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7화
제18장. 강변풍운(江邊風雲)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는 용문의 경치는 그런대로 풍취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일행들 중 누구도 주위의 경치를 구경할만한 여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 진산월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진산월은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구비쳐 흘러가는 이수의 물살과 용문의 가파른 벼랑을 몇 번이나 살펴보고 있었다. 정해는 일행 중 가장 앞에서 바짝 긴장한 채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으나, 동중산은 제일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진산월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광경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의아하고 한편으로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저 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도 용문을 구경할 기분이 난단 말인가? 저런 작자가 장문인이라니 종남파의 장래가 어떤지 안봐도 훤히 알겠군.’
동중산은 마치 문파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직한 문하제자라도 된 것처럼 나직하게 혀를 차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진산월이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는 그들이 가고 있는 좁다란 소로(小路)에서 삼 장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줄기가 무성하고 기둥이 거의 장정 몇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만 닿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울창했다. 나무를 향해 빠르게 다가간 진산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 커니 선 채로 반경이 사오장은 족히 될 듯한 무성한 나무줄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나무의 장관(壯觀)에 반해서 넋을 잃고 있는 유람객의 그것이었다. 동중산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 종남파 일행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고수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 일행이 용문을 벗어나기만 하면 고수들은 굶주린 늑대떼들처럼 달려들 것이 뻔했다. 게다가 일행 중에는 부상이 심해 거동하지 못하는 인물도 있어서 전력을 기울인다 해도 무사히 그들의 손을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태였다. 그런데 그들의 장문인이란 작자는 한가로이 나무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동중산이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원건도 진산월의 행동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던지 그에게로 다가가며 급히 물었다.
“왜 그러시오?”
진산월은 여전히 나무를 올려다 본 채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나무의 모양은 몹시 특이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군요.”
“……”
상원건은 그가 말하는 뜻을 몰라 멀거니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다시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 그는 갑자기 일행의 가장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동중산을 돌아보았다.
“중산. 이리 오너라.”
그는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동중산에게 하대를 하면서도 아주 자연스런 태도를 유지했다. 때문에 동중산은 거부감을 느낄만 한데도 그다지 기분 나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중산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진산월은 뒷짐을 진 채로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전부터 너의 경공술(輕功術)이 제법 탁월하다는 말을 들었다.”
동중산은 약간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 할 줄 아는 정도입니다.”
진산월은 턱으로 나무 위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 나무의 가장 위에까지 올라갈 수 있겠느냐?”
동중산은 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는 생각보다 더욱 커서 높이가 무려 십 장에 육박해 보였다. 게다가 그 끝은 유달리 뾰쪽하고 가느다란 가지들로만 덮혀 있어서 왠만한 실력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나 동중산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문제 없습니다.”
“좋다. 그럼 가장 위에 있는 나무 가지 하나만 꺾어주지 않겠느냐?”
동중산은 진산월이 왜 갑자기 자신을 불러 이런 쓸데없는 일을 시키는지 영문을 몰라 멀뚱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땅을 박차고 나무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팟!
그의 몸은 한 마리 비조(飛鳥)처럼 허공을 솟구쳐 단숨에 육칠 장이나 올라갔다. 그곳에서 힘이 떨어질 즈음, 그는 한 소리 낭랑한 외침을 토해내며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차앗!”
그러자 그의 신형은 마치 탄력을 받은 화살처럼 사오장이나 쑤욱 올라가 나무의 무성한 줄기를 뚫고 꼭대기에 거의 접근해 가는 것이었다. 실로 비천호리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님을 실감나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나무의 정상에는 어린 아이의 손가락만한 굵기의 가지들 몇 가닥이 뻗어 있었다. 어른은커녕 작은 물건이라도 올라 있을 수 없는 굵기였으나, 동중산은 허공에서 다시 한 차례 멋들어지게 공중제비를 하며 그 가지 위에 내려섰다. 가지는 금시라도 부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용케도 그의 몸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동중산은 가느다란 가지 위에 전신이 흔들리는 대로 서 있다가 중심을 잡으며 가까이 있는 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그리고는 가지를 세게 밟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비상(飛翔)했다가 나무줄기를 뚫고 아래로 내려왔다.
