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5화
제105장. 의중탐색(意中探索)
이존휘가 온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인시(寅時)가 조금 넘은 시각에 달랑 네 명의 일꾼들만 거느리고 자은사를 찾아왔다. 자은사에서는 이미 사내(寺內)에서 가장 깨끗한 자심당(慈心堂)에 새로 불단(佛壇)을 마련하고 제사 준비를 마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존휘는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하는 묘시(卯時)가 되기 전에 제사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백운은 제사가 시작될 즈음에 자심당으로 와서 제사가 끝날 때까지 불단에 앉아 불경을 암송했다. 제사가 끝나자 이존휘는 백운에게 다가와서 사의를 표했다.
“대사님 덕분에 올해에도 일을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백운은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납이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그보다 이 공자의 효심(孝心)이 실로 갸륵하구려. 벌써 팔 년 동안이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영당(令堂)의 기일을 손수 챙기다니 보통 사람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오.”
이존휘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이런저런 일로 너무 속을 썩여 드린 것이 못내 후회스러울 뿐입니다.”
“부모에게 불효(不孝)하지 않는 자식은 없는 법이오. 얼마 전에 좋은 차가 들어왔는데, 노납의 방으로 가서 차나 한잔 하는 게 어떻겠소?”
“좋습니다.”
두 사람은 백운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 사미승의 음성이 들려 왔다.
“주지스님, 현오입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며 현오가 들어왔다. 현오는 방안에 이존휘가 있는 것을 보더니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이 공자는 외인(外人)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무슨 일이냐?”
“예, 어제 오셨던 여시주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주지스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만나시겠습니까?”
백운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허… 이를 어쩐다?”
현오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주지스님이 안 계시니 그냥 돌아가시라고 할까요?”
“이놈, 불존(佛尊)을 모시는 신분으로 어찌 거짓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어서 모시고 오너라.”
현오는 백운의 호통에 찔끔하여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것 참…”
백운은 나직이 혀를 차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존휘는 백운을 안 지 몇 년 되었지만 그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누구인데 그러십니까?”
“강호(江湖)의 여인(女人)이라오. 천봉팔선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곤란한 일을 부탁해 와서 고민 중이오.”
이존휘의 눈이 번쩍 빛났다.
“천봉팔선자라면 무림에서도 아주 유명한 여인인데, 그녀가 무림에는 전혀 문외한인 대사님께 무슨 부탁을 했는지 궁금하군요.”
“그건…”
백운이 머뭇거리자 이존휘는 이내 조용히 웃었다.
“제가 아무래도 곤란한 걸 물어 본 모양이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백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오. 노납에게는 조금 골치 아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이번 일은 이 공자와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며칠 전에 이 공자께서 취미사에서 벌어진 혈겁의 희생자 시신들을 본사로 옮겨오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시신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소.”
이존휘는 깜짝 놀랐다.
“언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노부도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소. 어제 시신을 안치한 불심당으로 가 보니 굉지선사의 유해를 비롯한 스물두 구의 시신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소.”
이존휘는 뜻밖의 사실에 경악과 당혹을 느끼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군요.”
“노납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요. 이미 숨이 끊어진 시신들을 무엇 하러 훔쳐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오.”
이존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일이 천봉선자가 대사님을 찾아온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녀가 노납을 찾아온 이유가 바로 굉지선사의 유해를 보기 위해서였소. 그래서 그녀를 불심당에 안내했다가 시신들이 없어진 걸 알게 되었던 거요.”
“그렇군요. 그런데 굉지선사께서 생전에 천봉궁과 친분이 있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 안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소. 원래 이번에 찾아온 여인은 굉지선사의 먼 친척이었는데, 굉지선사가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달려온 거라고 하오. 그런데 굉지선사의 유해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노납에게 그 유해를 목격한 사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요.”
이존휘의 안광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유해를 직접 본 사람에게 굉지선사의 죽음에 대해 좀더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대사님을 조르는 것보다는 마검 조일평을 찾아가는 게 더 낮지 않겠습니까? 취미사의 혈겁을 제일 처음 목격했던 사람이 그이니.”
