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11화 (1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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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11화


제133장. 동중기사(洞中奇事)

너무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면 사람은 막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지금 방취아가 그러했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고 애타게 찾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돌아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죽은 줄로만 알고 몇 번이나 그를 생각하며 눈물지었던 낙일방이 의젓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소식 한 장 없어 종남파를 영원히 등진 것이 아닌가 불안하게 만들었던 정해도 함께 왔다. 방취아는 어린 사질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일방과 정해를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좀처럼 평정을 잃지 않던 소지산의 눈자위도 붉어졌고, 동중산은 외눈을 쉴사이없이 깜박거렸다.

“살아 있었구나. 정말 잘 왔다.”
소지산은 낙일방의 등을 몇 번이고 두드렸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좋은 동중산은 낙일방 앞에서 몇 번이고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침내 낙일방이 먼저 웃으면서 와락 동중산을 끌어안았다.

“당신도 무사했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동중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낙일방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가장 뜻밖의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응계성이었다. 수술 후에 며칠 만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응계성은 낙일방을 보더니 주먹부터 휘둘렀다.

“이 망할 자식,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소식 한 장 없다 이제 나타나!”
낙일방은 피하지 않고 그의 주먹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박박 깎인 머리와 불편한 다리를 계속 쳐다보았다. 응계성은 한참이나 주먹을 휘두른 다음에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멈추었다. 맞은 낙일방은 멀쩡한데 때린 응계성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응 사형, 앞으로 매일매일 때려도 맞을게요. 그러니 오늘은 이만 하세요.”
낙일방이 땀으로 범벅이 된 응계성을 안쓰러운 듯 보며 말하자 응계성은 낙일방도 이제 컸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낙일방은 그동안 키도 조금 커졌고, 덩치도 몰라보게 듬직해졌다. 무엇보다 그동안 잘 생기기만 했지 어딘지 모르게 가볍고 경솔해 보였던 태도들이 확연하게 달라 보일 정도로 진중해졌다. 이목구비는 예전과 그대로이건만 사람 자체가 한층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응 사형…”
정해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하나 응계성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좋군. 가서 부족한 잠이나 좀더 자야겠다.”
응계성은 다리를 절룩이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해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지산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계성은 성격이 불같아서 너를 예전처럼 대하려면 시일이 조금 걸릴 것이다. 그보다 결혼을 했으면 편지라도 보낼 것이지 소식 한 장 없다니 서운하구나.”
정해는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알리려고 했지만 처가 마침 유산(流産)을 하는 바람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너와 네 장인의 심려가 컸겠구나. 제수시의 건강은 어떻느냐?”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올 한 해만 몸을 잘 추스리면 내년쯤에는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내년에는 반드시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해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장문사형은 어디에 계십니까?”
“치료를 받고 계시다.”
정해는 흠칫 놀랐다.

“치료라니요? 장문사형이 다치셨습니까?”
“며칠 전에 왼손에 가벼운 상처를 입으셨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완쾌 중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마침 오늘이 붕대를 푸는 날이라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 같구나.”
아까부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진산월을 찾고 있던 낙일방이 그 말을 들었는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그렇군요. 난 또 장문사형이 그때처럼 말도 없이 어디로 가버린 줄 알고 조마조마했어요.”
그때 누군가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 음성을 듣자 정해와 낙일방은 반색을 하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문사형!”
그들은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진산월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변해 버린 모습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낙일방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자… 장문사형… 정말 장문사형이십니까?”
“그새 나를 잊었느냐?”
낙일방은 몇 번이나 그를 보더니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물로 웃었다.

“잊을 리가 있습니까? 너무나 모습이 변해 못 알아볼 뻔했지만, 그래도 단 한시도 장문사형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몸이 아픈 건 아니시죠?”
“나는 괜찮다. 너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예. 이제는 남에게 맞고 다닐 걱정 안 할 정도는 됩니다.”

“실력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구나. 눈빛에 전에 없던 힘이 느껴진다.”

낙일방은 재빨리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예전처럼 활짝 웃었다.

“사연을 말하자면 깁니다. 잠시 후에 소상히 말씀드릴게요.”

“그러자꾸나.”

이어 진산월의 시선은 정해에게로 향했다.

“장문사형,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정해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한쪽에서 불안과 초조가 뒤섞인 얼굴로 연신 이쪽을 보고 있던 젊은 미부가 재빨리 다가와 정해의 옆에 나란히 엎드렸다.

“이이를 용서해 주세요. 이이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진산월은 그 미부가 상원건의 딸인 상소홍임을 알아보았다. 예전의 청순하고 산뜻했던 미소녀는 어느새 나이를 먹어 남의 아낙이 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의 잘못은 아주 크다. 말 몇 마디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진산월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키던 두 남녀는 진산월의 말에 흠칫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진산월은 그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결혼을 하고도 알리지 않은 죄는 둘째치고라도 이렇게 예쁜 아내를 얻고도 사형인 내게 소개시켜 주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느냐?”

