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12화 (1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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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12화


제112장. 괴의시술(怪醫施術)

“장문사형.”

아침식사가 끝난 후 방취아가 진산월에게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사매?”

방취아는 방긋 웃었다.

“나는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사형을 만날 수 있나요?”

진산월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너는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나를 찾아오지 않았느냐?”

“내가 그랬나요?”

방취아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무슨 날인데?”

“정말 모르세요?”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구나.”

“강북삼보의 회동이 벌어지는 날이에요.”

방취아는 진산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했으나 진산월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모르세요? 오늘이 바로 초가보에서 강북삼보가 만나서…”

“그런데?”

진산월이 되묻자 방취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자기 딴에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진산월에게 말한 것인데 그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초가보에 관련된 중요한 일이잖아요.”

“어차피 강북삼보가 회동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의 적이 초가보라는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초가보가 우리를 없애려는 마음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진산월의 말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방취아는 심술이 났다.

“그러다 강북삼보가 몽땅 우리에게 달려들면 어떻게 해요?”

“모두 상대해 줘야지.”

“그건 너무 무모한 일이에요.”

“그럼 너는 다른 방법이라도 있느냐?”

방취아는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의 말마따나 강북삼보가 모두 덤비든 초가보 혼자서 덤비든 종남파로서는 상대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물러나거나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제서야 방취아는 진산월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이라고 초가보에서 벌어지는 삼보회동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삼보회동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자신들이 초가보를 상대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방취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검보와는 싸우지 않았으면 해요.”

“서문 소저 때문이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쌍하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검보와 싸운다면 그녀는 가운데 끼여서 고민만 하다 늙어버릴 거예요.”

진산월은 방취아를 보며 웃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 애는 겉으로는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속마음은 약하거든요. 어젯밤에도 혼자 뒤뜰에서 고민하고 있는 걸 봤어요.”

“그건 그녀가 결정할 문제다. 우리가 신경 쓸 것은 아니지.”

“그렇긴 하지만…”

방취아는 속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침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문사형.”

“왜?”

방취아는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소 사형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무슨 말이냐?”

“다른 길이 없나요? 요즘 들어와서 소 사형이 웃은 걸 못 봤어요.”

“예전에도 별로 자주 웃는 편이 아니었지.”

“그래도 내가 놀려 주면 가끔 응해 주고는 했어요. 무뚝뚝한 소 사형이 웃는 걸 보려고 하루 종일 놀린 적도 있었는데…”

진산월은 묵묵히 방취아를 쳐다보았다. 방취아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그늘이 생겨 있었다.

“소 사형은 왼쪽 팔을 쓸 수 없는 것에 절망하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가다가 조만간에 소 사형이 나락(那落)으로 빠질까 봐 불안해 죽겠어요.”

“…”

“어젯밤에도 소 사형은 한자마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요. 세상 고민을 혼자서 다 짊어진 사람처럼 말이에요.”

진산월을 쳐다보는 방취아의 눈에는 애틋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장문사형이 소 사형을 타이르면 안 될까요? 그깟 팔 하나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열심히만 노력하면 절정검객이 될 수 있다고… 아니, 절정검객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몸 성하게만 있어 달라고…”

“내가 그런 말을 하면 그는 더욱 절망할 거다.”

방취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진산월의 말이 옳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녀는 너무도 답답하고 불안하여 진산월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진산월은 애처로운 빛이 가득한 그녀의 처연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녀는 귀가 번쩍 뜨이는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게 뭐죠? 무슨 방법이 있는 거죠?”

“그건…”

그때 진산월의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진산월은 잠시 고개를 쳐들었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방법이 지금 온 것 같구나.”

“예?”

방취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을 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몇 명의 인물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방취아가 놀라 보니 그들은 어제 오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던 동중산과 장승표,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늙은이였다. 비쩍 마르고 사납게 생긴 늙은이는 독사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고 있었다. 동중산이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장문인, 모셔왔습니다.”

“수고했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늙은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늙은이는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나 있는지 얼굴 가득 분기탱천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먼 곳까지 일부러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인 진산월이라 합니다.”

