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0권 양대호리(兩大狐狸)편 : 7화
제96장. 결전당일(決戰當日)
종남산에 아침이 밝았다. 새벽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 차고 맑았다. 그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소지산은 산문(山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지산은 안휘성(安徽省) 회남(淮南) 출신이다. 나이는 올해 스물 셋. 나이는 응계성과 동갑이었으나, 입문이 석 달 빨라서 그보다 항렬이 높았다. 그의 아버지는 관원(官員)이었는데, 옥사(獄事)와 연루되어 파면당하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당시 소지산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그후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장강(長江) 일대를 전전하다가 삼 년 후의 대홍수(大洪水) 때 어머니마저 잃고 고아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무척 쾌활한 아이였던 그가 말을 잘 안 하게 된 것은 이때의 고통스런 생활 때문이었다. 입에 발린 천 마디의 말보다는 꼭 필요할 때의 한줌의 음식과 한번의 손길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육 개월 동안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했다. 그러다 마침 장강을 건너기 위해 부둣가에 왔던 임장홍을 만나 그의 제가가 되었다. 임장홍이 그를 제자로 거두어들인 것은 나이답지 않게 의지견정(意志堅定)한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임장홍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가면 부귀(富貴)나 영화(榮華)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추위와 굶주림은 벗어날 수 있으며, 적어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를 느끼며 살 수 있지. 나를 따라가겠느냐?”
소지산은 임장홍의 선량한 눈과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는 마른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 있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소지산이 삼 개월 동안의 긴 여정(旅程)을 거쳐 임장홍과 함께 종남산에 도착한 것은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사형과 한 명이 사저가 있었다. 소지산은 지금도 진산월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잘 왔다. 배고프지? 내가 맛있는 닭죽을 끓여 주마.”
자신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듬직한 체구의 소년이 밝게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가자 소지산은 한동안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색이 한 문파의 대사형인 자가 어찌 저리도 경박하단 말인가? 오히려 이사형(二師兄)이 훨씬 더 과묵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사형이 나이도 대사형보다 몇 살이 더 많았다. 단지 입문이 조금 늦어 아래 서열이 된 것이다. 조금 후에 다시 나타난 진산월의 손에는 과연 뜨거운 김이 모락 나는 닭죽이 들려 있었다. 그 닭죽을 한 모금 먹은 소지산은 다시 한번 놀랐다. 지금까지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한쪽에 서서 소지산이 정신없이 닭죽을 먹는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닭죽을 다 먹은 다음 소지산은 딱 한마디만 했다.
“맛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진산월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좋은 사제(師弟)가 될 것이다.”
인사치고는 참으로 이상한 인사였으나, 소지산은 그 어떤 칭찬보다도 뿌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 응계성이 들어왔고, 다시 석 달 뒤에 이사형이 사문을 나갔다.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종남파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으며, 소지산의 개인 신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두 명의 사형고 한 명의 사저가 차례로 떠나고 그는 진산월에 이은 종남파의 이인자(二人者)가 되었다. 진산월마저 실종된 삼 년 동안은 아예 종남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야만 했다. 그 위치에 있게 되자 비로소 그는 그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한 문파를 책임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안고 사는 것이었다. 그 어깨에 주어지는 막중한 책무(責務)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종남파를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는 진산월의 귀환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이제 진산월이 자신에게 맡긴 지시를 완수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종남파의 산문을 찾아온 것이다. 진산월의 지시는 간단했다. 최대한 소란스럽게 하고 시간을 끌라는 것이었다. 산문으로 다가가니 눈에 익은 그리운 풍경들이 나타났다. 몇 년 전에 매상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던 산문은 응계성의 노력으로 제 모습을 되찾았었다. 하나 육 개월 전에 초가보의 침입 때 다시 한번 파괴되어야만 했다. 지금은 당시의 부서진 산문 대신 오동나무에 붉은 칠을 한 거대한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산문 너머로 태화각고 청풍각 등의 건물들이 보였다. 태화각은 종남파의 건물들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중요한 회의를 하거나 연회를 할 때 주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몇 년 전에 진산월이 중원행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성대한 주연(酒宴)을 배풀던 곳도 저곳이었다. 그때의 풍경과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 한데, 그들 중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청풍각은 두기춘과 소지산이 거처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이름 그대로 깨끗하고 정갈해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여름날에 이층 누각에 앉아 있으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취해 시간 가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두기춘이 만년삼정을 훔쳐 달아난 후 그 건물은 소지산 혼자 사용하고 있었는데, 소지산은 늦은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아예 이층에 침상을 놓고 거기에서 잠들곤 했다. 소지산은 붉은 색 대문 앞에 우뚝 선 채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한차례 깊은 호흡을 했다. 그
다음 전력을 다해 오른손으로 대문을 후려쳤다.