그제서야 그들은 진산월이 자신들에게 화를 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상소홍이 정해와 나란히 진산월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했다.

“인사 받으십시오. 장문인의 사제인 정해와 그의 안사람인 상소홍입니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두 사람의 절을 받았다. 그들이 몸을 일으킨 다음에야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쉬운 대로 이것으로 소개를 받은 것으로 하겠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조심하도록 해라.”

정해는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사형.”

진산월은 고개를 돌려 어느새 다가온 상원건을 바라보았다. 상원건은 감회가 가득한 눈으로 정해와 상소홍을 보고 있다가 급히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소. 진 장문인이 한 자루 검으로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진산월도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별말씀을,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상원건은 부드럽게 웃으며 정해와 상소홍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죽다 살아난 기분이오. 진 장문인이 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해서 오히려 허탈할 지경이었소.”

그 말만 들어도 상원건이 그들에게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상원건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삼년이라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었다. 그동안에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몸에 병(病)이라도 있지 않은 다음에야 그 체격 좋고 살집이 넉넉하던 사람이 이토록 앙상하게 마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강호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의 무공은 외형보다 더욱 달라져 있음이 분명했다. 상원건은 진산월이 무언가를 얻고 또 다른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으나, 정확히 어느 것을 얻고 어느 것을 잃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그에게 이로운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상원건 다음으로 진산월에게 다가온 사람은 석가장의 여덟 번째 공자인 석지명이었다.

“진 장문인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동안 다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진산월은 이제는 제법 노련한 장사꾼의 분위기가 나는 석지명을 바라보다가 그의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고생은요. 서안은 처음 방문하는데다 이번에 오는 도중에 눈요깃거리가 많아서 전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진산월은 석지명의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뒤에 계신 분들은…”

석지명은 그들을 소개했다.

“이 두 사람은 저의 시종들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저의 개인 보표(保?)입니다.”

황삼중년인이 진산월을 응시하다 고개를 숙였다.

“종리성(鍾里星)이라 하오.”

“종남의 진산월이오. 잘 오셨소.”

진산월은 한 눈에 그가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임을 알아보았으나,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헤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자기가 말한 대로 살아만 있으면 결국은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만남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날 저녁, 낙일방은 혼자 진산월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자기가 육 개월 전의 그날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종남으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으아악!”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낙일방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미 상대의 장력을 거푸 격중 당해 갈비뼈가 서너 대 부러지고 심맥(心脈)이 크게 흔들린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는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낙일방은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수많은 아쉬움과 후회들이 물밀듯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무공 연마를 소홀히 했었는지…. 절벽에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낙일방은 평생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생각과 추억에 젖어 있었다. 자신의 몸이 점점 더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의식할 즈음, 그는 점차로 정신의 끈을 놓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몸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죽을 때가 되면 악한 사람도 착해진다더니 이제는 이상한 망상(妄想)에도 빠지는군.’

그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이 동굴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죽어서 저승의 비닥에 왔나 하는 생각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하나 동굴의 축축한 느낌이 누워 있는 등을 통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지자 눈을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머리 위에 보이는 것도 분명한 동굴의 천장이었다. 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어째서 동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인가?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신을 차렸으면 냉큼 일어날 일이지 무얼 그리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낙일방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욱!’

장력을 맞은 곳이 욱신거렸으나, 정신은 오히려 맑아졌다.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낙일방은 이 말을 되뇌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안색이 변한 채 짤막한 경호성을 내질렀다.

“흡!”

그가 본 것은 한 쌍의 푸르스름한 인광(燐光)이었다. 그 두 개의 인광이 사람의 눈동자임을 알아본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동굴의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며, 머리를 산발하고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친 괴인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뒤의 일이었다.

“누구요?”

낙일방이 소리치자 괴인의 안광이 더욱 짙어졌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놈을 살려 줬더니 적반하장이군. 네놈이야 말로 누구냐?”

그의 음성은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듯 갈라터지고 쉬어 있어 듣기에 거북했다. 낙일방은 괴인이 자신을 살려 주었으리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듣자 주저하지 않고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종남의 제자인 낙일방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바람이 불며 괴인이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어 낙일방이 피하고 자시고 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종남의 제자라고? 그게 정말이냐?”

낙일방은 괴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으나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이 손을 놓고 이야기를…”

괴인의 안광이 번뜩이는 순간 그는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있었다. 낙일방은 괴인의 반응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목을 문지르면서 괴인을 주시했다. 괴인은 한동안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잠시 후에 다시 낙일방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네놈의 사부가 누구냐?”

낙일방은 괴인의 몸에서 나오는 악취 때문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자신을 살려 준 생명의 은인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할 수가 없어 아쉬운 대로 슬쩍 코를 매만졌다.

“선사님 함자는 임장홍이라 합니다.”

“장홍의 제자라구? 그런데 선사라니… 장홍이 이미 죽었단 말이냐?”

