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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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3화


제125장. 낙화수사(落花秀士)

종남산을 내려오는 길은 지루했다. 하룻밤 사이에 같은 길을 두 번이나 오르내려야 하는 이동정과 금교교 등은 더욱 그러했다. 종남산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는 이미 오후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을 때였다.

“좀 더 빨리 가요. 이러다가는 산에서 밤을 맞겠어요.”

누산산이 일행들에게 뛰쳐나와 속도를 올려 막 모퉁이 길을 돌아 내려갈 때였다.

“앗?”

누산산은 맞은편 길에서 걸어오던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하마터면 정면으로 충돌할 뻔했다. 그녀는 황급히 신형을 뽑아 올려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서 땅에 내려섰다.

“눈을 대체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그녀는 어두운 산길에서 빠르게 내려오던 자신의 실책은 탓하지 않고 오히려 매서운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흠칫거렸다.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에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남자가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다리가 불편한지 왼쪽 다리를 이상하게 구부리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누산산이 천방지축의 성격이라고 해도 불구인 사람을 상대로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 표정과 음성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이봐요, 다친 데는 없어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 험상궂어서 누산산은 공연히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네.’

누산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남자의 뒤에서 누군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무척이나 키가 훤칠하고 깡마른 몰골의 괴인이었다. 누산산은 행색이 기괴한 두 사람의 모습에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나 자신의 뒤에서 정소소와 금교교 등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산 매, 왜 그래? 아는 사람들이야?”

모퉁이에서 벌어진 일이라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금교교가 의아한 듯 묻자 누산산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눈앞의 두 괴인들을 바라보았다.

“별일 아니에요. 지나가다 마주쳤을 뿐이에요.”

나중에 나타났던 키가 큰 괴인이 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절름발이 남자를 슬쩍 끌고 길 한편으로 비켜섰다. 그녀들이 먼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이내 그들을 지나쳐 산길을 내려갔다. 도중에 누산산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그녀의 그런 심각한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한 금교교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냐?”

누산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쳐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그 사람들…”

“그들이 어째서?”

누산산은 갑자기 금교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셋째 언니, 그 사람들 누군지 모르겠어요?”

금교교는 누산산이 흥분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자 이 아이가 또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말았다.

“별로 신경 써서 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왜? 두 사람 중 마음에 드는 자라도 있느냐?”

누산산은 답답한 듯 마구 도리질을 쳤다.

“그게 아니라… 정말 그들이 기억 안 나요? 얼굴들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면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녀가 너무나 정색을 하자 금교교는 물론이고 이제까지 무관심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정소소와 이동정도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대체 누구인데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거냐?”

“그 사람들… 종남파 사람들이잖아요. 몇 년 전에 보았던…”

금교교와 정소소사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래요. 그 머리를 박박 깎은 절름발이는 긴가민가한데, 그 뒤에 서 있던 키가 엄청나게 큰 말라깽이는 분명히 종남파의 장문인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모두들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조금 전의 그 괴인이 진 장문인이라고? 확실한 거냐?”

침착하기 그지없던 정소소가 정색을 하고 묻자 누산산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확실해요, 처음에는 너무나 변해서 몰라봤는데, 그 절름발이의 얼굴이 아무래도 눈에 익어서 자꾸 생각해 보니까 예전에 낙양 근처에서 보았던 종남파의 고수 중 하나였어요. 그때는 그자가 정신을 잃고 누군가에게 업혀 있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뒤에 있던 키다리도 혹시 종남파 사람이 아닐까 해서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예전과 엄청나게 달라지긴 했어도 그 사람은 종남파의 그 뚱뚱하고 말 잘하는 장문인 이었어요.”

정소소의 얼굴에 한 줄기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너무도 빠르게 사라져 버려 장내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금교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셋째도 알아차리지 못했니?”

금교교는 아직도 어리벙벙한 모습이었다.

“전혀 몰랐어요. 종남파 고수들이라면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런 모습으로 변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군요. 더구나 진 장문인이라면… 요즘 들어 서안 일대를 뒤흔들고 있다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요?”

“나도 그 소문은 들었다. 그런데 그가 진 장문인이라면 왜 우리를 보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먼저 우리를 아는 척하기도 어렵지 않았겠어요?”