꽝!
이른 새벽의 정적을 깨는 굉음이 종남산 전체를 뒤흔드는 듯 했다. 그 소리에 놀란 듯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한 무리의 인영들이 산문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부서진 산문을 보더니 재빨리 소지산을 에워쌌다.
“웬 놈이냐?”
소지산은 그들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책임자가 누구냐?”
장한들 중 얼굴이 유달리 검은 인물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나다.”
“이름은?”
“흑면호(黑面虎) 나달(羅達)이다. 너는 누구냐?”
소지산은 그들이 모두 여덟 명이며, 그들 중 다섯 명은 그저 그런 자들이지만 나달을 비롯한 세 명은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다. 소지산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들을 살펴보고만 있자 나달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네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소지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본산을 되찾으러 온 사람이다.”
나달의 옆에 서 있던 얼굴이 길쭉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중년인이 나달의 귀에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나달의 검은 얼굴에 한 줄기 냉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했더니 종남의 떨거지로군. 혼자 제 발로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그 담력은 인정해 주겠다. 하지만 명년(明年)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테니 안타깝구나.”
나달이 슬쩍 눈짓을 하자 소지산의 뒤쪽에 있던 무사 두 명이 소리 없이 달려들었다. 소지산은 그들의 공격이 지척에 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벼락같이 몸을 돌리며 검을 뽑았다.
팟!
눈부신 검광이 주위를 밝힘과 동시에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악!”
“크윽!”
소지산의 뒤에서 달려들던 두 명의 무사들이 제각기 가슴과 옆구에 일검(一劍)씩을 맞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달의 눈꼬리가 쭈욱 찢어지며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제법 한 수가 있구나. 하지만 그 정도 솜씨로 혼자 이곳에 찾아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로구나.”
나달이 눈짓을 하자 소지산을 에워쌌던 장한들 중 세 명이 한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나달의 양쪽 옆에 서 있던 얼굴이 길쭉한 중년인과 체구가 커다란 중년인이 어슬렁거리며 소지산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은 나달과 함께 파동삼호(巴東三虎)라 불리는 인물들로, 얼굴이 길쭉한 중년인이 냉혈호(冷血虎) 곽비(藿丕)였고, 체구가 큰 중년인이 패력호(覇力虎) 우위광(禹威光)이라 했다. 파동삼호는 하남성에서는 적지 않은 명성을 쌓은 고수들이었으며, 특히 그들 중 우두머리인 흑면호 나달은 투박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손속이 날카롭고 매서워서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나달은 소지산의 검술을 한번 보고는 자신들 파동삼호만이 그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부하들을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상당히 냉정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냉혈호 곽비였다. 곽비는 어느 틈에 빼들었는지 손에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를 들고 소지산의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단순 무식한 것 같아도 그가 덤벼드는 기세가 무척이나 흉폭해서 소지산으로 하여금 심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소지산은 피하지 않고 장검으로 곽비의 앞가슴을 찔러 갔다.
땅!
삼첨양인도와 장검이 정면으로 격돌하며 불똥이 튀었다. 곽비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반면에 소지산은 계속 돌진하며 그의 앞가슴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패력호 우위광이 우렁찬 고함을 내지르며 오른 주먹을 소지산의 등을 후려쳐 왔다.
“우와압!”
소지산이 계속 곽비의 앞가슴을 향해 검을 날리면 비록 곽비의 가슴을 벨 수 있지만, 그도 또한 우위광의 주먹에 등을 격중당할 것이 뻔했다. 더구나 우위광의 주먹은 위력이 강한 통배권(通背拳)의 일종이어서, 제대로 맞으면 등뼈가 박살날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소지산은 옆으로 몸을 움직여 우위광의 주먹을 피하며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성진(天河星震)과 천하도괘(天河道卦)의 초식을 거푸 펼쳐 우위광과 곽비의 몸을 검세에 휘감아 갔다. 한데 막 그들의 몸을 향해 검을 휘날리던 소지산은 갑자기 머리 위쪽에서 한 줄기 강력한 압력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쾅!
