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10화
제122장. 인사천명(人事天命)
종남산의 아침은 언제나 상쾌하다. 소지산이 제일 처음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방취아의 모습이었다.
“사형…”
방취아는 그 말만 하고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소지산은 그녀의 손에서 흘러 나오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웃었다. 항상 적막감이 감돌던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보자 방취아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 일 만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던 지난 오 일은 소지산 뿐 아니라 종남파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악몽(惡夢)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하나 이제 악몽은 끝이 났다.
소지산은 목청이 상해서 당장은 아무런 음성도 내뱉을 수 없었으나 방취아는 그의 눈빛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마워, 사매…’
방취아는 그의 손에 얼굴을 대고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고마워요, 사형…”
그 처절한 고통을 참아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소지산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이 그저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갈 노인이 들어왔다. 방취아는 황급히 손을 놓고 소지산의 품에서 떨어졌으나 갈 노인은 이미 볼 것을 다 보았는지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내숭이냐? 그냥 지금까지 하던 대로 저놈한테 엉겨 있어.”
방취아는 짐짓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노인네가 주책이네. 그런 걸 봤으면 그냥 못 본 척해 주면 어때서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갈 노인에게 고마움의 빛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소지산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갈 노인은 툴툴거리며 침상으로 다가와 소지산의 왼쪽 팔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제법 잘 붙었군. 이제 남은 건 네놈의 노력에 달려 있다.”
갈 노인은 소지산의 왼쪽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소지산이 내려보니 그것은 두 개의 호두였다.
“이것들을 계속 손으로 굴리고 있어라. 맨손으로 이 호두들을 깬 다음에야 네 팔은 비로소 완벽하게 나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지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섣불리 갈 노인에게 고맙다는 등의 인사는 하지 않았다. 갈 노인의 은혜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는 말로써 남에게 은혜를 갚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다. 갈 노인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갈 노인도 남에게 공치사 듣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소지산과 방취아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소지산의 왼쪽 팔에 붙은 고약을 갈아 붙이고는 훌쩍 방을 나가 버렸다.
두 사람은 묵묵히 갈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생각은 서로 같았다.
이 은혜는 마음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두었다가 꼭 필요할 때 조금씩 갚아 나갈 것이다. 평생이 걸린다 해도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소지산은 왼쪽 손을 움직여 보였다. 전력을 기울였으나 손가락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비 오듯 땀을 쏟은 후에야 겨우 그는 새끼손가락을 한치쯤 움직였을 뿐이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감각도 없던 왼쪽 손에 쥐여진 호두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새로운 희망에 불타올랐다. 얼마나 빨리 이 손을 정상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갈 노인의 말대로 순전히 그의 노력과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 있어서 소지산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강인한 사람이었다.
방취아는 땀으로 범벅된 소지산의 이마를 젖은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앞으로 당신에게는 긴 시간이 있으니 서두르지 말고 조금씩 시작하도록 해요.”
소지산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방취아는 그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계속 물수건을 짜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고, 굳어 있는 왼쪽 팔을 조심스럽게 주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있는 방밖에는 한 사람이 벽에 등을 기댄 채 툴툴거리고 서 있었다.
“제길, 이거 너무 불공평하군. 누구는 팔도 고치고 예쁜 여자의 간호도 받으면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할 일이 없어 이렇게 벽만 긁고 있으니 말이야.”
전흠은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은근히 마음에 두었던 방취아가 훌쩍 소지산의 품으로 날아가 버린 후 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해남도에 있을 때만 해도 뭇 여인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흠뻑 받았던 그로서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여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여자라고는 단 두 명뿐인데, 그중 한 명은 이미 임자가 있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어린데다 그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가게 몸을 풀 만한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호승심을 자극할 만한 경쟁자도 없었다.
‘아니, 한 사람 있기는 하군. 그런데 그 작자는 장문인의 신분으로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전흠은 무엇이 그리도 불만스러운지 거친 콧소리를 냈다.
