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6화
제139장. 심야소사(深夜小事)
밤이 깊었다. 두 남녀는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남자는 그윽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당신은 너무 아름답군.”
여인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평소에는 예쁘지 않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남자, 소지산은 따라 웃으며 방취아의 탐스런 볼을 슬쩍 어루만졌다.
“예전에는 가끔 사매가 너무 얄밉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
“내가 언제요?”
“그러니까 가끔, 아주 가끔…”
방취아는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당신이야말로 무척이나 심술 맞은 사람이었다는 거 알아요?”
소지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적이 있었나?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군.”
“정말이에요.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몸은 잘 씻지도 않아서 늘 어깨에 비듬이 수북하게 내려앉아 있고, 가끔씩 한마디 할 때마다 사람 속을 은근히 뒤집어 놓기도 하고… 아무튼 정말 심술 맞고 못된 사람이었어요.”
“그랬었나?”
“그렇다니까요. 당신은 나 만나서 사람 된 줄 알아요.”
소지산은 빙그레 웃었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군. 역시 나는 운(運)이 좋은 사람이야.”
“나도 운이 좋은 여자예요.”
“왜?”
그를 쳐다보는 방취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게 반짝였다.
“당신처럼 심술 맞고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요.”
“좋은 사람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 말이로군.”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소지산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방취아는 한 마리 어린 새처럼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소지산은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상대방의 체온을 느낀 채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방취아가 다시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그때… 정업사의 후원에서 숨어 지낼 때…”
“그때가 어땠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비참해서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왠지 조금씩 그리워져요. 둘이 조그만 불빛을 마주보고 앉아 있던 기억… 창문 너머로 내리는 눈을 보며 서로를 격려해주던 모습도 생각나고… 사형의 체취도 잊을 수가 없어요.”
“내 체취라니… 끔찍했을 텐데.”
방취아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에요. 조금 고리타분하긴 했어도 그때 사형에겐 아주 좋은 냄새가 났어요. 그래서 나는 사형이 보기보다는 그렇게 지저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그때도 아침저녁으로 나 몰래 몸을 씻었죠?”
소지산은 허를 찔린 듯한 모습이었다.
“알고 있었어?”
방취아는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그럼요. 몸에서 냄새 나면 내가 싫어할까 봐 사형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소지산의 얼굴이 구겨졌다.
“볼품사나웠겠군.”
“아니요. 오히려 나는 그때부터 사형이 마음에 들었어요.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은근히 나를 위해 배려해 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내가 청혼할 때도 몸을 씻으라는 조건을 내걸었나?”
“호호… 그건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런 거예요.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사형 표정이 얼마나 귀여웠다고요.”
“끔찍했겠지.”
“호호… 정말 귀여웠다니까.”
두 남녀는 서로 속삭이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했으며, 가끔은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기도 했다. 끝없는 밀어(蜜語)가 샘물처럼 솟아 나오고 있었다.
한참을 행복한 기분에 젖어 소곤거리다 문득 방취아가 꿈결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일 밤에 장문사형에게 당신과의 관계를 밝히겠어요.”
소지산은 빙긋 웃었다.
“벌써 말했는걸.”
방취아의 몸이 움찔했다.
“뭐라고요? 언제요?”
“조금 전에. 연회가 파할 때쯤 찾아가서 말씀드렸지.”
방취아는 급히 물었다.
“장문사형이 뭐래요?”
“씩 웃더니 내 어깨를 치면서 그러더군. ‘성공했구나’.”
“다른 말은 없었어요?”
소지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한마디 더 하셨지. ‘취아의 성격을 맞추려면 네가 애 좀 쓰겠구나.’ 그러셨어.”
방취아의 고운 아미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뭐예요? 장문사형이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이에요?”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미심쩍으면 가서 직접 물어 봐.”
“그걸 여자가 자기 입으로 어떻게 물어 봐요?”
방취아는 의심쩍은 눈으로 소지산을 흘겨보았다.
