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4화
제137장. 이중계획(二重計劃)
하늘에는 햇살이 찬란하건만 장내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해광의 느닷없는 출현에 당혹해했던 중인들도 착잡함이 짙게 밴 표정으로 노해광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동일의 시신을 안고 한참이나 흐느끼던 노해광은 돌연 진산월을 돌아보며 비통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느냐… 정녕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느냐?”
진산월은 노해광의 원망 섞인 시선을 받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애초부터 그들 사이에 어떠한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백동일은 종남의 재건을 위해 몸을 던졌고, 진산월은 종남의 법도를 위해 그를 죽였을 뿐이다. 사소한 미련이나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로서는 각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노해광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산월에 대한 원망이 일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백동일은 그에게는 광활한 천지에서 단 하나 남은 사형제였고, 그를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벗으로 오랜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며 살아왔다. 이제 그 유일한 마음속의 지기(知己)가 사라졌으니 노해광의 허탈함과 야속한 심정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노해광이 슬픔과 고통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반시진 가까이 시간이 흐른 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진산월만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노해광은 손짓해 그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진산월이 다가오자 노해광은 백동일의 시신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산발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백동일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 주고 피가 묻어 있는 입 주변도 소맷자락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드러난 백동일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노해광은 한동안 백동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중의 행적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이 사람도 한때는 누구 못지 않은 종남파의 충실한 제자였고,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였다. 더구나 그는 너에게 사숙뻘이 된다. 그를 종남산에 묻어 줄 수 있겠느냐?”
진산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노해광은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도 틀림없이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지금의 그로서는 노해광에게 특별히 할말이 없었다. 노해광이 종남파에서 강탈해 가다시피 한 대왕령 일대의 주루 네 곳에서 상당한 부(富)를 축적하고 있다는 소문은 진산월도 들은 적이 있었다. 종남파가 운영할 때보다 더한 성황을 누려서 서안 전체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커다란 규모로 발전했다고도 했다.
하나 지금까지 진산월은 그에 대해서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노해광은 이미 종남파를 떠난 사람이었고, 주루를 가져갈 때의 약조(約條)대로 두 번 다시 종남파를 찾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종남파에게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출현은 그가 아직 잊혀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노해광은 진산월의 선사인 임장홍의 하나뿐인 사제였다. 어찌 생각하면 전풍개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해광은 호북성(湖北省) 파동(巴東) 출신이었다. 날 때부터 인근에서는 기재(奇才)로 소문이 났고, 나름대로 인망(人望)도 두터워서 따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 십칠 세 때 우연한 사고로 사람을 죽인 후 고향을 떠나 천하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섬서성까지 흘러들어온 노해광은 당시의 종남파 장문인이었던 하원지의 눈에 띄어 그의 세 번째 제자로 종남파에 입문했다. 그보다 먼저 들어온 두 사람은 강일비(姜一飛)와 임장홍이었다.
대사형인 강일비는 상당한 무골(武骨)이어서 종남파 고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고, 둘째인 임장홍은 차분한 성격에 온순한 심성을 지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 비해 노해광은 어정쩡한 위치였다. 무공에 대한 재질은 강일비보다 떨어지는 편이었고, 성격 또한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어서 남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 년 후에 백동일이 입문하자 그의 위치는 더욱 애매해졌다. 백동일은 그야말로 천부적인 무재(武才)여서 오히려 강일비보다 더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하나 노해광은 그들에게 없는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다. 우선 그는 눈치가 비상하고 심기가 뛰어나서 좀처럼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이해타산이 빨라 이재(理財)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하원지의 사제들 중에는 그를 종남파의 내부 일을 담당하는 집사(執事)로 임명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아마 기산취악으로 종남파가 뿌리째 흔들리는 일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노해광은 정말로 종남파의 집사가 되어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이십 년 전에 벌어진 기산취악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장문인인 하원지와 종남파의 실질적인 기둥이었던 종남삼검은 참담한 패배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각기 세상을 떠나거나 종남파를 등지고 말았으며, 남아 있는 제자들은 우왕좌왕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하원지의 뒤를 이어 장문인이 되어야 할 강일비는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책임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야밤에 몰래 종적을 감추었으며, 그 뒤를 이어 많은 제자들이 종남파를 떠났다. 촉망받는 기재였던 백동일은 사부를 따라 장성으로 갔고, 결국 임장홍이 차기 장문인으로 지목되었다.
