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3화
제14장. 용문석굴(龍門石窟)
“에이! 그때 참지 말고 확 뒤엎었어야 하는 건데…”
석가장을 벗어난 다음에도 낙일방은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더욱 낙일방의 울화통을 치미게 하는 것은 그들이 석가장을 벗어나기 직전에 본 광경이었다. 그들이 들어올 때는 그토록 굳건하게 닫혀 있던 석가장의 대문은 왠지 활짝 열려져 있었고, 문 양쪽으로 이십 여명의 석가장 식솔이 도열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한 대의 호화로운 은색 마차가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마차가 그들이 낙양성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운문세가의 운룡신차 임을 확인한 중인들은 모두 입맛이 쓸 수 밖에 없었다.
“제길. 이 자식들이 사람차별을 해도 너무 하는구나. 누구는 환송을 받으며 대문으로 출입하고 누구는 개구멍 같은 쪽문으로 들락거려야 한단 말인가?”
응계성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늘어서 있던 석가장 하인 중 몇 사람이 그들을 힐끗 돌아보았으나, 곧 자기들끼리 쑤근거리고는 안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응계성은 하인들마저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해 금시라도 소매를 겉어붙이고 그들을 향해 덤벼들 기세였다. 정해가 재빨리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석가장 대문 앞에서 때아닌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 이거 정말 미치겠구나! 여기에 무얼 바라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이런 괄시를 받을 줄은 몰랐다. 그 석지명인지 뭔지하는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을 따라오는게 아니었어. 아이구… 정말 미치겠네.”
응계성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응계성의 말은 중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정해는 석지명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그 대신 죄를 지은 것처럼 풀이 죽어 있었고, 낙일방은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석가장을 벗어나 낙양성의 번화한 거리로 나올 때 까지도 중인들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상원건은 몇 차례나 그들의 표정을 풀어주려 했으나 그 자신도 석가장에서의 일에 기분이 언짢아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로 그들을 달래야 할지 일시지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진산월이 빙긋 웃으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상갓집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은 모처럼 보는군.”
그 말에 응계성과 낙일방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응계성은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상갓집 개라니… 비유를 해도 어떻게 그런 것에 비유합니까?”
“영락없이 그런 모습이다. 특히 계성, 네 모습이 그중 가장 심하구나. 하하… 그보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술과 음식을 사서 용문석굴이나 구경하러 갈까?”
응계성은 막 화를 내려다 진산월의 마지막 말에 귀가 솔깃한지 멈칫거리다가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너 빨리 가서 아무 주루나 가서 좋은 술 몇 병하고 잘 구운 오리구이 서너 마리만 사와라.”
낙일방은 ‘왜 하필 내가 가야해요?’ 라고 물어보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응계성이 험악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솥뚜껑만한 주먹이 날라올게 뻔한지라 낙일방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잽싸게 갔다 오지요.”
정해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같이 가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근처의 주루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상원건이 웃으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잘 생각했소. 기분 나쁜 일은 빨리 잊어버리는게 상책(上策)이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기분 나쁘기는요. 석공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오히려 성급히 결정해서 두고 두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신중히 고려해서 선택하는 것이 저희들에게도 좋습니다.”
“허헛… 남을 배려해 주는 진 장문인의 그 성격은 정말 마음에 드는구료.”
진산월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배려라니요. 그런건 아닙니다. 석공자가 우리를 지켜보는 동안 우리도 석공자에 대해서 좀 더 관찰할 수 있으니 좋다는 말이지요.”
그 말에 상원건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진산월의 말인즉, 석지명만 자신들을 시험하는게 아니라 자신들도 석지명이 합작할 만한 상대인지 조사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합작이란 일방적인 한쪽의 의사대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쌍방간에 치밀한 조사와 준비 끝에 마음이 맞아야만 성사(成事)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상원건이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은연 중에 그의 마음 속에 종남파를 비하(卑下)하는 감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종남파라면 상대가 누구든 손만 벌리면 냉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상원건은 내심 고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 자는 보기와는 틀리군. 생각하는 바가 남다른 데가 있어.’