“내가 못 물어 볼 줄 알고 나를 놀리는 거죠? 장문사형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요.”
“그럼 무어라고 했을 거 같은데?”
“음… ‘취아가 큰 결심을 했구나. 게으르고 둔감한 사제를 제대로 사람답게 만들어 보려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다니. 취아는 정말 예쁜 만큼이나 성격도 훌륭하구나.'”
소지산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 아직도 그런 소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정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방취아도 따라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어요? 하지만 서문연상 같으면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소지산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래, 그녀라면 정말 그럴 거야. 하하… 그녀는 보면 볼수록 몇 년 전의 사매를 닮았다니까.”
“잘 나가다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요? 그 아이가 어떻게 나를 닮았다고 그래요? 그 천방지축 왈가닥을 나와 비교하다니… 아까도 봤죠? 장 대가가 자기를 놀렸다고 다 큰 계집애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쫓아가서 기어코 술병을 뒤집어 씌운 걸.”
“하하… 그때 장 형님의 표정이 정말 볼 만 했었지. 그 황당해하는 표정이라니… 아마 당분간은 술 먹겠다는 소리를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걸.”
두 사람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그러다가 우연인지 방취아의 손이 소지산의 왼손에 닿았다. 방취아는 뱅어 같은 손가락으로 소지산의 왼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소지산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가 낮게 소곤거렸다.
“이 손은 괜찮나요?”
소지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어. 볼 테야?”
소지산은 왼손을 불쑥 내밀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머.”
“어때? 힘이 넘치지?”
소지산이 허리를 끌어당겨 그녀를 품안에 넣어도 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그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밤새 그런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방취아는 언뜻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녀의 자는 모습을 소지산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른손으로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을 때 그녀는 나직한 콧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소지산은 그녀의 몸을 편하게 뉘어 주고는 자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녀가 살짝 눈을 떴다.
“음… 어디 가려고요?”
소지산은 조용히 웃었다.
“후원에 가서 몸 좀 풀려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알았어.”
소지산이 저만큼 걸어가자 방취아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사형.”
“왜?”
소지산이 돌아보자 방취아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머뭇거렸다. 소지산은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좀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소지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내일 우리는 꼭 초가보를 물리칠 거야.”
짙은 어둠 속에서 방취아가 방긋 웃어 보였다.
“너무 당연한 말은 하지 말아요.”
소지산도 따라서 웃었다.
그때 방취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당신은 낙하구구검을 어디까지 익혔죠?”
“익힐 수 있는 데까지.”
“그럼 내일 그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겠군요.”
“당연하지.”
그녀는 활짝 웃었다.
“안심했어요.”
소지산은 방취아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자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빠져 나왔다.
소지산의 모습이 사라지자 방취아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는 어둠 속의 빈 공간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더니 소리 죽여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꼭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소지산이 후원으로 가 보니 한 사람이 달빛을 받으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냐?”
소지산의 물음에 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하얀 이가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내일 쓸 병기를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은 낙일방이었다. 소지산이 옆에 가서 보니 낙일방이 닦고 있는 물건은 검은 색 장갑이었다. 그 장갑은 전체가 검은 색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죽도 아니고 금속도 아닌 처음 보는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손가락 끝부분이 없이 손바닥과 손가락의 둘째 마디까지만 보호하게 되어 있어 언뜻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낙일방은 기름 먹인 천으로 그 검은 장갑을 구석구석까지 정성들여 닦고 있었다. 소지산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게 우일기 조사께서 쓰셨다는 묵령갑이냐?”
“예. 오랫동안 쓰지 않던 것이어서 이렇게 매일 닦아주고 있습니다.”
낙일방은 장갑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닦으면 닦을수록 부드러워져서 사용하기 편해집니다. 처음에는 너무 딱딱해서 얼마나 손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른 장갑과 비슷해졌죠.”
낙일방은 장갑을 양손에 끼었다. 달빛을 받아 검게 빛나는 장갑은 어딘지 모르게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낙일방은 장갑을 낀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고는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보세요. 아주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런데 그것은 무엇으로 만든 것이냐?”
