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5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5화


제127장. 이차회동(二次會同)

다음 날, 방화의 입문식이 거행되었다. 갈 노인에게 수술을 받느라 의식이 없는 응계성과 부상이 심해서 아직도 거동을 못하는 송천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참석해서 방화를 축하해 주었다.

심지어는 그동안 계속 병상에만 누워 있던 전풍개도 모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입문식에 참석을 했다. 중인들 중 방화의 입문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동중산이었다.

“이제 내게도 두 번째 사제(師弟)가 생겼구나.”

동중산은 방화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방화의 준수한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방화는 하룻밤 사이에 세 명의 사숙과 한 명의 사고, 두 명의 사형제가 생기게 되었다.

늘 혼자라는 외로움 속에 살았고, 이곳에 와서도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던 방화는 모든 사람들이 따뜻하게 축하해 주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습이었다.

장승표가 텁석부리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같은 날 술이 없을 순 없지. 모두 태화각으로 오시오. 그곳에 근사하게 술상을 봐 놨으니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모두들 떠들썩하게 웃으며 태화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과연 여러 종류의 음식들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었다.

비록 산해진미(山海珍味)는 아니지만 장승표가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들답게 하나같이 입에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중인들은 마음껏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었으나, 의외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장승표와 갈 노인뿐이었다.

장승표는 가장 친한 동중산에게 몇 번이나 술을 권했으나, 동중산은 웃으면서 점잖게 사양을 했다.

몇 번이나 이런 일이 계속되자 눈치가 둔한 장승표도 종남파 사람들의 심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초가보와의 본격적인 싸움을 앞둔 종남파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도 모두들 하나같이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즐거운 척 웃고 떠든다 해도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돌멩이를 매단 듯 심정이 복잡하니 잔치를 즐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초가보가 언제 또 사람을 보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 아닌가? 당연히 술을 마시는 것은 은연중에 금기(禁忌)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위 상황이 이러니 장승표 또한 술맛이 날 리가 없었다. 결국 엄청나게 준비한 술통 중 겨우 한 통을 간신히 비우고는 장승표도 술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야겠다.”

장승표가 혼잣말치고는 지나치게 크고, 그렇다고 떠든 것치고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중산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쉬워도 조금만 참게. 내가 몸이 다 나으면 자네 뱃속의 술벌레들이 모두 만족할 때까지 상대해 주겠네.”

장승표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제발 그래 주게. 이곳에 와서 마음껏 술을 먹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네.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이네.”

옆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갈 노인이 냉소를 날렸다.

“세상에 술 안 먹어 명이 줄어들었다는 놈은 보다보다 처음 보겠군. 네놈처럼 술을 밝히다가는 환갑 전에 염라대왕과 면담을 하게 될 거다.”

장승표는 정색을 한다.

“그건 갈 노인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저같이 술을 마셔야만 사는 보람도 느끼고 수명도 연장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주불사(斗酒不死)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 밥통 같은 놈아, 불사(不死)가 아니라 불사(不辭)다. 제발 알고나 지껄여라.”

갈 노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었으나 장승표는 여전히 떳떳한 표정이었다.

“말술을 사양하지 않으나(斗酒不辭), 말술 먹고 죽지 않으나(斗酒不死)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무튼 저는 술 마시는 세월만큼 수명이 늘어난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갈 노인은 더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가 네놈과 더 이야기했다가는 속이 터져 죽겠다.”

“속이 터질 때는 술을 드시는 것이…”

아마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갈 노인의 주먹이 장승표의 텁석부리 얼굴을 가격했을지도 몰랐다.

“어떤 놈이 쥐새끼처럼 숨어서 훔쳐보는 거냐?”

전풍개가 노호성을 지르며 앞에 있던 술잔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그가 던진 술잔은 무서운 속도로 천장의 한쪽 귀퉁이로 날아갔다.

팍!

술잔이 서까래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그 파편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대청 안으로 뛰어내렸다.

“오해요, 오해! 나는 적(敵)이 아니오!”

서까래 위에서 뛰어내린 인영은 황급히 소리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흑의중년인이었는데, 얼굴이 길고 턱에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어 제법 청수해 보였다.

