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5화
제138장. 장부지망(丈夫之望)
그날 저녁. 종남파에는 때아닌 연회가 벌어졌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연회는 아니었다. 오히려 차분하고 조용한 가운데 약간은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일 초가보와의 숙명의 결전을 앞두고 연회를 벌인다는 것은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연회를 지시했으며, 모두들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진산월이 굳이 오늘 저녁에 연회를 연 것에는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뜻이 있었다. 우선은 과거의 일로 노해광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종남파의 여러 제자들과 그와의 소원한 관계를 풀어 줄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심산이 있었다. 어떤 과정을 거쳤건 종남파의 선배이며 사숙인 노해광이 다시 종남파로 돌아온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귀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진산월은 떠났던 사람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초가보와의 격전을 앞두고 문하제자들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무리 비장한 결심을 하고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고 해도 그런 격전을 앞에 두고 태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일 연회라도 열지 않았다면 종남파의 제자들에게 오늘 저녁은 생애(生涯)에 가장 긴 밤이 되었을 것이다.
웃고 떠드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했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일의 일을 위해서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풍성하게 준비했던 음식이 거의 없어질 정도로 다들 왕성한 식욕을 자랑했다. 특히 진산월이 누구보다도 많이 먹었다. 앙상하게 마른 그의 몸을 생각해 본다면 그런 음식들이 다 어디로 들어갈지 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낙일방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방취아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어요?”
낙일방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진산월을 턱으로 가리켰다.
“장문사형 말이야. 꼭 예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아?”
방취아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정말 그렇네. 다시 돌아온 후로는 별로 많이 드시는 걸 못 봤는데 오늘은 정말 엄청나게 드시네. 식욕이 돌아온 건가?”
“그런가 봐. 장문사형의 저런 모습을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군.”
“그래도 이건 꼭 먹어야 돼요. 사형 주려고 내가 장 대가(張大哥)를 꼬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그녀가 잘 구운 닭다리를 내밀자 낙일방은 주저하지 않고 받아서 뜯어 먹었다.
“맛있군. 장문사형이 만들었던 남전계퇴 만큼은 못해도 아주 좋은 솜씨야. 그런데 그 장승표란 사람은 원래 요리사였어? 생긴 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방취아가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 그런 얼굴의 요리사가 어디 있겠어요? 원래 사냥꾼인데 혼자 살아서 그런지 요리 솜씨가 좋아서 주방 일을 맡고 있는 거예요.”
“그렇군. 동 사질과 죽이 잘 맞는 걸 보니 두 사람이 원래 친구였나 보지?”
“아니요. 동 사질을 만나기 전에 이미 장문사형과 잘 아는 사이였대요. 아무튼 생긴 건 그래도 성격이 화통해서 다들 좋아해요. 툭하면 술 먹자고 아무나 붙잡고 피곤하게 하는 것 외에는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죠.”
낙일방이 어깨를 움츠렸다.
“술고래라면 조심해야겠군.”
“왜요? 사형도 술이라면 죽고 못 사는 사람 아니에요?”
낙일방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예전처럼 마시지 않을 생각이야.”
방취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목표로 한 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술을 입에 대지 않기로 맹세했거든.”
“맹세라니? 누구와 말이에요?”
“나 자신과 말이야.”
방취아는 새삼스런 눈으로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목표가 무언데요?”
낙일방은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어른스럽고 듬직해 보여서 방취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 달 사이에 낙일방은 부쩍 성장한 모습이었다. 단순히 외모나 행동거지만이 아니라 기질 자체도 변한 것 같았다. 방취아는 그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예전의 철없고 순진한 모습이 그립다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종남파는 발전하고 있고 문하제자들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과거와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는 것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한쪽에서는 서문연상과 전흠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사숙이면 사숙답게 굴어요. 쩨쩨하게 굴지 말고.”
서문연상의 핀잔에 전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내가 쩨쩨하다고?”
서문연상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럼 아니란 말이에요? 무공 한 수 가르쳐 달랬더니 갖은 핑계를 대고 이리저리 빼고 있으니 그게 쩨쩨한 게 아니고 뭐예요?”
전흠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동안 멀거니 서문연상을 쳐다보더니 얼굴이 점차로 붉게 상기되었다.
‘이 계집애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군.’
전흠이 막 발작하려 할 때, 전풍개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어째서 만나기만 하면 싸우려고 드는 거냐?”