상원건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런데 석공자를 조사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소?”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긴 합니다만, 지금으로선 확실치 않군요.”
진산월은 그 말만을 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상원건은 몇 마디 더 묻고 싶었으나 진산월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음을 알아차리고는 자신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때 마침 주루로 갔던 정해와 낙일방이 고기와 술을 한 보따리 들고 돌아왔다.
“가시지요, 장문사형! 나들이 준비가 다 됐습니다.”
낙일방은 흥이 나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낙일방의 안내를 받으며 십 여리쯤 남쪽으로 내려가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넓다란 강(江)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이수(伊水)였다.
이수는 낙수(洛水)의 지류(支流)로, 유난히 경치가 좋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이었다. 이수의 양안(兩岸)에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野山)이 양쪽으로 솟아 있었는데, 그 두 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궁궐과 같다고 해서 ‘이궐(伊闕)’ 이라고도 하였다. 두 야산은 절반 이상이 깎여져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거인이 허연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 반쯤 드러난 야산의 중턱에 수 백개의 크고 작은 동굴이 무수히 뚫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천하에 이름높은 용문석굴(龍門石窟)이었다. 예로부터 ‘용문산색(龍門山色)은 낙양팔경(洛陽八景)의 제일’ 이라고 칭송되어 왔다. 용문석굴은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때부터 처음 건조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 무려 사백 여년동안 크고 작은 석굴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지금 이수의 양쪽 산에 있는 석굴의 수는 무려 천삼백오십여개, 그 안의 불상은 십만(十萬)에 가깝다고 한다.
중인들은 용문석굴의 위용에 압도당해 한동안 정신없이 주위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용문석굴에서도 가장 커다란 중앙의 석굴로 향했다. 그 석굴은 용문석굴의 중앙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규모가 가장 크면서도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한 눈에 보기에도 압도적인 것이었다. 상원건은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그 석굴에 쏠려 있는 것을 보고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곳은 봉선사(奉先寺)라고 하는데, 용문석굴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석굴사원이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봉선사의 석굴은 더욱 거대했다. 그곳의 한가운데는 높이가 거의 육장에 육박하는 엄청난 크기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있었으며, 그 양옆으로는 각기 가섭(伽葉)과 아난(阿難), 관세음보살, 천왕(天王)의 불상이 늘어서 있었다. 중인들은 모두 비로자나불의 고요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하나 낙일방은 그중에서도 우락부락하고 험상궃은 모습의 천왕상(天王像)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나이답고 위풍당당한 것이 자신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봉선사 불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을 때였다.
“휘–익!”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 휘파람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청명하면서도 웅혼(雄魂)한 힘이 담겨 있었다.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별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익!”
이번의 휘파람 소리는 조금 전 보다 훨씬 가깝게 들렸다. 아마도 휘파람을 부는 사람이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중인들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봉선사의 석굴에서 오십 여장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빈양중동(賓陽中洞)이라는 석굴이 있었다. 빈양중동은 남쪽의 고양동(古陽洞)과 함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석굴이었다. 그 빈양중동의 입구에 갑자기 몇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눈부신 백의를 입은 네 명의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의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중반 쯤으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기개가 헌앙하고 비범해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백의 청년들은 무언가를 찾는지 빠른 동작으로 빈양중동 주위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이 절도가 있고 민첩한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은 인물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백의 청년들은 빈양중동에서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다시 그 옆의 석동을 뒤지며 조금씩 중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다시 세 번째로 예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익!”
놀랍게도 이번의 휘파람 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처음에 들려왔던 휘파람 소리가 거의 백여장 밖에서 울렸던 것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것이다. 그와 함께 멀지 않은 수림속에서 무언가 희끗한 그림자 하나가 허공을 훌훌 날아 중인들의 머리를 타넘어 백의 청년들 쪽으로 다가갔다. 중인들이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 인영(人影)은 십 여장 이상을 움직여 저만큼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가공할 신법에 모두들 입을 딱 벌렸다. 백의 청년들도 그 그림자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출검(出劍)!”
백의 청년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나왔다.
차창!
