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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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2화


제135장. 구중삼로(九重三路)

악종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악종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들은 개개인이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정고수들이었다. 한 사람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경동(驚動)시킬 수 있었다. 그런 절정곳들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무림인으로서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가장 우측의 인물은 얼굴에 검상(劍傷)이 나 있는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검상 때문에 험상궂어 보였으나 이목구비는 의외로 수려한 편이었다. 중년인의 옆구리에는 허름한 한 자루 도(刀)가 달랑 매어져 있었는데, 얼굴의 검상과 썩 잘 어울려 보였다.

그의 이름은 좌린(左麟)이라 했으며, 초가보에서는 도패(刀覇)라고도 불렀다. 그는 초가사패 중의 일인이었으나,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다른 삼패보다 한 수 위의 고수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자존심 강하고 스스로의 무공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극패 유광조차도 자신이 좌린에게 뒤진다는 것을 시인할 정도였다.

좌린의 옆에는 짙은 남색 장포를 걸친 음산한 눈빛의 노인이 있었다.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남포노인의 두 눈이 번뜩일 때 가끔씩 은은한 혈광(血光)이 내비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남포노인이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마공(魔功) 중 하나인 혈영무극강기(血影無極?氣)를 익혔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혈제(血帝) 구소기(丘?起)라고 하면 오대산(五臺山) 일대에서는 염라대왕보다도 더욱 무서운 인물로 통하고 있었다. 그는 일전에 초가보에 들어왔으며, 초관은 그를 오대호법 중의 한 자리로 임명했다.

구소기의 왼쪽에는 유난히 눈썹이 짙고 체구가 우람한 홍의노인이 앉아 있었다. 홍의노인의 얼굴은 대춧빛으로 붉었고, 턱밑에 나 있는 교룡(蛟龍) 같은 수염 또한 붉은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칼과 눈썹에도 은은한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한때 흥안령(興安嶺)과 대초원 일대를 주름잡았던 벽력천자(霹靂天子) 진염(秦焰)이라는 인물이었다. 진염의 벽력장(霹靂掌)은 강호일절(江湖一絶)로 손색이 없는 가공할 무공이며, 진염은 십여 년 전에 이 벽력장으로 당시 관락(關洛) 지방에서 무서운 명성을 날리던 신마쌍절(神魔雙絶) 두씨 형제(竇氏兄弟)를 격살시켜 강북무림을 뒤흔든 적도 있었다. 진염 또한 구소기와 마찬가지로 초가보의 오대호법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대호법은 섬서성뿐 아니라 강북무림 전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혁혁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초가보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패왕창 전괴와 청효 나월이 죽은 후 그들은 단지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았고, 찬란했던 명성도 조금은 퇴색된 감이 없지 않았다. 하나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개개인이 강호를 진동시키는 절정고수들이었으며, 고수들이 즐비한 초가보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실력자들이었다.

오대호법의 마지막 인물은 의외로 자그마한 몸집에 볼품없는 인상의 초로인(初老人)이었다. 체구가 당당한 진염의 옆에 있어서 더욱 작고 왜소해 보였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양팔이 유난히 길어서 초로인이 그 기다란 팔을 늘어뜨린 채 동그마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늙은 성성이를 연상케 했다. 하나 초로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마환(魔環) 초일산(焦一山). 그는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산서성(山西省)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로 손꼽히고 있었고, 그의 금은쌍환(金銀雙環)은 죽음을 부르는 공포의 병기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다시 다섯 명의 절정고수들이 더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중원에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었으나, 악종기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오대호법보다 오히려 더욱 정중한 면이 있었다. 그들 다섯 명은 모두 초가보의 빈객으로 초빙되어 후원에 기거하고 있었으며, 후원에는 그들 외에도 상당수의 빈객들이 머물러 있었다. 하나 그들 다섯 명이야말로 빈객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나이순으로 각기 곽(郭), 철(鐵), 혁(赫), 염(廉), 탁(卓)의 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곽일(郭一), 철이(鐵二), 혁삼(赫三), 염사(廉四), 탁오(卓五)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곽일은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고, 반대로 가장 젊은 탁오는 서른을 갓 넘긴 젊은이였다.

빈객들 중의 절반은 그들 개개인의 수하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들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래서 악종기가 수뇌들의 모임에 많은 빈객들 중에서 그들 다섯 사람만을 불렀음에도 누구도 그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악종기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홉 명의 고수들을 한 사람씩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이라고 한 것은 내일 있을 일에 대한 최종적인 점검을 하기 위해서요.”

진염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악 총관의 조심성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번에는 너무 심한 게 아니오? 설마 우리들이 모두 참가하는데 무슨 엉뚱한 일이라도 벌어지리라고 생각한단 말이오?”