낙일방은 괴인이 임장홍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고 은근히 화가 났으나 그보다는 그가 어떻게 임장홍을 알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선사께선 이미 사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선사와는 어떤 사이가…”

괴인은 그의 질문은 듣지도 못한 듯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장홍이 죽었다고… 그 착하고 순하기만 한 아이가 모진 고생만 하다 나보다 먼저 떠났구나…”

낙일방은 임장홍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괴인의 넋두리에 몸을 움찔했다. 그때 괴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당대의 장문인은 누구냐? 노가놈이냐?”

“노가라니요?”

“노해광 말이다.”

낙일방의 뇌리에 삼년여 전 진산월의 장문인 취임식 때 보았던 그 심술궂은 짝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낙일방은 화가 나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자는 본파의 제자가 아닙니다. 당대의 장문인은 선사의 대제자이며 저의 대사형인 진산월이란 분입니다.”

“노해광이 종남파를 나가? 그리고 진산월이라… 그는 언제 종남파에 입문했느냐?”

“십이 년 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괴인은 갑자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십이 년 전에 들어온 애송이가 장문인이 되어야 할 만큼 종남파에 사람이 없었던 게로군.”

낙일방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진산월을 애송이라고 부르는 괴인에게 화가 나서 무어라고 하려 했으나 그때 괴인이 그를 손짓해 불렀다.

“이리 와서 내게 절을 해라. 나는 종남파의 십구대 제자인 해조림이라 한다.”

그 말을 듣자 낙일방은 깜짝 놀랐다. 해조림이라면 종남삼검 중의 첫째이며 낙일검이란 별호로 강호에 쟁쟁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 아닌가?

“저… 정말 해조림 사조이십니까?”

“그렇다.”

낙일방은 즉시 그의 앞으로 달려가 세 번 절을 했다.

“이십일대 제자 낙일방이 사조님을 뵙니다.”

낙일방이 절을 마치지 괴인, 해조림은 그를 자신의 앞에 앉게 했다.

“이제 노부에게 이야기를 해봐라. 본파는 지금 어떤 상황이냐? 그리고 너는 대체 무슨 일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신세가 되었느냐?”

낙일방은 머뭇거리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사부인 임장홍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진산월이 장문이 된 것부터 무림첩을 받고 소림으로 가서 무림맹 창설에 참가한 이야기, 그리고 이어 사천까지 갔다가 종남파로 되돌아왔고, 결국 장문인이 실종되어 남은 제자들만으로 버티다가 초가보의 습격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 것까지 소상히 밝혔다.

낙일방의 말을 듣고 있던 해조림의 안색은 여러 차례 변했다. 특히 종남파 근처에 초가보라는 신흥세력이 생겨서 무서운 속도로 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불안한 표정이더니 장문인이 실종된 후 그 초가보에 공격을 당했다는 부분에서는 확연히 알 수 있도록 몸을 떨었다.

“크으으… 본파가 이토록 몰락해 버리다니… 오백 년 전통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구나. 이제 돌아가신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인가?”

해조림의 무거운 탄식을 들은 낙일방은 죄인이 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동안이나 탄식에 탄식을 거듭하던 해조림은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는 낙일방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어린 너희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저 본파의 명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빈껍데기만 너희들에게 남겨두고 떠난 우리 선배들의 잘못이지.”

낙일방으로서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선배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사자를 앞에 두고 어찌 그런 내색을 할 수 있겠는가? 한동안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낙일방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런데 사조께선 어떻게 하시다 이곳에 계시게 되었습니까?”

해조림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이십여 년 전에 소림사에서 있었던 기산취악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이십여 년 전, 종남파는 소림사에서 형산파에 패해 구대문파에서 쫓겨나는 치욕을 당했다. 그리고 해조림은 당시 장문인이었던 하원지를 보좌하여 형산파와 대결을 벌이던 인물들 중 하나였다. 해조림은 종남삼검의 우두머리로서 가장 먼저 대결에 임했으며, 가장 먼저 패했다. 그의 상대는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칠지신검 좌군풍이었다. 해조림은 정확히 삼십 초만에 좌군풍의 검에 왼쪽 팔꿈치를 베이고 말았다. 비록 그리 크지 않은 상처였으나,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육체적으로 해조림은 그 상처로 왼쪽 팔의 근육을 다쳐 그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되었으며, 정신적으로 자신이 몸담았던 문파가 몰락하는 데 일조(一助)를 한 격이 되어 회복되기 어려운 마음의 충격을 받았다. 그의 패배 이후 다른 종남삼검이 거푸 형산파의 오결검객들에게 패했으며, 그것으로 종남파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장문인인 하원지가 사결검객에게 당한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종남삼검 중 막내이자 가장 성격이 격정적이었던 풍뢰검 관소양은 제자인 백동일을 데리고 북쪽으로 떠나 버렸으며, 둘째인 질풍검 전풍개는 남쪽으로 가버렸다. 눈만 감아도 당시의 참혹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형산파의 검법을 꺾을 무공을 찾아 천하를 헤매고 다녔다. 하나 그런 기연(奇緣)이 쉽게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는 들려오는 소문으로 종남파가 자신이 있을 때에 비할 수 없이 몰락해 버렸고, 반대로 형산파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절망했다. 결국 오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황을 거듭하던 해조림은 마침내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 본파를 부흥시킬 무공을 멀리서 찾으려고 했던 건 나의 중대한 실책이다. 본파는 본파의 힘으로 되살려야 한다. 이백 년 전의 절대고수들이었던 종남오선의 무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소림사에서의 치욕을 씻을 수 있다.