슥!
진산월의 앞에 내려서는 그의 몸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착지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진산월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신법(身法)이구나.”
동중산은 별반 표정없는 얼굴로 그에게 꺾어든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뭇 가지를 바치면서도 동중산은 진산월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이걸 꺾어오라고 시킨 것일까 하는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진산월은 태연하게 그 나뭇가지를 받아 들더니 한 차례 힐끔 내려다 보고는 자신의 품속에 정성스레 갈무리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나뭇가지가 천하의 보물(寶物)이라도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 동중산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들기고는 서슴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가던 길을 가자꾸나.”
이어 누가 무어라 할 사이도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동중산은 귀신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멀거니 진산월의 뒷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당혹감과 짙은 의구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것은 상원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산월의 행동에 필유곡절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당체 그 이유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벌써 저만큼 앞으로 걸어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 속을 모를 사람이군. 실없이 장난이나 칠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이유로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임영옥이나 정해는 물론이고 낙일방도 전혀 의아해 하는 표정이 없이 태연자약한 모습들이었다. 상원건은 낙일방을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자네는 자네 장문인이 무슨 이유로 저런 행동을 한 것인지 알고 있나?”
낙일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아니 그런데도 그게 전혀 궁금하지 않단 말인가?”
낙일방은 순진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궁금하긴 해요.”
“그런데 왜 아무도 그에게 가서 그것을 묻지 않나?”
낙일방은 싱거운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묻지 않아도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텐데요, 뭘.”
상원건은 무슨 희한한 동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장문사형은 결코 쓸데없이 일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굳이 시시콜콜 따지지 않아도 조만간에 장문사형이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될거란 말이지요.”
낙일방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면서 다시 밉지 않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는 저런 일에 익숙해 있어서 별로 신경도 쓰지 않죠. 헤헤…”
상원건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네들 사형제는 정말 괴상한 사람들이야.”
“괴상하긴요. 상대협도 우리 장문사형과 좀 더 지내다보면 우리를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상원건은 이렇게 말하며 앞에서 걷고 있는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산월은 어찌된 일인지 조금 전 보다는 한결 보폭을 빨리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일행의 전진하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져서 조금 전의 유유자적하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었다. 상원건은 진산월의 걸음이 빨라진 것이 조금 전에 나뭇가지를 꺾은 행동과 무슨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진산월이 다시 동중산을 불렀다.
“중산.”
동중산은 그가 이번엔 무슨 일을 시키려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부지런히 굴리면서도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예.”
진산월은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 동굴의 위치가 몹시 은밀하여 시선을 끄는구나. 올라가서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동중산이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멀지 않은 암벽 중간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겨우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입구가 좁고 협소했는데, 암벽에서 사 오장 높이에 뚫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이 그 동굴을 살펴보고 오라는 지시를 내리자 동중산은 그의 속뜻을 몰라 한동안 우두커니 진산월을 쳐다 보고 있었다.
‘이 자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하나 진산월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어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동중산이 움직일 생각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만 있자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갈길이 멀다. 어서 갔다 오너라.”
동중산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암벽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몸은 곧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 숨 몇 번 내쉴 사이도 없이 그는 이내 동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무 것도 없는데요.”
동굴은 겉에서 본 것처럼 작고 짧아서 살펴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동중산의 태도는 분명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수고했다.”