벼락이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파여 버렸다. 어느새 나달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강력한 일장(一掌)을 퍼부었던 것이다. 나달이 사용하는 장력은 쇄심장(碎心掌)이라는 것으로, 일격에 사람의 가슴뼈를 으스러뜨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달까지 싸움에 가세하자 소지산도 일시지간은 제대로 공세를 취할 수가 없었다. 나달의 쇄심장에 우위광의 통배권, 그리고 곽비의 삼첨양인도가 교묘한
배합을 이루며 지금까지와는 달리 소지산을 무섭게 압박해 들어갔던 것이다.
한동안 네 사람은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누구도 특별히 우세하지 않은 가운데 장풍과 검광이 장내를 뒤덮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하나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휘익!”
그 휘파람 소리는 상당한 공력이 실려 있어 모든 이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나달 등의 얼굴에 일제히 희색이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소지산의 검세가 갑자기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눈이 부시도록 현란하고 변화무쌍한 움직임이었다.
나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크악!”
비명이 터져 나오며 우위광이 양팔을 잘린 채 뒤로 물러나다가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나달과 곽비는 대경실색하여 전력을 다해 대항했으나, 소지산의 갑작스레 변한 검법은 그 위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억!”
곽비가 삼첨양인도를 떨어뜨리고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달 또한 오른쪽 팔이 피투성이가 된 채 뒤로 물러났다.
“멈춰라!”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벼락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하나 소지산의 검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달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왔다.
“크흑!”
마침내 나달은 견디지 못하고 앞가슴에 피분수를 뿌리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와 함께 장내에 검은 장포를 걸친 괴인이 나타났다.
괴인은 자신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그 짧은 순간에 파동삼혹가 모두 피를 뿌리며 쓰러진 것을 보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악독한 놈이로군.”
검은 장포의 괴인은 오십대 후반의 중노인으로, 눈꼬리가 쭉찢어져서 음독하고 잔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흑포노인의 옆구리에는 은은한 검은 빛을 띠는 피리 하나가 꽂혀 있었다. 흑포노인의 시선이 장내에 우뚝 서 있는 소지산에게로 향했다.
“네놈은 지금까지 노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고 있었구나.”
흑포노인의 음성은 표정만큼이나 음산하고 칙칙했다.
소지산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모습을 살피더니 이내 허리춤에 꽂혀 있는 피리를 발견하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귀혼적 악평이오?”
“그렇다. 네놈은 누구냐?”
소지산은 수중에 들고 있는 장검을 한차례 흔들었다.
“나는 종남파의 소지산이오.”
“네놈이 소지산이구나. 몇 달 동안 꽁꽁 숨어 있던 놈이 제발로 찾아왔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그동안 몇 가지 재주를 배운 모양이구나.”
소지산이 조금 전에 파동삼호를 쓰러뜨린 수법은 진산월에게서 최근에 배운 낙하구구검이었다. 소지산은 그중에서 전반부의 삼 초를 거푸 펼쳤는데, 그 위력은 실로 흡족할 정도였다. 하나 귀혼적 악평은 파동삼호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그는 초가보의 칠대빈객 중 한 명으로, 소지산이 일전에 손속을 겨루었던 칠살추명조 손익보다 오히려 무공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시 소지산은 손익의 손가락 무공을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났었는데, 오늘 그보다 강한 악평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악평은 소지산이 파동삼호를 쓰러뜨릴 때 사용한 검법이 약간 꺼림칙하게 생각되었다.
워낙 빨리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무척 변화무쌍하고 절묘한 위력이 있는 검법 같았던 것이다.
‘이놈이 종남파의 실전된 절학이라도 익힌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혼자 이곳에 온 것은 이상한 일이구나.’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특별히 수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종남파에 잔당이 남아 있어 봤자 두세 명에 불과하다. 이놈이 검법 하나를 새로 배워 호기(豪氣)만을 앞세우고 이곳에 온 모양인데,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를 곧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겠다.’
