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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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10화


제110장. 이씨세가(李氏世家)

서안의 서쪽에는 유달리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있었다.
담장의 높이는 삼 장에 달했고, 담장의 길이는 수십 리나 되었다.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이 그 담장을 따라 걸어가 보았는데, 아침에 시작하여 밤이 깊어서야 겨우 한바퀴를 돌아 원래의 자리로 올 수 있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 담장이 워낙 높아서 담장 안의 모습은 바깥에서 절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하나 담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서안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그 담장 안에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전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으며,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화원(花園)들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시(常時) 거주하는 인원만 해도 칠백 명에 달했으며, 수시로 출입하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매일 이천 명이 넘었다.
이곳이 바로 천하에 이름 높은 이씨세가였다.
이씨세가는 대대로 서안뿐 아니라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명문(名門) 중의 명문이었다.
특히 당대에 이르러서는 문주인 이세적뿐 아니라 그의 아들인 이존휘 또한 그 명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어서 그들의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유시(酉時) 경.
어스름한 어둠을 뚫고 이씨세가의 정문(正門) 앞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마차가 있었다.
그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끌고 있었는데, 장식이 화려한 마차의 지붕 위에는 백마(白馬)가 수(繡) 놓아진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 깃발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서둘러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 깃발은 이 마차가 이씨세가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차가 정문에 도착하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여덟 명의 무사들 중 두 사람이 재빨리 마차로 다가와서 문을 열었다.
곧 백의를 입은 눈부신 미녀와 허름한 중년인이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존휘의 초청을 받고 이씨세가를 방문한 금교교와 남호였다.
두 사람은 이씨세가의 정문에 내려서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 이씨세가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그 경관이 실로 볼 만 했기 때문이다.
정문은 귀한 자단목(紫檀木)을 통째로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높이가 이 장이 넘었고 너비 또한 사두마차 두 대가 나란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정문의 한쪽에 나 있는 작은 쪽문만 해도 웬만한 장원의 정문만한 크기였다.
정문의 앞에는 십여 개의 등불이 달려 있어 주위를 대낮같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정문에서 십 장쯤 떨어진 곳부터는 사람의 두 배 크기의 석상(石像)들이 이 열로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누구든지 그 석상 사이로 지나가면 석상의 크기와 모양에 위압감을 느껴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남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연신 감탄성을 발했다.

“대단하군. 정말 놀라워.”

금교교가 힐끔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도 이곳은 처음인가요?”

“그렇소.”

“당신은 천하에 안 돌아다닌 곳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군요.”

남호는 히죽 웃었다.

“내가 이곳에 한 번이라도 온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기를 쓰고 소저의 뒤를 따라왔겠소?”

“내가 겨우 당신의 길 안내밖에 안 되는군요.”

“허허… 이씨세가는 특별히 초청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소. 그런데 이씨세가에서 나같이 별볼일 없는 놈을 초청할 리 있겠소? 이번에 마침 금 소저께서 이 공자의 초청을 받앗으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내가 높은 이씨세가의 문턱을 넘을 수 있겠소?”

“이 공자가 초청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당신은 불청객(不請客)이라고 바로 쫓겨날지 몰라요.”

남호는 빙글빙글 미소지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 공자라면 금 소저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나 하나쯤은 눈감아줄 수 있을 거요.”

남호의 넉살에 금교교는 알아서 하라는 듯 휑하니 몸을 돌려 정문으로 다가갔다.
마차 문을 열어 주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들을 따라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가 자신들을 쪽문 쪽으로 인도하자 남호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제길, 우리 같은 사람은 정문으로 출입할 수도 없다는 건가?”

그들을 안내하던 무사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문은 강호의 거대문파의 장문인이나 한 지역의 웅주(雄主)인 분이 오실 때만 열 수 있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남호는 더욱 기분이 나빴다.

‘사람을 이렇게 차별대우한단 말이지? 이게 소위 명문정파라는 자들의 자존심인가?’

그는 속으로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무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무사가 문을 두드리자 쪽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깔끔한 남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이목구비는 상당히 청수했으나, 눈빛이 날카로워서 차가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남포중년인은 무사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금교교에게로 다가왔다.

“금 소저이십니까?”

“그래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씨세가의 제육총관(第六總官)인 주석인(周晳仁)이라고 합니다. 대공자(大公子)님의 분부를 받고 금 소저를 모시러 왔습니다.”