동중산은 화를 내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멀거니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호에서도 약삭 빠르기로 유명한 동중산이었으나, 지금 이와 같은 황당한 일은 당해본 적이 없었다. 진산월이 자신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속한 문파의 장문인이니 말이다. 하나 그것이 전혀 아무런 소용가치도 없는 나뭇가지를 꺾어오거나 텅 빈 동굴을 염탐하는 일이라면 동중산이 아니라 부처님같은 심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 사람을 미치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일을 지시하는 진산월의 태도였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당당하면서도 태연스러워서 동중산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에 또 이따위 일을 시키면…’
동중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종남파고 뭐고 다 때려 엎고 나 혼자 갈 길을 가고 말겠다.’
하나 동중산이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중산.”
진산월이 세 번째로 동중산을 불렀다. 동중산은 아무 대꾸도 없이 묵묵히 진산월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낙일방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진산월은 동중산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면서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세 번째 지시를 내렸다.
“저 앞에 있는 바위의 형상이 제법 괴이해서 공연히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나. 바위 주변을 한 번 조사하고 오지 않겠느냐?”
말은 완곡한 것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분명한 명령이었다. 동중산은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더 이상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동중산은 휑하니 몸을 돌려 진산월이 가리킨 바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바위는 과연 모양이 기괴해서 멀리서 보아도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높이는 이 장 가량 되었지만, 형태가 흡사 말을 탄 사람의 모습 같아서 어둑한 밤에 보면 하나의 조각상으로 착각할 만 했다. 하나 그 뿐이었다. 바위 주변은 돌조각들만 무성할 뿐, 다른 어떤 이상한 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동중산은 바위 주변을 두어 차례 돈 후 다시 진산월 앞으로 달려왔다.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진산월은 이번에도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동중산은 웬일인지 조금전과는 달리 공손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더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는 충분하다. 더 이상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동중산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제자는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는 후미로 가서 임영옥의 옆에 서는 것이었다. 상원건은 이 광경을 보고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어 불같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화를 폭발할 것 같았던 동중산이 왜 갑자기 순한 양처럼 온순해진 것일까?’
동중산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 별로 믿어지 않았던 것이다. 잔꾀가 많고 약삭빠르기로 유명한 동중산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것 같은 잔심부름을 눈쌀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고분고분 해치운다고 한다면 아무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진산월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전력을 다해 동남방향으로 직진(直進)하겠다. 일이 잘 진행된다면 한 시진 후에는 안전한 곳으로 가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상원건은 그 말에 내심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고수들의 포위망을 아주 쉽게 뚫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데, 상원건의 강호경험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수월할 리가 없었다.
동중산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가 가진 기보(奇寶)가 운문세가의 운자추나 혁련삼 같은 절정고수들도 욕심을 낼 정도의 물건이라면 무림 고수들이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을 암암리에 뒤따르고 있는 고수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이삼십 명은 되어 보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상원건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라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전만 해도 사방의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던 고수들의 숨소리가 대부분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많이 보아도 지금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고수들의 수는 십 여명에 불과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삼십 명이 넘었던 고수들의 수가 왜 갑자기 이토록 줄어든 것일까?
그때 비로소 상원건은 진산월이 지금까지 한 이상한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무림 고수들은 동중산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중산이 갑자기 거대한 나무로 뛰어 올라가 무언가를 가지고 내려와 진산월에게 갖다 바쳤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잠시 후에는 다시 은밀한 곳에 위치한 동굴로 들어갔다 나오고,
기이한 모양의 바위 주변을 서성거렸다면 그들로서는 당연히 동중산이 문제의 기보를 숨기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그들을 뒤쫒던 고수들 중 대부분은 바로 동중산이 지나갔던 나무와 동굴, 바위 일대를 수색하기 위해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진산월의 지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로 대수로울 것 없어 보이는 간단한 행동만으로 포위망을 몇 배나 엷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중산도 그 점을 깨닫고 갑자기 진산월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것이 분명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신통한 사람이군. 얼핏 볼 때는 둔하고 멍청한 것 같은데 사실은 굉장히 예리한 두뇌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야.’
상원건은 신기한 생각이 들어 몇 차례나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의 행동은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리의 맹점(盲點)을 교묘하게 파고든 것으로, 나중에 고수들이 속은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도저히 진산월 일행을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진 후 일 것이다.
