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3화
제147장. 암습내막(暗襲內幕)
서안의 북대가(北大街) 끝 쪽에는 한 채의 장원(莊院)이 자리하고 있다. 장원은 그리 크지 않았고,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거의 끌지 않았다. 입구에 < 명일장(明逸莊) > 이라는 작은 현판이 붙어 있기는 했으나, 누구도 유심히 살펴보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후의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 평소에는 좀처럼 인적을 보기 힘든 명일장 앞에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수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명일장의 입구로 오더니 신중한 동작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재빨리 대문을 두드렸다. 살짝 두드렸는데도 금세 대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검은 수염을 기른 장한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사람은 문 앞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죽립인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이내 낮은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섯 명의 죽립인은 일언반구 말도 없이 열려진 대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닫힌 명일장 앞은 다시 예전의 황량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명일장 안으로 들어간 다섯 명의 죽립인을 안내한 사람은 조금 전에 대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장한의 얼굴은 대추처럼 붉었고, 체구가 건장해서 문지기치고는 위풍이 당당한 모습이었다. 죽립인들 중 한 사람이 그 점이 궁금했는지 쓰고 있던 죽립을 벗으며 장한을 향해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형장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소?”
텁석부리 장한은 빙긋 웃었다.
“존성대명이라니 당치 않소. 나는 장평이라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오.”
그 이름을 듣자 죽립인은 나직한 경호성을 토해냈다.
“아! 이제 보니 천봉궁 팔대신장 중의 한 분이신 규염객 장 대협이셨구려. 미처 몰라뵈어 죄송하오.”
“대협은 무슨. 그냥 편하게 장 형(張兄)이라고 부르시오.”
죽립인은 장평의 호쾌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말 소문대로 성격이 시원시원하시구려. 나는 화산파에서 집법을 맡고 있는….”
죽립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평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화산파의 꾀주머니라는 신산 곡수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소.”
죽립인, 곡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으나 속으로는 은근히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장평이 우악스러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치밀하고 눈치가 빠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장평의 시선이 곡수의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네 명의 죽립인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그들은 곡수와는 달리 머리에 쓰고 있는 죽립을 벗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네 분은 이번에 화산에서 내려오신 분들이시오?”
“그렇소. 이 분은….”
“아, 굳이 지금 소개할 필요가 없소. 곧 모임이 열릴 장소에 도착할 테니 그곳에서 한번에 인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곡수는 멋쩍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네 명의 죽립인 중 한 사람에게 슬쩍 향해 있었다. 그 사람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야 곡수는 한결 표정이 여유롭게 변했다. 장평은 그의 표정의 변화를 알아차렸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그들을 명일장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앞에 있는 두 채의 건물을 지나자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나타났다. 장원 안에 다시 담장을 쌓았다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중인들 중 누구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일장이야말로 천봉궁이 서안에 세운 비밀 거점이었다. 당연히 이런 은밀한 장소가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담장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안에 있는 건물의 지붕이 밖에서도 보인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하나 작은 월동문을 지나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치가 나타났다. 사방이 온통 형형색색의 기화이초(奇花異草)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화원(花園)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화원의 한복판에 파란 기와로 이루어진 한 채의 전각이 서 있었다.
곡수는 눈으로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 화원이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무서운 기관진식(機關陣式)이 설치되어 있는 용담호혈(龍潭虎穴)임을 알아차렸다. 뿐만 아니라 담장 자체에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매복이 있음이 분명했다.
‘과연 천봉궁에는 비상한 재주를 지닌 자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곳만 보아도 그들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겠구나.’
곡수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장평을 따라 전각 쪽으로 다가갔다. 화원에 들어서기 전에 장평은 그들을 돌아보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밟는 곳만을 밟고 오시기 바라겠소.”
