 바꾸었다.

“조 시주는 오래 전에 장성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황성고검 나력지 대협의 제자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오?”

조일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는 다시 물었다.

“나 대협은 지금까지 정정하시오?”

“그렇소. 그건 왜 물으시오?”

정화의 두 눈에 기이한 신광(神光)이 어른거렸다.

“소승이 듣기론 과거 나 대협은 열두 초로 된 혈우검법(血雨劍法)으로 장성을 석권했다고 알고 있소. 그 혈우검법 중의 가장 무서운 초식은 혈천홍(血淺紅)이란 것인데, 그 수법은 전문적으로 사람의 인후혈을 노리기 때문에 격중된 사람은 목에 한 방울의 피를 남긴 채 숨이 끊어진다고 하오.”

“…!”

“이십 년 전에 소요검객 사 대협과 싸울 때도 그분은 혈천홍 수법으로 사 대협의 목을 찔러 승리를 거두었다고 들었소. 이제 그동안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으니 그 수법은 더욱 정교하고 무서워졌을 거라고 보는데, 조 시주의 생각은 어떻소?”

조일평의 얼굴에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거요?”

“소승은 단지 아무리 세월이 흘렀더라도 똑 같은 수법에 다시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옛 격언을 떠올렸을 뿐이오.”

조일평은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그가 불문곡직하고 검을 뽑자 정화의 일행이었던 정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남호는 황급히 그를 제지하려 했다.

“왜 이러는 거요?”

조일평의 표정은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은나, 음성만큼은 뼛골이 시릴 정도로 싸늘해져 있었다.

“저자는 나름대로 내가 흉수라는 증거를 댄 셈이오. 그렇다면 내가 할 일도 분명해지지.”

남호는 그의 기세에 압도당해 더 이상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화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담담하게 웃었다.

“소승은 조 시주의 의중을 알 수 없구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광이 어른거렸다.
조일평이 느닷없이 뽑아 든 검으로 그의 목젖을 찔러 왔던 것이다.
장내의 누구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란 경호성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게다가 검이 날아드는 속도는 그야말로 가공(可恐)스러울 정도여서, 설사 알고 있다 할지라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땅!

갑자기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검광이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보니, 조일평이 내뻗은 장검은 정화의 목덜미 한치 앞에서 선장(禪杖)에 가로막혀 있었다.
정화는 들고 있던 선장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막았던 것이다.
조일평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화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이게 이십 년 전의 혈천홍이오.”

정화 또한 언제 자신의 목이 잘라질 뻔했느냐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어떻소?”

“그때의 혈천홍은 이제 십마혈류(十魔血流)가 되었소.”

“십마혈류?”

“열 개의 혈천홍이 동시에 날아들어 전신을 벌집으로 만든다는 뜻이지.”

그 말에 남호와 정선은 나직하게 진저리를 쳤다.
조금 전에 조일평이 발출한 검초는 그야말로 살인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그러한 검광이 동시에 열 개나 날아든다면 천하의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정화는 선장을 거두더니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잘 알았소. 오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오.”

그는 유심한 시선으로 조일평을 응시했다.

“다음에는 소승에게도 기회가 오길 기대하겠소. 그럼 소승들은 이만 가 보겠소.”

이어 그는 아직도 표정이 굳어 있는 정선을 이끌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남호는 한바탕 격전이 벌어질 줄 알았다가 그들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잠시 생각해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풍시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이거 이상하네요. 결코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인상이 아니던데 왜 사형에게 공격당하고도 그냥 가버리는 거지요? 대체 무슨 심산일까요?”

남호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 소협이 흉수가 아님을 확인했기에 물러난 것이겠지.”

“당연히 사형은 아무런 죄가 없죠. 그런데 그 중은 어떻게 그걸 안 거죠?”

“방금 조 소협이 시전한 혈천홍은 비록 위력적이긴 했으나 그자는 막아냈네.”

“그래서요?”

