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9화
제121장. 신검무적(神劍無敵)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해정설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허어! 정말 굉장한 검기로군. 자네 나이에 이와 같은 검기를 발출하는 검객이 있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네.”
그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무거운 것이었다. 진산월은 여전히 검을 든 채로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도 대응표국의 인물이오?”
화산파 고수들의 얼굴에 일제히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이 몰라서 이렇게 물은 것은 아니었다. 진산월도 눈앞의 노인이 화산파의 고수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그 점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해정설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노부는 해정설이라고 하네.”
진산월은 즉시 포권을 했다.
“화산파의 장로이신 난매신검이셨군요. 나는 종남파의 진산월이라 하오.”
해정설의 강호상에서의 배분은 진산월의 스승인 임장홍보다 높아서 종남삼검과 비슷했다. 그러니 진산월이 비록 일파의 장문인 신분이라고 해도 그에게 선배 대접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강호에서의 배분이란 묘한 것이어서, 비슷한 수준의 문파에서는 상대의 배분을 인정해 주는 게 원칙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파일방의 고수들끼리는 서로 상대 문파에서의 지위와 배분을 자신의 문파와 동등하게 대접해 준다는 것이다.
종남파가 비록 지금은 구대문파에서 쫓겨난 상태이나 오랫동안 구대문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진산월은 해정설을 장로의 신분으로 대우해 준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원칙이 일방적이라는 데 있었다. 세력이 약한 문파에서는 강한 문파의 신분을 인정해 주는 데 비해 반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때가 왕왕 있기도 했다.
어쨌든 진산월의 인사를 받자 해정설도 그를 아랫사람 다루듯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비록 지금은 구대문파에서도 내쫓긴 상태이긴 하나 진산월은 엄연히 일파의 존주(尊主)였다. 원래 자신이 대접을 받으려면 상대에게도 대접을 해주어야 하는 법이다.
“진 장문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네. 듣던 것보다 더욱 대단한 기도를 지녔군.”
“해 대협을 만나서 나도 기쁘게 생각하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군요.”
해정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진산월이 자신의 신분을 알면서도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해정설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서 있는 단리정천을 슬쩍 쳐다보더니 정색을 하고 진산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 장문인이 무슨 일 때문에 이곳에 와서 살수(殺手)를 펼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대응표국에서는 아무도 진 장문인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네. 그러니 이쯤에서 손을 거두고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나?”
해정설로서는 모처럼 상대를 배려해 준 말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대응표국과 본파와의 일이오. 그러니 해 대협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이 일에 개입할 수는 없소.”
너무도 단정적인 그의 말에 해정설은 일시지간 할 말을 잃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화산파의 고수들의 얼굴에도 서서히 분노의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나이나 강호에서의 위치로 보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차이가 남에도 해정설이 예의를 갖추어 부탁을 했는데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해 버렸으니 그들의 눈에 진산월이 얼마나 광오하고 무례한 인물로 비치겠는가?
원래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법이다. 화산파의 인물들은 항상 자신들이 강호에서 손꼽히는 명문정파의 최고봉이며 남들에 비해 우월하다는 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자신들이 부탁을 하면 누구라도 들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그들은 자신들이 만족하기 전에는 아무리 다른 사람이 부탁한다 해도 결코 그 부탁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해정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진산월을 응시했다. 하나 진산월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철탑처럼 강인하고 냉정한 얼굴을 보자 해정설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단리정천이 진산월의 손에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어찌되었건 대응표국과 화산파는 이미 결맹을 한 사이가 아닌가? 종남파와 대응표국이 무엇 때문에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대응표국이 위기에 처한 이상 화산파는 대응표국을 도와야 할 명분과 책임이 있었다.
만약 진산월의 무공이 이토록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별다른 고려도 없이 대응표국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 아래 해치우고 말았을 것이다.
해정설은 조금 전에 보았던 진산월의 검법을 다시 뇌리에 떠올려 보았다. 비록 무서운 검법이고 냉철한 솜씨였지만 자기 혼자라면 모를까 남사일이 있는 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해정설은 마음을 결정하고 진산월을 향해 고개를 저어보였다.
“더 이상의 살수는 안 되네. 오늘 진 장문인이 한 일만으로도 대응표국은 이미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네. 대응표국과 본파는 이미 결맹한 사이이니 진 장문인이 계속 억지를 부리겠담녀 우리도 두고만 볼 수는 없네.”
의외로 진산월은 너무도 쉽게 대답해서 해정설이 허탈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럼 준비하시오. 나는 손을 쓰겠소.”