그들은 똑같은 동작으로 일제히 검을 뽑아 든 채 양쪽으로 두 명씩 갈라섰다. 그 동작은 비호가 무색할 정도로 재빠른 것이었다. 앞에 선 두 명의 백의 청년들은 검을 상단(上段)을 겨누고, 뒤의 두 명은 중단(中段)으로 겨눈 채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괴인영에 맞설 준비를 했다. 그 민첩하고 침착한 대응에 멀리서 지켜보던 상원건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잘 훈련된 검진(劍陣)이군.”
그 인영은 무서운 속도로 백의 청년들을 향해 돌진하다가 이 광경을 보았는지 갑자기 허공에서 한 차례 신형을 회전시켰다.
쉬악!
세찬 경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 인영은 백의 청년들의 바로 앞에서 내려섰다. 신형을 멈춰 세우는 동작만으로 마치 돌풍이라도 부는 듯한 바람이 휘몰아 친 것만 보아도 그 인영이 조금 전 돌진하던 기세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었다.
“흐흐… 사상검진(四象劍陣)이라… 너희들은 운문세가의 사상검수(四象劍手)로구나.”
괴인영은 백의 청년들을 쓰윽 훑어보고는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괴인영은 짙은 고동색 장포를 걸치고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오십 대 후반의 중노인이었다. 중노인은 얼굴이 말처럼 길고 박박 얽은 곰보였으며, 얄팍한 입술에 턱밑으로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몹시 강퍅하고 싸늘한 인상이었다. 중노인을 보자 상원건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엇? 저자는…”
정해가 급히 물었다.
“상대협께서 아는 사람입니까?”
상원건은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노괴물(老怪物)이 어찌 이곳까지 왔을까? 저자는 파동(巴東)의…”
바로 그때였다.
“이얍!”
갑자기 백의 청년들이 낭랑한 호통과 함께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희뿌연 검광이 중인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요란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따땅!
중인들이 놀라 보니 바닥에 손가락만한 작고 예리한 비도(飛刀)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백의 청년들 중 얼굴이 네모나고 두 눈에 총기가 가득한 청년이 중노인을 향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혁련삼(赫連森)! 과연 듣던 대로 야비한 수작만 일삼는구나. 하나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조금 전에 중노인이 그들에게 말을 거는 척 하며 사실은 은밀히 비도를 날렸음을 알고 그의 악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 비도들은 은형인(隱形刃)이라는 암기로, 크기가 어린 아이의 손가락보다도 작고 종잇장만큼이나 얇아서 일단 발출되면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창졸지간에 그것들을 모두 정확히 떨어뜨린 백의 청년들의 검술은 놀라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해는 백의 청년이 외친 혁련삼이라는 이름을 듣고 중노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중노인은 파동 지방에서 오랫동안 악명을 자자하게 떨치고 있는 파천노괴(破天老怪) 혁련삼이었다. 혁련삼은 비록 오십대로 보이나 실제나이는 거의 칠순에 가까운 노마두(老魔頭)로, 손속이 잔인하고 심성이 악랄해서 모두들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파동지방에서 제왕처럼 행세하며 악행을 일삼던 혁련삼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나타났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혁련삼은 자신이 기습적으로 날린 은형인이 백의 청년들에 의해서 모두 떨어져 내렸는데도 조금도 멋적거나 계면쩍어 하는 빛이 없었다.
“흐흐… 운가 애송이가 제법 신경써서 가르친 모양이군. 하지만 그 정도 솜씨를 믿고 노부 앞에서 감히 큰 소리를 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혁련삼은 음충맞게 웃으며 느릿느릿 백의 청년들을 향해 다가갔다. 백의 청년들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수중의 검을 힘껏 움켜잡은 채 안광을 빛내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혁련삼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서 있는 자세는 약간 특이했다. 앞의 두 명은 검날을 약간 밑으로 한 채 검을 아랫배 부근에 대고 있었고, 그보다 한발짝 정도 뒤에 서 있는 두 명은 검을 가슴에 댄 채 검날을 위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수비형 자세인 포원수일(抱元守一)을 변형시킨 것으로, 포원수일보다도 더욱 엄밀하고 삼엄하며, 반격을 염두에 둔 공격적인 자세였다. 혁련삼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다가오던 신형이 느려지며 눈쌀이 조금씩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광(寒光)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백의 청년들의 대형을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갑자기 번개같이 신형을 움직였다.