“그가 막을 수 있다면 사익도 막을 수 있었겠지. 다시 말해서 조 소협이 흉수였다면 사익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목을 방비하는 데 신경 썼을 테고, 혈천홍 수법만으로는 그런 사익의 목을 벨 수 없다는 것이지.”

그제서야 풍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중은 사형이 흉수가 아님을 안 거로군요. 결국 사형이 혈천홍을 전개한 건 그 수법으로는 사익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거였군요.”

“그렇지. 어찌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세. 사익 같은 절정고수가 이십 년 전에 당한 유일한 패배의 기억을 잊고 당시 적수의 제자에게 다시 또 같은 수법으로 당한다는 건 별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거든.”

“그런데 그 땡중은 왜 그렇게 엉뚱한 말을 해서 사람의 심기를 어지럽혀 놓은 거죠?”

남호는 빙긋 웃었다.

“조 소협을 보니 호승심(好勝心)이 일어났던 모양이지.”

“예?”

“조 소협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은데,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으니 엉뚱한 트집을 잡았던 거지. 떠날 때 그가 한 말을 생각해 보면, 다음에 다시 조 소협을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도전해 올 걸세.”

풍시헌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망할 놈의 땡중, 만일 그 땡중이 사형에게 도전해 온다면 그전에 반드시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말겠어요.”

남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들이 다시 온다면 그때는 그들도 조 소협의 검고 맞닥뜨릴 각오를 했다는 말이지. 소림사는 누가 뭐래도 당금에서 가장 강력한 문파일세. 이런 일로 그들과 등을 지게 된다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세.”

풍시헌은 볼멘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굳이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온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남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라야겠지.”


주루는 굳게 닫혀 있었다.
닫힌 주루의 문 입구를 서성이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이상하군. 쌍쌍인랑의 흔적이 이 근처에서 사라져 버리다니…’

그는 주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이 안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주루의 문까지 닫혀 있다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그 인영은 주위를 한차례 두리번거리더니 지나가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몸을 날려 후원의 담을 훌쩍 넘어갔다.
주루의 후원에 내려선 그 인영은 후원에서 주루로 통하는 작은 문을 지나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주루 안은 부서진 탁자와 나무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한쪽 벽은 금시라도 무너질 듯 움푹 파여 있어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는 바닥과 벽에 나 있는 흔적들을 보고는 눈을 번쩍 빛냈다.

‘이건 분명히 이랑(二狼)의 귀왕무영륜이 남긴 흔적이다. 과연 그들은 이곳에 왔었구나.’

그의 시선이 한차례 가볍게 흔들렸다.

‘그들이 기문병기를 꺼내 들어야 할 정도로 상대의 무공이 고강했단 말인가? 그녀는 아닐 테고, 대체 그들은 누구와 싸운 것일까?’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나 있는 핏자국으로 향했다.
그 핏자국은 대충 닦기는 했으나 아직도 선명하게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양의 피가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핏자국은 쌍쌍인랑의 것이란 말인가?’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후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후원의 여기저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내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원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 앞에 있는 흙의 색깔이 주위와 미묘하게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그 부근의 흙을 새로 팠다가 다시 덮었기 때문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팡!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깊은 구덩이가 파여졌다.
몇 차례 더 손을 휘두르자 곧 흙 속에 덮여 있는 두 구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남삼을 입은 중년인과 웃통을 벗은 봉두난발의 청년이었다.
그 시신을 발견한 인영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졌다.
그는 재빠른 손길로 두 구의 시신의 상흔(傷痕)을 살펴보았다.
남삼중년인과 청년의 시신에는 수십 개의 시커먼 흔적들이 나 있었다.
무언가 뭉툭한 것에 가격당해 피부가 시커멓게 죽어 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흔적일까? 도(刀)나 검(劍)은 물론 아니고, 봉(棒)이나 곤(棍)의 일종 같은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금 무림에서 쌍쌍인랑을 격살할 만한 곤의 고수가 있었던가? 더구나 이들이 기문병기까지 꺼내 들었는데도 이런 꼴로 만들 만한 자가 있더란 말인가?’

