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3화
제115장. 심야검풍(深夜劍風)
계단을 모두 내려가자 짙은 어둠에 잠긴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의 길이는 십 장쯤 되었는데, 그 끝부분은 두꺼운 석문(石門)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막 그 석문을 향해 다가가려던 진산월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졌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십 장 길이의 통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괴괴한 어둠에 싸여 있는 검은 통로는 마치 지옥으로 가는 입구(入口)라도 되는 듯 했다. 진산월은 잠시 통로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막 세 번째 걸음을 내디뎠을 때 갑자기 양쪽 벽에서 몇 개의 창날이 튀어나왔다. 그런 상황을 예측이나 한 듯 진산월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더니 그의 몸이 한 줄기 연기처럼 너무도 유연하게 창날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하나 바로 그때 다시 여덟 개의 창날이 앞쪽에서 튀어나왔다. 이번의 창날은 처음보다 훨씬 빨랐을 뿐 아니라 그 시기가 교묘해서 진산월의 몸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진산월의 신형이 재차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
팟!
진산월의 몸은 순식간에 앞으로 사오 장이나 쑤욱 전진했다. 막 그가 통로를 거의 가로질러 바닥에 몸을 내려서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발이 닿으려는 부분의 바닥에서 대여섯 개의 작은 창들이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창들은 비록 지금까지 쏘아져 온 것들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나, 지금 상태로 발을 내디뎠다가는 그대로 발바닥이 뚫리고 말 것이 분명했다.
휘잉!
진산월의 몸이 내려서던 자세 그대로 무섭게 회전하며 세찬 회오리가 일어났다. 그와 함께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왔던 창날들이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따땅!
사방으로 비산(飛散)되는 창날들이 석벽에 부딪히며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것만 보아도 창날들을 휩쓴 회오리에 얼마나 가공스런 경력이 실렸는지를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방을 휘몰아쳤던 세찬 경풍이 걷히며 진산월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산월은 자신의 발 아래 여기저기 널려 있는 창날의 잔해들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장치로군.”
통로에 설치된 기관장치들은 하나하나 따지자면 그다지 위협적인 것이 없었으나, 세 개의 배열이 잘 이루어져 있어서 자칫했다가는 영문도 모르고 쓰러지기 십상이었다. 특히 마지막의 기관장치는 어지간히 뛰어난 일류고수라 할지라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진산월도 종남의 비전신법(秘傳身法)인 와선보(渦旋步)가 아니었으면 뜻밖의 낭패를 보았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이러한 기관장치를 믿고 통로에 특별한 경비를 세워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통로에 더 이상의 기관장치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통로의 끝을 막고 서 있는 석문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슬쩍 밀어 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석문은 별다른 힘을 주지 않고도 쉽게 열렸다. 석문의 열린 틈 사이로 이상한 악취와 코를 찌르는 듯한 비린내가 짙게 풍겨 나왔다. 진산월은 석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양쪽으로 수십 개의 석실(石室)들이 늘어서 있는 긴 복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석실들은 위아래로 작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었고, 그외에는 두꺼운 철문으로 막혀 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강호에서 명문세가로 드높은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씨세가의 한 귀퉁이에 이와 같은 감옥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좌측의 석실부터 차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석실들 중 대부분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하나 몇 군데 석실에는 각기 한 명씩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제일 처음 진산월의 눈에 띈 사람은 삼십대 후반 가량의 중년인이었는데, 다소 초췌한 모습으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철문에 난 구멍 사이로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름이 뭐요?”
중년인은 얼굴이 유난히 길고 광대뼈가 튀어나온데다 아래턱에 탐스런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중년인은 진산월의 물음에 다소 뜻밖인 듯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 보는 거요? 아니, 그보다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무언가를 느낀 듯 갑자기 중년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곳 사람이라면 내가 누군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당신은 이씨세가의 사람 아니로군? 그렇지 않소?”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이름이 어떻게 되오?”