정소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의 말을 그대로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금교교는 조금 전에 보았던 괴인의 모습을 자세히 떠올리려 했으나 스쳐 지나가듯 한 상황이었는지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누산산에게 물었다.

“진 장문인의 모습이 어떠했니?”

누산산은 기억을 되새기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신중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굉장히 이상했어요. 옛날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져서 목내이(木乃伊)처럼 깡마른데다 얼굴에 흉터가 나 있어서 무시무시해 보였어요. 예전의 그 여유롭고 사람 좋아 보이던 모습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어서 전혀 다른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도 용케도 그를 알아보았구나.”

“눈빛이 눈에 익었거든요. 나와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아주 친근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간신히 기억이 났어요.”

금교교는 짓궂은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진 장문인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지는 미처 몰랐구나.”

놀랍게도 누산산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관심은요, 체격 좋고 뚱뚱하던 사람이 해골같이 변해서 신기햇던 것뿐이에요.”

금교교는 누산산이 얼굴까지 붉히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살짝 흥미가 동해서 그녀를 놀리려 했다. 그때 정소소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진 장문인이 맞다면 조만간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더 늦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도록 하자.”

“예, 큰언니.”

누산산은 큰소리로 대답하며 한발 먼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금교교는 무언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자 그제서야 자신도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우리를 알아보았을 것 같소?”

한참이나 묵묵히 산을 올라가던 응계성이 입을 연 것은 그녀들과 스쳐 지나간 지 일각(一刻)이 넘은 후였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응계성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천봉팔선자가 다섯 명이나 몰려다니다니 좀처럼 보기 힘든 일 아니오?”

“그렇군.”

“그들 중 세 사람은 전에 만나서 알겠는데, 다른 두 사람은 천봉팔선자 중의 여인들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 전혀 모르겠구려. 장문사형은 혹시 알고 있소?”

진산월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백의를 입은 여인은 천봉팔선자의 첫째인 백봉 정소소다. 다른 한 사람은 나도 모르겠구나.”

“그녀들과 같이 있던 남자는?”

“처음 보는 자다.”

진산월은 응계성이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응계성은 웬일인지 잠깐 머뭇거리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더구려. 그녀도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었을 텐데 아직도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정말 신기한 일 아니오?”

진산월은 응계성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머리가 깎이고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거칠고 투박한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아련한 빛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응계성이 말한 그녀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만난 천봉팔선자들 중 응계성이 만난 적이 있는 여인들은 영봉 금교교와 취봉 두청청, 옥봉 누산산 뿐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응계성의 시선은 오직 누산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응계성이 누산산을 처음 만난 곳은 이수 강변이었다.

당시 응계성을 비롯한 종남의 문하들은 봉황금시를 훔친 동중산 때문에 많은 고수들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응계성은 그 와중의 치열한 격전으로 정신을 잃고 있어서 막상 누산산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가 누산산의 얼굴을 처음으로 본 곳은 무림집회가 벌어진 소림사 내의 초조암 앞에 있는 어느 주루였다. 비록 잠깐 동안의 만남이었고, 누산산의 용무는 진산월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어서 응계성은 그녀와 대화 한 마디 나눌 수 없었으나, 그녀의 상큼하고 깜찍한 모습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었다. 거칠고 성격이 불 같은 응계성은 이상하게도 얼굴이 예쁘거나 다소곳한 여자보다는 귀엽고 앙칼진 성격의 여자를 좋아했다. 그래서 삼년 전에 잠깐 보았던 누산산을 지금까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계성이 잠시나마 야릇한 감회에 빠진 것은 그가 지금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려운 것 없고 물러설 줄 모르는 야성(野性)을 지닌 응계성도 힘들고 혹독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문득 자신이 외롭다고 느낀 것일까?

두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한 사람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갈색 유삼(儒衫)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갈삼중년인은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오다 진산월과 응계성을 발견하고는 눈을 번쩍 빛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침 잘 되었군.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생면부지의 갈삼중년인이 자신들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오자 응계성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응계서어이 아닌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그러할 것이다. 하나 응계성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말하시오.”

갈삼중년인은 온화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다름아니라 혹시 산을 올라오면서 젊은 청년 세 사람을 보지 못했나? 다들 제법 준수하게 생기고 기도가 뛰어나서 봤으면 기억하기 쉬울 텐데…”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보지 못했소.”