백운은 한차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납도 그렇게 말했소. 그런데 그 여인의 말로는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찾아도 조일평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결국 그녀는 굉지선사의 유해를 이곳으로 운반해 온 사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소.”
백운은 말을 멈추고는 슬쩍 이존휘를 쳐다보았다. 이존휘는 사정을 짐작했는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사님께서는 너무 곤란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그 여인을 만나 보도록 하지요.”
백운은 한숨을 돌렸다는 듯이 표정이 활짝 풀어졌다.
“그래 주겠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더구나 상대가 강호에 명성이 높은 천봉선자라면 제가 일부러라도 만나 보고 싶군요.”
그때 마침 밖에서 현오의 음성이 들려 왔다.
“주지스님, 여시주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백운은 조금 전보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곧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였다. 그녀는 수수한 황의를 입고 있었는데, 백옥같이 희고 고운 피부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지고 있어 더할 나위없이 총명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무심코 선실로 들어왔다가 백운의 앞에 준수한 미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두 눈에 이채(異彩)를 발했다. 하나 그녀는 이내 이존휘에게 시선을 거두고 백운을 응시했다.
“대사님을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군요. 저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 여시주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소. 하나 노납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니 정말 미안하구려.”
“대사님께서 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보다 어제 제가 말씀드린 일은 생각해 보셨는지요?”
백운은 어색한 헛기침을 토해냈다.
“허험, 하루 동안 여시주의 부탁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백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의미녀의 안색이 조금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사님께선 제 부탁을 거절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허허… 그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여시주의 부탁은 노납이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소.”
“대사님이 아니면 누가 결정한단 말입니까?”
백운의 시선이 힐끗 이존휘를 향했다.
“그건 여기 당사자가 있으니 직접 물어 보는 게 어떻겠소?”
이 말에 황의미녀의 시선이 다시 이존휘에게 쏠렸다. 이존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황의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존휘라 하오. 실례하지만 소저의 방명(芳名)을 알 수 있겠소?”
“이 공자셨군요. 인사가 늦었어요. 나는 금교교라고 합니다.”
이존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오! 천봉팔선자 중의 한 분이신 영봉 금 소저이셨구려. 몰라 뵈어 죄송하오.”
인사를 마친 후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나 그 침묵은 이내 금교교의 영롱한 음성으로 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공자를 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불초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소?”
금교교의 아름다운 봉목(鳳目)이 이존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 공자께서 얼마 전에 취미사에서 벌어진 혈겁을 목격했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소.”
“당시 혈겁 때 피해를 입은 시신들을 수습한 사람은 이 공자로 알고 있어요. 이곳으로 시신들을 운반해 온 사람도 이 공자였구요. 그래서 이 공자께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시오.”
금교교는 침착한 음성으로 천봉궁에서 영롱비를 분실했으며, 그 영롱비가 이번 혈겁에 사용되었을 거라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 그 일에 소봉 매향향이 관련되어 있다는 등의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았다.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이존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구려. 내가 무엇을 도와 주면 되겠소?”
“이 공자께서는 굉지선사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곳까지 직접 운반해 오셨으니 그동안 시신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겠지요?”
이존휘는 그녀가 말하려는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는지 이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소. 사신의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시신이 영롱비에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소?”
“영롱비에 당한 시신에는 특이한 흔적이 남아요.”
“어떤 흔적 말이오?”
“영롱비는 천하에서 가장 극음(極陰)한 기병(奇兵) 중 하나예요. 그래서 그것에 베이게 되면 상처 부위가 얼어붙을 뿐 아니라 영롱비 자체의 흡력(吸力) 때문에 상처가 벌어지지도 않지요.
따라서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검흔(劍痕)만 보아도 영롱비에 당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요.”
이존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일이긴 하지만 워낙 중대한 일이라 나도 시체의 상흔을 살펴보긴 했었소. 확실히 금 소저가 말씀한 것과 비슷한 상흔이 있었던 것 같구려.”