진산월의 지시대로 일행들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속한 행동으로 앞으로 질주해 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들을 뒤쫓던 인물들 중 아직까지 남아있던 몇몇 고수들의 행동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상원건은 재빠른 신형으로 몸을 날리면서도 주위의 동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머지 않아 그는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고수들의 수가 아홉 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홉 명이라면 물론 적지 않은 수였지만, 감당할 수 없을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주위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데다 진산월 일행이 전력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추적을 하는데는 몹시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과연, 일각(一刻)도 되지 않아 다시 두 명의 인물이 떨어져 나가고 이제는 단지 일곱 명만이 진산월 일행을 맹렬하게 뒤쫓아오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만큼 그들 일곱 명의 무공은 뛰어난 것이어서 그들의 추적을 뿌리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낙일방이 조금씩 쳐지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일행 중 가장 공력이 떨어진데다 응계성마저 업고 있어서 다른 누구보다도 일찍 지쳐버린 것이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 상원건은 낙일방이 온 몸을 땀으로 적신 채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쯧. 많이 힘든 모양이군.’
낙일방은 용케도 쉬었다 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계속 달려가고 있었으나 누가 보아도 그가 거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리(一里)만 더 가면 강변이 나온다. 그곳에서 추적을 따돌리자.”
상원건은 달려가면서도 진산월이 왜 하필 다른 곳도 아닌 강변으로 향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변이라면 퇴로가 강(江)에 막혀 추적을 벗어나기에는 오히려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일행을 인도하여 곧장 이수 강변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상원건이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그들을 추적하던 일곱 명의 고수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몸을 드러내놓고 그들을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 중 서너 명의 신법은 상원건이 보기에도 탁월하기 그지없어 강호의 일류고수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과연 일리쯤 가자 눈앞이 갑자기 탁 트이며 이수의 푸른 물살이 나타났다.
이곳은 용문석굴에서 이십 여리 떨어진 곳이라 운자추가 말한 운문세가의 구역에서 훨씬 벗어난 지역이었다.
하늘에는 어느 덧 점점이 별이 빛나고 훤한 달빛이 사방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늦은 가을의 강변은 나름대로 우아한 정취가 풍기는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그들은 쫓기는 신세인지라 그러한 정취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강변에 도착하자 진산월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사매와 내가 저들을 막을테니 정해는 일방을 도와서 계성을 지켜라.”
진산월은 다시 빠르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중산, 너는 이리 오너라.”
그는 동중산을 불러 나직하게 무어라고 소근거렸다.
이어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동중산의 손에 쥐어 주었다.
동중산은 신중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떤 고수들이 우리 뒤를 쫓아왔는지 한 번 알아보자꾸나.”
진산월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자신들의 주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고수들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어느 새 그들은 반원형으로 포위된 듯한 형세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로 일곱 명의 고수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오남이녀(五男二女)였다.
같은 일행이 아닌 듯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 보며 약간은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눈치들이었다.
가장 우측의 인물은 체구가 우람하고 등 뒤에 커다란 방천화극(方天火戟)을 맨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전신에 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얼굴도 붉어서 성격이 더할 나위없이 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상원건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 홍의인이 성격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화령천관(火靈天관) 적동(狄銅)임을 알아보았다.
적동은 멀리 장성(長城) 너머의 소흥안령(小興安嶺) 일대에서 거의 지옥의 염라대왕처럼 무서운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오늘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 옆의 인물은 반대로 비쩍 마르고 뺨이 홀쭉한 청의인이었다.
청의인의 나이는 이십 대로도 보였고, 삼십 대로도 보였다.
강퍅한 얼굴에 두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날카로워서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청의인의 우측 허리춤에는 어른의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 같은 가느다란 장검이 매어져 있었다.
