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2화
제114장. 맹룡과강(猛龍過江)
진산월이 이씨세가를 처음 방문한 것은 육 년 전이었다. 그때 그는 사부인 임장홍을 따라 이씨세가의 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처음 본 이씨세가는 그에게는 하나의 경이(驚異)였다. 일개 가문이 이토록 넓은 장소에 이토록 웅장한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못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정말 대단하군요.”
진산월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임장홍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넓고 사람이 많은 집은 처음 봅니다. 이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임장홍은 온화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집의 주인 말이냐? 그는 특이한 사람이지.”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다. 그는 굉장히 오만하면서도 수줍음이 많고, 냉혹하면서도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한번 화가 나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곤 하지. 마음속의 생각을 겉으로 말하는 법이 없어 아무도 그의 진실한 속을 알지 못한다.”
진산월은 임장홍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쉽게 사귈 수 없는 사람이군요.”
임장홍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바로 그렇다.”
“그에게 친구가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는 두 부류의 인물들만을 사귄다고 한다.”
“그게 어떤 부류입니까?”
“하나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다.”
진산월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그가 사부님과 사귈 가능성은 거의 없겠군요.”
임장홍은 다시 웃었다.
“그런데 그는 나와 사귀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왜 나를 이곳으로 초대했겠느냐?”
진산월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임장홍은 비록 성격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었으나 누구를 추종하거나 하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서안의 최고 명문(名門)인 이씨세가의 주인에게 도움을 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임장홍은 진산월의 마음을 훤하게 알고 있는 듯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비록 무공도 보잘 것 없고 부자도 아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종남파의 장문인 자리.”
진산월은 움찔하여 급히 물었다.
“그가 본파의 장문인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 단지 어떤 종류의 일에는 가끔 그 이름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임장홍은 그 말만을 하고는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나 그때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씁쓸한 미소를 진산월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진산월은 이씨세가에서 임장홍을 초대한 이유가 임장홍의 절친한 벗인 팔비신살 곽자령 때문임을 알고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쓴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씨세가에 곽자령과 안면을 트기 위해 임장홍을 징검다리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임장홍은 그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었다. 이씨세가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친우가 이씨세가와 친분을 쌓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중에 곽자령은 임장홍의 추천장을 들고 자신을 찾아온 이씨세가의 고수를 보고는 특유의 무덤덤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친구는 당연히 나의 친구다. 당신들이 그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이런 서신(書信) 따위가 없어도 나와 친구로 사귈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설사 그가 직접 찾아와서 말한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이씨세가에서 그후 곽자령과 어떤 관계가 되었는지는 진산월도 알지 못했다. 이제 육 년 만에 이씨세가의 두터운 담벽을 다시 보게 되니 진산월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줄기 야릇한 감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시의 그는 그래도 사부를 따라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들 잠들어 있는 깊은 밤에 담장을 넘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파의 장문인 신분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진산월의 심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이번 일은 응계성의 행방을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응계성을 찾을 수만 있다면 야삼경에 남의 집을 몰래 들어가는 일보다 더한 짓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이씨세가의 높다란 담장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그중 후원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소리도 없이 허공을 날아 이씨세가의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한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고 있었으나, 진산월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후원의 어둠 속을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깊은 산중의 숲 속을 연상케 하는 듯한 울창한 수림들이 후원의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담장만 아니라면 이곳이 산속인지 장원 안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작은 수림 하나를 지나자 몇 채의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전각들은 음산하고 거대해 보였다. 몇 군데 걸려 있는 유등(油燈)에서 흘러 나오는 흐릿한 불빛이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방향을 가늠해 보고는 북서쪽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육 년 전의 기억으로는 이씨세가에서 죄인들은 수감하던 감옥이 그쪽 방향에 있었던 것이다. 상당한 거리를 움직였는데도 주위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설마 누가 후원으로 침입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지 호위무사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이내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전면에 제법 커다란 화원이 펼쳐져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 완전히 녹지 않았는지 화원의 군데군데에는 눈 더미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그중 가장 구석에 있는 제법 커다란 눈 더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 더미 속에 적어도 두 명 이상의 고수들이 숨어 있었다. 진산월은 건물의 그림자 속에 서 있기 때문에 아직 종적을 발각당하지 않았으나, 앞으로 두세 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숨어 있는 자들의 눈에 뜨일 것이 분명했다.