금교교는 준수한 이존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확실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굉지선사의 시신에 나 있는 검흔이 얼어붙어 있고, 상처가 닫혀 있었나요?”
“상처 부위가 얼어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 상처가 닫혀 있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소.
그런 흔적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좀 더 분명하게 살펴보았을 텐데, 지금으로선 무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기 힘들구려.
별다른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금교교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아니에요. 나도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이존휘가 금교교를 빤히 응시했다.
금교교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무언가 야릇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존휘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는지 다시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금 소저께서는 이번 사건이 영롱비를 훔쳐간 자의 소행이라고 보시오?”
금교교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물론 있어요. 하지만 그 이유를 밝히려면 본궁(本宮)의 기밀 중 하나를 공개해야 하므로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아무래도 영롱비에 금교교가 아직 밝히지 않은 또 다른 비밀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 천봉궁의 기밀이라고 하는데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어서 이존휘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백운이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괜찮다면 노납이 두 분 시주께 식사 대접이라도 해드리고 싶소만.”
두 사람이 사양하지 않자 즉시 백운은 사미승 오현을 불러 식사 준비를 했다.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세 사람 모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음식을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자은사의 음식은 어지간히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날 즈음, 이존휘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이 야채무침은 정말 맛있군요. 지금은 한겨울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백운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본사에 자주 다니는 신도들 중에서 야채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소.
덕분에 아무리 험한 날에도 식탁에 야채가 끊기는 일이 없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그렇군요. 그 사람을 소개시켜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소만, 왜 그러시오?”
이존휘는 하얀 미소를 드러내며 빙긋 미소지었다.
“겨울에 이 정도로 신선한 야채를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가에서도 거래해 보려 합니다.”
“허허… 그렇다면 장 노삼(張老三)에게도 좋은 일이구려. 며칠 내로 장 노삼을 공자께 보내겠소.”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금교교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불쑥 물었다.
“이씨세가에서 기존에 거래하던 곳에서는 싱싱한 재료를 공급하지 못하나요?”
“물론 오랫동안 본가와 거래를 하는 곳이 있기는 하오. 하지만 육류(肉類)는 좋은데, 야채는 이곳보다 못한 것 같소.”
“아쉽네요. 본궁도 장 노삼에게 야채를 주문하고 싶은데, 거리가 멀어서 안 되겠군요.”
“천봉궁은 강호에서도 신비지처(神秘之處)로 이름이 높은데, 그곳에서도 좋은 야채를 구하기 힘들단 말이오?”
“물론 예전에는 본궁도 계절에 상관없이 싱싱한 야채를 구할 수 있었어요. 단순히 싱싱한 정도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선하고 좋은 야채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죠.”
이조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말이오?”
“그래요.”
“그 이유가 무엇이오?”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본궁에서 영롱비를 잃어버렸다고.”
이존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뜻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영롱비가 없어진 것이 그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영롱비는 단순히 극음의 신병이 아니라 또 한 가지의 효능이 있어요. 영롱비로 야채를 다듬으면 오랫동안 신선도가 유지되어 천연(天然)의 상태 그대로 보관할 수 있어요. 영롱비에서 나오는 기운이 단순한 음기(陰氣)가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순수한 지음지기(至陰之氣)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야채나 과일을 자르면 처음의 상태를 한 달이나 유지할 수 있고, 고기나 생선 또한 쉽게 상하지 않고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본래의 맛을 간직할 수 있죠.”
이존휘과 백운은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금교교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본궁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거나 명절 때면 궁주님의 지시로 영롱비를 사용하여 요리를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즐거움을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게 되었죠.”
이존휘는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기물(奇物) 중의 기물이군요. 그런 보물을 잃어버렸으니 천봉궁주의 노여움이 적지 않았겠습니다.”
금교교는 그 말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이존휘는 그녀의 표정만 보아도 이번 일로 천봉궁주의 노화가 대단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존휘는 대인관계(對人關係)에 능수능란한 인물답게 즉시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앞으로 금 소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어떻게 하다뇨?”