해조림은 은밀히 종남산으로 돌아와 종남오선의 흔적을 찾는 데 주력했다. 특히 그는 종남오선의 제일가는 실력자이며 당시의 천하제일고수였던 태을검선 매종도의 비학에 더욱 신경을 집중시켰다. 매종도가 만약 종남산을 떠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종남산의 어딘가에 그의 비학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해조림은 야인(野人)이 되어 종남산의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그런 세월이 다시 오년이 흘렀다. 해조림은 이제 종남산이라면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나 어디에도 매종도의 비학은 없었다. 절망에 절망을 거듭하던 해조림은 결국 좌절하여 삶의 의욕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그가 찾은 곳이 바로 낙일방이 떨어졌던 바로 그 절벽이었다. 절벽 위에서 종남산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 두고 있던 해조림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남산의 거의 모든 곳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아직 절벽 자체를 조사한 적은 없었다. 만약 이 절벽의 어딘가에 동굴이 있다면….’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수백 장이 넘는 가파른 절벽을 무슨 수로 조사한다든가 하는 문제는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생(生)을 포기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찾아온 실낱 같은 희망에 해조림의 마음은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부터 해조림은 자신이 뛰어내리려고 했던 절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절벽의 높이는 무려 백 장에 가까웠고,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리 긴 줄을 몸에 묶고 내려가도 이십여 장이 한계였다. 그 이상은 줄이 끊어질 위험 때문에 시도해 볼 수가 없었다. 절벽의 정상에서 이십 장 이내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해조림은 동물의 시체에 줄을 묶어 늘어뜨려 보았다. 예상한 대로 이십 장이 넘어가자 줄이 흔들리더니 결국에는 끊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굵고 튼튼한 줄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쇠사슬을 사용해 볼 생각도 했으나, 이십 장이 넘는 쇠사슬은 그 무게만도 엄청나서 제작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이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절벽의 높이는 그보다 몇 배나 높지 않은가?

무언가 방법을 모색하던 해조림은 결국 위험천만하긴 하지만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절벽의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비상식량을 든든하게 준비하고 몸을 지탱해 줄 쇠못과 쇠망치도 챙긴 다음 절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법 순조로웠다. 절벽이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는 했으나 군데군데 균열이 난 부분도 있었고, 바위가 튀어나온 곳도 있어서 그곳들을 이용해서 오르는 것이 당초 예상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하나 바닥에서 십여 장쯤 올라갔을 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바위의 균열들도 점점 보이지 않았고, 튀어나온 부분도 찾기 어려웠다. 결국 해조림은 바위에 쇠못을 박아 몸을 지탱하면서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불편한 왼팔로 쇠못을 잡고 오른팔로 쇠망치를 휘두르는 것은 중노동에 가까운 힘든 일이었다. 올라온 높이가 이십여 장이 넘자 이번에는 추락(墜落)의 위험이 생겨났다.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아무리 신법을 극도로 발휘한다 해도 두 다리가 박살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올라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추락의 공포가 뒤섞여 해조림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서 삼십여 장쯤 올라왔을 때 그는 진퇴양난의 고비에 처하게 되었다. 그 일대는 이상하리 만치 바위가 매끄러워서 도저히 붙잡고 올라갈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올라오느라 쇠못도 거의 사용해서 불과 대여섯 개밖에는 남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너무나 까마득해서 떨어지면 분신쇄골(分身碎骨)을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이대로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다. 이제는 자신의 능력 밖의 일만 남은 것이다. 애초부터 백 장 높이의 절벽을 혼자의 힘으로 수색한다는 것이 무리였다. 그런 줄 알면서도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해조림은 이대로 절벽을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박쥐들이 튀어나왔다. 해조림은 정신이 번쩍 나서 박쥐들이 나온 바위 쪽을 올려다보았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느낄 수는 있었다. 절벽 속에서 박쥐가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틀림없이 저 위에는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는 동굴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만 했다. 해조림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다섯 개 남은 쇠못을 하나씩 절벽에 박았다. 이 일대의 바위는 너무나 단단해서 쇠못 하나를 박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야만 했다. 다섯 개의 쇠못을 모두 사용해도 올라온 거리는 사 장 남짓에 불과했다.