중년인은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누군가를 찾고 있군. 그래서 이곳까지 잠입한 거요? 당신의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 배포만은 칭찬해 줄 만 하군. 당신이 찾는 사람이 누구요?”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송천기.”
중년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어서 문을 열어 주시오.”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중년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그를 불렀다.
“여보시오… 내가 바로 송천기요, 왜 그냥 가는 거요? 나를 구해 주러 온 게 아니란 말이오?”
그가 무어라고 떠들든 진산월은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석실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 한 명이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늙은이의 주름살투성이 얼굴에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 있어서, 흉측하고 살벌해 보였다. 늙은이는 잠을 자고 있는지 두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진산월은 늙은이를 일별(一瞥)하고는 다시 다른 석실로 몸을 돌렸다. 세 번째 사람은 이목구비가 수려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그는 조금 전에 진산월과 중년인의 대화를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철문에 나 있는 구멍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있다가 진산월과 눈이 마주치자 다급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송천기는 내 친구요. 귀하는 송 노형의 부탁으로 왔소?”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물었다.
“귀하의 이름은?”
“나는 추성이라 하오.”
진산월은 즉시 철문의 고리를 풀고 철문을 열었다. 추성은 한차례 비틀거리더니 이내 몸을 가누고는 석실 밖으로 나왔다.
“누군지 모르나 고맙소. 송 노형과는 어떤 사이요?”
“주고 받을 게 있는 사이요. 불편한 곳은 없소?”
추성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무공을 폐쇄당했소. 몸을 움직이는 데 크게 지장은 없으나, 빠르게 움직이기는 힘들 것 같소.”
“어디 한번 봅시다.”
진산월은 서슴없이 그의 맥문을 잡았다. 추성은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몸 속으로 진기를 넣어 보더니 표정이 조금 무거워졌다.
“칠개대맥(七個大脈)을 모두 봉쇄 당했군. 혈도를 뚫는 것은 가능 하나 시간이 제법 걸리겠소. 일단은 이곳을 빠져 나간 후에 처리해야 할 것 같소.”
진산월이 추성을 데리고 감옥을 빠져 나가려 할 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보시오, 나는 두고 그냥 갈 셈이오?”
진산월이 돌아보니 처음에 자신을 속이려 했던 중년인이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형장을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나도 워낙 사정이 다급해서 그랬던 거요. 형장이 이대로 떠난다면 나는 며칠 내로 그자들 손에 처단되고 말 거요. 그러니 제발 나도 좀 꺼내 주고 가시오.”
중년인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다가 진산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리려 하자 더욱 애원의 소리가 높아졌다.
“형장! 제발 부탁하오. 이대로 가면 난 죽게 되오. 사람이 죽는데 그냥 두고 간단 말이오?”
그래도 진산월이 그냥 가버릴 듯 하자 악에 받쳤는지 목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이 마른 개뼉다귀 같은 놈아! 너도 사람이면서 어찌 이리도 무정하단 말이냐? 그냥 갈 바에는 차라리 날 죽이고 가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아예 이 더러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중년인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언제 몸을 움직였는지 그의 코앞에 진산월의 차가운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중년인은 철문에서 떨어지며 몸을 움찔 떨었다.
“저… 정말 나를 죽일 셈이오?”
덜컹!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대신 철문이 열렸다. 중년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내다보니 진산월은 어느새 추성과 함께 감옥을 벗어나고 있었다. 중년인은 황급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같이 갑시다.”
진산월은 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대신 추성이 약간은 의아하고 약간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중년인은 넉살좋게 웃으며 그들에게 바짝 다가갔다.
“나도 어차피 무공이 폐쇄되어 혼자 힘으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소. 그러니 이왕 도와 줄 바에는 이곳을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가게 해주시오.”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추성이 한 마디 했다.
“따라오려거든 조용히 따라오시오.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다가 여기 사람들을 모두 깨울 참이오?”