노해광의 위치는 더욱 어정쩡해졌다.
종남파의 문하제자들 수가 급감하여 따로 문파의 살림을 꾸려 나갈 집사를 둘 필요가 없어졌고, 윗대의 고수들이 모두 사라져 당장 문파를 끌어 나갈 사람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노해광은 장문인이 될 수도 없고 집사가 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가 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노해광은 꿋꿋하게 종남파에 남아 있었다.
특별히 갈 곳도 없었고, 위기에 처한 종남파를 등지고 떠날 만큼 야박한 성격도 아니어서 임장홍을 도와 종남파의 궂은 일을 모맡아 처리했다.
하나 그러던 그도 결국 오 년도 되지 않아 종남파를 등지고 말았다.
그것은 뜻하지 않게 발생한 임장홍과의 불화(不和) 때문이었다.
당시 종남파의 장문인은 임장홍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종남파의 내부 살림을 이끌어 나간 사람은 노해광이었다.
그것은 노해광이 이재에 밝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임장홍의 처(妻)인 두란향이 몸이 좋지 않아 자주 병상에 누워 있던 탓도 있었다.
외부로 나가 주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임장홍을 안에서 도와줘야 할 두란향이 앓아 누워 있으니 자연히 그녀의 몫까지 노해광이 감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병수발을 들며 문파를 꾸며 나가던 노해광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연정(戀情)을 품게 되었다.
두란향은 비단 보기 드문 미녀일 뿐 아니라 그 심성이나 자태가 여느 여인과는 틀려서 사람을 매혹게 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유난히 병약(病弱)한 몸은 남자의 보호본능까지 자극하여 노해광이 아닌 누구라 할지라도 그녀를 보면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노해광의 경우에는 그런 호감이 좀더 발전한 형태였을 뿐이다.
일단 그녀를 마음에 두게 되자 노해광은 그녀의 남편인 임장홍의 모든 것이 안 좋게 생각되었다.
병상에만 누워 있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문파를 재건하겠다고 밖으로 나다니는 것도 못마땅했고, 능력도 없으면서 사람만 좋은 그의 행태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히 그는 임장홍이 하는 일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때마다 임장홍은 특유의 느긋한 웃음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럴수록 노해광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 결국 두란향이 병마(病魔)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자 노해광은 임장홍을 향해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해냈다.
임장홍은 아무 말도 없이 노해광의 욕설을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노해광을 더욱 광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당신이 죽인 거요! 이 한심한 인간! 한 여자의 남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책임졌어야지!”
노해광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질렀다.
그래도 임장홍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노해광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당신이 장문인이 되어서 제대로 한 일이 하나라도 있었소? 당신은 그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조만간에 본파까지 말아먹고 말 거요!”
그때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던 임장홍의 쓸쓸한 모습을 노해광은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노해광은 자신을 파문(破門)시켜 달라며 임장홍을 강요했고, 임장홍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종남파를 떠나고 말았다.
“네 사부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지. 차라리 나쁜 놈이었다면 욕을 퍼붓고 칼부림이라도 했을 텐데 네 사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싫어질 수 없는 인간이었지.”
“…”
“그래서 나는 떠나야만 했다.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싶은데, 그의 곁에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거든.”
노해광은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너는 그런 놈이 되지 마라. 너무 좋기만 해서는 안 돼. 좋은 사람보다는 강한 사람이 돼라. 그게 우두머리의 숙명(宿命)이다.”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자신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무심결에 한 행동인지 노해광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너는 네 사부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구석이 있다. 그래서 안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불안하기도 하다. 네 모습을 보니 그동안 네가 어떠한 길을 겪어 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구나. 하지만 앞으로 걸어야 하는 길은 절대로 지나온 길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
“내일 초가보에서 총공격을 해올 것이다.”