스읏!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몸은 무섭도록 빨랐다. 중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줄기 갈색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백의 청년들의 왼쪽으로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훌쩍 솟구쳐 오르는 모습 뿐이었다. 그 순간, 백의 청년들중 앞에 있던 두 사람이 뒤로 물러서며 뒤에 있던 두 명의 청년이 좌우(左右)로 흩어져 날아 올랐다.
차창!
요란한 검명(劍鳴)과 함께 눈부신 검광이 사방으로 쏘아져갔다. 검광이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그야말로 빠르고 날카로워서 주위가 온통 검광안에 휩싸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갈색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십 여줄기의 새하얀 섬광이 폭사해 나왔다.
따땅! 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쇳소리가 울리며 갈색 그림자가 뿜어낸 섬광들이 검광에 부딪쳐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나 그 중 몇 개는 엄밀한 검광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흡!”
검광 속에서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검광이 씻은 듯이 걷히며 장내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중인들은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백의 청년들은 여전히 두 명씩 앞뒤로 선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형은 처음과 다름없이 안정되고 침착했으나, 우측의 백의 청년만이 왼쪽 팔이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조금 전에 검광을 뚫고 들어온 은형인에 왼팔을 격중당한 것이다. 하나 백의 청년은 조금도 고통스런 빛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굳건한 자세로 검을 쥔 채 전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이 장여 앞에는 혁련삼이 한 그루 고목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하나 그의 눈빛이 연신 흔들리고 안색이 싸늘하게 굳은 것으로 보아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실 조금 전에 혁련삼은 자신의 장기인 오귀투차(五鬼投叉) 수법을 거푸 두 번이나 펼쳐 백의 청년들의 사상검진을 깨려했다. 그의 오귀투차는 무림에 산재한 수백 종(種)의 암기수법 중에서도 빠르고 악독하기로 유명한 수법이었다. 그런데 혁련삼이 비마환영신법(飛魔幻影身法)으로 백의 청년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며 오귀투차를 연속해서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사상검진을 깨지 못하고 겨우 그들 중 한 명의 팔에 경미한 부상을 입힌 것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자식들이 정말 만만치 않군. 방해자가 더 몰려오기 전에 이놈들을 쓸어버려야 하는데…’
혁련삼은 당혹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이 조급해져서 살심(殺心)이 크게 일어났다. 백의 청년들은 혁련삼의 안광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그의 얼굴이 흉신악살(兇神惡殺)처럼 무섭게 일그러지자 그가 흉심이 발동하여 잔인한 살수를 쓰리라는 것을 알고 바짝 긴장하여 공력을 끌어올린 채 그의 공격에 대비했다. 특히 그들 중 얼굴이 네모난 청년은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며 가끔씩 주위를 힐끔 거리고 있었다.
‘네째가 이미 부상을 당해 조금 전처럼 검진을 완벽하게 펼치기 힘들텐데 큰일났군. 그나저나 대체 그 자는 어디로 숨어 들어간거지?’
그때 문득 그의 시선이 그들이 있는 빈양중동에서 네 개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석굴로 향했다. 그 석굴의 입구는 유난히 좁았는데, 그 석굴 앞에 거무스름한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검게 말라버린 핏자국임을 알아본 청년의 눈에 한 줄기 격동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곳이다!’
그 순간,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던 혁련삼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맹렬한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그 기세는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고 사나운 것이었다. 네모난 얼굴의 청년은 정신이 번쩍 들어 수중의 장검을 상하(上下)로 그어대며 외쳤다.
“사상잔섬(四象殘纖)!”
그러자 나머지 세 명의 청년들도 일제히 이에 호응하며 장검을 휘둘러 혁련삼에 맞서갔다.
파파팍!