“흥, 벌써 이틀째 아무 연락도 없다니. 이런 자를 장문인이라고 믿고 있어야 하나?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문파로군 그래.”
그가 연신 툴툴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무얼 그리 구시렁거리고 있는 거냐?”
전흠은 나타난 사람을 보고 흠칫 몸을 굳히다가 이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구시렁거리다니요, 할아버님. 소손은 그저 날이 너무 좋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을 뿐입니다.”
“병든 병아리도 아니고 한창 힘이 남아돌 나이에 무슨 햇볕을 쬐고 있단 말이냐? 심심하면 연무장으로 가서 성라검법이나 한번 더 휘두르고 오너라.”
전흠은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아이고, 할아버님. 그 검법은 이제 너무 휘둘러서 지겨워 죽겠습니다. 제발 봐주세요.”
전풍개의 주름진 노안이 부릅떠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겨우 십 년밖에 익히지 않은 놈이 지겹다니… 노부는 벌써 오십 년 가까이 되어도 항상 새롭기만 하다.”
“그거야 할아버님이 새로운 걸 싫어하셔서…”
전흠은 조그맣게 투덜거리다가 전풍개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전풍개는 한동안 성난 표정으로 전흠을 노려보더니 탄식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네놈이 우습게 볼지 몰라도 성라검법은 노부에게는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친구 같은 존재다. 과거 사공표, 그 망할 놈의 칠살검법에 무릎을 꿇었을 때도 언제고 성라검법을 더욱 다듬어서 복수하고 말리라고 결심했지. 미우나 고우나 노부에게 있어 성라검법은 무공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전흠은 움찔하여 평소와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전풍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전풍개는 허공을 응시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일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곤 하지. 너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할 수는 없다. 그건 절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
“상실(喪失)한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인간은 종종 절망하게 되지. 그 시련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다.”
전흠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린 채 전풍개에게 절을 했다.
“할아버님, 죄송합니다. 소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풍개는 전흠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다음 온화하면서도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이 벌어진 다음에 피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전에 흘린 땀과 눈물이 나중의 피눈물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풍개는 처음과는 달리 부드러운 눈으로 전흠을 바라보았다. 전흠은 그에게는 단 둘 뿐인 손자였고, 그중에서도 자신의 뒤를 이을 유일한 후계자였다. 비록 성격이 직선적이고 가끔 엉뚱한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무공에 대한 재질도 뛰어나고 열성 또한 대단한 편이었다.
전풍개는 앞으로 전흠이 자신을 뛰어넘는 훌륭한 고수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들 조손(祖孫)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저 앞에서 장승표가 마구 달려오는 것이었다.
“큰일났소…”
전풍개는 못마땅한 눈으로 게거품을 물고 뛰어오는 장승표를 노려보았다.
“저놈은 또 무슨 쓸데없는 짓거리를 했기에 저러는 거지? 아침부터 술을 처먹었을 리는 없을 텐데…”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래도 음식 솜씨 좋고 남자다운 사람이잖아요.”
전흠이 빙긋 웃으면서 장승표에게 다가갔다.
“형님, 무슨 일이세요?”
장승표는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산적을 연상케 하는 수염투성이의 얼굴이 정말 볼 만하게 변했다.
“큰일났네, 전 노제. 산문 입구에… 헉헉…”
장승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산문 입구에 낯선 고수들이 나타났네.”
전흠과 전풍개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전흠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장승표의 두툼한 어깨를 두드렸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 줘요. 산문에 누가 나타났다고요?”
“처음 보는 인물들인데 얼추 세어 보아도 이십 명은 족히 되어 보였네. 하나같이 병장기를 든 것으로 보아 무림인들이 틀림없네.”
전풍개는 전흠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초가보인지 하는 놈들이 쳐들어온 것 같구나. 너는 방안의 애들에게 말해서 다른 꼬마놈들을 지키게 하고 산문으로 오너라. 나는 미리 나가 보겠다.”