전흠은 움찔하여 급히 전풍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서문연상이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전풍개를 향해 쪼르르 다가가는 것이었다.
“조사님, 전 사숙께서 소녀를 너무 핍박하고 있사옵니다.”
“핍박하다니?”
서문연상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전 사숙이 연무장에서 검술을 수련하고 있길래 제가 잠시 구경을 했사옵니다. 그런데 전 사숙의 검술이 어찌나 현란하고 위력적이던지 제가 배우고 싶은 마음에 사숙께 정중히 지도를 요청했습니다.”
옆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전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정중히라고? 쳇! 두 번 정중했다가는 사람을 아예 잡겠군 그래.”
서문연상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전풍개에게로 바짝 다가오며 계속 조잘거렸다.
“제자는 늦게 본파에 입문하여 아직 제대로 본파의 무공도 전수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 사숙께 처음으로 도움을 청한 것인데… 전 사숙께서는 소녀의 요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런 무공은 익힐 필요가 없다고…”
“아니, 내가 언제…”
전흠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전풍개가 힐끔 쳐다보는 바람에 황급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전풍개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물었다.
“네가 펼친 것이 무엇이었느냐?”
전흠은 공연히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성라검법의 후반부 여섯 초식이었습니다.”
성라검법은 모두 십팔 초로 되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후반부의 여섯 초식은 절초(絶招) 중의 절초로 강호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무공이었다. 전흠은 어려서부터 전풍개에게 체계적으로 성라검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 수준이 능히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니 그가 성라검법을 시전하는 것을 본 서문연상이 한눈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풍개는 한숨을 내쉬더니 서문연상을 돌아보았다.
“흠아가 네게 가르쳐 주고 싶어도 가르쳐 줄 수 없는 상황이구나. 너는 아직 본파의 무공에 입문(入門)하지도 않았지 않느냐?”
서문연상은 움찔하다가 조금 풀이 죽은 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무도 제게 아려 주지 않아서…”
“성라검법을 익히려면 먼저 본파 무공의 기초가 되는 천하삼십육검과 장괘장권구식을 완벽하게 터득해야 한다.”
“그러면 익힐 수 있나요?”
“그 다음에는 유운검법과 월녀검법 중 하나를 택해서 익혀야 한다. 너는 여자이니 월녀검법이 좋을 것이다. 성라검법은 그 다음에나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문연상의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천하삼십육검이나 장괘장권구식은 워낙에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는 무공이어서 별로 익히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익혀야만 비로소 성라검법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의기소침해진 것이다. 사실 성라검법은 삼락검에 못지않은 상승절학(上乘絶學)이라서 탄탄한 기초가 없으면 도저히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조사님처럼 알려 주면 되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윽박지르기만 하니…”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전풍개가 전흠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원래 바닷바람을 쐬고 자란 놈은 말투가 거칠고 투박한 법이다. 너는 이번 일이 끝나면 따로 노부를 찾아오너라.”
서문연상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전풍개를 쳐다보았다.
“예? 조사님을요?”
하나 전풍개는 그 말만을 내뱉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서문연상은 전풍개가 자신에게 직접 사사(師事)하겠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회로애락(會怒哀樂)이 변화무쌍한 그녀는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생글생글 웃으며 애꿎게 옆에 앉아 있는 유소응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꼬마 사형, 많이 먹었어?”
유소응은 막 전병(煎餠) 하나를 집어먹다 하마터면 사레가 걸릴 뻔했다.
“쿡… 예.”
그녀는 짓궂은 표정으로 유소응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 같은 사매가 생겨서 기분 좋지? 얼마 후면 내 생일인데 꼬마 사형은 이 귀엽고 예쁜 사매에게 무슨 선물을 해줄 거야?”
유소응이 아무리 과묵하고 침착하다고 해도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그녀가 옆에 바짝 달라붙어 아양을 떨자 절로 당황하여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지켜보고 있던 장승표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오늘 애늙은이가 아주 호되게 당하는구나. 그러기에 이 아저씨가 항상 어린애는 어린애다워야 한다고 하지 않더냐?”
유소응의 작은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서문연상은 장승표를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남의 얘기 할 게 아니에요. 어린애가 어린애다워야 한다면 어른은 어른다워야죠.”
