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10화
제132장. 회자정리(會者定離)
쿵쿵!
노해광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쿵쿵!
마침내 노해광은 참지 못하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미친놈이 야밤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거야?”
그는 아랫사람을 시켜 그 무뢰한 놈을 혼내 주라고 시키려다 밤이 너무 깊어 아무도 깨어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
노해광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떤 놈인지 보기만 하면 손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그는 잠옷 위에 대충 겉옷을 걸치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을 몸에 쐬자 잠이 달아나며 정신이 들었다. 하나 그럴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궐 같은 집에서 수십 명의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자신이 왜 잠을 자다 말고 대문을 열러 일어나야 하는가 말이다. 얼추 시산을 보니 삼경(三更)도 지나서 새벽이 멀지 않았다.
“누구냐?”
노해광은 노성을 지르며 대문을 활짝 열었다. 한 사람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를 보자 노해광은 차마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술이 잔뜩 취해 자기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연신 비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해광도 술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사람인데 어찌 술 취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수 있겠는가? 취한(醉漢)은 노해광을 보더니 히죽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같이 마시고 싶어서 왔지. 아직 술이 조금 남았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혀가 꼬부라져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노해광은 쉽사리 알아들었다. 그는 묵묵히 취한을 보고 있더니 몸을 돌렸다.
“들어오게.”
취한은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용케도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다시 비틀거렸다. 노해광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부축했다. 취한이 그를 보고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때는 내가 자네를 부축했던 것 같은데…”
노해광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문식 때였을 거야.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셨다가 대취(大醉)하고 말았지. 그때 자네가 나를 부축해서 방에 데려다 주었지 않나?”
“그렇지? 그럼 이제 그 신세는 갚은 것으로 하자구.”
취한이 입을 열 때마다 술기운과 구취가 뒤섞여 악취가 풍겨 나왔다. 하나 노해광은 인상 한번 찡그러지 않고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왔다. 의자 위에 몸을 가눈 취한은 다시 빙긋 웃었다.
“잔은 필요 없어. 그냥 마시라구.”
그는 들고 있던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서 꿀꺽꿀꺽 마시더니 노해광에게 내밀었다.
“자네도 한잔해.”
노해광은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술병을 들어 취한과 똑 같은 모습으로 마셨다. 한동안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술병을 들이켰다. 술병은 곧 바닥이 났다. 노해광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몇 개의 술병을 가져왔다.
그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취한은 탁자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 있었다. 잠이 들었나 하고 살펴보았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노해광은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은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런 자세로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취한은 엎드린 자세로, 노해광은 앉은 자세로.
멀리 먼동이 터 오기 시작할 때 취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가 익힌 검법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게 궁금했네. 종남파의 무공치고는 너무 살벌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비슷한 점이 있더군.”
“사부가 가르쳐 준 검법은 물론 아니야. 나는 패배자의 검법은 익히지 않아.”
“자네 사부가 패배자인가?”
취한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독백(獨白) 같은 중얼거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부를 따라 소림사로 갔었지. 그곳에서 사부가 싸우는 걸 보았어. 하늘처럼 믿었던 사부가 불과 오십 초 만에 쓰러지는 광경을 보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나는 패배자의 검법 따위는 익히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그건 너무 비참해. 그토록 강했던 사부였는데…”
노해광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부는 울지 않았어. 다만 피눈물을 흘릴 뿐이었지. 장성(長城)에 간 후 사부는 사람이 달라졌어. 하루 종일 미친 듯이 검법만 연구했고, 나를 닦달했어. 어디엔가 뛰어난 검색이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달려가서 싸움을 걸었지. 그러다 천랑곡(天狼谷)에 괴인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거야.”
“…!”
“사부는 아마도 자신이 그런 최후를 맞이하리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을 거야. 밤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는 귀신을 만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결국 사부는 천랑곡의 주인인 천랑존자(天狼尊子)에게 쓰러졌어. 다음 날, 나는 천랑존자의 제자가 되었지.”
“…!”