“제가 먼저 나갈 테니…”
“할애비 말대로 해라.”
전풍개는 엄격한 음성으로 말한 후 휑하니 몸을 돌려 산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전흠의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장문인도 없고 소지산도 무공을 사용할 수 없을 때 쳐들어왔군. 그 망할 놈의 장문인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무리 그가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단 두 사람만으로 초가보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지금 종남파에 남은 사람들 중 남과 싸울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자는 전풍개 조손 외에는 방취아가 유일했다.
하나 방취아마저 싸움에 가담한담녀 무공도 익히지 못한 장승표와 유소응, 갈 노인, 그리고 제 한 몸 가눌 상홍도 안 되는 소지산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특히 동중산은 잔꾀가 많고 수단이 좋지만 현재 부상이 완쾌된 상태가 아니라서 싸우는 일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 십상이었다.
전흠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문득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방화라는 애송이와 선상연인지 하는 여우 같은 계집애는 제법 무공을 할 줄 안다고 했지. 그들에게 나머지 사람들을 지키라고 하고 동중산이 그들을 옆에서 지휘해 준다면 웬만한 위급상황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방취아의 힘을 빌려야겠군.’
전흠은 재빨리 생각을 굴린 후 장승표에게 말했다.
“형님, 지금 가서 방화와 선 소저, 그리고 동중산을 불러와 주시겠어요?”
“그러지.”
장승표가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 전흠은 방문을 두드리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흠이 방취아와 함께 산문으로 달려갔을 때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할아버지인 전풍개의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언제 보아도 전풍개의 검법은 매서우면서도 독특한 절도가 있었다. 성라검법에 해남파의 남해삼십육검의 정화를 가미한 그의 검법은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를 상대하는 네 명의 고수들이 쩔쩔매면서 연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십여 명의 장한들이 그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자신의 동료들이 몰리고 있는 광경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별로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고수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가장 우측의 인물은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삼중년인이었고, 중앙의 인물은 백의를 입은 삼십대 초반의 호리호리한 유생이었으며, 좌측의 인물은 건장한 체구에 강렬한 눈빛을 지닌 청년이었다.
세 사람을 일별한 전흠은 이내 표정이 무거워졌다.
‘이들은 절대로 내 하수(下手)가 아니다.’
그들의 서 있는 자세와 침착한 모습만 보아도 오늘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겁을 먹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애초에 ‘후퇴’ 라는 단어는 전흠의 머리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었다.
막 전흠과 방취아가 장내에 도착했을 때, 장내의 격전도 끝나가고 있었다.
차창!
“으윽!”
요란한 검명과 함께 눈부신 검광이 사방으로 퍼지며 전풍개를 상대했던 네 명의 백의인들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전풍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손을 쓰지 않고 중앙에 서 있는 세 명의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애송이들을 보내지 말고 네놈들이 직접 나서라. 누가 먼저 노부를 상대할 거냐?”
세 명의 인물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한가운데 서 있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백의유생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담담하게 웃었다.
“하하… 노선배님의 검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종남파에 이러한 고수가 있는 걸 몰랐으니 제 실책이 큽니다.”
전풍개는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덤벼라.”
백의유생은 수중에 들고 있는 작은 섭선을 손으로 매만지며 계속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성급하게 덤비실 필요 없습니다. 마침 일행분들도 오신 모양이니 이제 슬슬 본론(本論)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이어 그의 시선이 전풍개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전흠과 방취아를 훑고 지나갔다.
“아쉽게도 종남파의 장문인께선 안 오신 모양이군요.”
방취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본파의 장문인을 알고 있나요?”
백의유생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비록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 신검무적 진 장문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소. 그분의 용모파기를 보니 무척 장신(長身)이신데 여러분들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셔서 쉽게 짐작할 수 있었소.”
“신검무적?”
“하하… 요즘 들어 진 장문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소. 가히 검신(劍神)이라 할 만한 놀라운 검법으로 고수들을 연파해서 예전의 삼절무적이란 별호에 빗대어 신검무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소.”