마지막 쇠못 위에 올라선 해조림은 조금 전에 박쥐들이 튀어나왔던 부분을 올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곳이 마지막이다. 이제는 나는 모든 힘을 다해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이다. 저곳에 동굴이 있다면 나는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착각이라면 나의 힘든 여정(旅程)은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의 삶은 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해조림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전력을 다해 위로 뛰어올랐다. 손가락 굵기의 쇠못 위에서의 도약인지라 제대로 힘을 실을 수 없어서 그가 뛰어오른 높이는 불과 삼 장이었다.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머리 위 이 장 부근에 시커먼 동혈(洞穴)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해조림은 동혈 속으로 뛰어들었고, 생(生)의 환희를 뼈저리게 느꼈다. 삶의 의지를 되찾은 해조림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선배고수의 유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혈이 끝나는 부분에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의 백골(白骨)을 찾아낸 것이다. 백골 앞에는 누렇게 변색된 종이와 작은 옥함(玉函) 하나가 먼지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해조림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쳐 보았다.

<언젠가 인연이 닿아 누군가가 이 글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을 남긴다. 나는 대종남파의 십이대 장문인인 소선 우일기라 한다. 그대가 종남의 문인(門人)이라면 나를 향해 구배(九拜)를 올린 후 나머지 글을 읽도록 해라. 만약 종남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이 편지를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종남과 원한이 있는 사이라면 이대로 편지를 없애 줄 것을 무림인 의 긍지를 걸고 당부하는 바이다…>

거기까지 읽고 난 해조림은 감격에 찬 얼굴로 그 자리에 엎드려 아홉 번 절을 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염원을 이루었다. 비록 가장 원했던 매종도는 아니었으나, 이백 년 전 종남파가 가장 번성했을 때의 장문인이며 종남오선 중의 첫째인 우일기의 시신을 찾아낸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흘린 그 많은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참 후에야 그는 겨우 마음을 수습하고 우일기의 서신을 계속 읽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실로 예상도 못했던 전대(前代)의 비사(秘史)가 적혀 있었다.

종남오선은 각기 천하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뛰어난 고수들이었고, 기재들이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종남파의 영화(榮華)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나 종남오선 중의 유일한 여인인 조심향을 사이에 두고 매종도와 정립병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종남팡에 암운(暗雲)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국(破局)은 예정보다 훨씬 빨리 닥쳐왔다. 매종도와 정립병이 싸움을 벌였고, 이긴 매종도와 패한 정립병이 모두 종남을 떠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실종에 충격을 받은 조심향마저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니 종남파는 삽시간에 가장 큰 기둥 세 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일기는 자신이 너무 사제들의 일이라고 방관한 것을 자책하며 그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잠시 종남을 떠날 생각을 했다. 이대로 그들 세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일기와 하정의만으로는 도저히 방대한 종남의 세력을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일기는 임시 장문인의 지위를 하정의에게 인계한 후 그들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는 우선 매종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매종도의 가장 친한 친우는 화음에 살고 있는 용태린이었다. 우일기는 상심(傷心)한 매종도가 친우인 용태린을 찾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종남산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우일기는 뜻밖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그를 습격한 자들은 전신을 흑포로 감싼 세 명의 괴인들이었는데, 그 무공이 실로 놀라워 우일기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우일기는 종남오선의 일인일 뿐 아니라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그 무공은 능히 강호를 주름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그는 검술이 탁월한 매종도나 정립병과는 달리 권장(拳掌) 쪽에 조예가 깊어 그 분야에 관한 한은 종남파 사상 최고의 고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세 흑의괴인들의 합공(合攻)에 연신 뒤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이 기괴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점도 있었으나, 우일기는 어딘지 모르게 그들이 자신의 무공의 약점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자랑하는 구반장법(九盤掌法)이 이토록 쉽게 와해될 리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빠르고 강맹한 옥뢰신장의 가장 취약한 점이 연속해서 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우일기가 옥뢰신장을 펼칠 때마다 무조건 몸을 피했다가 그 다음에 맹렬하게 공격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들과의 치열한 싸움은 한 시진이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우일기는 점차로 계속 몰려서 마침내는 종남산에서 가장 깊은 낭떠러지 부근까지 쫓기게 되었다. 퇴로(退路)가 막힌 우일기는 사력을 다해 반격을 했고, 그 때문인지 세 명의 흑포괴인도 일시지간 그를 어쩌지 못했다. 맹렬한 공방(攻防)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지 않은 숲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 인영은 흑포괴인들과 비슷한 복장을 했으나 우일기는 그 인영의 몸매가 어딘지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영의 눈과 마주친 순간, 우일기는 복면을 뒤집어쓴 그 인영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바로 그 순간 인영의 오른손이 움직이며 허공이 온통 새하얀 손가락 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그것은 강호제일의 지공(指功)으로 공인받은 절세무적의 난화지였다. 아니, 지금은 혈화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 명의 흑포괴인들과 오랫동안 격전을 벌이느라 진력이 고갈난 우일기는 그 지공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에 다섯 개의 피구멍을 뚫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매… 네가!”

우일기는 경악과 비통에 젖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하나 뒤이어 다른 세 명의 흑포괴인들이 내갈긴 장력이 노도처럼 그의 몸을 강타해 버렸다.