“오 년 후에 나는 천랑존자의 검법을 모두 배웠고, 그에게 도전해서 그를 쓰러뜨렸어. 사부의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어. 단지 그가 그 일대에서 가장 강한 고수였기에 도전했을 뿐이야. 나도 어느새 사부처럼 검귀(劍鬼)가 되어 있었던 거지.”
취한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어 노해광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노해광은 왠지 그의 웃음이 울음보다 슬프게 느껴졌다.
취한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나는 백동일이야. 장성에서 죽음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절명검이라고. 내 검법의 비밀을 안 소감이 어떤가?”
노해광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 눈어 어때서? 비밀 하나는 풀었으니 속이 시원하군. 그래서 이렇게 술을 마시고 내게 온 건가? 비밀을 고백하기 위해서?”
백동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자네와 술 한잔 하고 싶었어. 비밀은 덤이야.”
“술은 얼마 전에도 마셨지 않나?”
“그때는 원하는 만큼 취하지 않았거든.”
“지금은 원하는 만큼 취한 것 같군.”
백동일은 다시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흥겨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래, 정말 원 없이 마셨지. 내 평생 이렇게 많이 마셔 본 건 처음이야. 그래서 이제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네.”
노해광이 몸을 움찔했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나는 내일 종남파로 갈 거야.”
“왜?’
“일전에 말했잖아. 종남의 무공으로 나를 죽일 만한 놈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자네가 궁금해하는 비밀 하나를 풀어 주었으니 나도 내가 궁금해하는 비밀 하나를 풀어야지.”
노해광은 안색이 변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 돼!”
백동일은 그의 고함 소리에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며 웃었다.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어. 무슨 소리를 그렇게 질러대나?”
노해광은 무거운 얼굴로 백동일을 주시했다.
“가면 안 돼. 자네는 그 소문도 못 들었나?”
“무슨 소문?”
“종남파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 한번 검을 휘두르면 천지(天地)가 번복(飜覆)하고 풍운(風雲)이 변색(變色)하는 희대의 검귀(劍鬼)가 나타났다는 소문 말일세.”
백동일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물론 들었지. 그래서 찾아가려는 거야.”
“가면… 자네는 죽네.”
백동일은 유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전에 누군가도 자네와 비슷한 말을 하더군. 하지만 걱정 말게. 그자가 검귀라면 나도 검귀야. 나는 시시한 종남의 무공에 죽을 정도로 약해빠진 사람이 아니라구.”
노해광은 복잡한 빛이 담긴 눈으로 백동일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일부러 종남파로 찾아갈 건 없지 않나?”
“내일밖에 시간이 없거든.”
“뭐라고?”
“초가보에서 모레 종남파를 공격할 거야. 그러니 내가 그 검귀의 무공을 견식하려면 내일밖에 남지 않았단 말이지.”
백동일의 말에 노해광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모레 초가보가 종남파를 공격한다고?”
“그래, 세세한 작전 계획이 이미 짜여져서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지시가 내려가더군. 이번에는 종남파에 더 이상의 운이 없을 거야. 아무리 검귀가 날뛰어도 말이지.”
노해광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초가보의 전력이… 그 정도인가?”
“나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그런데 얼마 전에 후원에 갔다가 나보다 강한 놈을 몇 놈이나 만났지.”
노해광은 황급히 물었다.
“그들이 누군가?”
백동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아주 백발이 성성해서 금방이라도 무덤 속으로 들어갈 듯한 늙은이들인데, 정체를 모르겠어. 그들에 비하면 세 명의 공봉들도 어린이에 불과하단 말이야.”
“어떻게 생긴 늙은이들인가? 인원은?”
“모두 네 명인데, 더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전형적인 늙은이들이라서 특별히 눈에 두드러지는 점은 없었네. 다만 어딘지 모르게 불가(佛家) 쪽의 냄새가 난단 말이야.”
“불가라고?”
“확실치는 않네. 그들에게 접근해서 까불다가 그중 한 늙은이가 가볍게 휘두른 일장(一掌)을 맞고 바로 기절했으니까.”