방취아는 이틀 전에 모습을 감춘 진산월이 그동안에 무슨 엄청난 짓을 저질렀나 싶어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본파에 찾아와서 행패인가요?”
백의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행패라니 당치 않소.”
“그런데 왜 사조님께서 당신들과 싸우고 있죠? 정식으로 본파를 방문한 것이라면 당연히 먼저 배첩을 보내 승낙을 받았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사조라는 말에 백의유생은 움찔 놀라 새삼스러운 눈으로 전풍개를 쳐다보더니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미리 배첩을 보내지 않은 것은 확실히 우리의 실수요. 하지만 저 분 노선배께서 다짜고짜 손을 쓰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응하느라 몇 사람이 검을 뽑게 되었던 거요.”
“좋아요. 그럼 이제라도 정식으로 배첩을 보내든지 자신들이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본파에 왔는지를 소상히 밝히도록 하세요.”
백의유생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방취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저의 말씀이 상당히 날카롭구려. 혹시 소저는 종남파의 하나뿐인 여고수라는 비연자(飛燕子) 방취아, 방 소저가 아니시오?”
“그래요, 내가 바로 방취아예요. 그런데 당신은 언제까지 그렇게 요리조리 말을 돌리기만 할 건가요?”
방취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백의유생도 더 이상 딴소리는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신분을 밝혔다.
“나는 검보에서 글선생을 하고 있는 사공언이라는 사람이오.”
그의 정체를 알고 나자 방취아는 깜짝 놀랐다.
“소일서생 사공언? 당신이 바로 그 지략이 하늘을 덮는다는 소일서생이란 말이에요?”
“하하… 과찬의 말씀이오. 그냥 이런저런 잔꾀에 조금 재주가 있을 뿐이오.”
말과는 달리 사공언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검보의 보주인 서문장천의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이며, 실질적인 검보의 군사(軍師) 노릇을 했다. 같은 검보쌍기인 척천수사(擲天秀士) 공야망(公冶望)이 기관진식(機關陣式)과 암기술의 달인이라면, 사공언은 놀라운 지략과 술수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방취아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양옆에 있는 청삼인과 백의인에게로 관심이 쏠렸다. 사공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면 그들도 틀림없이 이름없는 인물들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내 이름은 위소룡이라 하고 저쪽은 포천성이란 사람이오.”
우측의 청삼중년인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자 방취아는 거듭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위소룡이라면 검보의 최고고수들인 오대검객 중의 비룡검이었고, 포천성은 검보 보주의 친위대 대장이 아닌가? 그런 쟁쟁한 인물들이 대체 무슨 일로 종남파를 찾아왔단 말인가?
그녀는 이런 중대한 시점에 장문사형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공언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오늘 이곳을 찾아온 것은 한 가지 필히 해결해야 할 사안(事案)이 있기 때문이오.”
그의 말을 듣자 방취아의 마음속에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자들이 종남파를 찾아온 것이 서문연상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공언의 다음 말은 그녀를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본보 보주의 따님인 서문 소저께서 얼마 전에 서안으로 나들이를 가셨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뒤로 소식이 끊겨 실종되셨소.”
방취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서문연상의 처리 문제 때문에 장문사형과 상담을 한 것이 엊그제인데 미처 방침을 정하기도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검보에서 먼저 쳐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들이 서문연상이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좀더 일이 확실해질 때까지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겠구나.’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런 일이라면 본파보다는 관아(官衙)를 찾든지 이씨세가에 도움을 청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군요.”
사공언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물론 평상시라면 그렇소. 그런데 서문 소저께서 실종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주루였는데, 그녀가 실종된 후 그 주루는 폐쇄되고 주인은 어디론가로 도망치고 말았고. 우리는 즉시 사라진 주루의 주인을 찾는 데 주력했고, 어제 비로소 그자의 행방을 알아내게 되었소.”