그는 한참 동안이나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뚜렷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죽장(竹杖)의 흔적인가? 개방에서 이들을 쓰러뜨릴 만한 인물은 방주(幇主)인 만리무영개 나자행과 두 명의 호법장로(護法長老), 그리고 삼대비밀조직의 우두머리 정도인데 그들이 아직 장안에 나타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게다가 이 흔적은 죽장치고는 지나치게 무거워 보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일이 꼬이는 느낌이군. 누군가가 쌍쌍인랑을 제거하고 그녀를 구해 갔는데, 전혀 행방을 알 수 없다니…’

한동안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그의 눈에서 점차로 무시무시한 신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자가 누구든 반드시 찾아내어 우리의 일을 방해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다. 누구도 우리의 계획은 저지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그는 이내 두 구의 시신을 옆구리에 끼고는 후원의 담을 넘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양전은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출신이다.
대대로 하남성에는 이름난 검객들이 많이 배출디었는데, 양전 또한 어려서부터 검재(劍才)가 탁월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양전의 스승은 당시 하남성의 십대검객(十大劍客) 중 하나로 명성을 날리던 대풍검(大風劍) 간조명(簡彫明)이었는데, 간조명은 웅혼하고 패도적인 검법으로 상당한 명성을 날린 인물이었다.
간조명을 십여 년 동안 사사(師事)한 양전은 무림에 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락삼검(河洛三劍)을 격파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후 싸우는 족족 승리하여 한때는 상승검객(常勝劍客)으로 불리기도 했다.
삼십대 중반에 그는 우연히 한 사람과 비무를 하여 십여 초만에 어이없는 참패를 했는데, 그가 바로 초가보의 보주인 무영신군 초관이었다.
초관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한 후, 양전은 스스럼없이 그의 수하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칠 년여 동안 그는 초가보의 사패(四覇) 중 하나로 슨꼽히며 명성을 떨쳐오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침착하고 냉정했으며, 말을 아꼈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초관이 종남파의 본산을 지킬 책임자로 그를 지명하자 자발적으로 그를 따라나선 사람들이 이십여 명이나 될 정도였다.

지금 양전은 뜻밖에 찾아온 사람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중 두 명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쌍둥이 형제였고, 한 명은 오십대 후반의 체구가 유난히 호리호리한 중노인이었다.
하나 양전이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그들과 동행한 사십대 중반의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었다.
그 중년인은 입가에 자신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미소만큼이나 태도 또한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양 형, 그동안 수고 많았소. 앞으로는 내가 일을 담당할 테니 양 형은 좀 쉬시구려.”

“총관의 지시오?”

“그렇소. 아무래도 요즘 종남파 잔당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총관께서 우려하고 계시오.”

총관의 지시라는데 양전이 더 무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알겠소. 그럼 종리 형께서 일을 맡아주시오.”

건장한 중년인은 수석총관인 소면호리 악종기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철혈수사(鐵血秀士) 종리황(鍾里皇)이라 했다.
그의 공식적인 직급은 초가보의 순찰(巡察)이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총관인 악종기와 비슷하게 취급을 했다.
악종기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악종기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슷한 서열의 사패에 속한 양전도 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 양전은 종리황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가 평소에 악종기의 신임을 믿고 너무 거들먹거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다짜고짜 밀고 들어와 양전의 지휘권을 빼앗다시피 가져가 버렸다.
악종기의 명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전으로서는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악종기가 양전의 힘으로는 이곳을 지키기 힘들다고 판단했다는 반증(反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종리황과 동행한 세 사람도 모두 양전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쌍둥이 형제는 각각 혈염라(血閻羅) 정혼(程琿)과 청염라(靑閻羅) 정탁(程琢) 이라 했다.
초가보에서는 그들을 쌍염라(雙閻羅)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그들이 지옥의 염라대왕만큼이나 무서운 인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특이한 혈염신공(血焰神功)과 청염신공(靑焰神功)을 연마하여 전신이 거의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경지에 올라 있을 뿐 아니라, 손속이 잔인하고 매서워서 사패보다 오히려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양전이 보는 견지에서 그들은 인간 백정과 다름없는 인물들이었다.
무공에만 빠져 있고, 일단 손을 쓰면 절대로 상대를 살려 두는 법이 없어 양전도 그들에게는 얼마쯤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의 내력은 쌍염라보다 오히려 더 대단했다.
노인은 초가보에서 최근 들어 포섭한 다섯 명의 호법(護法) 중 한 사람이었는데, 초가보주가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노인은 등에 둘둘 만 길다란 물체를 메고 있었는데,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것이 창(槍)의 일종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저것이 강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패왕신창(覇王神槍)이로군.’