콰쾅!

“크아악!”

우일기는 피분수를 뿌리며 허공을 훌훌 날아갔다. 그가 날아간 곳은 공교롭게도 천길 낭떠러지가 있는 곳이었다. 흑포괴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우일기의 몸은 이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진 후였다.

“이런, 반드시 그의 죽음을 확인해야 하거늘.”

뒤늦게 나타난 작은 체구의 흑포인이 발로 바닥을 차며 소리쳤다. 세 명의 흑포괴인 중 가장 체구가 큰 인물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높이에서 떨어지면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라도 살아날 수 없다. 너는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그는 제 정체를 알아차렸어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우일기는 죽었다. 그건 누구도 되돌릴 수가 없다.”

작은 체구의 흑포인은 여전히 불만족스런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무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른 흑포인이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우일기의 무공이 이 정도면 대체 매종도나 정립병은 얼마만한 고수라는 거야?”

네 명의 흑포인들은 한참이나 절벽 위에 머물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멀어져 갔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우일기는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기필코 이 사실을 사제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의 몸은 난화지에 뚫린 피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온통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세 명의 흑포괴인들이 연합하여 내갈긴 장력에 갈비뼈 전체가 으스러져서 숨을 쉬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그가 육합귀진신공 중에서도 강(剛)과 유(柔)를 가장 잘 융합시켰다고 알려진 천단신공(天檀神功)을 익히고 있지 않았다면 이미 진작에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천단신공의 호심결(護心訣)은 천하에서도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는 비결이었다. 우일기는 체네의 진원지기(眞元之氣)까지 끌어올려 천단신공을 손으로 집중시켰다. 그런 다음 떨어지는 상태에서 사력을 다해 몸을 뒤집어 절벽 쪽으로 이동했다. 절벽이 코앞으로 나가오자 주저하지 않고 천단신공의 천강결(天剛訣)이 주입된 오른손을 절벽으로 쑤셔 박았다.

콰악!

뿌드득!

가장 단단한 암석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린다는 천강결의 위력은 과연 놀라워서 우일기의 오른손은 팔꿈치까지 절벽을 뚫고 들어갔으나, 떨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우일기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그가 깨어난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나서였다. 그는 천길 절벽의 한가운데에 오른팔을 절벽에 박은 자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우일기는 자신의 오른팔이 완전히 부서져서 도저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통증은 오히려 생각보다 적었다. 다만 오른팔 하나만 못 쓰게 된 것이다. 한동안 우일기는 절벽에 매달린 채로 어떠허게 내려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매달린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쪽으로 박쥐들이 드나드는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우일기는 절벽에 박힌 채 못 쓰게 된 오른팔을 팔꿈치 아래로 잘라 버리고는 왼손으로 절벽에 구멍을 내면서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간신히 동굴로 들어갔다. 하나 그의 상처는 너무도 막중했다. 난화지에 당한 다섯 개의 구멍은 모두 인체의 요혈(要穴)들이었고, 부러진 갈비뼈 중 일부가 폐를 찔러 숨을 쉴 때마다 시커먼 피가 흘러 나왔다. 게다가 오른팔이 부러지면서 그 충격으로 심맥이 온통 헝클어져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원지기까지 고갈되어 한줌의 진력(眞力)도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일기는 자신의 최후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우일기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글에 담아 후대(後代)의 누군가에게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천길 낭떠러지의 중간에 있는 이런 외진 동굴로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만에 하나의 실오라기 같은 가능성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종남파의 모든 문인들이 나를 찾아 종남산을 뒤질 것이다. 그때 천운(天運)이 닿는다면 이 동굴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일기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의 희망은 헛되지 않아 그의 유물은 물경 이백 년이란 기나긴 시공(時空)을 넘어 마침내 그가 그토록 원하던 종남파 고수의 눈에 뜨이게 된 것이다.


“옥함 속에는 그동안 절전(絶傳)되었던 태인장과 옥뢰신장, 구반장법, 낙뢰신권(落雷神拳) 등 칠종(七種)의 절학들과 천단신공의 비급, 그리고 우 사조께서 사용하시던 병기인 묵령갑(墨靈甲)이 담겨 있었다.”