잠시 진산월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주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눈 더미 외에 달리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 하나 정말 그러한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바닥에서 몇 개의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돌멩이를 만지작거린 채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진산월은 손에 든 돌멩이 중 하나를 눈 더미 쪽으로 던지고는 재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그가 던진 돌멩이는 곧장 날아가더니 눈 더미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 커다란 호선(弧線)을 그리며 눈 더미에서 좌측으로 삼 장 부근의 풀밭에 떨어졌다.
파아아….
눈 더미가 산산히 흩어지며 그 속에서 두 인영이 섬전처럼 튀어나왔다. 흩날리는 눈발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두 명의 인영이 돌멩이가 떨어진 곳에 우뚝 선 채 사방으로 날카로운 안광을 뿌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발견하고는 무언가를 느낀 듯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속았다!”
하나 그들이 채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어느새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하나의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시커먼 그림자 속에서 빛살 같은 섬광이 자신들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는 광경 뿐이었다. 그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진산월은 단번에 그들의 혈도(穴道)를 제압해 쓰러뜨리고는 재차 앞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그의 신형이 채 일 장도 전진하기 전에 땅거죽이 뒤집히며 다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진산월은 손에 들고 있던 또 다른 돌멩이를 그에게 던졌다.
뒤늦게 튀어나온 인영은 황급히 그 돌멩이를 피했으나, 돌멩이를 던짐과 동시에 바짝 그 뒤를 따라온 진산월의 손에 맥없이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 인영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아마도 진산월의 빠른 몸놀림에 어지간히 놀란 듯 했다.
진산월은 주위에 더 이상의 매복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그 인영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흑의무복(黑衣武服)을 걸친 삼십대 초반의 장한이었다. 유달리 길쭉한 얼굴에 뾰쪽한 코를 가지고 있었고, 입술이 얄팍해서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진산월은 흑의장한의 두 눈을 쳐다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소. 소리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아혈(啞穴)을 풀어 주겠소. 승낙하면 눈을 깜박거리시오.”
흑의장한이 눈을 깜박이자 진산월은 그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그 순간 흑의장한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침입자다!”
“신용(信用)이 없는 친구로군. 난 그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이 자기 일에 충실하다는 점만은 인정해 주겠소.”
“네놈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감히 본가에 함부로 침입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흑의장한은 연신 주위가 떠나갈 듯한 고함을 내질렀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비쩍 마른 얼굴에 메마른 미소를 떠올렸다.
“이곳에 나 같은 사람을 가두는 곳이 있을 텐데…”
흑의장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더니 이내 큰소리로 말했다.
“제심전(濟心殿)을 말하는 거냐?”
“그렇소. 그곳의 위치만 알려 주면 당신은 자기 할 일을 모두 한 것이 되오.”
흑의장한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네놈이 무슨 속셈으로 제심전을 찾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본가에 들어온 이상 네놈은 가기 싫어도 그곳에 가게 될 것이다.”
“이왕이면 내 발로 찾아가겠소. 그곳이 어디요?”
“죽기를 자초하는구나. 여기서 두 건물 앞쪽으로만 가면 네놈은 본가를 함부로 침입한 대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소.”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하며 손을 내밀어 다시 그의 혈도를 짚었다. 그런 다음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당신은 제 할 일을 다했으니 이제 그만 쉬도록 하시오.”
흑의장한의 눈에 한 줄기 미혹의 빛이 떠올랐으나 진산월은 개의치 않고 마혈(麻穴)이 제압당한 채 굳어져 있는 그를 뒤로하고 몸을 움직였다. 아마 흑의장한은 자신이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는데도 왜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지 몹시 미심쩍었을 것이다.