양전은 직접 본 일은 없었지만 노인의 창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노인은 패왕창(覇王槍) 전괴(典魁)라는 인물로,
하남성과 섬서성 일대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무명(武名)을 떨친 절세고수였다.

그가 사용하는 창은 무게가 거의 팔십 근이나 되었는데, 그것은 여타 창에 비해서 세 배 이상이나 무거운 것이었다. 그 창이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패도무쌍(覇道無雙)한 위력은 가히 가공스러울 정도하고 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전괴가 팔십 근이나 되는 창을 무섭게 휘두르는 광경은 언뜻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강호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전괴는 젊은이 못지않은 강인한 근력(筋力)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종리황이 손뼉을 치며 활기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 어디부터 시작할까? 양 형, 우선 이 일대의 지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지 않겠소?”

양전은 품속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내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종남파의 건물은 모두 일곱 채이며, 외부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은 세 군데가 있소.”

그는 지도에 붉게 표시된 세 개의 화살표를 가리켰다.

“우선 제일 큰 출입구는 자오진에서 올라오는 길이오. 이 길이 사실상의 주로(主路)라고 할 수 있소. 이곳은 현재 귀혼적 악평이 여덟 명의 무사를 데리고 지키고 있소.”

“다른 두 곳은 어디요?”

“서쪽의 규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조사전(祖師殿) 뒤쪽에 도달할 수 있소. 여기는 신망 곡풍과 혈붕 시일해가 여섯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잠복해 있소.”

양전은 손가락으로 가장 우측의 화살표를 짚었다.

“마지막으로 동쪽의 취화산(翠華山)을 넘어오는 길이 있소. 이쪽이 사실 종남파로 몰래 잠입하기에는 제일 적합한데, 그래서 독수금륜 낙무인에게 육태세(六太歲)와 함께 이곳을 맡게끔 조치하고 있소.”

“이들 세 곳 외에는 종남파로 들어오는 길이 없소?”

“남쪽에서 절벽이라도 타고 내려오지 않는 한 다른 길은 없소.”

종리황은 빙긋 웃으며 양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양 형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구려. 적절하게 안배를 한 것 같소.”

양전은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머지 스물두 명은 이 태화각(太和閣)에서 대기하며 수시로 그들과 교대를 하고 있소. 지금까지는 이교대를 했으나, 부하들이 너무 피곤해 하니 인원을 보충해서 삼교대를 했으면 하오.”

“지금 당장은 힘들 거요. 양 형도 알다시피 이제 며칠 후면 삼보회동이 있지 않소? 그 회동이 끝나면 이곳에 대해서도 총관께서 다른 지시를 내릴 테니 그때까지는 힘들어도 어쩔 수 없소.”

종리황은 잠깐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시다. 서쪽 규봉에서 조사전으로 내려오는 길은 자세가 험해서 굳이 그렇게 많은 인원이 지킬 필요가 없을 듯 하오. 그러니 곡풍과 시일해에게 각기 세 명씩의 수하를 맡겨 그들 자체만으로 이교대를 하게 하시오. 그러면 다른 쪽의 교대가 조금 더 수월해질 거요. 그리고 남쪽 절벽도 그냥 방치해 놓을 게 아니라 눈치가 빠른 자 두세 명을 잠복시켜 놓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게 좋겠소.”