해정설은 물론이고 화산파의 고수들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그들이 지금 진산월의 심정을 어찌 알겠는가? 응계성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라면 화산파가 아니라 구대문파 전부와 적대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화산파의 고수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진산월은 수중의 용영검을 힘껏 움켜쥐고 단리정천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정말 광오하군. 그래도 종남파라면 백도(白道)의 명문으로써 나름대로 전통이 있는데 그 장문인이란 자가 어찌 이리도 광망(狂妄)스럽단 말인가?”
마침내 해정설이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뜨렸다.
하나 그때 진산월은 이미 단리정천을 향해 곧장 달려들고 있었다. 해정설이 신호를 내리기도 전에 장내에 있던 화산파의 제자 다섯 사람이 일제히 몸을 날려 진산월을 에워쌌다. 천개방과 백수함을 비롯한 일대제자들이었다.
차창!
그들 다섯 사람이 일제히 발검(發劍)하는 소리가 마치 하나의 검이 뽑혀 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정심한 검도를 닦은 인물들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곧 일 대 오(一對五)의 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해정설은 진산월이 자신의 몇 번에 걸친 제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일대제자과 싸움을 벌이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정말 검법만큼이나 성질도 대단하군. 일파의 장문인이란 자가 저토록 화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로구나.”
그때 그의 옆에서 격전을 구경하고 있던 신산 곡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자는 결코 성격이 급하거나 경솔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침착하고 냉정한 인물이지요.”
해정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곡수의 눈은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종남파 장문인의 과거 별호는 삼절무적이었습니다. 심계와 언변, 그리고 배짱이 좋다고 하여 붙여졌던 이름이지요. 그런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홧김에 이런 일을 저질렀겠습니까?”
“그렇다면 저자의 행동이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란 말인가?”
“적어도 본파와 싸우기로 한 것은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결정했을 겁니다.”
해정설은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종남파는 이제 겨우 본산을 되찾은 실정인데, 감히 본파와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려 하겠는가? 더구나 그들 앞에는 당장 초가보가 있는데 말일세.”
“어차피 본파와 종남파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초가보를 물리친다면 그 다음에는 자연적으로 본파와 자웅을 겨루려 하지 않겠습니까?”
해정설은 냉소를 날렸다.
“비록 저자의 검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몇 사람 되지 않은 문하 제자들로 초가보를 이길 수 있겠나? 강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닐세.”
뜻밖에도 곡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겁니다. 강호에는 종종 예상을 깨는 일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만일 저자가 철저한 계획 하에 이번 일을 행동에 옮긴 것이라면 우리로서는 의외의 낭패를 볼지도 모릅니다. 당장 지금까지 공을 대응표국과의 결맹은 이미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지 않습니까?”
해정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곡수의 의견에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곡수의 가치는 그의 탁월한 지략과 뛰어난 심기에 있었다. 그 가치를 화산파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했기 때문에 정통 화산파 출신이 아님에도 그가 집법의 지위에 오른 것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해정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곡수의 의견은 언제나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곡수의 말대로 진산월이 이미 화산파와 대응표국의 결맹을 알고 그것을 깨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라면 절대로 그를 고이 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이대로 대응표국과의 결맹이 허무한 종말을 맞이한다면 화산파로써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었다.
‘초가보도 아니고 종남파 따위에 신경을 쓰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군.’
해정설이 쓴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였다.
차창!
“악!”
갑자기 요란한 병장기 부딪치는 음향과 함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해정설은 깜짝 놀라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엄밀한 검진(劍陣)을 형성하며 진산월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상황은 이미 깨어졌다. 검진을 형성했던 일대제자들은 모두 술 취한 사람들처럼 휘청거리며 물러나고 있었고, 그들 중 한 명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해정설은 장내의 광경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황급히 남사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저 아이들이 오안검진(五雁劍陣)을 펼친 것이 아니었소?”
남사일은 평정한 모습 그대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오안검진은 완벽했소. 다만 저자의 검법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검진의 변화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을 뿐이오.”