“계속 영롱비를 훔쳐간 범인을 추적하실 생각이시오?”
“물론이죠.”
“하지만 추적할 단서가 마땅치 않을 듯 한데…”
금교교는 빙긋 웃었다.
짜릿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은연 중에 그 안에는 다부진 각오가 엿보이고 있었다.
“범인이 취미사의 혈겁을 일으킨 자라면 아직 서안을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서안 일대를 다시 뒤져보면 무언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이존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더니 이내 정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도울 일이 없겠소?”
금교교는 의외인 듯한 표정이었다.
“저를 도와 주시겠어요?”
이존휘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 취미사의 혈겁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요소가 적지 않소. 어차피 서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본가(本家)에서 무시할 수도 없고, 게다가 요즘은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다소 지루해하던 참이었소. 금 소저를 따라 다닌다면 적어도 심심할 일은 없을 게 아니겠소?”
금교교는 잠깐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이존휘가 제 입으로 자신을 도와 주겠다고 나선 것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거절하기에는 그 유혹이 너무도 컸다.
남호의 의심대로 이존휘가 범인이라면 가까이에서 지켜볼 좋은 기회가 생기는 것이고, 만일 이존휘가 범인이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그의 도움을 받게 되니 그녀로서는 손해볼 게 없는 일이었다.
금교교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자께서 도와 주시겠다니 나로서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기분이에요. 감사히 도움을 받겠어요.”
“하하… 도움이 될지 아니면 공연히 방해만 하게 될지 모르니 인사는 나중에 받도록 하겠소. 그보다 괜찮다면 오늘 저녁은 본가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금교교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초청하는 건가요?”
“물론이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고 늘 뵙기를 갈망했던 천봉선자를 만났는데 집으로 모셔가지 않는다면 아버님께서 커다란 꾸중을 주실 거여.”
금교교로서는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이씨세가의 허실(虛實)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이 공자의 초청을 기꺼이 수락하겠어요.”
“하하… 역시 금 소저는 시원시원한 성격이구려.”
이존휘는 허공을 올려다본 채 소리내어 웃었다.
이존휘는 오후에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을 하고는 곧 자은사를 떠났다. 이존휘가 자은사를 떠나가자마자 남호와 누산산 등이 우르르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어요.”
누산산이 급히 묻자 금교교는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중인들의 표정은 여러 가지로 바뀌었다. 누산산은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자가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그자의 초청을 수락했단 말이에요?”
금교교는 별로 걱정스런 얼굴이 아니었다.
“초청을 거절할 이유도 없지 않니? 게다가 백운선사님도 계신 자리에서 나를 초청했는데, 설마 무슨 엉뚱한 일이야 벌이겠니?”
“그래도…”
“아직 그가 흉수라고 단정된 것도 아니니 오히려 그를 알아볼 좋은 기회인 것 같구나.”
그제서야 누산산은 조금 얼굴이 풀어졌다. 그러다 옆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남호의 어깨를 툭 쳤다.
“말 좀 해봐요. 항상 떠들던 사람이 조용하니까 분위기가 이상하잖아요.”
남호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언제 떠들었소? 나는 꼭 필요한 말을 할 때 외에는 조개처럼 입이 여문 사람이오.”
“피, 세상에 여문 조개가 다 죽었나 보네.”
누산산이 입을 삐쭉거리자 백운선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누 시주의 말씀이 맞다. 네가 보기에는 이존휘가 금 시주를 초청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남호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모두 정리한 듯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야 우리와 똑 같은 생각에서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남호는 빙그레 웃으며 반문했다.
“금 소자가 오늘 없는 핑계까지 대 가면서 이존휘를 굳이 만났던 이유가 뭡니까?”
“그야 이존휘를 자극해서 스스로 마각을 드러내게…”
“그러니 이존휘도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 말에 백운과 금교교를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럼 이존휘가 금 시주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단 말이냐?”
“이존휘도 바보가 아니라면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렸겠죠. 단지 그는 금 소저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여 그것을 확인하려고 초청한 것일 겁니다.”