“재질은 저도 잘 모릅니다. 무슨 은사(銀絲)에 특수한 액체를 발랐다고 하더군요.”
장갑을 낀 낙일방이 몸을 일으켰다. 예전에 그의 체구는 소지산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낙일방은 후원의 중앙에 가서 우뚝 섰다.
“사형도 연무(鍊武)를 하러 온 것 같은데, 모처럼 한번 어울려 보실래요?”
소지산은 눈을 번쩍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마주섰다.
“그렇지 않아도 정 사제가 네 칭찬을 많이 해서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보자.”
소지산은 두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릉!
나직한 검명(劍鳴)과 함께 그의 손에는 자연스럽게 검이 쥐어졌다. 그 동작을 본 낙일방의 안광이 유난히 번쩍거렸다.
“사형도 정말 많이 달라졌군요. 검을 뽑아 든 동작만 보아도 중압감이 느껴지네요.”
“나도 네 자세를 보니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든다.”
“하하… 그럼 시작할까요?”
“좋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출수(出手)했다.
팟!
눈부신 검광이 어두컴컴한 밤공기를 가르고 지나갔고, 예리한 파공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몇 차례의 공방(攻防)이 오간 후 소지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경력(勁力)을 뿜어내지 않는 거냐?”
낙일방의 얼굴에 먹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체내의 공력(功力)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기 힘들어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급적 자제하고 있습니다.”
“괜찮으니 경력을 사용해 보거라.”
“그럼 조심하십시오.”
낙일방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더니 검은 그림자가 폭사해 나왔다. 그와 함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음향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꽈릉!
낙일방의 두 주먹은 두 개의 검은 뇌전(雷電)과도 같았다. 그 위세가 어찌나 강력하던지 소지산은 감히 정면으로 맞받지 못하고 일단 몸을 피해야만 했다. 낙일방의 두 주먹은 정말 빠르고 무서웠다. 소지산은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검초의 변화로 상대해야만 했다. 하나 낙일방 또한 낙하구구검의 다양한 검로를 쉽게 뚫지 못했다.
팍!
소지산이 펼쳐낸 다섯 개의 검광이 낙일방의 주먹과 부딪치자 맥없이 사라져 버렸다. 낙일방은 묵령갑을 낀 주먹으로 소지산의 검광에 거리낌없이 마주쳤으며, 그때마다 소지산은 막대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지나갔다. 낙일방은 차츰 경력을 조절하는 데 익숙해져서 조금 전과 같은 강맹한 경력을 함부로 뿜어내지 않았다. 대신에 그만큼 초식의 수발(收發)이 민첩해져서 소지산은 오히려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웠다. 하나 소지산도 진정으로 무서운 살초(殺招)는 아직 선보이지 않았다.
다시 삼십여 초가 흘렀을 때, 소지산은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낙일방 또한 더 이상 손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지산의 얼굴에는 모처럼 보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정말 놀랍게 발전했구나.”
“사형이 손에 사정을 봐주어서 그런 거지요.”
“아니다. 너도 실력을 다 발휘한 게 아니지 않느냐? 전력을 기울였어도 내가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입이 무겁고 좀처럼 남을 칭찬하지 않던 소지산의 말에 낙일방은 쑥스러움을 느끼는지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사형의 검법도 날카로웠습니다. 변화가 다양하면서도 속에 무서운 살수(殺手)들이 숨어 있더군요. 그것도 본파의 검법인가요?”
“삼락검 중의 하나인 낙하구구검이다.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던 것을 장문사형이 찾아냈지.”
“그렇군요. 왼손을 다쳤다고 들었는데…”
소지산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였다.
“지금은 다 나았다. 갈 노인의 신세를 졌지.”
이번에는 소지산이 낙일방을 향해 물었다.
“맨손으로 검광을 잡아도 괜찮은 거냐?”