해정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원래 화산파에는 여러 명이 펼칠 수 있는 검진이 몇 개 존재했다. 그중 가장 위력적인 것은 삼응검진(三鷹劍陣)이었고, 그외에도 오안검진과 칠앵검진(七鶯劍陣), 그리고 구작검진(九雀劍陣)이 있었다. 그 검진들은 하나같이 일인(一人)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하도록 만들어졌으며, 아무리 뛰어난 절정고수라 해도 일단 그 검진 안에 갇히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일대제자 다섯 사람이 펼치는 오안검진이라면 설사 해정설 본인이라 해도 깨뜨린다고 자신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불과 십여 초도 되지 않아 오안검진이 깨어지고 일대제자 한 사람이 쓰러져 버렸으니 해정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은 네 명의 일대제자들이 주춤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고정시키고 다시 진산월에게 덤벼들 듯하자 해정설은 황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그들의 실력으로 더 이상 덤벼 보았자 헛된 희생만 당할 것이 분명했다.
“됐다. 이만 물러나라.”
천개방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해정설을 돌아보았다.
“사부님…”
“너희들은 그자의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 어서 물러서라.”
천개방과 백수함 등 남은 네 명의 일대제자들이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해정설은 다시 남사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 형이 나서 주겠소?”
남사일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리다.”
남사일과 해정설은 비록 같은 화산파의 십대장로였지만, ‘무공’ 실력은 남사일이 해정설보다 뛰어났다. 해정설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선뜻 남사일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게다가 해정설에게는 다른 의도도 있었다. 남사일은 고고한 성품만큼이나 자존심이 남달라서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코 합공을 하거나 기습을 하지 않았다. 하나 해정설은 달랐다. 그는 상황에 따라서는 기꺼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문파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서슴없이 지옥으로 떨어질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해정설은 남사일마저 진산월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면 암습을 해서라도 진산월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종남파가 화산파와 적대관계가 된 것이 분명해진 이상 위태로운 싹은 애초에 잘라 버리는 것이 좋았다.
이런 해정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사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진산월의 앞으로 가서 우뚝 섰다. 진산월은 거듭된 격전을 겪었음에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땀을 흘리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숨결조차 가빠지지 않았다. 몇 군데 옷자락이 찢어지긴 했으나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어서 어찌 보면 지금 막 검을 뽑아 들고 장내에 뛰어든 사람 같기도 했다. 그가 지금까지 쓰러뜨린 사람들의 면면을 생각해 볼 때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남사일도 그 점을 알아차렸는지 감탄이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정말 보기 드문 솜씨로군. 이런 검객이라면 일부러 찾아라도 갈 텐데 이토록 쉽게 만나다니 노부는 무척 운(運)이 좋은 사람일세.”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남사일은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네가 펼친 것 중 천하삼십육검은 쉽게 알아보겠는데, 다른 하나의 검법은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더군. 언뜻 보아서는 유운검법 같기도 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검법인지 알 수 있겠나?”
싸우려는 상대에게 무공을 물어 보는 것은 확실히 강호의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다. 남사일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예의 이전에 무인(武人)으로서의 호기심이 더욱 강했다. 진산월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유운검법이오.”
남사일은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다소 의외인 듯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유운검법에 그런 변화가 있다면 지금까지 강호의 소문은 많이 잘못된 것이로군. 노부는 본파의 양의무극검법으로 자네의 유운검법을 상대하려 하네. 승낙해 주겠나?”
상대의 검법을 안 이상 자신이 펼칠 검법의 내력 또한 밝히는 것이 예의였다. 남사일은 확실히 예의를 아는 인물이었다.
“좋소.”
두 사람은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본 채 우뚝 섰다. 삼 장이라면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그들과 같은 절세검객들에게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내는 다시 아연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뜻밖에도 남사일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강호에서의 지위와 배분이 높은 인물이 선초(先招)를 양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사일은 그런 관행을 무시하고 자신이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이번 승부에 자신의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남사일의 각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남사일의 검은 한 줄기 유성(流星)과도 같이 움직였다. 원래 양의무극검법은 도가(道家)의 양의검법(兩儀劍法)에 강맹하기로 유명한 무극검법(無極劍法)의 절초들을 융합한 것으로, 백여 년 전 화산파 사상 최고의 고수였던 신검 조일화가 창안한 다섯 가지 검법 중 하나였다. 이 검법은 그 위력만큼이나 검로(劍路)가 복잡하고 익히기가 어려워서 지금까지 화산파에서 이 검법을 극성에 이르도록 연마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남사일도 삼십 년이 넘는 각고(刻苦) 끝에 몇 년 전에야 겨우 대성(大成)에 이를 수 있었다. 그만큼 이 검법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양의무극검법은 모두 십이 초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일초인 무극유전(無極流轉)부터 마지막 초식인 무극조화(無極造化)까지 열두 초식이 그야말로 숨돌릴 틈 없이 풍차처럼 연거푸 전개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검법에 일단 휘말리게 되면 도저히 피하거나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지금도 남사일의 검은 일단 움직이자 어느새 진산월의 턱밑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 검끝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다음 변초(變招)를 예상하기 힘들다는 것이 여타의 쾌검식(快劍式)들과 판이하게 다른 점이었다. 진산월은 피하는 대신 용영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오는 남사일의 검에 정면으로 마주쳐 갔다. 막 두 개의 검이 부딪치기 직전, 남사일의 검이 꿈틀거리며 목을 찔러 가던 방향을 바꾸어 어느새 진산월의 가슴팍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무극생화(無極生花)의 절초였다.
