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7화
제129장. 검풍혈영(劍風血影)
야심한 밤이었다. 오늘도 진산월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심사(心思)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직도 오지 못한 사제들 생각에 가슴이 아팠고, 문파의 흥망(興亡)을 건 초가보와의 싸움을 어떤 식으로 끌어가야 할지 암담한 심정이었다. 가야 할 길은 정말 멀고도 험한데, 그에게 주어진 것은 너무도 적고 보잘것 없었다.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초가보와 종남파의 인원 숫자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수십 배가 넘었다. 그 현격한 인원의 차이를 대체 무엇으로 감당한단 말인가? 그가 이런저런 상념에 휩싸여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휘익-!
갑자기 어디선가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휘파람 소리는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진산월은 한차례 몸을 떨었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귀를 후벼파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육합전성(六合傳聲)을 이음상인(以音傷人)의 경지까지 익힌 사람이 있다니…’
진산월은 무거운 표정으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음상인이란 음공(音功)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경지를 말한다. 단순히 소리에 공력을 실었다고 해서 이음상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까지라도 정확히 원하는 대상에게 음공을 보내 살상시킬 수 있어야만 비로소 이음상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깊은 밤에 난데없이 나타나서 이음상인을 펼친 사람이 종남파에 호의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과연 진산월이 의복을 갖춰 입기도 전에 다시 육합전성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싸늘한 냉소였다.
“흐흐흐…”
진산월은 귀에 상당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한쪽에 걸어 둔 용영검을 풀어 허리에 찼다. 찾아온 자가 누구이든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단지 이제 막 움을 트기 시작한 종남파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진산월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조양봉(朝陽峯)으로 와라.”
진산월이 태평각을 빠져 나올 때까지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는 쓸데없이 주위를 경동(驚動)시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양봉은 종남산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였다. 종남산에서도 가장 먼저 일출(日出)을 볼 수 있기에 조양봉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종남파 사람들은 동봉(東峯)이라고 불렀다. 진산월이 동봉으로 올라간 것은 불과 일각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초승달이 희미한 월광(月光)을 뿌리는 가운데 조양봉 일대는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조양봉 정상은 나무가 거의 없고 기암괴석만이 가득했다. 그 조양봉의 정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하나의 인영이 우뚝 선 채로 올라오는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구가 무척이나 우람한 흑의인이었다. 키는 진산월보다 조금 작은 듯했으나 덩치는 두 배 가까이나 되었고, 두 팔이 유달리 길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성성이를 보는 것 같았다. 산발한 머리를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어서 나이는 정확히 몇 살이나 되었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휘잉!
한차례 밤바람이 불어와 산발한 머리를 흩날리자 머리카락 사이로 맹수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두 개의 안광이 드러났다. 그 눈빛은 진산월도 처음 본다 싶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흑의인은 진산월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미동도 않고 있더니 그가 봉우리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음산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 혼자 오다니 과연 듣던 대로 배짱 하나는 두둑하구나.”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굉량한 힘을 담고 있어서 간이 약한 사람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진산월은 가만히 흑의인을 살피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초면인 것 같은데 나를 아시오?”
“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다 죽어 가는 종남파에 제법 쓸 만한 장문인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나를 그렇게 봐준다니 고맙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이 밤에 나를 찾아온 거요?”
흑의인은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눈빛이 한층 더 무섭게 번뜩였다.
“흐흐… 노부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으냐?”
흑의인의 음성이나 언뜻 드러난 얼굴은 잘해야 중년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실제 나이는 한참 더 많은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흑의인의 정체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흑의인은 진산월의 의중을 짐작한 듯 괴소를 흘렸다.
“쓸데없이 잔머리 굴릴 필요는 없다. 노부가 누구인지는 잠시 후에 알게 될 테니까. 노부가 야심한 시간에 종남산까지 올라온 것은 네게 알아볼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흑의인의 목적이 종남파가 아닌 자신임을 알고는 의혹과 안도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괴인이 자신을 찾은 목적이 궁금했고, 최악의 경우에라도 종남파에는 해(害)를 끼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시오.”
