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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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2화


제146장. 행로난측(行路難測)

진산월은 숨을 가다듬었다.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기는 했지만 날씨는 따뜻했고, 공기는 맑았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자 공기 속에 섞여 있는 은은한 꽃향기의 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용영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소리도 없이 검집 속으로 사라지는 용영검의 모습은 오랜 비행(飛行)을 마치고 동굴 속으로 사라지는 한 마리 비룡(飛龍)을 연상케 했다.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오히려 쾌적함을 안겨다 주었다. 잠시 진산월은 땀에 젖은 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선 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수많은 용의 그림자가 허공을 자욱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 용의 그림자들 중 단 하나도 똑 같은 것이 없었고, 움직이는 궤적도 일치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전혀 혼란스럽거나 번잡해 보이지 않았다. 각각의 용은 구름을 타고 날아오르고 있었고, 그 구름들이 모여 도도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의 모습이 실제로 새겨진 조각상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그 많은 용의 그림자들이 점차로 모여들더니 어느 사이엔가 하나의 거대한 구름을 형성했다. 그 구름은 이내 이리저리 비틀리더니 한 사람의 영상(影像)을 만들어 냈다.

그때 진산월은 눈을 떴다. 때마침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진산월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을 것이다.

“장문사형!”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문 너머에서 소지산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초청장(招請狀)이 왔습니다. 그런데 보내 온 곳이….”

소지산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간 당혹스런 모습이었다.

“이씨세가입니다.”

소지산은 진산월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손에 들린 서찰을 내밀었다. 진산월이 펼쳐보니 그 안에는 용이 날아갈 듯한 수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 종남파 진산월 장문인 친전(親展). 금월 십팔 일에 본가(本家)에서 엄친(嚴親)의 회갑연을 열고자 합니다. 필히 왕림해 주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장안 이씨세가 이존휘 배상(拜上). >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간략하게 용건만 적은 서찰이었지만, 분명히 진산월을 이씨세가에 초대하는 초청장이었다. 진산월은 비록 이존휘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와 별 다른 친분 관계는 없었다. 오히려 이씨세가에 몰래 잠입하여 사람을 빼내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친분은커녕 적대 관계(敵對關係)에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식의 친필 초대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응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별다른 이유 없이 불참한다면 그것은 초대장을 보낸 사람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이존휘는 다만 서안의 유력한 문파인 종남파에 의례적인 초대장을 보낸 것일까? 아니면 이 안에는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소지산은 생각에 잠겨 있는 진산월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이씨세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

“이씨세가에서 여기저기서 고수들을 끌어 모으고 있고, 그들 중 대다수가 신분이 불확실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진산월이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자 소지산은 잠시 침음했다가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산월은 의외로 선뜻 대답했다.

“초대했는데 안 간다면 예의가 아니지. 당연히 참석한다.”

소지산은 마음속으로 한숨이 흘러나왔으나 진산월을 저지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씨세가의 초청이 갑작스럽고 무언가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산월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거부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진산월이 마음을 결정한 이상 왈가왈부해 보았자 쓸데없는 분란(紛亂)만 야기할 뿐이었다.

소지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누구를 데려가시겠습니까?”

“일방과 중산을 데려가야겠다.”

소지산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장안의 최고 세력가인 이세적의 회갑연이라면 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참석할 게 분명했다. 아직 강호 경험이 일천(日淺)한 낙일방에게는 이번 일이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동중산이 함께 간다면 의외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올바른 선택을 하여 어렵지 않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가시겠습니까?”

“내일쯤 출발할 생각이다.”

소지산은 다소 의외인 듯 진산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씨세가는 하루 거리도 되지 않으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서둘러 떠나려는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산을 내려가는 김에 몇 군데 들러 볼 곳이 있다. 그 동안 네가 수고를 해줘야겠구나.”