이어 그의 시선이 남호에게로 향했다.

“이분은…”

남호는 급히 포권을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남호라는 사람으로, 금 소저와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교묘해서 금교교가 일부러 데리고 왔는지 아니면 자신이 억지로 따라온 것인지 애매하게 표현했다.
주석인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십시오.”

쪽문을 지나자 곧 청석대로(靑石大路)가 나타났다.
귀하디귀한 청석을 거의 석 장 넓이로 깐 길을 보자 남호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세가의 부(富)가 석가장에 맞먹는다고 하더니 과언이 아니었군. 구하기도 힘든 청석으로 이 넓은 길을 깔아 놓다니…’

길은 중앙으로 곧게 뚫린 청석대로 외에도 수많은 사잇길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화원들이 메우고 있어서 선경(仙境)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화원들 위로 붉은 색 단청(丹靑)으로 통일된 건물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어 쳐다만 봐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청석대로의 군데군데에는 유등(油燈)이 걸려 있어 어둠이 조금씩 깊어가는 데도 어둡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불빛에 어른거리는 이씨세가의 전경(全景)은 보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인 것이었다.
남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석인의 뒤를 따라갔다.
주석인은 주위의 경관과 건물의 대해 무어라고 설명해 줄 법도 하건만 입술을 굳게 마문 채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심통난 사람처럼 보여서 남호는 공연히 가슴이 불안해졌다.

‘이거 괜히 따라온 거 아냐?’

하나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 신세라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주석인의 뒤를 따랐다.
일각(一刻) 가까이나 걸어서야 세 사람은 한 채의 아름다운 누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각의 크기는 여타 건물과 비슷했으나 붉은 빛이 감도는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이 건물은 푸른색이 많이 깃들여 있었다.
누각 위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청운각(靑雲閣)> 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건물 자체의 분위기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주석인은 그들을 청운각 안으로 인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윽한 향기(香氣)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누각 안에는 아담한 크기의 대청이 있었고, 대청 한편으로는 내실(內室)로 향하는 문이 나 있었다.
대청의 곳곳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유등이 달려 있어 전혀 어둡지가 않았다.
주석인은 그들을 대청에서 기다리게 한 후 자신은 내실로 들어갔다.
곧 이어 내실에서 시비(侍婢)가 나와 그들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이존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유등에 비친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남호가 조금은 답답한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왠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구려. 사람을 불러다 놓고 텅빈 객청에 우리만 동그마니 앉혀 놓다니 당초 예상했던 성대한 연회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소.”

금교교는 조용히 웃었다.

“성대한 연회를 기대하고 왔어요? 나는 그냥 간단하게 식사나 한끼 하려고 온 건데…”

남호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자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뭐 특별히 기대했다기보다는… 그래도 이씨세가라면 어느 정도의 대접을 할 것이다라고 예상은 했었소. 예상이 빗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보았던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만 해도 오늘 온 것이 헛걸음만은 아니었던 것 같소.”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아직 대접은 시작도 되지 않았으니까. 누가 알아요? 지금부터 당신 소원대로 근사한 저녁이 나오게 될지.”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운이 좋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남호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고 있는데, 내실로 사라졌던 주석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그의 뒤에는 십여 명의 시비들이 갖가지 음식을 들고 줄지어 따라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남호는 탁자 위에 차려지는 음식들을 보며 입이 쭉 찢어졌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귀한 음식들이 탁자 위에 가득히 펼쳐지는 것이다.
산해진미(山海珍味)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주석인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금교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공자께선 마침 손님이 찾아오셔서 조금 늦게 오실 듯 합니다. 그때까지 두 분이 기다리실까 봐 먼저 식사를 대접해 드리오니 약소하나마 잘 드시기 바랍니다.”

남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걱정 마시오. 약소하면 약소한 대로 먹으면 되니까 말이오.”

주석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겸손하게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대꾸하는 남호의 모습은 금교교가 보기에도 조금 심한 것 같았다.
하나 남호는 누가 무어라고 하든 말든 벌써부터 젓가락을 집어 든 채 열심히 이것저것을 입 속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비에게 말씀하십시오.”

주석인은 남호는 쳐다보지도 않고 금교교에게 공손하게 말한 후 다시 내실 쪽으로 사라졌다.
금교교도 그제서야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하나같이 독특하면서도 풍부한 맛이 있어서 어느 것을 먹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음식 맛에 취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에만 열중했다.
음식을 먹던 도중 금교교는 간혹 가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금교교가 먼저 식사를 마친 다음에도 남호는 한참이나 더 집어먹고 나서야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젓가락을 놓았다.