백동일의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노해광은 그의 말을 선뜻 믿기 어려웠다. 백동일 같은 고수를 단 일장만으로 기절시킬 수 있는 고수는 아무리 강호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 해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초가보 후원에 그런 고수가 적어도 네 명이나 있다니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늙은들 말고도 제법 실력 있는 인물들도 여럿 있지. 개중에는 나로서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자들도 적지 않단 말이야. 그런 고수들이 총출동하는데 종남파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겠나? 아마도 이번에는 주춧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어져 버릴걸세.”
노해광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동일 또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 후에 노해광이 물었다.
“그런데 왜 내일 종남파를 찾아가려는 건가?”
백동일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보며 웃었다.
“말했잖아. 그 다음 날이면 종남파가 없어질 테니 그 전에 미리 내 의문을 해소하려는 것이라고.”
노해광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백동일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깟 의문을 해소하는 게 자네 목숨보다 귀한가? 하루만 더 참고 있으면 그런 의문을 느낄 필요가 없이 종남파가 사라져 버릴 텐데 왜 굳이 그 전에 종남파로 가서 목숨을 버리려고 하느냔 말일세.”
백동일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으나 아내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속단하지는 말라구. 내가 간다고 해도 그자에게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말일세.”
“아니, 자네는 결코 그자의 적수가 못되네.”
노해광의 음성은 단호했다.
“나는 이미 그자가 서안 일대를 휘젓고 다닐 때의 모든 상황을 입수했네.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그자는 종남파에는 축복(祝福)이지만 초가보나 화산파에게는 재앙(災殃)이라고 말일세. 종남파의 무공으로 어떻게 그런 고수가 탄생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자는 진짜 고수일세. 정말 무서운 검객이란 말이야.”
백동일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보였다.
“내가 그렇게 보잘 것 없나?”
“자네가 약한 게 아닐세. 그자가 강한 거야. 그렇게 터무니없이 강한 자와 싸우려고 하다니 자네는 제정신이 아닐세.”
“내 정신은 어느 때보다 분명해. 나는 내일 종남파로 갈 거야. 가서 과연 그자의 무공이 나를 죽일 수 있는지를 직접 확인해 볼 테야.”
백동일의 음성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을 보는 순간 노해광은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필사(必死)의 각오(覺悟)를 가진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노해광은 자신도 모르는 마음속의 격동 때문에 더 이상 백동일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가슴속을 휘젓는 이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그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노해광을 바라보는 백동일의 시선이 그답지 않게 부드러워졌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노해광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말해 보게.”
“들어주겠나?”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백동일은 다시 웃었다.
“어렵지는 않은 일이야.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토라져 있지 말고 나를 쳐다보게. 나는 이야기할 때 정면으로 내 얼굴을 보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네.”
노해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나 백동일과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백동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십여 리쯤 가면 자오곡(子午谷)이 나오네.”
“알고 있네. 용건만 말하게.”
“그 자오곡 안에 들어가면 하나의 작은 사찰이 나오네. 그 사찰의 후원 쪽에 한 사람이 있네. 그를 보살펴 주게.”
“그가 누구인가?”
“혹시 정동(丁動)이란 사람을 기억하나?”
“정동?”
노해광은 잠시 그 이름을 몇 번 뇌까리다가 눈을 번쩍 빛냈다.
“종남파에서 주방 일을 보다가 주루를 개업한 그 정씨 할아범 말인가?”
“그래, 자네나 나나 예전에 그 할아범에게 신세를 적지 않게 졌었지. 늦은 밤에 술안주를 마련하라고 성화를 부려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술상을 봐준 적도 많지 않았나?”
“정 할아범이라면 물론 기억하고 있네. 하지만 정 할아범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을 텐데.”
“물론 정 할아범은 몇 년 전에 불귀(不歸)의 몸이 되었네. 하지만 그 아들은 아직 살아 있지.”
노해광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생각에 골몰할 때 나타나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정 할아범의 아들이라면… 아마도 이름이 정산인가 할 텐데, 나이가 우리보다 몇 살 많았지?”