중년인은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분부대로 하겠네.”
추성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진산월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감옥을 나오자 기관장치가 되어 있던 검은 통로가 나타났다. 중년인은 통로의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부서진 창날들을 보고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이곳을 지키는 자를 위협해서 기관을 정지시킨 줄 알았더니 몸으로 때운 모양이군. 낙백삼창관(落魄三槍關)은 절정고수라도 피하기 어려운데 아주 박살을 냈구나.”
추성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그런데 앞서 걷고 있던 진산월이 갑자기 몸을 돌려 중년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 왜 그러시오?”
진산월은 중년인을 빤히 쳐다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기관에 대해 알고 있소?”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도요.”
진산월은 그에게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앞장 서시오.”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이러는 거요?”
“이 건물을 벗어날 때까지는 당신의 신세를 져야겠소.”
“정말 들은 풍월 밖에는 모르오. 게다가 지금은 무공도 쓸 수 없는 몸이란 말이오.”
“위급해지면 구해 주겠소.”
중년인은 쓴웃음을 짓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길,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는군.”
투덜거리면서도 중년인은 재빠른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산월이 정체도 모르는 중년인을 선뜻 앞에 내세운 것은 혹시라도 이곳에 또 다른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자신 혼자라면 모를까, 무공이 폐쇄당한 사람을 둘씩이나 데리고 암습(暗襲)이나 기관을 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년인은 제법 능숙한 솜씨로 통로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통로를 다 벗어날 때까지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온 중년인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저 계단이 조금 이상하구려.”
진산월은 중년인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으나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그쪽을 유심히 살펴보던 추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다른 부분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중년인은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래 보이나? 하지만 잘 보게. 저 일곱 번째 계단은 다른 계단과는 달리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세.”
뜻밖의 말에 추성은 물론이고 진산월도 눈을 크게 뜨고 일곱 번째 계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나 아무리 보아도 전혀 다른 계단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의 계단들은 모두 돌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돌로 만들지 않았다면 나무계단이란 말인데, 진산월의 안목으로 돌과 나무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내려올 때는 아무런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지 않은가? 중년인은 진산월의 그런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입술로 혀를 살짝 축이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계단은 나무로 만들어서 돌가루를 씌운 것이오. 아마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는 별 이상이 없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때는 기관이 발동하도록 되어 있을 거요.”
진산월은 중년인의 눈치와 안목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비상함을 깨닫고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중년인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시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남들보다 이런 장치에 좀더 익숙한 것뿐이오.”
옆에서 듣고 있던 추성이 궁금한지 물었다.
“직업이 뭐요?”
중년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알 거 없네. 그냥 두루두루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게.”
추성이 다시 무언가를 물으려 했을 때, 중년인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가 아니라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 나는 것일세.”
이어 그는 성큼 계단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추성은 자기 입으로 기관장치가 있다고 말하고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무작정 계단을 올라가는 중년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데 중년인의 다음 행동은 추성을 허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중년인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일곱 번째 계단을 훌쩍 뛰어넘어 다음 계단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이어 추성을 돌아보며 얄미운 웃음을 날리는 것이었다.
“이런 장치는 안 밟으면 그만일세. 장치가 있다는 걸 모르면 곤란해도 알면 아무것도 아닌 거지.”
추성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은근히 약이 오르기도 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가 맥없이 그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계단을 모두 오르자 제심전의 넓은 대청이 나타났다. 진산월은 제심전을 들어올 때 자신이 제압했던 두 명의 흑의인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심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사위(四圍)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이 처음 들어왔던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추성과 중년인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얼마쯤 가니 멀리 이씨세가의 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 담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진산월이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추성과 중년인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 거요?”
담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제법 울창한 수림이 자리잡고 있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그 수림에 고정되어 있었다. 추성과 중년인은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긴장한 표정으로 진산월의 뒤쪽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이목이 대단하군.”