방취아는 그들이 정산의 행방을 파악했다는 말을 듣자 불안감이 더욱 짙어졌으나 이미 사태는 활을 떠난 화살과도 같았다.
“그럼 이제 그 주인이란 자를 족치면 서문 소저의 행방을 알게 되겠네요.”
사공언은 그녀의 표정을 빤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소. 어제 사람을 파견해 보니 주인이란 자는 또 다른 자가 이미 데려가고 그 집 앞에는 초가보의 고수들 몇이 차가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소.”
초가보란 말에 방취아는 움찔 놀랐다.
“그럼 초가보의 고수들이 그 주인을 데려갔단 말인가요?”
“상황으로 보아 그 반대요. 우리가 그 주인을 찾는다는 걸 알고 초가보에서 그 주인을 확보하여 우리에게 인계하려 한 모양인데,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고 주인을 데려간 거요.”
“그럼 초가보의 고수들을 죽인 자가 서문 소저를 납치한 범인일 확률이 높겠군요.”
방취아가 멋도 모르고 말하자 사공언은 손뼉을 탁 쳤다.
“확실히 방 소저의 혜안(慧眼)은 놀랍구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다면 그자를 찾을 것이지 본파에는 무슨 일로 왔나요?”
사공언은 계속 웃고 있었으나, 두 눈 만큼은 어느 때보다 매섭게 반짝이고 있었다.
“초가보 고수들의 시신을 조사한 결과 그 시체에는 종남파 무공의 흔적이 발견되었소. 다시 말해서 초가보 고수들을 죽인 사람은 종남파의 무공을 익힌 고수란 말이오.”
그제서야 방취아는 그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리고 안색이 훽 변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본파가 그들을 죽이고 서문 소저를 납치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요?”
“그건 내가 아니라 소저가 먼저 한 말이오.”
“그런 헛소리를…”
“그 주루의 주인은 정산이라 자요. 혹시 소저는 그자를 알고 있소?”
막 발작하려던 방취아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주루의 주인이 정산이라는 것은 이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안색이 변한 건 정산 때문이 아니라 한 가지 놀라운 생각이 갑자기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초가보의 고수들을 죽이고 정산을 데려간 사람은 장문사형이 아니었을까? 그래, 틀림없이 장문사형일 거야.’
방취아는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 버렸다.
‘그래서 장문사형이 이틀 동안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은 거로군. 그렇다면 장문사형은 정산을 데리고 어디로 간 것일까? 왜 본파로 돌아오지 않는 거지?’
그녀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을 대 사공언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직감은 이미 그녀가 흉수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믿어주고 있었다.
‘과연 종남파가 범인이었군. 서문 소저는 종남파에 있음이 분명하다.’
사공언의 얼굴은 점차로 냉정하게 굳어 갔다. 서문장천의 딸을 납치했다면 의당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종남파로써는 처절한 일이 될 것이다.
‘본보를 건드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테다.’
사공언은 슬쩍 옆에 있는 위소룡과 포천성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도 이미 사태의 추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이미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특히 서문연상의 실종으로 서문장천에게 혹독한 질책을 받았던 위소룡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만약 오늘 일의 최고책임자가 사공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위소룡은 길길이 날뛰며 종남파의 고수들을 찢어 죽였을 것이다.
전흠은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그는 단순히 무공의 고하(高下)만을 생각하고 동중산이 아닌 방취아를 데리고 왔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보다는 동중산이 훨씬 활용가치가 높았다. 동중산이었다면 사공언의 말 몇 마디만으로 사태를 파악하여 오히려 종남파에 이롭게 일을 진행시켰을 것이다. 하나 아쉽게도 이 자리에 온 것은 그가 아닌 방취아였다. 방취아는 비록 눈치가 비상하고 머리가 영특하지만 강호 경험이 전무하여 이런 일의 대처에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사공언과 위소룡 등의 태도가 판이하게 바뀐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가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종남파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지도 몰랐다. 방화와 함께 본산을 지키고 있어야 할 서문연상이 갑자기 산문 입구에 나타났던 것이다.