악평은 허리춤에 꽂혀 있던 피리를 뽑아 들며 소지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두 눈에서는 진득한 살광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소지산은 장검을 힘주어 잡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악평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 악평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싶을 뿐이었다. 악평은 귀혼적을 손에 든 채 악귀와 같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삐이익!
귀혼적이 움직이면서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괴이한 음향이 발출되었다.
그것이 바로 듣는 순간 사람의 마음까지 멈추게 한다는 귀혼성(鬼魂聲)이었다.
방취아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이미 소지산이 정문으로 들어간 지 일각(一刻)이나 경과했다.
‘열을 센 다음에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문득 고개를 내려보니 자신의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사실 무서웠다.
원래 남과 싸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검을 들고 죽기 살기로 싸워 본 것은 육 개월 전에 초가보의 습격 때가 유일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싸워야만 할 때였다.
단 네 명의 인원으로 수십 명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종남파의 본산을 쳐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발상이었지만, 그래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럴 때 쓰려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무공수련에만 열중해 오지 않았던가?
장문사형이 절정고수가 되어서 돌아온 게 그렇게 든든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자신은 자신이 맡은 일에만 충실하면 된다.
나머지는 모두 장문사형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녀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셋… 둘… 하나…!’
그녀는 비호처럼 몸을 날려 산 아래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규봉의 능선에서 종남파로 내려가는 길은 유달리 경사가 가파르고 산세가 험해서 평상시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종남파에서 조사전을 이쪽에 둔 것도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마치 외부의 침입자처럼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서 조사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방취아는 한 마리 새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험한 산길을 빠르게 치달려갔다.
그녀가 익힌 것은 종남파의 비전인 비연신법이었다.
비연신법은 점창파(點蒼派)의 응조칠식경공(鷹爪七式輕功)이나 화산파의 청운신법(靑雲身法)에 비길 만한 뛰어난 경공신법으로, 완벽하게 익히면 말 그대로 한 마리 제비처럼 자유자재로 허공을 선회할 수 있었다.
그녀의 비연신법에 대한 조예는 종남파의 제자들 중 단연 뛰어나서, 적어도 신법에 관한 한은 그녀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절정고수가 된 진산월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종남제일영(終南第一影)이라 할 만 했다.
방취아가 신법에 매진하게 된 것은 천부적으로 몸이 가벼운 탓도 있었으나, 자신만의 장점을 갖고 싶은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검법으로서는 사저인 임영옥을 따라갈 수 없고, 그외의 나머지 면으로도 다른 사형들을 능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방취아는 남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신법과 지법(指法)에 몰두해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종남파에만 있는 바람에 남들과 싸워 본 경험이 거의 없어 실전(實戰)에서의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육 개월 전의 일은 그녀에게 무공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한 소중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방취아는 험한 산길을 거의 내려가서 조사전이 지척에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다.
‘이쯤에서 매복이 있을 거라고 했지.’
그녀는 동중산의 말을 기억해 내고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금 전보다 한결 신중해진 동작으로 전진했다.
아니나 다를까?
급격한 경사를 이룬 커다란 바위 사이를 막 지나려 할 때 거친 숨소리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녀의 양옆으로 덮쳐 왔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른발로 왼발이 발등을 밟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아!”
두 인영 중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빠른 속도로 내려오던 그녀의 몸이 허공에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그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하나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신형이 채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 하나의 인영이 허공에 떠 있는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보니 매복해 있는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던 것이다.
허공에 고정된 듯 했던 방취아의 몸이 한차례 미묘하게 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아래도 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무거운 돌멩이를 매단 듯한 그 초식은 비연신법 중의 비연천림(飛燕穿林)이라는 수법이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은 세 명의 암습자를 피해 바닥에 내려섰다.
그녀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 세 명은 방취아의 뛰어난 신법에 놀랐는지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황삼(黃衫)을 걸친 삼십대 중반의 장한들이었는데, 그다지 뛰어난 고수들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이곳에는 그냥 감시자들만 세워놓은 모양이구나.’
그녀의 얼굴에 막 희색이 돌려 할 때, 그녀의 등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흐… 누군가 했더니 종남파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아가씨로군. 과연 듣던 대로 상당히 뛰어난 신법을 가지고 있군 그래.”