“휴우… 잘 먹었다. 이렇게 마음껏 먹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금교교가 피식 웃었다.

“이제 만족하세요?”

남호는 두 눈을 실눈처럼 가늘게 뜨며 빙글빙글 미소지었다.

“술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그런대로 만족하오. 역시 미인을 따라다니면 주워먹을 게 많다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소.”

금교교는 그의 넉살에 마땅히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다시 내실 쪽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왔다.
남호는 주석인 온 줄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주 총관, 먹긴 잘 먹었는데, 풍악(風樂)이 없는 게 좀 아쉽구려. 노래 잘 하는 가기(歌妓)라도 불러 주지 않겠소?”

금교교가 매서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주인도 없이 우리가 먼저 식사를 했어요. 실례가 되지는 않았나요?”

그제서야 남호는 나타난 사람이 주석인이 아니라 이존휘라는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에는 눈부신 백의를 차려입고 이마에는 영웅건을 두른 준수한 미남자가 다소 난처한 듯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우뚝 서 있었다.
남호는 먹쩍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이 공자님이 오신 걸 몰랐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금 소저와 동행한 남호라는 사람이올시다.”

이존휘는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남호는 자신의 몸이 송두리째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 이존휘의 눈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예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존휘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마주 포권을 했다.

“반갑습니다. 이존휘라 합니다. 본가(本家)에 잘 오셨습니다.”

이존휘는 초청 받기도 않은 남호가 허락도 없이 따라온 것에 대해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초청 받은 손님을 대하듯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주석인이 다시 시비들을 시켜 음식상을 치우게 하고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이존휘는 금교교를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모처럼 초대를 해놓고 늦게 와서 미안하오. 갑자기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찾아와서 실례를 범했소.”

“아니에요. 덕분에 모처럼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어요.”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이존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두 분을 본청(本廳)에 모시고 아버님도 뵙게 했을 테지만 요새 본가에 일이 생겨 그러지 못했소. 아버님도 몹시 아쉬워하고 계시오.”

금교교는 조요요히 웃었다.

“언젠가는 뵐 날이 있겠지요.”

“조만간에 그럴 기회를 만들도록 하겠소.”

이어 이존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금 소저는 영롱비를 훔쳐간 범인에 대한 단서를 잡았소?”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잡지 못했어요. 취미사 혈사도 시일이 갈수록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점점 단서를 찾기가 어려워지는군요.”

“오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로서는 적극적으로 금 소저를 돕고 싶은 마음이오. 금 소저만 괜찮다면 내일부터 함께 행동했으면 하는데 금 소저의 의향은 어떠시오?”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그런데 어디부터 조사를 착수해야 할지 막막하군요.”

“나도 계속 생각해 보았는데, 한 군데 짚이는 데가 있소.”

금교교는 눈을 반짝이며 급히 물었다.

“그곳이 어딘가요?”

이존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신목령이오.”

뜻밖의 말에 금교교는 물론이고 느긋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호도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만마(萬魔)를 굴복시킨다는 그 신목령 말이에요?”

“그렇소.”

“공자는 왜 신목령을 의심하는 거지요?”

“신목령의 고수들은 모두 특이한 음공(陰功)을 익히고 있소. 그건 신목령주가 음공에 관한 한 당대의 제일인자(第一人者)이기 때문이오.”

“그런데요?”

“일전에 대왕루 앞에서 비명횡사한 소방방은 아무래도 음공의 고수에게 살해당한 것이 분명하오. 그를 살해한 자가 취미사 혈사의 흉수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이상 뛰어난 음공을 지닌 신목령의 고수들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소.”

금교교와 남호는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사실 개방의 장안분타주인 소방방이 음공의 고수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도 예측하고 있는 바였다.
그걸 바탕으로 해서 그들은 이존휘가 범인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심을 받고 있는 당사자인 이존휘가 자신의 입으로 먼저 음공에 대해 거론을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금교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지 그 점 때문에 신목령을 의심한다는 건 조금 억지스러운 일 같군요. 강호에서 음공을 익힌 자들이 그들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않아요.”

“물론 그렇소.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신목령과 천봉궁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조를 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금교교는 눈을 반짝 빛냈다.