갈삼중년인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그렇다면 그 녀석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분명히 이쪽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종적을 찾을 수 없으니, 원…”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갈삼중년인은 진산월을 향해 가볍게 눈웃음을 쳤다.

“고맙네. 그나저나 이토록 늦은 시간에 산을 올라가다니 향화객(香火客)은 아닌 것 같고, 복장으로 보니 사냥꾼이나 약초꾼도 아니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나?”

갈삼중년인은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눈빛이 맑았을 뿐 아니라 태도 하나하나에도 은근한 멋과 여유가 담겨 있었다. 진산월이 대답하지 않고 빤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자 갈삼중년인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두 사람의 기도가 범상치 않고 인상이 강렬해서 문득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네.”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하가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면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소.”

갈삼중년인은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헛! 이거 내가 아무래도 큰 실례를 한 것 같군. 확실히 일에는 선후(先後)가 있는 법인데 내가 너무 성급했네. 나는 산동에서 온 조가(趙哥)일세.”

“나는 진가(陳哥)요, 다른 일이 없다면 우리는 그만 가 보겠소.”

진산월이 주저 없이 몸을 돌리려 하자 갈삼중년인의 준수한 얼굴에 계면쩍은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제대로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자네의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군. 이해하게. 오랫동안 강호에서 온갖 험악한 일을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신분을 밝히는 데 조심스러워지는군. 조금 전의 일은 없던 것으로 하세.”

갈삼중년인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헤어질 것을 선택했다. 진산월 또한 그에게 약간의 호기심이 있기는 했으나 문파로 돌아가는 일이 더 급한지라 별다른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이곳에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낭랑한 음성과 함께 멀지 않은 숲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장내로 날아왔다. 두 사람의 신법은 표홀하기 그지없어서 상당한 거리를 단숨에 날아왔는데 바닥에는 먼지조차 날리지 않았다. 그들은 각기 백의와 하늘색 유삼을 입은 준수한 청년들이었다. 두 사람의 용모가 어찌나 뛰어난지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그들의 눈빛은 용모와는 달리 얼음장처럼 차갑고 싸늘해서 성격이 냉정한 인물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장내에 도착하자 아내 갈삼중년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갈삼중년인은 그들을 둘러보더니 조금 전에 진산월을 대할 때와는 달리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너희들 둘 뿐이냐? 설아(雪兒)는?”

백의청년과 하늘색 유삼의 청년은 얼굴을 마주보더니 그들 중 백의청년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섯째 형은 여기에 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갈삼중년인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백의청년의 시선이 한쪽에 서 있는 진산월과 응계성을 힐끔 스치듯 지나쳤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갈삼중년인은 외부인이 있는 곳에서는 말할 수 없다는 그의 속뜻을 쉽게 알아차렸다. 진산월 또한 그들의 눈짓을 빠르게 눈치채고는 주저 없이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데 그가 채 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무심코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백의청년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엇?”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진산월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백의청년은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얼굴에 한줄기 미소를 떠올렸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늑대처럼 냉혹하고 득의에 찬 웃음이었다.

“너무 달라져서 미처 못 알아봤군. 모처럼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졌다면 무척이나 서운할 뻔했소. 그렇지 않소?”

진산월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백의청년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잊을 뻔했군. 당신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었지.”

백의청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흐흐… 얼굴뿐 아니라 분위기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군. 그래도 그 본신 (本身)이 어디 가겠소?”

갈삼중년인은 백의청년이 진산월에게 계속 조소 어린 말을 내뱉자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냐?”

백의청년은 여전히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별일 아닙니다. 예전에 해결했어야 하는 일을 오늘 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아는 사람이냐?”

“알든 모르든 곧 상관없게 될 겁니다.”

백의청년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내 진산월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갈삼중년인은 무언가 못마땅한 것이 있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으나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백의청년은 빙글거리며 진산월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때는 용케도 내 손을 피했지만 이제 그 좋던 운도 끝이로군. 요즘 제법 소문이 들리던데 그동안 어디 숨어서 무공이라고 익히고 있었나 보지?”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진산월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응계성이 분노하여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백의청년은 신목령의 구호사자인 옥면절정 조화심이었다. 삼년 전, 처음 강호에 출도했을 때 진산월은 조화심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조화심은 천봉팔선자 중의 남봉 엄쌍쌍을 쫓고 있었는데, 자신의 일을 가로막은 진산월을 제거하려다 오호사자인 악자화의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화심은 당시의 일을 잊지 않고 진산월에게 살수를 쓰려는 것이다.