곡수를 비롯한 다섯 사람은 이미 화원 전체가 기관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장평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화원은 겉에서 보던 것보다는 한층 더 규모가 큰데다 장평이 일직선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복잡하게 돌았기 때문에 그들이 화원을 통과하여 전각 안으로 들어간 것은 거의 반각(半刻)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였다.
<봉림전(鳳臨殿)> 이라는 이름의 전각은 그리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아(高雅)한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은은한 향기가 흘러 나왔다. 전각 안에는 제법 넓은 대청이 있었는데, 커다란 원탁(圓卓)을 가운데 두고 십여 명의 인물들이 둘러앉아 있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들 중에는 회색 승포를 걸친 승인(僧人)들도 있었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들도 있었으며, 허름한 옷을 걸치고 두 눈에 정광(精光)을 번뜩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들도 있었다.
곡수는 한 눈에 그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회색 승포를 입고 머리에 계인(戒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여섯 명의 승려들은 소림사의 인물들이 분명했고, 꽃들이 시샘할 정도로 각기 다른 미모를 뽐내고 있는 네 명의 여인들은 천봉궁의 팔선자들이었으며, 용모는 비록 평범하나 하나같이 신태비범(神態非凡)한 모습을 지닌 자들은 개방의 고수들이 확실했다. 그들 외에 세 명의 남녀가 가장 구석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그들에게로 재빨리 다가왔다.
“집법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고장명과 종요설, 하중광 등 미리 파견한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이었다. 곡수는 이미 그들이 서안으로 오자마자 암습을 당해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빠른 눈으로 그들의 신색(身色)부터 살폈다.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
고장명은 아직도 낯빛이 창백했고,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억지로 웃어 보였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본파의 제자로서 본파의 명성에 누(累)를 끼치게 되어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강호를 행도(行道)하다 보면 이런 일을 당할 때도 있는 법이니 너무 부끄러워하자 말게. 다른 두 사람은 어떤가?”
종요설이 턱 부상을 당한 하중광 대신 공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하 사제는 턱을 다쳐 당분간 행동하는 데 약간의 지장을 받을 것 같네요.”
그녀는 약간이라고 했지만, 하중광은 턱뼈가 부서져 말을 하기는커녕 음식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죽으로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곡수는 아래턱에 붕대를 감은 하중광의 모습을 보고 사정을 짐작했으나 더 이상 그 일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때 여인들과 함께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이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시오. 노부는 차복승이라고 하오.”
곡수는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반갑습니다. 곡수라고 합니다.”
차복승은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눈부신 백발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곡 대협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소.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안계(眼界)를 크게 넓히게 되겠구려.”
“그저 허명(虛溟)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보다 이번에 본파에서 오신 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와 함께 들어왔던 네 명의 죽립인이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그들 중 가슴까지 오는 검은 수염을 기른 장년인을 보자 고장명과 종요설이 깜짝 놀라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을 뵙니다.”
검은 수염의 장년인은 오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눈빛이 수정처럼 맑았고, 피부가 여인의 그것처럼 깨끗했다. 게다가 전신에서 은은한 기상을 풍기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성을 발하게 했다. 이곳에 모인 중인들은 고장명의 정체를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말을 듣자 하나같이 놀란 시선으로 검은 수염의 장년인을 쳐다보았다. 심지어는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을 것 같던 차복승마저 눈을 크게 뜨고 검은 수염의 장년인을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이제 보니 담로검 매 대협께서 직접 오셨구려. 그것도 모르고 늙은이가 미처 마중을 나가지 못했으니 결례를 용서하시오.”
차복승은 비록 총관이라고 해도 그 지위는 천봉궁에서 독특한 데가 있어서 일파(一派)의 주인(主人)이라고 해도 쉽게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검은 수염의 장년인에게는 깍듯한 예를 취하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수염의 장년인은 자신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여고 있는 고장명과 종요설 등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차복승을 향해 마주 포권을 했다.
“결례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십 년 만에 뵈었는데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계시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동안 별례무양하셨습니까?”