방취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시뻘건 장포를 걸친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그녀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그 홍포중년인은 얼굴도 피처럼 붉었고, 턱에 나 있는 수염도 붉어서 그야말로 붉은 정령(精靈)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방취아는 그의 특이한 모습과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혈광(血光)에 움찔 놀라더니 이내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팔수 중의 혈붕 시일해구나.”
혈붕 시일해의 얼굴에 한 줄기 비릿한 미소가 내걸렸다.
“흐흐… 조금 전에 산문 근처에서 소란이 있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결국 네가 이곳으로 숨어들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었군. 이런 얄팍한 수법으로 우리들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주인이 자기 집 들어가는데 무얼 속이고 자시고 한단 말이냐?”
방취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시일해의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이제는 아니지. 주인 바뀐 지가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사정을 모르는군.”
“사정을 모르는 건 네놈이다. 주인이 바뀐 게 아니라 잠시 외출 나갔다가 들어온 거다. 이제 주인이 왔으니 네놈들은 어서 빨리 짐 싸들고 떠나도록 해라.”
방취아와 입씨름을 하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했는지 시일해는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방취아는 겉으로는 큰소리를 쳤으나 속으로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시일해는 팔수 중에서도 분랑 척시림과 함께 가장 무공이 강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혈정신공(血霆神功)이라는 특이한 내공을 익혀 맨손으로도 능히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시일해가 단지 주먹을 앞으로 쭈욱 내뻗었을 뿐인데도 방취아는 마치 거대한 철추(鐵鎚)가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방취아는 양쪽 어깨를 흔들었다.
보법(步法)의 생명은 물론 다리의 움직임이었으나, 어깨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어깨와 다리를 얼마나 잘 움직이느냐에 따라 보법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하나 강호에는 아주 간혹 어깨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다리만을 이용한 보법이 있기도 했다.
그런 보법은 하나같이 천하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절학(絶學)들이었다.
종남파에도 그런 보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무염보(無艶步)라는 것인데, 이백 년 전에 여중제일고수였던 비선 조심향 이후 실전되어 지금은 누구도 익히는 사람이 없었다.
방취아의 실력은 물론 조심향에 비할 수 없었다.
하나 나름대로는 상당히 뛰어나서 시일해의 무시무시한 일권(一拳)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시일해는 조금도 실망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 방취아에게 다가서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가 휘두르는 것은 혈정권(血鼎拳)이라는 무공으로, 패도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쉭! 쉭!
혈정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방취아는 처음에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그의 주먹을 피하기만 했다.
하나 차츰 시일해의 공세가 눈에 익자 반격을 꾀하기 시작했다.
방취아가 주로 사용하는 무공은 비파지(琵琶指)라는 것이었다.
원래 종남파의 무공 중 여인들이 익히기 적합한 지법은 모두 세 가지가 있었다.
비파지, 옥잠지(玉簪指), 그리고 난화지(蘭花指)가 그들이었다.
그중의 최고봉은 난화지였고, 그 난화지를 종남파 사상 최초로 완벽하게 익힌 인물도 비선 조심향이었다.
난화지는 사실 조심향이 창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순한 개요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난화지의 요결(要訣)을 오랫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실제로 형상화시킨 사람이 조심향이었기 때문이다.
당년에 조심향이 무염보를 전개하며 난화지를 펼칠 때면 주위 사방이 온통 난화의 물결로 뒤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선연(鮮姸)한 난화의 한 가닥만이라도 몸에 닿는다면 어떠한 호신강기(護身氣)도 예외 없이 파괴되고 시뻘건 피구멍이 뚫린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난화지를 혈화지(血花指)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제 조심향이 사라진 후 난화지 또한 절전되어 지금은 단지 그 이름만이 종남파 문하들의 입에서 입으로 조심스레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방취아가 익힌 비파지는 비파를 튕기는 듯한 가벼운 손동작만으로 능히 상대를 살상(殺傷)할 수 있는 뛰어난 무공이었다.