하나 두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연신 사방으로 굴리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경망스러워 보여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인상이었다.

전흠이 검을 들고 그의 앞으로 뛰어나왔다.

“당신은 누구요?”

흑의중년인은 전흠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하자 당황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나… 나는 진 장문인을 만나러…”

그러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했다.

“아! 진 장문인, 나요. 진 장문인이 지시한 일을 완수하고 이제 막 도착한 참이오.”

전흠은 흑의중년인이 진산월을 향해 아는 척을 하자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이자의 말이 사실이오?”

진산월은 흑의중년인이 이씨세가의 제심전에서 구출한 상로객 지일환임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전흠은 지일환의 위아래를 쓸어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지일환의 외모는 제법 그럴듯했으나, 뛰어난 무공을 지닌 것 같지도 않고 그리 호감 가는 인상도 아니었다.

‘아무리 보아도 별볼일 없는 자 같은데, 어디서 이런 자들만 끌어들이는 거야?’

지일환은 전흠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재빠르게 진산월에게로 다가갔다.

“진 장문인을 찾아서 이곳에 오기는 했는데, 진 장문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한참을 찾았소. 그러다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혹시 진 장문인이 있나 하여 들어왔는데…”

“그런데 왜 정문으로 떳떳하게 들어오지 않았소?”

지일환의 얼굴에 계면쩍은 웃음이 떠올랐다.

“하하… 아무래도 습관이 되다 보니… 사람들이 예상보다 너무 많아서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소.”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전흠이 보다 못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아니, 습관이라니? 직업이 도둑이라도 되는 거요?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대들보 위로 숨어들다니 별 이상한 습관도 다 보겠구려.”

지일환은 계속 웃기만 했다. 전흠의 말은 정확한 사실이니 그로서는 달리 할 말도 없을 것이다. 지일환이 부인하지 않고 웃고만 있자 전흠은 수상쩍은 눈으로 지일환을 쏘아보았다.

‘이거 진짜 도둑놈 아냐?’

다행히 그때 진산월이 지일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갔던 일은 잘 되었소?”

지일환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진 장문인의 지시를 어기지 않을 수 있었소.”

이어 그는 품속에서 몇 장의 문서를 꺼내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소지산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산월은 문서를 훑어보더니 소지산에게 내밀었다.

“직접 보아라.”

문서를 살펴본 소지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건 대왕루의 권리문서로군요.”

“그렇다. 초가보가 우리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갔으니 이제 되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대왕루를 비롯한 네 개의 주루는 종남파의 유일한 자금원이었다. 하나 육 개월 전 초가보의 공격으로 종남파가 풍비박산 되었을 때, 초가보는 그 틈을 노려 네 개의 주루를 강점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종남파는 그야말로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살림살이가 형편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 주루들을 힘으로 되찾자니 본산을 지키기도 힘든 형편에 그 주루를 지킬 인원이 없으니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지일환을 시켜 대왕루의 권리문서를 훔쳐오게 했던 것이다. 일단 권리문서만 있으면 나중에 여력이 되었을 때 언제든지 대왕루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알고 난 중인들의 표정은 제각기로 달랐다. 전풍개와 전흠은 당당한 명문정파의 장문인이 도둑질을 시켰다는 것이 못마땅한 모습이었고, 방취아와 장승표는 강탈당한 것을 훔쳐왔다는 것이 통쾌한지 연신 킬킬거리고 있었다. 동중산은 지일환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고, 추성은 그때 진산월이 지일환에게 보낸 전음이 그것이었구나 하고 신기해하고 있었다.

소지산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일처리 방식은 예전의 진산월이 즐겨 사용하던 것이었다. 무리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손해 보지 않는 것이 진산월만의 방식이었다.

삼 년 만에 돌아온 진산월은 비단 얼굴뿐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와 일을 처리하는 방식까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리해서라도 일을 강행했으며, 때로는 정면충돌도 주저하지 않았고, 일단 손을 쓰면 사정을 보지 않았다.