진산월도 그때 조화심에게 당한 모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종남파를 완전히 재건하기 전에는 가급적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진산월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것은 번거로움 이전에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의 자존심, 남자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무림인으로서의 자존심. 그래서 진산월은 두말하지 않고 조화심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조화심은 이미 진산월을 없애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오른쪽 소맷자락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와 함께 칼날같이 예리한 경기(勁氣)가 진산월의 앞가슴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조화심이 펼친 것은 월강수(月?袖)라는 것으로, 이십 년 전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무학(武學)의 천재(天才) 경천신수(驚天神手) 동방욱(東方旭)의 구대절학(九大絶學) 중 하나였다. 당시 동방욱은 약관을 조금 넘긴 나이에 혜성같이 강호에 나타나 두 개의 육장(肉掌)만으로 절정고수들을 연파하여 강호를 놀라게 했었다. 그가 지금까지 계속 무림에서 활동했다면 정파의 최고고수들은 무림구봉이 아니라 무림십봉(武林十峯)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모든 무림인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하나 동방욱은 웬일인지 십여 년 전부터 강호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지금은 당시의 명성이 많이 퇴색된 상태였다.

지금도 진산월의 가슴을 베어 버릴 듯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경기의 위력은 살인적인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오른손을 살짝 흔들었다.

꽝!

마치 뇌성벽력이 터지는 음향이 울려 퍼지며 세찬 경풍이 장내를 휩쓸었다. 먼지바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으며, 땅거죽의 일부가 뒤집히고 근처의 초목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단 한번의 격돌이 빚은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장내의 광경이 서서히 중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진산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반면에 조화심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핼쑥하게 질린 채 두 눈에 은은한 경악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조화심은 출도 이후 자신의 월강수를 이토록 간단하게 격퇴시킨 사람을 처음 보았기에 심중의 놀라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월강수는 자체에 담긴 기이한 힘 때문에 웬만한 장력(掌力)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는데 진산월의 장력은 마치 금성철벽처럼 단단하여 전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화심의 입에서 자신도모르게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이것이 무슨 장공(掌功)이냐?”

그로서는 존재 여부조차 관심 없었던 종남파에 이토록 가공할 장력이 있다는 사실을 선뜻 믿기 어려웠다.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장력은 대천장에 태진강기를 섞어 보낸 것이었으나, 그런 사실을 시시콜콜하게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대신 진산월은 앞으로 한발 성큼 다가서며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 공격을 시작했다. 마치 그림자가 흐르는 듯한 광경과 함께 진산월의 손은 어느새 조화심의 턱밑까지 도달해 있었다. 조화심은 심중의 경악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진산월의 손이 눈부신 속도로 다가오자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자신도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시사한 종남의 무공으로는 나를 당해낼 수 없다!”

그의 외침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그의 손과 진산월의 손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부딪쳤다.

타타탁!

두 사람의 손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수십 번이나 격돌했으며 서로 상대의 목과 가슴에 있는 중요 부위를 노리고 있었다. 눈 깜박할 새 십여 초가 지나갔다. 이런 식의 가까운 거리에서의 공방(攻防)은 그야말로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물론이고 싸우는 당사자 두 사람의 긴장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화심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무서운 속도로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러 진산월의 목덜미와 관자놀이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그의 손이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마치 수십 개의 손이 동시에 날아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가 사용하는 무공은 동방욱의 구대절학 중 하나인 분광착영수(分光捉影手)로, 이 수법은 이름 그대로 강호의 수많은 금나수법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빠르고 강력한 절학이었다.

하나 그토록 가공할 수법으로도 진산월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진산월의 동작은 분명 조화심보다 느렸으나, 이상하게도 조화심의 손이 움직이는 길목을 미리 장악하고 있어 좀처럼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가끔씩 전혀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날아드는 일격에 조화심이 쩔쩔매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화심의 얼굴에 조바심이 떠올랐다. 그는 오른손이 퉁퉁 부어 심각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맨 처음에 진산월의 손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후유증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맨손과 맨손이 부딪쳤는데도 진산월의 손은 멀쩡한 반면에 조화심의 손은 푸르뎅뎅하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지금도 조화심의 손과 손이 교차되는 미세한 틈을 뚫고 들어오는 진산월의 깡마른 손은 마치 유령의 손바닥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대체 지난 삼년 동안 이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냐?’