늙은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대(當代)고 전대(前代)고 상관없다. 당장 노부를 원래 있던 곳으로 고이 모셔 놔라. 그러지 않으면 네놈들이 피눈물이 나도록 후회하게 만들어 주고야 말 테다.”

생면부지의 노인이 대뜸 욕설을 터뜨리자 방취아의 고운 아미가 상큼히 치켜 올라갔다. 하나 늙은이는 마치 봇물이라도 터진 것처럼 쉴사이 없이 욕설을 늘어 놓았다.

“이 망할 놈들이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뭐 언덕 하나만 넘으면 된다고? 그래 놓고 한나절을 끌고 온단 말이냐? 여기가 종남파냐, 사기꾼 소굴이냐?”

듣다못한 장승표가 한마디했다.

“갈 노인, 보수는 섭섭지 않게 해드릴 테니 제발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갈 노인을 댁으로 안전하게 모셔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늙은이는 더욱 기세 등등하게 날뛰었다.

“시끄럽다, 이 망할 놈! 네놈의 이름 따위를 어느 짝에다 쓴단 말이냐? 몇 번 거래해 줬다고 오냐오냐했더니 감히 노부를 속여 이곳까지 끌고 와? 어디 네놈이 말한 천년설삼(千年雪蔘)인지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인지가 있으면 내놓아 봐라. 그럼 노부가 네놈의 말을 믿어 주마.”

그 말에 장승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정을 보아하니 동중산과 장승표가 오기 싫다는 노인을 사탕발림을 하여 억지로 끌고 온 모양이었다. 동중산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정이 다급하여 갈 노인께 죄를 저질렀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고 우선 저희들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 빌어먹다 얼어죽을 애꾸놈아! 기껏 살려 줬더니 생명의 은인도 몰라보고 노부를 속여? 그리고 네놈이 뭔데 감히 노부를 갈 노인이라고 부르는 거냐? 노부가 네놈 친구냐?”

동중산은 고소를 머금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는 그야말로 좌충우돌, 욕설과 고함을 함께 내질러서 장내의 누구도 그를 제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나 늙은이의 호적수(好敵手)는 따로 있었다.

“어떤 미친 늙은이가 벌건 대낮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단 말이냐?”

갑자기 갈 노인의 목소리보다 열 배는 큰 듯한 엄청난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길길이 날뛰며 발작을 일으키던 갈 노인조차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어 버릴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지닌 호통이었다. 하나 이내 갈 노인은 쌍심지를 곤두세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종자(種字)도 알지 못할 망할 놈이…”

막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욕설을 퍼부으려던 갈 노인이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 당신은…”

문 앞에는 전풍개가 두 팔을 팔짱낀 채 눈을 부릅뜨고 우뚝 서 있었다. 전풍개의 모습을 본 갈 노인은 웬일인지 안절부절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전풍개는 전신에 맹렬한 기운을 뿜어내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왜 반벙어리처럼 말을 하다가 마는 거냐? 노부보고 종자도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러는 네놈의 종자는 대체 뭐냐? 당나귀 새끼라도 된단 말이냐?”

너무나 모욕적인 말에 갈 노인의 양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하나 악을 고래고래 쓰며 대들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갈 노인은 이를 질끈 깨물며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풍개는 갈 노인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무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는 거냐?”

갈 노인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으나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전풍개는 갈 노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단 말이야.”

갈 노인은 움찔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전풍개는 갈 노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니야. 분명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야.”

“그럴 리 없소.”

전풍개는 수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갈 노인에 대한 것을 떠올릴 수 없자 쓴웃음을 지었다.

“거 참 이상하군.”

갈 노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부를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러면 노부를 속여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을 용서해 주겠다.”

진산월은 갈 노인을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하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인을 댁으로 모셔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소.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우리의 용건을 들어 보고 가는게 좋지 않겠소?”

갈 노인은 마구 손사래를 쳤다.

“필요 없다. 네놈들 용건이야 네놈들 사정이고, 노부는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전풍개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보자보자하니까 이 늙은이가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군. 그렇게 빨리 가고 싶으면 아예 이 기회에 저 세상으로 일찍 보내줄까?”