낭랑한 음성과 함께 몇 명의 인물들이 수림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진산월의 뒤쪽에서도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 추성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포위되었소.”
뒤쪽에도 어느새 십여 명의 무사들이 반원형으로 에워싼 채 그들을 압박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진산월의 시선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물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 중 좌측의 세 사람은 쌍둥이인지 얼굴과 체형이 몹시 흡사했다. 각진 턱과 뱀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쭉 찢어진 눈, 그리고 유난히 긴 양팔과 허리춤에 매달린 기형도(奇形刀)까지. 나이는 대략 삼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진산월은 그들 삼형제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씨세가의 수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살성(煞星)으로 소문난 혁가삼랑(赫家三狼)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쌍둥이들로서, 비단 무공이 고강하고 합격술에 능할 뿐 아니라 손속이 잔인해서 일단 손을 쓰면 상대를 살려 두지 않기로 유명했다. 혁가삼랑의 우측에는 반백(半白)의 머리에 짙은 고동색 장포를 입은 중늙은이가 표표히 서 있었다. 비쩍 마른 몸에 고적한 눈빛을 가진 그 중늙은이의 오른손에는 도사(道士)들이 사용하는 불진(拂塵)같이 생긴 물건이 들려 있었다. 제일 마지막 인물은 체구가 건장하고 눈빛이 강렬한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호화로운 화의(華衣)를 입고 허리춤에는 금빛 요대를 차고 있었는데, 뒷짐을 진 채 느긋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는 모습이 몹시 여유자적하면서도 당당해 보였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화의청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태도만큼이나 당당하고 여유로운 것이었다. 진산월은 한눈에 그가 이들의 우두머리임을 알아차렸다. 진산월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화의청년은 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나는 이서명(李瑞命)이라 하오. 내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본 것도 같군.”
스스로를 이서명이라고 밝힌 화의청년은 무엇이 그리 흥겨운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다면 말하기 더욱 쉽겠군. 귀한 손님이 오신 줄로 모르고 대접이 소홀했던 것 같아 내가 직접 나오게 되었소.”
이서명의 음성이나 태도에는 당당함을 넘어선 자부심과 패기가 담겨 있었다. 하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런 모습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서명은 이씨세가의 가주인 장안대호 이세적의 조카로, 이씨세가의 젊은 층 고수들 중 이존휘에 못지않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이존휘가 문무쌍전(文武雙全)으로 명성이 높은 데 비해, 이서명은 천부의 무재(武才)로 알려져 있었다. 순수한 무공 실력만 놓고 보자면 이존휘를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안제일공자 이존휘와 견주어서 그를 천무공자(天武公子)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서명은 진산월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전혀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자 그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지 궁금하지 않소?”
진산월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궁금하오.”
진산월이 이씨세가의 담장을 넘어서 제심전에서 두 사람을 빼내올 때까지 만난 사람은 모두 제압하거나 제거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미 진산월이 올 방향에 미리 잠복해 있었으니 진산월로서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명은 가볍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서 있는 우측 숲에서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들을 보는 순간 진산월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진산월이 이씨세가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제압했던 세 명의 흑의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관씨(關氏) 성을 지닌 형제들로, 진산월의 손에 쓰러졌다가 진산월이 제심전을 살펴보는 동안 청삼중년인에게 구출되었었다. 그런데 진산월을 막기 위해 네 명의 고수들을 대동하고 달려간 청삼중년인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이 총관(二總官)에게 가서 사태를 보고했다. 그들의 보고를 받은 이 총관이 바로 이서명의 옆에 불진을 든 채 서 있는 중늙은이였다. 그의 이름은 갈종의(葛宗倚)라 했다. 갈종의는 이서명의 외가(外家) 쪽 친척으로, 계산에 밝고 지모가 뛰어나서 이씨세가의 식솔로 들어온 지 십 년 만에 총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갈종의는 관씨삼형제의 보고를 받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이서명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서명은 진산월의 표정을 살피며 빙긋 웃었다.