원래 이런 상황이라면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도괘를 펼쳐 상대의 검을 쳐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하나 진산월은 오히려 앞으로 한발 다가서며 유운검법 중의 배운축월을 펼쳤다. 남사일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양의무극검법과 유운검법간의 대결이었다. 비록 정식으로 선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두 사람이 암묵(暗默)적으로 정한 그들만의 규칙이었다. 따라서 유운검법이 아닌 다른 검법을 펼친다는 것은 이러한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배운축월은 유운검법 중에서도 가까운 거리에서 펼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초식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섰던 것이다. 남사일은 자신의 공세가 봉쇄되며 오히려 진산월의 검에 의해 왼쪽 가슴이 노출되자 황급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가 무극영일(無極迎日)과 무극토월(無極吐月)의 두 초식을 거푸 펼쳐냈다. 두 초식은 각각 흡(吸)과 배(排)에 있어 탁월한 위력이 있으며, 특히 지금처럼 연이어 펼치면 상대는 빨아들였다 내뿜는 검초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가슴이 꿰뚫리기 십상이었다.
진산월은 무극영일과 무극토월이 펼쳐지는 그 촌음(寸陰)의 사이에 유운경변 일식을 밀어 넣었다.
파파팟!
빗발치는 듯한 검광이 뿌려지며 남사일이 처음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검이 거두어졌다가 다시 뿌려지는 그 짧은 사이에 날아든 유운검법의 공세는 그로서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비록 단 한 걸음의 물러섬이었으나 남사일이 느끼는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다. 일단 펼쳐지면 일초부터 십이 초까지 구슬에 꿰인 듯 쉬임 없이 전개되는 양의무극검법의 흐름이 처음으로 중간에 끊겨진 것이다. 검초와 검초가 바뀌는 그 짧은 순간의 틈을 노리고 들어온다는 것은 수십 년간 검을 벗삼아 살아온 남사일로서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과연 대단하구나!”
남사일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물러섰던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진산월의 옆으로 돌아갔다. 흐름이 끊겨진 검초를 무리하게 계속 잇지 않고 공격 방향을 바꾸어 다시 기회를 노리는 것은 절세검객다운 노련한 솜씨였다. 남사일의 검은 독수리의 발톱처럼 매서운 기세로 진산월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끊겨졌던 무극토월의 변화가 다시 일어나며 뒤이어 양의무극검법 중에서도 가장 빠른 초식인 무극능운(無極凌雲)이 진산월의 옆구리에서 가슴 쪽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의 접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검을 사용하는 검객들끼리의 격전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오늘 두 사람은 처음의 몇 초 외에는 서로 손을 내밀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육박전이나 다름없는 이와 같은 근접검투(近接劍鬪)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어서 그 흉험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진산월의 허리가 버드나무처럼 뒤로 휘청 휘어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 순간 남사일이 펼쳤던 회심의 무극능운은 헛되이 허공을 가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진산월의 무서운 반격이 시작되었다.
파파파팍…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뭉게구름처럼 끊임없이 일어나는 검(劍)의 환영 (幻影)들 뿐이었다.
남사일은 필사적으로 양의무극검법의 절초들을 펼쳐 그 검의 구름에 대항했으나, 꾸역꾸역 솟아나는 그 구르므이 기세는 가공(可恐)스러운 것이었다.
드디어 유운검법 중에서도 가장 변화무쌍한 운무중첩이 펼쳐진 것이다.
남사일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무극천라(無極天羅)와 무극지망 (無極地網)의 양대 절초를 펼쳤으나, 그가 내뿜은 검초들은 끝없는 검의 구름 속으로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남사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래도 검의 구름은 계속 확장되었다.