악종기는 진염의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빙긋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강호에서의 일은 아무리 조심해도 과하지 않은 법이오. 특히 이번 종남파와의 일은 진 대협도 알다시피 우리가 몇 번의 실수를 하는 바람에 상화이 예상보다 악화되었소. 그래서 이번만큼은 만에 하나라도 사소한 착오나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되오.”

“흐흐… 악 총관이 종남파의 애송이 장문인을 얕보았다가 혼쭐이 났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번 일은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싶구려.”

악종기는 은근히 자신을 얕잡아 보는 듯한 그의 말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내가 실수하는 바람에 진 호법에게까지 일감이 돌아가게 되었으니 창피 막심한 일이오. 덕분에 이번에는 깔끔히 정리되리라고 믿고 있소. 아무튼 이번 일은 본보의 인원 중 대부분이 참여하는지라 나중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일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소.”

진염도 더 이상은 악종기를 비하(卑下)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악종기는 비단 초가보의 총관일 뿐 아니라 두뇌가 명석하고 심기가 깊은 인물이었다. 공연히 이런 인물을 놀려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진염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묵묵히 악종기를 주시한 채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종기는 문득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는 바이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화산파와 자웅(雌雄)을 겨루어야 거늘, 내 실수로 사태가 악화되었으니 입이 두 개라도 할말이 없소.”

혈제 구소기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 일이 악 총관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소. 그러니 사태를 깨끗이 매듭지을 생각만 합시다.”

“고맙소. 우선 기본 계획은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종남파 전체에 삼중(三重)의 포위망을 형성해 그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완벽히 봉쇄하는 것이오. 일전에는 우리의 힘만 믿고 포위망을 엉성하게 쌓는 바람에 그들 대부분을 놓치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실수가 재발되지 않게 하겠소. 또한 무작정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우리끼리 혼란을 자초한 감이 없지 않아서 이번에는 철저히 선발된 정예들만을 파견할 생각이오.”

악종기는 중앙의 탁자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종남파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세 갈래요. 하나는 산문(山門)의 입구인 주통로(主通路)이고, 또 하나는 조양봉에서 내려오는 샛길이며, 마지막으로 조금 가파르긴 하지만 뒤쪽 절벽에서 종남파의 조사전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소. 일전에 우리는 주통로와 조양봉의 샛길은 철저히 막았지만 조사전 쪽의 길은 막지 못해서 그곳으로 상당수의 종남파 고수들이 탈출한 적이 있었소.”

악종기는 손가락으로 조사전 쪽의 산길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이곳을 철통같이 지킬 생각이오. 그 일은 세 분 호법께서 수고해 주셔야겠소. 하북십호(河北十虎)를 함께 보낼 테니 그들로 하여금 산길을 봉쇄하게 하고 세 분은 그들 뒤에서 혹시 모를 적들의 탈출기도를 막기 바라겠소.”

하북십호라는 말에 진염이 이외인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들도 이곳에 와 있소?”

“그렇소.”

“하북십호라면 믿음직하군. 그들과 우리 세 명이라면 종남파 고수들 전체가 몰려와도 막아낼 수 있을 거요.”

진염이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짓자 악종기는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 분의 임무는 산길을 봉쇄하여 그들의 탈출로를 막고 후면에서 그들을 압박하는 것이니 그 점을 명심해 주시오. 특히 탈출로를 완벽하게 봉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오. 아마 내 예상으로는 종남파에서 실력이 떨어지는 일부 인물들이 그 산길을 이용해 탈출하려 할 거요. 그때 그들 중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되오.”

진염은 악종기의 거듭된 다짐에 자신들의 실력을 깔보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가슴을 탕탕 치며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했다.

“걱정 마시오. 쥐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겠소.”

악종기의 시선은 이내 초일산에게 향했다.

“초 호법께서 다른 분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악종기가 초일산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두 사람의 호법들과는 조금 틀렸다. 구소기와 진염도 그 사실을 알았으나 감히 불만을 표하지는 못했다. 초일산은 명성이나 나이로 보아 그들 두 사람보다 한 수 위의 인물이었다. 초일산은 단지 고개만 까닥거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악종기는 입이 무겁고 태도가 진중한 그의 평소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조양봉에서 종남파로 내려오는 샛길이었다.

“이 길은 별로 넓지는 않으나 갈래길이 많아서 전체를 봉쇄하기가 마땅치 않소. 그래서 우선 좌 노제가 철영대(鐵英隊)를 이끌고 다소 넓게 포위망을 치며 내려올 거요.”

성격이 꼼꼼한 구소기가 좌린을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좌 노형의 실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좌 노형과 철영대만이라면 절정고수의 수가 너무 적은 게 아니오?”

악종기의 시선이 자신의 뒤로 향했다.

