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3화
제136장. 수구초심(首丘初心)
백삼중년인은 두 사람 앞까지 다가오더니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 있나?”
그의 태도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여서 전흠은 엉겁결에 되물었다.
“장문인의 친구분이시오?”
백삼중년인의 미소가 조금 냉랭해졌다.
“그 녀석이 감히 내 친구가 될 수 있겠나?”
전흠은 처음에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은 누구요? 무슨 일로 본파의 장문인을 만나려는 거요?”
“장문인이나 불러와. 다른 녀석들과는 볼일이 없으니까.”
“뭐라고?”
전흠의 눈꼬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전흠이 화가 솟구쳐 백삼중년인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치려 할 때였다. 아까부터 백삼중년인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있던 전풍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백씨 성을 가지고 있지 않나?”
백삼중년인은 전풍개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의외로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백동일입니다.”
전풍개의 얼굴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어났다.
“정말 백동일이구나. 네가 이곳에 오다니…”
전풍개가 격동에 찬 모습인 반면 백동일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이 제가 못 올 곳이라도 됩니까?”
“네가 본파에 등을 돌리고 초가보에 적(籍)을 두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백동일은 너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전풍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동안 백동일을 응시하다가 점차로 눈가에 살기가 감돌며 전신에서 맹렬한 기운이 뿜어 나왔다.
“네놈이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이곳을 찾아오다니… 오늘 네 사부 대신 네놈을 응징해 본파의 법도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고야 말 테다.”
전풍개의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백동일은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종남파의 법도라… 그러고 보니 일전에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종남파에 법도 따위는 없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법도라고 했던가?”
전풍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본파에 법도가 없다고? 어떤 놈이 그 따위 망발을 지껄였다는 게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이미 종남파를 떠난 사람이니 내 앞에서 종남의 법도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은 모두 무의미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종남의 문하가 아니란 말입니다.”
전풍개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격앙된 흥분으로 가느다란 경련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듯한 폭풍 같은 분노와 무언지 표현 못할 야릇한 슬픔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백동일은 전풍개의 사제인 풍뢰검 관소양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어려서부터 무공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사부를 존경하고 따르던 아이였다. 종남파의 커다란 인재가 될 줄 알았던 그가 절명검이란 별호로 장성에서 이름난 살성(殺星)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가 초가보의 부하가 되어 오히려 종남파의 고수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는 동중산의 말에도 설마 그러겠느냐 싶었다.
그런데 이십여 년 만에 만난 백동일의 입에서 직접 이런 말을 듣게 되자 전풍개는 분노 이전에 진한 서글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토록 성실하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젊은 인재가 가슴속에 흉심만 가득한 중년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 버렸단 말인가?
전풍개가 마음속의 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전흠이 백동일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사숙뻘 된다는 말이지? 하지만 본파에서 나갔다니 다행이군.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사숙이라면 정말 성질나는 일이라서 말이야.”
전흠이 자신을 향해서 노골적인 적의(敵意)를 드러내며 검을 뽑는 광경을 보고 백동일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과는 볼일이 없다니까. 어서 장문인이나 불러와라.”
전흠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본파의 장문인이 당신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인 줄 아나? 우선 솜씨나 한번 보자구. 장문인을 불러낼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게 말이야.”
전흠이 계속적으로 반말을 하자 백동일은 표정의 변화가 없는데 전풍개가 오히려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나 전풍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동일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담담한 시선으로 전흠을 응시했다.
“애송이, 무어라고 떠들어도 상관없지만, 어른 앞에서 함부로 검을 뽑는 건 실례라는 걸 알아야지.”
“본파를 배신한 주제에 어른 노릇까지 하려고? 어림 반푼 없다!”
전흠은 벼락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출검(出劍)을 했다.
파앗!
눈앞에 섬광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전흠의 검은 어느새 백동일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부시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서운 쾌검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전흠, 멈춰라!”
어디선가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을 듣자 전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나 그의 검은 날아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거두어지더니 이내 그의 검집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백동일의 눈에서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큰소리칠 만한 솜씨를 가지긴 했군. 제법 쓸 만한 천하제탄(天河齊彈)이었다.”