전풍개가 금시라도 검을 뽑아 휘두를 듯하자 갈 노인이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중인들은 기세 등등하던 갈 노인이 전풍개에만은 이상하리만치 약세를 보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전풍개에게 눈짓을 했다. 전풍개도 강호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인물인지라 즉시 그들의 의향을 알아차리고 갈 노인에게 다가오더니 갈 노인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헉!”

갈 노인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전풍개는 갈 노인의 비쩍 마른 어깨를 감싸안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보게,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젊은이들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나? 자네나 나나 앞으로 남은 고지(高地)가 눈앞인데 서둘러 갈 게 뭐 있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 며칠 푹 쉬다 가게.”

“저… 그게…”

“왜 싫은가?”

전풍개가 눈을 부릅뜨자 갈 노인은 움찔하더니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이의(異義) 없는 거지?”

“그… 그렇소.”

중인들은 천하에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갈 노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내심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하나 그 바람에 모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괴상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갈 노인은 속에서 열불이 텨져 나오는 듯 했으나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전풍개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방취아가 급히 물었다.

“저 노인은 누구예요? 대체 무슨 일로 저런 욕설까지 들어가면서 괴상한 노인네를 여기에 데려온 거예요?”

동중산이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방취아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다가 동중산이 진산월의 지시로 어제 장승표와 함께 노인이 살고 있는 서십왕촌으로 가서 그를 데려왔다는 말을 듣자 무언가를 느낀 듯 얼굴을 활짝 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장문사형은 저 노인으로 하여금 소 사형의 왼팔을 고치려는 거로군요.”

진산월은 의외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의도였기는 한데, 지금은 성과가 있을지 의심스럽군.”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노인은 희대(稀代)의 명의(名醫)라면서요?”

“원래 의술(醫術)이란 환자도 중요하지만 의원도 중요한 법이거든. 아무리 우리가 강요한다고 해도 의원이 내켜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굳어졌다.

“저 노인이 비록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사조님 덕분에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과 사람을 고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야. 치료란 누구도 강제로 시킬 수 없어. 오직 본인이 원해서 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거든.”

방취아의 얼굴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침울하게 변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저 노인의 마음이 변할 때까지 지켜보기만 하라는 건가요? 난 그렇게 못해요.”

방취아는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이 말릴 사이도 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는 모두 해볼 거예요!”

그녀의 외침 소리만이 장내를 뒤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갈 노인이 생각을 바꾸는데 까지는 정확히 반나절이 걸렸다. 가장 큰 공헌자는 뜻밖에도 유소응이었다. 전풍개의 협박과 방취아의 애원에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던 갈 노인은 의외로 유소응을 보자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표정의 유소응을 보더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전풍개와 방취아의 성화를 피하기 위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오후 해가 다 지도록 유소응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을 물어 보는 갈 노인을 보고는 모두들 그가 유소응에게 빠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갈 노인이 유소응에게 물어 보는 질문들은 아주 단순했다.

“부모님이 계시냐?”

“고향은 어디냐?”

“나이는 몇 살이냐?”

“이름은 뭐냐?”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느냐?”

“그 할아버지가 이왕이면 의술도 높고 학식도 뛰어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없느냐?”

그 모든 질문에 대한 유소응의 반응은 오직 하나,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마침내 세 시진(時辰) 만에 갈 노인은 항복을 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노부의 말에 한 마디라도 대답해 준다면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겠다.”

유소응은 유난히 초롱한 눈으로 갈 노인을 빤히 바라보더니 실로 오랜만에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의 말씀을 따라 주세요.”

혹시나 유소응이 벙어리가 아닐까 걱정했던 갈 노인은 기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해서 한동안 멍하니 유소응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그대로 할 테니 앞으로는 노부의 말에 꼭꼭 대답하도록 해라.”

유소응은 그렇게 했다.

“네.”