흑의인의 번갯불 같은 안광이 진산월의 얼굴에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너는 운자추를 알고 있겠지?”
진산월은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운자추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나빴다. 초가보와의 격전이 코앞에 와 있는 지금 자칫하면 감당하기 힘든 강적을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진산월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몇 년 전에 그를 본 기억이 나는군.”
흑의인은 진산월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 아이는 너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일에 실패한 후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삼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
“…. ”
“노부는 그 아이의 실종에 대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떠한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하나 단 한 가지, 그 아이의 실종에 네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거라는 심중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너 또한 어디론가로 사라벼 버려 노부로서도 더 이상 알아볼 곳을 찾지 못했다.”
흑의인의 시선은 갈수록 무섭게 빛나고 있는데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에 네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노부는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숙원(宿願)을 해결할 길이 보이게 되었음을 알고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이제 네게 묻겠다.”
흑의인은 한자 한자 분명한 음성으로 물었다.
“운자추의 실종은 너와 관련이 있느냐?”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되물었다.
“귀하는 운자추와 어떤 사이요?”
“운자추는 내게는 제자뻘 되는 아이다. 아니, 제자라기보다는 아들과 같다고 해야 옳겠지. 이십 년 가까이 은거해 있던 노부가 다시 강호로 돌아오게 된 것도 모두 그 아이 때문이다.”
흑의인의 말을 듣자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 악자화에게서 그와 같은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지 않았는가?
“귀하의 성은 혹시 오(吳)씨가 아니오?”
흑의인은 묵묵히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구나. 노부가 바로 오욕백이다.”
진산월은 그러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흑의인이 오욕백 본인임을 알자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운자추 일로 자신을 찾아올 사람으로는 최악의 상대가 온 것이다.
혈수존자 오욕백은 이미 삼십 년 전에 천하무림을 풍미했던 일세의 고수였다. 그의 혈라인은 마도의 십팔대장공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으로, 당년에 오욕백이 혈라인을 휘두르면 아무도 감히 정면으로 받아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 핏빛 장공에 격중되면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해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고 했다.
오욕백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육십이 훨씬 넘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강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거마(巨魔)를 눈앞에 두게 되니 진산월은 오히려 담담한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닥쳐올 일일 뿐이었다. 오히려 삼년의 시간이 주어진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오욕백이 삼년 전에 바로 종남파로 찾아왔다면 어쩌면 종남파는 진작에 멸문(滅門)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막상 진산월이 순순히 시인을 하자 오욕백은 움찔하더니 돌연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죽었겠지?”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욕백은 다시 물었다.
“네가 죽였느냐?”
“그렇소.”
“왜 그를 죽였느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제거하려 하고, 나도 그의 손에 죽기는 싫었으니 어차피 둘 중 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이었소.”
“네 실력은 그보다 훨씬 떨어졌을 텐데 무슨 수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느냐?”
“그는 나를 너무 만만히 보았소.”
오욕백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시선을 내려 진산월을 쳐다보았을 때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점차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일전에 심옥당이 네게 낭패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노부는 심옥당의 경솔함을 비웃었었지. 그런데 이제는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까지 네 손에 죽었구나. 너와 나는 아무래도 질긴 악연(惡緣)이 있는 듯하다.”
그의 흑의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며 폭풍 같은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 나와 사방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이제 그 악연도 끝내야겠다. 너를 죽인다고 자추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자추의 넋을 위로해 주어야겠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벼락 같은 섬광이 피어올랐다. 진산월은 황급히 옆으로 이 장 움직였다.