남사일은 이대로 가다가는 참혹한 결과만이 있을 것임을 직감하고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그 검의 구름 속으로 뛰어들며 수중의 장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무극광풍(無極狂風)부터 무극조화까지의 마지막 다섯 초식이 쉴사이 없이 펼쳐지며 엄청난 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순간, 그토록 끊임없이 솟아오르던 검의 구름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나는 섬광 하나!
그것은 마치 구름을 가르는 뇌전(雷電)과도 같았다.
운무중첩에 이어지는 유운단악(流雲斷嶽)의 일식은 유운검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변화들 중의 하나였다.
뭉게뭉게 솟아오르던 검초들이 하나로 귀합하여 능히 산악조차 갈라 버리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남사일이 펼쳐낸 그 많은 검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그의 검의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이어 남사일의 가슴마저 갈라지려는 순간, 갑자기 진산월의 등뒤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는지라 진산월조차도 안색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진산월이 내뿜은 기세는 너무도 강력해서 이 기세를 중도에 거두어 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진산월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속력을 내서 앞으로 몸을 날렸다.
파앗!
그의 등뒤 옷자락이 길게 잘려지며 핏물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 함께 진산월의 용영검은 남사일의 왼쪽 어깨를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남사일은 신형을 휘청거렸으나 신음조차 내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원래 가슴이 갈라졌어야 마땅했으나, 진산월이 앞으로 돌진해 오는 바람에 검초의 방향이 바뀌어 어깨가 뚫린 것이다.
하나 남사일은 자신의 목숨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에 만족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항상 냉정을 잃지 않던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며 진산월의 등뒤를 향해 있었다.
“해정설, 당신이 이런 짓을 하다니…”
진산월의 등뒤에는 해정설이 약간은 당혹스럽고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는 질펀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해정설은 남사일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며 애써 웃어보였다.
“이해하시오, 남 형. 이자는 이대로 살려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자요.”
남사일은 어깨가 뚫린 고통도 잊은 듯 성난 외침을 토해냈다.
“아무리 그렇기로 등뒤에서 암습을 하다니… 당신은 본파의 장로로서 명예도 없고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못한단 말이오?”
해정설은 침착함을 되찾은 듯 다소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 명예는 내가 만드는 것이니 남 형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본파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나요.”
“그… 그런…”
해정설은 피 묻은 장검으로 진산월을 가리켰다.
“내가 지금 당장 욕을 먹고 수치를 당하는 게 저자가 나중에 본파의 제자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낫소. 그러니 남 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남사일은 몇 차례 표정이 변한 채 해정설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아…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평생 쌓아온 명성을 무너뜨렸으니… 해 형, 당신의 생각은 너무도 잘못된 것이오.”
“남 형이 신경 쓸 일이 아니오.”
남사일의 얼굴에는 씁쓸한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게 아니오. 해 형은 스스로 멍에를 지고 일을 저질렀으나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고 명예만 사라졌을 뿐이오.”
해정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까지 미동도 않고 있던 진산월의 몸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남사일의 어깨를 꿰뚫은 장검을 회수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정도의 공격으로는 나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말이지.”
네, 아래와 같이 수정해드렸습니다.
해정설은 조금 전의 자신의 공격이 진산월의 등뼈를 갈랐음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가 그가 몸을 움직이자 대경실색했다. 진산월의 얼굴 표정은 처음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눈에서 흘러 나오는 안광 또한 여전히 차고 맑았다. 그것을 보자 해정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그 상황에서는 내 매화검기(梅花劍氣)를 막을 수 없었을 덴테…”
“매화검기는 물론 사람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들지. 하지만 본파의 태을신공을 극성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피육(皮肉)의 상처만으로 막아낼 수 있소.”
해정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태… 태을신공이 극성에 이르렀다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해정설이 쉽게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무공이든 극성에 이른다는 것은 오랜 동안의 수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신공(神功)이나 강기(?氣) 같은 내공(內功)의 종류들은 더욱 많은 세월의 흐름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이제 약관을 갓 넘은 진산월이 신공을 완성했다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 조금 전에 태을신공이 아니었으면 해정설의 예측대로 진산월은 등뼈가 갈라져 숨이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진산월은 몸을 최대한 앞으로 이동시켜 해정설의 매화검기에서 최대한 거리를 떼어놓는 것과 동시에 태을신공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던 것이다. 그 결과 비록 피부가 갈라져 적지 않은 피를 흘렸으나 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고 해정설의 암습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진산월의 순간적인 임기응변과 몸을 보호하는 데 강점이 있는 태을신공의 효능이 만들어 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해정설은 화산파의 장로라는 명예조차 내던지고 심혈을 기울인 암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그로서는 성공을 의심치 않았던 암습의 실패를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진산월은 해정설에게는 손을 쓰지 않았다. 지금의 해정설은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았다. 그에게는 싸울 투지(鬪志)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런 자에게 검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그를 일별한 후 몸을 돌려 단리정천에게로 걸어갔다. 이제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내에 자신의 발로 서 있는 사람은 세 명의 입회인을 포함해도 불과 칠팔 명에 불과했고, 절반 이상이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어 버렸다. 불과 얼마 전에 결맹식을 열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침내 진산월은 단리정천의 앞에 우뚝 섰다. 단리정천은 안색이 핼쑥하게 변한 채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시선을 피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응계성은 어디 있소?”