조금 전 전흠이 펼친 초식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제탄 일식이었다. 하나 백동일이 경탄한 것은 천하제탄을 펼친 속도보다도 그것을 거두어들인 전흠의 솜씨였다. 원래 초식이란 펼치기보다 거두기가 더욱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전흠은 마치 사전에 계획한 것처럼 검의 수발(收發)이 너무도 자유스러웠던 것이다. 전흠은 검을 거두고 훌쩍 물러나더니 한곳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제길, 나타나려면 좀더 있다 나타나든지… 아주 적당한 시간에 나와서 방해하는구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전흠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백동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동일도 어느새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진산월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 데 비해 백동일의 입가에는 여전희 희미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언뜻 백동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네가 진산월이냐?”
“그렇소.”
“요즘 들어 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네가 백 년 내 종남파에서 배출된 고수들 중 최고의 실력을 지녔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진산월은 무심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건 잘 모르겠소.”
“잘 모르겠다구? 언뜻 들으면 겸손한 소리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오만하고 광오한 말이구나. 백 년 내 제일고수(第一高手)인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히는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그걸 확실히 알게 해주지.”
백동일의 훤칠한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압축해 진산월의 코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앗?”
진산월의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짤막한 경호성을 지르며 그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진산월이 피하지 않고 백동일을 향해 마주 달려가고 있었다.
팟!
백동일이 검을 뽑는 광경을 제대로 본 사람도 없었는데 난데없이 검광이 번뜩이며 세 줄기의 검화(劍花)가 진산월의 앞가슴을 향해 쏘아져 갔다. 진산월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신형을 날리자 세 줄기의 검화가 헛되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하나 백동일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주위 사방이 온통 시퍼런 검영(劍影)에 휩싸이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여 초를 나누었다. 그들의 검세가 어찌나 빠르고 날카롭던지 금시라도 둘 중 한 사람이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들의 치열한 격전을 지켜보는 중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비록 문파의 배반자이지만 사문의 어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문파를 책임지는 장문인의 신분이었다. 마땅히 머리를 맞대고 문파의 부흥을 위해 일로매진해야 할 두 사람이 필생(必生)의 대적(大敵)을 만난 듯 무시무시한 격전을 벌이고 있으니 이를 보는 종남파 문인들의 가슴은 한없이 침통할 수밖에 없었다.
차창!
갑자기 요란한 검명(劍鳴)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다. 흠칫 놀란 중인들이 바라보니 두 사람은 이 장의 간격을 둔 채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몸에 별다른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진산월의 표정이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데 비해 백동일은 두 눈에 무시무시한 안광을 번뜩인 채로 입꼬리가 슬쩍 뒤틀려져 있었다.
“흐흐…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는 별로로군. 소문이 잘못된 것가, 아니면 사정을 봐주고 있는 건가?”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본파의 무공에 이상한 걸 섞어 놨군. 이건 무어라고 하는 거요?”
백동일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려졌다.
“종남의 무공이 천하에 다시없는 절학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껄이는구나. 굳이 숨길 것도 없겠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천하삼십육검에 천랑칠절검(天狼七絶劍)의 묘용을 섞었더니 제법 그럴듯한 무공이 되더구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 귀하는 아직 천하삼십육검의 진정한 묘용(妙用)을 모르고 있구려.”
백동일은 냉랭하게 웃었다.
“흥! 네 녀석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천하삼십육검을 익혔던 나다. 모든 변화와 검로(劍路)를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훤히 파악하고 있거늘 묘용을 모른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건 몸으로 직접 느껴 보도록 하시오.”
이번에는 진산월이 먼저 백동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백동일의 두 눈이 매섭게 번뜩이더니 얄팍한 입술 사이로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종남의 무공으로는 절대로 내 천랑십이절(天狼十二絶)을 꺾을 수 없다.”