소지산은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예전의 느긋한 여유를 지녔던 진산월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예전의 진산월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묘한 감회로 들끓었다.

‘이제 장문사형도 강유(剛柔)를 겸비한 인물이 되었구나.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하기 마련인데 내가 너무 앞질러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지.’

소지산은 왠지 가슴이 시큰해졌다. 몇 년 전의 어느 날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중원행을 코앞에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웃고 떠들었던 시간들…

그날 밤 그날의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비록 무공도 보잘것없었고 인원도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당시의 웃음소리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의 장문사형은 그렇게 밝게 웃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행복했던 시절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소지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다. 장문사형이 웃음을 되찾는 날, 그때의 행복도 다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소지산은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부지게 잡으며 자신의 왼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손에는 두 개의 호두알이 쥐어져 있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그 호두알들이 마찰되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왼팔의 촉감인가? 지금 당장은 이 촉감을 되찾기 위해 보낸 고통의 시간들을 소지산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호두알을 깰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나 지금은 이 촉감을 좀 더 느껴 보고 싶었다. 소지산은 내일부터 검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강북삼보의 두 번째 회동은 첫 번째 회동과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하나 참석한 사람은 전과 같지 않았다.

전에는 각기 여섯 명씩의 고수들이 참석했으나, 오늘 모임에는 두 명씩뿐이었다.

검보에서는 보주인 서문장천과 소일서생 사공언이 참석했으며, 삼월보에서는 세 명의 보주 중 첫째인 금월 선초와 둘째인 은월 맹동야가 나왔다. 그리고 초가보에서는 무영신군 초관이 악종기를 대동하고 자리하고 있었다.

인원은 당시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참석자의 신분이나 무게는 전혀 못하지 않아서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오늘 회동을 주창한 사람은 서문장천이었다. 그래서인지 중인들의 시선은 서문장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문장천은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삼보회동을 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나갔소. 그런데 당초 계획과는 달리 회동 이후의 진행이 너무 지지부진하여 그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이차 회동을 제안하게 된 거요.

아닌게 아니라 거창하게 시작한 삼보회동 이후 별다른 사태의 진전이 없어서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처음의 예상대로라면 서안 일대의 세력을 장악하여 화산파를 압박하면서 그들과 본격적인 대결 구도가 벌어져야 하건만, 지금의 상황은 삼보회동을 하기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서문장천의 시선이 천천히 초가보주인 초관에게로 향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아무래도 초가보의 책임이 제일 큰 것 같소. 서안 일대를 세력권에 넣겠다는 당초 약속과는 달리 오히려 상당수의 문파들이 화산파와 결맹하고 있는 실정이오. 그 점에 대해서 초보주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은근한 질책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건만 초관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매달았다.

“서문 보주의 말씀은 잘 들었소. 확실히 요즘 본보에서 추진하고 있는 세력 규합이 지지부진한 것은 사실이오. 유화상단과 대응표국을 비롯해 서안 일대의 유력한 문파 일곱 개가 이미 화산파와 결맹하였거나 결맹 직전에 있소.”

말과는 달리 초관의 얼굴에는 조금도 긴장이나 불안감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삼월보의 둘째 보주이자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은월 맹동야가 불만에 가득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의 계획이 초장부터 어긋나게 된 것이 아니요?”

“다행히 최근에 한곳에서 우리와 손을 잡기로 했소.”

“화산파와 결맹한 곳이 일곱 군데라면서 겨우 한곳이란 말이오?”

맹동야는 계속 쏘아붙였으니 초관은 여유 있는 미소를 흘렸다.

“그곳만 우리를 도와준다면 서안의 모든 문파들이 화산파를 지지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승산(勝算)이 있소.”

이제는 성질이 급한 맹동야도 초관에게 무언가 한 수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곳이 어디요?”

초관의 대답은 중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이씨세가요.”

맹동야는 물론이고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던 서문장천 또한 안색이 조금 변했다.

“이세적이 결심을 굳혔단 말이오?”

“그렇소. 이달 보름에 이씨세가에서 정식으로 결맹식(結盟式)을 갖기로 했소.”