소지산은 듬직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본파도 조금씩 틀을 잡아 가고 있으니,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지금의 종남파는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노해광이 돌아옴으로써 끊어졌던 선대(先代)의 배분이 이어지면서 체계적인 문파의 틀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해광의 합류는 종남파의 커다란 고민거리였던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세 개의 주루에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는 종남파의 살림을 꾸려 가기도 벅찼는데, 노해광이 가져갔던 네 개의 주루에 대한 권리(權利)를 다시 종남파에 인계하면서 살림살이가 한층 나아지게 되었다. 진산월은 노해광이 다시 반납한 네 개의 주루뿐 아니라 다른 세 개의 주루에 대한 관리(管理)까지 노해광에게 일임하여 노해광은 어쩔 수 없이 종남파의 수입을 책임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이 먹어서 이게 무슨 고생이냐고 노해광이 투덜거렸으나, 전풍개에게 잔소리를 듣고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노해광이 외부의 수입을 맡았다면, 안 살림은 정해의 몫이었다. 정해는 원래부터 총기가 있는데다 석가장에 몇 년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상술(商術)도 터득해서, 재정(財政)이 거의 바닥나고 형편없이 빈약하기만 했던 종남파의 살림을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제자들의 교육은 소지산이 담당했고, 방취아는 문파의 안주인 행세를 하며 나름대로 규율을 잡았다. 천방지축인 서문연상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그녀뿐이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모습을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직 서문연상만이 호랑이 같은 사고(師姑)를 만났다면 투덜거렸을 뿐이다.

부상이 심했던 전풍개는 조용히 숙소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고, 전흠만이 가끔 소지산에게 시비를 걸다가 방취아의 잔소리를 듣는 한가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종남파의 고수들 중 가장 바쁜 사람은 뜻밖에도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낮에는 부서진 종남파의 전각들을 다시 짓고 소홀히 방치했던 전답(田畓)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었고, 밤에는 자신의 무공을 수련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종남혈사에서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미진함을 절실히 깨달았던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했다. 그가 침식(寢食)도 거르다시피 하고 무공에 빠져있는 모습에 방취아가 몇 번이나 진산월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장문사형이 가서 낙 사형 좀 말려 줘요. 어제도 하루 종일 태화각의 창고를 손보더니 저녁부터는 밤새도록 후원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는 정말 몸이 축나서 해골처럼 변하고 말 거예요.”

방취아는 그 말을 하면서 진산월의 위아래를 묘한 눈으로 쓸어보았다. 마치 그렇게 무리하다가 장문사형처럼 앙상한 몸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듯한 무언(無言)의 시위(示威) 같았다. 진산월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방취아는 그런 그의 반응이 못마땅한지 고운 아미를 상큼하게 찡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게 웃고만 있을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조금 전에도 낙 사형을 만나 보았는데, 뺨이 너무 홀쭉해져서 그 잘 생긴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그렇게 무공에만 미쳐 있다가는 좋은 시절 다 놓치고 평생 혼자 사는 신세가 되고 말 거예요.”

“일방은 무어라고 하더냐?”

방취아의 표정이 한층 더 샐쭉해졌다.

“낙 사형이 언제 내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내가 뭐라고 하니까 요즘 들어 잔소리만 늘었다면 바가지를 긁으려면 소 사형에게나 하라고 하더군요. 성질 같아서는 그 얄미운 얼굴을 확 긁어 주고 싶었는데, 얼굴이 너무 말라서 간신히 눌러 참았어요.”

“일방은 괜찮을 거다.”

방취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니요?”

진산월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 만큼은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지금의 그는 비로소 무공의 또 다른 세계에 개안(開眼)한 상태다. 몸과 마음이 온통 그것에 빠지고 전신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활력(活力)과 투지(鬪志)가 끝없이 샘솟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힘든 수련을 하고 몸을 혹독하게 굴린다 해도 결코 큰 부상을 입지 않는다.”

“그러다 잘못되면….”

“누에가 고치를 벗듯 그도 지금 자신의 굴레를 한 꺼풀 벗고 있는 상태다. 잔해(殘骸)가 조금 남을지 몰라도 보다 새롭고 강한 인간으로 다시 날 수 있다는 말이지. 이것을 바로 ‘탈각(脫殼)’ 이라고 한다. 무공의 세계에서 ‘탈각’ 은 ‘돈오(頓悟)’ 라는 순간적인 깨달음의 방법과 ‘점수(漸修)’ 라는 점진적인 깨달음의 방법이 있는데, 일방은 지금 ‘점수’ 의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방취아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왜 그렇게 자신하는 거죠?”

“나도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지.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겪고 나면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산월의 음성은 점차로 나직하게 가라앉아서 마지막 말은 방취아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잃어버린 무언가가 더욱 소중할지도 모르지만….”