조화심은 예전 생각만 하고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달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조화심은 자신의 목덜미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진산월의 손을 오른쪽 팔꿈치로 후려쳤다.

팍!

진산월의 손과 조화심의 팔꿈치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팔꿈치는 맨손 공격 중에서는 가장 위력이 강한 부위였다. 그런데 진산월의 손바닥과 부딪치는 순간 조화심은 단단한 쇳덩이를 가격하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을 토하내고 말았다.

“큭!”

그때 조화심의 팔꿈치와 부딪쳤던 진산월의 손이 그의 팔뚝을 타고 미끄러지듯 조화심의 콧등으로 다가들었다. 그 변화의 기괴함과 변초(變招)의 신속함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어서 조화심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로 빠르게 다가오는 진산월의 손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조화심의 준수한 얼굴이 피투성이로 변하려는 찰나, 갑자기 진산월의 뒤통수로 한 줄기 예리한 경기가 날아들었다. 한쪽에서 구경하고 있던 공손도가 조화심의 위기를 보고 때맞추어 수중의 섭선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진산월의 신형의 한차례 흔들리더니 너무도 수월하게 공손도가 휘두른 섭선의 그림자 속을 뚫고 이 장 밖으로 이동했다.

“허!”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갈삼중년인이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진산월의 단순해 보이는 동작 하나하나에 기이한 현기(玄機)가 담겨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지금도 언뜻 보기에는 진산월이 그냥 몸을 훌쩍 날린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 와중에 네 번이나 몸의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공손도의 광풍이십팔선을 그토록 간단하게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장 밖에 멈춰 선 진산월은 무심한 시선으로 조화심과 공손도를 훑어 보더니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제 제대로 해볼까?”

그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용영검의 손잡이 쪽으로 움직였다. 조화심은 물론이고 공손도의 안색 또한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록 길지 않은 싸움이었으나, 진산월의 무공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맨손으로도 이토록 무서웠는데 이제 검까지 사용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위력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자신들은 과연 그의 검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한 사람에게 자신들이 이토록 위압감을 느끼리라고는 전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그들이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지금까지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종남파의 장문인이었으니 그들로서는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갈삼중년인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멈추게.”

진산월은 용영검의 손잡이에 손가락 끝을 가볍게 댄 채 갈삼중년인을 쳐다보았다.

“우리 사이의 일은 모두 끝난 것으로 아는데…”

갈삼중년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그렇지. 하나 그 아이들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일세. 그러니 자네의 손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뻔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군.”

그 말에 조화심과 공손도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공손도는 무언가 못마땅한 듯 항변하려 했으나 조화심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중한 모습이었다. 갈삼중년인이 공손도의 불만 어린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냉엄한 눈으로 그를 쓸어보았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 거냐? 하지만 사실이다. 저자가 검을 뽑았다면 너희 둘은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공손도는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말을 삼켰다. 갈삼중년인은 평소에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으나 일단 내뱉은 말에는 절대적인 책임을 지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무공에 대한 안목과 수준은 자신들로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탁월한 것이어서 비록 마음속으로는 수긍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드러내 놓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갈삼중년인의 얼굴에는 평소의 온유한 표정과는 달리 엄격하고 근엄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강호에서 함부로 원한을 맺지 말고, 상대를 경시하지 말라는 내 당부를 너희들은 아주 깨끗하게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일곱째의 뼈아픈 실패를 보았으면서도 조금도 느끼는 점이 없었느냐?”

그때 이제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조화심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저자가 바로 일곱째 형님에게 낭패를 준 종남파의 장문인 진산월입니다.”

그 말에 갈삼중년인의 눈에서 번뜩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는 기광(奇光)이 번쩍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찬찬히 응시하더니 나직하면서도 힘이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진산월이로군.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네.”