그 장검을 보자 상원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좌수(左手)에 협봉검(狹鋒劍)… 그렇다면 저 자가 강북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쾌검 (快劍)의 달인(達人)이라는 전광검객(電光劍客) 도욱(陶煜)이겠구나.’
전광검객 도욱은 별호 그대로 번갯불같이 빠르고 무서운 검법의 소유자로, 요즘 들어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름난 검객이었다.
도욱의 옆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리따운 홍의 미소부가 요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홍의 미소부의 자태는 교태스럽기 그지없었고,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사내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유혹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굴곡이 완연한 육감적인 몸매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홍의 미소부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인들을 둘러보고 있다가 상원건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야릇한 눈웃음을 쳤다.
그것을 보자 상원건의 입가에는 쓴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홍의 미소부가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녀가 도욱이나 적동같은 무서운 인물들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홍의 미소부 바로 옆에는 두 눈에 푸르스름한 인광(燐光)을 번뜩이는 마의 노인(麻衣老人)이 서 있었다.
마의 노인은 음욕(淫慾)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연신 홍의 미소부의 잘룩한 허리와 팽팽한 둔부, 그리고 풍만한 가슴을 훔쳐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미색에 마음이 단단히 동한 모양이었다.
상원건은 그 역겹고 추악한 모습에 마의 노인을 더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재빨리 그 옆의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섯 번째 사나이는 눈부신 백의를 걸친 준수한 미남자였다.
그는 짙은 검미에 우뚝한 콧날, 형형한 눈빛을 지니고 있어서 여인이라면 좀처럼 시선을 떼기 어려운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이따끔 살짝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이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을 짙게 풍기고 있었다.
백의 미남자는 가끔 홍의 미소부를 힐끗거리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자신의 준수한 모습을로 그녀를 유혹하려는 것 같았다.
홍의 미소부도 짙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그에게 야릇한 미소를 보내고 있어 그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의 노인은 자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묘한 웃음을 주고받자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하며 거친 콧소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질투와 탐욕에 가득 찬 듯한 그 모습은 추악하고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백의 미남자 옆에는 먹물처럼 짙은 흑의를 걸친 삼십 대 후반의 흑삼문사(黑衫文士)가 서 있었다.
흑삼문사는 이목구비가 깔끔하고 턱 밑으로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무척 청수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오른 손에는 검은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그 부채를 가볍게 흔들고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천하를 떠도는 낙척문사(落拓文士)같았다.
하나 그를 본 상원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흑수사(黑秀士) 모용건(慕容乾)까지 나타나다니… 오늘 일은 아무래도 흉함이 많겠구나.’
상원건은 그 흑삼문사가 강호무림에서도 손속이 잔인하고 수단이 악랄하기로 이름난 흑수사 모용건임을 알고 있었다.
과거 십 여년 전에 우연히 그는 모용건이 단신으로 하삭칠응(河朔七鷹)을 모두 쓰러뜨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보여준 모용건의 수법은 참으로 악랄하면서도 무자비한 것이었다.
게다가 모용건은 심기가 깊고 음흉하기로 유명하여 혁련삼보다도 오히려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상원건이 보기에 오늘 이곳에 모인 일곱 명의 고수들 중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모용건임이 분명했다.
마지막 일곱 번째의 인물은 이제 갓 십 칠팔세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소녀는 짙은 녹의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있어서 더욱 어리고 깜찍해 보였다.
하나 양 손이나 등뒤에 별다른 병장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신법만이 조금 뛰어날 뿐 별다른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녹의 소녀는 흑백(黑白)이 분명한 커다란 눈망울을 떼구르르 굴리며 진산월 일행을 한 사람씩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낙일방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 동안 찾고 있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소녀의 모습과도 같았다.
상원건은 그들 일곱 사람의 면면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 중 녹의 소녀를 제외한 여섯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아직 정체를 모르는 홍의 미소부와 마의노인, 백의 미남자를 제외하고라도 그의 실력으로는 적동 만을 상대할 수 있을 뿐 전광검객 도욱이나 모용건은 승산이 별로 없는 고수들이었다.