“잘 기억하고 있군. 자오곡 사찰에 있는 자가 바로 정산일세.”
노해광은 흠칫 놀랐다.
“용케도 그를 찾아냈군.”
“최근에 악종기의 지시를 받고 사람 하나를 잡으러 갔는데 알고 보니 정산이었네. 그래서 일단 초가보에 그를 넘겼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에 그를 몰래 그곳으로 빼돌려 놓았네.”
“잘했군. 그런데 나보고 그를 돌보라고?”
“그래. 보아하니 정산은 종남파를 도와주고 있는 모양인던데 지금 그를 종남파로 보내 봤자 이틀 후에 죽으란 소리밖에 되지 않네. 종남파가 어찌되었건 그만이라도 살아남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지.”
백동일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래야 나중에 지하에서 정 할아범을 만나도 떳떳할 게 아닌가?”
“그렇게 하지. 하지만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입에 다라고 다니지 말게. 보기 흉하니까.”
“하하… 내가 일부러 자살이라도 할 사람으로 보이나? 걱정말게. 나는 안 죽어. 내 손에 죽은 놈은 많아도 내가 남의 손에 죽은 적은 없어. 왜냐고? 내가 바로 절명검이니까.”
백동일은 큰소리를 쳤으나 그럴수록 노해광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백동일은 계속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노해광을 잠시 바라보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나를 보지 않을 셈인가?”
노해광은 천천히 백동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백동일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도 마셨고, 할 일도 끝났으니 이제 가야겠군.”
그는 휑하니 몸을 돌리더니 등뒤로 손을 내저었다.
“나올 필요 없네. 잘 있게.”
노해광은 멀어져 가는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허공의 한 점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이 닫히고 백동일의 모습이 사라져도 그는 여전히 그런 자세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날이 훤히 밝고 주위가 사람들로 웅성거리는 소리로 뒤덮일 때까지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잘 가게… 친구…”
“보고가 들어왔소.”
이동정의 말에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동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마른침을 삼킨 후 비로소 입을 열었다.
“망경루가 흑갈방의 공격을 받아 폐허로 변해 버렸다고 하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고, 반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꼭 쥐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 웃음을 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겨우 꼬리를 잡은 것이다. 그 과정에 천봉팔선장은 육선자(六仙子)가 되고 말았다. 두 번째 희생자인 유화화의 처참한 죽음이 아직도 중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장내의 분위기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금교교가 입을 열었다.
“당신 짐작대로군요. 살인멸구를 하되 남의 칼을 빌었으니 과연 교활하고 잔인한 수법이에요.”
누산산이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흑갈방이 이존휘의 지시를 받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 확실한 가요? 이존휘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로 그런 짓을 했을 수도 있잖아요.”
이동정은 자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존휘의 사주가 분명하오. 흑갈방은 동관 일대에서 활동하는 자들이오. 상부의 강력한 지시가 없었다면 그들이 감히 화산파와 초가보가 건재한 서안에서 일을 저지를 리 없소. 게다가 흑갈방의 수뇌부를 조사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소.”
“그게 무언가요?”
“우선 그들의 방주는 흑의사신(黑衣死神)이란 자인데, 지금까지 강호에는 전혀 행적이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오. 게다가 부방주인 화면신사(花面神邪)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요. 그들뿐 아니라 수뇌부의 대다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인들이요.”
“…!”
“그리고 이틀 전에 그들의 본거지인 동관 일대에서 연락용 전서구(傳書鳩)를 보았다는 보고가 있었소. 그 이후 그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부산해지더니 결국 이번 일이 일어나고 말았소.”
금교교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전이라면 우리가 이존휘에게 망경루에 대한 이야기를 한 날이로군요.”
“그렇소. 시기상으로 보나 정황으로 보나 이번 일은 이존휘가 사주한 것이며, 따라서 그가 취미사 혈겁과 관련이 있음이 비로소 증명된 거요.”