장승표는 웃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어른답지 못하단 말이냐?”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장승표는 순진한 표정으로 털북숭이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대고 큰 눈을 껌벅껌벅거리더니 이내 히죽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어른이다. 열여섯 살에 엄동설한에 삼 일 동안 늑대 사냥을 갔다온 후 나는 어른이 되었지.”
서문연상은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아미를 찡그렸다.
“늑대를 잡았다고 어른이 된단 말이에요?”
장승표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사냥꾼의 세계는 그렇다. 맹수를 잡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는 거지.”
“그런 법이 어딨어요?”
장승표의 얼굴이 돌연 엄숙해졌다.
“그것말고도 아이가 어른이 되는 법이 또 하나 있지.”
서문연상은 호기심이 동해 급히 물었다.
“그게 뭔데요?”
“여자와 자 보는 것이다. 여자를 알게 되면 사내아이는 금세 어른이 되지.”
“뭐라고? 이런 엉터리! 주정뱅이인 줄만 알았더니 순 색골이잖아!”
그녀가 얼굴이 빨개져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에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장승표가 낄낄거리며 자리를 피하자 그녀가 술병을 든 채로 그 뒤를 쫓아갔다.
“거기 서요, 이 색골! 어린애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그 말버릇을 고쳐 주고 말 테예요!”
“헤헤…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그렇다면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는 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들어라. 원래 여자애가 여인이 되려면…”
“닥치지 못해요?”
이런 소동이 벌어지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노해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진산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엉망인 아이로군. 어디서 저런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인 거냐?”
그런데 진산월의 대답이 의외였다.
“그녀는 잘 적응하고 있군요.”
노해광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치켜떴다.
“뭐라고? 사문의 어른들 앞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게 잘하는 거라고?”
“오늘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보십니까?”
“…!”
“오늘 이 자리는 본파의 존망(存亡)이 달린 결전을 앞두고 지나친 긴장과 불안으로 초조해 있을 제자들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만든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공연히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거나 규범에 얽매여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면 차라리 열지 않느니만 못할 겁니다.”
노해광은 여전히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가 네 의중을 알고 일부러 저런 행동을 했단 말이냐?”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단지 그녀도 좌중의 분위기가 무겁거나 딱딱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평소에 하던 대로 행동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예의범절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의를 차려야 할 자리라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정중한 태도를 보였을 겁니다.”
노해광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서문연상에게로 향했다. 그때 서문연상은 필사의 추적 끝에 장승표를 붙잡고 그의 이마에 술병을 붓고 있는 있는 중이었다. 장승표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통에 장내는 그야말로 저잣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저 아이가 예의를 지킬 줄 안다고?”
“그녀는 예의범절이라면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배운 사람입니다. 검보가 그렇게 허술히 사람을 키우는 곳은 아니지요. 그녀는 본파의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겁니다.”
그 말에 노해광은 흠칫 놀랐다.
“저 아이가 검보의 여식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노해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서문연상을 지켜보더니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얼마 전에 실종되었다던 서문장천의 딸이 바로 저 아이로군.”
“맞습니다.”
노해광은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되자 오히려 더욱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보는 규율이 추상(秋霜)과 같이 엄하고 가풍(家風)이 엄격하다고 하는데 저 아이는 전혀 그런 곳에서 자란 여자 같지 않구나.”
“타고난 천성(天性)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그녀 덕분에 본파의 분위기가 밝아진 것 같아 저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때 동중산이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이쯤에서 자리를 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비록 긴장을 이완시키기 위해 만든 자리였으나 지나치게 되면 자칫 당초의 각오가 흐트러질 수도 있었다. 동중산은 적당한 기회에 마무리를 지으려 했고, 진산월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선뜻 승낙을 한 것이다.
노해광은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들어맞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동중산을 가만히 주시했다. 동중산에 대한 강호의 소문은 그도 익히 듣고 있었다. 하나 그에 대한 강호의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비천호리는 심기가 깊고 수단이 탁월하나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남의 뒤통수를 치고 거짓과 협잡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나 본 동중산은 세간의 평가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제법 준수한 얼굴은 한쪽 눈이 없어지는 바람에 거칠고 투박스럽게 변했지만, 그는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웠고, 누구보다도 현명했으며, 사태 파악이 빠르고 민첩했다. 빈틈없이 진산월을 보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비천호리에 대한 강호의 소문과 너무도 달라서 당혹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동중산에 대한 진산월의 믿음도 확실해 보였다. 그들은 굳이 세세한 속마음을 밝히지 않아도 서로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처럼 손발이 척척 맞았다. 지일환을 내보낼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솔직히 노해광은 그런 두 사람의 사이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과거의 자신에 대해 후회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자신도 그럴 기회가 있었다. 지금의 동중산처럼 임장홍의 옆에서 그와 호흡을 나누며 힘을 합쳐 나갈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럴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속 좁은 질투와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그를 배척했었다. 그때 임장홍이 얼마나 자신의 도움을 바랐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를 철저히 외면했었다. 문득 멱살이 잡힌 채 쓸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임장홍의 모습의 뇌리에 떠올랐다.