이씨세가는 단순히 일개 세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안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이었으며, 종남파가 힘을 잃은 뒤로는 명실상부한 서안의 제일가는 세력이었다.

초관의 말마따나 서안의 모든 문파가 합세해도 이씨세가에 견줄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나선다면 화산파와 강북삼보의 팽팽한 세력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화산파와 초가보는 모두 이세적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했는데, 최근에 이세적이 초가보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초관을 질책하던 장내의 분위기가 완연히 바뀌어 모두들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에 바빴다.

“하하… 정말 초보주의 사람을 섭외하는 실력은 알아줘야겠소. 진심으로 감복하오.”

맹동야가 언제 인상을 찡그렸느냐는 듯 활짝 웃으며 말하자 초관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악종기를 가리켰다.

“이번의 일은 모두 여기 있는 악 총관의 공(功)이오, 악 총관이 직접 이세적을 찾아가서 담판을 짓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중인들의 시선이 악종기에게로 향했다. 악종기는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 중인들이 자신을 주목하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이세적도 본파와 화산파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화산파에서 사람이 오기 전에 제가 먼저 찾아간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씨세가를 방문한 다음 날, 화산파의 장로인 담로검(曇爐劍) 매장원(梅長原)이 이씨세가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이제껏 말이 없던 금월 선초가 피식 웃었다.

“용진산이 어지간히 애가 탔던 모양이군. 자신이 가장 아끼는 둘째 사제를 보내다니… 아무튼 시의 적절하게 이세적을 찾아간 악 총관의 노고가 컸소. 단순히 운으로 돌릴 일만은 아니지.”

담로검 매장원은 화산파의 십대장로에 속해 있지도 않았고 평상시에는 화산파 밖으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명성은 다른 화산파 장로들에 비해서 뒤처지지만 본신의 실력은 능히 첫째 둘째를 다툰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용진산과 같은 사부를 둔 사제로, 용진산의 신임이 무척 두터워 화산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수뇌 중 한 사람이었다.

초가보가 이씨세가를 회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장내의 분위기는 급격히 밝아져서 나머지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언제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화산파를 압박할 것인지, 그리고 세력 확장이 끝나면 어떤 식으로 화산파를 충동질하여 그들과 자웅(雌雄)을 겨루게 될 것인지를 심도 깊게 상의했다.

회의가 끝날 즈음, 서문장천이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요즘 초가보에 외환(外患)이 하나 있다고 들었소. 이번 일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그런 외환은 미리 제거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소?”

초관은 서문장천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 문제 때문에 그도 적지 않게 골머리를 앓고 있는 터였다. 하나 그 점을 내색할 수는 없어서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서문 보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도 종남파에 대한 처리 같은데,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서문장천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들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오?”

초관은 담담하게 웃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몇 년간 잠적해 있더니 제법 놀라운 무공을 익혀서 돌아온 모양이오. 그들 외에 과거에 종남을 떠났던 몇몇 인물들이 가세하여 세(勢)를 불리고 있으나, 그 인원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소.”

종남파의 이야기가 나오자 제법 관심을 기울이던 삼월보의 두 보주는 그들의 인원이 열 명도 되지 않는다는 말에 이내 흥미가 사라지는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서문장천과 사공언은 초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초관의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어서 아무런 걱정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 인원으로는 본보에 별다른 위험이 되지 않소. 그래도 본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씨세가와 결맹식을 하기 전에 후환을 완전히 제거해 놓기로 결정했소.”

서문장천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가능하겠소?”

초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가능한지는 두고 보면 알 거요. 종남파의 뿌리가 아무리 깊다 해도 이번에는 단 하나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고 모두 뽑아 버릴 생각이오.”

초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도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달 보름 이후로 강호무림에서는 두 번 다시 종남파라는 이름을 들을 수 없게 될 거라는 말이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회동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서문장천은 언제나처럼 사공언의 의견을 물었다. 사공언은 회의장을 나올 때부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서문장천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이씨세가와의 결맹식 말입니까?”

“그거야 초관의 말대로 진행되겠지. 초관이 그런 일로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럼 종남파 말씀이군요.”