사실 진산월은 그의 아혈을 풀어 주면서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주위의 음파(音波)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결국 흑의장한이 애써 내지른 고함 소리는 그들의 몸에서 반경 일 장 밖으로는 전혀 새어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진산월이 두 채의 건물을 지나갈 때까지 또 다른 매복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의 눈앞에 지붕이 낮고 창문이 거의 없는 단층의 건물이 나타났다. 그 건물은 양쪽 끝으로 사람의 얼굴만한 크기의 작은 창문 두 개가 나 있을 뿐, 출입구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 창문들조차도 지금은 굳게 닫혀 있어 도저히 들어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 건물의 주위에 별다른 호위가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어딘가에 비밀통로가 있을 텐데, 그 통로를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았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이씨세가의 후원에 이토록 은밀한 장소가 있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기가 들어갈 수 없다면 건물에 출입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는 일이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이 찾는 인물이 과연 저 건물 안에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진산월은 몸을 돌려서 조금 전에 흑의장한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흑의장한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 더미 속에서 뛰쳐나왔다가 쓰러졌던 다른 두 명의 장한들도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진산월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밤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푸른 청삼(靑杉)을 걸친 삼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길쭉하고 낯빛이 창백했으나, 짙은 눈썹 아래 내비치는 두 눈은 차갑고 예리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청삼중년인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진산월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뜻밖이오?”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청삼중년인은 진산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별로 놀란 표정이 아니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본가(本家)에 함부로 난입(亂入)할 정도면 그런 배짱이 있어야지. 이곳을 지키고 있던 관씨삼형제(關氏三兄弟)는 그리 못난 자들이 아닌데도 당신 손에 경보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진 것으로 보아 당신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겠소.”
청삼중년인은 날카로운 눈빛과는 달리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 준다면 당신의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도록 해주겠소. 내 제안이 어떻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그렇게 하겠소?”
“그럴 수는 없소.”
“내 말이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거요?”
진산월은 무표정한 얼굴에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호인(江湖人)의 의지라고나 할까? 뭐 대충 그런 거요.”
청삼중년인은 한동안 진산월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돌연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강호인의 의지라… 정말 모처럼 들어 보는 말이로군. 그 의지란 것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지 지켜보겠소.”
청삼중년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연 어둠 속에서 다시 몇 개의 인영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여 순식간에 진산월의 사위(四圍)를 철통 같이 에워싸버렸다.
장내에 금시라도 폭발할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네 명의 장한들은 하나같이 양쪽 태양혈(太陽穴)이 불룩 솟아 있고 두 눈에는 형형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손에 두 척 정도 되는 도(刀)를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내외공(內外功)을 겸비한 고수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깊은 삼경.
적막한 가운데 살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진산월은 소란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사람만 구해서 나가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하나 이미 최선의 상황은 지나가 버렸고, 소란이 커질수록 남들의 시선을 피해 담을 넘어 들어온 진산월로서는 난처한 일이 될 것이 뻔했다.
더구나 이들은 조금 전처럼 혈도만 간단히 제압하여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우두커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짙은 어둠에 싸인 하늘 한가운데로 검은 구름 하나가 흘러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구름이 원래 검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점의 빛도 없는 캄캄한 어둠이 그렇게 보이게 한 것뿐이다.
진산월도 피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단지 주위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피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꼭 봐야 할 피라면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서슴없이 검을 뽑았다.
팟!
눈부시게 번뜩이는 검광(劍光) 하나.
그리고 석상(石像)처럼 몸이 굳어진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허물어지는 네 개의 검은 그림자.
“헉!”
청삼중년인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흘러 나왔다.
네 명의 장한들은 이씨세가를 지키는 이십사위(二十四衛)에 속해 있는 인물들로, 하나같이 강호무림의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단 일순간엘 썩은 짚단처럼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단숨에 그들을 베어 넘긴 진산월의 검은 어느 사이에 청삼중년인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진산월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이제 내 의지를 알겠소?”
청삼중년인의 안색은 조금 전과는 달리 몇 차례 급격하게 변했다.