천랑십이절은 백동일이 종남파의 무공에 천랑존자의 천랑칠절검을 융합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절학이었다. 천하삼십육검의 장중함과 유운검법의 변화무쌍함에 종남파에는 없는 천랑칠절검 특유의 날카로움을 결합시킨 것이어서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천랑십이절을 완성한 후 백동일은 적어도 장성 일대에서는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진산월의 검은 한 가닥 뇌전(雷電)처럼 곧장 백동일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제탄이란 초식이었다. 조금 전에 백동일은 전흠이 펼친 천하제탄을 보고 감탆나 적이 있었다. 하나 지금 자신의 앞으로 날아들고 있는 천하제탄은 전흠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분명 겉으로는 똑 같은 천하제탄이었으나, 검초가 어찌나 빠르고 맹렬하던지 검이 아닌 거대한 창(槍)이 쏘아져 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백동일은 피하지 않고 수중의 장검을 질풍처럼 휘둘러 정면으로 맞서 갔다.
까깡!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두 사람의 검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으윽!’
백동일은 손아귀에 막대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천하제탄은 빠르고 날카롭기는 했으나 강맹한 맛은 부족한 초식이었다. 그래서 백동일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후려친 것인데, 막상 격돌하게 되자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반탄력으로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던 것이다. 하나 백동일은 조금도 기가 죽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진산월의 앞가슴 쪽으로 뛰어들며 장검을 세차게 내뻗었다. 그러자 느닷없이 다섯 줄기의 검광이 빛살처럼 진산월의 목덜미와 양쪽 관자놀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갔다.
쐐애액!
백동일이 펼친 것은 천랑십이절 중의 낭조오자(狼爪五刺)라는 초식으로,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장내의 사람들은 설마 백동일이 이토록 무모할 정도로 살벌하게 반격해 올 줄은 몰랐는지 모두 안색이 변해 버렸다. 자신의 안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반드시 상대의 몸을 난도질하고야 말겠다는 악독한 마음이 없으면 이런 식의 수법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면이 훤히 노출된 진산월의 몸에 피구멍이 뚫리려는 순간, 그의 신형이 한차례 흔들리더니 십여 개의 폭발하는 듯한 검광이 피어올랐다.
따따땅!
폭죽이 터지는 듯한 음향이 울려 퍼지며 불똥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동시에 한 사람의 신형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광경이 중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뒤로 두 걸음 물러난 사람은 백동일이었다. 백동일의 안색은 조금 전의 여유 있던 모습과는 달리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백동일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재차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파파팍!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검광이 진산월의 전신을 뒤덮었다. 백동일은 검을 휘두르는 일에 심혼(心魂)을 내던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천랑십이절 중의 절초들을 펼쳐 진산월을 압박해 갔다.
그 공격이 어찌나 세차고 맹렬했던지 중인들은 진산월이 금시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아 절로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백동일의 검법은 확실히 종남파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틀렸다. 분명 구석구석에 아직도 종남파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검로의 진행 방향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변화가 전혀 달랐다. 그것은 어찌 보면 시전하는 사람의 마음자세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종남파의 무공은 도가(道家)에 그 기본 바탕을 두고 있어서 순간적인 강맹함이나 사람을 살상(殺傷)시키는 매서운 위력보다는 진중(鎭重)하면서도 은근한 힘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종남파의 무공을 대성(大成)하기 위해서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할 줄 아는 끈기와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침착함이 필요했다.
하나 백동일은 이십여 년 전에 소림사에서 커다란 좌절을 겪은 이후 심성(心性)이 달라져서 오직 상대를 신속하게 쓰러뜨리는 것만을 지상명제로 생각했다. 일단 손을 쓰면 격식이나 외양에 신경쓰지 않고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상대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한수 한수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무자비하고 냉혹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비슷한 검로라고 할지라도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초는 종남파 본래의 색깔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도 진산월의 전신을 난도질할 듯이 몰아쳐 오는 백동일의 검초는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전풍개는 그 검초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밀밀(天河密密)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하삼십육검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고 엄밀한 천하밀밀에 천랑칠절검의 천랑색명(天狼索命)이 결합하여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돋는 야랑횡비(野狼橫飛)의 일식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북방의 검객들이 백동일의 이 잔인한 검초에 허무하게 피를 뿌리며 쓰러졌는지 모른다.