그의 음성은 고고한 외모만큼이나 맑고 청량했다. 차복승은 주름진 노안(老顔)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허허…. 매 대협이 아직까지도 이 늙은이를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소. 그때는 매 대협도 한창 때의 패기만만한 젊은이였는데, 이제는 어느새 강호의 명숙으로서 위엄 있는 모습이 되었구려.”
“제가 어찌 총관님 앞에서 명숙 행세를 할 수 있습니까? 그때처럼 편하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허허…. 그때야 매 대협이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화산파를 이끌고 있는 최고의 수뇌 중 한 분이 아니오? 이 늙은이에게 더 이상의 결례를 범하도록 강요하지 마시오.”
차복승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검은 수염의 장년인도 더 이상은 권유하지 않았다.
차복승의 말대로 담로검 매장원은 확실히 당금 화산파의 실질적인 이인자 (二人者)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화산파의 당대 장문인인 용진산이 가장 믿는 사제(師弟)일 뿐 아니라 실력과 명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의 검객이었다. 비록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장로(長老)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화산파는 물론이고 무림의 어느 누구도 그가 화산파의 이인자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매장원이 직접 이번 모임에 참석한 것은 중인들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소림사에서도 팔대신승 중의 한 명이 오긴 했으나, 매장원의 화산파 내에서의 지위나 영향력은 문주인 용진산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화산파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고장명이 처음에 매장원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그가 죽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설마 자신의 사부가 직접 이곳에 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장원의 시선이 차복승을 지나 원탁에 둘러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여섯 명의 승려들 중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반장(半掌)을 하며 불호(佛號)를 외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소림의 대원이라 합니다. 매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매장원의 심원(深遠)한 눈에서 기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이제 보니 신명승이었군. 자네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네. 굉원대사(宏遠大師)께서는 무고(無故)하신가?”
굉원대사는 대원의 사부였다. 엄밀히 말해서 대원과 매장원 모두 각파의 장문인의 사제들이었으니 원래는 같은 배분이어야 옳았다. 그런데 소림사의 전대 장문인인 굉요대선사가 방장(方丈)의 지위를 일찍 대방에게 물려주는 바람에 비슷했던 소림과 화산의 수뇌부들의 배분이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대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매장원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선 아직 정정하십니다. 요즘도 가끔 예전에 뵈었던 매 대협의 고고한 기풍(氣風)이 다시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하십니다.”
“언제고 다시 뵈올 날이 있겠지.”
대원에 이어 다른 소림사의 승려들도 차례로 매장원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 중 세 사람은 나한당에서 파견된 고수들이었고, 가장 젊은 두 사람은 정자배의 승려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소개받을 때도 가볍게 목례만 하던 매장원이 그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자신을 소개한 정자배 승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네가 바로 소림사 고승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소신승이라고까지 불린다는 정화인가?”
정화는 총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매장원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소승의 이름을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그저 윗분들께서 저를 어여삐 봐 주셔서 과분한 칭호를 받게 되었을 뿐입니다.”
매장원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정화를 쳐다보았다.
“소림에서 소신승이란 호칭을 아무에게나 붙이지는 않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방장인 대방대사도 예전에는 소신승이라고 불렸었다네.”
“아미타불….”
정화가 별다른 대꾸도 없이 불호만 외우고 있자 매장원은 알 듯 모르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다섯 명의 개방 고수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는데, 한 사람만 머리가 허연 노인이었을 뿐 나머지 네 사람은 삼사십대의 장한들이었다. 매장원의 시선은 그들 중 중앙에 있는 원숭이처럼 작은 체구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매장원과 시선이 마주치자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화산파에서 꼼짝도 않고 움직이기 싫어하던 양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직접 납시었나?”
매장원도 지지 않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곳에는 빌어먹을 것도 없을 텐데 개봉(開封)에나 처박혀 있지 왜 여기까지 온 건가?”
“흐흐…. 빌어먹을 게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아나? 혹시 그새 노부 몰래 빌어먹는 법이라도 배운 겐가?”