낙일방은 묵령갑을 낀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강력한 검기(劍氣)를 만나면 가끔 손에 통증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잘려지거나 베어지는 않습니다.”
“좋은 무기를 얻었구나. 조금 전에 보니 공력을 뿜어낼 때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더구나.”
“예. 묵령갑을 낀 채로 천단신공을 펼치면 묵룡기(墨龍氣)라는 특이한 강기(?氣)가 흘러나옵니다. 제대로 사용하면 검기처럼 직접 닿지 않아도 상대를 벨 수 있는데, 아직은 천단신공의 조절이 자유롭지 못해서 마음먹은 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가 사용했던 권법은?”
“처음에 펼친 것은 낙뢰신권이었고, 나중에는 구반장법과 옥뢰신장을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아직 칠 성(七成)의 경지밖에는 오르지 못해 본연(本然)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그 정도라니 그동안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겠구나. 정말 장하다.”
두 사람이 조금 전의 비무에 대해 서로간에 의견을 주고받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쳇. 정말 친밀한 사형제로군. 엄밀히 따지면 나도 사형제인데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그 눈의 주인은 전흠이었다. 전흠은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사실은 그도 연무를 하기 위해 후원에 왔는데 먼저 온 낙일방과 소지산이 비무를 하고 있는 바람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일단 등장할 시기를 놓치자 뒤늦게 나가기도 어색해서 전흠은 계속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소가의 실력이 상당해졌군. 확실히 팔을 고친 효과가 있긴 하나 본데. 저 정도라면 이제 동작의 단점은 없어졌다고 봐야겠군.”
전흠은 혼잣말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공력도 비슷하고 약점도 사라졌으니 결국 검법의 숙련도에 따라 우열(優劣)이 판가름나겠군. 이거 방심하다가 큰일 나겠는걸.”
전흠은 소리 없이 히죽 웃었다.
“아무튼 심심하지는 않겠어. 옆에서 경쟁자가 무럭무럭 크고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의 시선이 소지산의 앞에 있는 낙일방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은 얼굴이 곱상해서 대단치 않게 봤는데 의외인걸? 공력으로 보자면 나보다 훨씬 높을 것 같은데… 이놈의 집안은 대체 무공 서열이 어떻게 되는 거야? 완전히 뒤죽박죽이잖아?”
전흠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달이 적막감을 느끼게 했다. 전흠의 얼굴에 한 줄기 쓸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따라 왠지 고향에 있는 큰형님이 생각나는군. 지금도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그때 문득 전흠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안광이 예리하게 빛났다.
“엇?”
그는 소리 없이 한쪽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한 곳은 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작고 아담한 연못에 정자(亭子)가 서 있는 뜨락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정자 근처에서 두 명의 남녀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바른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아미를 곤두세우며 날카롭게 소리치는 사람은 소녀에서 막 여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서문연상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방화가 난처함이 가득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글쎄 무엇을 바른대로 말하라는 거요?”
원래 이 뜨락은 경치가 아름다우면서도 은밀한 곳에 있어서 사람의 인기척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전흠은 후원을 피해 한쪽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용케도 이곳으로 오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야? 저들 둘이 언제부터 저런 사이가 됐지?’
전흠은 야밤에 두 남녀가 단둘이 만나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약이 바짝 올라서 인상이 찡그려졌으나 곧 그들이 정담(情談)을 나누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서문연상은 개미허리처럼 가느다란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린 채 방화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당신의 정체를 모를 줄 알아요? 조금만 더 있으면 기억이 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밝히도록 해요.”
방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방화이고, 소저보다 며칠 먼저 종남파에 입문한 사람이오.
벌써 여러 날을 나와 함께 있었으면서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내가 그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잖아요? 당신이 할아버지의 생신 때 본가(本家)에 왔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미심쩍었어요. 그때 본가에서 초청한 사람은 모두 강호의 명문세가거나 명숙(名宿)들이었어요. 그러니 당신은 명문가의 후손이거나 명숙의 문하제자임이 분명해요.”