꽝!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부서진 돌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놀랍게도 오욕백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는데 그의 손에서 뇌전(雷電)과도 같은 강기가 폭사해 나왔던 것이다. 진산월의 동작이 조그만 늦었다면 영문도 모르고 그 가공할 강기에 정면으로 가격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욕백은 진산월이 피할 것을 짐작이라도 한 듯 허깨비처럼 신형을 날려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진산월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막강한 압력이 자신의 전신을 짓누르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쪽으로 피하든 그 압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진산월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태진강기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꽈앙!
세찬 경기가 주위를 폐허로 만들었다. 진산월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반면에 오욕백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진산월이 조금 손해를 본 상황이었으나, 위에서 아래로 공격을 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몰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욕백은 진산월이 자신의 일장을 받아낸 것이 뜻밖인 듯 무시무시한 안광을 번뜩이며 음산하게 말했다.
“네 나이에 이 정도 내공이라면 능히 강호를 주름잡을 수 있다. 하지만 하필이면 노부를 만났으니 네 운도 결코 좋지 못하구나.”
오욕백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오른손을 들어올리더니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고오오…
마치 주위가 진공(眞空)으로 변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오욕백의 장공은 가공할 위력을 담고 있었다. 진산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오욕백의 장공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용영검이 우윳빛 검광을 뿌리고 있었다.
팟! 팟!
몇 줄기의 섬광이 가공할 장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번뜩였다.
“엇?”
오욕백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이 펼친 가공할 마운장력(摩雲掌力)이 진산월의 검에 너무도 수월하게 뚫리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이놈이 내공뿐 아니라 검법도 대단하구나. 자칫하면 의외의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는걸.’
그의 마운장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듯했으나, 사실은 여러 겹의 장력이 겹쳐지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무공이었다. 겹겹이 다가오는 장력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갇힌 사람은 그 중압감에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진산월은 지금 너무도 쉽게 마운장의 장력을 돌파해 버린 것이다.
오욕백의 산발한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치며 그의 몸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움직이자 그의 신형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허공에는 온통 희끗한 흑영(黑影)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에 따라 진산월의 주위에는 노도와 같은 경기가 휘몰아치고 돌가루가 솟구쳐 올랐다. 너무도 가공할 장력의 위력에 바위들이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천하삼십육검의 절초들을 펼쳐 정면으로 오욕백의 공세에 맞서 갔다.
파파파팍!
조양봉 정상은 삽시간에 비산(飛散)하는 바위의 파편들과 장풍, 검광에 휩싸여 버렸다. 흐릿한 월광이 장내를 비추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결은 순식간에 십여 초가 지나갔다. 그동안 누구도 결정적인 우세는 점하지 못했다.
오욕백의 마운장은 확실히 위력적이어서 진산월은 천하삼십육검의 검초들을 전개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수십 겹의 거미줄에 친친 동여매어진 듯 자유롭게 몸을 운신(運身)하기가 수월치 않은 것이다.
오욕백은 오욕백대로 거듭 놀라고 있었다. 그의 마운장 공력은 장력 한 가닥 한 가닥이 강기(?氣)로 뭉쳐진 것이어서 어지가낳나 도검(刀劍)은 닿기만 해도 박살이 나버리거늘, 진산월의 검은 한번에 그런 강기 가닥을 대여섯 줄기씩이나 자르고 들어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검초가 어찌나 쾌활하고 예리하게 변하던지 조금만 방심해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몰랐다.
주위는 이미 그들이 뿜어내는 장공과 검광으로 폐허처럼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다 갑자기 오욕백이 맹렬하게 일장(一掌)을 내갈기고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노부가 너를 잘못 보았다. 종남파에 너와 같은 검객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느릿느릿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올라가는 그의 오른손에서 갑자기 붉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아지랑이 같은 붉은 연기가 그의 손을 감싼 채 흐트러지지 않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해 보였다. 하나 그 광경을 본 진산월의 표정은 침중하리 만치 무거워졌다. 그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바로 무형(無形)의 강기가 유형화(有形化) 된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오욕백의 손은 어느새 불그스름한 연기에 완전히 휩싸여져 마치 시뻘건 물감을 들인 듯했다. 드디어 그가 절세무적의 혈라인 공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오욕백은 혈수(血手)로 변한 오른손을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오욕백의 오른손에 있던 붉은 색 연기가 어느 사이에 기척도 없이 진산월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 연기가 날아드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마치 오욕백의 손에서 진산월의 가슴까지 일직선으로 붉은색 선이 그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팍!