아무리 주위가 칠흑같이 어둡다고 해도 눈앞에서 네 사람을 쓰러뜨리고 자신을 제압할 때까지 진산월의 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무공에 나름대로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청삼중년인으로서는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당신은 누구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서 묻기에는 너무 늦은 질문이군.”
청삼중년인의 가슴이 서너 차례 크게 오르락 내리락 거리더니 점차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진산월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씨세가로 뛰어들어왔는지에 대해 짙은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청삼중년인은 한결 침착해진 얼굴로 진산월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불안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몸에 큰 키, 칼자국이 나 있는 강퍍한 얼굴에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극도로 냉정한 시선.
이런 모습에 이런 실력의 고수라면 강호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선뜻 뇌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진산월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당신은 내 수중에 들어왔소. 당신의 의지는 어떤 것이오?”
청삼중년인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내 의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살고자 하는 의지 말이오.”
청삼중년인의 안색이 조금 핼쑥해졌다.
“나를 죽이겠다는 말이오?”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청삼중년인은 그의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진산월의 표정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청삼중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나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소.”
“아무쪼록 그 의지가 굳건한 것이길 바라겠소.”
진산월의 검이 한차례 흔들렸다.
다음 순간, 청삼중년인은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목덜미를 뚫고 들어옴을 느끼고 두 눈을 부릅떴다.
진산월은 검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청삼중년인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거… 검기불혈진맥(劍氣拂穴震脈)!’
그의 크게 뜨여진 눈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검기불혈진맥이란 검기로 사람의 혈맥을 뒤흔들어 제압하는 상승(上乘)의 검학(劍學)을 말한다.
청삼중년인은 검기불혈진맥이란 말은 들어 보았으나 실제로 이러한 수법을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몸은 혈맥을 침입한 검기에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진산월은 창백하게 굳어진 청삼중년인의 얼굴을 담담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두면 한 시진 후쯤에는 당신의 혈맥이 모두 굳어져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와도 살릴 수 없을 거요.”
청삼중년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내… 내게 원하는 게 뭐요?”
“제심전으로 들어가는 방법.”
“그… 그건…”
청삼중년인의 안색이 흙빛으로 굳어지든 말든 진산월의 음성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당신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스스로 확인해 볼 좋은 기회가 아니겠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신중히 판단해서 대답하기 바라겠소.”
진산월은 한쪽에 있는 나무로 가서 등을 기댄 채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청삼중년인은 울컥 화가 치미는 모습이었으나 꼼짝돟 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그저 얼굴만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청삼중년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혈맥을 침투한 검기의 차가움이 전신을 얼려 버릴 듯 해서 단 일각(一刻)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알 듯 모를 듯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소. 제심전의 문을 여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우선 내 혈도를 풀어 주시오.”
진산월은 천천히 다가와서 다시 한차례 손을 휘둘렀다. 별다른 기척도 없었는데 청삼중년인의 얼굴이 제 혈색을 찾으며 굳어졌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청삼중년인은 진산월의 해혈수법(解穴手法)이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제심전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소.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해 주겠소. 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본가에 침입해 제심전으로 들어가려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안에 들어간다 해도 당초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소.”
“그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오.”
청삼중년인은 진산월의 얼굴을 힐끗 주시하더니 손으로 제심전의 양쪽 끝에 나 있는 작은 창문 하나를 가리켰다.
“저쪽 창문을 빠르게 세 번, 느리게 두 번 두드리면 암문(暗門)이 열릴 거요.”
“그게 다요?”
“나머지는 당신의 운(運)과 실력에 달려 있소.”
진산월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손을 움직여 그의 마혈(麻穴)과 아혈(啞穴)을 짚었다. 청삼중년인은 검기불혈진맥의 후유증으로 완전한 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맥없이 제압당하고 말았다. 진산월은 몸이 석상처럼 굳어져 있는 그를 남겨 두고 제심전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제심전은 출입구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하고 소박한 건물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건물에서 색다른 점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진산월은 청삼중년인이 가리킨 창문으로 다가가서 재빠르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똑똑!