해조림은 음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나 그 절학들은 전부가 권법과 장법에 관한 것들이었고, 내가 찾고 있던 검법은 적혀 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모진 고생 끝에 길을 발견했으나, 그 갈은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해조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검법과 권장법의 고수는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물론 처음에는 모든 무공을 함께 익힐 수 있겠지만, 일정 수준에 오른 후에는 둘 중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매종도와 정립병도 그래서 검에만 매진(邁進)했고, 우일기는 권장법에, 조심향은 지법과 신법에 자신의 심혈(心血)을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절대고수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 비해 하정의는 잡학(雜學)에 능했다. 특정한 어느 한 분야보다는 모든 무공에 두루 재주가 있었으나, 그런 만큼 무공에 대한 경지는 다른 네 사람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해조림 또한 평생 동안 검만을 익히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권장법의 절학들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해조림으로서는 두 가지 결정 중 하나를 해야 했다. 자신에게 불필요한 절학들을 종남팡에 돌려주고 자신이 원하는 매종도나 정립병의 유물을 찾아 다시 종남산을 헤매고 다니는 것과, 처음 무공에 입문한 시절을 되새기며 검을 버리고 우일기의 권장절학들을 새롭게 익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것도 쉬운 길은 아니었고, 그가 가고자 했던 길도 아니었다. 그런 길만이 그에게 남았다나는 것이 애통스러울 뿐이었다. 결국 해조림은 오랜 고민 끝에 후자(後者)의 길을 가기로 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절학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일은 더 이상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자신은 이미 너무 나이를 먹어 버렸다. 앞으로 십년만 지나면 설사 매종도나 정립병의 절학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로서는 익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해조림은 우일기의 절학을 익히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나 너무 늦게 시작한 권장(拳掌)의 길은 그가 기울인 노력에 비해서 너무 적은 성과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십년이 넘게 노력했으나 그의 실력은 아직 흡족하지 않았다. 특히 잘려나간 왼쪽 팔꿈치 때문에 왼팔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다행이라면 내공 방면은 상당한 성과가 있어서 천단신공을 팔 성(八成) 이상 익혔다는 것이었다. 하나 다른 절학들의 성취는 그 반도 되지 않았다. 특히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태인장은 겨우 삼 성(三成)에 불과할 뿐이었다. 태인장의 위력은 실로 놀라워서 해조림은 태인장을 대성(大成)할 경우 충분히 형산파의 절학들을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으나, 그 진경(進境)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해조림은 배가 고프면 동굴에 서식하는 박쥐들을 잡아먹었고, 목이 마르면 박쥐의 피를 빨면서 계속 무공을 수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절벽 위에서 희미하게 싸움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도 천단신공이 구 성(九成)에 가까워 오면서 생긴 천이통(天耳通)의 능력 때문이었다. 해조림은 호기심을 느끼고 동굴의 입구까지 다가갔다. 그때 절벽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조림은 바짝 긴장해 있다가 그 물체가 동굴을 지날 때 접인신공(接引神功)을 발휘하여 물체를 동굴로 끌어당겼다. 그 물체는 과연 사람이었다. 이목구비가 상당히 뛰어난 젊은 청년이 가슴 부근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해조림이 낙일방을 구하게 된 사연이었다.

해조림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낙일방은 그의 파란만장한 사연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울러 자신들이 그로톡 갈망했던 종남오선의 절학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에 충심으로 기쁨을 느꼈다. 종남오선의 비사(秘史)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이미 이백 년 전의 사람들이고, 그때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낙일방은 해조림에게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해조림은 낙일방이 검법보다는 권장지각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으며,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해 주리라 결심했다. 낙일방의 진경은 과연 해조림과는 달랐다. 해조림이 한 달 넘게 각고하여 간신히 터득한 초식을 낙일방은 겨우 삼 일 만에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어려서부터 검법보다는 장괘장권구식 같은 권장법을 종하해서인지 그에 대한 이해도 남달랐다. 불과 몇 달 만에 낙일방은 절벽에 떨어질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실력으로 발전했다. 낙일방의 성장을 보면서 해조림은 새삼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낙일방의 약점은 모두 두 가지였다. 성격적으로 너무 조급했고, 내공이 빈약해 초식을 제대로 구사하면서도 본연의 위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해조림은 낙일방의 조급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그에게 모진 시련을 주었고, 그래서인지 낙일방은 점차로 진중(鎭重)한 모습을 보였다. 하나 내공 방면은 뚜렷한 진전이 없었다.

원래 내공이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해조림은 어느 날부터인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낙일방은 그가 종남파로 되돌아가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낙일방을 바라보는 해조림의 눈은 유현(幽玄)하고 깊었다. 그리고 낙일방의 태인장이 사 성(四成)의 경지에 이른 날,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그날 저녁, 해조림은 낙일방을 조용히 불렀다.

“이곳에 와서 앉거라.”

낙일방이 단정한 자세로 앉자 해조림은 온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육 개월이 조금 넘는 세월 동안 낙일방은 적지 않게 성장해 있었다. 무공으로나 성격적으로나 그는 한 명의 완벽한 무림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낙일방의 모습을 보면서 해조림은 흐뭇함과 아릿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낙일방은 자신의 꿈을 대신 꾸어 줄 유일한 존재였고, 제자였으며, 손자였다. 이제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낙일방의 가장 큰 약점을 해소시켜서 그가 마음껏 활개 치며 세상을 날 수 있도록 해주는 일뿐이었다.

낙일방은 해조림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오늘따라 그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도 해조림을 친할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친밀감이 진산월에 대한 감정에 못지않았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나서 어른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는 낙일방으로서는 생전처음으로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어른의 온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사부인 임장홍이 해주었던 것과도 또 달랐다. 사부는 자신뿐 아니라 사형제 모두들에게 공평하게 대했다. 하나 해조림에게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자기 한 사람에게만 모든 정성을 베풀었던 것이다.