방취아는 진산월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낙 사형의 눈빛이 지금 장문사형의 눈빛과 몹시 닮았네요. 아세요? 요즘 장문사형의 얼굴에 다시 조금씩 살이 오르니까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정말이에요. 예전의 장문사형은 그저 사람만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왠지 듬직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요. 그래서 서문연상, 그 앙큼한 여우가 가끔 장문사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진산월은 미소를 거두었다.

“그런 농담은 별로 즐겁지가 않구나.”

방취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호호….”

진산월은 우두커니 선 채로 멀어지는 방취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짓궂은 농담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몇 가지 상념들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종남파는 분명 문파로서의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흡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문하제자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현재 종남파의 인원은 모두 열세 명에 불과했다.

특히 선배고수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몇몇 사람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컸다. 믿을 만한 실력을 갖춘 절정고수가 별로 없다는 것도 약점이었다.

진산월이 걱정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일시간에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문하제자야 문파가 존속하는 한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적정한 수준으로 불어나겠지만, 절정고수는 그런 식으로 충원할 수가 없었다.

고수(高手)란 절대로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본인의 각고(刻苦)와 체계적인 훈련, 문파의 배려, 그리고 풍부한 경험 등이 있어야만 했다. 그 모든 것을 갖추어도 진정한 고수가 탄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낙일방이 탈각의 기회를 잡았다는 것은 그를 위해서나 종남파 전체를 위해서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초가보가 무너진 지금 서안 일대에서 종남파를 위협할 수 있는 문파는 오직 화산파뿐이었다. 하나 화산파는 취미사의 혈겁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어 당장은 시비(是非)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진산월이 곧 두 번째 강호행(江湖行)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종남파는 누가 뭐래도 진산월이라는 커다란 기둥이 지탱하고 있기에 존속할 수 있었다. 진산월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종남파에 위해(危害)로운 일이 벌어진다면 이제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한 종남파는 다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진산월은 중원으로 나가기 전에 종남파의 안위(安慰)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는 철저하게 제거할 생각이었다. 마침 이씨세가의 초청은 그런 면에서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진산월이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진산월은 굳이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종남파에서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종남혈사에서 응계성은 왼쪽 다리를 영원히 쓸 수 없게 되었다. 하나 그의 상처를 본 제갈외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정말 운이 좋구나. 좋아도 너무 좋아.”

방취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 계집애야, 노부가 틀린 말을 한 줄 아느냐?”

제갈외는 응계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변을 토해냈다.

“원래대로라면 이놈은 체내의 잠력(潛力)을 모두 소비하고 심지가 다 타버린 촛불 신세가 되어 지금쯤은 차가운 시신으로 나뒹굴고 있어야 옳았다. 그런데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몸속에 있는 잠력이 고스란히 유지된 것이다.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게 운이 좋은 게 아니고 뭐란 말이냐?”

뜻밖의 말에 방취아를 비롯한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뭐라고요? 그럼 제갈 노인은 응 사형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지켜보고만 있었단 말이에요?”

제갈외는 금시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 듯한 방취아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이놈의 문파는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구석도 없군. 한 놈은 다음 날 죽어도 좋으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난리고, 다른 놈은 그렇게 고쳐 주었다고 난리고…. 난 누구 장단에 춤을 춰야 한단 말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튼 이놈은 목숨이 살아난 대신 이쪽 다리는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제갈외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응계성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놈아, 진귀토를 시술받고 살아난 사람은 네가 유일하다. 더 이상 욕심 부리면 정말 천벌 받는다.”

응계성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응계성의 얼굴에 떠올랐던 처참한 표정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이후 응계성은 자기 방에 칩거(蟄居)한 채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방취아가 그를 위해 한쪽 다리로만 쓸 수 있는 신법을 만든다고 수선을 떨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낙일방이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해주겠다고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런 응계성이 정말 모처럼 제 발로 진산월을 찾아온 것이다.

진산월은 한쪽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응계성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응계성이 문을 열고 진산월의 앞까지 다가온 거리는 사오 장에 불과했지만, 진산월에게는 그 거리가 수백 장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침내 응계성이 자신의 앞에 와서 걸음을 멈추자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좋아 보이는구나.”

“응계성은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내일 산을 내려간다고 들었소.”

“그렇다. 이씨세가에서 초청장을 보내 왔다.”

“나도 데려가 주시오.”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응계성의 두 눈을 가만히 주시했다. 별다른 빛 없이 가라앉아 있는 듯한 응계성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말없이 응계성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따라가려는 거냐?”