“두 분 공봉께서 함께하실 테니 절대 적은 게 아니오. 사실을 말하자면 이쪽이 곧 우리의 부공(副攻)이오.”

그 말에 중인들이 모두 악종기의 뒤편을 쳐다보았다. 불빛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뒤편 어둠에는 두 명의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두 노인은 초가보의 고수들 중 최고의 실력자들인 삼대공봉 중 두 사람으로, 초가보에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보주인 초관뿐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신편 갈태독과 현음상인 냉구유라고 했으며, 강호에서는 이미 전설과도 같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었다.

갈태독은 한 자루 채찍으로 수십 년간 강북무림을 석권해 온 인물로, 특히 감숙성(甘肅省)에서는 신(神)과도 같은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현음상인 냉구유는 괴이무쌍한 현음강기(玄陰?氣)와 현음신장(玄陰神掌)으로 천하를 놀라게 한 일대괴인이었다. 그는 삼십 년 전에 이미 강북무림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고수 중 하나로 손꼽혔고, 현음곡(玄陰谷)에 기거한 채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느닷없이 초가보의 공봉으로 나타나 세인들을 다시 한 번 경악하게 했다.

갈태독과 현음상인은 중인들의 시선을 받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이 그 자리에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구소기가 이내 악종기를 돌아보았다.

“두 분이 직접 나선다면 그곳이 곧 주공(主攻)이 아니겠소? 그런데도 주공이 따로 있다는 말이오?”

악종기의 입가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우리의 주공은 이곳, 산문으로 향하는 주통로요.”

구소기는 악종기의 자신에 찬 음성에 무언가를 느낀 듯 자신들의 옆에 묵묵히 앉아 있는 다섯 명의 빈객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악종기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저들 다섯 분이 열다섯 명의 빈객들과 함께 정문 쪽을 공격할 거요. 그 정도라면 능히 주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구소기를 비롯한 중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 다섯 명은 말할 것도 없고, 후원에 있는 빈객들 또한 뛰어난 고수들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스무 명이나 공격한다면 어지간한 문파는 그들만으로도 능히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종남파에 비밀통로라도 있어 그들이 도망갈 것에 대비하여 종남파가 있는 산 전체를 보주님 휘하의 수신대(修身隊)로 에워쌀 생각이오. 그들은 공격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오직 산 전체를 포위한 채 산을 빠져나오는 종남파의 인물들만을 소탕하게 될 거요.”

중인들은 새삼 악종기의 치밀한 계획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수신대는 초관을 호위하는 고수들로, 인원수는 비록 삼십 명에 불과했지만 하나같이 무서운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어서 실질적인 초가보의 최정예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 군데의 공격로에 각기 다섯 명의 빈객들과 두 명의 공봉, 세 명의 호법들로 일차 포위망을 만들고, 그들 뒤로 열다섯 명의 빈객과 철영대, 하북십호로 이차 포위망을 쌓은 다음 마지막으로 수신대가 산 전체를 에워싸는 삼차 포위망을 형성하니 가히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철벽의 삼중망(三重網)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인들은 이번에야말로 종남파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완벽하게 멸망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미처 몰랐으나 악종기가 제시한 이 방법은 구중삼로(九重三路)라는 것으로, 세 개의 공격로에 각기 또 다른 세 개의 포위망을 형성하여 상대를 섬멸하는 무서운 진식이었다. 이 진식은 이미 오래 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십면매복(十面埋伏)과 함께 최고의 포위공격진으로 꼽히고 있었다.

문득 구소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수신대는 초 보주를 호위하는 인물들인데, 그들까지 동원한다면 본보는 누가 지킨단 말이오?”

악종기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공봉 중의 한 분이신 천왕도 해 대협을 비롯한 상당수 고수들이 남아 있소. 그리고 보주님의 호위는 보주님 사문의 고수들이 하기로 했으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렇구려. 그런데 듣자하니 종남파의 젊은 장문인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던데 그자는 누가 상대할 거요?”

그 말에 모두들 관심 어린 표정이 되었다. 그들도 요즘 섬서성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희대의 검객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 초가보에서도 적지 않은 고수들이 그의 손에 이미 참변(慘變)을 당했지 않은가? 그의 손에 패한 고수들 중에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무시 못할 실력자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특히 패왕창 전괴와 화산파의 장로인 검군 남사일은 남아있는 세 명의 호법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절세의 고수들이었다.

자존심 강한 구소기조차도 가기 혼자로는 그자와 맞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악종기에게 그를 상대할 자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따로 복안(腹案)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소.”

악종기는 이렇게만 말했으나 구소기를 비롯한 중인들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이번 일의 관건은 그 종남파의 장문인을 어떻게 쓰러뜨리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숨기지만 말고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그자를 상대할 방법이 있소?”