매장원은 그와 입씨름을 하기 싫은 듯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이내 그의 옆에 있는 장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인은 오의단의 셋째 실력자인 풍수 인시망이었으며, 그와 함께 서 있는 네 명의 장한들 또한 모두 오의단의 고수들이었다. 매장원은 그들 중 누구와도 일면식(一面識)이 없었으나, 그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자네가 철심수사 모관이로군. 불민한 제자들을 자네가 구해 주었다고 들었네. 늦게나마 고마움을 전하는 바일세.”
모관은 천하에 대명(大名)이 자자한 매장원이 자신에게 사례를 하자 평소의 냉정하던 성격과는 달리 조금 당황했다.
“제가 오히려 제때 나서지 못해 제자분이 크게 다쳤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하는 법이네. 그 정도 도와주었으면 자네는 할 바를 다한 것일세.”
딱 부러지는 듯한 매장원의 말에 모관은 쓴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백봉 정소소를 비롯한 천봉궁의 선자들과 인사를 마치고야 상견례가 모두 끝이 났다.
매장원과 함께 화산에서 내려온 세 사람은 모두 이삼십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는데, 특히 그들 중에서도 이십대 중반의 청년 한 사람이 남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청년이 강호에 유명한 고수여서가 아니라 그의 용모가 좀처럼 보기 드문 준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남자 알기를 발가락의 때만큼도 어겨지 않던 콧대 높은 천봉선자들도 가끔씩 그 미남자를 힐끔거리고는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누산산은 노골적으로 미남자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민망함을 느낄 정도였다. 누산산이 미남자를 너무 유심히 살펴보다 금교교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산 매, 그만 좀 자중해라.”
누산산은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소곤거렸다.
“언니, 저자는 정말 잘 생겼네요.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두 번째로 잘 생긴 자 같아요.”
금교교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들을까 봐 절로 고운 아미가 찡그러졌다. 여인으로서 어찌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궁금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누구냐?”
누산산은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언니는 벌써 잊어버렸어요? 얼마 전에 보았던 그 못된 송아지 말이에요.”
“못된 송아지라니?”
“종남파의 그 낙일방인가 뭔가 하는 자식 말이에요. 저자도 잘 생겼지만 솔직히 뜯어보면 그놈이 더 낫지 않아요? 성격이 재수 없어서 그렇지.”
금교교는 한숨이 흘러나왔으나 더 내버려두었다가는 누산산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는 것이 낫겠다.”
누산산은 입을 삐죽거렸다.
“피! 자시도 은근히 관심 있었으면서.”
“뭐라고?”
“아니에요. 난 원래 남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신하게 있는 얌전한 여자예요.”
누산산이 시치미를 뚝 떼고 새침한 표정으로 있자 금교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소를 머금고 말았다.
중인들이 모두 원탁에 둘러앉자 차복승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까지 오시느라 모두 원로(遠路)에 고생이 많으셨소. 게다가 뜻하지 않은 변고(變故)로 인해 각파에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니, 일을 주최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소.”
중인들 중 가장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인시망이 불쑥 끼어들었다.
“노총관(老總官)님은 흉수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가히 풍수라는 외호에 어울리는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인시망이 불문곡직하고 대뜸 본론으로 들어가자 차복승도 이야기를 꺼내기가 한결 편해졌다.
“어떤 흉수를 말하는 거요?”