무언가 부드러운 솜망치가 모래사장에 닿는 듯한 미약한 음향과 함께 진산월의 몸이 훌훌 날아갔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든 혈라인 장력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가격당한 것이다.
진산월의 몸은 거의 오 장이나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다.
한데 이상한 것은 오욕백의 행동이었다.
의당 진산월이 혈라인을 피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거늘,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진산월이 날아간 곳으로 신형을 날려 벼락같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스으으…
다시 그의 오른손이 움직이며 두 개의 혈선(血線)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진산월에게로 날아갔다.
두 줄기 혈라인이 진산월의 몸을 가격하려는 순간, 진산월의 신형이 한차례 꿈틀거리더니 미끄러지듯 옆으로 이동했다.
파악!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방금 전까지 진산월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 두 개의 장인이 선명하게 찍혔다.
조양봉의 정상 부근은 온통 암반(巖盤) 투성이여서 진산월이 있던 곳도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바위에 다섯 치나 되는 장인이 찍힌 것이다.
그 장인이 사람의 몸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실로 모골이 송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옆으로 이 장 날아간 진산월은 유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공격은 피했다고 해도 그 전에 분명히 혈라인을 정통으로 가격 당했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전혀 부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손은 퉁퉁 부어 있었다.
조금 전에 오욕백이 혈라인을 펼쳤을 때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왼손으로 맞받아쳤던 것이다.
하나 혈라인의 위력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고 오 장이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가슴에 혈라인이 찍히는 참변은 면했으나, 왼손에 심각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대천장에 태진강기를 섞는 정도로는 혈라인을 감당하지 못하는군.’
진산월은 자신이 익힌 장공 중 가장 강한 위력을 가진 대천장으로 혈라인을 당해낼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종남파의 장공 중 최고의 위력을 지닌 것은 태인장(太印掌)이었다.
하나 태인장은 종남오선이 사라진 후 절전(絶傳)되어 지금은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기록에는 태인장을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능히 강호무림의 최고 장공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다고 했는데, 그 아까운 절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태인장 외에 옥뢰신장(玉雷神掌)과 난화지(蘭花指) 같은 절예들도 종남오선의 실종과 함께 모두 맥이 끊기고 말았다.
지금 종남파에 남아 있는 장공들은 약류장과 대천장, 그리고 진산월이 뒤늦게 입수한 천둔장법 정도였다.
그중에서 그나마 대천장의 위력이 가장 강해서 진산월은 태진강기와 함께 즐겨 사용하고는 했었다.
하나 그 진정한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해 오늘 위험을 무릅쓰고 혈라인과 정면으로 맞서 보았는데, 아쉽게도 혈라인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오욕백 정도의 고수와 상대하려면 검법을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진산월의 왼손은 시시각각으로 부어올랐다.
하나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오욕백을 응시하며 천천히 용영검을 들어 올렸다.
그 광경을 본 오욕백의 표정에 처음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산월의 기세가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단순히 검을 중단(中段)으로 들어올리기만 했는데도 진산월의 전신에서는 질식할 것 같은 검기(劍氣)가 솟구쳐 올랐다.
‘이 정도라니… 나이를 생각한다면 정말 믿기 힘든 일이로다.’
오욕백의 안광에 붉은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오욕백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자신의 혈령신공(血靈神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오욕백이 혈령신공과 혈라인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삼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삼십 년 전에 오욕백은 생애 최대의 강적을 만나서 이 두 가지 무공을 사용했고, 결국은 패퇴하여 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 지난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의 혈령신공과 혈라인에 대한 경지는 당시보다 훨씬 진척된 상태였다.