구소기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물어보자 악종기도 무조건 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악종기는 이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비밀이 외부로 새어 나갈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보주님의 사문 어른께서 해결하시기로 했소.”

구소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초 보주의 사문 어른이라면?”

“그렇게만 알고 계시오. 아무튼 종남파의 장문인은 여러분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장문인 외의 다른 자들만 상대할 생각을 하시오.”

성격이 단순한 편인 진염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그러면 이번 일은 그야말로 여반장(如反掌)이겠군. 악 총관은 걱정 말고 내일 근사하게 술상이나 차릴 준비나 하시오. 그래도 한때는 구대문파에 속했던 문파이니 정리한 기념으로 한잔 걸쳐야 하지 않겠소?”

“그거야 이를 말이오?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여러분들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소.”

악종기의 말에 모두들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천봉궁의 인물들이 모두 떠나자 종남파는 다시 고요한 정적(靜寂) 속에 빠져들었다. 장승표만이 저녁 준비로 바쁠 뿐, 모두들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정해와 낙일방이 돌아온 기념으로 조촐한 연회를 열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서문연상이 유달리 활기찬 모습으로 장승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간섭을 하고 있었다.

“이봐요, 털보 아저씨. 홍배웅장(紅?熊掌)도 하자니까요.”

장승표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아가씨야, 지금 어디 가서 곰 발바닥을 구해? 그리고 설사 구한다고 해도 최소한 삼 일은 삶아야 하는데 어느 천 년에 그걸 만드냔 말이야.”

서문연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꿋꿋했다.

“그런가요? 누가 그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나요? 난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는 뜻에서 한 소리라고요.”

“그게 제대로 하자는 거야? 자기가 먹고 싶은 요리니까 만들자고 했으면서.”

서문연상은 배시시 웃었다.

“어머, 알고 있었어요? 그럼 다음에 꼭 만들어 줘야 해요.”

장승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러다 내가 아무래도 제 명에 못살 거 같군. 아예 귀라도 막고 다니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멀쩡한 귀를 왜 막고 다녀요? 그러지 말고 이 요리를 해보는 건 어때요? 양반포어(凉拌鮑魚 : 전복냉채)나 내유어시(?油魚翅 : 상어 지느러미 튀김) 같은 건 간단해서 하기 쉬울 거 같은데…”

장승표의 얼굴이 우거지상으로 구겨졌다. 이런 한겨울에 어디가서 전복이나 상어 지느러미를 구한단 말인가? 그녀가 다시 또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장승표는 아예 귀를 틀어막더니 앞으로 마구 달려나갔다.

“으아아… 못살겠다!”

“이봐요, 털보 아저씨.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그게 싫으면 낙타 요리라든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계속 요리들을 꼽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앞서가니 뒤서거니 달려가는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전흠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파 꼬락서니가 가관이군. 저런 말괄량이를 누가 제자로 받은 거야?”

그때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바로 네놈이 제일 먼저 받자고 하지 않았느냐?”

딱!

“아이쿠!”

전흠은 머리통을 끌어안고 인상을 찡그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전풍개말고 누가 감히 그에게 이런 짓을 하겠는가?

“할아버님, 누가 그런 말을…”

전풍개는 눈을 부릅떴다.

“노부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모르는 줄 아느냐? 저 계집아이가 노부에게 와서는 똑똑한 손자를 둬서 얼마나 좋으냐고 입에 침을 튀기며 떠들어 대더구나.”

전흠은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그 약아빠진 계집애가 벌서 할아버님까지 삶아놓은 모양이군. 이러다 문파 전체가 그 계집애 치마폭에서 놀아나게 되는 거 아냐?’

전흠의 얼굴에 갑자기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표정이 원래대로 풀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문인인 진산월은 절대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든 것이다.

‘휘둘리기는커녕 그 계집애가 장문인한테는 꼼짝도 못하니 천적(天敵)이 따로 없지.’

전흠이 히죽히죽 웃을 때 전풍개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네놈이 아무래도 요즘 정신 상태가 해이해진 것 같다. 오늘 마침 날도 좋고 어깨의 상처도 대충 아물었으니 모처럼 제대로 수련 한 번 해보도록 하자.”

“아이고, 할아버님…”

전흠은 우는 소리를 내면서도 제 발로 전풍개를 따라갔다. 전풍개와의 수련은 고달프기는 했으나, 할아버지의 부상이 완쾌된 것이 기뻐서 기꺼이 수련에 동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전흠은 누군가가 산문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 누구지?”

두 조손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산문 앞으로 들어오는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춤에 한 자루 검을 찬 채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인영은 백색 장삼을 입은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헌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어 멀리서 보아도 기개가 헌앙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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