노해광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진산월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나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듣고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우선 당장은 내일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그 다음에도 결코 순탄한 길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무 힘든 선택을 한 거야.”
이어서 노해광은 백동일이 어젯밤에 자신을 찾아온 이야기를 했다.
노해광이 말을 마칠 때까지 진산월은 한마디로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노해광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진산월의 비쩍 마른 얼굴에 고정되었다.
“이제 어쩔 셈이냐? 그래도 초가보에 맞서 싸울 생각이냐?”
진산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들은 강하다. 일전에 너희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경시한 탓도 있었지만, 정말 운(運)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력(戰力)은 결코 화산파에 뒤지지 않는다. 이번에 그들은 먼젓번과 같은 방심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전력을 기울여 너희들을 뿌리째 뽑으려 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너희들의 수를 모두 합쳐도 열 명 남짓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인원으로는 네가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라 할지라도 초가보를 감당해 낼 수 없다. 차라리 일단 그들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후일(後日)을 도모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노해광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나친 자신감은 만용(蠻勇)일 뿐이다. 옛말에도 지나가는 소나기는 피하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너는 무사할 자신이 있을지 몰라도 몇 명 남지도 않은 제자들이 몽땅 죽는다면 종남파의 재건은 영원히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노해광이 언뜻 고개를 돌려보니 진산월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강퍅한 얼굴에 떠올라 있는 희미한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마력이 있었다.
노해광은 한동안 멍하니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언뜻 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의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편하고 차분한 심정이 되었다. 노해광은 왜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진산월의 미소는 자신감에 차 있거나 용기를 북돋는 그런 미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하나 그 미소 속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자연스러운 당당함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에게 있어 초가보와의 싸움은 당연히 거쳐야 할 관문(關門)이었고, 오래 전부터 그 일을 마음속으로 준비해 오고 있었다. 그러니 그 시기가 내일로 닥쳐왔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노해광은 갑자기 목이 메어 와서 황급히 엉뚱한 곳을 쳐다보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왔던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깬 사람은 의외로 진산월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잘해 낼 수 있을 겁니다.”
노해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백동일을 묻을 만한 곳을 찾아봐야겠다.”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노해광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 했으나 어느새 진산월은 휑하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노해광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백동일의 시신을 안고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덤은 작고 초라했다. 하나 전망이 아주 좋아서 종남산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특히 종남파의 구석구석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노해광은 백동일의 시신을 묻고 난 후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은 곳이군. 여기라면 백동일도 마음에 들어 할 거다.”
노해광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음에 그럴듯한 비석(碑石)이라도 세워야겠군. 조금 쓸쓸한 것 같구나.”
노해광의 얼굴에는 형용하기 힘든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 각기 다른 상념에 잠긴 채 무덤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노해광이 돌연 피식 웃었다.
“하긴… 그 녀석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을 거다. 오직 승부를 위해서 앞으로만 달려가던 놈이었으니까. 틀림없이 무덤 속에서도 칼을 갈고 뛰쳐나올 기회만 노리고 있을 거야.”
노해광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니 그놈 앞에서 나약한 꼴을 보일 수 없지. 후아!”
노해광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조금 전보다는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내일 제대로 싸우려면 아무래도 좀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구나.”
“내일 초가보에서 출정(出征)하는 인원은 대략 사십 명 남짓이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요. 숫자는 비록 적지만 초가보의 실질적인 정예들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어 화산파와도 정면으로 자웅(雌雄)을 겨루어 볼 수 있는 가공할 전력(戰力)이오.”