비록 위력은 옥잠지보다 떨어졌으나, 현묘하고 빠르다는 점에서는 훨씬 뛰어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방취아는 위력이 강한 반면에 단순한 옥잠지보다는 변화무쌍한 비파지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
지금도 방취아가 몸을 흔들며 시일해의 시야를 어지럽힌 후 오른손가락을 튕기자 두 줄기의 지풍(指風)이 소리도 없이 시일해의 관자놀이와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갔다.
시일해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머리를 움직여 관자놀이로 날아오는 지풍만을 피했을 뿐이었다.
팍!
다른 하나의 지풍은 정확하게 시일해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하나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난 사람은 뜻밖에도 방취아였다.
지풍이 그의 가슴을 가격하는 순간,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흐흐… 손길이 참으로 야들야들하구나. 이왕이면 제대로 주무르도록 해라.”
시일해가 비릿하게 웃으며 털이 숭숭 난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채로 방취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일 놈!”
방취아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으나 자신의 지법이 상대의 혈정신공을 뚫지 못한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해져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의 신법은 종남파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났으나, 내공은 반대로 가장 약한 축에 속했다. 지법은 정순(精純)한 내공이 바탕이 되어야만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이기 때문에 그녀가 혈정신공 같은 강력한 호신강기를 익힌 시일해를 상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동안 방취아는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피하기만 했다. 그녀의 신법이 워낙 뛰어나서 시일해도 단시일 내에 그녀를 어쩌지는 못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조금씩 뒤로 몰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전권(戰圈) 밖에는 시일해보다는 못하지만 세 명의 고수들이 에워싼 채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고 있어서 부담이 점점 가중되었다.
‘이러다 이들의 후속 세력이라도 오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겠구나.’
방취아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자신이 크게 낭패를 보겠다고 생각하고 입술을 다부지게 깨물었다.
마침 그때 시일해는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그녀를 향해 두 주먹을 번갈아 가며 휘두르고 있었다. 수비는 거의 도외시한 그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그녀를 얼마나 얕보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그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시일해는 이번에도 그녀가 피할 줄 알고 무심코 주먹을 휘두르다 그녀가 자신의 앞으로 돌진해 오자 눈을 번뜩였다.
‘이년이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그는 즉시 한발을 뒤로 움직여 몸을 옆으로 비틀어 그녀에게 노출된 부분을 최소한으로 좁히며 주먹을 종횡(縱橫)으로 마구 내질렀다.
쉭! 쉭!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귓전을 스치는 가운데 그녀는 시일해의 강력한 권력을 뚫고 그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그녀의 하얀 손이 허공에서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시일해의 목덜미를 후려쳐 갔다.
시일해는 지법만 펼칠 줄 알았던 그녀가 장법(掌法)을 펼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그대로 목덜미를 가격당하고 말았다.
펑!
“음…”
시일해의 몸이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나며 한차례 휘청거렸다. 시일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뜻밖에도 그녀의 장력은 상당한 위력이 있어 하마터면 목뼈가 그대로 부러져 나갈뻔했던 것이다.
“이년이…!”
시일해가 발연 대로하여 그녀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번에도 그녀의 손은 허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사람의 손이 어찌 사라질 수 있겠는가? 단지 그녀의 손이 급격하게 움직여 순간적으로 시일해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하나 그 효과는 실로 커서 시일해가 움찔하는 순간 그녀의 손은 다시 그의 앞가슴을 사정없이 가격하고 말았다.
꽝!
방취아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하나 시일해도 충격을 받았는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의 앞가슴에는 그녀의 손 모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어 조금 전의 장력이 상당한 위력을 지녔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이년의 내공이 조금만 심후했다면 내 혈정신공이 깨어져 큰일날 뻔했다.’
시일해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중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심결에 당한 두 번의 공격으로 기혈(氣血)이 끓어오르고 가슴 부위에 상당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이번의 공격으로 가슴뼈가 부러져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방취아 또한 그의 가슴을 정통으로 가격하여 충격을 입혔으나 자신의 손바닥도 빨갛게 부어 올라 얼얼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 그녀는 시일해가 주춤거리는 모습에 용기를 내어 다시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자칫 시간을 끌었다가 초가보의 지원 세력이 도착하기라도 하면 좁은 이 공간에서 꼼짝없이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천둔장법이 예상대로 놀라운 위력이 있음을 확인한지라 용기 백배하여 시일해를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시일해가 몰리는 것을 알아차린 세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