이존휘는 물론 바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몇 년 간 그를 지켜본 백운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존휘는 비단 바보가 아닐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영민하고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었다.
백운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금 시주가 이존휘의 초청을 수락한 일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이야 걱정을 하건 말건 남호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금 소저의 말대로 거절할 이유도 없지요. 어찌되었건 지금 남은 단서라고는 이존휘 하나뿐이니 사건의 실마리도 그에게서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이 기회에 그가 진범(眞犯)인지 알아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금교교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 초청은 피차간에 서로 정신없이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싸움이 되겠군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 초청에 나도 동행하게 해주시오.”
남호의 말에 금교교는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따라가겠다고요?”
남호는 빙그레 웃었다.
“천하에 이름 높은 이씨세가를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내가 어찌 그냥 지나치겠소? 내가 간다면 이존휘의 말이나 행동에서 허점을 발견하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지지 않겠소?”
금교교는 그가 얄밉기는 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강호 경험이나 눈치 면에서 남호가 금교교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누산산이 재빨리 물었다.
“나도 따라갈 거예요.”
“너는 안 돼.”
“왜요? 저 떠벌이는 데려가면서 나는 안 된다는 거에요? 이 일은 본궁의 일이니 본궁 사람이 더 많이 가야죠.”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상황이 좀 더 명확해질 때까지 너와 화매(華妹)는 이곳에 있거라.”
그녀는 차마 이씨세가에 가는 일이 위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데려갈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면 누산산의 성격에 더욱 막무가내로 따라가려 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누산산이 다시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 남호가 재빨리 끼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누 소저와 유 소저는 따로 할 일이 있소.”
누산산이 그를 쏘아보았다.
“나를 떼어내려고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정말 참으로 성미 급한 아가씨로군. 내가 왜 그런 수작을 부린단 말이오.”
“내가 할 일이 뭐예요?”
“두 분은 한곳으로 가서 누군가를 만나 주었으면 하오.”
“그게 누군데요?”
“노해광(盧解廣)이란 사람이오.”
누산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강호에는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사람이오.”
“무얼 하는 사람이죠?”
“주루를 경영하고 있소.”
누산산은 다시 물었다.
“왜 그를 만나야 하죠?”
“그는 서안의 남쪽에서 가장 큰 주루 네 개를 운영하고 있소.”
“그래서요?”
“그래서 그는 서안 인근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소. 그를 찾아가서 물어 본다면 적어도 지난 며칠 간 이 일대에서 일어난 의심스런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요.”
누산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순순히 우리를 도와 주려고 할까요?”
남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안 좋은 습관이 있지. 아니, 이번 경우에는 좋은 습관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뭔가요?”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요. 특히 스무 살 이하의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누산산의 아미가 하늘로 솟구쳤다.
“뭐예요? 당신은 지금 나에게 미인계(美人計)를 쓰라는 거예요?”
“그는 비록 여자를 좋아하지만 결코 강제로 취하지는 않소. 그런 점에서는 아주 확실한 사람이지. 아마 두 분 소저를 본다면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할 거요. 그러니 식사 대접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요한 일들을 알 수 있게 될 거요. 그리고 알지 모르겠지만, 미인계는 미인만이 쓸 수 있는 거요.”
곰곰이 남호의 말을 듣고 있던 누산산은 남호의 마지막 말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나 약아빠진 남호는 그때 이미 조일평의 앞으로 가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 소협은 오늘 무얼 할 생각이오?”
조일평은 과묵한 표정에서 벗어나 모처럼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나도 한 가지 할 일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오랫동안 행적을 찾지 못했던 친구의 소식을 들었소.”
“일전에 말했던 그 친구 말씀이오?”
조일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더군. 오늘은 그를 찾아가 볼 생각이오.”
남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거 잘된 일이로군. 조 소협이 말한 그 대단한 친구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구려.”
조일평은 천천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한동안 허공의 한 점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는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 나도 미치도록 궁금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