“제길…”
노해광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마침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전풍개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이 또 불만이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노해광이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으나, 전풍개는 미심쩍은 얼굴로 한동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풍개가 기억하는 과거의 노해광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잔머리가 밝은 청년이었다. 그리 특출난 재능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수단이 좋고 의리(義理)도 있어서 따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장문인감은 아니었어도 훌륭한 참모감으로 충분히 문파의 기둥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노해광이 이미 오래 전에 종남파를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풍개는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노해광은 야심(野心)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임장홍과의 사이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 임장홍을 잘 보필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노해광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갓 장문인이 된 나이 어린 사질을 협박하여 주루를 네 개나 강탈해 갔다는 것은 선뜻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만큼 전풍개가 느끼는 배신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아마 백동일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만 아니었다면 노해광을 이렇듯 선뜻 다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전풍개는 노해광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지는 않았다. 한 번 떠난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떠날 수 있다. 더구나 내일은 종남파의 사활(死活)이 걸린 중대한 결전이 벌어지는 날이 아닌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노해광이 혼자만 살겠다고 다시 종남파를 등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것이다.
‘내일 네놈을 지켜보겠다. 만약 다시 또 엉뚱한 생각을 품는다면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처단하고야 말 것이다.’
전풍개는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노해광을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들어가서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었다. 전풍개는 운공(運功)으로 밤을 지새울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내일 하루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힘을 발휘하여 종남파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다. 생사(生死)는 이미 도외시한 지 오래였다. 종남파가 아직 건재하며, 그 깃발이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만천하(滿天下)에 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늙은 목숨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날 밤, 한 사람이 비밀리에 진산월을 찾아왔다. 진산월은 그와 한참 동안 밀담(密談)을 나누었으며, 그가 떠난 후에 조용히 동중산을 불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갈 노인은 눈살을 잔뜩 찡그렸다.
“누구냐?”
문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갈 노인이 침상에서 일어나 다시 물으려 할 때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갈 노인은 의외인듯 눈을 번쩍 빛냈다.
“네놈이 웬일이냐?”
갈 노인의 방에 들어온 사람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쯧.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긴장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앉거라. 다리도 불편한 놈이 휘청거리며 서 있는 모습에 나까지 공연히 불안해지니 말이다.”
야심한 밤에 갈 노인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응계성이었다. 응계성은 다리의 치료를 받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걷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갈 노인의 방까지 오는 동안 이미 지쳤는지 응계성의 이마는 흐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상반신도 흠뻑 젖어 있었다. 응계성은 연신 비틀거리면서도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침상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응계성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관자놀이 부근에는 굵은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갈 노인은 응계성이 이를 악문 채로 힘겹게 의자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물었다.
“그래,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놈이 무슨 일로 노부를 찾아왔느냐?”
응계성은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갈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부탁?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네가 몸을 함부로 굴리지만 않으면 너는 한 달 내로 예전처럼 뛰어다닐 수 있다.”
“제 다리를 고쳐 주신 것에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갈 노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네 공치사를 듣자고 한 일이 아니다. 다 그 망할 놈의 장문인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조르는 바람에 한 일이니 너는 신경 쓸 거 없다.”
이어 갈 노인은 응계성을 슬쩍 흘겨보았다.
“부탁이란 게 뭐냐? 다리 고치는 거 말고도 또 노부에게 원하는 게 있단 말이냐?”
웬일인지 응계성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갈 노인께서는 현세에 보기 드문 일대신의(一大神醫)라고 들었습니다.”
갈 노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어느 놈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사람 잘못 봤다. 노부는 그저 내 한 몸이나 간수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다.”
“갈 노인의 성(性)이 원래 제갈(諸葛)이며, 본신(本身)은 무림신의(武林神醫)로 알려진 신수무정 제갈…”
“닥쳐라, 이놈!”