“당신 정도의 실력자가 무엇 때문에 본가에 몰래 들어왔는지 궁금했는데, 겨우 저런 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니 조금 실망이 되는구려.”
이어 이서명의 시선이 진산월의 뒤에 서 있는 추성과 중년인을 훑고 지나갔다. 비록 잠깐 동안이었으나, 그와 시선이 마주친 추성과 중년인은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전신을 쑤시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본가의 식솔을 죽인 자이고, 다른 하나는 겁도 없이 본가에 뛰어들어온 도둑놈인데, 저런 자들 때문에 손을 더럽히는 건 무인(武人)의 수치라고 생각지 않소?”
진산월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사람의 가치란 그렇게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진산월의 말이 뜻밖인 듯 이서명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럼 당신은 저들의 가치가 무어라고 생각하오?”
“가치란 상대적인 거요. 내가 어떤 일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다른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내게는 그 일이 가치가 있는 일이 되는 것이오.”
“호! 그럴듯한 말이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목숨을 내 걸고 본가에 뛰어들 정도로 그들이 가치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걸.”
처음으로 진산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왼쪽 뺨에 나 있는 흉터 자국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스산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목숨을 내걸 정도는 아니라도 사소한 위험을 무릅쓸 정도는 되지.”
이서명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사소한 위험이라? 너무 광오한 말이라고 생각지 않소?”
“의심나면 시험해 보시오.”
이서명은 형형한 눈빛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시험해 보고 싶소. 그래서 자다 말고 뛰쳐나왔지만, 아무래도 나한테까지 차례가 올 것 같지 않구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일 좌측에 있던 혁가삼랑이 어슬렁거리며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똑같이 생긴 얼굴만큼이나 행동도 같아서 언뜻 보기에는 한 사람이 분신술(分身術)을 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은 진산월의 앞으로 서너 걸음 다가오더니 일언반구 말도 없이 일제히 몸을 날려 그에게로 육박해 들어왔다. 그들의 손은 모두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기형도의 손잡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아직 도를 뽑아 든 사람은 없었으나 순식간에 사방이 그들에게 흘러 나오는 흉흉한 살기로 뒤덮여 버렸다. 진산월은 앞으로 성큼 한 걸음 내디뎠다. 자칫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추성과 중년인이 전권(戰圈)에 휩쓸리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무서운 속도로 진산월에게 다가오던 혁가삼랑의 신형이 갑자기 흔들리며 그들의 신형이 사방으로 마구 교차되어 진산월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도무지 누가 어느 쪽으로 다가오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혁가삼랑에게서 거의 동시에 도기(刀氣)들이 발출되었다.
파파팟!
무시무시한 섬광을 뿌리며 날아드는 세 가닥의 도기는 금시라도 진산월의 전신을 짓이길 듯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누가 보기에도 진산월의 몸이 삼등분 되어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진산월은 출검(出劍)을 했다.
따따땅!
귀청을 찢을 듯한 파공음이 거푸 터지며 그토록 살벌한 기세로 날아들던 세 가닥의 도기들이 한 줄기 검광에 모두 격퇴되었다. 그와 함께 난데없이 구름 같은 검영(劍影)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장내를 휩쓸어 버렸다. 그 검영이 펼쳐지는 속도가 워낙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혁가삼랑 세 사람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이얍!”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듯한 고함 소리와 함께 혁가삼랑은 맹렬하게 도를 휘둘렀다. 수비를 완전히 도외시한 그들의 공세는 수십 개의 시퍼런 도광을 형성하며 구름 같은 검영과 마주쳐 갔다. 놀랍게도 그토록 많은 도광과 검영이 부딪쳤는데도 아무런 파공음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무거운 침묵만이 주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침묵은 곧 깨어졌다.
“아!”