“그야 물론 이번에 본방을 비롯해 소림과 화산을 암습한 그 불한당 같은 놈들이지. 취미사 혈겁이야 거의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게 아니오?”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소. 우리는 그저 어떤 의혹을 발견했다는 거지,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게 아니니 말이오. 우선 이번 암습에 대해 말하자면 흉수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소.”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차복승에게로 향했다. 차복승의 강호에서의 배분(輩分)은 상당히 묘한 구석이 있었다. 누구도 그의 진정한 나이를 알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차복승은 지금처럼 늙은 모습이었으며, 천봉궁의 총관이었다. 강호인들이 기억하는 차복승의 가장 오래된 모습조차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육십이 넘은 인시망이 그를 노총관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래서 차복승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정확히 몇 살이며, 앞으로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를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본다면 차복승이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인지니도 몰랐다. 하나 그 자신은 천봉궁의 총관으로서의 자신의 직분을 잊지 않았고, 늘 스스로를 낮추어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지금도 차복승은 자신이 장내에서 가장 연장자(年長者)임에도 마치 윗사람에게 보고하듯 정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여러분들이 이곳으로 오는 행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치밀하고 효과적인 암습을 할 수 없었을 거요.”
그 점은 누구나가 수긍을 하는 바였다.
“둘째로 그들 중 몇 사람은 각파의 무공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거요. 그 때문에 피해가 더욱 컸소.”
그것이야말로 현재 이곳에 모인 각파의 고수들의 골머리를 썩게 하는 것이었다. 차복승은 점잖게 돌려서 말했지만 사실 암습자들은 단순히 각파의 무공에 대한 정보를 가진 정도가 아니라 그 파해법을 정확하게 숙지(熟知)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무림에 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각파의 비전(秘傳)까지 파해한 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가히 각파의 존망(存亡)을 좌우할 정도로 커다란 일이었다.
화산파의 최고 수뇌인 매장원이 갑작스레 서안으로 온 것도 화산파의 무공에 대한 파해법이 나타났다는 고장명의 보고 때문이었다. 더구나 매화검법은 강호상에 워낙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 파해법이 발견된 것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화산파에서도 극히 극소수만이 익히고 있는 현천검결까지 파해된 것은 화산파의 수뇌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화산파의 또 다른 비전절학도 파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현천검결은 위력 면에서 화산파의 검학들 중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 정말 무섭고 화산파가 자랑하는 절학들은 좀처럼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그 비전절학들의 파해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화산파의 명운(命運)을 위태롭게 할 치명적인 비수가 될지도 몰랐다.
“셋째로 그들은 비록 상당수가 암습을 성공했으나, 여러분들을 몰살시킬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오.”
그 말에 삼파(三派) 중 피해가 가장 컸던 개방의 인시망이 이의(異義)를 제기하려 했으나 차복승이 먼저 말을 이었다.
“만일 그들이 여러분들을 몰살시키려 했다면 아마 암습자들을 더욱 많이 보냈든지 보다 치밀한 함정을 팠을 거요. 그들이 그러지 않은 게 단순히 그들이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준 조직력과 행사(行事)가 너무나 거대하고 정교하오.”
인시망도 이번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차복승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록 개방의 고수들은 몰살을 당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처음에 파견된 개방의 고수들이 실력이 떨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 파견된 순의단의 고수들은 책임자보다는 정보원으로서 색채가 더욱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에 비해 실력 있는 고수들을 파견한 소림사는 비록 네 명의 제자들을 잃기는 했으나, 핵심 인력은 고스란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화산파 또한 어찌되었건 네 명 중 세 명이나 살았고, 지금은 정예들을 급파(急派)하여 현재의 전력은 오히려 삼파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되어 있었다. 차복승은 이런 일들이 모두 흉수들의 유도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시망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어쩌면 취미사의 혈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음모(陰謀)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시망이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자 소림사와 화산파의 고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광을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번에 소림에서 온 대원은 신명승이라는 별호처럼 두뇌 회전이 비상한 기승(奇僧)이었고, 매장원 또한 화산파를 이끄는 수뇌답게 지략이 탁월한 인물이었으니 인시망이 생각한 바를 추측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차복승의 늙수그레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번 일은 겉으로 드러난 면(面)보다는 더욱 복잡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의구심이 들고 있소. 그래서 나는 이번 일의 흑막(黑幕)에 대해 다른 한 분의 자문을 구하고자 하오.”