거친 칼바람 소리가 연신 터져나오며 그들의 신형이 희뿌연 검광에 거의 가려져 버렸다. 혁련삼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인 채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검광속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양쪽 소매가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거렸다.
콰쾅!
거센 폭음과 욕설이 뒤섞인 고함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 듯 마구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보기 드문 치열한 격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뿜어내는 검광과 경기가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밀려오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낙일방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백의 청년들과 혁련삼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굉장하구나.”
정해도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네 명의 청년들이 펼치는 검진도 놀랍지만 그 속을 무풍지대처럼 휩쓸고 다니며 그들을 밀어붙이는 혁련삼의 무공은 정말 무섭군. 역시 파동의 제왕이라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구나.”
그들 중 태반은 실제로 강호무림에서 벌어지는 고수들의 치열한 격전을 처음 목격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더욱 놀랍고 경이롭게 생각되었다.
파파파파팍!
혁련삼은 한 마리 비조처럼 허공을 이리저리 선회하며 질풍노도와 같은 장세(掌勢)를 퍼부어 대고 있었다. 그의 장력(掌力)은 몹시 유현(幽玄)하면서도 쾌속해서 방비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음명장(陰冥掌)이라는 것으로, 은형인과 함께 혁련삼이 비장의 절기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음명장의 위력은 실로 놀라워서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은 사상검진으로 맞서고 있었으나, 조금씩 뒤로 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들 중 특히 왼팔에 부상을 입은 청년의 몸이 갈수록 둔해져서 머지않아 검진이 깨어지고 말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혁련삼도 그 사실을 간파했는지 부상을 입은 청년 쪽으로 더욱 날카로운 공세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부상 입은 청년은 금새 손발이 어지러워져서 땀을 비오듯 흘리며 허둥거렸다. 다른 세 청년들은 그를 도와주고 싶어도 검진의 변화를 무시하고 무작정 몸을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검진이 깨어지고 마는지라 그저 안타까운 시선만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퍼퍼펑!
혁련삼의 오른손에서 번갯불같은 섬광이 연거푸 세 가닥이나 피어오르자 마침내 부상 입은 청년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혁련삼의 수법은 음린삼화(陰燐三火)라는 것으로, 음명장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서운 절초였다.
“큭!”
물러서는 청년의 입과 코로 시커먼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른 세 청년이 깜짝 놀라 황급히 그가 물러선 자리를 메꾸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혁련삼이 광소를 내지르며 그 자리로 뛰어들고 난 후였다.
“크하하하… 이미 늦었다!”
혁련삼의 비쩍 마른 쌍수(雙手)가 미친 듯이 요동을 치며 벼락같은 장세를 십여 장(掌)이나 폭포수처럼 뿜어냈다. 그 위세는 가히 놀라워서 주위가 온통 장영(掌影)속에 휘감겨 버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백의 청년들은 그 가공할 광경에 압도되어 미처 검진을 복구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의 몸이 장영에 휩싸여버리려는 순간,
쉬아악!
갑자기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 새하얀 광채가 허공을 뚫고 혁련삼의 뒷통수를 향해 쏘아져가는 것이 아닌가? 그 광채가 날아오는 속도와 위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주위의 공기가 마구 파동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혁련삼은 막 음명장의 절초로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을 박살내려다 괴이한 소성과 함께 무언가가 놀라운 속도로 자신의 머리 뒤로 날아오는 것을 깨닫고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혁련삼은 백의 청년들을 향해 퍼붓듯 갈겨댔던 장력을 회수하며 전력을 다해 미끄러지듯 옆으로 세 걸음을 이동했다. 찰나,
쉬이아악!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 새하얀 섬광 같은 것이 그의 관자놀이 부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가공할 위세에 천하의 혁련삼도 머리 끝이 쭈삣해지는 섬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이게 뭐야?’