노해광의 말을 듣는 중인들의 표정은 모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초가보에서 내일 총공격을 해올 거라는 소식은 종남파의 모든 고수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전해 주었다. 며칠 전의 습격에서 채 부상이 낫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형편에서 초가보의 모든 힘이 투입되는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여러모로 종남파에는 불리한 일이었다. 노해광은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종남파 부근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모두 세 방향에서 포위망을 구축하여 접근해 올 텐데, 초가보의 오대호법 중 남아 있는 세 명과 하북십호가 조사전 후방을 맡고, 두 명의 공봉과 도패 좌린이 철영대를 이끌고 조양봉의 산길을 봉쇄할거요. 그리고 그들의 주력은…”
노해광의 손은 산문 입구에 고정되었다.
“바로 이쪽으로 올 텐데, 초가보의 후원에 머물러 있는 빈객들이 총출동한다고 하오.”
모두들 묵묵히 노해광이 가리키는 지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노해광의 말대로라면 종남파로서는 퇴로(退路)가 원천 봉쇄된 상태에서 초가보의 정예들과 정면충돌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문득 전풍개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그토록 소상하게 알고 있는 거냐?”
노해광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백동일이 정산을 통해 저에게 초가보의 공격 계획을 알려 주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정산이 재빨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백 공자께서 제게 노 공자께 전하라며 서신(書信)을 맡기셨습니다. 그 서신에 초가보에 대한 정보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정산의 두 눈이 빨갛게 변했다.
“백 공자께선 겉으로는 저를 차갑게 대하셨지만, 그래도 종남에 대한 충심(忠心)을 간직하고 계셨던 게 분명합니다…”
정산의 두 눈에서는 금시라도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전풍개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이미 죽은 녀석 때문에 궁상떨 것 없다. 그놈이 진정으로 본파를 생각했다면 그런 식으로 목숨을 내던질 게 아니라 본파를 위해서 힘을 더 했어야지. 바보 같은 놈!”
정산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붉게 상기된 얼굴을 떨구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는 듯하자 노해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무튼 덕분에 상대의 전력(戰力)에 대해 소상하게 알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대비해야 할지를 몰라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겁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전풍개는 더 이상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노해광은 다시 한차례 중인들을 훑어보았다.
“초가보의 전법(戰法)은 단순하오. 본파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철저히 봉쇄하고, 자신들의 주력(主力)으로 정면을 치고 들어와 우리를 철저히 분쇄하려는 것이오.”
노해광의 입에서 ‘본파’와 ‘우리’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몇몇 사람은 그의 그런 모습에 다소 낯설어 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특별히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만 또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오.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본파를 철저히 궤멸시키겠다는 의지가 다분히 담겨 있는 전술이오.”
노해광은 말을 하면서 중인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의외로 겁을 먹거나 의기소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얼굴 가득 맹렬한 투지를 끌어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노해광은 이들의 이런 모습이 단순한 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자신감 때문인지를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하나 일단 그들에게 싸우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들이 정공법(正攻法)을 택한 이상 우리의 선택도 그리 많지 않소. 내가 생각하기에는 모두 세 가지 정도의 대응책이 있을 것 같소.”
중인들 중 유난히 번쩍이는 외눈을 가진 중년인이 그에게 물어왔다.
“세 가지 대응책이란 어떤 것입니까?”
노해광은 조금 전에 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게는 사손(師孫)뻘인 동중산임을 알고 있었다. 비천호리 동중산이라면 나이도 제법 먹었고 강호에서의 명성도 상당한 인물이었지만, 배분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만큼 노해광의 입에서는 자연스런 하대가 흘러나왔다.
“첫째는 우리도 정공법으로 그들에게 맞서는 것이다. 우리의 힘을 분산하지 않고 하나로 뭉쳐 정면돌파를 강행하자는 것이지. 이 방식은 성공하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실패했을 때는 우리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약점이 있다.”
동중산은 침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상대의 전력이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둘째로는 본파의 지리상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매복과 암습으로 기병지계(奇兵之計)를 펼치는 것이다. 이 방법에도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은 잘만 활용하면 우리의 손실을 최소로 하고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자칫하다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겠지요.”