‘겨우 머리를 써서 고수들을 따돌렸다 했더니 끝까지 따라온 인물들이 이런 무서운 자들 이라니… 종남파도 지독히 운(運)이 없구나.’
그는 진심으로 종남파와 진산월을 위해서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표정으로 일곱 사람을 둘러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들이 우리를 따라 오신 것은 본파에 무슨 특별한 용건이라도 있기 때문입니까?”
일곱 명의 고수들은 진산월의 담담한 태도에 조금은 뜻밖인 듯 눈을 빛내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 중 모용건이 부채를 부치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귀하가 바로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이시오?”
진산월은 별빛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바로 종남파를 맡고 있는 진산월입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
모용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반쯤 걸렸다.
“나는 삭동(朔東)에 사는 모용(慕容)이라 하오. 진 장문인을 보게 되어 반갑소.”
모용건은 슬쩍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하나 그때 홍의 미소부가 짤랑짤랑한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아주 평범한 문인(文人)같군요. 그러다 자칫 진 장문인께서 모용대협이 천하에 이름 높은 흑수사임을 몰라보고 실수라도 할까 두렵군요.”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용건에게로 향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이미 모용건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흠칫 놀라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그만큼 흑수사 모용건의 명성은 강호무림에 널리 퍼져있었다.
모용건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조부인(爪婦人)은 갈수록 더 젊어지는 것 같구료. 누가 조부인을 보고 사십이 훨씬 넘은 혈선자(血仙子)라는 짐작이나 할 수 있겠소?”
홍의 미소부의 길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모용건의 말은 얼핏 듣기에는 그녀의 미모를 칭찬하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은근히 그녀를 비하(卑下)하는 빛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나이 문제는 그녀가 평소에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으로, 모용건이 그녀의 나이를 공개리에 밝힌 것은 그녀를 격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하나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나이 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정체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들이었다.
상원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나도 눈이 멀었군. 피처럼 붉은 홍의(紅衣)에 요염한 모습을 보고도 그녀가 혈선자 조채홍(爪彩紅)임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그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자책했으나, 사실 강호에 홍의를 입고 다니는 여인이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옷차림과 용모만을 보고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혈선자 조채홍은 얼핏 보기에는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보였으나,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명성을 자자하게 날리던 무림의 여마두(女魔頭)였다.
그녀는 남자 관계가 문란하고 마음이 사갈(蛇蝎)같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워낙 무공이 높고 행적이 신비해서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를 감히 제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채홍은 모용건에게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그의 말이 신경 쓰였는지 백의 미남자를 힐끔 거리고 있었다.
하나 백의 미남자는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살짝 고개까지 숙여 보이고 있었다.
조채홍의 분기로 가득 찼던 얼굴이 언제 그랬느냐 싶게 풀어지며 다시 화사하고 요염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그녀는 피처럼 붉은 입술을 혀로 살짝 축이며 은근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모용대협의 말씀이 조금 지나치긴 하지만 오늘은 다른 용건이 있으니 그냥 마음 속으로만 접어 두겠어요. 그보다 이제 대충 올 사람들이 모두 온 것 같은데 다른 자들이 눈치를 채고 달려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는게 어떻겠어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장내의 공기가 아연 긴장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고수가 아닌 자가 없어서 그들은 내심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곱 명이라는 숫자도 적은 게 아닌데 그녀의 말대로 다른 고수들이라도 몰려든다면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게 될 것이 뻔했다.
종남파의 인물들은 그들대로 상대방이 하나같이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일류고수들임을 알게 되자 절로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모용건은 한 차례 중인들을 쓸어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조부인의 말씀이 옳소. 하지만 물건은 하나이고 노리는 사람은 많으니 어찌 하면 좋겠소?”
조채홍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용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걸 보니 좋은 생각이 있나 보죠?”