“…!”
“그런데도 당신은 본파의 제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궁리했죠. 본파에 입문한 것으로 보아 당신은 누군가의 제자는 아니에요. 그러면 틀림없이 명문가의 후손일 텐데,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에 할아버지의 고희연에 참석한 곳 중 방(方)씨 성을 쓰는 무림세가는 없었어요.”
그녀의 예리한 추긍에 방화는 그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칼날 같은 시선이 방화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당신이 가명(假名)을 쓰고 있거나 신분을 속이고 있다는 거예요. 어때요? 내 추측이 맞죠?”
“…!”
“빨리 말해요. 지금 계속 생각하니까 당신을 고희연에서 본 기억이 날 듯 하단 말이에요. 만일 내가 기억이 나서 당신이 말하기 전에 먼저 알게 된다면 당신으로선 그런 창피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순순히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도록 해요.”
그녀의 억지 반, 강요 반의 성화에 방화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정말 할말이 없소.”
그녀의 쌍심지가 하늘로 솟구치며 귀여운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정말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올 거예요? 자꾸 이러면 장문인에게 직접 고하겠어요.”
방화의 어깨가 한순간 움찔거렸다. 하나 방화는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저가 잘못 짚은 거요. 내 이름은 방화요. 누가 뭐래도 내 성은 방씨이며, 종남파의 제자요. 아무리 소저가 뭐라고 해도 이건 변함없는 사실이오.”
방화가 뜻밖으로 강하게 나오자 이번에는 서문연상이 주춤거렸다. 하나 그녀는 계속 미심쩍은 눈으로 방화를 요리조리 흘겨보고 있었다. 그녀는 트집 잡을 거리를 찾다가 마침내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종남파의 제자라면서 왜 나한테 사매라고 안 부르는 거예요?”
그녀의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자기는 한번도 사형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서 방화만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방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하오, 사매…”
사매라는 말에 서문연상의 차갑던 얼굴이 눈 녹듯 풀어졌다. 하나 그녀는 쌀쌀맞은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아무튼 나중에라도 당신에게 다른 정체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오늘 일까지 합해서 단단히 추궁할 줄 알아요.”
방화는 더 대꾸할 기력도 없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전흠은 여기까지 지켜보고는 흥미를 잃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때 공교롭게도 서문연상을 피해 몸을 돌리던 방화의 눈에 띄고 말았다.
“엇?”
방화가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외침을 토해내자 서문연상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전흠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했다.
“전 사숙 아니세요?”
전흠의 눈살이 절로 찡그려졌다.
‘사숙이란 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전흠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서문연상이 방화를 이끌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 늦은 밤에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전흠은 그녀에게 붙들려 시달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나 이렇게 되고 보니 대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물을 말 같구나. 너희들은 여기서 무얼 하는 거냐?”
서문연상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돌연 방화의 팔짱을 척하니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보면 몰라요? 사형제끼리 친분을 쌓고 있는 중이죠.”
뜻밖의 행동에 전흠보다는 방화가 더 놀랐다. 그는 팔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의 촉감이 느껴지자 그야말로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그녀의 품에서 팔을 잡아 뺐다.
“이… 이거 왜 이래요?”
그녀는 그의 거친 행동에 움찔하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이런 바보 같은 사형, 그런 대사는 여자가 해야 어울리는 거예요.”
방화의 얼굴은 그야말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전흠은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웃어넘기자니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쓰려서 절로 퉁명스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쓸데없이 히히덕거리지 말고 잠이나 자도록 해라. 내일은 긴 하루가 될 테니.”
“알았어요. 전 사숙도 밤늦게 쏘다니지 말고 들어가서 주무세요.”
‘이 계집애가?'”
전흠은 겉으로는 공손한 척해도 은근히 자신을 놀리는 듯한 그녀의 말에 약이 바짝 올랐으나 그녀가 말끝마다 사숙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무작정 화를 낼 수도 없어 그녀를 한차례 쏘아보고는 휑하니 몸을 돌려 버렸다.