“숙부님!”
갑자기 뾰족한 음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쏜살같이 위소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소룡은 분노에 찬 눈으로 손을 쓸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갑자기 멀리서 여인의 음성과 함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기쁨과 격정으로 부릅떠졌다.
“상아야!”
“숙부님!”
서문연상은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와서 위소룡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위소룡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의 준수하고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던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서문연상은 그에게는 단순한 보주의 딸이 아니라 사랑하는 조카이며 의녀(義女)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실종된 후 그가 겪은 마음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그녀를 보게 되니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가 다시 얼굴을 쳐다보고, 디시 끌어안는 행동을 반복했다. 서문연상은 곧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배시시 웃었다.
“숙부님께서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위소룡은 틀림없이 종남파에 감금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서문연상이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반가운 와중에도 어리둥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그들이 너를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느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아주 잘 지냈어요.”
서문연상은 연신 생글생글 미소짓고 있어서 그녀 때문에 애간장을 태웠던 위소룡으로서는 오히려 얄미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때 사공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문 소저, 무사한 것을 보니 반갑군요.”
서문연상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공 선생께서도 오셨군요. 연상이 인사드립니다.”
사공언의 검보에서의 위치는 무척 특별해서 아무리 서문장천의 딸인 서문연상이라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숙부 뻘인 위소룡보다도 오히려 그를 대하는 태도가 한층 더 공손했다. 이어 그녀는 포천성과 다른 검보의 인물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사공언은 이미 서문연상의 모습을 보고 상황이 자신의 당초 예상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방취아를 향해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방 소저께선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방취아는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녀가 종남파에 있다는 것을 숨긴 사실 때문에 공연히 머쓱해졌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공언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따금 서문연상에게 질문을 던졌고, 서문연상은 즉각 대답을 해주었다. 사공언이 모든 일의 진상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서문 소저는 취미사 혈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그 와중에 암습을 받았다가 종남파의 인물들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로군. 자칫했으면 은혜를 원수로 갚을 뻔했구나.’
사공언은 불필요한 오해(誤解)로 종남파를 적으로 돌릴 뻔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꼭 쓰러뜨려야 할 적이라면 모르지만, 쓸데없는 오해로 적으로 삼기에는 종남파는 너무 껄끄러운 상대였다. 물론 예전이었다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겠으나, 장문인인 신검무적을 빼놓고라도 눈앞의 늙은이와 그 옆의 체구가 건장한 젊은이는 상당한 실력자들임이 분명했다. 이들말고도 또 어떤 고수들이 종남파에 더 숨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삼보회동이란 화산파를 상대하기 위한 연합이었다. 종남파는 초가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자신들이 공연히 중간에 나서서 불필요한 피를 뒤집어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국 사공언 등 검보의 고수들은 서문연상을 데리고 종남파를 떠났다. 서문연상은 그들을 따라가는 것을 무척이나 망설였으나, 아버지인 서문장천이 무척이나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종남파의 인물들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검보에 들어간 이상 그녀의 행동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단지 방취아는 그동안 무던히도 속을 썩였던 서문연상의 문제가 해결되어 시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무언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고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문연상과 검보의 고수들이 떠난 후 채 일각(一刻)도 되지 않아 다시 한 떼의 고수들이 종남파를 찾아왔다. 그들이야말로 종남파을 아예 없애기 위해 악종기가 파견한 초가보의 고수들이었다. 원래 악종기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종남파는 검보 고수들에 의해 반쯤 파괴되었어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 악종기가 보낸 고수들이 쳐들어왔다면 종남파는 진짜로 멸문(滅門)의 위기를 맞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검보의 고수들은 서문연상 때문에 종남파와는 별다른 충돌도 없이 그대로 떠나 버렸고, 그로 인해 악종기가 짜놓았던 치밀한 계획은 커다란 틈을 보이고 말았다. 악종기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실종되었던 서문연상이 설마 진짜로 종남파에 있을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종남파가 서문연상을 납치한 것처럼 일을 꾸몄으나, 실제로 서문연상이 아미 종남파에 합세해 있는 바람에 모든 일이 어긋나 버렸다. 만약 서문연상이 종남파에 없었다면 종남파가 무슨 변명을 하든 검보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파국(破局) 또한 면키 힘들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일이 성사(成事)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다.