진산월은 무표정한 눈으로 자신을 짓쳐오는 검광들을 보더니 수중의 장검을 몇 차례 흔들었다.
쏴아아…
마치 대나무 숲을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무수한 검영(劍影)들이 나타났다. 그 검영들은 하나의 거대한 그물처럼 백동일의 전신을 뒤덮어 가더니 결국에는 백동일이 펼친 야랑횡비의 검광의 무리와 정면으로 격돌하고 말았다.
차차차창!
수백 개의 검들이 동시에 부딪친 듯한 음향과 함께 사방이 온통 폭발하는 듯한 검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렸다. 그 충돌의 여파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중인들이 사오 장 밖으로 허겁지겁 몸을 피해야만 했다. 자욱했던 검광과 수북이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화살이 쏘아지는 듯한 격렬한 파공음이 거푸 터져 나왔다.
핑! 핑!
중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보니 백동일이 머리를 산발하고 웃자락이 마구 풀어 헤쳐진 채로 미친 사람처럼 마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더기처럼 여기저기가 잘려져 나간 의복 사이로 내비치는 그의 몸에는 군데군데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고, 산발한 머리카락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언뜻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어 그야말로 흉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살기등등하다 못해 광기(狂氣)마저 어린 듯한 그 모습에 종남파의 모든 문인(門人)들은 아연실색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니고, 그래도 한때 자신이 몸을 담았던 문파의 장문인을 상대로 어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한동안 좀처럼 보기 드문 처절한 격전이 계속되었다. 장내에는 살벌한 검풍(劍風)과 거친 숨소리만이 들리고 있을 뿐, 이상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허억… 허억…!”
백동일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흐르는 땀과 핏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길게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 괴기스러워 보였다. 그에 비하면 진산월은 대조적이라 할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숨결도 거칠어지지 않았고, 동작 또한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검을 휘두를 것만 같던 백동일이 갑자기 검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숨을 불어 내쉬는 것이었다.
“크허허! 크헉!”
마치 고함이라도 내지르는 것처럼 큰 숨을 몇 차례나 내뱉은 백동일이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크하하… 네가 지금 나에게 사정을 봐주는 것이냐?”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동일은 그의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던 듯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거야말로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격이로구나. 네 말대로 천하삼십육검에 나도 모르는 묘용이 있다는 걸 인정해 주지.”
백동일은 검을 든 채로 어깨를 몇 차례 돌리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피 섞인 가래침을 서너 차례 뱉은 후에 신발로 그것을 짓이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몇 번이나 나를 벨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네 딴에는 내게 아량을 베풀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너의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강호에서는 일단 검을 들었으면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자가 누구든 서슴없이 벨 수 있어야 하며, 적어도 상대를 마음속으로 완전하게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는 나를 베지도 못했고 심복(心服)시키지도 못했으니 이게 바로 너의 허술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백동일의 눈에서 점차로 이글거리는 듯한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듣기로는 네가 검으로 구름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나는 소문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직접 본 것만 믿는다. 그래서 나는 종남파가 재건되었다느니 종남파에 검귀가 나타났다느니 하는 말도 결코 믿지 않는다.”
백동일은 검을 들어 진산월을 겨누더니 부러지는 듯한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종남파는 이미 무너졌다. 지금 너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지막 몸부림일 뿐이다.”
백동일의 선언과도 같은 외침은 주위에 있던 종남파의 모든 고수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 말 속에 포함된 뜻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찌되었건 그래도 한때는 종남의 촉망받는 제자였던 백동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자체가 너무도 의외였던 것이다. 처음의 놀람과 당혹감은 이내 격렬한 분노와 격앙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뭐라고? 몸부림? 뚫린 입이라고 정말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전흠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흠뿐 아니라 대부분의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나 백동일은 그들에게는 일별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 진산월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것 같았고, 어찌 보면 마음속에 솟구쳐 오르는 노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백동일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시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 진산월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소.”
조용하고 담담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백동일은 더욱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당신에게 살수(殺手)를 쓰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살수를 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오.”