“그렇게 하겠소.”

“서로간에 연락 신호를 좀더 명확히 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아무 연락이 없으면 그쪽으로 즉시 고수들을 파견해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시오.”

“알겠소.”

양전은 내심 종리황의 판단에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확실히 건방진 면이 있기는 했지만 종리황은 일 처리만큼은 누구보다도 분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점이 악종기가 그를 신임하는 이유일 것이다. 종리황은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형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복지(福地)로군.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별볼일 없는 놈들만 모여 있다가 망하고 말았는지 모르겠군.”

그는 이내 고개를 쳐들고 양전과 다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며칠 고비요. 삼보회동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 종남파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이제 그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오. 그때쯤에는 누구도 종남파 따위는 기억도 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이 아래를 곧장 내려가면 조사전이 나옵니다.”

동중산은 손으로 가파른 능선의 아래를 가리켰다.

“문제는 저곳이 몹시 험준해서 웬만한 사람은 쉽게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저곳은 아무래도 방 사고께서 수고하셔야겠습니다.”

종남파의 제자들 중 신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방취아였다. 방취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둬. 그런데 그들도 틀림없이 지키고 있을 텐데…”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경비가 소홀할 게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다른 곳에서 소란이 벌이진다면 아무래도 그쪽으로 신경을 쏟을 테니 어렵지 않게 조사전으로 잠입할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그런데 왜 하필 조사전이야? 그 근처에는 태화각과 청풍각(淸風閣)이 있는데, 그쪽이 더 낫지 않겠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뭔데?”

“조사전은 본파의 다른 건물에 비해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 있으면 최악의 경우에도 퇴로(退路)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랬군. 하지만 공격도 하기 전에 도망칠 곳부터 먼저 알아보다니 너무 비관적인 생각 아니야?”

“그게 병법(兵法)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조사전은 단순히 퇴로뿐 아니고 본파 선조들의 영령(英靈)이 깃들인 곳이므로 하루빨리 되찾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리상으로도 태평각(太平閣)과 가까워서 나중에 일을 도모하기에도 적합하고 말입니다.”

방취아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싱긋 웃었다.

“이제 보니 아주 복잡 미묘한 문제가 있었군 그래.”

동중산은 외눈을 번쩍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은 장문인께서 얼마나 신속하고 은밀하게 태평각으로 들어가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태평각의 잠입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들을 혼란스럽게 해서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동중산의 계획은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것이었다. 그 중심 축에는 물론 진산월이 있다. 하나 그외의 다른 사람들의 역할도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그때 서문연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한테도 좀더 그럴싸한 일을 맡겨주세요.”

“소저에게는 조금 전에 할 일을 이야기해 줬지 않소?”

서문연상은 퉁퉁 부은 모습이었다.

“그게 일이에요? 심부름이지. 나는 좀더 멋진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저 여자처럼 건물 하나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정문으로 쳐들어가 솜씨를 보여 주고 싶단 말이에요.”

방취아가 냉소를 날렸다.

“남들에게 주목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군.”

서문연상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누가 당신에게 물었어요? 남이야 주목을 받든 말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뭐라고?”

방취아가 쌍심지를 곤두세울 때, 동중산이 조용히 웃으며 그녀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소저의 일도 무척 중요하오. 경우에 따라서는 건물 하나를 빼앗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소.”

서문연상은 귀가 솔깃한지 표정이 풀어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왜 소저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소저가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잘 소화해 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이 한층 더 수월해질 수도 있소.”

서문연상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을 한번 믿어 보죠. 하지만 다음에는 좀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겨 줘야 해요.”

그녀는 아마도 이번 일을 한 문파의 존망(存亡)을 가름하는 중대사가 아니라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무대의 공연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하나 동중산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못마땅해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오. 다음에는 소저도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게 될 거요.”

이번에는 장승표가 툴툴거리며 나섰다.

“왜 나한테는 아무 것도 안 시키는 거요? 내가 사냥만 할 줄 아는 무지렁이라서 무시하는 거요?”