응계성이 말을 맺기도 전에 갈 노인이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응계성은 움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갈 노인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두 눈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누구냐? 어떤 놈이 그런 헛소리를 지껄인 거냐?”
응계성은 갈 노인이 설마 이리도 펄펄 뛸 줄은 몰랐는지 다소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사조께서…”
사조라는 말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갈 노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역시 나를 알아봤군. 하긴… 처음 봤을 때 못 알아본 게 신기한 일이었지.’
갈 노인의 눈가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갈 노인의 정체는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의술 실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신수무정 제갈외였다. 제갈외는 아무리 심한 부상을 당한 환자라도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살려낼 수 있는 당대(當代) 제일의 신의이며, 오랫동안 무림에서 의술로 명성을 떨쳐 온 제갈세가(諸葛世家)의 당대 가주였다. 의술로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은 오직 철면군자 노방 뿐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생각이었다. 하나 웬만해서는 치료받기가 힘들고, 최근에는 아예 무림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려 그의 치료를 받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다.
원래 제갈외는 종남파의 전전대 장문인인 하원지와 적지 않은 친분이 있었다. 하원지보다 나이가 십여 살 어렸으나, 나이를 떠나 절친한 친구 사이로 두터운 정분을 유지했었다. 하나 하원지가 죽고 나자 하원지 외에는 종남파에 특별히 친한 사람이 없던 제갈외는 곧 종남파와 소원(疏遠)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몇 년 전에 제갈외는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던 친손자를 잃고 크게 낙담하여 제갈세가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그는 과거에 하원지와 사귀었던 추억을 되살려 종남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십왕촌에 거처를 정했다. 그곳에서 당시의 좋았던 기억을 곱씹으며 남은 여생(餘生)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것만이 손자를 잃은 슬픔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나 우연히 장승표로 인해 다시 종남파와 연(緣)을 맺게 되었고, 결국 죽기 전에는 결코 나오지 않으려 했던 무림의 일에 다시 뛰어들게 되었으니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갈외가 진산월의 거듭된 부탁을 투덜거리면서도 모두 들어주었던 것도 하원지와의 오래된 친분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하원지의 사제인 질풍검 전풍개를 제갈외가 모를 리 없었다. 하나 당시에도 그저 인사만 하는 사이였고, 전풍개의 표독할 정도로 차가운 성격이 평소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별 다른 친분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종남파에서 이십 년 만에 전풍개를 다시 보게 되었으니 제갈외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풍개는 제갈외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그동안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데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풍개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지금 응계성의 말을 듣고 보니 전풍개는 이미 제갈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갈외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가득 어렸다. 친손자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이름까지 바꾸고 자신을 잊은 채 살려 했건만, 그것마저 실패해 버렸다. 결국 조용히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겠다는 꿈은 깨어졌고, 자신은 어떻게든 다시 강호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후우…”
제갈외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만사불의(萬事不意)라더니 하늘의 뜻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나 보구나… 피한다고 없어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겠지. 그래, 노부가 바로 제갈외다. 너는 노부에게 무엇을 부탁하려 하느냐?”
응계성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제갈외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일 제가 싸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갈외의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뭐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응계성의 음성에는 절박한 빛이 담겨 있었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다들 목숨을 내걸고 본파를 지키려는 마당에 혼자만 침대에 누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내일 하루만이라도 제가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허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제갈외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정색을 하고 매서운 눈으로 응계성을 쏘아보았다.
“네놈은 노부가 신선(神仙)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너는 지금 부러진 다리를 겨우 이어놓은 상태다. 싸움은커녕 조금만 심하게 움직여도 다리가 다시 부러져 아예 영영 붙지도 못하게 돼 버릴 거다.”
“상관없습니다. 내일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제갈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부의 말을 뭘로 듣는 거냐? 네 다리를 이어 붙인 것도 노부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한계다. 지금의 너는 남과 싸우기는 고사하고 적어도 열흘은 꼼짝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단 말이다.”
하나 응계성의 태도는 단호했다.
“열흘이 아니라 하루만 누워 있어도 저는 미쳐 버릴 겁니다. 절름발이가 되어도 좋으니 사형제들과 같이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안 된다!”
“제갈 노인…”
제갈외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음성을 한결 누그러뜨렸다.