“허헛. 조부인의 눈은 속일 수가 없겠구료. 확실히 나에게는 그런대로 쓸만한 생각이 하나 있소.”
“그게 무엇인가요?”
“통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는거요.”
조채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상적인 방법이라뇨?”
“강호(江湖)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 말이오.”
조채홍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그게 무엇이죠?”
모용건은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물건부터 입수한 다음 주인을 가리는 것이오.”
그제서야 조채홍은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모용대협의 말은 우리가 우선 합심하여 물건을 빼앗은 다음 다시 우리끼리 물건의 임자를 가리자는 말이로군요.”
모용건은 그녀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며 말하자 내심 욕설이 치밀어 올랐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조부인의 표현은 조금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런 뜻이오. 조부인도 이런 일에는 익숙할 것 아니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말 속에는 은근한 가시가 담겨 있었다. 조채홍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 나야 익숙한 정도지만 모용대협에게는 생업(生業)과도 같은 것이겠죠? 아무튼 난 찬성이에요.”
그녀가 웃을 때마다 그녀의 볼록하게 솟은 가슴 부위가 미묘하게 파동을 쳤다. 마의 노인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흔들리는 가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고목나무를 쥐가 갉아먹는 듯한 음성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노부도 찬성이다.”
그의 음성은 얼굴만큼이나 추악하고 듣기 거북하여 많은 사람들이 눈쌀을 찌푸렸다. 하나 누구도 그에게 무어라고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외모야 어찌 되었건, 이곳까지 따라온 신법만 보아도 마의 노인이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용건의 시선이 적동을 향했다. 적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소.”
모용건은 다시 도욱을 바라보았다. 도욱은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만큼 희미하게 고개를 까닥거릴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용건의 시선이 이번에는 준수한 백의 미남자에게로 향했다. 백의 미남자는 얼굴에 훈풍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불초는 여러 고인(高人)들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의 음성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질 정도로 청량하고 낭랑한 것이었다. 조채홍은 그의 음성을 듣자 그가 더욱 마음에 드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요염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모용건은 다시 한 차례 주위를 둘러 보고는 활짝 웃었다.
“자. 이제 모두의 뜻이 맞은 것 같군.”
한데 바로 그때였다.
“흥. 왜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는 거죠?”
돌연 이제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녹의 소녀가 불쑥 소리치며 앞으로 성큼 나서는 것이 아닌가? 모용건의 눈쌀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그도 물론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나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 보이고 무공도 별로 대단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녀에게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중인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자신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불쑥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년이…’
아마 다른 장소였다면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살수(殺手)를 쓰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눈이 있는지라 그는 짐짓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허헛. 내가 깜박 귀여운 아가씨도 있다는 것을 잊었군. 아가씨는 다른 의견이라도 있는가? 있으면 말해보게.”
녹의 소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거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본 아가씨에게는 물론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요. 하지만 내가 왜 그걸 당신에게 말해야 하죠?”
모용건의 얼굴이 떫은 감을 씹은 듯 약간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는 설마 이 어리고 맹랑한 아가씨가 남들 앞에서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기 때문에 일시지간 난감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했는지 조채홍이 킥킥거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호… 이봐, 어린 동생. 그는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이야. 너무 그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걸.”
녹의 소녀는 그녀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누가 당신의 어린 동생이라는거죠? 분명히 말하지만 난 당신같이 늙고 음탕한 언니를 둔 적이 없어요.”
이번에는 조채홍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녀는 기껏 선심을 쓴다고 말한 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 올 줄은 정녕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늙고 음탕하다니… 그것은 그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두 가지 말이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변하며 무서운 눈으로 녹의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때 백의 미남자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녹의 소녀를 향해 덤벼들고 말았을 것이다.
“하하… 과연 듣던 대로군. 그 좌충우돌하는 성격은 정말 소문과 똑같군 그래.”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백의 미남자에게로 쏠렸다. 백의 미남자는 녹의 소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녹의 소녀도 백의 미남자를 쏘아보다가 갑자기 표독스런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 뻔뻔한 얼굴로 잘도 지껄이는군요. 나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우리 사이의 일은 잠시 후에 해결할테니 단단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에요.”