갈 노인은 그 모습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유소응을 한차례 와락 끌어안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산월을 찾아 갔다. 진산월은 고집불통이던 갈 노인이 제 발로 찾아오자 그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갈 노인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내일 보자고 하며 소지산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전흠과 송천기를 제외한 종남파의 모든 사람들이 진산월의 방에 모여 있었다. 묘시(卯時)가 가까워서야 갈 노인은 소지산의 방에서 나왔다. 갈 노인은 방안에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산월은 담대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소? 고칠 수 있겠소?”

모두의 기대와 갈망이 담긴 시선이 갈 노인에게 향했다. 하나 갈 노인은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팔은 고칠 수 없다.”

그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특히 방취아의 절망은 다른 누구보다도 큰 것이었다. 기대가 컸기에 그 기대가 무산되었을 때의 충격 또한 컸다.

“왜… 왜 고칠 수 없다는 거죠?”

갈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저자의 팔은 신경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그걸 고치려면 특수하게 제조한 약으로 신경을 붙여야 하는데, 신경이 붙을 때의 고통을 참을 만한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

“마취제도 듣지 않는다. 순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참아야 하는데, 그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노부도 과거에 저런 상처를 지닌 환자를 두 사람 손대 본 적이 있지만, 둘 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자살하느니 팔 하나가 불편하더라도 살아 있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그래서 저 팔은 고칠 수 없다고 했던 거다.”

장내는 무서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래도 하겠소.”

중인들은 소리가 들려 온 것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헝클어진 머리에 어색하게 붙은 왼팔을 가진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소 사형…!”

방취아가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소지산은 머리카락 사이로 번갯불 같은 광망을 이글거리며 한자 한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참을 수 있소. 시술(施術)해 주시오.”

갈 노인은 냉소를 날렸다.

“네가 그 고통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따위 말을 하는 거다. 그 고통은 인간이라면 견딜 수 없다. 이건 노부가 치료하기 귀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노부가 시술했던 두 사람도 하나같이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도 너처럼 참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결국은 스스로 자신의 혀를 깨물고 말았다. 노부는 똑 같은 실수를 세 번이나 반복하기 싫다.”

스릉!

소지산은 들고 있던 장검을 뽑았다. 중인들이 놀란 외침을 토해냈으나 소지산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다.

“소 사형… 무슨 짓이에요?”

방취아가 부르짖었으나, 소지산은 갈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갈 바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생각했었소. 노인장이 나에게 시술하는 것은 나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내게 살길을 마련해 주는 일이오.”

크게 악쓰는 소리도 아니고 절규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을 수도 없는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중인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 조그만 음성 속에 담겨 있는 비장한 각오와 격정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갈 노인은 한참 동안이나 소지산의 두 눈을 응시했다. 소지산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주위가 적막감에 휩싸이는 가운데 문득 갈 노인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소지산에게 시선을 돌려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이자가 잘못되어도 노부를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겠느냐?”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인생은 그 자신이 결정하는 겁니다. 후회나 원망 따위가 있을 리 없지요.”

갈 노인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술해 주마.”


마취 준비가 대충 끝났을 때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냐?”

문이 열리며 방취아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요?”

갈 노인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소지산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이내 그녀를 밀치다시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일각(一刻) 이상은 안 된다.”

“고마워요.”

방취아는 그의 등에 소리치고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에 있는 침대에는 소지산이 웃통을 벗은 채 누워 있었다. 방취아는 그에게 다가가서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들었어요?”

소지산의 눈이 떠지며 유성(流星)처럼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나타났다. 방취아는 그 눈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기분이 어때요?”

“나쁘지 않아.”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형은 견딜 수 있죠?”

소지산은 묵묵히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물론 참을 수 있지. 사매는 잊었어? 나는 원래 참을성이 강하잖아.”

방취아는 미소지었으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사형이 포기한다 해도 나는 사형을 욕하지 않아요.”

“나는 포기하지 않아.”

“…”

“우리는 그동안 군림천하의 꿈만 꿔 왔어. 하나 이제는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 비록 희미한 길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길이지.”

“소 사형…”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지금의 나는 장문사형에게 짐만 될 뿐이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될 수는 없어. 지금 내가 장문사형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것뿐이야.”