노해광은 그의 외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상대의 주공이 아닌 한쪽 방면에 우리의 전력을 집중시켜 포위망을 빠져 나가는 방법이다. 이 방법 또한 단숨에 그 방면의 상대를 궤멸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포위망에 제 발로 뛰어든 격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 중 가장 약한 방면이라면 세 명의 호법과 하북십호가 지키고 있는 후방 쪽일 텐데, 그들을 빠른 시간 내에 제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초가보를 상대하는 데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나는 이 세 번째 방법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진산월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노해광이 눈을 슬쩍 치켜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너무 수동적입니다. 결국 그 방법은 상대의 정면공격을 피해 도망치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는 이번 싸움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본파가 멸문하느냐 마느냐 하는 마당에 무슨 의미를 찾겠다는 거냐? 무조건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자는 것이다.”
“그들의 공격을 피해 다니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이번에는 그들에게 본파를 공격한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를 똑똑히 알게 해주어야겠습니다.”
노해광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진산월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자신감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초가보의 전력이 이토록 가공스러운데 살길을 모색하기도 바쁜 와중에 무슨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말인가? 아마 사문의 어른인 전풍개가 없었다면 버럭 소리라도 질렀을지 몰랐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사람들 또한 진산월의 말에 동조한다는 표정들이었다. 우선 당장 전풍개가 먼저 어깨를 흔들며 웃는 것이었다.
“흐흐… 옳은 말이다. 본파를 우습게 본 그놈들을 순순히 돌려보낸대서야 말이 안 되지. 이번에야말로 그놈들에게 지금까지 당한 모든 수모를 단단히 갚아 줘야겠다.”
전풍개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모두의 심정이 그와 같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노해광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당했으면서도 이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사숙, 초가보의 호법과 공봉들은 당금 강호에서도 최고 수준의 고수들입니다. 게다가 빈객들 중에는 그들을 능가하는 실력자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런 자들과 정면으로 싸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노해광의 걱정과는 달리 전풍개는 태연자약했다.
“싸우는 방법이야 장문인이 결정할 문제지. 다만 이대로 순순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그놈들에게 반드시 본파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노해광은 한숨부터 흘러나왔으나 억지로 눌러 참고는 진산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말한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우리가 먼저 기습을 합니다.”
뜻밖의 말에 강호의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노해광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고?”
“그들이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그들은 아마 내일 새벽에 초가보를 출발하여 본파로 올 겁니다. 본파의 세 군데 출입구를 봉쇄하기로 계획했으니 그들도 세 개의 무리로 나뉘어지겠지요. 미리 그들의 이동경로에 매복해 있다가 한 무리씩 제거한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습니다.”
노해광은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하나 멍청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머리 속에는 번개같이 빠른 생각이 치달려 가고 있었다.
‘이건…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재빠르게 진산월의 말을 검토해 보고는 그 계획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는 종남파 내에서 초가보의 공격을 처리하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궁리를 해왔다. 자연히 모든 계획이 수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진산월의 계획은 그 발상부터 달랐다. 상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찾아가서 승부를 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공격적인 계획이며, 이행 여부에 따라서는 오히려 초가보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단순히 생존(生存)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勝利)를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
동중산이 재빨리 탁자 앞으로 와서 또 다른 지도 하나를 펼쳤다.
“이건 초가보의 인근 지역입니다. 그들이 본파로 올 수 있는 길은 모두 다섯 군데인데, 그중 두 곳은 서안 쪽으로 삥 돌아오기 때문에 결국 나머지 세 군데의 길로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 지도를 본 노해광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지도는 초가보와 그 주변에 대해 무척이나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작은 샛길 하나, 심지어는 허름한 사당이나 버려진 흉가(凶家)까지도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노해광은 이들이 이미 오랫동안 초가보와의 일전(一戰)을 준비해왔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동중산은 초가보에서 나오는 붉은 색 선(線)으로 표시된 길을 가리켰다.
“이 길로 아마도 그들의 주력이 지나갈 것입니다. 이쪽으로 오면 본파의 정문에 가장 빨리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옆의 길이 본파의 조양봉 쪽으로 오는 샛길이며, 가장 오른쪽이 본파의 조사전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장문인께선 먼저 어느 쪽 길을 치시겠습니까?”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가장 약한 곳을 먼저 친다.”