누군가의 뜻 모를 탄성이 흘러 나오더니 돌연 무서운 기세로 도를 휘두르던 혁가삼랑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들의 몸에는 수십 개의 검흔(劍痕)이 나 있어 성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반면에 진산월은 언제 검을 썼느냐는 듯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우윳빛 검광을 뿌리는 장검이 들려져 있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가 단 이검(二劍)으로 이씨세가의 일류고수인 혁가삼랑을 검하고혼(劍下孤魂)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경악과 불신(不信)의 시선으로 진산월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천천히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서명이었다. 놀랍게도 이서명의 얼굴에는 여전히 처음의 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일어난 보람이 있군. 당신은 정말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칼솜씨를 가지고 있소. 나로서는 아주 기쁘게도 말이지.”
이서명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가만히 늘어뜨린 채 조용한 시선으로 이서명을 응시했다.
그 물처럼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이서명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검객(劍客)다운 눈이로군. 그렇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줘야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창!
날카로운 검명(劍鳴)과 함께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의 눈부신 금검(金劍)이 쥐어져 있었다.
이제 보니 그의 허리띠는 다름아닌 연검(軟劍)이었던 것이다.
원래 연검은 허리띠로 대용할 만큼 탄력이 좋고 부드러운 반면에 단단한 강도는 떨어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서명이 들고 있는 금검은 여타 장검처럼 꼿꼿하게 서 있어서 도무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연검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이것은 이서명이 몸 속의 진기를 금검 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검 속에 자신의 진기를 넣는다는 것은 절정의 검도(劍道)를 익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서명이 금검을 뽑아 든 채 진산월에게 다가가자 장내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이서명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연덕스런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이 나를 꺾는다면 본가에서도 더 이상 당신을 막지 않을 거요.”
말과는 달리 그가 자신의 패배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이서명 뿐 아니라 이서명의 뒤에 서 있는 갈종의와 관씨삼형제도 마찬가자였는지 그들의 얼굴에서는 특별히 걱정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이서명을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만큼 이서명에 대한 이씨세가 사람들의 믿음은 확실한 것이었다.
이서명은 유쾌한 듯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당신이 패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차피 강호인이란 언제 이슬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 아니겠소? 그러니 너무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거요.”
싸우기 전에 주절주절 떠드는 것은 이서명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서명이 싸움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실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이서명이 즐기고 있는 도락(道樂)의 일종일 뿐이었다.
쥐를 잡은 고양이가 쥐를 죽이기 전에 희롱을 하듯이 상대를 쓰러뜨리기 전에 간단한 말의 유희(遊戱)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따라 이서명의 말은 평소보다 더욱 많았다.
그것은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마음속 즐거움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反證)이었다.
“자, 먼저 손을 쓰시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공격할 변변한 기회조차 없을지 모르니 말이오.”
진산월은 짤막하게 몇 마디를 내뱉었다.
“후회하지 말기 바라오.”
“후회 따위는…”
이서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산월의 용영검이 허공을 가르며 이서명에게로 날아들었다.
마치 허공을 송두리째 반으로 갈라 버릴 듯한 가공할 검기와 함께 용영검이 이서명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서명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진산월의 검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했던 것이다.
조금 전에 혁가삼랑을 상대할 때 진산월의 검법은 비록 다채로운 변화 속에 무궁(無窮)한 현기(玄機)를 담고 있기는 했으나 이처럼 강력한 맛은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이마를 향해 날아드는 검 속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가공할 위력이 실려 있었다.
이런 공격을 어설프게 피했다가는 상대의 기세에 일방적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이서명은 물러서지 않고 수중의 금검으로 진산월의 검을 마주쳐 갔다.
그런데 막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하려는 순간, 진산월의 검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미간을 노리던 검이 갑자기 뚝 떨어지며 이서명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무서운 위세로 날아들던 검이 이토록 교묘한 변화를 일으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것이 유운검법 중의 초식인 운중암전(雲中暗電)이었다.