단리정천은 몇 차례나 표정이 변했다. 똑같은 질문을 불과 일각(一刻) 전에 들었으나, 그때와 지금은 모든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그때 이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짙은 후회가 그의 얼굴 한구석에 떠올라 있었다. 하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단리정천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쌓아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소… 내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소… 그런데도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단 말이오?”
그의 음성 속에는 필설로 형용 못할 자책(自責)과 회의(懷疑), 그리고 짙은 허무가 깃들어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단리정천은 모든 걸 잃어버렸다. 열두 명의 일급표두들 중 절반이 죽었고, 세 명의 총표두도 이제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살아 남은 방수립도 전신이 파편으로 벌집처럼 변해 있어 앞으로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하면 다행이었다.
단리정천 또한 부상이 적지 않고 패배의 후유증이 심각해 설사 회복한다 해도 예전의 기세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강호에서 한번 꺾인 사람이 되살아나기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인생(人生)의 최정점에 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비록 화산파와의 결맹이 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문파로써의 존재가치를 상실한 대응표국을 화산파가 언제까지 결맹 상대로 인정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보아도 단리정천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좌절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단리정천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는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소.”
단리정천은 무슨 말이야는 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는 아직도 여섯 명의 일급표두와 오백여 명의 표사들, 그리고 다섯 개의 지국이 있소. 그리고 지난 백여 년 동안 사대(四代)에 걸쳐 쌓아온 신용(信用)과 인맥(人脈)이 남아 있소.”
“…!”
“무엇보다도 당신에게는 누구도 부러워할 뛰어난 손자가 있지 않소? 당신의 앞으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대응표국은 그러한 자산을 기반으로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소.”
단리정천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진산월을 살인이라도 할 듯 쏘아보았다.
“저…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소. 그리고 나는 당신이 다시 재기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소. 복수(復讐)를 하고 싶다면 그때 가서 하면 되는 거요.”
단리정천은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의 눈은 유난히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묻겠소. 내 사제는 어디에 있소?”
망부석(望夫石)처럼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던 단리정천이 문득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쪽에 서 있는 곡수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하시오.”
“진 장문인의 사제를 왜 우리가 가두었는지는 묻지 말아 주시오.”
진산월은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단리정천의 얼굴에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소. 그것이 나로서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소. 진 장문인의 사제는 객청에 있소.”
뜻밖의 말에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오늘 오전에 내가 갔던 곳 말이오?”
“그렇소.”
이제 보니 단리정천은 진산월이 대응표국을 나가자 응계성을 지금까지 가두었던 곳에서 객청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진산월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객청은 손님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필시 손님들 중 누군가에게 응계성을 넘겨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응계성이 아직까지 객청에 있다는 것은 그 손님이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 손님은 과연 누구일까?
진산월은 단리정천이 응계성의 행방을 밝히기 전에 곡수를 힐끔 쳐다보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때 단리정천은 무심결에 한 행동 같았으나, 이제 진산월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단리정천은 그렇게 함으로써 진산월에게 응계성을 넘겨받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의 말대로 마지막 남은 그의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이제 진산월은 대응표국에서 왜 응계성을 감금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냈다. 하나 곡수가 왜 응계성을 필요로 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곡수는 과연 화산파의 지시를 받고 그러한 일을 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내막(內幕)이 숨어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진산월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실종되었던 응계성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곡수의 속셈이 어쨌든 응계성이 그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이상 진실은 언제고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산월은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은원(恩怨)을 종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단 이틀 만에 강호의 거대세력 네 군데와 크고 작은 격돌을 벌였으며, 수많은 고수들을 쓰러뜨려 천하를 경동케 했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무림에 희대의 검신이 등장했음을 절감했고, 그때부터 삼절무적 대신 신검무적(神劍無敵)이라는 이름이 강호를 뒤흔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