동중산도 그렇게 생각한 듯 이내 오른쪽 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게 합당한 순서겠지요. 그렇다면 이쪽 길부터 순서대로 공격하면 되겠군요. 이쪽 길의 매복은 소량산(小梁山) 부근이 좋을 듯 합니다.”
소량산은 산세가 험한데다 정상 부근에는 가파른 바위들로 이루어진 지대가 있어서 잠복해 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장소였다. 이어 동중산은 두 번째 길을 따라 손가락을 이동시켰다.
“두 번째 기습은… 태평곡(太平谷) 일대가 괜찮을 듯 싶습니다.”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곡은 계곡이 깊고 은밀하지.”
“예. 그리고 세 번째로는…”
“더 이상은 필요 없다.”
“예?”
동중산이 반문하자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번째 기습이 성공하면 마지막 무리는 본산으로 와서 해결하도록 하자.”
동중산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들이 계획을 세우는 광경을 노해광은 한쪽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절대 서두르지도 않았고,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실현 가능한 일을 최대한 신중하고 치밀하게 짜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매복 장소를 아무렇게나 선정한 것 같아도 오랜 세월 동안 종남산 일대를 헤집고 다녔던 노해광은 그들이 고른 장소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감탄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비천호리라고 하더니 정말 이름 그대로구나…’
동중산뿐 아니었다. 계획을 검토하고 보완하는 진산월의 모습은 평생을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살아온 노강호(老江湖)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그 두 사람이 계획을 입안(立案)하고 추진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간혹 낙일방이 몇 마디를 물었을 뿐, 아무도 그들의 계획에 반대하거나 이견(異見)을 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는 굳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계획을 최종적으로 점검한 진산월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상원건의 얼굴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상원건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행여 나보고 종남파를 떠나라고 할 생각이라면 미리 정중하게 거절하겠소.”
진산월은 선수를 치는 상원건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상 대협께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말에 상원건은 귀가 번쩍 뜨이더니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말씀하시오.”
“현재 본파에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몇 명 머물러 있습니다. 내일 하루 만이라도 상 대협께선 그들을 지켜 주십시오.”
상원건은 처음에는 진산월이 자신을 초가보와의 싸움에서 빠지게 하려고 핑계를 대는 것으로 알고 그의 부탁을 거절하려 했다. 하나 생각해 보니 현재 종남파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중 무림인(武林人)이 아닌 사람은 석지명과 그의 하인들을 포함하여 거의 칠팔 명이나 되었다. 내일 벌어질 초가보와의 결전에서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종남파에는 커다란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자신의 딸인 상소홍도 끼어 있지 않은가? 석지명이야 자신의 개인 보표가 있다고 해도 나머지 사람들은 자칫 싸움의 와중에 생사(生死)의 위기에 처할지도 몰랐다.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시되는 일이었다. 상원건은 몇 번이나 생각을 거듭하고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하겠소.”
“부탁드리겠습니다.”
상원건이 맡은 일은 결코 수월한 게 아니었다. 종남파에서 내일의 싸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은 유소응과 응계성을 제외하더라도 장승표와 정산, 갈 노인, 그리고 워낙 심한 부상을 입은 송천기 등이 있다. 거기에 상소홍과 석지명 일행까지 합치면 한 사람이 보호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인원이었다. 이들을 완벽하게 보호한다는 것은 오히려 절정고수들과의 싸움보다 더욱 힘들고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처음에 어려운 부탁이라고 한 진산월의 말은 단순히 의례적인 겉치레는 아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주춤거리고 있는 지일환과 시선이 마주쳤다. 지일환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진 장문인, 나는 종남파의 소속이 아니니 이번 일에는 아무래도 빠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평상시라면 아무리 지일환의 낯짝이 두껍다 해도 이런 말을 쉽게 내뱉을 수는 없었을 텐데, 사정이 워낙 다급하다 보니 염치불구하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중인들의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지일환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나는 무공도 보잘 것 없고 별다른 장기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내일과 같은 싸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오. 오히려 내가 빠져 주는 게 진 장문인을 도와주는 일이 될 거요.”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은 이제 그만 본파를 떠나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소. 늦기 전에 어서 가 보시오.”