혁련삼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 물체를 주시했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간 물체는 다름아닌 하나의 돌맹이였던 것이다.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이를 부드득 갈며 돌맹이가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혁련삼의 몸이 못 박히듯 굳어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에게서 십 장 여 떨어진 인도(人道)위에 하나의 마차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마차는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호화스럽기 그지 없는 은색(銀色)의 마차였다. 하나 안력을 돋구어 보면 단순한 은색이 아니라 진짜 순은으로 만든 마차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마리의 한혈마가 이끄는 순은의 마차! 그것은 천하 무림이 아무리 넓다해도 결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운룡신차…”
혁련삼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운룡신차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천하에 오직 두 대 뿐인 운룡신차 중 소운룡(小雲龍)이었던 것이다. 그때 다시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혁련삼의 손에 하마터면 큰 낭패를 볼 뻔 했던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운룡신차의 앞에 내려섰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부복하며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대공자(大公子)님을 뵈옵니다!”
마차에는 천연의 진주로 만든 주렴이 매달려 있었다. 그 주렴 안에서 담담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중산(董重山)은?”
그 음성은 맑고 차분하면서도 묘한 힘을 담고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네 명의 백의 청년 중 얼굴이 네모난 청년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서 행적이 묘연해 졌습니다. 그래서 속하들이 석굴을 수색하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이 힐끗 한쪽에 서 있는 혁련삼을 향했다.
“파천노괴 혁련삼이 나타나는 바람에 수색을 더 진행하지 못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점차로 나직해져서 들리지 않게 되었다. 상원건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서 네모난 얼굴의 청년이 지금 주렴 속 인물에게 전음(傳音)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용의주도한 인물이군. 그런데 아무도 못 듣게 전음을 보내다니 설마 찾는 사람의 행방을 발견했단 말인가?’
상원건은 재빠른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편, 혁련삼은 운룡신차가 나타날 때부터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네모난 얼굴의 청년이 주렴 속의 인물을 향해 전음을 보내자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도 이미 수십 년간 강호(江湖)의 물을 먹은 인물인데 어찌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그는 절로 초조한 심정이 되어 두 손을 쥐었다 폈다하고 있었다.
‘제기랄. 좀 더 빨리 손을 썼어야 하는 건데… 운대공자까지 나타났으니 낭패로군.’
그는 무심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문득 멀지 않은 석굴 입구에서 이상한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눈에 그것이 말라붙은 핏자국임을 알아차린 혁련삼은 환호성이라도 내지를 것 같은 심정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그 석굴쪽으로 다가갔다. 네모난 얼굴의 청년은 주렴을 향해 전음을 보내고 있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마음이 다급해져서 급히 다른 세 청년에게 눈짓을 했다. 세 청년은 벌떡 일어나서 석굴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때 주렴 속에서 다시 예의 그 음성이 흘러나왔다.
“혁련노사(赫連老師). 파동에서 멀리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혁련삼은 막 그 석굴 앞으로 다가서려다 그 음성을 듣자 움찔하여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허허… 수고라니 당치 않네. 그보다 운대공자야 말로 운문세가에서 편안하게 있지 않고 이곳까지 어인 행차신가?”
강호무림에서 악명이 자자한 파천노괴 혁련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는 광경은 신기함을 넘어 어색해 보이기조차 했다. 그것만 보아도 혁련삼이 마차 속의 인물을 얼마나 꺼려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 속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 이곳은 본가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내가 평소에도 심심치 않게 바람을 쏘이러 나오는 곳이오. 혁련노사께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내가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면 많은 무림인들이 나를 버릇없다고 꾸짖으려 할 거요.”
혁련삼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니까 노부가 네놈 앞마당에 쳐들어온 셈이니 순순히 물러나라는 말이냐? 어림없는 소리 마라.’
하나 겉으로는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운대공자는 농담도 잘하는군. 누가 감히 천하의 운대공자를 꾸짖을 수 있겠나? 그보다 노부가 미처 모르고 자네의 수하들을 다치게 할 뻔 했군 그래.”
그의 말에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창피함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마차 속의 인물은 조용하게 웃었다.
“그건 그들의 실력이 모자라서이니 오히려 혁련노사께서 너무 과하게 손을 쓰지 않은 걸 고맙다고 해야 할거요. 그런데 혁련노사께서는 이곳에 다른 볼 일이라도 있소?”