혈령신공을 끌어올림에 따라 그의 오른손에 머물러 있던 붉은빛 연기가 점차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해도 피에 젖은 듯 시뻘겋던 손의 색깔도 조금씩 원래대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그의 공력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혈라인이 극(極)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커다란 소리는 차라리 들리지 않는 것처럼 혈라인이 극성에 다다르자 붉은색 강기가 엷어지고 있는 것이다.
혈령신공과 혈라인을 최고로 끌어올리자 오욕백은 천하의 누구와 싸워도 두렵지 않은 심정이 되었다.
“이놈! 오너라!”
그의 입에서 자신에 찬 함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진산월의 신형이 허공을 육박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그에 맞서 오욕백은 오른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파파팍!
세찬 경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가운데 진산월은 자신의 앞가슴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혈라인 장력을 피하지 않고 검으로 맞받아쳤다.
팡!
검과 장공이 마주치면서 나직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진산월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했다.
이를 본 오욕백이 진산월의 앞으로 돌진해 오며 연거푸 삼 장(三掌)을
날렸다.
세 가닥의 혈라인이 진산월의 목덜미와 양쪽 옆구리 부근으로 교차하며 날아들었다. 진산월은 손에 든 용영검을 흔들었다. 그러자 정면에서 날아오던 혈라인이 그대로 와해되었다. 하나 다른 두 가닥의 혈라인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진산월의 양쪽 옆구리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그 순간, 진산월의 신형이 휘청이더니 두 혈라인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 나왔다.
“흡!”
오욕백은 진산월의 신묘한 몸놀림에 당혹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때 진산월의 검이 움직이며 무수한 검영(劍影)이 폭포수처럼 피어올랐다. 주위 사방이 온통 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오욕백은 안색이 변한 채 사력을 다해 혈라인을 다섯 번이나 내갈겼다. 하나 그가 발출한 혈라인들은 끝도 보이지 않는 검의 그림자에 휘감겨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환상(幻想)이다!’
오욕백은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름에 휘감긴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무수히 피어오르는 구름 사이로 수백 개의 검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크윽!”
짤막한 신음과 함께 오욕백의 신형이 뒤로 주르르 밀려나더니 돌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과 함께 그의 신형은 허공을 날아 어둠 속으로 치달려 갔다. 순식간에 그의 거대한 몸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는 점점이 뿌려진 핏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하가 경동(驚動)하고 말 것이다. 수십 년간 강호무림에 공포스런 존재로 군림했던 혈수존자 오욕백이 십여 초를 버티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천천히 검을 거두며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왼손은 처음보다 두 배는 더 커져 있었고 푸르뎅뎅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 흉측해 보였다. 오른손은 멀쩡했으나 자세히 보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혈라인을 검으로 후려쳤을 때 진산월 또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하나 그는 그 충격을 검기불혈진맥의 수법으로 흐트러뜨리며 유운검법 중의 절초인 운무중첩을 사용해 오욕백을 격퇴시켰던 것이다. 오욕백의 혈라인이 조금만 더 강력했다면 어쩌면 검을 놓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직도 검으로 장력을 상대하는 것이 미흡하군.’
진산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욕백을 꺾었다는 자부심 같은 건 그의 뇌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장력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진산월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뜩이나 기암괴석만이 가득해서 황량하던 조양봉의 정상은 그와 오욕백의 격투의 여파로 그야말로 흉물스러울 정도로 변해 버렸다. 여기저기 부서진 바위들이 널려져 있었고, 사방이 장공과 검기에 스쳐 움푹움푹 파여 있었다. 진산월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크으으… 아직 서른도 안 된 애송이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오욕백은 무서운 속도로 산 아래로 치달려 가면서도 연신 신음 같은 음성을 토해냈다. 그러다 한차례 신형을 휘청거리더니 한바탕의 피를 게워내는 것이었다.