그야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지일환은 멍하니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이내 멎쩍은 웃음을 흘렸다.
“헤헤… 과연 진 장문인의 마음은 하해(河海)와 같소이다. 진 장문인과 종남파의 무운(武運)을 빌겠소.”
지일환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더니 그가 다시 마음을 바꾸어 자신을 제지할 것이 두려운지 황급히 몸을 돌려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나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진산월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동중산을 돌아보았다.
“그가 초가보로 갈 것 같으냐?”
동중산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는 이씨세가에 쫓기는 신세라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의탁할 곳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본파에 더 머무를 수 없는 형편이라면 당연히 초가보로 가겠지요. 더구나 초가보에서 반겨줄 좋은 정보까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초가보에서 그의 말을 믿어 줄까?”
“믿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노해광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들은 그자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냐?”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자 앞에서 그런 중대한 계획을 의논했단 말이냐?”
“지일환은 눈치가 빠르고 신법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만일 일부러 그를 배제했다면 숨어서 우리의 말을 엿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를 이 자리에 끼워 넣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노해광은 아직도 영문을 몰라 하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짜놓은 계획은 모두 엉터리란 말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고 듣지 않았느냐? 그자가 네 짐작대로 초가보로 간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
노해광의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진산월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매복할 장소만 바꾸면 되는 일입니다.”
“뭐라고?”
“지일환이 초가보로 가서 사정을 밝힌다 해도 초가보에서는 본파를 공격할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소량산과 태평곡에서 우리를 제거하려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다른 곳에서 그들을 기습한다면 그들의 의표를 찌를 수 있습니다.”
“만일 지일환이 초가보로 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당초의 계획대로 매복 작전을 벌이는 것이니 사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기습하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제서야 노해광은 진산월의 계획이 모두 치밀한 궁리 끝에 나온 것임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초가보의 공격을 알려 준 것은 불과 반시진 전의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효과적인 매복 작전을 생각했을 뿐 아니라 지일환의 배반까지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해광은 새삼스런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의 얼굴은 해골을 연상케 할 만큼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눈빛은 고적했으며, 음성은 나직했다. 강호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무서운 검객 같은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 이제는 노해광도 그의 그 조용한 듯한 모습 속에 얼마나 뛰어난 두뇌가 존재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진산월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의 무공이 아니라 머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동중산을 향해 물었다.
“소량산 대신에 적당한 곳을 알고 있나?”
동중산은 이미 생각해 놓은 곳이 있는 듯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고관담(高冠潭) 부근이 좋을 듯 합니다.”
동중산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 그곳에 잠복해 있기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고관담은 동중산이 초가보의 습격을 피해 상당 기간 동안 숨어 지내던 곳으로, 그 일대의 지리는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만큼 훤했다. 특히 그는 고관담의 동굴 지대에 몇 개의 은밀한 은신처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 은신처들을 이용하면 아주 효과적인 기습을 할 수가 있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새벽에 고관담으로 간다.”
진산월이 그 말만을 하고 몸을 일으킬 듯 하자 노해광이 다시 물었다.
“태평곡을 대신할 장소도 물색해야 하지 않느냐?”
“그건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고관담에서 초가보의 선봉 부대를 제거한 다음 우리는 초가보로 향합니다.”
노해광은 흠칫 놀랐다.
“초가보의 본진으로 말이냐?”
“그렇습니다. 초가보의 고수들이 본파에 도착할 때, 우리는 초가보를 공격합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진산월에게 고정되었다. 진산월의 음성은 조용했으나 중인들의 귀에는 다른 어떤 음성보다 크고 강렬하게 들렸다.
“초가보가 살아남을지 본파가 살아남을지 내일이면 판가름납니다. 다만 싸움 장소가 본파가 되는 것은 사양합니다. 여기서 흘린 피는 이미 충분하고도 남으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