혁련삼은 그가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묻자 내심 어이가 없어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 했다.
‘이 녀석이 머리가 비상하고 잔꾀가 많아서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하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혁련삼은 강호상(江湖上)에서 평생을 굴러 먹은 인물답게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며 오히려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나이 먹은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야 뻔하지 않나? 평소부터 용문석굴의 불상이 효험이 좋다고 하기에 참배를 온 것 일세.”
“오. 그렇다면 잘 되었군요. 용문석굴에서도 가장 불공 드리기 좋은 곳은 저 아래의 봉선사요. 내가 사람을 시켜 안내해 드릴테니 다녀오시도록 하시오.”
혁련삼에는 제딴에는 머리를 굴린다고 한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자신을 쫏아내는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자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하고 말았다.
“허험…. 아니… 나… 나는 너무 화려한 곳보다는 이곳처럼 수수하고 조용한 곳이 더 마음에 든다네. 운대공자의 말은 고맙지만 나는 이곳이면 족하니 운대공자야 말로 다른 볼 일이 있으면 보도록 하게.”
“하하… 모처럼 먼길을 오셔서 이런 누추한 곳만 구경하고 가신다면 본가의 체면이 어찌 되겠소? 사양말고 봉선사로 가시지요.”
혁련삼은 점차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누가 뭐래도 이곳은 운문세가의 영역권이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 보았자 불리한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게다가 마차 속의 인물이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이 조금씩 자신이 목표로 했던 문제의 그 석굴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혁련삼의 성격은 원래 난폭하고 잔인해서 참을성이 거의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억지로 참았던 것도 운문세가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억누르고 있던 성질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간다면 안가는 줄 알 것이지 왜 자꾸 귀찮게 구는거냐?”
그는 버럭 노호성을 내지르며 석굴로 다가서던 백의 청년들을 향해 은형인을 발출해 냈다. 그리고는 그 결과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번개같이 몸을 날려 석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앗?”
“멈춰라!”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은 다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혁련삼을 제지하려 했으나 우선은 그가 쏘아보낸 은형인을 피하기에 급급해야만 했다. 그들이 몇 차례 신형을 날려 간신히 은형인을 모두 피해냈을 때는 혁련삼의 모습은 석굴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이런 약아빠진 늙은이 같으니라구…”
백의 청년들은 이를 부드득 갈며 그가 사라진 석굴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그때 마차 안에서 예의 그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 두어라.”
백의 청년들은 막 몸을 날리려다 황급히 신형을 멈추며 마차를 돌아보았다. 네모난 얼굴의 청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저 석굴 앞에 혈흔(血痕)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중산은 틀림없이 저 안에…”
“동중산은 다른 곳에 있다.”
마차 안의 음성은 짤막했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단호했다. 네모난 얼굴의 청년은 움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동중산은 잔꾀가 많고 영리하여 비천호리(飛天狐狸)라고 까지 불리우는 인물이다. 그런 동중산이 허술하게 핏자국을 남겨 자신의 종적을 쉽사리 발각당할 것 같으냐?”
마차 안의 음성을 듣자 네모난 얼굴의 청년은 얼굴이 변해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대공자님께서는 동중서가 일부러 그 핏자국을 냈다고 보십니까?”
“그렇다. 혁련삼은 쓸데없이 심기(心機)를 낭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중산은 대체 어디에…”
“이곳으로 우리를 유인했으니 자신은 가장 먼 쪽에 가 있겠지.”
그 말에 네모난 얼굴의 청년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지 황급히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용문석굴의 북쪽 끝이니 이곳에서 가장 먼 쪽이라면 남쪽의 고양동 부근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때 갑자기 석굴 밖으로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조금 전에 석굴로 뛰어들었던 혁련삼의 모습이 나타났다. 혁련삼의 얼굴에 한 줄기 낭패어린 빛이 떠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마차 안의 인물이 말한대로 석굴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혁련삼은 중인들의 비웃음에 가득 찬 시선을 받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것이 모두 자신이 초래한 일인지라 화를 내지도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더듬거렸다.
“저… 저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