“으웩!”
그는 시커먼 피를 한사발이나 쏟아내고서야 겨우 몸을 멈추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상반신 옷자락은 너덜너덜해져서 맨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드러난 그의 가슴은 종횡(縱橫)으로 그어진 수십 개의 검흔(劍痕)으로 뒤덮여 있어 선혈이 낭자했다. 그 검흔들을 보는 오욕백의 눈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검법이었다. 종남파에 이와 같은 검법이 존재했단 말인가?”
오욕백은 나직하게 진저리를 쳤다. 조금만 동작이 굼떴어도 그는 진산월의 구름 같은 검광에 휩싸인 채 난도질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오욕백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자신이 아들처럼 아끼던 운자추의 복수를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달려왔건만 오히려 상대의 검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말았으니 그로서는 억울하고 비통한 생각에 미칠 지경이었다.
오욕백이 이렇게 회한(悔恨)과 분노로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지 않은 숲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오 사숙(吳師叔)이십니까?”
오욕백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영들을 보고 반색을 했다.
“너희들이구나. 마침 잘 왔다.”
나타난 두 인영은 조화심과 공손도였다. 그들은 오욕백의 낭패스런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욕백은 이를 부드득 갈았으나 그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서둘러 말했다.
“조옥린이 근처에 왔을 텐데 혹시 그를 만나지 않았느냐?”
조화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예. 그렇지 않아도 저희들은 그분의 지시로 오 사숙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느… 헉!”
오욕백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자신에게 다가온 조화심이 그가 입을 여는 사이에 그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한 일장(一掌)을 내갈겼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창졸지간의 일인지라 천하의 오욕백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가격당하고 말았다.
쾅!
“크윽!”
오욕백의 거대한 신형이 휘청거리더니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하나 상황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욕백이 채 신형을 가누기도 전에 어느새 다가온 공손도가 오른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섭선이 오욕백의 옆구리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오욕백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학질 걸린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너… 너희들이 감히… 우와아!”
갑자기 오욕백은 미친 듯한 노호성을 내지르더니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옆구리에 섭선이 꽂힌 채로 오른손을 날려 공손도의 앞가슴을 강타한 것이다. 공손도는 오욕백을 쓰러뜨렸다고 방심하고 있다가 하마터면 그의 손에 가슴뼈가 으스러질 뻔했다. 하나 그는 운이 좋았다. 오욕백의 손이 막 그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숲 속에서 다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와 오욕백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했던 것이다.
쾅!
오욕백의 뒤통수가 함몰되며 그의 눈과 코, 입으로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오욕백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몸을 휘청거리더니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숲 속에서 나와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람은 누더기 같은 장삼을 걸치고 이마에는 노란 두건을 쓴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비록 장한은 볼품없는 모습이었으나, 혈령신공으로 보호된 오욕백의 몸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것으로 보아 일신의 공력이 무척 심후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욕백은 노란 두건의 사나이를 쏘아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누구냐?”
노란 두건의 사나이는 그런 상처를 입고도 쓰러지지 않고 있는 오욕백을 감탄에 찬 눈으로 응시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무인(武人)이오. 내 이름은 등곽(鄧槨)이라 하오.”
오욕백이 입을 열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 나왔다.
“등곽… 서장(西藏) 십이사(十二邪) 중의 철사자(鐵獅子)가 바로 너냐?”
“그렇소.”
오욕백의 신형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점차로 그 흔들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서장의 십이사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너… 너희들은…”
오욕백은 무서운 눈으로 철사자 등곽의 옆에 서 있는 조화심과 공손도를 노려보았다. 하나 그는 이내 격렬하게 몸을 떨더니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거대한 체구가 쓰러지는 모습은 일세를 풍미했던 고수의 죽음답지 않은 허무한 것이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싸늘히 식어 가는 그의 시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시신을 들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