백동일은 묵묵히 진산월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칼날같이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하나 그 시선을 받는 진산월의 얼굴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담담한 것이었다.
“본파는 이미 재건되었소. 당신이 무어라고 하든 그건 사실이요. 이제와서 당신 한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말이오.” 이번에는 백동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나 이내 백동일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 과연 듣던 것처럼 말 하나는 잘하는군. 하나 강호에서 중요한 것은 말보다 행동이다. 어디 나를 쓰러뜨려 보아라. 검으로 구름을 일으키든 일검에 삼십육방을 찌르든 나를 완전히 꺾어 보아라. 그렇다면 종남파가 재건되었다는 네 말을 믿도록 해보지!”
“…!”
“왜 아무런 대꾸가 없는 거냐?”
진산월은 고개를 내젓더니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본파를 찾아와서 이런 시비를 벌이는지 모르겠지만, 본파는 당신의 투정을 받아줄 만큼 한가한 곳이 아니오. 그러니 어서 물러 가시오.”
모욕에 가까운 심한 말을 들었음에도 백동일은 여전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흐… 서툰 격장지계(激將之計)를 벌일 필요 없다. 나를 쓰러뜨리든지, 아니면 종남파가 이미 무너졌다는 걸 시인하고 봉문(封門)을 해라.”
강압적인 그의 말에 모두들 다시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진산월은 웃고 있는 백동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백동일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그의 두 눈에서는 기이한 광기(狂氣) 같은 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그 눈을 바라보던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다른 선택은?”
백동일은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없다.”
진산월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준비하시오.”
백동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의미를 지닌 미소였다.
“말이 통하는 녀석이군.”
백동일은 두 팔을 활짝 벌리더니 수중의 장검을 허공으로 번쩍 치켜 올렸다.
“어디 검으로 구름을 일으킨다는 네 솜씨 좀 보자!”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검을 쳐든 자세로 곧장 진산월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그의 행동은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눈부신 검광이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백동일, 장성의 절명검이다!”
세찬 검광 속에서 그의 터져 나갈 듯한 외침 소리가 너무도 분명하게 들려왔다. 진산월은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는 백동일의 얼굴을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로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수중의 장검을 들어올렸다.
막 검을 휘두르기 직전, 그는 폭발하는 듯한 검광 속에서 백동일의 시선과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다.
검이 뽑혔다. 그리고 거대한 구름이 장내를 뒤덮었다.
…
죽음 같은 침묵이 주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백동일은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사방을 뒤덮을 듯하던 검광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그와 함께 그토록 찬연하게 피어올랐던 거대한 구름마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던 백동일이 번쩍 고개를 쳐들어 진산월을 응시했다.
“이것도 종남의 무공이냐?”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건… 유운검법이겠군. 그렇지?”
진산월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백동일의 몸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훌륭하군. 정말 훌륭해. 유운검법에 이런 묘미가 있었군.”
누더기처럼 변한 옷자락에서 갑자기 붉은 선혈이 여기저기 뿜어나왔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은 미끄러지듯 바닥에 천천히 쓰러졌다. 그의 온몸은 이미 수많은 검흔(劍痕)으로 뒤덮여 단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난 행운아야. 그렇지?”
바로 그때 어디선가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 쏜살같이 장내로 뛰어들었다.
“동일!”
그 인영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백동일의 몸을 끌어안고 비통한 고함을 내질렀다.
“자네… 자네…”
백동일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노해광을 쳐다보았다. 항상 심술궂은 표정에 냉혹함으로 가득했던 노해광의 얼굴은 표현 못할 슬픔과 비통함으로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백동일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져 파란 하늘로 이동했다. 백동일은 텅 빈 허공을 향해 웃었다.
“이젠 지옥에서 사부를 만나도 두렵지 않아. 이렇게 멋진 검을 보았으니… 이렇게 멋진 종남의 검법을…”
그것이 장성의 최고검객인 절명검 백동일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노해광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백동일의 시신을 끌어안고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이때 백동일의 나이는 마흔일곱. < 종남연기(終南年紀) > 에 보면 종남파에서 배출한 고수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