악종기가 종남파의 멸문을 노리고 파견한 고수들의 수는 무려 스물다섯 명으로, 그들 중 절반에 가까운 열두 명이 절정고수들이었고, 나머지도 상당한 실력의 일류고수들이었다. 비록 검보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어도 이들만으로 종남파는 상당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진산월이 있었다면 사정아 달랐겠으나, 진산월이 없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맞이하게 된 초가보의 습격은 남아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에게는 또 다른 악몽일 뿐이었다. 초가보 무리들 중 우두머리는 오대호법 중의 일인인 청효(靑梟) 나월(羅鉞)이었다. 나월은 신강(新疆) 일대에서 오랫동안 마왕(魔王)처럼 군림하던 인물로, 공력이 하늘에 닿아 있고 수단이 잔혹하여 모두들 두려워 마지 않는 공포스런 존재였다. 나월 외에도 사패 중의 극패(戟覇) 유광(劉光), 칠객 중의 자면비차(紫面飛叉) 희대목(姬大木)과 진령일수(秦嶺逸?) 범불수(范不垂), 팔수 중의 독응 위지독과 분랑 척시림 등 이름만으로도 능히 강호를 울릴 수 있는 인물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그들의 습격을 알아차린 인물은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막 사냥을 떠나려던 장승표였다. 장승표는 산문에서 일 리쯤 떨어진 계곡 쪽으로 갔다가 종남파를 향해 다가오는 한 떼의 고수들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종남파로 되돌아왔다.
“이… 이번엔 진짜인가 봅니다.”
장승표의 연락을 받은 중인들은 표정이 침울해졌다. 장문인이 없다는 것이 이처럼 불안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심지어는 자존심 강호고 자신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는 전풍개마저도 진산월의 부재(부재)에 안타까운 생각일 들 정도였다.
‘그 녀석의 비중이 이 정도였나?’
전풍개는 막상 초가보와의 일전(一戰)이 코앞에 닥치자 진산월이 없는 걸 아쉬워하는 자신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냉정을 잃지 않는 사람은 동중산 뿐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첫째는 장문인이 돌아오실 때까지 잠시 몸을 피했다가 다시 본산을 수복하는 것입니다.”
전풍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본산을 버리고 도망을 가란 말이냐?”
“지금 상태에서 본파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후일(後日)을 도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더구나 저는 이곳을 빠져 나갈 암도를 몇 군데 알고 있으니 그들으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전풍개는 무서운 눈으로 동중산을 쏘아보며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죽일 놈, 노부는 목이 칼이 들어와도 그런 짓을 못한다. 싸워 보지도 않고 꼬리를 말고 도망치려고 이십 년 만에 이곳으로 돌아온 줄 아느냐?”
전흠도 큰소리로 외쳤다.
“나도 무저건 반대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장문인 핑계를 대며 도망치란 말이오?”
동중산은 이미 그들의 성격을 환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반대하리한 것을 능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좀더 쉽게 말을 하기 위해 그들이 반대할 만한 방법을 먼저 제시했던 것이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빨리 말해라. 시간 없다.”
“본산을 지키면서 최대한 버티는 겁니다. 그들을 물리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격퇴당하지 않는 선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기다리는 겁니다.”
“뭘 기다린단 말이냐?”
“장문인이 돌아오실 때를 말입니다.”
전풍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냉소를 날렸다.