“장 형도 물론 할 일이 있소.”

장승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색을 했다.

“오! 과연 동 형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려. 내가 할 일이 뭐요?”

“우리가 올 동안 산짐승들을 잔뜩 잡아서 음식을 푸짐하게 마련하는 거요. 일을 마치면 무척 시장할 테니 가급적이면 많이 준비해 주었으면 좋겠소.”

장승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뭐야? 날 보고 음식이나 만들라고? 이제 보니 동 형이 날 아주 우습게 보는구려. 그런 하찮은 일이나 시키고…”

“그건 하찮은 일이 아니오. 장 형이 우리를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서 힘이 솟구쳐 오르고 있소. 그건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요.”

진산월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예전에 끓여 주었던 꿩고기 국을 먹고 싶소. 그때의 맛은 잊을 수가 없을 거요.”

장승표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래? 진 아우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걱정 말게. 이제껏 먹어 보지 못했던 최고의 음식들을 준비하겠네. 물론 꿩고기 국도 잊지 말고 만들어 두지. 대신…”

장승표가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묵직하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와야 하네. 기껏 음식을 만들어 놨는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절대로 용서치 않을 걸세.”

모두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중산이 그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걱정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가 만든 음식을 먹고야 말 테니…”

서문연상이 재빨리 조잘거렸다.

“하나는 간을 조금만 넣고 싱겁게 해주세요.”

장승표가 히죽 웃었다.

“맵지도 짜지도 않게 말이지? 알았으니 염려는 붙들어매 놓게, 아가씨.”

모두들 각자의 맡은바 역할을 되짚어 보았다. 아무 일도 맡지 않은 사람은 방화와 유소응뿐이었다. 방화는 그 점이 못내 아쉬웠던지 진산월을 향해 우물쭈물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저…”

진산월은 그의 의중을 짐작하고 유소응과 그를 조용히 불렀다.

“너희 둘은 나를 따라와라.”

그는 그들을 데리고 동굴을 벗어났다. 동굴 주위는 유난히 기암괴석들이 많았고, 산세가 험해서 조금만 발을 잘못 놀려도 금세 미끄러져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얇게 얼음이 깔려 있는 바위들이 많아서 더욱 조심해야 했다. 진산월은 그들을 동굴에서 삼십여 장쯤 떨어진 커다란 바위 위로 데리고 갔다. 그 바위는 거북이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주위의 수많은 암석들 중에서도 유달리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그 바위 위에 올라서자 종남파의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내일 너희들은 이곳에 있거라.”

방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이곳에는 왜?”

“방화, 너의 임무는 소응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응은 일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유소응이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제자는 이번 일에 동참할 수 없는 겁니까?”

“물론 너도 동참한다. 이곳에서 앞으로의 일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것이 네가 이번 일에 동참하는 길이다.”

유소응의 작은 얼굴에 한 줄기 아쉬움의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꼭 칼을 들고 싸움터에 뛰어드는 것만이 함께 싸우는 것은 아니다. 멀리서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다른 사숙들과 사고도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

“너는 이곳에서 우리들이 본파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싸우는지 똑똑히 지켜보아야 한다. 비록 몸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마음만은 우리와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유소응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은 홀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루지 못할 꿈이란 애초부터 없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이다. 꿈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유소응과 방화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어느사이엔가 소지산과 방취아, 동중산, 장승표 등이 모두 나와 그들의 옆에 서서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연히 허공을 응시하는 진산월의 얼굴에는 말로 형용키 어려운 괴이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을 함께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같은 운명(運命)을 살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 있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마음속의 꿈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하나인 것이다.”

유난히 푸른 하늘이 진산월의 눈을 찔렀다. 진산월은 그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느냐, 일방, 계성… 그리고 사매! 틀림없이 이 하늘 아래 살아 있다면 우리와 이 자리에서 함께 하는 것이겠지?’

하늘 멀리 어딘가에서 그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물론입니다, 장문사형! 우리도 본산을 되찾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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