방취아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소지산은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고개를 쳐든 그녀의 얼굴은 유달리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때 그녀의 아름다움이란… 평생을 그녀를 지척에서 보아온 소지산도 이 순간만큼은 가슴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 치밀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결혼해 줘.”

방취아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별빛같이 반짝이는 눈으로 소지산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소지산은 그 눈빛이 달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장문사형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방취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그래요. 나는 아직도 장문사형을 좋아해요.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소지산의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순간적으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건 몰랐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게 뭐지?”

“하루에 한 번씩 목욕을 해야 돼요.”

소지산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는 입을 열었다.

“그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군.”

그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거절하는 건가요?”

소지산은 오른팔로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물론 승낙하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하고 어려운 부탁이지만 당신을 얻을 수만 있다면 참겠어.”


소지산의 비명 소리는 밤새 계속되었다. 종남파에 있는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잠을 제대로 잔 사람도 없었다. 비명 소리는 간혹 그쳤다가 다시 계속되고는 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중간에 고통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혼절(昏絶)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나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어 버렸으나 그래도 비명 소리는 계속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방취아를 걱정해서 그녀를 반강제로 재우려 했으나, 그녀는 거절하고 자신의 방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지옥과 가타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왔다. 비명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크륵… 크륵…” 하는 괴이한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목청이 완전히 상해 버린 소지산이 내지를 수 있는 최고의 소리였다. 아침이 지나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도 종남파는 적막에 잠겨 있었다. 잠을 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소리내어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해가 조금씩 서산(西山)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진산월은 갈 노인을 찾았다.

“그는 어떻소?”

갈 노인은 진산월을 힐끔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럭저럭 견디고 있군. 하지만 이건 이제 시작일 뿐이야. 신경이 붙으려면 최소한 닷새는 저런 고통에 시달려야 돼.”

“…!”

“먼젓번에 내가 시술한 자들도 며칠씩은 견뎠어. 하지만 한 명은 이틀 만에, 나머지 한 명은 결국 삼 일만에 스스로 혀를 끊고 말더군.”

“그는 참을 수 있을 거요.”

“그거야 네 희망사항이겠지. 아무튼 그 녀석이 견디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불행해지겠더군. 그 여자가 그 녀석과 결혼하기로 한 거 알아?”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요.”

갈 노인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시술하기 전에 그 여자가 와서 잠깐 자리를 비워줬지. 지금쯤은 됐겠구나 싶어 갔다가 우연히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어.”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갈 노인은 계속 키득거렸다.

“크흐흐… 아마 그 녀석에게 삶의 의지(意志)를 주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야. 어쩌면 그 여자는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될지도 몰라.”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요.”

“왜?”

“그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갈 노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다가 이내 냉소를 날렸다.

“흐흐… 녀석을 너무 믿는군. 뭐 그거야 노부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리고 네 얼굴 말인데…”

갈 노인은 손가락으로 진산월의 왼쪽 뺨을 가리켰다.

“노파심에서 미리 말해 두겠는데, 그 흉터는 나도 고칠 수 없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쓸데없는 부탁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갈 노인은 시선을 진산월의 빰에 나 있는 흉터에 고정시키며 말을 계속했다.

“솜씨를 보니 철면군자 노방의 것이군. 당시였다면 어쩌면 나에게 수가 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안 된다. 너무 세월이 흘렀어.”

“상관없소.”

갈 노인은 진산월의 의중을 알려는 듯 그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이 진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놈도 이상한 놈이고, 그들도 이상한 연놈들이다. 게다가 그 늙은이와 애꾸까지… 이곳에는 모두 이상한 놈들만 모여 있어.”

“이상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 있지 않소?”

갑자기 갈 노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 하나 있지. 그 꼬마… 나의 소응! 그 녀석은 앞으로 이 세상의 빛이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어.”

진산월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갈 노인을 보더니 조용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 진산월은 모두 잠든 사이에 혼자 길을 떠났다. 그리고 섬서성 일대는 물론이고 강호 전역을 경악케 한 폭풍(暴風)의 행보(行步)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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