별다른 기척도 없이 창문에서 이 장쯤 떨어진 곳의 벽면이 스르르 갈라지며 암문이 나타났다. 진산월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암문 속으로 서슴없이 들어갔다. 그의 몸이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갈라졌던 벽면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분명 출입구가 열렸다 닫혔는데도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실로 교묘한 장치가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의 몸을 삼킨 제심전은 여전히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제심전 안은 여타 전각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널찍한 대청이 있고, 한쪽에 내실(內室)로 향하는 작은 문이 있었다. 하나 진산월이 대청 안으로 미처 들어서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그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어왔다. 그 기운은 무척이나 빠르고 맹렬하여 웬만한 고수였다면 영문도 모르고 그 기운에 격중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문을 들어서는 순간에 문밖에 누군가가 잠복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슬쩍 몸을 비틀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팡!
진산월의 손에서 흘러 나온 경력이 차가운 기운과 정면으로 마주치며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헛!”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짤막한 경호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진산월의 몸은 이미 허공을 날아 그 기운을 발출한 사람에게로 쏘아져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급한 기색으로 몸을 돌려 옆으로 움직이려 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진산월의 앙상하게 마른 오른손이 그의 완맥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진산월의 가공할 무위(武威)에 경악했는지 입을 딱 벌린 채 진산월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진산월이 문 안으로 들어와서 그의 암습을 피하고 그를 제압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눈 한번 깜박할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전광석화(電光石火)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짙은 흑의를 입은 삼십대 중반의 장한이었다.
“이… 이렇게 빠를 수가…”
흑의장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을 때 진산월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흑의장한의 완맥을 잡은 채 허리를 돌려 왼손을 앞으로 세차게 내뻗었다.
콰릉!
나직한 굉음과 함께 한 줄기 강력한 장력(掌力)이 어둠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장력은 대청의 짙은 어둠 속 한 부분을 사정없이 휩쓸어 버렸다.
팡!
“크윽!”
폭음과 비명성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오며 검은 인영 하나가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 인영은 제심전의 출입구를 여닫는 기관을 조정하는 자였는데, 진산월이 이씨세가의 인물이 아님을 알고는 경보를 발하려다 순식간에 날아든 진산월의 벽공장력(劈空掌力)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진산월에게 완맥을 제압당한 흑의장한은 눈 깜박할 새 자신의 동료가 맥없이 당하자 정신이 하나도 없는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의 수정(水晶)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 눈빛을 받자 흑의장한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렸다.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섬뜩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완맥을 잡고 있는 앙상하게 마른 손은 마치 강철로 만든 것처럼 단단해서 손목을 타고 냉기(冷氣)가 흘러오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흑의장한은 나름대로 자신의 무공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괴인(怪人)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절대고수임을 깨달았다. 흑의장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귀… 귀하는 누구요?”
진산월은 자신의 시선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흑의장한을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하더니 니작하면서도 냉엄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여기에 모두 몇 명이나 갇혀 있소?”
흑의장한은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나 그때 자신의 완맥을 잡고 있던 진산월의 손이 무겁게 조여들며 전신이 저려 오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모… 모두 스무 명쯤 되오.”
“그들 중 추성이란 자가 있소?”
흑의장한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자신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잡혀 들어온 자가 추씨 성을 썼던 것 같기도 하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흑의장한은 다시 망설였다. 진산월은 그의 완맥을 움켜쥔 손에 일성(一成)의 공력을 더 끌어올렸다. 그러자 당장 흑의장한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완맥은 인체의 기(氣)가 흘러가는 중요한 급소 중 하나여서 일단 제압 당하게 되면 전신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 흑의장한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떨고만 있자 진산월은 돋우었던 공력을 거두어 들였다.
“그는 어디에 있소?”
흑의장한은 한차례 몸을 떨더니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저쪽으로 가면 지하(地下)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올 거요. 그 계단을 따라 아래로 가면 되오.”
진산월은 즉시 손을 들어 그의 혈도를 제압한 후 주저 없이 몸을 돌려 흑의장한이 가리킨 곳으로 다가갔다. 과연 희미한 어둠 속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산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