이어 차복승이 손뼉을 가볍게 치자 한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제법 이목구비가 수려한 중년인이었는데, 얼굴 가득 호감 가는 미소를 지으며 중인들을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동정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번에 차 총관님의 부름을 받고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인시망이 얼굴 한구석에 희미한 놀라움의 빛을 떠올렸다.
“성숙해의 부책임자인 호반육객이 자네로군.”
이동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인 대협.”
이어 그는 매장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별례무양하셨습니까?”
매장원은 이동정을 보고도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물론 잘 있네. 자네 형님은 어디 계신가?”
“저도 모릅니다. 형님은 워낙 신룡(神龍) 같은 분이라….”
“자네도 이번 일에 관여하게 되었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너그러이 봐 주십시요.”
“이번 일의 해결에 자네의 명석한 두뇌가 도움이 되길 바라네.”
이동정은 넉살좋게 웃었다.
“저도 그렇게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누산산이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다가 금교교의 눈총을 받고는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매장원은 이동정의 그런 모습을 익히 알고 있는지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번 일에 대한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차 총관께서 자네를 부른 것을 보니 이미 나름대로의 복안(腹案)이 세워져 있는 것 같은데.”
이동정은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일에 두 가지 주목해 볼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의문을 풀게 되면 흉수의 정체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밝혀지리라고 봅니다.”
“그 의문들이 무엇인가?”
“첫째는 이번에 암습을 한 흉수들이 취미사 혈겁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흠, 계속해 보게.”
“모두들 짐작하다시피 흉수들이 노린 것은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기 위해 서안으로 오고 있던 삼파의 고수들입니다. 결국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취미사 혈겁의 흉수와 관련이 있고, 삼파의 조사를 방해하거나 제지하기 위해 암습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게 됩니다.”
중인들 중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이동정의 다음 말을 듣자 모두들 안색이 변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두 번째는 그들에게 포섭된 각파의 고수들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장명이 이의를 내뱉었다.
“그건 너무 심한 억측이오.”
매장원의 수정(水晶)처럼 맑고 차가운 눈이 힐끗 고장명을 쓸어보았다.
“너는 아직도 심사숙고하기 전에 쓸데없이 입부터 놀리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구나.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자중(自重)하고 있도록 해라.”
고장명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매장원의 시선이 다시 천천히 이동정에게 향했다.
“그 의견은 무척 흥미진진하군. 왜 각파에 배반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나?”
이동정은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매달았다.
“그건 조그만 생각해 보면 쉽게 유추(類推)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매 대협께서는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 외인(外人)이 화산파의 비전검법에 대한 파해식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매장원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절대 불가능하지.”
“또한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화산파에서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들의 면면과 그 행적을 알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어렵겠지.”
이동정의 시선이 원탁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대원에게로 향했다.
“대원선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대원은 잠시 눈을 빛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빈승도 매 대협의 의견과 같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번 일은 각파의 누군가가 흉수들에게 정보를 주고 비전무학의 장단점을 알려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 말은 각파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매장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결론일세.”
그가 너무도 쉽게 이동정의 말에 수긍을 하자 화산파를 비롯한 소림사와 개방의 고수들은 당혹스런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몇몇 생각이 깊은 인물들은 그다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미 그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각오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단순히 흉수들에게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각파로 잠입한 것인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귀파로 돌아가시면 비전무학의 장단점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들 중에서 이번 서안에 파견된 고수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중 배반자가 있습니다.”
이동정의 단정적인 말에 이번에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동정은 잠시 한차례 숨을 돌렸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두 가지 의문점이 해결된다면 더욱 중요한 한 가지 의문에 접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그들이 왜 이런 암습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 흉수들이 취미사 혈겁과 관련이 있다느니 각파에 배반자가 있다느니 떠들어 놓고 이제와서 왜 암습을 저질렀느냐고 물으니 중인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동정은 곧바로 그들의 당혹감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삼파에서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이런 식의 암습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일일 뿐입니다. 만약 이번 암습으로 파견했던 고수들이 몰살했다면…. 귀파에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동정이 묻자 매장원은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파에서는 당연히 더욱 강한 제자들을 파견하겠지.”