서문연상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혀를 낼름거리고는 한쪽에서 멍하니 서 있는 방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멍청하게 뭘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빨리 가자구요.”
방화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마저 사라지자 작은 뜨락 안은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들었다.
그때 정자 안에서 다시 두 명의 인물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정자가 있는 부분이 그늘이 진 곳인데다 두 사람이 너무 조용하게 있어서 그들이 정자에 있는 것을 미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온 사람들은 진산월과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서문연상과 방화가 사라진 곳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대단한 사매입니다.”
진산월은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그렇다.”
동중산은 빙긋 미소 지었다.
“가끔 억지를 부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도 좀처럼 찾기 어렵지요. 그나저나 내일은 정말 혼자서 행동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중산은 진산월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장문인의 계획대로라면 확실히 그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몸을 보중(保重)하셔야 합니다. 지금 본파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더 걱정이다. 특히 사조님께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네가 잘 지켜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진산월은 돌연 정색을 하고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보자고 한 것은 그 외에 또 한 가지 용건이 있어서다.”
“말씀하십시오.”
진산월의 시선은 동중산의 외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너무 늦게 본파에 입문하여 도저히 절정의 무공을 익힐 수가 없다. 그건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원래 본파의 무공은 오랜 동안의 수련을 쌓지 않으면 결코 절정에 이를 수가 없다. 속성(速成)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솔직히 지금의 네 무공으로는 내일 살아서 해를 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너를 뒤로 빼돌려 안전한 곳으로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곳이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제자도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게 한 가지 무공을 가르칠 생각이다.”
뜻밖의 말에 동중산의 외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종남의 무공은 속성할 수 없다고 방금 말했으면서 결전을 몇 시진 남겨놓지 않은 지금 무슨 무공을 전수하려 한단 말인가?
동중산의 의중을 짐작한 듯 진산월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이 무공은 원래 본파의 장로(長老)들만이 익힐 수 있는 것으로, 비전(秘傳) 중의 비전이어서 현재 본파에서는 나 외에 아무도 터득한 사람이 없다.”
동중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런 무공을 제게 전수해 주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예외란 항상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지. 사실 특별한 신분만이 익힐 수 있도록 제약을 해놓은 것은 이 검법이 위력에 비해서 익히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자칫 제자들이 본신의 실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고 이러한 기궤(奇詭)한 편법(便法)에 물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어차피 다른 무공으로 절정에 오르기는 힘드니 이것이라도 익혀 무공의 미흡함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다.”
동중산은 입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가슴 한구석이 몹시 격탕되어 눈빛이 흐려졌다. 자신을 위해 주는 진산월의 마음 씀씀이가 절절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이 무공의 이름은 색혼검결(索魂劍訣)이라 한다.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상황을 반전시켜 상대를 일격필살(一擊必殺)하는 무서운 초식이다. 잘만 사용하면 위급한 상황에서 네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자칫하다가는 오히려 자신의 명(命)을 재촉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어 진산월은 색혼검결의 검식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원래 이 색혼검결은 진산월이 누관의 동굴에서 발견한 혈선 정립병의 혈선비록에 수록된 구종절기 중 하나였다. 단 일 초(一招)로 된 구결이지만, 상황에 따라 수십 개의 응용초식을 만들 수도 있는 독특한 검법이었다.
그 원리(原理)는 비교적 단순했으나 파생된 변화가 많아서 완벽히 익히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 하나 반나절만 익혀도 위급한 순간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효과적인 무공이기도 했다.
진산월이 동중산에게 색혼검결을 전수해 주고 자세까지 어느 정도 교정해 주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두 사람은 꼬박 두 시진 동안 일초로 된 검법 전수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동중산이 색혼검결을 제법 능숙하게 펼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이 검초는 일반적인 경우에는 사용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오직 네가 생사(生死)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만 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동중산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공손하게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위는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직 동이 트기에는 일렀다.
하나 이미 새로운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문파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하루가 시작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