진산월의 시선과 갈삼중년인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차갑게 가라앉아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진산월의 눈을 본 갈삼중년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눈이로군. 검을 들고 있는 자세만 보아도 자네가 얼마나 뛰어난 검객(劍客)인지 짐작이 가네. 자네의 이름을 알았으니 내 신분을 밝히는게 도리겠지? 나는 조옥린(趙玉麟)이라고 하네.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그 이름을 듣자 응계성은 움찔 놀라는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들어보았소. 낙화수사(落花秀士)는 고고한 한 마리 학(鶴)과 같아서 표표히 떠돌기를 좋아한다는데 당신도 신목령에 속해 있었소?”

갈삼중년인은 한때 강호제일의 풍류아(風流兒)라고 소문났던 낙화수사 조옥린이었다. 그는 이십 년 전에 이미 강북에서 손꼽히는 절정고수였으며, 준수한 외모와 세련된 태도로 뭇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절세의 미남자였다. 이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 과거의 풍류남아는 중년을 훌쩍 넘겨 노년을 바라보는 장년인이 되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수려한 모습은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비록 풍류를 즐기기는 했으나 백도(白道)의 인물로 알려진 조옥린이 신목령의 사람이라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옥린의 입가에 한 줄기 미묘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보면 쓸쓸하고 어찌 보면 착잡한 빛을 담고 있는 미소였다.

“몇 가지 일을 봐주고 있지. 예전에 자네가 꺾은 심옥당은 내게는 제자와 같은 아이였네. 비록 오만하고 버릇이 없는 아이였지만 무공에 대한 재질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자네에게 패한 후 의기소침해 있다가 지금까지 과거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네.”

“그게 내 책임이란 말이오?”

조옥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네.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므로 자신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지. 다만 나는 한때의 인연으로 그를 돌보았던 만큼 그를 좌절시킨 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네.”

신목령의 일곱 번째 사자인 신목칠호 심옥당은 자부심이 강하고 무공이 탁월한 기재였다. 하나는 그는 삼 년 전에 방심한 상태에서 진산월과 싸웠다가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심옥당의 실력은 신목십이호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것이어서 절대로 진산월에게 당할 수가 없었는데, 심옥당은 진산월을 너무 경시하고 우습게 보았다가 크나큰 낭패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부상은 심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의 좌절감이 너무 커서 심옥당은 심각한 후유증에 빠져들었다. 신목령에서는 그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어렵지 않은 일을 맡겼으나 오히려 쾌의당의 고수에게 한쪽 팔까지 잘려 거의 폐인(廢人)이 되어 버렸다. 당시 그의 팔을 자른 사람은 무영귀 허무극이었는데, 평소의 심옥당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였다. 결국 진산월에게 패한 충격이 그를 나락(奈落)으로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조옥린은 신목령주인 신목존자의 최측근에 있는 다섯 사람 중 하나였다. 신목령 내에서는 그들을 오천왕(五天王)이라고 불렀다. 오천왕은 신목령의 십이사자들 중 마음에 드는 한두 사람에게 자신들의 절학을 가르쳐 주었는데, 조옥린은 심옥당에게 신경을 쏟았다. 비록 정식으로 사부와 제자의 연(緣)을 맺지는 않았으나 아들 같고 제자같이 아끼던 심옥당이 폐인이 되자 조옥린으로서는 아쉬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심옥당을 패배시킨 당사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조옥린의 심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검의 손잡이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며 양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렸다.

“나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면 이제 그만 비켜 주시오.”

“그러지.”

의외로 조옥린은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진산월은 아직도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조화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당신 운이 좋았군. 운이란 공평한 거요. 때로는 좋고, 때로는 나쁘기도 하지. 다음에 만날 때는 오늘과 같은 운을 바라기 어려울 거요.”

조화심은 연신 눈자위를 실룩거렸으나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조옥린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응계성과 함께 천천히 산을 올라갔다. 그들의 신형은 곧 산속의 어둠에 묻혀버렸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조옥린이 나직한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종남파라… 다섯 째를 경쟁에서 밀어냈다는 바로 그자인가? 강호에 한바탕 격랑이 몰아치겠구나.”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런 고수를 눈앞에 두고도 마음속에 호승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나도 이제는 늙어 버린 것인가? 허헛…”

씁쓸하고 허탈한 독백을 내뱉던 조옥린은 이내 시선을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조화심과 공손도를 돌아보았다.

“설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산을 내려가서 듣도록 하겠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라.”

이어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허공을 날아 산 아래로 내려가시 시작했다. 조화심과 공손도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곧 그들의 몸은 세 개의 점이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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