“끝까지 장문인 타령이구나. 그놈의 장문인이 언제 돌아올 줄 알고 무작정 기다린단 말이냐?”
동중산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떠나시기 전에 사흘 내로 오시겠다고 했으니 늦어도 오늘 중으로는 돌아오실 겁니다.”
전풍개는 날카로운 눈으로 동중산을 쏘아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네놈들 둘이서 그전부터 자주 통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네놈 말대로 장문인이 오늘 내로 돌아온다고 해도 적어도 서너 시진은 버텨야 하는데 이 인원으로는 어림없다.”
“본파의 건물을 최대한 이용하면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자세히 이야기해라.”
“그들에 비해 우리가 유리한 것은 우리들이 본파의 지형지물에 익숙하다는 겁니다.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싸운다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전풍개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찌그러졌다.
“본파의 건물이래 봤자 십여 채밖에 안 되는데 그런 방법이 통하겠는냐?”
“어차피 초가보에서는 예전과 같이 대대적인 인원을 보내지는 못합니다. 기껏해야 삼십 명 안짝일 겁니다. 그 정도의 인원으로는 본파의 건물들을 모두 장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건물 저 건물로 옮겨 다니며 그들을 공격한다면 반나절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전풍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나 그도 동중산이 말한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보거라.”
“일단 지금 인원을 삼개조(三個組)로 나눕니다. 조사님과 방 사고께서 한 조를 이루시고 저와 전 사숙이 또 한 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로 마지막 한 조를 이루겠습니다.”
“남은 사람들이라니… 설마 무공도 못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싸우게 한단 말이야?”
“그들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몸을 숨기는 것입니다. 싸울 수 없는 소 사숙과 유 사제, 갈 노인, 그리고 장 형과 방 소협은 일이 끝날 때까지 태평각 밑의 암도(暗道)에 숨어 있어야 합니다.”
듣고만 있던 방화가 불쑥 말했다.
“나도 싸우겠어요.”
동중산은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다른 네 사람을 보호해야 하네. 최악의 경우에 자네들의 행적이 발각될 수도 있으니 말일세.”
방화는 불만이 가득한 모습이었으나 자네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동중산의 거듭된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식의 일을 떠맡는 건 이게 마지막이에요.”
동중산은 조용히 웃었다.
“약속하지. 다음에는 반드시 흡족할 만한 역할을 맡겨 주겠네.”
이어 동중산은 종남파의 건물이 표시된 지도를 꺼내 들고 다른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조사님과 방 사고는 주로 태진각(太眞閣)에서 태화각으로 이동하시면서 싸워 주십시오. 두 분의 공격이 아무래도 우리의 주공(主攻)이니 조금 힘드셔도 분발을 당부드립니다.”
전풍개가 피식 웃었다.
“걱정도 팔자자. 노부는 신경 쓰지 말고 네놈들이나 잘해라.”
방취아도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 마. 이쪽 지리는 눈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니까. 사질도 내 신법이 얼마나 빠른지 알잖아. 그들은 내 그림자조차 발지 못할 거야.”
동중산은 안심한 듯 이번에는 전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 사숙게선 불편하겠지만 저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아시디시피 제 몸이 그다지 성처 얺으니 많은 도움을 바라겠습니다.”
전흠은 마음껏 싸울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 뒤치다꺼리하다 볼일 다 보겠군. 아무튼 도와는 주겠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동중산은 빙그레 웃었다.
“명심히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더니 밝고 힘찬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본파가 겪어 온 일에 비하면 이 정도 일은 시련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몇 시진만 버티면 된다는 든든한 방어막이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반드시 우리가 될 겁니다.”
전흠이 투덜거렸다.
“쳇, 멋있는 소리는 혼자 다 하는군.”
그때 밖을 내다보고 있던 장승표가 호들갑을 떨었다.
“왔다, 왔어. 그자들이 산문까지 왔다고…”
“그럼 시작합시다.”
동중산의 말을 마지막으로 중인들은 일제히 각자 맡은 바를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