원래 빠르고 위력이 강한 초식일수록 변초(變招)를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운중암전은 번갯불 같은 초식 속에 또 다른 변화를 숨기고 있어서 설사 알고 있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막기가 힘들었다.
이서명은 황급히 몸을 비틀며 금검으로 자신의 목덜미로 다가오는 검을 막았다.
땅!
‘윽!’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이서명은 검을 잡은 손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하나 그가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다시 진산월의 검봉(劍鋒)이 흔들리더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금검을 피해 계속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이서명은 상대의 거듭된 공격에 내심 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이번 공격에도 예리하기 그지없어서 할 수 없이 옆으로 두 걸음 빠르게 비켜서며 공격을 무산시키려 했다. 한 번만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절학인 천풍십팔검(天風十八劍)을 펼쳐 노도와 같은 기세로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하나 그 한 번의 반격 기회를 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진산월의 검은 쉴사이 없이 계속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이서명의 요혈(要穴)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다양한 변화와 눈부시도록 빠른 속도, 그리고 검 속에 실린 힘은 이서명으로 하여금 도저히 반격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흘렀다. 그동안 진산월은 일방적으로 공격하기만 했고, 이서명은 수세에 몰린 채 수비에 급급했다.
‘한 번만… 한 번만…’
이서명은 눈을 부릅뜨고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하나 진산월의 검은 한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우윳빛 검광을 뿌리며 날아드는 검영은 마치 뭉게구름처럼 기이한 변화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이서명의 가슴팍을 노리고 있었다. 이서명은 금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 그 변화무쌍한 검영에 맞서 갔으나 완벽히 막지 못하고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모두 잘려 나갔다. 용케도 가슴이 피투성이가 되는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으나 이서명은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상대를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넘쳐 선수(先手)를 양보한 것이 이런 위기에 몰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이서명이었다. 이서명으로서는 참으로 후회막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막 그의 가슴팍 옷자락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사라지는 듯 하던 진산월의 검이 다시 꿈틀거리며 구름 같은 검영을 재차 일으켜 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끝없는 운무(雲霧)가 계속 피어오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곽일산이 만들었던 유운검법 중의 절초인 운무중첩(雲霧重疊)이 사백 만에 처음으로 본연의 위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서명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사력을 다해 금검을 휘둘렀다. 그의 금검에서 찬연한 금광이 마구 피어올랐다. 하나 무섭게 확산되는 구름 같은 검영은 순식간에 그 금광들을 에워싸 버렸다.
파팟!
“큭!”
핏물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짤막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서명아!”
한쪽에서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갈종의가 깜짝 놀란 경악성을 터뜨리며 장내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고수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그 순간, 이서명을 쓰러뜨린 진산월이 어느새 추성과 중년인을 양쪽 팔에 안고는 그들의 머리를 뛰어넘어 담장 밖으로 날아갔다. 몇몇 고수들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장력(掌力)을 날렸으나 진산월의 신형이 워낙 빨라서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갈종의는 담을 넘어 사라진 진산월은 신경도 쓰지 않고 황급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서명에게로 달려갔다. 이서명은 가슴팍 부근이 피투성이가 된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서명의 맥문을 잡은 갈종의는 그의 맥이 뛰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서명의 가슴팍을 지혈(止血)한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이서명의 가슴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검기들이 피부만을 가르고 지나갔을 뿐 심맥은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상처가 반치만 더 깊었어도 이서명의 가슴은 갈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갈종의의 품에 안겨 있던 이서명의 눈이 뜨여졌다.
“서명아…”
이서명은 갈종의를 올려보더니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외숙(外叔), 그자는 갔습니까?”
“그래. 그보다 몸은 어떠냐?”
“쿨럭!”