“하지만 그가 직접 넷째를 유혹하고 취미사에서 혈겁을 저지른 장본인이란 증거는 아직 없어요.”
“물론이오. 하나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이존휘를 압박하면 조만간에 그가 본색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하오. 일단 꼬리를 발견하는게 어렵지, 꼬리가 드러난 이상 몸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금교교는 생각에 잠겨 있고, 그녀의 옆에 있던 정소소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심증(心證)은 굳혔지만 실질적으로 이존휘를 압박할 만한 증거는 되지 못해요.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의 흉수이고 천목지약을 깨뜨린 장본인이라면 그의 정체는 과연 뭘까요? 그리고 그는 왜 취미사에서 혈겁을 일으켰을까요?”
정소소의 의문은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이동정은 신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나는 이존휘의 정체는 아무래도 신목령의 수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다면 조화심과 공손도를 조종할 수 없었을 것이오.”
정소소는 그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신목령의 고수라면 왜 위중설이 죽도록 내버려둔 거죠?”
“아마도 신목령 내부에 천목지약을 못마땅해하는 세력이 존재할지도 모르오. 그렇게 본다면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을 일으킨 이유도 자연스레 설명이 되오.”
“말해 보세요.”
“천봉궁에서 영롱비를 훔쳐 취미사의 혈겁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중원무림의 이목을 이곳에 집중시켰을 뿐 아니라 자연스레 천봉궁을 이번 사건에 개입시켰소. 그리고 신목령의 사자인 조화심에게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 다음 우리로 하여금 위중설을 살해케하여 천목지약을 깨 버린 거요. 결국 그가 취미사 혈겁을 저지른 근본 이유는 천봉궁을 격발시켜 천목지약을 깨뜨리는 것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정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듯한 추론(推論)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흡하군요. 천목지약을 깨뜨리는 데 굳이 그런 복잡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의 추론은 이존휘가 신목령의 수하라는 가정(假定)에서 출발하는데, 만약 그 가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쩌죠?”
이동정은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정 소저의 말씀이 옳소. 이존휘가 신목령의 수하일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신목령의 수하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의 정체가 무엇이겠소? 천하에서 천봉궁과 신목령 말고 그토록 치밀하고 거대한 일을 꾸밀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갑자기 이동정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번뇌(煩惱)에 싸였던 노승(老僧)이 해탈(解脫)을 앞에 둔 희열에 찬 표정 같기도 하고, 무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사람의 경악에 찬 표정 같기도 했다.
정소소는 이동정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동정은 표정이 여러 차례 변한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생각에 골몰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동정이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거의 일각(一刻)이나 지난 후였다. 그동안 누산산만이 지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기지개를 몇 번 켰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은 채 묵묵히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정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주위를 보며 포권을 했다.
“여러분들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오. 나같이 별볼일이 없는 사람이 천하에 명성 높은 분들을 무작정 기다리게 했으니 이 죄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누산산이 재빠르게 입을 조잘거렸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어서 토해내도록 해요. 이존휘의 정체에 대해 뭔가 생각난 게 있죠?”
“그렇소. 이존휘가 만약 신목령의 수하가 아니라면 그가 있을 조직은 오직 한 군데 뿐이오.”
누산산은 급히 물었다.
“그게 어딘가요?”
“그것은 바로…”
이동정이 말하려 할 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체구가 건장하고 얼굴이 대추처럼 붉은 검은 수염의 장한이었다. 그 장한은 천봉궁의 팔대신장 중의 한 사람으로, 규염객(?髥客) 장평(張平)이라 했다.
정소소는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던 장평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장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장평은 한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혈수존자 오욕백의 종적을 알아냈다.”
그 말에 정소소와 금교교 등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특히 누산산은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다섯 째 언니를 해친 그 나쁜 놈이 있는 곳을 알았다고요? 그놈이 어디 있어요?”
평상시였다면 그녀의 경망된 행동을 꾸짖었을 것이나 지금은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들 재촉하는 눈으로 장평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장평은 입을 열었다.
“종남파 부근에서 그자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는 종남파로 간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