서문장천은 매처럼 날카로운 얼굴을 가만히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종남파라는 이름이 자꾸 신경이 쓰인단 말일세. 소문에 들으니 그들의 장문인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검의 귀재(鬼才)라고 하더군. 상아는 그자의 손에서 귀면상을 보았다고 했네. 그 정도 고수가 속한 문파를 과연 초가보에서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사공언은 두 눈을 별빛처럼 반짝였다.

“저도 종남파가 호락호락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일전에 종남파를 찾아갔을 때 보았던 자들은 결코 만만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장문인 또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소문만 들어도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알 수 있겠더군요.”

“그렇다면 이달 보름까지 종남파를 제거하겠다는 초관의 말은 허풍이란 말인가?”

“그 반대입니다. 저는 종남파가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초관의 말대로 그들이 뿌리째 뽑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문장천은 사공언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사공언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종남파가 초가보의 공격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초관이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전력을 기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초관도 이대로 그들을 놔두어서는 삼보회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남파를 뒤에 남겨 두고 화산파와 정면 승부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요.”

“…!”

“그래서 이번에는 초관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초가보의 모든 힘을 기울여 그들을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종남파의 고수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수백(數百) 대 십(十)의 대결은 어느 한 개인의 능력으로 승부를 바꿀 수 없는 수치입니다.”

서문장천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것이 사공언의 말에 대한 반박 때문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공언은 가만히 그가 상념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서문장천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초가보의 세력은 어느 정도인가? 그동안 종남파를 공격하다가 적지 않은 인원의 손실을 보았다고 하던데…”

“최근에 몇 번 실패를 보는 바람에 제법 많은 고수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초가보 전력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짜 무서운 고수들은 세간(世間)에 알려진 사패나 팔수(八獸) 따위가 아닙니다. 초관의 친위대인 수신대(修身隊)와 초관의 사문(師門) 어른인 네 명의 노괴물들, 세 명의 공봉, 그리고 몇 명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후원의 깊숙한 곳에서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조용히 머물고 있는 빈객(賓客)들이 초가보의 진정한 힘입니다.”

“아직도 그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삼대공봉만 해도 한곳에 머물기를 싫어하고 성질이 괴팍한 괴걸들로 알려진 인물들이고, 후원에 머물고 있는 빈객들 중에는 실력을 추측하기 힘든 고수들이 즐비하게 있는 실정입니다. 초관이 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고수들을 포섭했는지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면 그 정도 세력은 쌓아야겠지. 초관의 사문은 어디인가?”

“천룡문(天龍門)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문파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서문장천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천룡문이라? 강호에 그런 문파가 있던가?”

“사문의 어른이라는 네 명의 노인을 멀리서 힐끗 본 적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기도가 범상치 않고 절정의 공력을 지닌 무서운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문파임이 분명합니다.”

“흠, 아무튼 결론은 종남파가 절대로 초가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격렬하게 저항은 하겠지만 결국은 초가보에 멸문(滅門)을 당할 겁니다.”

사공언은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고, 이번에는 서문장천도 그의 의견에 수긍을 했다.

“종남파라… 귀면상을 지녔다는 그 젊은 장문인은 꼭 한번 만나서 솜씨를 보고 싶었는데 그럴 일은 없겠군. 아쉬운 일이야.”

그날 저녁, 서문장천이 자기 방에서 쉬고 있을 때 위소룡이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위소룡의 보고를 들은 서문장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간신히 찾아 놓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서문연상이 또다시 실종되었던 것이다. 위소룡은 서문연상의 방에서 찾아낸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 종이를 읽은 서문장천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두 눈에 무시무시한 광망을 번뜩였다.

“아무래도 인연이 아주 없는 건 아닌 것 같군. 의도하지 않은 일이 저절로 그쪽으로 굴러가니 말이야.”

그가 움켜쥔 종이에는 여인 특유의 곱고 단정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 저는 종남파에서 꿈을 보았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 꿈을 쫓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아끼신다면 제 결심을 존중해 주세요.

불효녀(不孝女) 연상(燕裳) 올림. >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