해조림은 한참 동안이나 낙일방을 찬찬히 살피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방아.”

“예, 사조님.”

“너는 노부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낙일방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형산파를 꺾어 과거의 치욕을 되갚고 본파를 다시 구대문파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부는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다. 이제 그 꿈은 네가 이루어 주어야겠구나.”

낙일방은 그의 말 속에 숨은 뜻도 모르고 힘차게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소손(小孫)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형산파를 누르고 본파의 영화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해조림은 흐뭇한 눈으로 낙일방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자만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자만하지 말라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자중자애(自重自愛)하며 매사에 자신(自信)을 갖되 상대를 경시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됐다. 뒤를 돌아보아라.”

낙일방은 무심코 뒤를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있을 리 없었다. 그때 해조림이 손을 내밀어 그의 혈도를 제압했다.

“사… 사조님….”

낙일방이 영문을 몰라 당혹해할 때 해조림의 오른손이 그의 백회혈(百會穴)쪽으로 다가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단신공 중의 흡자결(吸字訣)을 외우도록 해라.”

그제서야 낙일방은 해조림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알고 안색이 대변했다.

“사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자중자애하라는 내 말을 벌써 잊은 거냐? 어서 흡자결을 외워라. 노부의 노고를 헛수고로 만들 셈이냐?”

“사조님…!”

해조림은 버럭 호통을 질렀다.

“바보 같은 놈! 그런 나약한 생각으로 형산파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너를 어찌 믿고 대사(大事)를 맡길 수 있겠느냐?”

낙일방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니 소손 옆에서 소손이 잘못하고 있는지를 지켜보셔야지요. 꾸지람도 주시고 따끔하게 벌도 주셔야 합니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해조림의 얼굴에 쉴사이없는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차마 낙일방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텅 빈 허공을 응시했다.

“노부는 이미 살 만큼 살았다. 이십여 년 전에 소림사에서 이미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선대의 유물도 찾았고, 내 뜻을 이어 줄 너까지 있는데 무슨 여한(餘恨)이 있겠느냐?”

“사조님…!”

해조림은 결연한 눈빛으로 다시 호통을 쳤다.

“어서 운기(運氣)를 하도록 해라. 노부는 이제 공력을 운행하겠다. 노부의 내력(內力)을 받고 받지 않고는 네놈 마음이니 알아서 해라.”

낙일방의 백회혈에 올라가 있는 해조림의 손에서 거대한 기운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그의 몸속으로 돌어오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어쩔 수 없이 운공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각 초래될 것이다. 천단신공의 흡자결을 끌어올리자 해조림의 기운이 노도처럼 그의 몸속으로 빨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격체전력(隔體傳力)은 불과 일각 만에 끝이 났다. 운공을 마친 낙일방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해조림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낙일방은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다. 그가 해조림의 시신을 묻고 동굴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오 일 후였다.

동굴을 나온 낙일방은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초가보로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도 앞뒤 안 가리고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우일기의 유진을 얻고 해조림의 막강한 내공을 수습했다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는 초가보를 상대할 수 없었다. 다른 사형제들이 무사한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들의 행방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그때 낙일방은 번쩍 눈을 떴다.

“그래, 정 사형을 찾아가는 거야. 정 사형은 그 당시에 본파에 없었으니 참변을 당했을 리도 없지. 정 사형은 머리가 좋으니까 정 사형을 찾아가 의논을 해보면 본파를 되찾을 좋은 방도가 있을 거야.”

생각을 정리한 낙일방은 정해가 있는 낙양 석가장으로 가기 위해 종남산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그러다 서안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어느 고개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주루를 찾다가 마침 주루에서 처참한 혈겁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간 낙일방은 때마침 돌려온 기합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얍!”

비록 상당히 떨어져 있기는 했으나 그 음성은 너무도 귀에 익은 것이었다. 낙일방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기합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흑의인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원건과 정해를 발견한 것이다.

낙일방의 긴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진산월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또 한 분의 선배고수께서 그렇게 가셨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분의 뜻을 잊지 말도록 해라.”

낙일방은 해조림 생각을 하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하나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이제는 떳떳한 한 사람의 무인(武人)으로서 장문사형에게 도움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낙일방의 당당한 모습에서 진산월은 새삼 그가 무척이나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녀석, 많이 컸구나.’

어찌 낙일방 뿐이겠는가? 그동안 종남파 고수들이 겪었던 좌절과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들 크든 작든 성장을 이루었다. 쇠가 두드리면 단단해지듯이 종남파의 문인들 또한 거듭된 시련으로 강하게 단련되었다. 이제는 초가보와도 능히 싸워 볼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이때 종남파의 인원은 모두 열두 명. 군림(君臨)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하나 생존(生存)을 위해서는 충분한 숫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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