백의 미남자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대하고 있겠소.”
녹의 소녀는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귀여운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며 발을 세차게 굴렀다.
쿵!
그러자 백사장 일대가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리며 바닥에 한뼘이나 되는 발자국이 파이는 것이 아닌가? 이 경인(驚人)할 광경에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땅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무림의 고수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 지금처럼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 한 자 가까이 되는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절정(絶頂)의 내공(內功)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녹의 소녀는 아무리 많이 보아도 열일곱도 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이 놀라운 내공을 지니고 있으니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당돌하고 무공이 고강한 아가씨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녀는 백의 미남자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똑같이 떠올랐다.
“백의 미남자는 녹의 소녀의 놀라운 공력을 보고도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훤히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모용건은 내심 녹의 소녀의 정체를 알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한편 그녀를 향해 친근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력이 상당하군. 아가씨 같은 나이에 그런 공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소.”
녹의 소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모르는 게 어디 그 뿐이겠어요?”
모용건은 머쓱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사람인 이상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리는 없겠지. 그건 그렇고, 아가씨의 그 생각이란 것을 알면 안되겠소?”
모용건이 평소의 성격 답지 않게 최대한 자제를 하고 있는 것은 녹의 소녀의 신분에 대해 내심 짐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누구보다도 심기가 뛰어난 모용건은 백의 미남자와 녹의 소녀의 대화를 듣고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용건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자 녹의 소녀도 더 이상은 거절하지 않고 도톰한 입술을 열기 시작했다.
“본 아가씨는 이번 일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모용건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오?”
녹의 소녀는 턱으로 진산월 일행을 가리켰다.
“당신들은 모두 하나같이 강호무림에서 이름이 난 고수들인데 물건 하나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을 핍박한다면 강호인들의 비웃음을 면키 어려울 거에요.”
그때 조채홍이 뾰쪽하게 소리쳤다.
“그 물건이 무언지나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조채홍은 비록 녹의 소녀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마음 속의 앙금이 가라앉지 않아 속으로 분을 삭히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재빨리 끼어든 것이다. 하나 그녀의 말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녹의 소녀는 힐끗 그녀를 쳐다보더니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던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입 밖으로 나오는대로 지껄이지 말아요.”
“뭐라고?”
조채홍의 눈썹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두 눈에서 독기에 가득찬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야차(夜叉)처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으나, 녹의 소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그 물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본 아가씨에요. 심지어는 그게 무언지도 모르고 무작정 훔친 저 두더지같은 작자 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단 말이에요.”
이번에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동중산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자신을 두더지에 비유하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중산의 지금 기분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종남파에 의지하여 위기를 탈출해 보려고 계획했던 일이 잘 진행되나 싶었는데, 진산월이 엉뚱하게도 퇴로가 막힌 강변으로 일행을 인도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일곱 명의 고수들에게 갇히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고수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당대 무림에서도 내노라하는 무서운 실력자들이어서 이들의 손을 피해 도망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다. 기분 같아서는 진산월을 붙잡고 왜 하필이면 이런 곳으로 왔느냐고 따지고라도 싶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장문인인 사람에게 차마 그럴 수 없어 속으로 터져오르는 불안감과 울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새파랗게 어린 소녀에게 두더지 같다는 비아냥을 듣게 되자 소리라도 버럭 내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하나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 너무도 의외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일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는지라 처음에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 이내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녹의 소녀를 보고 있던 백의 미남자가 돌연 오른 손을 내밀어 모용건의 목덜미를 그대로 움켜쥐었던 것이다. 그 속도는 너무도 빠르고 가공스러웠는지라 모용건이 무언가 이상한 기척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의 목덜미는 이미 백의 미남자의 손에 그대로 제압 당해 버린 뒤였다.