응계성은 약간 핼쑥한 얼굴이었으나, 음성 만큼은 어느 때보다 강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요.”

“…!”

“이런 몸으로 남에게 짐이 된 채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소. 나는 내 스스로 일어나 보이겠소.”

진산월은 묵묵히 응계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응계성은 열띤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장문사형도 알다시피 나는 이런 꼴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오. 이곳에서 사형제들의 보살핌이나 받으며 지내느니 내일 당장 숨이 끊어진다 해도 칼바람을 맞으며 사는 것이 더 낫소. 내가 산을 내려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오.”

“본파를 떠날 생각이냐?”

응계성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나 혼자 힘으로 자립(自立)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서안에서 살아 볼 생각이오. 그래서 반드시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일 테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에게 말이냐?”

이번에는 응계성이 입을 다물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누구에게 네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인단 말이냐? 이곳의 어느 누구도 너를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데 대체 누구에게 보여 준단 말이냐?”

응계성은 자조 어린 음성으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장문사형,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알 거요. 나는 단지 내 스스로의 인생(人生)을 내 손으로 개척하고 싶을 뿐이오.”

응계성은 자신의 양손을 들어 보인 다음 힘껏 움켜쥐었다.

“장문사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소. 하지만 난 그렇게 나약한 놈이 아니오. 반드시… 반드시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고야 말겠소.”

진산월은 응계성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무언가 아릿한 슬픔 같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무림인(武林人)에게 있어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절정고수가 될 수 있는 길이 막혔다는 것을 뜻한다. 응계성은 비록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대신에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상실한 것은 단순히 다리 한쪽이 아니라 무림인으로서의 미래(未來)였다. 진산월은 그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 특별히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느냐?”

“이세적의 회갑연이라면 서안의 유력한 인사(人士)들이 대부분 참석하겠지요?”

“그럴 것이다.”

“장문사형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시오.”

“그가 누구냐?”

응계성은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손노태야요.”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손가전장의 손노태야 말이냐?”

“그렇소.”

“하필이면 왜 그를 택했느냐?”

“그가 아니라 손가전장을 택한 거요.”

손노태야는 자타가 공인하는 서안의 제일가는 부자였다. 손가전장은 그가 수십 년간 피땀으로 일구어 낸 곳으로, 수대(數代)에 걸쳐 부(富)를 쌓은 유화상단과 달리 오랜 전통은 없었으나 재력(財力)만큼은 유화상단을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손노태야에게는 자식이 두 명 있지만, 그중 한 명은 오래 전에 비명횡사했고, 다른 한 명은 주색(酒色)에 빠져 손노태야의 눈 밖에 났다고 하오. 나는 손가전장에서 제이(第二)의 인생을 개척해 보겠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내게 쉬운 일이 어디 있겠소?”

응계성은 진산월의 승낙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한쪽 다리를 쓸 수 없다고 해도 상인의 호위무사들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소. 당장은 손노태야의 신임을 얻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내가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응계성을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끝까지 네게 못할 짓을 시키는구나.”

응계성은 움찔하다가 모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장문사형이 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요. 누가 감히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이오? 장문사형이라도 어림없는 소리요.”

“알겠다.”

응계성은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힘찬 걸음으로 사라졌다. 비록 다리를 심하게 절기는 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는 예전의 패기가 되살아난 듯 보였다. 진산월이 묵묵히 멀어지는 응계성의 등을 쳐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의 안쪽 그림자 속에서 살며시 걸어 나와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진산월은 이미 그가 온 것을 알고 있었는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냐?”

들어온 사람은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들어온 사람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며칠 전에 응 사숙께서 제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이 본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달라고 몇 번이나 조르시기에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가전장으로 가라고 한 것이냐?”

“제자는 본파가 앞으로 예전의 성세(盛勢)를 되찾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資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석 공자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셨어도 석가장에서의 그분의 지위로 보아 큰 도움이 되기는 힘들 게 분명해서 어떤 식으로든 다른 자금원을 물색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른 게 손가전장이란 말이냐?”

“조금 전에 응 사숙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손가전장은 현재 뚜렷한 후계자가 없는 형편입니다. 유화상단 같이 오래된 전통도 없고, 가문(家門)이라고 할 만한 혈족(血族)들도 거의 없어서 손노태야의 마음만 사로잡는다면 전장(錢莊)을 물려 받는 게 불가능한 일만도 아닙니다.”

“…!”