“이 공자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우리들은 그것을 천목지약(天目之約)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실상 신목령과 천봉궁은 강호에서 몇 번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소?”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천봉팔선자 중의 남봉 엄쌍쌍은 신목령의 고수에 의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신목령에서 천목지약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힘들다 해도 비공개적으로 얼마든지 천봉궁을 적대시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금교교는 굳이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가설(假設)일 뿐이에요.”

이존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내가 신목령을 의심하게 된 이유를 알려 주겠소.”

금교교와 남호는 그가 이제부터 진짜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짝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이존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 분은 오늘 나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금교교는 다소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아니… 혹시 찾아온 사람이 신목령의 고수가 아닌가요?”

이존휘는 그녀를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매혹당할 만한 매력적인 미소였다.

“과연 금 소저의 혜안(慧眼)은 놀랍기 그지없소. 확실히 오늘 내가 두 분을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만난 사람은 신목령의 고수요.”

“신목십이호 중 한 사람인가요?”

“그렇소.”

“그가 이 공자를 찾아온 이유가 무언가요?”

“한 사람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소.”

“누구를 찾아 달라는 거죠?”

이존휘는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개인적인 일이므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오.”

“그럼 무엇 때문에 신목령을 의심하는 거죠?”

“그와 대화 중에 그가 이미 취미사의 혈사가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서안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오.”

“…!”

“게다가 그는 굉지선사와 친분이 있어서 서안에 올 때면 늘 취미사에 머무르곤 하오.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된 일인지 다른 곳에서 숙식(宿食)을 해결했다고 하더군.”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하던 금교교와 남호도 그제서야 조금씩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존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나도 별달리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소. 그런데 아무래도 미심쩍은 생각이 계속 들었소. 원래 그와 나는 예전부터 교분이 긴밀해서 이 근처를 지날 때는 그가 꼭 나를 찾아왔었소. 그런데 보름 가까이나 나에게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서안 일대를 은밀히 잠행(潛行)하고 다녔다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소. 게다가 그는 좌수검(左手劍)의 고수라서…”

그때 갑자기 금교교가 황급히 물었다.

“그가 왼손잡이란 말이에요?”

이존휘는 그녀의 갑작스런 물음에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렇소.”

왼손잡이라면 남호가 지적한 흉수의 조건 중 하나가 아닌가? 금교교도 점차로 신목령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신목령과 천봉궁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깝다기보다는 앙숙과 같은 사이였다.
게다가 최근 들어 신목령의 고수들이 계속 도발을 해오는 바람에 천봉궁 내에서는 유명무실한 천목지약을 깨 버리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신목령이 흉수라고 가정한다면 여러 가지 가정(假定)에 부합되는 점이 많았다.
그들은 스물두 구의 시신을 감쪽같이 처리할 능력도 있고, 굉지선사와 친분도 있으며 왼손잡이에 놀라운 검술을 익혔을 뿐 아니라 음공의 고수이기도 하다.
게다가 신목령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물됨이 헌앙(軒昻)하고 준수한 미남자들이어서 뭇 강호의 여인들의 관심을 받아 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대부분이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천봉궁에서만 지내온 순진한 매향향을 유혹하는 것쯤은 그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금교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목령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금교교는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하자고 속으로 몇번이고 되뇌고 나서야 격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금교교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이 공자를 찾아온 신목령의 고수가 누구지요?”

이존휘는 잠깐 망설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목구호인 옥면절정 조화심이오.”

“조화심…”

그녀는 그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화심이라면 물론 스물두 명을 살해하는 것쯤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별호 그대로 그는 강호에서도 알아주는 미남자였다.
이존휘는 그녀의 얼굴이 점차로 굳어지는 모습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그가 흉수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소. 그러니 성급하게 결정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는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금교교는 그의 의중을 짐작하고는 이내 빙긋 미소지었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죠. 다만 나는 없어진 줄 알았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어서 기쁠 뿐이에요.”

이존휘는 그녀가 냉정을 잃지 않은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면 내일부터 나와 함께 조화심의 뒤를 추적해 보는 게 어떻겠소?”

금교교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그런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죠?”

“조금 전에 본가를 떠났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소. 하지만 어디로 가면 그를 볼 수 있는지는 알고 있소.”

“그곳이 어디죠?”

이존휘는 짤막하게 말했다.

“서십왕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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