이서명은 갈종의의 앞가슴에 한바탕 피를 토해내고 나서야 겨우 혈색을 되찾았다. 이서명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번에 아주 호되게 당했군요. 설마 그자의 검이 그토록 무서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갈종의는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너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갈종의는 이서명을 크게 꾸짖지 않았으나, 이서명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제가 아무래도 그자를 너무 경시했나 봅니다. 그나저나 그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외숙께선 아십니까?”
“특이한 외모의 소유자라서 정체를 알기는 어렵지 않을 듯 싶다. 그런데 그자의 목적이 지일환(池日環)인지 추성이란 애송이인지 모르겠구나. 그들 둘은 전혀 연관이 없는 사이여서 그들 모두를 구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때 등뒤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아무도 추성일 거요.”
갈종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대공자(大公子)!”
그들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눈부신 백의를 입은 준수한 미청년이 담담한 신색으로 서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장안제일공자 이존휘였다. 이존휘가 나타난 것을 보자 이서명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낯빛은 아직도 핼쑥했으나, 눈빛만큼은 다시 조금 전과 같은 형형함을 되찾았다.
“언제 왔소?”
그의 음성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반대로 이존휘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쓸데없는 자만심에 그자에게 선수를 양보했다가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뒤로 밀렸을 때였다.”
이서명의 눈자위가 실룩거리며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하나 이존휘는 그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빙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정도의 고수는 강호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소귀에 경 읽기로구나. 상대의 실력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선수를 양보하다니 그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서명이 진산월을 무조건 경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도 뻔히 자신의 눈으로 진산월이 혁가삼랑을 단 이 초 만에 쓰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했었다. 다만 그는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자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 뿐이다. 문제는 진산월의 검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지나치게 뛰어났다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이서명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마음속으로는 분노가 들끓고 있는지 얼굴빛이 붉게 상기되었고, 두 눈에는 무시무시한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존휘도 더 이상은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비록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씨세가의 양대공자(兩大公子)라고 두 사람을 함께 칭해도, 그들 사이의 서열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이존휘는 이세적의 유일한 아들이며, 누가 뭐래도 이씨세가의 소가주(小家主)였다. 그에 비해 이서명은 방계(傍系)의 후손이며 나이나 경력 면에서 이존휘에게는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이서명 본인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이존휘에게 있어 이서명은 자신이 거느려야 할 수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수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되면 의기소침하거나 반발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것도 이존휘는 바라지 않았다. 이서명은 아직은 써먹을 데가 많은 존재였다. 갈종의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공자께선 그자를 아십니까?”
“일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소.”
“그자가 누굽니까?”
이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오. 하지만 이번 일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지.”
갈종의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존휘의 두 눈에는 괴이한 기광이 번쩍거렸다.
“지금까지 미궁 속에 빠져 있던 사안(事案)들의 실마리를 풀었소.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던 일인데, 내가 소홀했던 것 같소.”
갈종의는 이존휘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취급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 말이 자신에 대한 자책이라기 보다는 조금 전에 사라진 괴인에 대한 경계심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자의 목적이 추성을 구출하기 위함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일환은 단순히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에 불과하지만 추성은 아니오.”
갈종의도 추성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항을 모르는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추성이 본가의 고수를 살해했기 때문에 끌려온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는…”
무언가 입을 열려던 이존휘의 눈빛이 갑자기 강렬하게 번뜩였다.
“그렇게 되는 건가?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깊은 상념에 빠진 듯 이존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갈종의는 그의 생각을 방해할 수 없어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이서명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존휘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는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갈종의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명의 어깨를 툭 쳤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네가 설욕할 수 있는 기회를 조만간 만들어 주겠다.”
이서명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정확히는 몰라도 어디 가면 그자를 만날 수 있을지는 알고 있다.”
이서명은 급히 물었다.
“그곳이 어디요?”
이존휘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서명과 갈종의도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멀리 동터 오르는 여명(黎明) 사이로 웅장하게 펼쳐져 있는 하나의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존휘는 한동안 그 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종남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