“손가전장의 자금만 흡수할 수 있다면 본파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응 사숙께서 선뜻 손가전장으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 멋대로 사숙을 험지(險地)로 가시게 했으니 그 죄가 실로 막중합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들어온 사람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그의 등을 내려보고 있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중산. 이번 일은 네 잘못만이 아니다.”

진산월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가 이번 일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방치한 내 책임이 더 크다. 오히려 네 도움으로 사제에게 새로운 목표가 정해져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되었으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문인….”

“몸이 어디에 있든 마음만 이곳에 있다면 떳떳한 본파의 제자다. 사제도 그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해야겠지.”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깬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이번에 이씨세가로 가는 일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너는 이번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껄끄러웠던 하제가 바뀌자 동중산의 얼굴에 한결 생동감이 어렸다. 그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는 먼저 몇 가지 다른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말해 보거라.”

“초가보의 배후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취미사의 혈겁 또한 미궁(迷宮)에 빠져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파가 아직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하기에 미흡하다는 점 등입니다.”

진산월은 뒷짐을 진 채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하나같이 의심장한 이야기들이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본파의 안위 문제입니다. 다른 두 사항도 결국은 본파의 안위에 직결되기 때문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본파가 비록 초가보를 쓰러뜨렸다고 해도 그들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 배후를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언제고 비슷한 일을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파의 안위를 굳건히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지금 현재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

“또한 취미사의 혈겁은 본파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 사건이 종결되지 않으면 서안 일대가 계속 풍운(風雲)에 휩쓸리게 될 것이며, 본파 또한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의 여파에 끌려들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취미사의 혈겁에 대한 진상이 하루 속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진산월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결국 초가보의 배후는 본파에 직접적인 위협이고, 취미사 혈겁은 간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말이군.”

“바로 그렇습니다. 이런 때에 이씨세가에서 초청장이 왔다는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느냐?”

“이씨세가에서 가주의 회갑연을 맞아 서안 일대의 유력자들을 초대하려는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초청장이 이세적 본인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이존휘의 이름으로 온 것은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이존휘는 본파의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고, 장문인과도 별다른 친분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세적의 이름으로 초청장이 와야 하는데, 그의 아들인 이존휘의 이름으로 왔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이번 이세적의 회갑연을 이존휘가 주도하여 본파뿐 아니라 모든 초청장을 자신이름으로 보내는 경우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너무 신경이 곤두서서 쓸데없는 일에 심력(心力)을 소비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지요.”

“다른 한 경우는 무엇이냐?”

동중산의 외눈에 기이한 안광이 번뜩거렸다.

“이존휘가 특별히 장문인께만 친필 초청장을 보냈을 때입니다. 이때에도 두 가지 경우의 수(數)를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이존휘가 장문인께 개인적인 호기심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장문인은 요즘 섬서성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

동중산의 외눈이 진산월의 얼굴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이존휘가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경우겠지요. 제가 가장 우려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어차피 조만간에 알게 될 일이다. 미리부터 골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지.”

동중산은 재차 진산월의 주의를 촉구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웃고 있는 진산월의 모습에서 태산이 무너져도 끄떡하지 않을 침착함과 여유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장문인의 말씀이 맞다. 이존휘가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면 설사 그가 우리에게 악의(惡意)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동중산은 매사를 너무 꼼꼼하게 궁리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왠지 하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가 이렇게 사소한 것을 신경 써 주기 때문에 진산월이 보다 대국적(대국적)인 눈으로 사태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가장 이상적인 상하 관계(上下關係)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마음속을 훤히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초가보의 배후와 취미사의 혈겁에 대한 너의 분석(분석)은 상당히 훌륭했다. 취미사의 혈겁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거의 없으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초가보의 배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

이번에는 동중산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초관이 초가보를 세운 것은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의 배후는 그 이전부터 벌써 초관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치밀한 자들이 초가보 하나만을 지원했을 리는 없다.”

동중산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표정이 일변했다.

“그렇다면 장문인께선 초가보 말고도 그들의 수족(手足)이 되는 집단이 더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다. 그것도 서안 부근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배후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토록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었을 리 없다.”

“서안 일대에서 그럴 만한 집단이라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항상 냉정하던 동중산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너무 앞질러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집단이 있을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매사에 한층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집단이 있다면 결코 본파를 이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지.”

동장산은 생각에 골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에 어떤 식으로든 시비(是非)를 걸어 오겠군요.”

“그렇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입가에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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