“바로 그렇습니다. 그 고수들을 다시 암습하여 몰살시킨다 해도 화산파에서는 그보다 더 강한 정예들을 파견할 것입니다. 소림사 또한 마찬가지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암습하여 서안으로 향하는 고수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정말 단순한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조금만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이와 같은 어설픈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말은 그들에게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인가?”
“저는 이번 일에 두 가지 주목해 볼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의문을 풀게 되면 흉수의 정체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밝혀지리라고 봅니다.”
“그 의문들이 무엇인가?”
“첫째는 이번에 암습을 한 흉수들이 취미사 혈겁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흠, 계속해 보게.”
“모두들 짐작하다시피 흉수들이 노린 것은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기 위해 서안으로 오고 있던 삼파의 고수들입니다. 결국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취미사 혈겁의 흉수와 관련이 있고, 삼파의 조사를 방해하거나 제지하기 위해 암습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게 됩니다.”
중인들 중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이동정의 다음 말을 듣자 모두들 안색이 변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두 번째는 그들에게 포섭된 각파의 고수들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장명이 이의를 내뱉었다.
“그건 너무 심한 억측이오.”
매장원의 수정(水晶)처럼 맑고 차가운 눈이 힐끗 고장명을 쓸어보았다.
“너는 아직도 심사숙고하기 전에 쓸데없이 입부터 놀리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구나.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자중(自重)하고 있도록 해라.”
고장명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매장원의 시선이 다시 천천히 이동정에게 향했다.
“그 의견은 무척 흥미진진하군. 왜 각파에 배반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나?”
이동정은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매달았다.
“그건 조그만 생각해 보면 쉽게 유추(類推)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매 대협께서는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 외인(外人)이 화산파의 비전검법에 대한 파해식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매장원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절대 불가능하지.”
“또한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화산파에서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들의 면면과 그 행적을 알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어렵겠지.”
이동정의 시선이 원탁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대원에게로 향했다.
“대원선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대원은 잠시 눈을 빛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빈승도 매 대협의 의견과 같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번 일은 각파의 누군가가 흉수들에게 정보를 주고 비전무학의 장단점을 알려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 말은 각파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매장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결론일세.”
그가 너무도 쉽게 이동정의 말에 수긍을 하자 화산파를 비롯한 소림사와 개방의 고수들은 당혹스런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몇몇 생각이 깊은 인물들은 그다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미 그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각오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단순히 흉수들에게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각파로 잠입한 것인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귀파로 돌아가시면 비전무학의 장단점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들 중에서 이번 서안에 파견된 고수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중 배반자가 있습니다.”
이동정의 단정적인 말에 이번에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동정은 잠시 한차례 숨을 돌렸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두 가지 의문점이 해결된다면 더욱 중요한 한 가지 의문에 접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그들이 왜 이런 암습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 흉수들이 취미사 혈겁과 관련이 있다느니 각파에 배반자가 있다느니 떠들어 놓고 이제와서 왜 암습을 저질렀느냐고 물으니 중인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동정은 곧바로 그들의 당혹감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삼파에서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이런 식의 암습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일일 뿐입니다. 만약 이번 암습으로 파견했던 고수들이 몰살했다면…. 귀파에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동정이 묻자 매장원은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파에서는 당연히 더욱 강한 제자들을 파견하겠지.”
“바로 그렇습니다. 그 고수들을 다시 암습하여 몰살시킨다 해도 화산파에서는 그보다 더 강한 정예들을 파견할 것입니다. 소림사 또한 마찬가지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암습하여 서안으로 향하는 고수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정말 단순한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조금만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이와 같은 어설픈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말은 그들에게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