“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다리 수술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놈을 무슨 수로 남과 싸울 수 있게 만든단 말이냐? 더구나 상대는 초가보의 일급 고수들이 아니냐? 네가 그 싸움에 억지로 끼어들다가는 오히려 종남파에 해(害)만 끼치게 될 것이다.”
응계성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눈길이 너무 사나워서 제갈외는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응계성은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응시하고 있더니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제갈세가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희귀한 비방(秘方)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중에서도 특히 ‘진귀토(盡歸土)’ 라는 비방은 곧 죽을 사람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희대(稀代)의 비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응계성의 입에서 비방이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제갈외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진귀토’ 라는 말에는 아예 사색이 되어 버렸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응계성을 쏘아보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놈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본가에는 그런 비방이 있다. 하지만 네놈은 왜 그 비방에 ‘진귀토’ 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었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진귀토’ 는 사람의 체내에 있는 잠력(潛力)을 격발시켜 일시적으로나마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방법이다. 그것이라면 아마도 너를 예전처럼 뛸 수 있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탁월한 효능만큼이나 치명적인 후유증이 있다.”
“…!”
“‘진귀토’ 란 곧 ‘다하면 흙으로 돌아간다’ 라는 뜻이다. 격발된 잠력이 모두 소비하고 나면 전신의 대사(代謝) 능력이 떨어져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과거에 본가에서는 이 비법을 세 사람에게 시술(施術)했는데 결과는 모두 똑같았다. 그들은 비록 죽음 직전에 하루의 소중한 시간을 벌었지만, 잠력이 떨어지자 체내의 기혈(氣血)이 역류(逆流)하여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 뒤로 본가에서는 더 이상 이 비법을 시전하지 않기로 했다.”
제갈외는 응계성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자 한자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은 죽음을 부르는 비법이다. 네 다리는 열흘 후면 분명히 낫는다. 한때의 충동을 못 이겨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겠느냐? 아니면 순간의 굴욕을 참고 후일 더욱 큰 뜻을 펼치겠느냐?”
응계성은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하하…”
난데없는 그의 웃음에 놀란 제갈외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응계성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갈 노인, 아니 제갈 선배. 선배도 강호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니 알 겁니다. 강호에서는 때로는 목숨을 내걸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응계성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박박 깎은 머리에 크고 작은 흉터로 뒤덮여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웃음만큼은 왠지 흥겨워 보였다.
“난 지금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걸 위해서 내던질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문파, 내가 좋아하는 이상(理想)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질 기회가 온 겁니다. 이런 날, 이런 때 꽁무니를 뺀다면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저주하며 살게 될 겁니다.”
“…!”
“후유증? 그런 건 내게는 상처에 앉은 딱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나이는 인생에 딱 한 번 타오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사나이랍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말입니다.”
제갈외는 웃고 있는 응계성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들 종남파의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군. 목숨을 버리는 걸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오늘 낮에 찾아왔던 그자도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 같았어. 대체 무엇이 자네들로 하여금 그렇게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도록 하는 건가?”
이번에는 응계성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문파의 재건이 그렇게 귀중한 건가? 자네들같이 전도가 양양하고 앞길이 구만 리(九萬里) 같은 청년들이 기꺼이 목숨을 내던져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왜 자네들은 그토록 위험한 줄타기를 하려는 건가?”
제갈외는 다시 탄식을 토해냈다.
“일생에 한 번 타오르겠다는 자네의 의지(意志)는 정말 존중하는 바일세. 하지만 타오를 수 있는 기회가 이번 한 번 뿐이라고는 생각지 말아 주게.”
응계성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타오를 수 있는 기회는 내가 정합니다.”
“하지만 목숨이란…”
“누구나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는 법입니다, 제갈 선배.”
그 말에 제갈외는 입을 다물었다. 응계성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제갈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응계성의 다부진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후회나 미련 따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계성 또한 입을 굳게 다문 채 피하지 않고 제갈외의 시선을 받았다.
제갈외는 문득 과거의 ‘진귀토’ 를 시술 받았던 세 사람이 생각났다. 당시 제갈외는 최악의 상황을 숨기지 않고 알려 주었다. 자연히 그들도 모두 시술 후에는 자신들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시술을 받았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후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제갈외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왜 그들은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시술을 받고 기꺼이 죽어갔는가?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人生)을 자기 스스로가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니 후회나 미련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한참 후에 제갈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시진 후에 시술을 시작하겠네. 서너 시진은 족히 걸릴 테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